“남자는 너그러워야 해. 달랠 건 달래고 사과할 건 사과하고 걸핏하면 헤어지고 그러면 못 써.”여한영은 유치하기 짝이 없는 육씨 가문 도련님을 달래보려고 시도했지만 상대는 듣는척하지 않고 되물었다.“주리가 본부장님 메시지에 답장을 안 해서 절 찾아온 거예요?”여한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대충 그 뜻이긴 했다.커플 사이에 문제가 생겼을 때 한 사람만 설득하면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었고 한 사람만 찾아내면 다른 한 사람도 찾기 쉬웠다.“어젯밤 동영상은 저희 두 사람이 확실하니 인정하는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이미 다했으니 이제 제가 필요하면 다시 연락해 주세요. 다른 건 제 알 바가 아니에요.”“육경서...”“다른 일이 없으면 나가볼게요.”여한영은 문을 열고 나가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는 육경서의 뒷모습에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잠깐만. 아직 내 말 안 끝났어. 네 계정 회사에서 몰수했어. 불만이 있으면 강유리한테 말해.”육경서가 아무리 제 마음대로라고 해도 강유리한테는 함부로 하지 못했다.그 말에 육경서는 잠깐 생각하더니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그러시든가요.”여한영은 화가 잔뜩 난 얼굴로 툴툴거렸다.“어린놈의 자식들. 내가 이놈들때문에 화병 걸려 제명에 못 죽어.”물병을 들어 병째로 물을 꿀꺽꿀꺽 마시고 난 여한영은 그제야 구석에 조용히 앉아 턱을 괸 채 생각에 빠져있는 강덕훈을 발견하고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아직 안 갔어?”이 나라에서 제일 전문가답다는 감독이 이렇게 한가하게 연예인의 가십거리를 귀담아듣고 있어도 된단 말인가?“갑자기 떠오른 생각인데 혹시 주리가 공식 입장을 발표하기 싫어 육경서를 차버린 거 아닐까요?강덕훈은 진지한 얼굴로 추측했다. 안 그래도 신주리와 연락이 닿지 않아 망연자실하고 있을 때 갑작스러운 강덕훈의 추측에 여한영은 저도 모르게 빠져들면서 말했다.“설마 그러겠어? 어제 영상을 봐서는...”신주리의 표정이며 옷을 찢는 모습을 봐서는 육경서에
신주리 부모님은 신주리의 일을 적극적으로 응원했고 딸의 영화, 드라마, 광고모델까지 꼼꼼히 챙겨보고는 주변의 재벌가 사모님들에게 추천하곤 했다. 신주리를 거론할 때마다 부모님들은 딸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미나는 올해 멜로 드라마로 두각을 보인 신인이고 인맥도 부족하고 연기도 딸리지만 팬들은 그 누구보다 극성이어서 스스로 육경서의 최고 파트너, 신주리의 라이벌로 컨셉을 잡아 연예계에서 꽤 인기몰이하고 있었다. 더욱이 알게 모르게 신주리의 배역과 광고모델을 가로챘고 이번 기회에는 아예 그녀의 명품 광고 모델 자리도 꿰차고는 대외로는 육경서의 소개로 합류했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열애 기사가 터진 뒤 미나는 자연스럽게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삼각연애인 척 노이즈마케팅까지 했다. 하여튼 하는 짓이 역겹기 그지없었다. “미나요?”신주리가 의혹에 찬 표정으로 묻더니 전에 육경서의 작품에서 그와 파트너를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자 한영숙은 분개하며 말했다.“너 혹시 모르는 거 아니야? 육경서 빼고 또 다른 철천지원수 말이야.”신주리는 자기가 연예계에서 꽤 인기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디서 또 한 명의 적수가 나타났단 말인가? 그리고 미나와 적수 할 정도로 신주리는 한가하지 않았다. 한영숙은 신주리의 표정을 보더니 미나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 같아 현재 상황과 미나의 여러 가지 악행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러자 신주리는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정말요? 이런 일도 있었어요? 그리고 제 스케줄도 가로챘어요?”신주리와 육경서의 스케줄은 유강 엔터에서 최고라 할 수 있었고 게다가 로열 엔터의 장경선도 가끔 두 사람과 함께 작업하며 그들에게 많은 인맥을 소개해 줬다. 하여 신주리가 거절하면 했지 절대 누구에게 빼앗긴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어디서 이런 철면피가 나타나 이따위 마케팅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네가 작품하고 스케줄 할 때 상대는 머리를 싸매고 네 라이벌 컨셉으로 몸값을 올리려고 애쓰고 있어.”한영숙은 불쾌한 듯 말하더니 이내 신주
