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여진의 사건은 이승우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죄책감과 두려움의 그림자를 드리웠다.배여진이 떠났음에도 그는 여전히 부승희 앞에서 조심스러웠고 그녀에게 사과해야 했지만 단 세 글자로는 그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그래서 요즘 그는 오직 일에만 파묻혔다.월말 전에 유럽과의 대형 협력을 성사했고 이제 직접 현지에서 세부 사항을 조율하는 일만 남았다.출국 전날 그는 부승희의 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둘 다 말없이 식사하던 중 부승희가 갑자기 물었다.“혹시 나도 배여진처럼 될까 봐 두려운 거야?”‘컥.’이승우는 반찬을 먹다 사레가 들려 고개를 숙이고 거칠게 기침했다.간신히 숨을 고르고 나서도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미간을 찌푸렸다.“그런 소리 좀 하지 마.”부승희는 태연하게 젓가락을 놓으며 말했다.“그럼 나 대신 퉤퉤퉤 해줄래?”이승우는 침묵했다.한참을 참다가 문득 자신도 모르게 속에서 끓어오르는 충동을 애써 눌렀다.물을 두 모금 마신 뒤 담담하게 말했다.“다음부터 헛소리 금지.”부승희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내일 몇 시 비행기야?”“열 시.”“그럼 오늘 밤에 짐 잘 챙겨.”이승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당부했다.“내일 김 대표 일행이 오는데 사람 많을 거야. 그냥 사무실 건물 옥상에서 연회 열어. 괜히 밖에서 고생하지 말고.”“알았어.”“나 없다고 너무 많이 마시지 마.”“응.”“김 대표 프로젝트는 좀 더 상의하고 결정해. 괜히 그 사람한테 말려들지 말고.” “알았어. 알았어.”...이승우는 마치 잔소리 많은 어머니처럼 한참이나 주의를 주더니 짐을 싸러 집으로 돌아갔다.부승희도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 그를 따라갔다.그가 캐리어에 옷을 넣는 걸 보며 방을 둘러보던 부승희는 거실 탁자 위에 놓인 낡은 지갑을 발견했고 무심코 집어 들며 말했다.“이거 이렇게 낡았는데 아직도 안 버렸어?”그녀가 열어보려 하자 이승우가 재빨리 빼앗았다.“쓰던 게 익숙해서.”부승희는 피식 웃으며 턱을 까딱했다.“완전
부승희는 회사로 돌아와 하루 종일 바쁘게 일한 후 저녁에는 옥상에서 김 대표 일행을 접대했다.현장의 분위기는 아주 좋았고 들어서자마자 마치 회사 창립 기념일 행사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테이블에 놓인 접시에는 ‘승가농목’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처음 회사를 설립할 때 부승희는 멋있고 고급스러운 이름을 짓고 싶었지만 같은 업계 회사들이 하나같이 ‘신희망’이나 ‘대농합’ 같은 이름을 쓰고 있어 결국 업계의 흐름을 따르자는 팀의 의견을 따랐다.‘승가’라는 이름은 ‘가정을 이루고 사업을 일으킨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 소박한 느낌을 주었다.게다가 ‘승가’는 ‘승희’의 이름과 비슷했기에 ‘이승우는 부승희의 농장과 목장을 줄여서 승가농목이라고 하면 좋겠다’고 말했다.그녀도 괜찮다고 생각했고 결국 그 이름으로 결정했다.예상보다 빠르게 1년도 채 되지 않아 사업은 탄탄한 기반을 갖추어 가고 있었고, 아직 수익이 많이 나진 않았지만 앞으로 잘 될 것이라고 부승희는 확신했다. “부 대표님, 김 대표님 일행이 도착하셨습니다.”직원의 말에 부승희는 정신을 차리고 직접 마중 나갔다.이승우는 먼저 화서시로 간 뒤 유럽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몇 시간 전 비행기 탑승 전에 연락을 받았으니 지금쯤이면 이미 이륙했을 터였다.부승희는 시간을 가늠하며 이승우가 착륙하면 안부를 물어야겠다고 생각했다.옥상을 연회장으로 사용하기로 한 것은 애초에 부승희와 이승우가 상의해서 결정한 일이었다.두 사람 모두 넓은 공간을 그대로 두는 것이 아깝다고 여겼고 그래서 처음부터 설계를 함께 고민했다.지난달 완공된 연회장은 기대 이상으로 멋지게 완성되었다.부승희는 김 대표 일행을 데리고 옥상을 둘러보았다.모두가 감탄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그녀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손님들을 자리로 안내했다.식사 자리에서 사람들은 부승희가 젊고 능력 있다며 칭찬을 늘어놓았고 자연스럽게 이승우에 대한 찬사도 빠지지 않았다. 말이 이어지다 보니 두 사람이 참 잘 어울린다는 말까지 나왔다.부승희는 사
