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는 단지 김씨 가문을 이용해 목적을 달성하려는 생각뿐이었는데 신안 그룹에서 갑자기 계약서를 보내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하여 계획은 계획대로 추진하고 릴리가 말했듯이 이제 와서 신안 그룹을 선택하는 건 김씨 가문에 복수도 할 겸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고성은 지금 신안과 어깨를 나란히 한 파트너이고 신안에 의지해야 하는 약체가 아니다.양율의 얼굴은 탄복한다는 표정을 짓고 있지만 속으로는 릴리의 복수심과 집행력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김씨 가문을 이렇게 조롱하면 고성이 나중에는 완전히 배제당하지 않을까요?”그러자 릴리가 웃으며 말했다.“아니요. 김씨 가문 전체가 아니라 절반이겠죠? 나머지 절반은 김서준이 맡고 있으니 도리어 협력할 기회가 더 많아지겠죠? 적수의 적수는 친구잖아요.”양율은 릴리에 대해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복수를 하는 한편 계획을 전혀 차질 없이 집행하려면 대단한 안목과 지혜가 필요했다.겉으로 보기에는 릴리가 마음대로 행동하면서 대수롭지 않은 척 해도 집행력은 장난이 아니었다.“조금 전 제가 질의해서 죄송해요.”양율은 진심으로 말했고 전에 배신사건이 있을 때보다 더욱 릴리를 탄복했다.그러자 릴리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양 비서님만 저를 질의하는 게 아니에요.”유능한 비서는 그녀의 팔과도 같은 존재이고 신임할 수 있는 비서는 많은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었다. 이제 임강준이 가고 나면 양율과 오랫동안 함께 일해야 하기에 그의 마음속에 황당무계한 인상을 남기고 싶지 않았고 더욱이 겉으로만 복종하는 척 하면 안 되기에 가능한 이해할 수 있도록 잘 설명했다. 하지만 양율은 릴리에 대해 탄복하는 동시에 그녀의 처지가 더욱 걱정되었다.“그럼 심씨 가문에서 보내온 계약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으시겠어요? 심씨 가문이 서울에서 꽤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데 등 돌리면 우리한테 불리하지 않을까요.”“전혀요. 누군 뭐 영향력이 있는 부모가 없는 줄 알아요? 그들은 애초에 나와 등 돌리면 어
눈앞에서 점차 확대되는 잘생긴 얼굴과 코끝에서 맴도는 남자의 익숙하고도 생소한 체취 때문에 릴리는 저도 모르게 심장 박동수가 빨라짐을 느꼈고 목소리도 모깃소리로 변했다.“립스틱 지워져요. 조금 있다 약속이 있어서 ㅋ...”‘키스’라는 단어를 말하기도 전에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안전벨트가 채워지는 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숙이고 몸에 고정된 안전벨트를 보면서 순간 멍해 있었다.“방금 뭐라 했어?”한쪽 팔로 몸을 지탱하고 있던 신하균의 웃는 얼굴이 릴리 바로 코앞에 고정되더니 그녀를 빤히 쳐다보면서 물었다.릴리는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했다. 만일 그녀가 조금만 과감하게 행동했더라면 신하균의 사랑이 듬뿍 담긴 눈빛을 봤을 것이다. 릴리는 우물거리며 대답했다.“아니에요. 립스틱을 안 가져온 것 같다고요.”그러자 신하균은 큰 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아 고개를 들어올리고는 두눈을 조용히 바라보았다.