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말할 필요도 없이 모두 릴리가 무슨 일을 말하는 건지 알고 있다.원래는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다.릴리의 계정을 받아서 삭제해야 될 것들을 삭제하고 릴리의 대외 이미지를 보호하면 됐다. 그런 다음 공식적으로 해명하면 여론몰이도 쉽게 피할 수 있었다.하지만 그들은 가장 어리석은 방법을 선택했다. 바로 릴리의 모든 계정 내용을 삭제해 버린 것이다.이 행동은 릴리를 완전히 화나게 했다.그래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그들의 잘못이지만 주주들은 릴리를 못마땅하게 여기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릴리를 비판했다.“계정을 전부 삭제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 결국 네가 철이 없어서...”“닥쳐요! 제가 당신한테 물었나요?”릴리는 매서운 눈빛으로 그 늙은 이사를 힐끗 쳐다보았다.그 이사는 릴리의 눈빛에 순간 겁을 먹고는 바로 얼굴을 찡그렸다. “너, 너 건방지게 굴지 말아라! 계집애 주제에 자기가 뭐라도 된 줄 알고. 이제는 말도 못 하게 하는 거냐?”“그러니까 말이야. 너무 버릇이 없어. 예의범절은 배우지를 못했나?”“그룹 내에서는 몰라도 대중 앞에서까지 망언을 하다니. 창피해서 원.”“...”늙은 이사들은 또다시 나이로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릴리는 좌석에 기대어 앉아 차가운 눈빛으로 그들을 지켜보았다.그들은 불만과 질책이 늘어놓으면 릴리의 기를 좀 눌러놓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릴리가 이런 태도로 그들을 지켜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알 수 없는 릴리의 눈빛에 그들은 당황했고 불만의 목소리도 점점 작아졌다...“얘기가 끝났나요?”릴리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들을 훑어보았다. 모두들 침묵하며 릴리가 무슨 말을 할 지 기다렸다.“아버지, 아버지가 이 자리에 계실 때 다들 이렇게 건방지게 굴었나요?”릴리는 고정남에게 물었다. “아니면 저는 이 자리에 앉아도 직원들의 잘못을 물을 자격이 없는 건가요? 당신들은 도대체 회장이 필요한 거예요? 아니면 가정교육이 잘 된 꼭두각시가 필요한 거예요? 만약 답이 후자라면,
홍보팀 본부장은 자신이 호명된 것을 듣고 얼른 사실대로 말했다.“하지만 저희는 이 계정을 없애라고 지시받았습니다.”“그래요?”“원래는 공지를 올리고 난 다음 사장님의 이미지에 안 좋은 내용들을 하나씩 삭제하려고 했는데...”여기까지 말하고 그는 난처한 듯 옆에 있던 양율을 쳐다보았다.릴리가 이 얘기를 꺼냈을 때 양율은 이미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머리를 다 굴린 상태였다. 예상했던 상황이라 양율은 무척이나 여유로웠다.양율이 이어서 말했다. “이번 일은 제 불찰입니다. 계정을 저희에게 맡기셔서 이 계정은 포기하신 줄 알았습니다. 게다가 올리신 내용들은...”양율은 얼굴에는 얕보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말투는 공손했다.“남길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 삭제하라고 지시했습니다.”“...”‘어쩌면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는지.’릴리는 급히 결론을 내리지 않고 고정남을 돌아보았다.고정남은 이런 장면에 익숙하다는 듯 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게다가 자기의 옛 비서의 행동에도 꽤 만족하는 모양이었다...“사실상 삭제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입니다. 사장님의 계정 내용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 후 바로 공지를 올리면 이 계확은 매우 성공적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방안은 그대로 중단됐습니다.”그는 원망스럽다는 말투로 해명했다.릴리가 아무것도 모르고 소란을 피우는 바람에 계획에 실패한 것이다.이사들이 릴리를 철이 없다며 나무라고 함부로 끼어들어 지금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그들은 한바탕 호통을 맞은 뒤 몇 분간 잠잠해 있다가 지금 같은 상황을 보고 다시 입을 열었다.그들은 또다시 릴리를 비판했다. “우리도 당신이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에 습관이 됐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전처럼 제멋대로 행동할 수는 없습니다!”“당신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고성그룹의 이미지를 대표합니다!”“당신이 충동적이고 철이 없어서 지금과 같은 결과를 초래한겁니다.”“...”릴리는 시선을 돌려 가장 가까이 앉아 있는 충동적이고 철이 없다고
