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는 잠깐 멈칫했다.일부러 불쌍한 척하는 것은 그녀의 특기였지만 정말 불쌍한 티를 낼 줄은 모르기 때문이다.게다가 이번에는 불쌍한 티를 내려면 다른 사람도 끌어들여야 할 것 같았다...그제야 릴리는 신하균을 밀어내려고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저 먼저 내려줘요.”그러나 신하균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고 오히려 팔을 더 오므리고 그녀를 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화단 밖 주차장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릴리는 이 튼튼한 그의 품에 기대어 있었고 마음은 이유 없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안정되었다.이에 그녀는 아예 두 손을 신하균의 목덜미에 감아 몸부림조차 치지 않고 수다 모드를 열었다.“저 무거워요?”“그럭저럭 괜찮습니다.”“...”릴리는 그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그럭저럭 괜찮다는 건 또 무슨 뜻이에요? 제가 무겁다고 생각하세요?”그러자 신하균은 그녀를 힐끔 내려다보더니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그럭저럭 무겁지 않아요.”“아니죠. 가벼우면 가벼운 거지 그럭저럭 괜찮다는 건 분명 무거운데 예의상 하는 말이잖아요. 이봐요, 저 겨우 45킬로예요. 힘이 좀 약한 거 아니에요? 어떻게 45킬로도 무겁다고 할 수 있지...”곧이어 차 문이 열리고 릴리는 조금 부드럽지 않게 조수석으로 던져졌다.그녀는 관성에 따라 몸이 휘청거렸고 몸 전체가 운전석 쪽으로 기울기도 했다.마음속으로 저주를 퍼부으며 릴리가 힘겹게 손을 뻗어 의자를 받치려 하자 오른팔이 누군가에 의해 잡아당겨 지며 힘껏 그녀를 다시 끌어당겼다.그렇게 그녀는 통제 불능으로 다시 남자의 단단한 가슴에 부딪히게 되었다.“뭐 하는 겁니까?”릴리도 이제는 참을 수 없어 언성을 높였고 남자는 그녀를 훑어보더니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다쳤어요? 어디 불편하진 않아요?”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릴리는 대충 둘러댔다.“네. 괜찮아요.”신하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손을 뻗어 그녀를 툭 밀었다.원래 힘이 빠져 몸이 나른한데 이렇게 몇 번을 이리저리 치이니 머리가
두 사람도 긴장감이 역력한 기색으로 따라붙어 상황을 지켜봤다.한 무리의 사람들이 입구를 막고 있었고 시선에 따라 굳게 닫힌 방문을 바라보던 고정남은 침묵에 빠지고 말았다.박지연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이걸 어찌하면 좋냐며 계속하여 중얼거렸고 이연정도 곁에서 그들 집안의 아가씨는 비록 평소에 함부로 굴곤 했지만 절대 여자들을 괴롭히는 사람이 아니기에 김옥을 어떻게 하지 않을 것이라며 위로해주었다...겉으로는 모두가 김옥이 괴롭힘을 당할까 봐 걱정하는 것 같지만 사실 다들 이 연극을 알고 있다.고정남은 뒤에 있는 사람들을 훑어보며 매의 눈을 날카롭게 번쩍이더니 경호원에게 분부했다.“문을 뜯어주세요.”“네.”경호원이 폭력을 휘두르자 문은 곧장 열렸다.방안은 캄캄했고 이연정이 먼저 다가가 불을 켰다.이윽고 눈 앞에 펼쳐진 화면은 모두를 얼어붙게 하고 말았다.거의 벌거벗은 두 사람의 모습이 카펫에 매달려 있었고 남자는 눈 밑이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얼굴은 온통 흥분되어 있었다. 반면, 여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고 하얀 피부는 붉은 자국으로 가득했다.그녀는 악마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지만 몇 걸음 기어 나오자마자 다른 사람에게 머리채를 잡혀 다시 끌려오게 되었다.그 순간, 갑작스러운 눈 부신 불빛에 방 안의 두 사람은 모두 시선을 보내왔다.고주영은 낭패한 몰골과 멍든 얼굴까지 하고 마치 구원자를 보는 듯 입구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며 쉰 목소리로 소리쳤다.“아버지,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예상치 못한 장면에 비주얼 쇼크는 어마어마했고 이는 고정남의 머릿속을 뒤집어 놓고 말았다.이윽고 그는 몇 걸음 달려가더니 김재운을 걷어찼다.이연정은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가자 서둘러 작은 담요를 들고 앞으로 가서 훤히 드러난 고주영의 몸을 가려주었다...“어머, 이게 다 무슨 일이래?”“고주영 이 바보 도련님은 어쩌다가 저 여자와 같이 있게 된 거지?”“이 꼴을 보니 저 바보는 맞아 죽어야 할 것 같은데? 고씨 가문의
