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을게.”그러더니 심수정은 잠깐 머뭇거리다 이내 웃으며 말했다.“어떻듯 간에 주경이 살려줘서 고마워. 심씨 가문의 명의로 약속하는데 주경과 우신이 다시는 널 귀찮게 하지 않을 거야. 고씨 가문은... 마음대로 해.”릴리는 눈썹을 찡긋하더니 심수정의 ‘마음대로’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어 “네”하고 대답했다.“아 맞다. 우신이가 널 귀찮게 하지 않을 거라는 건 내가 장담 못하겠지만 적어도 너에게 악의는 없을 거야.”고우신은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었고 아직 오누이 관계를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릴리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쳐다만 보았다.땅거미가 지더니 불빛이 화려하게 빛났다. 서울의 야경은 일품이었다. 식당에서 나와 릴리는 가슴이 답답하다며 산책하자고 제의했고 두 사람은 강변을 따라 천천히 걸으면서 간혹 불어오는 밤바람이 몰고 오는 서늘함을 만끽했다.고요한 밤거리에 하이힐이 바닥을 밟는 또각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발 괜찮아?”따뜻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들어보니 신하균의 시선이 발에 꽂혀있었다.“괜찮아요.”말이 끝나기 바쁘게 릴리는 살짝 패인 웅덩이를 밟으면서 몸이 기우뚱하자 이내 힘 있는 팔이 뻗어와 그녀의 허리를 감싸면서 품으로 당겼다. 고개를 드니 칠흑같이 어두운 눈동자와 마주쳤고 따뜻한 가로등 불빛이 그의 몸을 비추면서 뚜렷한 오관이 흐릿하게 보였다. 릴리는 당황하며 이내 몸을 바로 하면서 말했다.“발은 괜찮은데 길이 별로 안 좋네요.”“저쪽에서 쉬다 갈까?”“그래요.”강변이라 그런지 인적이 드물었고 네온사인이 수면위로 무더기로 쏟아지면서 번화하면서도 고요한 느낌이 들었으며 바람에 따라 수면위로 오색찬란한 물결이 찰랑이었다.릴리가 의자에 앉아 가방을 내려놓자 옆에 서 있던 거대한 그림자가 그녀의 앞에 쭈그리고 앉더니 한 손으로 그녀의 발목을 잡고 한 손으로는 하이힐을 벗겼다.그러자 릴리는 깜짝 놀라면서 순간 발을 빼려고 했다.“뭐…”“가만히 있어.”남자는 낮은 소리
겨우 우세를 차지한 릴리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쑥스러움을 뒤로 한 채 연이어 물었다.“맞나요? 언제부터 내 매력에 반한 거죠?”그래도 신하균은 얇은 입술을 꾹 닫은 채 아무 말이 없었다.릴리는 히히 웃으며 손바닥으로 의자를 짚고는 두 발을 흔들거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전에 주리 언니가 하균 씨가 부모님의 결혼 독촉 때문에 대충 목표를 나로 정했다는데 지금 봐서는 하균 씨를 잘 모르고 그랬던 것 같아요. 우리 신 팀장님이 시크하면서도 얼마나 끼가 많다고요. 일찍부터 나한테 반했을지도 모르잖아요.”“어. 맞아.”신하균이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그녀의 말에 찬성했다. 그러자 릴리는 신대륙이라도 발견한 듯 갑자기 고개를 돌리면서 물었다.“맞다고요? 진짜예요? 그게 언제예요?”신하균의 눈이 반짝 빛나더니 쑥스러운지 다른 말로 화제를 바꿨다. “이젠 가야 하지 않겠어? 강철이 아직 산책시키지 않았잖아?”“맞아요. 빨리 가요. 우리 강철 씨가 이 공주님이 무지 보고 싶을 거예요.”말하면서 릴리를 허리를 숙여 다시 하이힐을 신으려고 하자 신하균이 신발을 집어 들고는 한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잡고 다른 팔로 무릎 뒤를 감싸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왜요?”릴리는 깜짝 놀라면서 무의식적으로 그의 목을 감싸안더니 잔뜩 긴장한 눈빛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릴 때 귓가에서 그녀가 좋아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빨리 가자.”아무리 직진남이라도 해도 연애를 하면 변하는 법인가 보다.신하균의 고리타분한 성격으로는 밖에서나 혹은 사람 앞에서 절대 친근한 행동을 하거나 달콤한 말을 하지 않았는데 오늘만 해도 여러 번 놀라게 했다.‘뭐가 어때서?’이렇게 대범한 남자 앞에서 쑥스러울 것이 뭐가 있단 말인가?릴리는 소리 없이 목에 감은 두 팔에 힘을 줬다. 품에 안겨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힘 있는 심장박동 소리를 들으며 릴리는 감격해 말했다.“기분이 좋아요. 하균 씨가 날 일찍부터 좋아했다면 내가 짝사랑했던 시간이 짧아지잖아요. 그러면 조금이나마 공평해요.”