양율은 안색이 유난히 나빠졌다.그는 옆에 있던 고정남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리고 고정남이 무표정한 얼굴로 도와주려는 기색이 전혀 없다는 것을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전에 고정남은 릴리의 의견은 상관없이 그가 독단적으로 결정해도 된다고 했었다.그는 릴리의 말을 부인할 절대적인 권리가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끝까지 그는 양율을 도와줄 기색이 눈곱만치도 없어 보였다. 양율은 고정남이 당최 이해가 안 갔다! 몇 초 후 양율은 마음을 가다듬고 변명하려고 했다.“이번 일은...”“됐습니다. 실수를 저질렀으면 사과하면 될 것을 계속 변명만 하고 계시네요. 저는 당신이 아버지 곁에 오래 계셨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번 더 기회를 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끝까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시네요!”릴리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이런 사람은 저도 더 이상 쓸 수 없습니다. 재무팀에 가서 월급을 정산하고 이만 나가세요.”양율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뭐라고요?”“왜요? 이제는 사람 말도 못 알아듣습니까?”양율의 놀란 얼굴을 릴리는 차가운 눈빛으로 훑어보았다.“저를 해고하는 겁니까?”“역시 나이가 들어서 반응력도 많이 느려지셨네요. 저도 억지를 부리는 사람은 아닙니다. 당신이 고성그룹을 위해 이렇게 오랫동안 일한 노고를 생각해서 이번 업무 소홀로 인한 피해는 당분간 추궁하지 않겠습니다.”“...”양율은 입을 벌리고 한참 동안 완전한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그는 릴리가 이런 말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해고?고성그룹에서 양율의 직책은 매우 중요하다.고정남이 그에게 불만이 있어도 기껏해야 훈계 몇 마디일 뿐 감히 해고라는 말은 하지 못한다.어쨌든 회장 비서라는 자리는 보통 직원이 대신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특히 지금의 고성그룹 같은 상황에서는 더더욱 말이다...과연 고정남은 이 말을 듣고 더 이상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이게 무슨 소리냐! 사장 비서 자리가 네가 함부로 장난칠 수 있는 자리 같으냐?”
그녀는 직접 찾아온 손님에게 미움을 살만큼 대담하지 않다.고위층 사람이 끊임없이 교체되고 회사 내부가 변화무쌍한 상황에 그들은 더욱 본분을 다해야 한다. 어느 누구의 미움을 사도 유리할 게 없다.“마침 오셨네요.”릴리는 일어서서 켈슨에게 말했다.“가요. 새 직장 동료를 소개시켜 드릴게요.”켈슨은 눈썹을 찡긋했다. “좋아요. 제 영광입니다.”“별일 없으면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고 인터넷에 떠도는 글들은 나중에 처리하겠습니다. 홍보팀은 잠시 후 회의 때 새 동료 한 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두 사람이 회의실을 나설 때까지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방금 한 말은 무슨 뜻이지?’‘LK그룹의 임 비서?’‘LK그룹의 어느 비서가 고위층 회의 중에 소식을 전할 만큼 지위가 높지?’그리고 방금 대화를 기억하던 중 그들의 머릿속에는 약속이나 한 듯 한 사람이 떠올랐다...“육시준이 개인 비서를 보낸 건 아니겠죠?”“미쳤어? 가뜩이나 시끄러운 고성그룹에 자기 비서를 보낸다고?”“차라리 그룹 이름도 LK그룹으로 바꾸지 그래!”“그 임 비서의 스펙이라면 이 자리는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이 객관적인 발언에 많은 이사들은 그를 째려보았다.그 사람은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회의실 사람들이 하나둘씩 밖으로 나갔다. 그들은 나가기 전에 양 비서를 보며 말없이 동정 어린 눈빛을 보냈다.사람들이 모두 밖으로 나간 후 고정남은 비로소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당신에게 업무에서 릴리를 주시하라고 했지 이렇게 제멋대로 결정하라고 하지는 않았소. 릴리의 물건을 건드리라고 하지도 않았고!”양율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 일도 공적인 일입니다! 저는...”“당신이 릴리에게 불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하지만 이번에는 당신이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한 것이오.”“...”양율은 대꾸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매우 불편했다.그는 회장의 뜻에 따라 일을 처리했고 회장이 찬성하고 지지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사장실.릴리는 임강준을 소파에 앉히고 직접 커피 두 잔을 따라왔다. 확실히 VIP 대접이다.