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가 찍혀있는 상자를 꺼내보니 또 다른 물건이 들어있었다.금속 체인을 꺼내 보니 군번 목걸이였고 위에 신하균의 이름, 번호, 소속 부대 등 각종 내용이 찍혀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릴리는 움찔하면서 얼굴빛이 굳어버렸다.릴리는 이 물건이 아주 익숙했고 이것 때문에 신하균이라는 재벌 2세를 주목하게 되었다.오늘 모임에서 신하균은 확실히 여느 재벌 2세와는 달랐고 그는 위험하지만 영광스러운 직업을 가지고 있다.금속 재질로 된 군번줄이 바로 그의 신분 상징이었고 임무 수행 중 혹시라도 희생될 시 빠르고 정확하게 신분을 확인할 수 있다.릴리는 이 군번줄이 아주 무겁게 느껴졌고 따라서 마음도 무거워졌다...갑자기 핸드폰 액정이 반짝 빛나더니 신하균이 보낸 메시지가 도착했다.[자?]손에 군번줄을 들고 침실로 들어가 침대에 엎드려 답장을 보냈다.[아직요.]그러자 이내 음성 통화가 걸려 왔고 릴리는 수락 버튼을 눌렀다.“아직 안 자고 뭐하고 있어?”“하균 씨도 안 자고 있잖아요.”릴리는 군패에 찍힌 이름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신하균은 기분이 좋은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재워주는 서비스가 필요해?”릴리는 대답하지 않고 말했다.“방금 선물을 봤어요.”신하균이 잠깐 주춤하더니 물었다.“마음에 들어?”한참 생각을 굴리다가 릴리가 대답했다.“그럭저럭요. 그런데 하균 씨 말처럼 꼭 마음에 드는 느낌은 아니었어요.”그러자 수화기 너머에서 아무 말이 없었다.신하균은 릴리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어떻게 대답할지 몰랐다.릴리도 마찬가지로 신하균의 뜻을 알 수 없지만 혼자 추측하기 싫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왜 이걸 선물했어요?”신하균이 물었다.“어떤 거?”“둘 다 궁금해요.”“그 목걸이는 네가 좋아한다길래 강유리를 부탁해 디자이너로부터 구입한 거야.”“네 맞아요. 좋아하는 디자인이에요. 그럼 다른 하나는요?”“...”신하균이 입을 열기도 전에 릴리는 군번줄을 들고 물었다.“이걸 왜 나한테 선물했어요? 한편으로는 나에게 대
신하균의 말에 릴리는 군번줄을 손으로 꼭 움켜주고 눈까풀을 파르르 떨더니 손톱으로 연청색 침대 시트를 후벼파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누군 첫 키스가 아닌 줄 알아요? 그게 그렇게 대단해요?”비록 릴리의 겉모습은 날라리이지만 일단 관계를 확정하면 자기처럼 일편단심일 것이란 걸 믿어 의심치 않지만 이일은 썩 전의 일이었다.사실 신하균은 릴리가 선물을 거절할까 봐 내심 불안해하고 있었는데 이 말을 듣고는 겨우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기분이 좋아진 신하균은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래? 그럼 우리 끝까지 가는 거지?”그러자 릴리는 입을 삐죽거리며 볼멘소리로 말했다.“쳇, 이렇게 중요한 일을, 그리고 이렇게 중요한 물건을 전화로 대충 얼버무리면 끝이에요?”“아니. 전부터 말하고 싶었어. 그런데너무 갑작스럽게 행운이 찾아오는 바람에 까맣게 잊고 있었어.”신하균의 말에 릴리는 방금 집 앞에서의 키스가 떠오르면서 얼굴이 화끈거렸졌지만 입으로는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하균 씨가 심지가 별로 굳지 않네요. 만일 적군이 미인계로 유혹하면 수행해야 할 임무를 깡그리 잊어버리는 거 아닌가요?”“아니야. 너한테만 그래.”신하균이 낮은 소리로 릴리의 말을 시정했다.