우물같이 깊은 두눈이 릴리의 얼굴을 천천히 훑으면서 입술에 고정되더니 뜨거운 기운을 뿜으며 말했다.“지금도 예뻐. 필요 없어.”릴리는 파들거리는 두 눈을 들어 신하균의 두 눈을 바라보자 눈동자에 비친 자기 그림자를 보았다.부끄럽고 쑥스러워 허둥대는 표정이었다.예쁘고 맑은 두 눈이며 딸기 같은 입술이며 살짝 고개를 쳐든 모습은 마치 그 누가 꺾어가기를 기다리는 꽃망울과도 같았다.릴리는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가슴이 팔랑거리더니 입가까지 나온 말을 꿀꺽 삼켰다.“지금은 필요 없겠지만 나중에는요?”남자의 두 눈이 어두워지면서 울대가 꿀렁이더니 고개를 낮춰 릴리를 한참 쳐다보다가 결국은 운전석으로 돌아가 자동차 엔진을 틀었다.신하균의 뜨거운 입김이 사라지자 그제야 숨통이 확 트이는 동시에 살짝 실망했다.‘분명히 암시했는데 뒤따른 행동이 없다고? 벌써 식었나?’고개를 돌려 그를 힐끗 쳐다보고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조수석의 햇빛 가리개를 내려 거울을 보면서 자기 얼굴을 요리조리 살폈다.흐트러짐 없는 화장과 예쁜 오관이 그대로 있었다.‘아주 완벽한데 왜? 미적
“괜찮아. 나도 도착한 지 얼마 안 됐어.”인사치레인 것 알지만 릴리는 더 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심수정의 맞은편에 앉았다.심수정의 시선이 그녀를 위해 의자를 빼주는 신하균의 얼굴에 멈추는 것을 보고 릴리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담담한 목소리로 소개했다.“제 남자 친구예요. 알고 계시죠? 저번처럼 고씨 가문에 갔다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한사코 따라오겠다고 해서 같이 왔어요.”과시하는 것처럼 들렸지만 사실 저번 사건을 거론하기 위해서이다. 만일 상대가 기본적인 사리 분별이 되는 사람이라면 절대 도덕적인 잣대로 자신에게 몰염치하게 용서해달라고 부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릴리는 거절에 강하지 못했다. 그 말을 들은 심수정은 흠칫했지만 이내 뜻을 알아차리고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난 고씨 가문 사람이 아니야.”대수롭지 않게 자신의 입장을 밝히며 고씨 가문과 상관이 없다고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그러자 릴리는 바로 자신이 오해했음을 느꼈다.“죄송해요. 제가 심했어요. 수정 이모, 화 안 내실 거죠?”릴리는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대범하게 자신의 실수를 승인하면서 심수정에게 당근과 채찍을 고루 선물했다.릴리의 ‘수정 이모’라는 호칭은 심수정이 고씨 가족의 신분을 떠나 그녀를 적대시하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다.그러자 심수정의 미소가 짙어지면서 말했다.“이모가 너하고 화낼 입장이 아니란 걸 잘 알잖아."릴리는 웃으며 심수정의 말에 동의했다. 심수정이 오늘 만나자고 했을 때 고주경 때문인 줄 알았다. 약정된 결혼 날짜가 점점 다가오는데 인터넷에서는 의견이 분분하고 분명하게 입장을 밝히지 않으면 소문이 진실이 되기때문에 그때 되면 고주경은 곤혹을 치를 게 뻔하다.하지만 심수정은 아무 일 없는 듯이 릴리와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일은 힘들지 않은지, 국내 생활에 적응되는지, 엄마의 병세는 어떠한지 등등의 쓸데없는 일상대화를 나눴다. 릴리는 속으로 놀랬지만 내색하지 않고 어른의 관심이라고 생각하고 묻는 말에 진심으로 대답했