곧 두 사람은 마주 앉아서 서로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릴리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당신이 올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임강준도 공손한 말투로 감탄했다. “제가 올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어제 오후만 해도 그는 중요한 프로젝트를 처리하고 오늘의 출장을 위해 비행기표를 예약했었다.그런데 저녁에 육시준에게 걸려 온 전화 한 통으로 그는 잘렸다.이 아둔한 상사.여자에게 현혹당한 것이 틀림없다...“언니가 든든한 비서 한 분 찾아주겠다고 했었어요! 당신을 보자마자 저는 생각했죠. 우리 언니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구나!”릴리는 계속해서 자신의 숭배를 표시했다.임강준은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모님은 확실히 애들은 속이지 않으시죠.”그녀는 그저 불쌍한 직원들을 속일 뿐이다.‘정말 너무해요.’“저도 언니와 동갑이니 표현에 신경을 써주세요.”릴리는 1초 만에 진지해졌다.임강준 역시 부당함을 깨닫고 말을 바꾸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나이만 믿고 잘난 척을 했네요.”릴리는 더욱 만족스럽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이것이야말로 일등 비서다운 모습이지.’1초 만에 자기의 위치를 파악하는 모습. 릴리가 방금 마주한 사람들이야말로 정말로 꼰대 짓을 하는 사람들이다.릴리는 임강준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그다지 반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받아들인 이상 전문적인 태도를 보이려는 것이다.그래서 릴리는 아낌없이 그에게 위로 겸 칭찬을 퍼부었다. “저에게로 온 것이 어려운 결정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아닙니다, 둘째 아가씨.”“네? 상관없으신가요?”“음... 솔직히 조금 있긴 한데 참을 수 있습니다.”“...”릴리는 그의 이런 모습이 웃겼다.예전에는 많이 접하지 못해서 몰랐는데 꽤 재밌는 사람이다. “안심하세요! 이 기간만 버티면 제가 새로운 사람을 키워서 비서 자리를 맡게 할게요. 그럼 당신은 그룹으로 돌아갈 수
“...”사실 계정 내용을 되찾을 생각을 릴리도 했었다.릴리도 알아본 적이 있다.하지만 그 늙은이들에게 오랫동안 충동적이고 그릇이 작다고 가스라이팅을 당해서 사실은 조금 주눅이 들었다.그래서 임강준의 앞에서는 자신이 세련되고 이성적이며 객관적으로 보이려고 노력했다.모두 중요한 일들에만 초점을 두었고 계정 내용과 같은 작은 일은 조금도 언급하지 않았다.하지만 그가 자신의 ‘손실’을 이렇게 중요하게 여길 줄은 몰랐다. 그리고 체면도 중요하다고 정중히 말해주었다.임강준은 릴리가 한참 동안 말이 없자 릴리를 쳐다보며 물었다. “왜요? 원래 의도도 이 계정을 삭제하는 것이었나요?”“물론 아니죠!”“임 비서님, 예전에는 제가 실례를 범했습니다. 당신이 이렇게 멋진 사람인지 몰라 뵀다니!”임강준은 안색이 굳어졌다.“...”그는 이상한 표정으로 릴리를 바라보았다. 릴리의 사생활에 대한 숱한 소문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둘째 아가씨, 저는 사실 개인적으로 사내 연애를 매우 반대합니다. 그리고 저 스스로도 인정합니다. 잘생김으로는 신 팀장의 절반도 따라가지 못합니다. 다시 한번 생각하시죠.”“???”릴리는 그를 반쯤 노려보다가 갑자기 픽 웃었다.예전에는 정말 몰랐다. 그가 이렇게 귀여운 모습이 있다는 것을.겉으로 보기에는 누가 봐도 직장 엘리트다.말 한마디에 수천만의 계약이 오갈 것 같은 사람이다.하지만 몇 마디만 더 해보면 업무 외의 생활에서는 진부해 죽을 지경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첫인상과 너무 다르다...릴리는 점점 더 크게 웃었다.임강준의 천하태평이던 표정에도 틈이 벌어져 잠시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보였다.‘무서워!’‘둘째 아가씨는 도대체 무슨 뜻인 거지?’‘정말 나를 좋아한다면 나는 죽을 목숨이겠지?’‘사모님한테 죽거나 신하균한테 죽거나!’그 순간, 임강준은 그날 밤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강유리가 술에 취해 육시준이 보는 앞에서 그에게 5,000만 원을 주며 자기를 방까지 안아다 달라고 했었다.‘이
회의실 안.홍보팀 직원 십여 명이 단정하게 자리에 앉아 있다.양율의 해고 소식은 순식간에 그룹 내에 퍼졌다. 모두들 자신도 이 일에 참여했기에 간담이 서늘했다.문이 열리자 몇 명은 자신도 모르게 더욱 똑바로 앉았다.그런데 들어온 사람을 보고 그들은 의문이 가득했다.“???”여한영은 강유리의 부탁을 받고 왔다. 그는 릴리가 강유리의 여동생이고 둘이 사이가 좋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고성그룹에 들어오면서 왠지 친딸의 뒤를 받쳐주는 느낌을 받았다.그는 연세가 있어 겸손할 것도 없이 당당하게 걸어 들어가 앞자리에 앉았다.다른 한쪽의 홍보팀 본부장과 얼굴을 맞대고 앉아 있는 모습이 기세가 장난이 아니었다.홍보팀 본부장은 이 상황을 보고 오싹해났고 더욱 긴장했다...미묘한 침묵이 흐른 뒤 문이 다시 열렸다.릴리는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천천히 걸어 들어왔고 임강준은 그녀의 옆에 반 발짝 뒤처져 따라 들어왔다.