돌아가는 길에 차 안은 조용했고 릴리는 핸드폰을 뒤적이다 어느 순간 갑자기 침묵을 깼다.“하균 씨, 주리 언니 새 영화가 개봉되었어요.”“알아. 10개 상영관을 통째로 대절했어.”릴리는 눈을 깜빡이며 신하균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아 설명을 기다렸지만 이 말만 하고는 아무 반응이 없어 조용히 바라봤다.릴리의 의아한 눈초리를 감지했는지 신하균은 대충 보충 설명을 했다.“새 영화가 방영될 때마다 하던 습관이야. 주리에게 보내는 응원이라고 할 수 있지.”이렇게 보니 친오누이답기도 했다. 신하균을 만나면서 릴리는 그의 사고방식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고 어떤 말은 단도직입적으로 해야지 스스로 이해하기를 기대하는 건 금물이었다.하여 아주 모호하게 귀띔해줬다.“통째로 대절해서 혼자 보러 가요?”“아니. 안 봐. 내가 좋아하는 타입도 아니고 시간도 없어.”‘잘났어. 그래. 돈 낭비가 자랑이야?’그러고는 두 사람 모두 말이 없었다. 월계만에 도착해 차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신하균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릴리에게 물었다.“주말에 시간이 있는데 보고 싶으면 같이 가줄게.”“보고 싶어요. 그런데 다른 사람과 약속했으니 바쁜 사람은 일 보세요.”릴리의 말에 신하균은 억울하고 속상하고 또한 유감스러웠다. 연애에 있어 신하균은 경험도 부족했고 둔감하기까지 했다. 밤이 되자 릴리는 강표를 데리고 산책하러 나갔고 신하균은 전화를 받고 한참동안 공적인 일을 얘기하더니 그쪽에 자문을 구했다.“어떤 여자의 완곡한 데이트 신청을 거절했는데 보상할 방법이 없을까?”수화기 건너편에 있던 김찬욱이 그 말을 듣더니 정신을 번쩍 차리면서 말했다.“네? 설마 강씨 가문 둘째 아가씨 데이트 신청을 거절한 건 아니죠? 역시 신 팀장님이시네요. 둘째 아가씨의 호감을 산 것도 대단한데 무슨 배짱으로 거절했어요?”신하균은 김찬욱의 비아냥거리는 말투가 거슬렸는지 차갑게 말했다.“뾰족한 수가 없으면 끊어.”그러자 김찬욱이 서둘러 말했다.“잠깐만요. 당연히
“여보세요?”“아빠, 요즘 바쁘세요? 아빠 예쁜 딸 안 보고 싶어요?”릴리의 끈적하고 애교 듬뿍한 목소리에 바론 공작은 바로 침묵해버리고 엄숙한 표정으로 계단으로 올라가려던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더니 잠깐 머뭇거리다가 고개 돌려 또 다른 예쁜 딸한테 진지하게 물었다.“네 동생이 요즘 혹시 사고 쳤어?”“아니요.”한창 육시준에게 내일 말 타러 가자고 칭얼거리던 중에 바론 공작의 목소리가 들려와 강유리는 고개를 돌리면서 물었다.“왜요? 왜 그러세요?”바론 공작은 그제야 덜컥 내려앉은 가슴을 다소 진정했지만 그래도 완전히 안심하지 못하고 무거운 목소리로 쌀쌀하게 물었다.“요즘 바빠. 무슨 일로 전화했어?”그러자 릴리는 속상한 척하며 말했다.“이렇게 확연하게 편애하실 건가요? 방금 언니한테 말씀하시는 말투와 저한테 하시는 말투를 비교해 보세요.”“내가 어떤 말투로 너한테 말해야 하는지 너 모르겠어? 쓸데없이 애교 부릴 때에는 꼭 무슨 꿍꿍이가 있어.”릴리는 눈썹을 움찔거리면서 어이없는 듯 말했다.“아버지 요즘 변하셨어요. 어떻게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어요?”“이게 언어의 예술이야. 강단 명료하잖아. 난 괜찮다고 생각해.”그러고 나서 이내 릴리의 목적이 불순하다고 생각해 다그쳐 말했다.“할 말이 있으면 빨리 해. 이 시간이 지나면 안 들어줄 거야.”이 계집애는 겉보기에는 애교가 많은 것 같지만 제 언니처럼 뼛속까지 차가운 사람이다.공식적인 일이 없으면 절대 먼저 전화하지 않을 것이다. 릴리는 아버지의 가슴 속에 남은 자신의 이미지에 대해 아주 송구스럽게 생각했다.“정말 아무 일도 없어요. 아버지가 보고 싶었을 뿐이에요.”바론 공작은 잠깐 침묵하더니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고 나서 말했다.“내일 사람을 보내 네가 저지른 사단을 정리할 테니 짐 싸서 돌아와. 전용기가 점심쯤에 도착할 거야.”갑자기 들려온 엄숙한 목소리에 릴리는 그제야 바론 공작의 말뜻을 알아차렸다.바론 공작은 릴리가 속상한 일이 있어 전화를 걸어 보고 싶다는
릴리는 평소 냉정하고 욱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지만 신하균은 침범해서는 안 되는 영역이다.하지만 안하무인인 바론 공작은 제 마음대로 신하균을 추측하고 평가했다.“아버지, 저를 무시하고 의심하는 건 괜찮은데 왜 무턱대고 다른 사람을 추측하고 평가해요? 제 신분이 그렇게 특별해요?”“넌 내 딸이야...”“제가 지금 아버지의 딸일 뿐만 아니라 고씨 그룹의 주주이기도 하고 신씨 가문과 공적으로도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코딱지만 한 고성 그룹이 뭐가 그렇게 대단해? 내 한마디 말이면 내일 망하게 할 수도 있어.”따뜻한 문안 전화가 왜 이렇게 변했는지 릴리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깊게 한숨을 들이쉬고 냉정하게 반박하려고 할 때 목소리가 바뀌었다.“릴리야? 급하게 상의해야 할 일이 아니면... 지금 우리가 좀 바빠. 곧 태어날 아기 이름을 지어야 하거든. 늦게 다시 전화할게.”