그러자 얼굴이 더욱 화끈거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뭐라고 말하려던 참에 신하균이 이어서 말했다.“혹시 내 대답이 마음에 안 들면 지금 문 열어. 얼굴 보면서 정중하게 물을게.”그 말에 릴리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으며 물었다.“아직 안 갔어요?”신하균이 “어”하고 대답하더니 이어서 말했다.“잠깐 정신을 잃다 보니 할 말을 다 못했어.”릴리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그래서 안 갔다고요?”신하균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릴리는 아무 말 없이 손톱을 물어뜯으며 침실 문을 한참 동안 바라보며 머뭇거리더니 큰 결심을 내렸는지 다시 침대에 드러누워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리며 불쌍한 목소리로 말했다.“늦었어요. 빨리 집에 가요.”신하균이 잠깐 침묵하더니 진심 반 농담 반으로 말했다.“이렇게
신하균의‘자기’라는 호칭이 엄청난 힘으로 릴리의 영혼을 가격했다.전에 전 남자 친구로부터 예쁜이, 아기야, 내 사랑 등등의 호칭을 들었어도 이 정도로 가슴이 설렌 적이 없었다.이것이 바로 목소리의 힘이 아닌가 싶으면서 혼이 빠져나간 것만 같았다.“잘 자요.”신하균에게 굿나잇을 고했지만 릴리는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 전혀 잠들 수가 없었다.행복과 부끄러움과 설레임 등등이 섞이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하여 끝내는 주체하지 못하고 모멘트에 [생일 축하가 비록 늦게 도착했지만 나도 해마다 당신과 함께 하고 싶어요.]라는 글귀를 적고 목걸이를 착용하고 찍은 셀카를 한 장 올렸다.모멘트에 있는 친구들은 대부분 밤낮이 바뀐 야행성 동물이고 특히 절친들은 이 글귀를 보자마자 난리법석을 떨면서 또 연애를 시작했냐고 문자를 보내왔다.거의 날이 밝을 때까지 카톡으로 수다를 떨다 드디어 진정하고 잠이 들려고 할 때 핸드폰이 반짝이더니 메시지가 무더기로 쏟아져나왔다.신주리: [우리 오빠가 준 선물이야?]신주리: [진짜로 사귀기로 했어?]신주리: [우리 오빠가 널 꼬신 거 아니지? 너 그새를 못 참고 넘어갔어? 너 왜 이렇게 물러터졌어? 더 지켜보겠다고 했잖아?]신주리: [우리 오빠가 갑자기 미쳤는지 하필 왜 어제 네 생일을 축하해주는지 모르겠어. 너무 신경 쓰지 마. 신하균이 뭘 알겠어? 이것 때문에 속상해하고 그러지 마.”신주리: [그런데 너 어제 보니 신하균을 싫어하는 것 같지 않던데 허락했어? 너 미쳤어?]신주리: [신하균은 네 진짜 생일도 몰라.]신주리: [신하균이 무슨 자격으로 너와 생일을 함께 하겠대? 네가 아까워.]썰물처럼 쏟아져나오는 메시지에 릴리는 머리가 뗑해지면서 하루 종일 기분이 롤러코스터를 탄 것 처럼 오르락내리락했기에 더 안 자면 힘들어 죽어버릴 것 같았다.하지만 문자가 쏟아져나오는 기세로 봐서는 릴리가 명확한 답을 주지 않으면 신주리가 조급해서 죽어버릴 것이다. 둘 중 한 사람이 죽어야 한다면 자기가 아닌 절친이 죽는 것이
이튿날 릴리는 끝내 제시간에 일어나지 못하고 눈을 떠보니 이미 점심시간이었다.핸드폰을 켜니 수많은 문자가 들어와 있었고 대부분 어젯밤 모멘트에 관한 것이었다. 어젯밤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오늘 아침에 보고 릴리에게 영문을 물었다.그중 신하균의 문자도 들어있었다.신하균은 릴리가 아침에 일어나지 못할 줄 알고 임 비서에게 연락을 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고 11시 반에 아침 식사가 도착할 것이라고 했다.그런데 신주리의 문자는 없었다. 