“여 아저씨, 오셨습니까?”릴리는 여한영을 보고 활짝 웃었다.여한영은 의아한 눈빛으로 임강준을 쳐다보았지만 금세 침착함을 되찾았다.“그래. 내가 늦지는 않았겠지?”회의 테이블 상단에는 한 자리만 남았다.임강준은 갑자기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이번에는 그들이 일부러 그를 난처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임강준의 자리를 남겨 놓았으나 그 자리를 여한영이 차지했을 뿐이다...“의자를 하나 더 가져오세요.”임강준은 고개를 돌려 침착하게 비서에게 분부했다.방금 회의를 통지했던 비서는 이 상황을 보고 멍해 있다가 그의 지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의자가 배치된 후 임강준은 릴리의 옆에 앉았다. 홍보팀 본부장은 어쩔 수 없이 한 자리 뒤로 옮겨야 했다.그래서 임강준과 여한영이 대등한 자리에 앉고 홍보팀 사람들은 그대로 뒤로 밀려나는 형국이 되었다.“다음 회의 때는 인원수를 잘 파악해서 이런 실수는 없도록 하세요.”임강준은 덤덤한 목소리로 상사의 포스를 풍기며 당부했다.어린 비서는 바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회의
여한영은 줄곧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그들의 방안이 좋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의 입장 때문이다.임강준의 말과 같이 그들은 릴리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그룹 입장만 고려했다.고성그룹에 오래 있은 사람이었다면 그 역시 그룹 이익을 우선시하는 이런 방안을 선호했을 것이다. 과거의 그는 확실히 그런 사람이었다.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금의 그는 뚜렷한 친소 관계 편향을 가지고 있다.심지어 이런 방안을 들었을 때 그는 은근히 화까지 났다. 그들 때문에 화가 났는지, 아니면 과거의 자신 때문에 화가 났는지는 모르지만...“간단한 일을 굳이 그렇게 복잡하게 만들 필요가 있나요?”그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턱을 살짝 쳐들고 도도하게 입을 열었다.“루머를 굳이 해명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가 많아요. 넘어진 김에 쉬어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에요.”“자세히 말씀해 보십시오.”“지금 강 이사님의 지지율이 훨씬 높아요. 고성그룹보다 강 이사님을 지지하는 사람이 더 많다는...”“하지만 강 이사님은 고성그룹 사람이기 때문에 양자가 반대편에 서면 안 되죠.”홍보 담당자가 참지 못하고 귀띔했다.여한영은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양자가 반대편에 서면 안 되니 반드시 바뀌어야 합니다. 하지만 왜 꼭 강 이사님이 고성그룹에 맞춰야 하죠? 고성그룹이 강 이사님에게 맞추면 안 되나요?”“다 같은 것이 아닌가요? 꼭 그렇게 분명하게 나눠야 하나요?”홍보 담당자는 여전히 고집을 부렸다.“같은 것이긴 하지만 현재 상황은 고성그룹보다 강 이사님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더 높다는 거예요. 그런데도 기어코 그룹을 위해 머리를 숙이라고 하는데, 이건 대중들이 보길 원하는 그림이 아니에요.”“이, 이건 궤변이에요! 고성그룹은 당신들 연예계와 달라요. 팬들의 환심을 사고 관객에게 알랑거려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요.”홍보 담당자의 당당한 말투에는 경멸도 섞여 있었다.그는 여한영의 명성을 익히 들었고 방금 만나자마자 알아봤다.하지만 그는 연예 홍보를 우습게 봤다. 게다가 작은
신주리는 고민하다가 말했다.“난 최근에 일이 많지 않아 괜찮지만 다음 달에 곧 새로운 촬영을 시작할 거야.”육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다음 달에 돌아가면 촬영 일정을 맞출 수 있어요.”육경서는 그들이 두어 마디 말로 일정안배를 끝내가 다급하게 입장을 밝혔다.“나도 있어! 주리가 돌아가지 않으면 나도 안 돌아갈래!”신주리는 흘겨보며 물었다.“넌 바쁘지 않아?”“마침 이 영화가 촬영을 마감할 예정이야. 기타 활동은 중요한 건 뒤로 미루고 중요하지 않은 건 매니저더러 거절하게 하면 돼.”육경서는 미처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말했다.강유리는 반대하지 않고 귀띔했다.“강덕준 감독이 널 죽일 수도 있어.”육경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괜찮아. 한 달뿐이잖아. 설마 날 따라 여기까지 오겠어?”강덕준이 그를 죽일지는 둘째치고, 어쨌든 지금 바론 공작은 그를 죽여버리고 싶었다.그는 그저 예의상 딸아이의 친구들을 초대해서 놀게 했을 뿐인데 결국 딸아이가 다음 달 귀국하는 일정을 안배하게 되다니?병원에서 육시준이 비아냥거리던 말을 그는 실행할 계획이었다. 단계마다 다른 이유로 딸을 만류하고 싶었고 시름 놓고 이곳에서 편히 안태하게 하고 싶었다.그러나 사위는...만약 자기 일을 다 처리했다면 남아있어도 괜찮았다. 부양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그러나 지금 덤으로 두 사람이 더 생겼고 또 이 두 사람은 시간 맞춰 돌아가야 했다. 돌아가지 않으면 재촉당할 것이 뻔하다.“두 분이 바쁘면 굳이 남지 않아도 돼. 유리는 지금 손님 접대하는 게 불편하거든.”그는 정색해서 다시 말했다.그러자 여러 가지 눈빛이 삽시에 바론 공작을 향했다......신주리와 강유리는 제작팀과 반나절만 휴가를 냈기 때문에 오후에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오전 시간만으로 두 친구가 얘기하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해 강유리는 직접 감독에게 전화해 하루 연장했다.점심시간.신주리는 육시준의 자리에 앉아 강유리의 옆에 누워 계속 절친끼리 이야기를 했다.강유리는 이번에 단도직입적
