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여 오늘 만남은 사실 무의미해진 것이다...릴리는 앞에 놓인 물컵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리 밝고 총명한 릴리에 대해 심수정은 아주 만족했고 대신 고주경은 자업자득인 셈이다. 상대가 잘못을 승인하는 태도가 좋다고 해서 용서하는 것은 자신에 대해 공평하지 않다. 어릴 때부터 생활 환경이 비록 열악했지만 부모님은 절대 억울함을 당하게는 하지 않았기에 스스로 자신을 바보로 만들 필요가 없었다. 심수정은 릴리의 표정을 살피면서 뭔가 말하려다 주춤하더니 끝내는 입을 열었다.“너에게 상처를 준 건 내가 주경이 대신 사과할게. 네가 무슨 보상이 필요한지 말만 해. 심씨 가문에서 다 만족시켜 줄게.”그러자 릴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니에요. 제가 큰 피해를 본 건 없으니까요.”이미 복수를 했기에 보상받을 필요가 없었다.“며칠 뒤에 주경이 데리고 해외에 가서 바람 좀 쐬다 올까 해.”심수경이 무의식적으로 한 말인 것 같지만 릴리를 테스트해 보려는 뜻이 없지 않아 있었다.그러자 릴리는 잠깐 주춤하더니 이내 심수정의 뜻을 알아차렸다.‘내가 고주경을 죽이기라도 할까 봐?’심수정이 한사코 배상하겠다고 했지만 릴리가 거절했기에 용서는 못 해주더라도 죽이지는 말라는 뜻인 것 같았다. 그말에 릴리는 웃으며 말했다.“수정 이모, 제가 그렇게 무정하고 잔인한 사람이 아니에요. 누가 제 뺨을 때리면 저도 한대 갚아주면 끝이에요. 이후에 절 건드리지 않으면 저도 절대 안 건드려요.”심씨 가문에서 아직 외손녀를 포기하지 않는 한 고주경과 김씨 가문의 혼약은 단지 형식뿐이다. 결혼식을 올린다고 사람이 죽는 것도 아니고 그저 소문이 좋지 않을 뿐이다. 심씨 가문에서 고주경을 해외로 피신시켰다가 소문이 잠잠해지면 다시 돌아와 이혼하기만 한다면 별로 손해 보는 일도 아니었다.릴리는 이런 사실을 알고 있기에 고주경을 핍박해 죽음에 달하게 하려는 생각은 없었다.“그럼 시름 놨어. 그렇다면 너희 부모님 측에 번거롭겠지만 대신 설명해
“그럼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을게.”그러더니 심수정은 잠깐 머뭇거리다 이내 웃으며 말했다.“어떻듯 간에 주경이 살려줘서 고마워. 심씨 가문의 명의로 약속하는데 주경과 우신이 다시는 널 귀찮게 하지 않을 거야. 고씨 가문은... 마음대로 해.”릴리는 눈썹을 찡긋하더니 심수정의 ‘마음대로’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어 “네”하고 대답했다.“아 맞다. 우신이가 널 귀찮게 하지 않을 거라는 건 내가 장담 못하겠지만 적어도 너에게 악의는 없을 거야.”고우신은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었고 아직 오누이 관계를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릴리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쳐다만 보았다.땅거미가 지더니 불빛이 화려하게 빛났다. 서울의 야경은 일품이었다. 식당에서 나와 릴리는 가슴이 답답하다며 산책하자고 제의했고 두 사람은 강변을 따라 천천히 걸으면서 간혹 불어오는 밤바람이 몰고 오는 서늘함을 만끽했다.고요한 밤거리에 하이힐이 바닥을 밟는 또각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발 괜찮아?”