맨발로 바닥을 밟으며 구름 위를 걷듯이 사뿐사뿐 문 앞에 와보니 정교하게 포장된 배달 봉투가 보였다.연애하는 느낌이 그다지 나쁜 것은 아니었다...배달 봉투를 들고 들어오면서 신하균에게 전화하니 바쁘지 않은지 바로 받았다.“여보세요?”신하균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갑자기 머리가 멍해지면서 몇 초 동안 침묵하더니 손에 들린 배달 봉투를 보면서 웃는 얼굴로 물었다.“하균 씨가 보낸 거예요?”그러자 신하균이 대답했다.“어. 아직 따뜻해?”릴리는 핸드폰을 스피커 모드로 전환해 테이블에 놓고는 봉투를 열고 손등으로 살짝 배달 용기에 대 보았다.“네. 따뜻해요.”“그럼 됐어.”두 사람 모두 말이 없다가 릴리가 물었다.“주리 언니가 하균 씨한테 전화하지 않았어요?”신주리가 릴리에게 문자를 안 한 것이 이상했고 그렇다면 당사자에게 확인했을 게 뻔하다. 그리고 신하균은 릴리가 아침에 일어나지 못할 것이란걸 잘 알고 있었다.“어. 나한테 오해가 있는 것 같아. 나중에 천천히 설명할 거야.”신하균이 낮은 소리로 말하다가 갑자기 시정했다.“자기와 주리가 나이가 비슷한데 언니라고 부르지 않아도 돼.”그러자 릴리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말했다.“주리 언니가 언니 친구이기에 언니라고 부르는 게 습관 됐어요.”그러자 신하균이 말했다.“나중에 주리가 자기를 언니라고 불러야 할 텐데 그러면 호칭이 이상해져.”그러자 릴리는 젓가락질을 멈추더니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면서 낮은 소리로 신하균을 나무랐다.“뻔뻔하긴.”그러더니
반나절이나 회사를 땡땡이쳤지만 아무 일 없이 잘 돌아가고 있었다.하지만 릴리가 책임진 협력 건은 직접 결정해야 했다...“분부에 따라 대외로 소문을 발설했고 현재 신안 그룹과 대헌 그룹이 조운 그룹의 빈자리를 서로 다투고 있어요. 다른 기업에서도 연락이 오는 것을 봐서는 효과가 괜찮은 듯싶어요. 하지만 실력을 따지면 신안 그룹과 대헌 그룹이 제일 강하고 이 중에서도 대헌 그룹이 좀 더 강하지 아닐까 싶어요.”이윤을 최대치로 낮췄기에 자선사업이라고 해도 과분하지 않았다.양율이 잠깐 숨을 돌리더니 이어서 말했다.“두 그룹을 서로 경쟁시켜 그중에서 더 우수한 그룹을 선택하시려는 건가요? 대헌 그룹에서 최대한의 성의를 보여줬기에 더는 양보 못할 거예요.릴리는 대헌 그룹의 계약서를 대충 훑어보면서 말했다.“당연하죠. 제가 협력업체를 괴롭히려는 건 아니에요.”양율이 의아한 눈빛으로 릴리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말했다.“맞다. 한 기업이 더 있어요.”그러더니 이미 준비한 서류를 건네주자 릴리는 서류봉투에 시선을 고정하고 손을 뻗어 받았다.“제가 알기로는 이 기업은 심씨 가문의 대폭 지지를 받고 있으며 최고 주주가 심씨 가문의 절반 가족이라고 할 수 있죠.”적극적으로 기업을 소개하는 양율의 목소리에는 암시의 뜻이 다분했다.릴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재빨리 계약 조건을 훑어보니 대헌 그룹보다 훨씬 낮게 책정되어 있었다.대헌 그룹이 자선 사업이라면 이 기업의 계약 조건은 적자라고 볼 수 있다.릴리는 혀를 끌끌 차면서 감개무량한듯 말했다.“심수정이 딸을 위해서 큰 결심을 한 듯 싶네요.”그러자 양율은 흠칫 놀라면서 바라보기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혹시 릴리가 심씨 가문의 성의를 알아채지 못할까 봐 귀띔하려던 찰나에 이미 알고 있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충고만 한마디 했다.“신안 그룹에서 제시한 조건도 상당히 성의가 있어 보이긴 하지만 이 두 기업과 비교하면 살짝 뒤처지는 느낌이 있어요. 하지만 신안 그룹은 고성이 제일 힘들 때 도와줬기에 가능