릴리가 “왜?”하고 묻자 신주리가 말했다.“내가 우울해하는 것 같아서 네가 와서 친구 하라는 거야.”그 말을 듣고 릴리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잠깐만 기다려. 바로 갈게.”신주리는 알았다고 하고는 인터넷에 접속해 프로필 정보를 확인했다. 미나, 데뷔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고 작품도 많지 않았다. 인기작이 육경서와 함께 찍은 그 한 부였다. 이런 삼류가 신주리와 라이벌 구도를 펼친다고? 살짝 흥미가 생겼다...저녁 6시가 되자 흰색 페라리가 신씨 가문 별장에 들어섰고 차를 주차하자마자 릴리는 신하균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신하균: [저녁에 같이 밥 먹을까?]릴리: [저녁에 약속 있어요.]신하균은 바쁘지 않은지 이내 답장했다. [오늘 토요일이야. 스케줄 없다며?]저번에 결혼 이야기를 꺼내 이유 모르게 차에서 쫓겨난 뒤로부터 릴리는 줄곧 뜨뜻미지근한 태도였고 신하균은 이번에도 자기와 만나기 싫어 만들어낸 핑계라고 생각했다.대화 창에‘입력 중...’이라고 뜨는 것을 보면서 잠깐 생각하더니 이내 덧붙였다.신하균: [나한테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우리 잠깐 만나.]릴리는 이 문자를 보더니 타자를 잠깐 멈추고 무슨 오해가 있는지 생각했다. 아, 전에 확실히 기분이 안 좋은 일이 있었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니 신하균은 워낙 직진남이고 생각하는 방식도 간단명료했다. 하여 릴리는 이 일을 재빨리 잊어버리고 말았다. 요즘 비록 많이 바빴지만 매일 강표 사진을 찍어서 신하균에게 발송했기에 오해가 풀린 줄로 알았다.릴리는 이 메시지를 보고 저 멀리 있는 별장 대문을 보더니 갑자기 겁이 덜컥 났다. 처음 남자 친구 집으로 부모님 만나러 왔는데 당사자에게 말도 없이 혼자 달려왔다는 사실을 눈치채고는 릴리는 자기 이마를 ‘탁’ 치면서 정신을 놓아버린 자기 자신이 한스러웠다. 다시 자동차 엔진을 틀고 소리 없이 도망가 신하균과 함께 오려고 생각했지만 상상은 항상 아름다운 것이었다.차 엔진을 틀자마자 한영숙이 문을 열고 나오며 반갑게 맞아줬다.“릴리
계단을 내려오면서 신주리는 오빠한테 메시지를 발송했다.신주리: [언제 와? 좀 있다 릴리가 집에 오기로 했어. 올 때 엄마, 아빠한테 드릴 선물 준비해서 와. 왜냐고 하면 내 친구 릴리는 예의 바른 아이이니까.]신하균은 이 메시지를 보면서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오늘 저녁? 릴리가 오늘 저녁 약속 있다 했는데?’바로 이때 또 한 통의 메시지가 도착했다.릴리: [다음에 얘기해요. 오늘 저녁 하균 씨 부모님이 집으로 식사 초대했어요. 몇 시에 돌아와요?]신하균의 찌푸려졌던 눈살이 저도 모르게 펴지면서 입꼬리를 끌어올리더니 기분이 제법 좋아져 릴리의 ‘돌아와요’ 도 눈치채지 못했다.신하균: [지금 데리러 갈게.]그러자 릴리가 이내 답장을 보냈다.[내가 갈게요. 여기서 가까워요.]신씨 가문 별장은 월계만과 그의 직장 사이에 있는데 왜 가깝다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신하균이 거절할 틈도 없이 릴리가 바로 또 문자를 보냈다.[출발했어요. 기다려요.]...릴리가 너무 일찍 도착해 신하균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집에서 오는 거 아니었어?”릴리는 대충 얼버무리며 말했다.“밖에 있었어요.”신하균은 더 묻지 않고 준비한 선물을 릴리의 차에 실으니 그녀가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집에 자주 안 가요? 아니면 부모님과 사이가 안 좋아요?”자기 집에 가면서 선물을 들고 가는 건 또 의외였다. 신하균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처음 우리 집에 가는데 선물 준비해야잖아. 내가 준비했으니 누구 선물인지만 기억하고 있어.”신하균을 바라보는 릴리의 눈빛이 반짝이면서 살짝 놀란 표정으로 표현 방식이 서툴러서 그렇지 그래도 나름 세심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신하균이 선물을 가리키며 설명하는 동안에 릴리가 아무 대꾸도 없자 고개를 들어 보니 그녀가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신하균은 잠깐 멈칫하더니 물었다.“왜 그래?”“아니에요. 갑자기 하균 씨가 아주 멋있어 보여서요. 사실 나도 선물을 준비했거든요.”남자의 눈빛이