오랜 침묵이 흐르고 역시 박지연이 옆에서 이유를 자세히 설명해주었다.간단히 말해서 고우신이 김옥과 뒹굴게 되었고 김재운은 고주영과 몸을 뒤섞은 것이다.그리고 그들 계획의 중심에 있는 인물은 현재 종적을 감추었다.“장난하나!”김철용이 탁자를 탁 치며 언성을 높였다.“당신 고씨 가문은 뭐 이런 자식을 낳은 건가? 염치도 모르고 볼품이 없군. 이렇게 많은 어른들 앞에서 이런 추잡한 일을 저지르다니!”순식간에 뒤바뀐 얼굴에 미처 반응할 틈도 주지 않았다.방금까지만 해도 후배들을 나무라더니 지금은 화살을 돌려 고씨 가문을 향해 내리밟고 있다.한편, 고정남은 자신이 망할 계집애에게 속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고우신은 인품이 손상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은 고주영도 체면을 잃게 되었다.“이 늙은이가 정말, 당신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우리 주영이의 상처는 모두 이 짐승에 의한 것이라고. 그런데 지금 모든 것을 다 우리 고씨 가문 탓으로 돌려?”고태규도 화가 치밀어올라 덩달아 말을 가리지 못했다.“당신들이 갑자기 우리를 이 무슨 가족 연회에 초대하지 않았다면 우리 집 옥이가 그 피해를 받았겠어? 김재운의 머리가 잘못되었다고 당신 집안 후손들도 전부 미쳐버린 거야? 애초에 침실에 같이 들어가서 뭘 하려는 건데?”“허. 자네가 직접 들어보게. 그게 사람이 할 소린가? 우리가 당신들을 초청한 탓이라고? 난 아직 당신이 이 병신을 우리 집에 데려온 것을 탓하지도 않았네.”“병신? 누굴 병신이라고 욕해? 이 늙은이가!”“...”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맞지 않는 두 어르신이 싸우니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결국, 고정남이 먼저 나서 소리 내어 그들을 제지했다.“자, 두 분 먼저 진정하세요.”두 어르신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지만 그 누구도 상대방을 보려 하지 않고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한쪽으로 돌려버렸다.지금의 상황은 확실히 고씨 가문의 실수이다.하지만 원래 잘 계획했던 것이 이렇게 엉망이 된 것도 그 망할 계집애의 책임이 분명 있다. 그래서
“우신 오빠, 나한테 옷 가져다준다면서 들어와서는 이상한 소리 하고 제 몸에 손대니까 제가 오빠를 내리친 거예요.”김옥은 순식간에 얼굴을 바꾸더니 겁먹은 듯 나약하게 설명했다.그리고 그녀의 설명이 고우신을 곤혹에 휩싸이게 했다.마치 김옥이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하고 김옥이 왜 릴리를 위해 말을 하는지 의심하는 것 같기도 했다.박지연은 고우신이 아무런 말도 없이 멍하니 있는 모습과 자기 딸, 김옥을 바라보며 긴장하는 모습에 생각에 잠겼다.그러자 고정남이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그를 몰아세웠다.“정말 옥이가 말한 그대로냐?”고우신이 대답하지 않자 김옥은 더욱 울먹이는 목소리로 캐물었다.“아저씨,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를 못 믿으시겠어요?”순간 고정남이 미간을 찌푸렸다.“아니, 난 그냥...”“지금 아저씨는 아들이 더 믿음직스럽다고만 생각하시는 거예요? 아저씨는 지금 저처럼 결백한 저 여자가 자신의 정조로 장난을 칠 것 같아요?”김옥의 말이 갑자기 날카로워졌다.방금 고우신이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때, 그녀는 줄곧 연약한 모습을 보이며 어른들이 자신을 도와 정의를 되찾아주는 것을 바라보았다.하지만 고우신이 깬 후, 그녀는 마치 이 일이 묻힐까 봐 두려운 사람처럼 끝까지 꼬치꼬치 캐물었다.고정남은 잠시 그녀를 쳐다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나는 단지 네가 협박을 받아 본의 아닌 말을 할까 봐 두려웠을 뿐이야.”그를 바라보는 김옥의 눈빛이 묘하게 번쩍였다.“...”‘늙은이가 자기 딸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네.’고정남의 말은 그녀조차도 그의 말에 따라 백기를 들고 싶어졌으니까.하지만 그 아가씨의 말도 일리가 있다. 그는 지금 실권이 전혀 없다. 그러니 그와 협력하면 그녀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제가 누구에게 협박당할 것 같은데요?”김옥은 다시 여린 입을 열었고 곧 뒤를 돌아 고우신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아니면 이 일을 누구의 탓으로 돌리기 위해 부자가 의논한 것입니까?”먼저 기선을