하여 오늘 만남은 사실 무의미해진 것이다...릴리는 앞에 놓인 물컵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리 밝고 총명한 릴리에 대해 심수정은 아주 만족했고 대신 고주경은 자업자득인 셈이다. 상대가 잘못을 승인하는 태도가 좋다고 해서 용서하는 것은 자신에 대해 공평하지 않다. 어릴 때부터 생활 환경이 비록 열악했지만 부모님은 절대 억울함을 당하게는 하지 않았기에 스스로 자신을 바보로 만들 필요가 없었다. 심수정은 릴리의 표정을 살피면서 뭔가 말하려다 주춤하더니 끝내는 입을 열었다.“너에게 상처를 준 건 내가 주경이 대신 사과할게. 네가 무슨 보상이 필요한지 말만 해. 심씨 가문에서 다 만족시켜 줄게.”그러자 릴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니에요. 제가 큰 피해를 본 건 없으니까요.”이미 복수를 했기에 보상받을 필요가 없었다.“며칠 뒤에 주경이 데리고 해외에 가서 바람 좀 쐬다 올까 해.”심수경이 무의식적으로 한 말인 것 같지만 릴리를 테스트해 보려는 뜻이 없지 않아 있었다.그러자 릴리는 잠깐 주춤하더니 이내 심수정의 뜻을 알아차렸다.‘내가 고주경을 죽이기라도 할까 봐?’심수정이 한사코 배상하겠다고 했지만 릴리가 거절했기에 용서는 못 해주더라도 죽이지는 말라는 뜻인 것 같았다. 그말에 릴리는 웃으며 말했다.“수정 이모, 제가 그렇게 무정하고 잔인한 사람이 아니에요. 누가 제 뺨을 때리면 저도 한대 갚아주면 끝이에요. 이후에 절 건드리지 않으면 저도 절대 안 건드려요.”심씨 가문에서 아직 외손녀를 포기하지 않는 한 고주경과 김씨 가문의 혼약은 단지 형식뿐이다. 결혼식을 올린다고 사람이 죽는 것도 아니고 그저 소문이 좋지 않을 뿐이다. 심씨 가문에서 고주경을 해외로 피신시켰다가 소문이 잠잠해지면 다시 돌아와 이혼하기만 한다면 별로 손해 보는 일도 아니었다.릴리는 이런 사실을 알고 있기에 고주경을 핍박해 죽음에 달하게 하려는 생각은 없었다.“그럼 시름 놨어. 그렇다면 너희 부모님 측에 번거롭겠지만 대신 설명해
“우리 헤어지자. 넌 더 이상 내가 원하는 걸 줄 수 없어.”23살 생일날, 케이크 앞에서 올해 천강이랑 결혼하게 해주세요라는 소원을 빌고난 지 5분도 지나지 않은 강유리가 받은 문자메시지 내용이다.휴대폰을 바라보던 강유리가 미간을 찌푸렸다.‘얘가 갑자기 왜 이러지? 3년 동안 롱디라서 많이 섭섭했나? 그게 미안해서 금전적으로 어떻게든 뒷바라지 해줬던 건데. 그리고 그 동안 한 번도 이런 말 한 적 없었잖아.’일방적인 이별 통보였지만 그녀는 그저 오랜 롱디에 지친 남자친구의 귀여운 투정 정도라고 생각했기에 가장 빠른 항공편으로 귀국했다.당일 밤 11시.‘내가 자길 위해서 특별히 귀국했다는 걸 알면 아마 깜짝 놀라겠지?’서프라이즈를 제대로 해주기 위해 강유리는 기나긴 채팅기록을 뒤져 언젠가 그가 알려주었던 도어락 비밀번호를 알아냈다.“삑삑, 삐리릭.”문이 열리고...트렁크를 살며시 내려둔 채 살금살금 2층으로 올라가던 강유리는 방 안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남자는 첫사랑 절대 못 잊는다던데. 이렇게 쉽게 헤어지는 거야?”“뭐래. 내 첫사랑은 너야. 강유리 걔는... 어디까지나 돈 때문에 좋아하는 척 하는 거였다고. 우리가 애도 아니고. 플라토닉 연애라니. 하여간 더럽게 비싸게 굴어요.”“뭐야. 그럼 스킨십하려고 나랑 만난다는 거야?”“자기도 즐겨놓고 왜 이래. 응?”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점점 야릇하게 변하고...밖에서 이 모든 걸 듣고 있던 강유리는 주먹을 꽉 쥔 채 천천히 방으로 다가갔다.역시나 살짝 열린 문틈으로 서로 뒤엉킨 남녀의 모습이 보이고... 강유리는 침착하게 휴대폰을 꺼냈다.“찰칵.”휴대폰 카메라의 셔터소리에 방금 전까지 서로에게만 빠져있던 임천강, 성신영이 화들짝 놀란다.방 앞에 서 있는 강유리를 발견한 임천강이 일단 급한대로 이불로 비루한 몸뚱어리를 가려본다.“강유리? 네... 네가 어떻게 여길...”떨리는 목소리에서 당황스러움이 그대로 묻어났다.“그냥... 네가 원하는 게