말이 끝나자마자 전화가 끊겼다. 자매 사이라 그런지 말이 없어도 통하는 구석이 있었다. 강유리와 바론 공작이 분쟁이 있을 때는 항상 릴리가 해결사의 역할을 하지만 간혹 두 사람의 역할이 바뀔 때는 강유리가 해결사를 자처하기도 했다.하지만 강유리가 원만한 성격이 아닌지라 해결이 안 되면 강압적으로 두 사람의 대화를 끊어버려 서로 진정하게 냉 처리하기도 했다.공기가 유난히 조용하다. 바론 공작은 강유리가 빼앗아 간 핸드폰을 보고 다시 눈앞의 친딸을 보더니 갈색 눈동자가 어두워지면서 폭풍우가 닥치기 전의 고요함과 같았다.강유리는 심장이 쫄깃해지면서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겉으로는 담담한 척 말했다.“오후에 아기 이름 짓기로 했잖아요. 시간 됐어요. 가정 회의 시작하죠.”“너 오늘 저녁에 데이지와 약속이 있다고 했어.”바론 공작이 냉랭하게 쳐다보며 말했다.그러자 강유리는 시치미를 떼며 말했따.“제가요? 언제요? 아. 잊어버렸어요. 제가 임신한 것 아닐까요? 임신하면 건망증이 생긴다고 하던데.”바론 공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강유리를 노려보았다.하도 발 연기라 눈이
강유리는 해맑게 웃으며 다가가 바론 공작의 팔을 끌어안으며 말했다.“네 맞는 것 같아요. 아빠가 요즘 저한테 너무 잘해주셔서 대디 걸이 된 거 같아요. 버릇이고 뭐고 제가 아빠를 너무 좋아해서가 아니겠어요? 우리 다 같이 아기 이름 지어요.”바론 공작은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방금 억지로 불러일으켰던 불만과 화가 가뭇없이 사라졌다. 도도하고 냉정하기만 하던 딸이 이런 애교를 부린다면 누가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머릿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체면은 지켜야 하기에 바론 공작의 표정은 부자연스러웠고 목소리도 힘이 잔뜩 실려 있었다.“여기에 있으면 캐번디시 가족이야. 반드시 내 말을 따라야 해.”그러자 강유리가 뜬금없이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당연하죠. 아버지는 우리 아기 외할아버지이신데 당연히 아빠 말을 따라야죠.”짐짓 엄숙한 척하고 있던 바론 공작의 표정이 제어가 안 되면서 이내 헤벌쭉하니 웃었다. 웃다가 갑자기 방금 강유리가 했던 말이 생각나 되물었다.“그런데 대디 걸은 무슨 뜻이야?”“아빠 사랑을 듬뿍 받는 공주같이 사는 여자를 말해요. 무엇을 하든 아빠에게 물어서 결정해야 하고 심지어 부부 문제도 아빠에게 물어야 하고 자기 주견이 없이 완전히 아빠 말만 듣는 거죠.”그 말에 바론 공작의 표정이 차츰 따뜻해지더니 입꼬리를 올린 채 말했다.“뭐든 적당해야지. 자기 주견도 있어야 하고 남편의 뜻도 따라야 해.”“네. 명심할게요.”강유리는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답했다.곁에 앉아 있던 육시준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다른 한편 릴리는 끊긴 휴대폰을 던져버리고 소파에서 공놀이하는 강표를 노려보면서 말했다.“아니, 정신이 이상한 것 아니야?”입에 공을 물고 있던 강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릴리를 바라보며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아버지면 다야? 그 사람에 대해 아냐고? 어떻게 그렇게 어두운 생각으로 평가하고 추측할 수 있지? 단순히 좋아하는 건 무엇이고 단순하지 않는 건 또 뭔데? 고씨 가문에
릴리는 ‘지금’이라는 단어를 사용했고 강미영은 이 말투가 너무나도 익숙했다.자신의 무능함 때문에 열을 받지만 그 화를 풀지 못해 미칠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인 것으로 봐서는 바론 공작과 다툰 게 분명했다. 하지만 릴리는 성격이 온화한 아이라 아버지와 다투는 경우가 드물었고 간혹 다투고 나서 분해서 엄마한테 울면서 부녀 관계를 단절하겠다고 말한 적도 있지만 그건 투정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젠 생부도 찾았고 캐번디시 가문의 형세도 안정되었기에 릴리는 전혀 겁낼 것이 없었다. 침대 머리에 기대어있던 강미영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의혹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이번에는 무엇 때문이야?”릴리는 잠깐 침묵하더니 진지하게 말했다.“절 존중하지 않아요.”강미영은 다시 미끄러져 누우면서 말했다.“그런 게 하루 이틀은 아니잖아.”그러자 릴리는 아무 말도 못 했다.“부녀 관계를 단절할 게 뭐가 있어? 처음부터 네 아빠가 아니잖아. 이모부와의 관계는 확실히 존재하는 것이니까 그건 끊지 못해.”릴리는 화가 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냉정하게 사실을 설명하고 나서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고 할 때 릴리는 갑자기 화제를 바꿔 물었다.“엄마, 그럼 우리 가문의 이 복잡한 관계는 언제 오픈할 거예요?”강미영은 무슨 뜻인지 몰라 되물었다.“무슨 복잡한 관계?”