고정남은 화가 폭발하여 고우신을 세게 찼다. 고태규가 나서서 말리고 나서야 고우신을 놔주었다.김옥은 계속 울었다. 연기를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하니 자신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용서를 할지 말지는 생각을 해봐야 한다.말은 이렇게 했으나 고정남은 김씨 가문에서 잠시 약혼을 취소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들어냈다.고정남은 침묵을 했다. 완벽한 계획이 흐트러진 것에 불만을 했다. 고정남은 여전히 아들이 저 여자애를 지킨다고 해도 김씨 가문에 이 여자애가 릴리와 친분이 없으니 지켜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가능하게 무슨 위협을 받았거나 약점이 잡혔다고 생각했다.고정남은 주위를 훑어보며 말했다. “강유리는 어디 있어? 지금 당장 나오라고 해. 그때 걔도 위층에 올라갔으니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 있을 거야.”고우신이 허약하게 옆에 있는 소파에 기대앉아 있다가 이 말을 듣고 이맛살을 찌푸렸다.“아빠...”“너 입 닥쳐. 강유리가 어떤 사람인지는 내가 제일 잘 알아. 만일 이 일이 걔하고 상관이 있으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거다.”이 말에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의 마음이 흔들렸다.이 일이 마치 반전이 있는 것 같았다.사람들 속에서 비웃는 소리가 들려 나왔다.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보니 청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찾아온 김씨 가문 작은 도련님이었다.이렇게 많은 시선을 받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죄송해요, 웃음을 참을 수 없었어요. 오늘 고씨 가문 좀 재수가 없네요.”고정남이 차가운 시선으로 보며 말했다.“집안일을 처리하는 중이니 김씨 가문 작은 도련님은 다른 일이 없으면 돌아가시죠. 배웅은 안 할게요.”겉치레도 하지 않고 내쫓는 태도가 분명했다.김찬욱도 화를 내지 않고 그저 가만히 있었다.“아저씨는 왜 제가 고씨 가문이 재수가 없다고 하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김찬욱이 말했다.고정남은 말이 없었다.김찬욱이 자문자답을 했다. “고씨 가문 큰 도련님이 술에 취해 다른 사람에게 무례한 짓을 하고 고씨 가문 큰아가씨는 술을 마
릴리는 일부러 더 물어보려 했다.“나랑 상관이 된 일이라서 누가 더 주의했는데요? 주어를 생략하지 말고요.”신하균은 입술을 꾹 닫고 침묵을 유지했다.릴리가 웃으며 다가가 더 물으려 했으나 핸드폰이 울렸다.두 사람의 분위기를 삽시에 깨버렸다.신하균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언짢아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핸드폰을 꺼내 보고 이어폰을 끼려고 한 순간 릴리가 신하균의 손을 잡았다.“이어폰 끼지 말고 나도 같이 들을래요.”릴리의 낯빛이 좋지 않았고 피곤한 기색이 가득했으나 눈은 반짝거렸고 기대하는 눈빛이었다.이런 시선을 보니 비밀이 있어도 감추기 어려웠다.그리고 원래부터 비밀도 아니었다.신하균이 턱을 들며 전화를 받으라고 했다.릴리가 전화를 받고 확성을 눌렀다.맞은편에서 폭소가 들려왔다.“내가 보낸 영상 봤어요? 너무 재밌잖아요. 그 두 늙은이끼리 서로 물고 뜯고 하는 거 좀 보세요.”“누구요, 누군데요? 고정남하고 그 김씨인 사람 말이에요?”릴리는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전화 맞은편에서 멈칫했다.“강씨 가문 둘째 아가씨?”릴리가 대답했다.“네, 저예요. 계속 얘기해 보세요.”계속 말할 흥미는 잃었고 갑자기 생긴 새로운 일에 흥미가 생겼다.“우리 신 형사님 핸드폰이 왜 아가씨 손에 있는 건가요. 이미 서로 핸드폰을 공용하고 아무런 프라이빗이 없는 정도까지 된 거예요?”릴리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아까까지만 해도 말하던 주제는 오늘 저녁에 있었던 일의 뒷일을 말하는 게 아니었나요?”김찬욱이 말했다.“이런 일은 중요하지 않아요. 결과는 다 예상안이니까요. 그거보다 지금 더 궁금한 건 두 사람...”“김옥하고 고우신은 어떻게 됐어요?”김찬욱은 입장이 확고하지 않고 호기심은 순식간에 전이됐다.“그 허위적인 동생이 누구 말도 듣지 않던 데요. 뭐라고 하셨길래 걔가 아가씨를 도와 고우신을 모함하는 거예요?”릴리는 속에 답이 생겼다.“그게 무슨 말이에요. 꼭 내가 어떻게 한 거인 거예요? 고우신이 그런 사람인 거 일수는 없
신하균은 더 해석하지 않고 그저 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려 부 좌석의 문을 열었다.팔을 차에 지대고 허리를 굽혀 릴리를 바라봤다.“스스로 걸을 수 있어요?”릴리는 넋을 잃고 신하균을 바라봤다.주차장은 조용했고 가로등 빛이 신하균의 몸에 비쳤다.가로등을 등져 릴리는 신하균의 표정을 잘 보지 못했다. 하지만 목소리에서 화가 나지만 어떻게 하지 못하는 어투를 들어낼 수 있었다.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릴리가 아래를 보며 긴 속눈썹이 흔들렸다. 부채마양 눈 안에 있는 모든 정서를 가렸다.릴리가 말했다.“아니요. 다리에 힘이 풀렸어요.” 신하균이 가만히 있다가 허리를 굽혀 한 손은 릴리의 어깨를 감쌌고 다른 한 손은 다리를 감싸고 가볍게 안았다.릴리는 신하균의 목에 두 팔을 감았다. 머리는 가슴팍에 수그리고 신하균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가는 길 조용했다.병원에 이미 연락을 해서 준비를 했으나 검사를 다 하고 나왔을 때는 새벽에 가까운 시간이었다.릴리가 물을 많이 마시고 또 오래 휴식을 해서 약효는 거의 흩어졌다. 그저 시간이 늦어 또 졸렸다.릴리가 맥없어하는 모습을 보고 신하균은 놀랐다.