화풀이를 끝낸 강유리가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둘 다 뭘 잘했다고 이렇게 뻔뻔해? 무릎 꿇고 애원하고 빌어도 모자랄 판에. 지금 나만 이 상황 이해 안 가는 거야?”“너...!”“임천강, 나 늙어죽는 한이 있어도 너 같은 애랑 결혼 안 해. 네가 누굴 좋아하든 상관없는데 그럼 적어도 나랑 끝내고 만났어야지. 추잡하게 이게 뭐 하는 거야? 어쨌든... 오늘 이 치욕... 절대 이대로 못 넘어가. 어떻게든 복수할 거니까 두고 봐.”말을 마친 강유리가 자리를 뜨고 분노에 찬 임천강의 절규가 오피스텔을 가득 채웠다.“강유리, 너야말로 두고 봐! 내가 멍청이처럼 당하고만 있을 것 같아?!”한편, 오피스텔을 나서며 분노로 인해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던 강유리가 우뚝 멈춰 섰다.‘아니지. 여긴 내 집이잖아. 왜 내가 나가야 해?’휴대폰을 꺼낸 강유리는 바로 아파트 관리인에게 전화를 걸었다.“아, 502호 주인인데요. 3년 동안 집을 비웠더니 모르는 사람들이 무단침입해서 살고 있네요. 경찰에 신고를 하든 뭘 하든 어서 처리해 주세요.”늦은 밤, 강유리의 전화에 벌떡 일어난 관리인은 바로 경비원들과 함께 502호로 달려가기 시작한다...마지막 미션까지 마친 강유리는 트렁크를 끌며 새벽의 거리를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연인의 배신, 슬프다기 보다 짜증이 밀려왔다.그녀와 임천강은 어렸을 때부터 아는 사이였고 수많은 남자들 중 임천강은 누구보다 그녀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물론 한때 열렬하게 그녀를 사랑했던 것도 사실이었고 말이다.그런데... 오늘 밤 그녀가 목격했던 추잡한 장면은 지난 3년이란 시간을 그저 웃음거리로 만들었다.‘애초에 날 좋아한 적도 없었잖아. 그냥 내 돈 보고 접근한 거였어?’“나쁜 자식들!”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짜증이 밀려들어 발에 닿는 조약돌을 퍽 차는 강유리다.하지만 다음 순간, 묘한 곡선을 그리며 날아가던 조약돌이 길가에 주차된 차량에 부딪히며 캉 하고 맑은 소리를 낸다.“헉!”가까이 가보니 롤스로이스 한정판.방금 전
한편, 육시준 역시 갑자기 나타나 계약 결혼이네 한달에 천만 원이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내뱉는 강유리를 유심히 바라보기 시작했다.그리고 한참을 가만히 있던 그가 손을 내민 곳은 뒤쪽이었다.“자료 좀 주실래요?”어젯밤 차에 남긴 정보에 따라 비서가 이미 강유리의 뒷조사를 완벽히 끝낸 상태.무표정으로 태블릿 PC를 넘기던 육시준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1000만원은 너무 적지 않나? 적어도 0 하나는 더 붙여야지. 그래야 육씨 집안 사모님이란 타이틀에 걸맞을 테니까.”목소리에서 묘한 위압감이 느껴졌지만 강유리는 0 하나는 더 붙여야 한다는 말에 꽂혀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하이고? 요즘 호스트는 가격 흥정을 이렇게 하나? 하긴, 저 얼굴에 저 분위기에... 부잣집 사모님 한 명 제대로 잡으면 월에 억은 쉽게 받겠어. 하지만...’“5000만원, 이 정도에서 끝내지. 적당히 해.”