“그 사람은 이모부인데 모든 사람은 양부인 줄 알잖아요. 그리고 엄마와 그 사람의 관계도요. 부부가 아닌데 부부인 줄 알잖아요.”릴리의 말에 사심이 담기긴 했지만 더욱 큰 것은 의문이었다.릴리의 말을 듣고 난 강미영은 웃으며 말했다.“양부 맞잖아. 이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어. 우리 관계는 내가 국내에서 안 돌아가면 Y국 쪽의 그 자식들도 언젠가는 눈치챌 거야.”“눈치만 채서 되는 거예요?”릴리는 이해되지 않아 물었다.“아니면 어떻게 해? 공지라도 해서 우리 가문의 일을 까발려야 해?”강미영은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그러자 릴리는 아무 말이 없었다.엄마 말을 들으니 그것도 맞는 말이긴 했다
요즘 한가한 탓인지 들어보니 재밌는 일인 것 같기도 해 강미영은 거절하지도, 승낙하지도 않고 화제를 바꿔 물었다.“오늘 단지 이것 때문에 전화했어?”릴리는 그제야 전화를 한 목적이 생각났다.“아니에요. 일이 있긴 한데 고씨 가문에 관한 거예요...”릴리는 오늘 심수정을 만난 일로부터 그녀가 했던 말까지 곧이곧대로 전달하고 나서 물었다.“엄마, 이 일을 엄마와 아버지가 지시했어요?”여기까지 말하고 나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열을 올리며 다투던 아버지가 그렇게 못마땅하지도 않았다. 비록 가끔 말을 아니꼽게 해 상처를 주는 경우가 있긴 해도 마음속으로는 릴리를 사랑했다. 어릴 때부터 시작해 릴리를 울린 사람은 바론 공작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전형적인 내 딸이기에 나는 괴롭힐 수 있어도 다른 사람은 건들기만 해도 된통 혼나는 경우이다. “해외 것은 네 아버지가 지시한 게 맞는 거 같아. 이게 다 고씨 가문 탓 아니겠어? 지금 캐번디시 가문이 한창 상승세를 달리고 있을 때 미친 것 아니면 어떻게 너한테 그럴 수 있어?”그러고 나서 한참 침묵하더니 이어서 말했다.“그런데 국내 쪽은 내가 개입 안 했어.”강미영은 당일 고정남을 된통 혼내고 나서 수집한 증거로 협박한 뒤 그걸 신하균에게 그대로 넘겨줬다. 어떻게 해결하고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신하균의 역할이다. 여기까지 듣고 난 릴리는 눈을 반짝이며 강미영의 처리방식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이건 강미영이 신하균을 신임한다는 뜻이 아닐까?“엄마, 한 가지만 더 물어볼게요.”한참 머뭇거리다가 릴리는 끝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강미영이 만일 아직 릴리의 속내를 알아맞히지 못했다면 이 나이 되도록 헛살지 않았을까?전화하자마자 아버지 때문에 잔뜩 골 난 원인이 바로 의견이 맞지 않아 다툰 것이 아닌가?두 사람이 모순이 생겨 다투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고 릴리가 진짜로 신경 쓰는 일이 아니면 거의 이런 적이 없었다...릴리가 물어보기도 전에 강미영이 대답했다.“그 녀석 괜찮았어. 나는 의견이
신주리는 고민하다가 말했다.“난 최근에 일이 많지 않아 괜찮지만 다음 달에 곧 새로운 촬영을 시작할 거야.”육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다음 달에 돌아가면 촬영 일정을 맞출 수 있어요.”육경서는 그들이 두어 마디 말로 일정안배를 끝내가 다급하게 입장을 밝혔다.“나도 있어! 주리가 돌아가지 않으면 나도 안 돌아갈래!”신주리는 흘겨보며 물었다.“넌 바쁘지 않아?”“마침 이 영화가 촬영을 마감할 예정이야. 기타 활동은 중요한 건 뒤로 미루고 중요하지 않은 건 매니저더러 거절하게 하면 돼.”육경서는 미처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말했다.강유리는 반대하지 않고 귀띔했다.“강덕준 감독이 널 죽일 수도 있어.”육경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괜찮아. 한 달뿐이잖아. 설마 날 따라 여기까지 오겠어?”강덕준이 그를 죽일지는 둘째치고, 어쨌든 지금 바론 공작은 그를 죽여버리고 싶었다.그는 그저 예의상 딸아이의 친구들을 초대해서 놀게 했을 뿐인데 결국 딸아이가 다음 달 귀국하는 일정을 안배하게 되다니?병원에서 육시준이 비아냥거리던 말을 그는 실행할 계획이었다. 단계마다 다른 이유로 딸을 만류하고 싶었고 시름 놓고 이곳에서 편히 안태하게 하고 싶었다.그러나 사위는...만약 자기 일을 다 처리했다면 남아있어도 괜찮았다. 부양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그러나 지금 덤으로 두 사람이 더 생겼고 또 이 두 사람은 시간 맞춰 돌아가야 했다. 돌아가지 않으면 재촉당할 것이 뻔하다.“두 분이 바쁘면 굳이 남지 않아도 돼. 유리는 지금 손님 접대하는 게 불편하거든.”그는 정색해서 다시 말했다.그러자 여러 가지 눈빛이 삽시에 바론 공작을 향했다......신주리와 강유리는 제작팀과 반나절만 휴가를 냈기 때문에 오후에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오전 시간만으로 두 친구가 얘기하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해 강유리는 직접 감독에게 전화해 하루 연장했다.점심시간.신주리는 육시준의 자리에 앉아 강유리의 옆에 누워 계속 절친끼리 이야기를 했다.강유리는 이번에 단도직입적