검사 결과를 받고 난 후.송이혁이 하얀 가운을 입고 문 앞에 서서 엄숙한 표정으로 검사 결과를 보고 또 릴리를 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신하균이 긴장을 하며 말했다.“어때?”송이혁이 물었다.“왜 일찍 데리고 오지 않은 거야?”신하균은 긴장한 상태로 송이혁을 바라봤다.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송이혁이 검사 결과를 다시 한번 보고 말했다.“좀만 더 늦었으면 약효가 다 사라졌어.”신하균은 멍해 있었다.송이혁이 말했다. “그래도 안심해. 약효가 다 사라졌다고 해도 혈액검사에서 문제를 검사해 낼 수 있으니까. 이 검사 결과를 가지고 책임을 묻는다고 해도 쓸모가 있을 거야.”신하균은 반응을 하고 검사 결과를 받았다. 표정에는 불만이 있었다.이렇게 엄숙한 일에 이 자식이 장난을 쳤다니.송이혁은 신하균이 불만을 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송이혁이 아까 신하균의 말을 간단히 들어보니 고씨 가문이 한 짓이었다.하지만 지금 릴리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것을 듣고도 놀라웠다.“속상하지 않아?”릴리는 이상하다는 듯이 송이혁을 쳐다봤다.“뭐가 속상해요?”이 말을 하고 릴리는 요즘에 있었던 속상한 일을 다 생각해 봤다. 심지어 인터넷에서 본 한 강아지가 입양하려고 했을 때 이미 입양해 간 것도 생각했다.좀 안타깝기는 했지만 속상하지는 않았다.“고정남이 널 이렇게 대하는데 어떻게 생각해?”송이혁이 더 명확히 물었다.릴리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뭐가 속상하다고 하는가 했잖아요. 이런 작은 일에도 속상해하면 어떻게 살아요.”송이혁은 흐뭇한 표정으로 릴리를 바라봤다. “내가 뭐 도와줄 게 있어?”릴리가 고개를 흔들었다.“아니요, 원한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갚는 편이라서요.”이 일은 신하균에게서 들은 적이 없다.송이혁이 의혹스러운 눈빛으로 신하균을 쳐다봤다.신하균은 송이혁이 바라보는 것을 감지하고 대답했다.“그래, 그 자리에서 갚았어.”그리고 지금 이 검사 결과도 있으니 더 유리하다.고씨 가문의 사람들은 오늘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다.“이제 시간 될 때 말해. 먼저 돌아가서 휴식해.”송이혁은 궁금했으나 릴리의 상황이 더 걱정이 됐다.릴리는 벽에 기대고 말했다.진짜 병실 하나만 쓰면 안 돼요?”송이혁은 릴리를 쳐다보다가 신하균을 쳐다봤다.“지금 약효가 다 사라졌지만 그래도 몸은 허약하니까 누군가 보살펴 줘야 해. 병원에 있어도 되긴 한데 보살펴 줄 사람은 있고?”릴리는 그저 잠을 자고 싶어 송이혁의 말 중의 의미를 캐치하지 못했다.“무슨 보살펴요. 몸 엄청 튼튼하니까 괜찮아요.”송이혁은 릴리의 말에 반박했다.“혹시 후유증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안돼.”“그 조금에 무슨 후유증까지 생겨요. 지금 회복 상태로는 약 거래처까지도 맞출 수 있다니까요.”송이혁은 할 말이 없었다.릴리를 보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자신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신주리는 고민하다가 말했다.“난 최근에 일이 많지 않아 괜찮지만 다음 달에 곧 새로운 촬영을 시작할 거야.”육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다음 달에 돌아가면 촬영 일정을 맞출 수 있어요.”육경서는 그들이 두어 마디 말로 일정안배를 끝내가 다급하게 입장을 밝혔다.“나도 있어! 주리가 돌아가지 않으면 나도 안 돌아갈래!”신주리는 흘겨보며 물었다.“넌 바쁘지 않아?”“마침 이 영화가 촬영을 마감할 예정이야. 기타 활동은 중요한 건 뒤로 미루고 중요하지 않은 건 매니저더러 거절하게 하면 돼.”육경서는 미처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말했다.강유리는 반대하지 않고 귀띔했다.“강덕준 감독이 널 죽일 수도 있어.”육경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괜찮아. 한 달뿐이잖아. 설마 날 따라 여기까지 오겠어?”강덕준이 그를 죽일지는 둘째치고, 어쨌든 지금 바론 공작은 그를 죽여버리고 싶었다.그는 그저 예의상 딸아이의 친구들을 초대해서 놀게 했을 뿐인데 결국 딸아이가 다음 달 귀국하는 일정을 안배하게 되다니?병원에서 육시준이 비아냥거리던 말을 그는 실행할 계획이었다. 단계마다 다른 이유로 딸을 만류하고 싶었고 시름 놓고 이곳에서 편히 안태하게 하고 싶었다.그러나 사위는...만약 자기 일을 다 처리했다면 남아있어도 괜찮았다. 부양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그러나 지금 덤으로 두 사람이 더 생겼고 또 이 두 사람은 시간 맞춰 돌아가야 했다. 돌아가지 않으면 재촉당할 것이 뻔하다.“두 분이 바쁘면 굳이 남지 않아도 돼. 유리는 지금 손님 접대하는 게 불편하거든.”그는 정색해서 다시 말했다.그러자 여러 가지 눈빛이 삽시에 바론 공작을 향했다......신주리와 강유리는 제작팀과 반나절만 휴가를 냈기 때문에 오후에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오전 시간만으로 두 친구가 얘기하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해 강유리는 직접 감독에게 전화해 하루 연장했다.점심시간.신주리는 육시준의 자리에 앉아 강유리의 옆에 누워 계속 절친끼리 이야기를 했다.강유리는 이번에 단도직입적