릴리는 단지 김씨 가문을 이용해 목적을 달성하려는 생각뿐이었는데 신안 그룹에서 갑자기 계약서를 보내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하여 계획은 계획대로 추진하고 릴리가 말했듯이 이제 와서 신안 그룹을 선택하는 건 김씨 가문에 복수도 할 겸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고성은 지금 신안과 어깨를 나란히 한 파트너이고 신안에 의지해야 하는 약체가 아니다.양율의 얼굴은 탄복한다는 표정을 짓고 있지만 속으로는 릴리의 복수심과 집행력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김씨 가문을 이렇게 조롱하면 고성이 나중에는 완전히 배제당하지 않을까요?”그러자 릴리가 웃으며 말했다.“아니요. 김씨 가문 전체가 아니라 절반이겠죠? 나머지 절반은 김서준이 맡고 있으니 도리어 협력할 기회가 더 많아지겠죠? 적수의 적수는 친구잖아요.”양율은 릴리에 대해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복수를 하는 한편 계획을 전혀 차질 없이 집행하려면 대단한 안목과 지혜가 필요했다.겉으로 보기에는 릴리가 마음대로 행동하면서 대수롭지 않은 척 해도 집행력은 장난이 아니었다.“조금 전 제가 질의해서 죄송해요.”양율은 진심으로 말했고 전에 배신사건이 있을 때보다 더욱 릴리를 탄복했다.그러자 릴리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양 비서님만 저를 질의하는 게 아니에요.”유능한 비서는 그녀의 팔과도 같은 존재이고 신임할 수 있는 비서는 많은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었다. 이제 임강준이 가고 나면 양율과 오랫동안 함께 일해야 하기에 그의 마음속에 황당무계한 인상을 남기고 싶지 않았고 더욱이 겉으로만 복종하는 척 하면 안 되기에 가능한 이해할 수 있도록 잘 설명했다. 하지만 양율은 릴리에 대해 탄복하는 동시에 그녀의 처지가 더욱 걱정되었다.“그럼 심씨 가문에서 보내온 계약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으시겠어요? 심씨 가문이 서울에서 꽤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데 등 돌리면 우리한테 불리하지 않을까요.”“전혀요. 누군 뭐 영향력이 있는 부모가 없는 줄 알아요? 그들은 애초에 나와 등 돌리면 어
눈앞에서 점차 확대되는 잘생긴 얼굴과 코끝에서 맴도는 남자의 익숙하고도 생소한 체취 때문에 릴리는 저도 모르게 심장 박동수가 빨라짐을 느꼈고 목소리도 모깃소리로 변했다.“립스틱 지워져요. 조금 있다 약속이 있어서 ㅋ...”‘키스’라는 단어를 말하기도 전에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안전벨트가 채워지는 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숙이고 몸에 고정된 안전벨트를 보면서 순간 멍해 있었다.“방금 뭐라 했어?”한쪽 팔로 몸을 지탱하고 있던 신하균의 웃는 얼굴이 릴리 바로 코앞에 고정되더니 그녀를 빤히 쳐다보면서 물었다.릴리는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했다. 만일 그녀가 조금만 과감하게 행동했더라면 신하균의 사랑이 듬뿍 담긴 눈빛을 봤을 것이다. 릴리는 우물거리며 대답했다.“아니에요. 립스틱을 안 가져온 것 같다고요.”그러자 신하균은 큰 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아 고개를 들어올리고는 두눈을 조용히 바라보았다.우물같이 깊은 두눈이 릴리의 얼굴을 천천히 훑으면서 입술에 고정되더니 뜨거운 기운을 뿜으며 말했다.