저쪽에서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상대방도 자신만큼 놀란 모습을 상상하며 육경서는 다음 이야기가 기대되었다.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송미연은 놀랐지만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유리 찾으러 갔어? 프로그램을 녹화한다며 왜 그들을 찾으러 갔어? 거기는 시간이 아직 이르지 않아? 이맘때면 유리는 잠을 잘 자지도 못했을 건데...”송미연은 육경서가 철이 없이 강유리가 잘 쉬지 못하게 방해한다고 한바탕 야단을 쳤다.그러나 그녀의 말은 한 가지 중요한 소식을 알렸다.“진작 알고 있었어요?”“물론이지!”송미연은 자랑스럽게 말했다.“며느리가 임신했는데 이렇게 큰 소식을 어떻게 바로 나에게 알려주지 않을 수 있겠어? 경고하는데 너무 떠들지 마. 네 형수님을 화나게 하면 안 돼! 그냥 녹화만 잘하면 되는 거 아니야? 주리가 널 용서했어? 왜 돌아다니며 다른 사람의 가십거리를 알아내려고 해! 이번에 돌아와서 주리의 용서를 받지 못한다면 넌 아예 돌아오지도 마!”...화제가 자신을 욕하는 방향으로 변해버리자 육경서의 열정은 순식간에 식어버렸고 목소리도 누그러들어 어쩔 수 없이 말했다.“알았어요. 알았어요. 제가 원한 줄 아세요? 이것도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잖아요...”“뭐가 어쩔 수 없다는 거야? 모두 네가 자초한 거잖아! 쌤통이야!”“...”“섬에서의 상황이 어떤지 모르니 넌 주리를 잘 돌봐야 해. 난 실시간으로 라이브 방송을 살펴보고 있을 테니 넌 주리 괴롭히지 마.”송미연이 또 당부했다.육경서는 머뭇거리다가 정색해서 대답했다.“알았어요. 걱정하지 마세요.”송미연은 또 몇 마디 더 당부한 후 전화를 끊었다.육경서는 어두워진 휴대폰 화면을 보며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잘됐어. 아빠 엄마가 다 주리를 좋아하니 나중에 언제든지 주리는 억울함 당하는 일이 없을 거야. 적어도 내가 있는 한 억울함 당하지 않을 거야...”...점심은 빌라의 셰프가 만든 영양식이다. 맛은 좋지만 오래 먹으면 질릴 수 있어 강유리는 이 음식을 보며 저도 모르게 한숨
그러나 앉은 자리가 아직 따뜻해지기도 전에 육경서는 흥분된 듯 바로 일어나 소리쳤다. “뭐? 임신했다고?” 바론 공작은 짜증 섞인 눈길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목소리 좀 낮춰. 뭘 그렇게 놀라!” 그는 지금까지는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사실 소식을 들었을 땐 당황하고 흥분했던 걸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육경서는 입을 막으며 어색하게 다시 앉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반짝이며 감출 수 없는 흥분이 드러났다. ‘나 이제 삼촌 된다! 삼촌 된다!’ “의사가 말하기를 첫 3개월은 불안정하니까 특히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도 이 소식을 공개하지 말고 태아가 안정될 때까지 기다리자고 하셨다.” 바론 공작은 드물게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 그는 그 말을 끝내며 신주리를 한번 훑어봤다. “그래서 나는 유리를 위해 사람들을 안배해 가까이서 돌보게 한 거다.” 그의 시선을 느낀 신주리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공작을 한 번 보고 다시 눈을 내리깔며 강유리의 아랫배를 바라봤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마치 한번 만져보고 싶은 듯했지만 참았다. 그녀의 눈은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고 육경서와 같이 흥분과 기쁨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녀는 강유리의 아랫배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서 지금 이 안에 작은 생명이 자라고 있는 거야?” “맞아.” 강유리가 그녀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신주리는 표정은 진지했지만 눈 속에 담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만져봐도 돼?” 육경서도 순간 정신을 차리며 손을 내밀었다. “나도...” “안 돼!” “안 돼!” 두 명의 목소리가 동시에 차갑게 외쳤다. 그들의 무리한 요구를 바로 거절했다. 강유리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두 남자를 쳐다봤다. 그녀는 그들에게 체면을 차리지 않았고 대신 신주리에게만 속삭였다. “조금 있다가 방에 들어가면 만져도 돼.” 육시준과 바론 공작은 동시에 얼어붙었다. ‘우리가 안 들릴 거라고 생각하나?’ 육경서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강유리를