해외에서 매달 임천강에게 용돈 명목을 부쳐준 돈이 겨우 2000만원 남짓, 강유리가 부자인 건 사실이지만 이런 일로 호구 잡힐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이때, 뭔가 이상함을 느낀 육시준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그런데... 5000만이든 1억이든 누가 누구한테 주는 거지?”“내가 그쪽을 고용했으니까 당연히 내가 주는 거지.”이에 육시준은 다시 강유리의 얼굴을 훑어보기 시작했다.얼핏 얼핏 보이는 요염함이 매력적인 정교한 얼굴, 지금까지 그의 돈에 빠져 어떻게든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아등바등 애를 쓰던 여자들과는 달리 자신만만함을 넘어 어딘가 고고하기까지 한 눈빛...‘연기하는 것 같진 않은데...’“좋아.”잠시 후 얘기를 마친 두 사람은 카페를 나선다.하지만 지하주차장에 도착한 강유리는 우뚝 멈춰서더니 익숙한 롤스로이스에 시선이 꽂힌다.“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야.”강유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내가 저 차 주인한테 빚을 좀 진 게 있거든.”강유리를 보는 육시준의 눈이 또 묘하게 변하고...비서 역시 상황이 묘하게 변하고 있다 싶지만 육시준의
충격으로 일렁이는 육경서의 눈동자는 제발 이 모든 게 거짓말이라고 말해 달라고 호소하는 듯했지만 육시준은 그의 시선을 무시한 채 비서에게 분부했다.“강유리, 그리고 그 집안에 대해 제대로 알아봐줘요.”3년 동안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사라졌다가 귀국하자마자 결혼이라니.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을 강행하는 걸 보면... 뭐에 쫓기는 듯한데.육시준은 그 답이 그녀의 집안에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알겠습니다. 해외 유학생활에 대해서도 알아볼까요?”어제 비서가 급하게 구한 자료에선 그저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3년 간 도피 유학을 떠났다는 정보가 전부, 그 3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적혀있지 않았다.“아니요.”‘그건 그 여자 입으로 직접 들어야겠어...’하지만 육경서는 여전히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린 모습이다.여기 오면서 비서에게 대충 들은 바로는 어제 일부러 육시준 차에 스크래치를 내놓고 오늘 못 알아보는 척 결혼 제안을 한 여자라던데...‘아무리 생각해도 꽃뱀 같단 말이야. 뭔가 냄새가 나... 구린 냄새가...’“형, 그 여자 진짜 형 얼굴 모르는 거 맞아?”서울시에서 한정판 롤스로이스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육시준 한 사람뿐.그의 차가 곧 그의 얼굴이자 이름 같은 존재인데 아무리 갓 귀국했다지만 그걸 못 알아봤다는 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동생의 질문에 잠깐 고민하던 육시준 역시 고개를 저었다.“글쎄..”“그런데 왜...”“내가 알아서 해.”동생의 말을 잘라버린 육시준이 말을 이어갔다.“아, 아주머니한테 내 짐 좀 정리해 달라고 부탁해 줘. 오늘부터 와이프랑 같이 살아야 하니까.”한편, 강유리는 외할아버지를 만나러 병원에 들른 뒤에야 집으로 향했다.마침 저녁 시간, 문 앞에 차를 댄 강유리는 검은색 철문 옆에 적힌 글씨를 보고 미간을 찌푸린다.“성홍주”강민영이 세상을 뜬 뒤로 성홍주는 강유리가 아직 어리다는 핑계로 재산을 전부 빼앗은 것도 모자라 첫사랑과 낳은 사생아까지 집안에 들였다.빨리 어른이 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