“지금도 예뻐. 필요 없어.”릴리는 파들거리는 두 눈을 들어 신하균의 두 눈을 바라보자 눈동자에 비친 자기 그림자를 보았다.부끄럽고 쑥스러워 허둥대는 표정이었다.예쁘고 맑은 두 눈이며 딸기 같은 입술이며 살짝 고개를 쳐든 모습은 마치 그 누가 꺾어가기를 기다리는 꽃망울과도 같았다.릴리는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가슴이 팔랑거리더니 입가까지 나온 말을 꿀꺽 삼켰다.“지금은 필요 없겠지만 나중에는요?”남자의 두 눈이 어두워지면서 울대가 꿀렁이더니 고개를 낮춰 릴리를 한참 쳐다보다가 결국은 운전석으로 돌아가 자동차 엔진을 틀었다.신하균의 뜨거운 입김이 사라지자 그제야 숨통이 확 트이는 동시에 살짝 실망했다.‘분명히 암시했는데 뒤따른 행동이 없다고? 벌써 식었나?’고개를 돌려 그를 힐끗 쳐다보고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조수석의 햇빛 가리개를 내려 거울을 보면서 자기 얼굴을 요리조리 살폈다.흐트러짐 없는 화장과 예쁜 오관이 그대로 있었다.‘아주 완벽한데 왜? 미적
“괜찮아. 나도 도착한 지 얼마 안 됐어.”인사치레인 것 알지만 릴리는 더 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심수정의 맞은편에 앉았다.심수정의 시선이 그녀를 위해 의자를 빼주는 신하균의 얼굴에 멈추는 것을 보고 릴리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담담한 목소리로 소개했다.“제 남자 친구예요. 알고 계시죠? 저번처럼 고씨 가문에 갔다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한사코 따라오겠다고 해서 같이 왔어요.”과시하는 것처럼 들렸지만 사실 저번 사건을 거론하기 위해서이다. 만일 상대가 기본적인 사리 분별이 되는 사람이라면 절대 도덕적인 잣대로 자신에게 몰염치하게 용서해달라고 부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릴리는 거절에 강하지 못했다. 그 말을 들은 심수정은 흠칫했지만 이내 뜻을 알아차리고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난 고씨 가문 사람이 아니야.”대수롭지 않게 자신의 입장을 밝히며 고씨 가문과 상관이 없다고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그러자 릴리는 바로 자신이 오해했음을 느꼈다.“죄송해요. 제가 심했어요. 수정 이모, 화 안 내실 거죠?”릴리는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대범하게 자신의 실수를 승인하면서 심수정에게 당근과 채찍을 고루 선물했다.릴리의 ‘수정 이모’라는 호칭은 심수정이 고씨 가족의 신분을 떠나 그녀를 적대시하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다.그러자 심수정의 미소가 짙어지면서 말했다.“이모가 너하고 화낼 입장이 아니란 걸 잘 알잖아."릴리는 웃으며 심수정의 말에 동의했다. 심수정이 오늘 만나자고 했을 때 고주경 때문인 줄 알았다. 약정된 결혼 날짜가 점점 다가오는데 인터넷에서는 의견이 분분하고 분명하게 입장을 밝히지 않으면 소문이 진실이 되기때문에 그때 되면 고주경은 곤혹을 치를 게 뻔하다.하지만 심수정은 아무 일 없는 듯이 릴리와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일은 힘들지 않은지, 국내 생활에 적응되는지, 엄마의 병세는 어떠한지 등등의 쓸데없는 일상대화를 나눴다. 릴리는 속으로 놀랬지만 내색하지 않고 어른의 관심이라고 생각하고 묻는 말에 진심으로 대답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