육경서는 얼굴에 기쁨이 가득한 채 입을 열려던 순간 정원에서 누군가가 다가왔다. 그 사람은 유창한 한국어로 두 사람에게 따뜻하게 인사했다. “이쪽이 둘째 도련님이랑 신주리 씨 맞으시죠? 강유리 아가씨께서 이미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 부탁드려요.” 신주리가 부드럽고 예의 있게 대답했다. 육경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 사람, 왜 이렇게 때맞춰 나타나는 거지? 다른 때는 왜 안 오고, 바로 이때 오냐고!’ “잠깐만요. 저희 형수 말고 일단 먼저 빌라를 둘러보고 싶어요!” 그가 급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안내하는 집사를 붙잡았다. 집사는 그의 눈을 한 번 쳐다본 뒤 다소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멈췄다. 신주리는 미소를 띤 채 침착하게 말했다. “미안해요. 낯을 가려서 그래요.” 육경서는 혼란스러웠다. ‘이게 무슨 말이야? 내가 낯을 가린다고? 왜 그렇게 갑자기...’ 집사는 이해한 듯 웃으며 공작님도 그들의 방문을 매우 기쁘게 생각해 오늘 특별히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전했다. 육경서는 그 한마디도 제대로 듣지 않았고 눈앞의 신주리를 원망스러운 눈길로 바라봤다. ‘주리는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이야? 너무 쉽게 대답해서 다시 부정하려는 건가?’ 그들이 정원으로 들어섰고 이곳은 여전히 고요하고 우아한 분위기였다. 뜨거운 태양 아래 한쪽에서 차와 다과가 준비된 작은 테이블이 보였다. 강유리는 햇볕을 가린 파라솔 아래에 앉아 있었고 그 앞에는 육시준이 전화를 끊고 있었다. 바론 공작이 불만을 표하며 입을 열었다. “하루 종일 그 전화기 들고 있으면 안 돼! 그렇게 바빠? 전자기기 방사선이 얼마나 해로운지 알지? 의사 선생님이 말했잖아. 첫 세 달은 불안정하다고, 푹 쉬어야 한다고!” 육시준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지난달에 돌아갔으면 이미 처리했을 일인데요.” 바론 공작은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스쳤다. “일이라는 게 끝날 수 있나? 돌아가면 내 딸과 시간을 제대로 보낼 수 있을까 몰라!” 육시준이 말하려던 순간 강유
감독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강하게 반박하지도 못하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규정에 따르면 녹화 중에는 제작진 팀을 이탈하면 안 됩니다.” 역시나 신주리는 가볍게 되물었다. “녹화 시작할 때 그런 규정은 없었잖아요? 갑자기 추가된 건가요?” “그건 아니지만 지금 상황이...” “그럼 우리를 일부러 견제하려는 건가요? 그럼 그냥 프로그램 안 하면 되죠?” 감독은 말문이 막혔다. 사실 첫 번째 시즌에서 육경서가 사고를 당한 이후로 그는 이미 이 두 사람에게 꼼짝 못 하고 있었다. 조건을 협상하든 규칙을 정하든 이 둘이 하겠다고 하면 다행이고 안 하겠다고 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될 판이었다. 결국 이를 악물고 그는 포기했다. “알겠어요, 알겠어! 두 분 다 제가 졌습니다! 하지만 어디 가든 꼭 행선지를 알려주시고 제작진 팀에서 두 분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걱정 마세요. 너무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점심 먹고 바로 돌아올게요!” 신주리가 대범하게 말했다. ‘점심도 먹고 온다고?’ 하지만 그가 불만을 표현하기도 전에 두 사람은 이미 유유히 그의 앞을 지나쳐 나가버렸다. 호텔 문을 나서자마자 감독은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너머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강 대표님, 경서 씨랑 주리 씨가 지금 강 대표님을 만나러 갑니다! 그런데 프로그램 효과를 위해서 행선지에 대한 건 절대 발설하시면 안 됩니다!” 감독이 진지하게 말했다. 강유리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만약 제가 발설하면요?” 감독은 순간 당황했다. 그는 이런 대답을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이건 우리 회사의 프로그램 아니었나? 이렇게 마음대로 행동해도 되는 거야? 시청률이 안 오르면 강 대표님에게도 손해 아닌가?’ 감독은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어떻게든 이 대형 회사를 설득해야겠다고 결심했지만 강유리는 그의 말을 끊으며 다시 말했다. “농담이에요. 발설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마세요.” 감독은 긴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