저쪽에서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상대방도 자신만큼 놀란 모습을 상상하며 육경서는 다음 이야기가 기대되었다.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송미연은 놀랐지만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유리 찾으러 갔어? 프로그램을 녹화한다며 왜 그들을 찾으러 갔어? 거기는 시간이 아직 이르지 않아? 이맘때면 유리는 잠을 잘 자지도 못했을 건데...”송미연은 육경서가 철이 없이 강유리가 잘 쉬지 못하게 방해한다고 한바탕 야단을 쳤다.그러나 그녀의 말은 한 가지 중요한 소식을 알렸다.“진작 알고 있었어요?”“물론이지!”송미연은 자랑스럽게 말했다.“며느리가 임신했는데 이렇게 큰 소식을 어떻게 바로 나에게 알려주지 않을 수 있겠어? 경고하는데 너무 떠들지 마. 네 형수님을 화나게 하면 안 돼! 그냥 녹화만 잘하면 되는 거 아니야? 주리가 널 용서했어? 왜 돌아다니며 다른 사람의 가십거리를 알아내려고 해! 이번에 돌아와서 주리의 용서를 받지 못한다면 넌 아예 돌아오지도 마!”...화제가 자신을 욕하는 방향으로 변해버리자 육경서의 열정은 순식간에 식어버렸고 목소리도 누그러들어 어쩔 수 없이 말했다.“알았어요. 알았어요. 제가 원한 줄 아세요? 이것도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잖아요...”“뭐가 어쩔 수 없다는 거야? 모두 네가 자초한 거잖아! 쌤통이야!”“...”“섬에서의 상황이 어떤지 모르니 넌 주리를 잘 돌봐야 해. 난 실시간으로 라이브 방송을 살펴보고 있을 테니 넌 주리 괴롭히지 마.”송미연이 또 당부했다.육경서는 머뭇거리다가 정색해서 대답했다.“알았어요. 걱정하지 마세요.”송미연은 또 몇 마디 더 당부한 후 전화를 끊었다.육경서는 어두워진 휴대폰 화면을 보며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잘됐어. 아빠 엄마가 다 주리를 좋아하니 나중에 언제든지 주리는 억울함 당하는 일이 없을 거야. 적어도 내가 있는 한 억울함 당하지 않을 거야...”...점심은 빌라의 셰프가 만든 영양식이다. 맛은 좋지만 오래 먹으면 질릴 수 있어 강유리는 이 음식을 보며 저도 모르게 한숨
그러나 앉은 자리가 아직 따뜻해지기도 전에 육경서는 흥분된 듯 바로 일어나 소리쳤다. “뭐? 임신했다고?” 바론 공작은 짜증 섞인 눈길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목소리 좀 낮춰. 뭘 그렇게 놀라!” 그는 지금까지는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사실 소식을 들었을 땐 당황하고 흥분했던 걸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육경서는 입을 막으며 어색하게 다시 앉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반짝이며 감출 수 없는 흥분이 드러났다. ‘나 이제 삼촌 된다! 삼촌 된다!’ “의사가 말하기를 첫 3개월은 불안정하니까 특히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도 이 소식을 공개하지 말고 태아가 안정될 때까지 기다리자고 하셨다.” 바론 공작은 드물게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 그는 그 말을 끝내며 신주리를 한번 훑어봤다. “그래서 나는 유리를 위해 사람들을 안배해 가까이서 돌보게 한 거다.” 그의 시선을 느낀 신주리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공작을 한 번 보고 다시 눈을 내리깔며 강유리의 아랫배를 바라봤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마치 한번 만져보고 싶은 듯했지만 참았다. 그녀의 눈은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고 육경서와 같이 흥분과 기쁨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녀는 강유리의 아랫배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서 지금 이 안에 작은 생명이 자라고 있는 거야?” “맞아.” 강유리가 그녀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신주리는 표정은 진지했지만 눈 속에 담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만져봐도 돼?” 육경서도 순간 정신을 차리며 손을 내밀었다. “나도...” “안 돼!” “안 돼!” 두 명의 목소리가 동시에 차갑게 외쳤다. 그들의 무리한 요구를 바로 거절했다. 강유리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두 남자를 쳐다봤다. 그녀는 그들에게 체면을 차리지 않았고 대신 신주리에게만 속삭였다. “조금 있다가 방에 들어가면 만져도 돼.” 육시준과 바론 공작은 동시에 얼어붙었다. ‘우리가 안 들릴 거라고 생각하나?’ 육경서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강유리를