부승희는 이승우와의 결말을 여러 번 상상했지만 어떤 결말도 그들이 함께 설계한 연회장에서 손님들을 대접하며 이승우가 황량한 사막에서 생사도 불분명한 상황에 놓인 그림은 아니었다.화가 나고 이승우를 원망하더라도 부승희는 그에게 재난이 닥치기를 바란 적은 없었다.그녀는 비서의 방향을 강하게 응시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비서의 말은 점점 더 선명하게 들렸고 부승희의 사지는 점점 더 굳어지고 마비되었다.“이걸 어떻게 부승희 씨에게 설명하죠?”“이 대표님이...”비서의 말은 떨리는 목소리로 끝났고 결국 말문이 막혔다.부승희는 발걸음을 멈추고 얼굴에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그쪽에서는 뭐라고 해요?”비서는 깜짝 놀라며 눈에 눈물이 고인 채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부승희의 마음은 더욱 무겁게 내려앉았다.“부, 부 대표님...”비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부승희는 갑자기 몸을 돌렸다.그녀는 얼굴과 몸에 이상한 점이 없었고 발걸음도 정상적이었다. 마치 모든 것이 평범한 듯했다.하지만 그녀가 연회장 대문을 열었을 때 실내의 금빛 화려함과 술잔을 주고받는 소리 그리고 뒤쪽 복도의 고요한 죽음 같은 소리가 그녀를 압박했다. 온몸이 고통스러웠다.강한 이명 소리가 귀를 찌르며 부승희는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고 발걸음을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그런데 마치 절벽 끝에 서 있는 것 같았고 발을 헛디뎌 그대로 떨어졌다.“부 대표님.”부승희는 시야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쿵’“부승희.”혼란 속에서 오랫동안 고요함이 이어졌고 그 후 누군가 부드럽게 그녀를 불렀다.부승희는 정신이 흐릿하게 떠올라 눈을 떴다. 시야가 어두워지고 눈앞이 밝아지면서 무엇이든 흐릿하게 보였다.그녀는 침대에 누워 있었고 침대 머리맡에는 큰 인형이 놓여 있었다. 천장에는 직접 그려진 에치젠 료마의 그림이 있었고 창문에 걸린 흰 커튼이 오후의 미풍에 살랑살랑 흔들리며 아름다운 곡선을 그렸다.창가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고 부승희는 그의 얼굴을 명확히
이틀 전 밤, 이승우는 면도하다가 살짝 긁혔고 부승희는 그 모습을 보고 장난스럽게 말했다.“이것도 재난의 한 조각으로 셀 수 있겠네? 이제 다 채운 거야?”“아직 하나 부족해.”“쳇. 점쟁이가 여덟 번이나 경고했잖아. 아마 다음엔 진짜로 손을 댈지도 몰라. 조심해.”“다음에 또 있으면 우리 둘은 아마 함께 있을 수 있을 거야.”“꿈깨.”...두 사람의 농담은 여전히 귓가에 울리지만 마치 전생의 이야기처럼 멀게 느껴졌고 부승희는 침대에 기대어 앉아 마치 오래전에 죽은 사람처럼 보였다.이승우와의 연락이 끊긴 지 30분이 넘었고 그녀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자신이 얼마나 오래 기절했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 휴대폰을 열면 아마 나쁜 소식을 보게 될 것만 같았다.그렇지 않으면 이승우가 이미 전화를 했을 텐데 그는 하지 않았고 휴대폰에는 그의 메시지가 하나도 없었다.이 생각에 부승희는 온몸이 저려오고 심장이 아파 숨을 쉴 수 없었다. 오감은 엉망이었고 눈앞은 흑백과 채색이 번갈아가며 현실과 꿈이 구분되지 않았다.사람은 이렇게 극도로 아플 때 기절하는 것 같다. 비록 깨어나더라도 그 이름을 떠올리면 고통이 반복되고 몸은 이를 견디지 못해 결국 잠으로 몸을 식히는 방법밖에 없다.부승희는 정신이 흐릿해지고 마치 자신이 비어버린 것처럼 텅 빈 껍데기만 남은 느낌이었다.자신이 얼마나 아픈지 설명할 수 없었지만 가슴이 무겁고 숨을 쉴 수 없었으며 뇌 속의 모든 생각은 끝없이 반복되는 기억들로 가득 차 있었다.부승희는 이승우와 함께 걸었던 거리 그가 사준 선물 그녀 앞에서 던졌던 장난스러운 말들 그리고 그가 돼지 농장에서 내기했던 내기를 기억했다.눈을 떠보니 베개가 다 젖어 있었다.그녀는 소리 내어 울 힘조차 없었다. 온몸의 힘은 이승우의 소식을 본 순간 모두 사라져 버렸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몇 번이고 기절했고 누군가가 왔다 갔다 하며 부승희의 상태를 확인했다.매번 깨어날 때마다 부승희는 그것이 꿈일 뿐이라고 믿고 싶었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뜨거운 온기를 느낀 후에도 부승희는 여전히 그것이 현실임을 믿을 수 없었다.