저쪽에서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상대방도 자신만큼 놀란 모습을 상상하며 육경서는 다음 이야기가 기대되었다.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송미연은 놀랐지만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유리 찾으러 갔어? 프로그램을 녹화한다며 왜 그들을 찾으러 갔어? 거기는 시간이 아직 이르지 않아? 이맘때면 유리는 잠을 잘 자지도 못했을 건데...”송미연은 육경서가 철이 없이 강유리가 잘 쉬지 못하게 방해한다고 한바탕 야단을 쳤다.그러나 그녀의 말은 한 가지 중요한 소식을 알렸다.“진작 알고 있었어요?”“물론이지!”송미연은 자랑스럽게 말했다.“며느리가 임신했는데 이렇게 큰 소식을 어떻게 바로 나에게 알려주지 않을 수 있겠어? 경고하는데 너무 떠들지 마. 네 형수님을 화나게 하면 안 돼! 그냥 녹화만 잘하면 되는 거 아니야? 주리가 널 용서했어? 왜 돌아다니며 다른 사람의 가십거리를 알아내려고 해! 이번에 돌아와서 주리의 용서를 받지 못한다면 넌 아예 돌아오지도 마!”...화제가 자신을 욕하는 방향으로 변해버리자 육경서의 열정은 순식간에 식어버렸고 목소리도 누그러들어 어쩔 수 없이 말했다.“알았어요. 알았어요. 제가 원한 줄 아세요? 이것도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잖아요...”“뭐가 어쩔 수 없다는 거야? 모두 네가 자초한 거잖아! 쌤통이야!”“...”“섬에서의 상황이 어떤지 모르니 넌 주리를 잘 돌봐야 해. 난 실시간으로 라이브 방송을 살펴보고 있을 테니 넌 주리 괴롭히지 마.”송미연이 또 당부했다.육경서는 머뭇거리다가 정색해서 대답했다.“알았어요. 걱정하지 마세요.”송미연은 또 몇 마디 더 당부한 후 전화를 끊었다.육경서는 어두워진 휴대폰 화면을 보며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잘됐어. 아빠 엄마가 다 주리를 좋아하니 나중에 언제든지 주리는 억울함 당하는 일이 없을 거야. 적어도 내가 있는 한 억울함 당하지 않을 거야...”...점심은 빌라의 셰프가 만든 영양식이다. 맛은 좋지만 오래 먹으면 질릴 수 있어 강유리는 이 음식을 보며 저도 모르게 한숨
그러나 앉은 자리가 아직 따뜻해지기도 전에 육경서는 흥분된 듯 바로 일어나 소리쳤다. “뭐? 임신했다고?” 바론 공작은 짜증 섞인 눈길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목소리 좀 낮춰. 뭘 그렇게 놀라!” 그는 지금까지는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사실 소식을 들었을 땐 당황하고 흥분했던 걸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육경서는 입을 막으며 어색하게 다시 앉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반짝이며 감출 수 없는 흥분이 드러났다. ‘나 이제 삼촌 된다! 삼촌 된다!’ “의사가 말하기를 첫 3개월은 불안정하니까 특히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도 이 소식을 공개하지 말고 태아가 안정될 때까지 기다리자고 하셨다.” 바론 공작은 드물게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 그는 그 말을 끝내며 신주리를 한번 훑어봤다. “그래서 나는 유리를 위해 사람들을 안배해 가까이서 돌보게 한 거다.” 그의 시선을 느낀 신주리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공작을 한 번 보고 다시 눈을 내리깔며 강유리의 아랫배를 바라봤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마치 한번 만져보고 싶은 듯했지만 참았다. 그녀의 눈은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고 육경서와 같이 흥분과 기쁨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녀는 강유리의 아랫배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서 지금 이 안에 작은 생명이 자라고 있는 거야?” “맞아.” 강유리가 그녀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신주리는 표정은 진지했지만 눈 속에 담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만져봐도 돼?” 육경서도 순간 정신을 차리며 손을 내밀었다. “나도...” “안 돼!” “안 돼!” 두 명의 목소리가 동시에 차갑게 외쳤다. 그들의 무리한 요구를 바로 거절했다. 강유리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두 남자를 쳐다봤다. 그녀는 그들에게 체면을 차리지 않았고 대신 신주리에게만 속삭였다. “조금 있다가 방에 들어가면 만져도 돼.” 육시준과 바론 공작은 동시에 얼어붙었다. ‘우리가 안 들릴 거라고 생각하나?’ 육경서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강유리를