따뜻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들어보니 신하균의 시선이 발에 꽂혀있었다.“괜찮아요.”말이 끝나기 바쁘게 릴리는 살짝 패인 웅덩이를 밟으면서 몸이 기우뚱하자 이내 힘 있는 팔이 뻗어와 그녀의 허리를 감싸면서 품으로 당겼다. 고개를 드니 칠흑같이 어두운 눈동자와 마주쳤고 따뜻한 가로등 불빛이 그의 몸을 비추면서 뚜렷한 오관이 흐릿하게 보였다. 릴리는 당황하며 이내 몸을 바로 하면서 말했다.“발은 괜찮은데 길이 별로 안 좋네요.”“저쪽에서 쉬다 갈까?”“그래요.”강변이라 그런지 인적이 드물었고 네온사인이 수면위로 무더기로 쏟아지면서 번화하면서도 고요한 느낌이 들었으며 바람에 따라 수면위로 오색찬란한 물결이 찰랑이었다.릴리가 의자에 앉아 가방을 내려놓자 옆에 서 있던 거대한 그림자가 그녀의 앞에 쭈그리고 앉더니 한 손으로 그녀의 발목을 잡고 한 손으로는 하이힐을 벗겼다.그러자 릴리는 깜짝 놀라면서 순간 발을 빼려고 했다.“뭐…”“가만히 있어.”남자는 낮은 소리
겨우 우세를 차지한 릴리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쑥스러움을 뒤로 한 채 연이어 물었다.“맞나요? 언제부터 내 매력에 반한 거죠?”그래도 신하균은 얇은 입술을 꾹 닫은 채 아무 말이 없었다.릴리는 히히 웃으며 손바닥으로 의자를 짚고는 두 발을 흔들거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전에 주리 언니가 하균 씨가 부모님의 결혼 독촉 때문에 대충 목표를 나로 정했다는데 지금 봐서는 하균 씨를 잘 모르고 그랬던 것 같아요. 우리 신 팀장님이 시크하면서도 얼마나 끼가 많다고요. 일찍부터 나한테 반했을지도 모르잖아요.”“어. 맞아.”신하균이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그녀의 말에 찬성했다. 그러자 릴리는 신대륙이라도 발견한 듯 갑자기 고개를 돌리면서 물었다.“맞다고요? 진짜예요? 그게 언제예요?”신하균의 눈이 반짝 빛나더니 쑥스러운지 다른 말로 화제를 바꿨다. “이젠 가야 하지 않겠어? 강철이 아직 산책시키지 않았잖아?”“맞아요. 빨리 가요. 우리 강철 씨가 이 공주님이 무지 보고 싶을 거예요.”말하면서 릴리를 허리를 숙여 다시 하이힐을 신으려고 하자 신하균이 신발을 집어 들고는 한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잡고 다른 팔로 무릎 뒤를 감싸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왜요?”릴리는 깜짝 놀라면서 무의식적으로 그의 목을 감싸안더니 잔뜩 긴장한 눈빛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릴 때 귓가에서 그녀가 좋아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빨리 가자.”아무리 직진남이라도 해도 연애를 하면 변하는 법인가 보다.신하균의 고리타분한 성격으로는 밖에서나 혹은 사람 앞에서 절대 친근한 행동을 하거나 달콤한 말을 하지 않았는데 오늘만 해도 여러 번 놀라게 했다.‘뭐가 어때서?’이렇게 대범한 남자 앞에서 쑥스러울 것이 뭐가 있단 말인가?릴리는 소리 없이 목에 감은 두 팔에 힘을 줬다. 품에 안겨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힘 있는 심장박동 소리를 들으며 릴리는 감격해 말했다.“기분이 좋아요. 하균 씨가 날 일찍부터 좋아했다면 내가 짝사랑했던 시간이 짧아지잖아요. 그러면 조금이나마 공평해요.”