비행기에 오를 때 각자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고 내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땐 이미 다음 날 새벽이었다. 제작진 팀은 미리 준비한 차를 타고 그들을 예약된 호텔로 보냈다. 해변가에 위치한 경치가 아름다운 5성급 호텔이었다. 모두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번에 제작진 팀 정말 큰돈 쓴 거네! 이게 진짜 여행 같아!” “그렇지. 갑작스러운 느낌도 있지만 일정은 꽤 합리적이네!” “응, 또 감사한 건 처음에 우리 주리랑 경서에게 그 사건이 터진 후로 대우가 점점 더 좋아졌다는 거야. 그들은 정말 목숨을 걸고 얻은 거라니까!” 모두가 웃으며 체크인 절차를 마쳤다. 그때 감독 팀에서 메시지가 왔다. “오늘 밤은 여기서 쉬고 내일은 섬으로 갑니다.” 모두들 당황했다. ‘그래서 목적지는 여기가 아닌가?’ “목적지는 반대편에 있는 작은 관광 섬입니다. 규모는 작지만 최근 몇 년 동안 관광업이 급성장했습니다. 얼마 전 이 섬의 소유자가 바뀌어서 다시 한번 큰 화제를 일으켰죠.” 감독이 그렇게 말하자 신주리는 점점 더 익숙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게 바론 공작이 유리에게 선물한 섬이죠?”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육경서는 감탄하며 물었다. “그럼 어떻게 우리 형수를 설득했어요?” 감독 팀은 미소를 지으며 답하지 않았다. 실시간 채팅창에서는 감탄이 이어졌다. [유리 언니가 이번 프로그램을 위해 진짜 대규모로 투자한 거네!] [하하하, 유리 언니가 투자한 건 아니야. 그냥 완전 부모님에게 의지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그 덕분에 도련님과 미래의 동서가 혜택을 보는 거고!” “나도 섬 주인 언니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번에 유리 언니 우정 출연할지 궁금하다!” 아침 식사 후 모두 방으로 돌아가 시차를 맞추기 위해 잠을 청했다. 카메라는 잠시 쉬어갔다. 신주리는 비행기에서 잠깐 눈을 붙였기에 이제는 전혀 졸리지 않았다. 그녀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호텔 방을 몰래 빠져나
심지어 원피스까지 캐리어 하나에 다 준비해 놨다. “안 믿을지 몰라도 내가 쇼핑 리스트까지 작성했어. 엄마한테도 참고를 부탁했거든! 원피스는 엄마가 골랐어. 안심해, 눈썰미는 진짜 좋아!” 말을 하면서 그는 정말로 쇼핑 리스트를 꺼내서 신주리에게 보여줬다. 신주리는 그 리스트를 보지 않아도 이미 믿고 있었다. 심지어 조금 놀랐다. “너 그럼 네 짐은 어쩌고? 얼마나 챙겨왔어?” “짐 하나야. 나중에 필요하면 제작진 팀에 부탁할 거야!” 육경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말했다. 신주리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너무 오랫동안 육경서를 바라보고 있었던 탓인지 휴대폰을 들여다보지 않은 채 그를 쳐다보던 신주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육경서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 “왜?” 신주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려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많아?” 육경서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많은 건 아니야. Y 국에 있는 우리 회사 지사에서 몇 가지 더 준비해 줬거든...” 그가 말을 하다 갑자기 멈칫했다. 불필요한 말을 했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신주리는 그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녀의 머릿속에 갑자기 대담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번 목적지는 네가 제작진 팀에 요청한 거 아니야?” “무슨 말이야? 내가 그런 사람인 줄 알아?” 육경서는 당황한 듯 대답했다. “네가 그런 사람 아닌가?” 육경서는 잠시 생각에 잠긴 후 고백했다. “맞아, 그런 사람일 수도 있어.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아니야! 사실 내가 쓴 목적지는 원래 해변이었어. 이런 건 결국 다 준비해야 할 것들이잖아.” 신주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이제는 아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서진태와 소지석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진태는 진지하게 소지석에게 도씨 가문의 그 양성 계획에 대해 물어보았다. 이 계획은 너무나도 비상식적이어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었다. 완전히 그들