육경서는 얼굴에 기쁨이 가득한 채 입을 열려던 순간 정원에서 누군가가 다가왔다. 그 사람은 유창한 한국어로 두 사람에게 따뜻하게 인사했다. “이쪽이 둘째 도련님이랑 신주리 씨 맞으시죠? 강유리 아가씨께서 이미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 부탁드려요.” 신주리가 부드럽고 예의 있게 대답했다. 육경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 사람, 왜 이렇게 때맞춰 나타나는 거지? 다른 때는 왜 안 오고, 바로 이때 오냐고!’ “잠깐만요. 저희 형수 말고 일단 먼저 빌라를 둘러보고 싶어요!” 그가 급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안내하는 집사를 붙잡았다. 집사는 그의 눈을 한 번 쳐다본 뒤 다소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멈췄다. 신주리는 미소를 띤 채 침착하게 말했다. “미안해요. 낯을 가려서 그래요.” 육경서는 혼란스러웠다. ‘이게 무슨 말이야? 내가 낯을 가린다고? 왜 그렇게 갑자기...’ 집사는 이해한 듯 웃으며 공작님도 그들의 방문을 매우 기쁘게 생각해 오늘 특별히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전했다. 육경서는 그 한마디도 제대로 듣지 않았고 눈앞의 신주리를 원망스러운 눈길로 바라봤다. ‘주리는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이야? 너무 쉽게 대답해서 다시 부정하려는 건가?’ 그들이 정원으로 들어섰고 이곳은 여전히 고요하고 우아한 분위기였다. 뜨거운 태양 아래 한쪽에서 차와 다과가 준비된 작은 테이블이 보였다. 강유리는 햇볕을 가린 파라솔 아래에 앉아 있었고 그 앞에는 육시준이 전화를 끊고 있었다. 바론 공작이 불만을 표하며 입을 열었다. “하루 종일 그 전화기 들고 있으면 안 돼! 그렇게 바빠? 전자기기 방사선이 얼마나 해로운지 알지? 의사 선생님이 말했잖아. 첫 세 달은 불안정하다고, 푹 쉬어야 한다고!” 육시준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지난달에 돌아갔으면 이미 처리했을 일인데요.” 바론 공작은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스쳤다. “일이라는 게 끝날 수 있나? 돌아가면 내 딸과 시간을 제대로 보낼 수 있을까 몰라!” 육시준이 말하려던 순간 강유
감독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강하게 반박하지도 못하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규정에 따르면 녹화 중에는 제작진 팀을 이탈하면 안 됩니다.” 역시나 신주리는 가볍게 되물었다. “녹화 시작할 때 그런 규정은 없었잖아요? 갑자기 추가된 건가요?” “그건 아니지만 지금 상황이...” “그럼 우리를 일부러 견제하려는 건가요? 그럼 그냥 프로그램 안 하면 되죠?” 감독은 말문이 막혔다. 사실 첫 번째 시즌에서 육경서가 사고를 당한 이후로 그는 이미 이 두 사람에게 꼼짝 못 하고 있었다. 조건을 협상하든 규칙을 정하든 이 둘이 하겠다고 하면 다행이고 안 하겠다고 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될 판이었다. 결국 이를 악물고 그는 포기했다. “알겠어요, 알겠어! 두 분 다 제가 졌습니다! 하지만 어디 가든 꼭 행선지를 알려주시고 제작진 팀에서 두 분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걱정 마세요. 너무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점심 먹고 바로 돌아올게요!” 신주리가 대범하게 말했다. ‘점심도 먹고 온다고?’ 하지만 그가 불만을 표현하기도 전에 두 사람은 이미 유유히 그의 앞을 지나쳐 나가버렸다. 호텔 문을 나서자마자 감독은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너머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강 대표님, 경서 씨랑 주리 씨가 지금 강 대표님을 만나러 갑니다! 그런데 프로그램 효과를 위해서 행선지에 대한 건 절대 발설하시면 안 됩니다!” 감독이 진지하게 말했다. 강유리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만약 제가 발설하면요?” 감독은 순간 당황했다. 그는 이런 대답을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이건 우리 회사의 프로그램 아니었나? 이렇게 마음대로 행동해도 되는 거야? 시청률이 안 오르면 강 대표님에게도 손해 아닌가?’ 감독은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어떻게든 이 대형 회사를 설득해야겠다고 결심했지만 강유리는 그의 말을 끊으며 다시 말했다. “농담이에요. 발설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마세요.” 감독은 긴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