육경서는 얼굴에 기쁨이 가득한 채 입을 열려던 순간 정원에서 누군가가 다가왔다. 그 사람은 유창한 한국어로 두 사람에게 따뜻하게 인사했다. “이쪽이 둘째 도련님이랑 신주리 씨 맞으시죠? 강유리 아가씨께서 이미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 부탁드려요.” 신주리가 부드럽고 예의 있게 대답했다. 육경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 사람, 왜 이렇게 때맞춰 나타나는 거지? 다른 때는 왜 안 오고, 바로 이때 오냐고!’ “잠깐만요. 저희 형수 말고 일단 먼저 빌라를 둘러보고 싶어요!” 그가 급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안내하는 집사를 붙잡았다. 집사는 그의 눈을 한 번 쳐다본 뒤 다소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멈췄다. 신주리는 미소를 띤 채 침착하게 말했다. “미안해요. 낯을 가려서 그래요.” 육경서는 혼란스러웠다. ‘이게 무슨 말이야? 내가 낯을 가린다고? 왜 그렇게 갑자기...’ 집사는 이해한 듯 웃으며 공작님도 그들의 방문을 매우 기쁘게 생각해 오늘 특별히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전했다. 육경서는 그 한마디도 제대로 듣지 않았고 눈앞의 신주리를 원망스러운 눈길로 바라봤다. ‘주리는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이야? 너무 쉽게 대답해서 다시 부정하려는 건가?’ 그들이 정원으로 들어섰고 이곳은 여전히 고요하고 우아한 분위기였다. 뜨거운 태양 아래 한쪽에서 차와 다과가 준비된 작은 테이블이 보였다. 강유리는 햇볕을 가린 파라솔 아래에 앉아 있었고 그 앞에는 육시준이 전화를 끊고 있었다. 바론 공작이 불만을 표하며 입을 열었다. “하루 종일 그 전화기 들고 있으면 안 돼! 그렇게 바빠? 전자기기 방사선이 얼마나 해로운지 알지? 의사 선생님이 말했잖아. 첫 세 달은 불안정하다고, 푹 쉬어야 한다고!” 육시준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지난달에 돌아갔으면 이미 처리했을 일인데요.” 바론 공작은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스쳤다. “일이라는 게 끝날 수 있나? 돌아가면 내 딸과 시간을 제대로 보낼 수 있을까 몰라!” 육시준이 말하려던 순간 강유
감독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강하게 반박하지도 못하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규정에 따르면 녹화 중에는 제작진 팀을 이탈하면 안 됩니다.” 역시나 신주리는 가볍게 되물었다. “녹화 시작할 때 그런 규정은 없었잖아요? 갑자기 추가된 건가요?” “그건 아니지만 지금 상황이...” “그럼 우리를 일부러 견제하려는 건가요? 그럼 그냥 프로그램 안 하면 되죠?” 감독은 말문이 막혔다. 사실 첫 번째 시즌에서 육경서가 사고를 당한 이후로 그는 이미 이 두 사람에게 꼼짝 못 하고 있었다. 조건을 협상하든 규칙을 정하든 이 둘이 하겠다고 하면 다행이고 안 하겠다고 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될 판이었다. 결국 이를 악물고 그는 포기했다. “알겠어요, 알겠어! 두 분 다 제가 졌습니다! 하지만 어디 가든 꼭 행선지를 알려주시고 제작진 팀에서 두 분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걱정 마세요. 너무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점심 먹고 바로 돌아올게요!” 신주리가 대범하게 말했다. ‘점심도 먹고 온다고?’ 하지만 그가 불만을 표현하기도 전에 두 사람은 이미 유유히 그의 앞을 지나쳐 나가버렸다. 호텔 문을 나서자마자 감독은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너머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강 대표님, 경서 씨랑 주리 씨가 지금 강 대표님을 만나러 갑니다! 그런데 프로그램 효과를 위해서 행선지에 대한 건 절대 발설하시면 안 됩니다!” 감독이 진지하게 말했다. 강유리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만약 제가 발설하면요?” 감독은 순간 당황했다. 그는 이런 대답을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이건 우리 회사의 프로그램 아니었나? 이렇게 마음대로 행동해도 되는 거야? 시청률이 안 오르면 강 대표님에게도 손해 아닌가?’ 감독은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어떻게든 이 대형 회사를 설득해야겠다고 결심했지만 강유리는 그의 말을 끊으며 다시 말했다. “농담이에요. 발설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마세요.” 감독은 긴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