[하하하, 이게 무슨 이상한 조합이야? 어쩐지 묘하게 어울리기도 하고 또 웃기기도 하네!] [처음부터 차 안에서 자리싸움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어색하지는 않았겠지.] [우리 지원 언니 한마디로 모든 흐름이 뒤집혔어!] [강미영은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우리 지석이를 일부러 피하는 거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소지석 팬들 너무 이기적이지 마! 누구든 미영 언니에게 다가갈 수 있고 미영 언니는 모두를 거절할 권리가 있어!] 좌석이 정리되고 비행기가 이륙을 준비하자 라이브 방송은 일시적으로 종료되었다. 이런 24시간 라이브 촬영 프로그램에서도 이렇게 잠깐 동안만은 각자가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강미영은 라이브 방송이 종료된 뒤 의아한 표정으로 한지원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왜 한지원이 굳이 자신과 함께 앉으려고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 누가 자신에게 같이 앉자고 했어도 마다하지는 않았겠지만... “미영 언니, 난 저 커플 팬이야.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 그러니까 제발 내 최애 커플 깨지지 않게 도와줘!” 한지원은 진지한 얼굴로 이유를 털어놓았다. 강미영은 살짝 멍해지더니 결국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어, 앞으로 네 최애 커플 잘 지켜주도록 할게.” 한지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밝게 웃었다. “정말 고마워! 덕분에 내 최애 커플이 마음 편히 연애할 수 있게 됐어!” 강미영은 눈가를 약간 찡그리며 물었다. “근데 언제부터 걔네 둘의 팬이 된 거야? 그리고 지금 걔네 둘 관계 꽤 안정적이던데 내가 굳이 뭐 하러 그걸 망치겠어?” 한지원은 고개를 저으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영 언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이런 카메라 밖에서의 달달한 순간들이지.” 강미영은 순간 뭔가를 깨달은 듯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혹시 영감이라도 떠오른 거야?” 한지원은 멍하니 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의 작은 호의 하나가 한 명의 유명 만화가를 탄생시킬 수도 있어!” 강
그는 단지 이런 행동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강미영에게 그를 좀 더 이해할 기회를 주고 소지석에게는 그가 혼자서만 밀어붙이지 않도록 눈에 띄게 하려 했다. 그러나 이 행동을 알아본 사람들도 있지만 일부 팬들은 그를 오해하거나 비판하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서 서진태는 너무 경계가 없지 않나요? 경쟁하고 싶다 해도 이렇게까지 급하게 해야 하나요? 왜 꼭 같이 앉아야만 하는 거죠?] [맞아요! 강미영 언니는 분명히 불편해 보였고 바로 피해서 조수석에 앉았잖아요!] [좋아한다고 해도 좀 경계를 두고 해야죠.] [근데 소지석 팬들 너무 이중잣대 아니에요? 오빠가 같이 앉고 싶으면 직설적으로 다가가도 ‘멋지다, 드디어 마음을 표현했다!’고 하는데 서진태가 다가가면 ‘경계가 없다’고 비판하잖아요?] [맞아요. 서진태는 사실 강미영 언니와 앉고 싶은 것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거죠.] 댓글창은 점점 떠들썩해졌다. 신주리와 육경서의 강미영에 대한 이해도는 완벽했다. 감정상에서 경쟁이 시작되면 그녀는 주저 없이 피할 것이다. 강미영은 감정을 물건처럼 경쟁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성격의 프로그램에서는 남성들끼리의 경쟁이나 여성들끼리의 경쟁이 감정을 더 순수하지 않게 만들 수 있고 로미오와 줄리엣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런 외적인 압박이 감정을 더 강화시키는 효과가 생기게 된다. 사실 그들이 정말 사랑하는 건 아닐 수도 있다. 단지 지는 걸 참지 못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와 고정남의 관계도 그랬다. 주위에서 반대할수록 더 진지하게 여겨졌던 그 감정이었지만 결국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엉망이 된 감정이었음을 깨달았다. “네가 졌으니까 내 선물 잊지 말고 사 와.” 신주리는 자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육경서는 그 결과를 보며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돌아서서 그녀에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이번엔 네가 이겼어.” 신주리는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이번? 그럼 다음에도 나랑 내기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