비행기에 오를 때 각자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고 내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땐 이미 다음 날 새벽이었다. 제작진 팀은 미리 준비한 차를 타고 그들을 예약된 호텔로 보냈다. 해변가에 위치한 경치가 아름다운 5성급 호텔이었다. 모두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번에 제작진 팀 정말 큰돈 쓴 거네! 이게 진짜 여행 같아!” “그렇지. 갑작스러운 느낌도 있지만 일정은 꽤 합리적이네!” “응, 또 감사한 건 처음에 우리 주리랑 경서에게 그 사건이 터진 후로 대우가 점점 더 좋아졌다는 거야. 그들은 정말 목숨을 걸고 얻은 거라니까!” 모두가 웃으며 체크인 절차를 마쳤다. 그때 감독 팀에서 메시지가 왔다. “오늘 밤은 여기서 쉬고 내일은 섬으로 갑니다.” 모두들 당황했다. ‘그래서 목적지는 여기가 아닌가?’ “목적지는 반대편에 있는 작은 관광 섬입니다. 규모는 작지만 최근 몇 년 동안 관광업이 급성장했습니다. 얼마 전 이 섬의 소유자가 바뀌어서 다시 한번 큰 화제를 일으켰죠.” 감독이 그렇게 말하자 신주리는 점점 더 익숙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게 바론 공작이 유리에게 선물한 섬이죠?”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육경서는 감탄하며 물었다. “그럼 어떻게 우리 형수를 설득했어요?” 감독 팀은 미소를 지으며 답하지 않았다. 실시간 채팅창에서는 감탄이 이어졌다. [유리 언니가 이번 프로그램을 위해 진짜 대규모로 투자한 거네!] [하하하, 유리 언니가 투자한 건 아니야. 그냥 완전 부모님에게 의지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그 덕분에 도련님과 미래의 동서가 혜택을 보는 거고!” “나도 섬 주인 언니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번에 유리 언니 우정 출연할지 궁금하다!” 아침 식사 후 모두 방으로 돌아가 시차를 맞추기 위해 잠을 청했다. 카메라는 잠시 쉬어갔다. 신주리는 비행기에서 잠깐 눈을 붙였기에 이제는 전혀 졸리지 않았다. 그녀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호텔 방을 몰래 빠져나
심지어 원피스까지 캐리어 하나에 다 준비해 놨다. “안 믿을지 몰라도 내가 쇼핑 리스트까지 작성했어. 엄마한테도 참고를 부탁했거든! 원피스는 엄마가 골랐어. 안심해, 눈썰미는 진짜 좋아!” 말을 하면서 그는 정말로 쇼핑 리스트를 꺼내서 신주리에게 보여줬다. 신주리는 그 리스트를 보지 않아도 이미 믿고 있었다. 심지어 조금 놀랐다. “너 그럼 네 짐은 어쩌고? 얼마나 챙겨왔어?” “짐 하나야. 나중에 필요하면 제작진 팀에 부탁할 거야!” 육경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말했다. 신주리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너무 오랫동안 육경서를 바라보고 있었던 탓인지 휴대폰을 들여다보지 않은 채 그를 쳐다보던 신주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육경서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 “왜?” 신주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려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많아?” 육경서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많은 건 아니야. Y 국에 있는 우리 회사 지사에서 몇 가지 더 준비해 줬거든...” 그가 말을 하다 갑자기 멈칫했다. 불필요한 말을 했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신주리는 그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녀의 머릿속에 갑자기 대담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번 목적지는 네가 제작진 팀에 요청한 거 아니야?” “무슨 말이야? 내가 그런 사람인 줄 알아?” 육경서는 당황한 듯 대답했다. “네가 그런 사람 아닌가?” 육경서는 잠시 생각에 잠긴 후 고백했다. “맞아, 그런 사람일 수도 있어.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아니야! 사실 내가 쓴 목적지는 원래 해변이었어. 이런 건 결국 다 준비해야 할 것들이잖아.” 신주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이제는 아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서진태와 소지석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진태는 진지하게 소지석에게 도씨 가문의 그 양성 계획에 대해 물어보았다. 이 계획은 너무나도 비상식적이어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었다. 완전히 그들