신하균의 눈빛이 살짝 흔들리더니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훑어보면서 바로 대답하지 않고 신중하게 반문했다.“내가 화날만한 무슨 일이라도 했어?”그러자 릴리는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팍을 쿡쿡 찌르며 귀찮은 듯 말했다.“반문하지 말고 Yes or No로만 대답해요. 대답하기 싫으면 관두고 그냥 냉전하죠 뭐.”그러자 신하균은 뭔가를 눈치챘는지 릴리의 손을 잡더니 웃으며 말했다.“알았어. 화 안 낼게.”릴리는 그 말에 오만하게 고개를 잔뜩 쳐들며 말했다.“당연히 그래야죠. 빨리 가요. 출발.”“잠깐만.”신하균은 꼼짝하지 않고 자기 가슴팍에 놓인 그녀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차를 짚고 서서는 그녀를 품으로 가뒀다. 릴리는 큰 눈을 깜빡이며 그를 향해 물었다. “왜요?”“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용서해 줬으니 나한테 감사의 뜻을 표시해야 하는 거 아니야?”릴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말했다.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내가 언제 조건을 제시했어요? 그리고 내가 용서해달라고 말한 적 있어요?”신하균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긴 그렇기도 해.”“맞죠? 남자가 왜 이렇게 옴니암니 따져요. 그러면 여자 친구가...”마지막 말을 하기도 전에 따뜻한 입술이 입을 막아버리자 릴리의 눈동자가 갑자기 확 커지면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신하...”신하균은 이내 입술을 떼고 이마를 그녀의 이마에 맞대니 코끝이 닿아버렸고 입술과 입술이 닿을락 말락 하면서 두 사람이 내뿜는 열기가 서로의 얼굴을 간지럽혔다.“감사의 뜻을 나는 전했어. 이번에는 자기 차례야.”신하균의 마법과도 목소리는 싸늘했지만 흡입하는 힘이 있어 릴리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고개를 쳐들어 신하균을 바라보는 릴리의 눈빛은 물결이 찰랑이었고 눈꼬리가 살짝 상기되었다.“반드시 해야 해요?”“며칠 동안 날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해야 하지 않겠어?”남자의 목소리가 살짝 잠겨있었고 억울한 듯 말했다.릴리는 이런 남자의 표정에 마음이 동해 두 팔로 그
가는 길에 신하균은 기분이 무척이나 좋아 보였고 이유도 모른 채 용서해준 것에 대해 아예 신경 쓰지 않았다. 릴리의 성격대로라면 신하균을 엄청나게 화나게 할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리고 남자로서 여자와 옴니암니 따지지 않기로 했다. 지나치게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일이라면 릴리와 화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신하균은 그녀를 과소평가했다. 별장에 들어서자마자 한영숙은 열성스레 릴리를 반기며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방금 왜 도망갔어? 가족끼리 선물이 뭔 대수라고 다시 돌아가기까지 해?”엄마의 말에 신하균은 흠칫하더니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무슨 뜻이야? 방금 왔다 갔어?”“하하, 선물이 중요하죠. 당연히 가지러 가야죠.”릴리는 제 발이 저려 감히 신하균의 눈빛을 마주하지 못하자 듣고 있던 신주리가 한마디 끼어들었다.“당연하죠. 릴리가 일찍부터 선물을 준비했는데 빈손으로 안 오려고 하죠.”한영숙은 고개를 돌리더니 신주리를 나무라며 말했다.“가족끼리 무슨 선물이야.”릴리는 그제야 이 사람들이 자기가 선물 가지러 돌아간 줄로 생각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그래. 아까 이 핑계를 댔더라면 좋았을 텐데.’뒤통수로 꽂히는 싸늘한 시선에 릴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릴리가 트렁크에서 선물을 꺼내는 것을 본 신하균은 이건 그녀가 일찍부터 준비한 것임을 알아차렸다.만일 잊어버리고 다시 집에 갔다가 신하균을 마중하러 왔다면 절대 그 시간에 도착할 수 없다.그렇다면 릴리는 신씨네 별장에서 바로 온 게 분명하다.만일 신씨 가문에서 바로 신하균을 마중하러 갔고 선물도 챙겼는데 잔뜩 미안한 표정이라면 한 가지 일밖에 없었다.그건 바로 신하균을 잊어버리고 혼자 갔던 것이다.여기까지 생각한 신하균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씰룩였다. 처음 남자 친구 집으로 부모님 뵈러 가면서 남자 친구한테 연락하는 것을 잊어버렸다는 건 릴리라서 가능한 일이었다.이놈의 계집애가...“문 앞에 서 있지 말고 빨리 들어와 앉아.”한영숙의 말이 난처해서 어쩔 바를 모르