돌아가는 길에 차 안은 조용했고 릴리는 핸드폰을 뒤적이다 어느 순간 갑자기 침묵을 깼다.“하균 씨, 주리 언니 새 영화가 개봉되었어요.”“알아. 10개 상영관을 통째로 대절했어.”릴리는 눈을 깜빡이며 신하균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아 설명을 기다렸지만 이 말만 하고는 아무 반응이 없어 조용히 바라봤다.릴리의 의아한 눈초리를 감지했는지 신하균은 대충 보충 설명을 했다.“새 영화가 방영될 때마다 하던 습관이야. 주리에게 보내는 응원이라고 할 수 있지.”이렇게 보니 친오누이답기도 했다. 신하균을 만나면서 릴리는 그의 사고방식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고 어떤 말은 단도직입적으로 해야지 스스로 이해하기를 기대하는 건 금물이었다.하여 아주 모호하게 귀띔해줬다.“통째로 대절해서 혼자 보러 가요?”“아니. 안 봐. 내가 좋아하는 타입도 아니고 시간도 없어.”‘잘났어. 그래. 돈 낭비가 자랑이야?’그러고는 두 사람 모두 말이 없었다. 월계만에 도착해 차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신하균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릴리에게 물었다.“주말에 시간이 있는데 보고 싶으면 같이 가줄게.”“보고 싶어요. 그런데 다른 사람과 약속했으니 바쁜 사람은 일 보세요.”릴리의 말에 신하균은 억울하고 속상하고 또한 유감스러웠다. 연애에 있어 신하균은 경험도 부족했고 둔감하기까지 했다. 밤이 되자 릴리는 강표를 데리고 산책하러 나갔고 신하균은 전화를 받고 한참동안 공적인 일을 얘기하더니 그쪽에 자문을 구했다.“어떤 여자의 완곡한 데이트 신청을 거절했는데 보상할 방법이 없을까?”수화기 건너편에 있던 김찬욱이 그 말을 듣더니 정신을 번쩍 차리면서 말했다.“네? 설마 강씨 가문 둘째 아가씨 데이트 신청을 거절한 건 아니죠? 역시 신 팀장님이시네요. 둘째 아가씨의 호감을 산 것도 대단한데 무슨 배짱으로 거절했어요?”신하균은 김찬욱의 비아냥거리는 말투가 거슬렸는지 차갑게 말했다.“뾰족한 수가 없으면 끊어.”그러자 김찬욱이 서둘러 말했다.“잠깐만요. 당연히
“여보세요?”“아빠, 요즘 바쁘세요? 아빠 예쁜 딸 안 보고 싶어요?”릴리의 끈적하고 애교 듬뿍한 목소리에 바론 공작은 바로 침묵해버리고 엄숙한 표정으로 계단으로 올라가려던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더니 잠깐 머뭇거리다가 고개 돌려 또 다른 예쁜 딸한테 진지하게 물었다.“네 동생이 요즘 혹시 사고 쳤어?”“아니요.”한창 육시준에게 내일 말 타러 가자고 칭얼거리던 중에 바론 공작의 목소리가 들려와 강유리는 고개를 돌리면서 물었다.“왜요? 왜 그러세요?”바론 공작은 그제야 덜컥 내려앉은 가슴을 다소 진정했지만 그래도 완전히 안심하지 못하고 무거운 목소리로 쌀쌀하게 물었다.“요즘 바빠. 무슨 일로 전화했어?”그러자 릴리는 속상한 척하며 말했다.“이렇게 확연하게 편애하실 건가요? 방금 언니한테 말씀하시는 말투와 저한테 하시는 말투를 비교해 보세요.”“내가 어떤 말투로 너한테 말해야 하는지 너 모르겠어? 쓸데없이 애교 부릴 때에는 꼭 무슨 꿍꿍이가 있어.”릴리는 눈썹을 움찔거리면서 어이없는 듯 말했다.“아버지 요즘 변하셨어요. 어떻게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어요?”“이게 언어의 예술이야. 강단 명료하잖아. 난 괜찮다고 생각해.”그러고 나서 이내 릴리의 목적이 불순하다고 생각해 다그쳐 말했다.“할 말이 있으면 빨리 해. 이 시간이 지나면 안 들어줄 거야.”이 계집애는 겉보기에는 애교가 많은 것 같지만 제 언니처럼 뼛속까지 차가운 사람이다.공식적인 일이 없으면 절대 먼저 전화하지 않을 것이다. 릴리는 아버지의 가슴 속에 남은 자신의 이미지에 대해 아주 송구스럽게 생각했다.“정말 아무 일도 없어요. 아버지가 보고 싶었을 뿐이에요.”바론 공작은 잠깐 침묵하더니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고 나서 말했다.“내일 사람을 보내 네가 저지른 사단을 정리할 테니 짐 싸서 돌아와. 전용기가 점심쯤에 도착할 거야.”갑자기 들려온 엄숙한 목소리에 릴리는 그제야 바론 공작의 말뜻을 알아차렸다.바론 공작은 릴리가 속상한 일이 있어 전화를 걸어 보고 싶다는