비행기에 오를 때 각자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고 내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땐 이미 다음 날 새벽이었다. 제작진 팀은 미리 준비한 차를 타고 그들을 예약된 호텔로 보냈다. 해변가에 위치한 경치가 아름다운 5성급 호텔이었다. 모두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번에 제작진 팀 정말 큰돈 쓴 거네! 이게 진짜 여행 같아!” “그렇지. 갑작스러운 느낌도 있지만 일정은 꽤 합리적이네!” “응, 또 감사한 건 처음에 우리 주리랑 경서에게 그 사건이 터진 후로 대우가 점점 더 좋아졌다는 거야. 그들은 정말 목숨을 걸고 얻은 거라니까!” 모두가 웃으며 체크인 절차를 마쳤다. 그때 감독 팀에서 메시지가 왔다. “오늘 밤은 여기서 쉬고 내일은 섬으로 갑니다.” 모두들 당황했다. ‘그래서 목적지는 여기가 아닌가?’ “목적지는 반대편에 있는 작은 관광 섬입니다. 규모는 작지만 최근 몇 년 동안 관광업이 급성장했습니다. 얼마 전 이 섬의 소유자가 바뀌어서 다시 한번 큰 화제를 일으켰죠.” 감독이 그렇게 말하자 신주리는 점점 더 익숙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게 바론 공작이 유리에게 선물한 섬이죠?”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육경서는 감탄하며 물었다. “그럼 어떻게 우리 형수를 설득했어요?” 감독 팀은 미소를 지으며 답하지 않았다. 실시간 채팅창에서는 감탄이 이어졌다. [유리 언니가 이번 프로그램을 위해 진짜 대규모로 투자한 거네!] [하하하, 유리 언니가 투자한 건 아니야. 그냥 완전 부모님에게 의지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그 덕분에 도련님과 미래의 동서가 혜택을 보는 거고!” “나도 섬 주인 언니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번에 유리 언니 우정 출연할지 궁금하다!” 아침 식사 후 모두 방으로 돌아가 시차를 맞추기 위해 잠을 청했다. 카메라는 잠시 쉬어갔다. 신주리는 비행기에서 잠깐 눈을 붙였기에 이제는 전혀 졸리지 않았다. 그녀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호텔 방을 몰래 빠져나
심지어 원피스까지 캐리어 하나에 다 준비해 놨다. “안 믿을지 몰라도 내가 쇼핑 리스트까지 작성했어. 엄마한테도 참고를 부탁했거든! 원피스는 엄마가 골랐어. 안심해, 눈썰미는 진짜 좋아!” 말을 하면서 그는 정말로 쇼핑 리스트를 꺼내서 신주리에게 보여줬다. 신주리는 그 리스트를 보지 않아도 이미 믿고 있었다. 심지어 조금 놀랐다. “너 그럼 네 짐은 어쩌고? 얼마나 챙겨왔어?” “짐 하나야. 나중에 필요하면 제작진 팀에 부탁할 거야!” 육경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말했다. 신주리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너무 오랫동안 육경서를 바라보고 있었던 탓인지 휴대폰을 들여다보지 않은 채 그를 쳐다보던 신주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육경서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 “왜?” 신주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려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많아?” 육경서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많은 건 아니야. Y 국에 있는 우리 회사 지사에서 몇 가지 더 준비해 줬거든...” 그가 말을 하다 갑자기 멈칫했다. 불필요한 말을 했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신주리는 그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녀의 머릿속에 갑자기 대담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번 목적지는 네가 제작진 팀에 요청한 거 아니야?” “무슨 말이야? 내가 그런 사람인 줄 알아?” 육경서는 당황한 듯 대답했다. “네가 그런 사람 아닌가?” 육경서는 잠시 생각에 잠긴 후 고백했다. “맞아, 그런 사람일 수도 있어.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아니야! 사실 내가 쓴 목적지는 원래 해변이었어. 이런 건 결국 다 준비해야 할 것들이잖아.” 신주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이제는 아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서진태와 소지석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진태는 진지하게 소지석에게 도씨 가문의 그 양성 계획에 대해 물어보았다. 이 계획은 너무나도 비상식적이어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었다. 완전히 그들