신명진이 모임에 참석하지 않고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 싫어서가 아니라 마누라가 못 가게 하기 때문이다. 예비 며느리가 주량이 괜찮고 같은 상업계에 있는 사람으로서 오늘 간만에 기분 좋게 한잔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맞죠? 나도 우리 릴리가 술을 못 마신다고 들었는데 네 아빠가 기어코 아니라고 하시잖아. 술병 치워버려.”한명숙이 덩달아 말하자 신명진은 작은 소리로 불만을 토로했다.“오래전부터 소장해 온 거야. 나도 아까워서 안 마셨는데...”그 말에 릴리의 눈이 반짝이면서 시선을 술병에 고정했지만 귓가에서 또다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이틀 전에 위 아프다고 하지 않았어? 마시면 안 돼.”릴리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어떻게 알아요?”사실 릴리는 그날 위가 아픈 것이 아니라 생리 때문에 배가 아팠다.그리고 더욱 의아했던 것은 양율이 1초 전까지만 해도 무뚝뚝한 얼굴로 사업 보고하더니 30분도 안 돼 릴리에게 위약을 건네주었다. ‘누가 생리통에 위약을 먹는단 말인가?’상남자라 이해는 되지만 고맙다고 아무 약이나 먹을 수는 없었다.릴리는 그때 예쁜 여비서를 한 명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지금 와서 보니 그 상남자는 양율이 아니라 곁에 앉은 이분이었다.“쳇, 하균 씨가 우리 회사에 간첩을 심어놨어요?”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릴리의 목소리를 들어서는 그녀의 기분을 알 수 없었지만 신하균은 당당하게 말했다.“간첩이라고 하긴 그렇고 저번에 자기가 사고 난 뒤로부터 양 비서와 연락을 자주 할 뿐이야.”릴리는 눈을 깜빡이며 신하균 쪽으로 몸을 기울이자 그는 떨떠름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눈치 빠르게 귀를 갖다 댔다. 그러자 릴리의 느릿느릿한 말소리가 들려왔다.“그런데 위가 아팠던 것이 아니라 복통이었어요.”의문스러운 눈빛으로 힐끗 쳐다보자 릴리는 웃으며 더욱 가까이 다가가서는 귓속말로 뭐라 했는지 신하균은 이내 자세를 바로잡고 정색해 앉아 있었다. 표정은 여전히 냉랭했고 엄숙했지만 빨갛게 달아오른 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신명진은 예비 며느리를 서재에 불러 계약 건과 김씨 가문에 대해 얘기를 나누려 했지만 한영숙이 한사코 반대했다.“오늘 주말인데 왜 애를 불러 일 얘기하려고 해요?”신명진은 “오늘...”하더니 뒷말을 잊지 못했다. 오늘 식사 자리에 초대한 목적이 계약 건을 위해서가 아닌가?“잔업하겠으면 혼자 하세요. 우리 릴리는 주말에 일 안 해요.”한영숙은 릴리의 팔짱을 끼고 소파 쪽으로 다가가면서 계속해 말했다.“맞다. 오전에 주리한테 가을 신상이 도착했다고 하던데 올라가서 마음에 드는 게 있는지 한번 봐봐.”예비 며느리와 더 오래 얘기를 나누고 싶지만 딸의 시큰둥해하는 모습이 마음에 걸려 한영숙은 릴리를 신주리에게 양보하기로 했다.“마음에 드는 브랜드가 있으면 내일 나와 함께 가서 골라 봐. 이 예비 시어머니가 사줄게.” 한영숙은 딸을 대하듯이 스스럼없이 말했다. 릴리도 미리 신씨 가문으로 온 목적을 염두에 두고 있었고 기회를 보고 있던 참에 얼른 대답했다.“네. 어머님, 전 그럼 주리 언니한테 가볼게요.”신주리는 존재감이 상당히 강한 사람으로 릴리와 신하균의 교제를 한사코 반대했지만 오늘 저녁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문으로 들어설 때 릴리를 위해 한마디 하고는 저녁 내내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저녁 식사가 끝나자마자 소리 없이 자기 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위층으로 올라가 노크하자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문을 열고 들어가니 신주리가 컴퓨터 앞에 앉아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다가가 대화 내용을 보더니 릴리는 그제야 신주리가 속상해서 의기소침한 것이 아니라 다른 중대한 일 때문이란 걸 알았다. 릴리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이 년 더 참아주면 안 돼. 반격할 거야?”“너 왜 올라왔어? 아빠, 엄마가 널 잡고 신상 조사 더 안 하신대?”신주리가 메시지를 보내는 한편 고개를 돌려 힐끗 쳐다보면서 묻자 릴리가 말했다.“주리 언니가 걱정돼서 먼저 올라왔어.”신주리는 마지막 메시지를 매니저에게 발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