[하하하, 이게 무슨 이상한 조합이야? 어쩐지 묘하게 어울리기도 하고 또 웃기기도 하네!] [처음부터 차 안에서 자리싸움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어색하지는 않았겠지.] [우리 지원 언니 한마디로 모든 흐름이 뒤집혔어!] [강미영은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우리 지석이를 일부러 피하는 거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소지석 팬들 너무 이기적이지 마! 누구든 미영 언니에게 다가갈 수 있고 미영 언니는 모두를 거절할 권리가 있어!] 좌석이 정리되고 비행기가 이륙을 준비하자 라이브 방송은 일시적으로 종료되었다. 이런 24시간 라이브 촬영 프로그램에서도 이렇게 잠깐 동안만은 각자가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강미영은 라이브 방송이 종료된 뒤 의아한 표정으로 한지원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왜 한지원이 굳이 자신과 함께 앉으려고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 누가 자신에게 같이 앉자고 했어도 마다하지는 않았겠지만... “미영 언니, 난 저 커플 팬이야.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 그러니까 제발 내 최애 커플 깨지지 않게 도와줘!” 한지원은 진지한 얼굴로 이유를 털어놓았다. 강미영은 살짝 멍해지더니 결국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어, 앞으로 네 최애 커플 잘 지켜주도록 할게.” 한지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밝게 웃었다. “정말 고마워! 덕분에 내 최애 커플이 마음 편히 연애할 수 있게 됐어!” 강미영은 눈가를 약간 찡그리며 물었다. “근데 언제부터 걔네 둘의 팬이 된 거야? 그리고 지금 걔네 둘 관계 꽤 안정적이던데 내가 굳이 뭐 하러 그걸 망치겠어?” 한지원은 고개를 저으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영 언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이런 카메라 밖에서의 달달한 순간들이지.” 강미영은 순간 뭔가를 깨달은 듯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혹시 영감이라도 떠오른 거야?” 한지원은 멍하니 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의 작은 호의 하나가 한 명의 유명 만화가를 탄생시킬 수도 있어!” 강
그는 단지 이런 행동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강미영에게 그를 좀 더 이해할 기회를 주고 소지석에게는 그가 혼자서만 밀어붙이지 않도록 눈에 띄게 하려 했다. 그러나 이 행동을 알아본 사람들도 있지만 일부 팬들은 그를 오해하거나 비판하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서 서진태는 너무 경계가 없지 않나요? 경쟁하고 싶다 해도 이렇게까지 급하게 해야 하나요? 왜 꼭 같이 앉아야만 하는 거죠?] [맞아요! 강미영 언니는 분명히 불편해 보였고 바로 피해서 조수석에 앉았잖아요!] [좋아한다고 해도 좀 경계를 두고 해야죠.] [근데 소지석 팬들 너무 이중잣대 아니에요? 오빠가 같이 앉고 싶으면 직설적으로 다가가도 ‘멋지다, 드디어 마음을 표현했다!’고 하는데 서진태가 다가가면 ‘경계가 없다’고 비판하잖아요?] [맞아요. 서진태는 사실 강미영 언니와 앉고 싶은 것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거죠.] 댓글창은 점점 떠들썩해졌다. 신주리와 육경서의 강미영에 대한 이해도는 완벽했다. 감정상에서 경쟁이 시작되면 그녀는 주저 없이 피할 것이다. 강미영은 감정을 물건처럼 경쟁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성격의 프로그램에서는 남성들끼리의 경쟁이나 여성들끼리의 경쟁이 감정을 더 순수하지 않게 만들 수 있고 로미오와 줄리엣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런 외적인 압박이 감정을 더 강화시키는 효과가 생기게 된다. 사실 그들이 정말 사랑하는 건 아닐 수도 있다. 단지 지는 걸 참지 못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와 고정남의 관계도 그랬다. 주위에서 반대할수록 더 진지하게 여겨졌던 그 감정이었지만 결국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엉망이 된 감정이었음을 깨달았다. “네가 졌으니까 내 선물 잊지 말고 사 와.” 신주리는 자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육경서는 그 결과를 보며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돌아서서 그녀에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이번엔 네가 이겼어.” 신주리는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이번? 그럼 다음에도 나랑 내기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