[하하하, 이게 무슨 이상한 조합이야? 어쩐지 묘하게 어울리기도 하고 또 웃기기도 하네!] [처음부터 차 안에서 자리싸움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어색하지는 않았겠지.] [우리 지원 언니 한마디로 모든 흐름이 뒤집혔어!] [강미영은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우리 지석이를 일부러 피하는 거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소지석 팬들 너무 이기적이지 마! 누구든 미영 언니에게 다가갈 수 있고 미영 언니는 모두를 거절할 권리가 있어!] 좌석이 정리되고 비행기가 이륙을 준비하자 라이브 방송은 일시적으로 종료되었다. 이런 24시간 라이브 촬영 프로그램에서도 이렇게 잠깐 동안만은 각자가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강미영은 라이브 방송이 종료된 뒤 의아한 표정으로 한지원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왜 한지원이 굳이 자신과 함께 앉으려고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 누가 자신에게 같이 앉자고 했어도 마다하지는 않았겠지만... “미영 언니, 난 저 커플 팬이야.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 그러니까 제발 내 최애 커플 깨지지 않게 도와줘!” 한지원은 진지한 얼굴로 이유를 털어놓았다. 강미영은 살짝 멍해지더니 결국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어, 앞으로 네 최애 커플 잘 지켜주도록 할게.” 한지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밝게 웃었다. “정말 고마워! 덕분에 내 최애 커플이 마음 편히 연애할 수 있게 됐어!” 강미영은 눈가를 약간 찡그리며 물었다. “근데 언제부터 걔네 둘의 팬이 된 거야? 그리고 지금 걔네 둘 관계 꽤 안정적이던데 내가 굳이 뭐 하러 그걸 망치겠어?” 한지원은 고개를 저으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영 언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이런 카메라 밖에서의 달달한 순간들이지.” 강미영은 순간 뭔가를 깨달은 듯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혹시 영감이라도 떠오른 거야?” 한지원은 멍하니 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의 작은 호의 하나가 한 명의 유명 만화가를 탄생시킬 수도 있어!” 강
그는 단지 이런 행동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강미영에게 그를 좀 더 이해할 기회를 주고 소지석에게는 그가 혼자서만 밀어붙이지 않도록 눈에 띄게 하려 했다. 그러나 이 행동을 알아본 사람들도 있지만 일부 팬들은 그를 오해하거나 비판하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서 서진태는 너무 경계가 없지 않나요? 경쟁하고 싶다 해도 이렇게까지 급하게 해야 하나요? 왜 꼭 같이 앉아야만 하는 거죠?] [맞아요! 강미영 언니는 분명히 불편해 보였고 바로 피해서 조수석에 앉았잖아요!] [좋아한다고 해도 좀 경계를 두고 해야죠.] [근데 소지석 팬들 너무 이중잣대 아니에요? 오빠가 같이 앉고 싶으면 직설적으로 다가가도 ‘멋지다, 드디어 마음을 표현했다!’고 하는데 서진태가 다가가면 ‘경계가 없다’고 비판하잖아요?] [맞아요. 서진태는 사실 강미영 언니와 앉고 싶은 것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거죠.] 댓글창은 점점 떠들썩해졌다. 신주리와 육경서의 강미영에 대한 이해도는 완벽했다. 감정상에서 경쟁이 시작되면 그녀는 주저 없이 피할 것이다. 강미영은 감정을 물건처럼 경쟁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성격의 프로그램에서는 남성들끼리의 경쟁이나 여성들끼리의 경쟁이 감정을 더 순수하지 않게 만들 수 있고 로미오와 줄리엣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런 외적인 압박이 감정을 더 강화시키는 효과가 생기게 된다. 사실 그들이 정말 사랑하는 건 아닐 수도 있다. 단지 지는 걸 참지 못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와 고정남의 관계도 그랬다. 주위에서 반대할수록 더 진지하게 여겨졌던 그 감정이었지만 결국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엉망이 된 감정이었음을 깨달았다. “네가 졌으니까 내 선물 잊지 말고 사 와.” 신주리는 자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육경서는 그 결과를 보며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돌아서서 그녀에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이번엔 네가 이겼어.” 신주리는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이번? 그럼 다음에도 나랑 내기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