릴리는 평소 냉정하고 욱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지만 신하균은 침범해서는 안 되는 영역이다.하지만 안하무인인 바론 공작은 제 마음대로 신하균을 추측하고 평가했다.“아버지, 저를 무시하고 의심하는 건 괜찮은데 왜 무턱대고 다른 사람을 추측하고 평가해요? 제 신분이 그렇게 특별해요?”“넌 내 딸이야...”“제가 지금 아버지의 딸일 뿐만 아니라 고씨 그룹의 주주이기도 하고 신씨 가문과 공적으로도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코딱지만 한 고성 그룹이 뭐가 그렇게 대단해? 내 한마디 말이면 내일 망하게 할 수도 있어.”따뜻한 문안 전화가 왜 이렇게 변했는지 릴리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깊게 한숨을 들이쉬고 냉정하게 반박하려고 할 때 목소리가 바뀌었다.“릴리야? 급하게 상의해야 할 일이 아니면... 지금 우리가 좀 바빠. 곧 태어날 아기 이름을 지어야 하거든. 늦게 다시 전화할게.”말이 끝나자마자 전화가 끊겼다. 자매 사이라 그런지 말이 없어도 통하는 구석이 있었다. 강유리와 바론 공작이 분쟁이 있을 때는 항상 릴리가 해결사의 역할을 하지만 간혹 두 사람의 역할이 바뀔 때는 강유리가 해결사를 자처하기도 했다.하지만 강유리가 원만한 성격이 아닌지라 해결이 안 되면 강압적으로 두 사람의 대화를 끊어버려 서로 진정하게 냉 처리하기도 했다.공기가 유난히 조용하다. 바론 공작은 강유리가 빼앗아 간 핸드폰을 보고 다시 눈앞의 친딸을 보더니 갈색 눈동자가 어두워지면서 폭풍우가 닥치기 전의 고요함과 같았다.강유리는 심장이 쫄깃해지면서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겉으로는 담담한 척 말했다.“오후에 아기 이름 짓기로 했잖아요. 시간 됐어요. 가정 회의 시작하죠.”“너 오늘 저녁에 데이지와 약속이 있다고 했어.”바론 공작이 냉랭하게 쳐다보며 말했다.그러자 강유리는 시치미를 떼며 말했따.“제가요? 언제요? 아. 잊어버렸어요. 제가 임신한 것 아닐까요? 임신하면 건망증이 생긴다고 하던데.”바론 공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강유리를 노려보았다.하도 발 연기라 눈이
강유리는 해맑게 웃으며 다가가 바론 공작의 팔을 끌어안으며 말했다.“네 맞는 것 같아요. 아빠가 요즘 저한테 너무 잘해주셔서 대디 걸이 된 거 같아요. 버릇이고 뭐고 제가 아빠를 너무 좋아해서가 아니겠어요? 우리 다 같이 아기 이름 지어요.”바론 공작은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방금 억지로 불러일으켰던 불만과 화가 가뭇없이 사라졌다. 도도하고 냉정하기만 하던 딸이 이런 애교를 부린다면 누가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머릿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체면은 지켜야 하기에 바론 공작의 표정은 부자연스러웠고 목소리도 힘이 잔뜩 실려 있었다.“여기에 있으면 캐번디시 가족이야. 반드시 내 말을 따라야 해.”그러자 강유리가 뜬금없이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당연하죠. 아버지는 우리 아기 외할아버지이신데 당연히 아빠 말을 따라야죠.”짐짓 엄숙한 척하고 있던 바론 공작의 표정이 제어가 안 되면서 이내 헤벌쭉하니 웃었다. 웃다가 갑자기 방금 강유리가 했던 말이 생각나 되물었다.“그런데 대디 걸은 무슨 뜻이야?”“아빠 사랑을 듬뿍 받는 공주같이 사는 여자를 말해요. 무엇을 하든 아빠에게 물어서 결정해야 하고 심지어 부부 문제도 아빠에게 물어야 하고 자기 주견이 없이 완전히 아빠 말만 듣는 거죠.”그 말에 바론 공작의 표정이 차츰 따뜻해지더니 입꼬리를 올린 채 말했다.“뭐든 적당해야지. 자기 주견도 있어야 하고 남편의 뜻도 따라야 해.”“네. 명심할게요.”강유리는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답했다.곁에 앉아 있던 육시준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다른 한편 릴리는 끊긴 휴대폰을 던져버리고 소파에서 공놀이하는 강표를 노려보면서 말했다.“아니, 정신이 이상한 것 아니야?”입에 공을 물고 있던 강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릴리를 바라보며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아버지면 다야? 그 사람에 대해 아냐고? 어떻게 그렇게 어두운 생각으로 평가하고 추측할 수 있지? 단순히 좋아하는 건 무엇이고 단순하지 않는 건 또 뭔데? 고씨 가문에
릴리는 ‘지금’이라는 단어를 사용했고 강미영은 이 말투가 너무나도 익숙했다.자신의 무능함 때문에 열을 받지만 그 화를 풀지 못해 미칠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인 것으로 봐서는 바론 공작과 다툰 게 분명했다. 하지만 릴리는 성격이 온화한 아이라 아버지와 다투는 경우가 드물었고 간혹 다투고 나서 분해서 엄마한테 울면서 부녀 관계를 단절하겠다고 말한 적도 있지만 그건 투정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젠 생부도 찾았고 캐번디시 가문의 형세도 안정되었기에 릴리는 전혀 겁낼 것이 없었다. 침대 머리에 기대어있던 강미영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의혹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이번에는 무엇 때문이야?”릴리는 잠깐 침묵하더니 진지하게 말했다.“절 존중하지 않아요.”강미영은 다시 미끄러져 누우면서 말했다.“그런 게 하루 이틀은 아니잖아.”그러자 릴리는 아무 말도 못 했다.“부녀 관계를 단절할 게 뭐가 있어? 처음부터 네 아빠가 아니잖아. 이모부와의 관계는 확실히 존재하는 것이니까 그건 끊지 못해.”릴리는 화가 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냉정하게 사실을 설명하고 나서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고 할 때 릴리는 갑자기 화제를 바꿔 물었다.“엄마, 그럼 우리 가문의 이 복잡한 관계는 언제 오픈할 거예요?”강미영은 무슨 뜻인지 몰라 되물었다.“무슨 복잡한 관계?”“그 사람은 이모부인데 모든 사람은 양부인 줄 알잖아요. 그리고 엄마와 그 사람의 관계도요. 부부가 아닌데 부부인 줄 알잖아요.”릴리의 말에 사심이 담기긴 했지만 더욱 큰 것은 의문이었다.릴리의 말을 듣고 난 강미영은 웃으며 말했다.“양부 맞잖아. 이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어. 우리 관계는 내가 국내에서 안 돌아가면 Y국 쪽의 그 자식들도 언젠가는 눈치챌 거야.”“눈치만 채서 되는 거예요?”릴리는 이해되지 않아 물었다.“아니면 어떻게 해? 공지라도 해서 우리 가문의 일을 까발려야 해?”강미영은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그러자 릴리는 아무 말이 없었다.엄마 말을 들으니 그것도 맞는 말이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