그때 밖에서 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며 누군가 소리쳤다.“이 대표님, 무사히 돌아오셨어요.”마치 누군가 부승희를 인간 세상으로 이끌어 당기듯 온몸에 굳어 있던 혈액이 서서히 흐르기 시작하고 심장의 압박이 사라지며 뇌의 사고 능력도 조금씩 되살아났다.입을 열어 말해보려 했지만 그녀는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이승우가 어떻게 이렇게 빨리 돌아왔는지에 대해 이상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이승우...”“부승희 나야. 무서워하지 마. 괜찮아.”이승우는 계속해서 강조했고 그녀의 눈물은 다시 걷잡을 수 없이 주룩주룩 흐르기 시작했다.그제야 반우희는 소리 내어 울음을 터뜨리며 흐느꼈다.부승희는 이승우를 꽉 붙잡고 울면서 입술은 갈라지고 눈은 불타는 듯 아팠다.이승우는 부승희가 아파하는 모습에 마음이 아팠지만 자신의 상태를 돌보지 않고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괜찮아’, ‘내가 있어’ 같은 말을 반복했다.부승희는 중간에 그를 놓았고 여전히 눈빛에는 혼란과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너 어떻게 돌아온 거야?”이승우는 웃으며 대답했다.“비행기 타고 왔어. 네가 걱정할까 봐.”그런데 그녀의 얼굴은 급격히 변했고 입을 벌리며 마치 악성의 짓궂은 말을 하듯 대성통곡했다. 한참을 울면서 그의 어깨를 때렸다.“너 감히 또 비행기를 탔어?”‘미쳤어. 비행기에서 겨우 목숨을 건졌으면서 또 다른 비행기를 타다니.’이승우는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만큼 부승희가 때려도 마음속에서는 기뻤다.“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전화가 왔어. 네가 기절했다길래 너무 걱정돼서 당장 돌아왔지.”부승희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고 그를 욕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의 어깨를 잡고 힘없이 때렸다.그녀는 이제까지 이렇게 많은 눈물을 흘린 적이 없었다.차분해지자 온몸의 세포들이 모두 지치고 피곤한 듯 느껴졌고 특히 얼굴은 여기저기 아프게 울렸다.이승우는 작은 스탠드 등을 켜고
부승희는 당연히 엄우한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들 세대의 인물 중에서, 세운에서 큰 영향을 미치는 인물이자 엄 씨 항공의 총책임자이기도 했다.부승희는 의자에 앉히며 물었다.“너 엄우한 씨와 친분이 있어?”“없어.”“그럼 어떻게...”“난 뻔뻔하거든.”이승우는 입꼬리를 올리고 약간 자랑스럽게 말했다.“엄우한 씨에게 집에 있는 아내가 소식을 듣고 기절해 버렸으니까 빨리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지.”부승희는 말문이 막혔다.“...”평소라면 그녀는 그를 바로 때렸을 텐데 오늘은 힘이 없다.그녀는 그와 마주 앉아 젓가락을 건네며 휴대폰에서는 최신 보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전에 내부에서 유출된 소식에 대해 티선항공은 응답을 거부했지만 이제는 비행기가 안전하게 착륙했다는 보도가 쏟아지고 있었다.그녀가 잠드는 동안 엄 씨 항공과 티선항공은 그 사건에 대해 공식적으로 구출 작업을 하고 있다는 태도를 발표했다.[현재 비행기는 안전하게 몽운시에 착륙했으며 사고 원인은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비행기의 기장인 설지윤 씨가 티선항공에서 최초로 임명된 여성 기장이라는 사실입니다. 최근에는 설지윤 씨가 티선항공 대표인 감우지 씨와 연인 관계라는 소식도 전해졌습니다.]이것은 단순한 찌라시 뉴스에 불과했다.부승희가 그 뉴스를 넘기려던 찰나 이승우가 밥을 두 입 먹고 말했다.“그게 사실이야.”“뭐?”“그 여자 기장이 감우지 씨의 여자친구야.”부승희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이승우는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있다는 게 정말 대단하다.“도대체 비행기가 왜 사고를 낸 거야? 날씨 때문이었나?”“아니야. 누군가가 비행기를 납치했어.”“뭐?!”부승희는 놀라서 식은땀이 났다.이승우는 그녀의 표정이 좋지 않자 일부러 가볍게 부승희의 얼굴을 눌렀다.“괜찮아. 나 지금 이렇게 멀쩡하게 있잖아. 비행기 탑승한 사람들 모두 다 무사해.”부승희의 마음이 조금 가라앉으면서 그녀는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고 그를 보았다. 잠시 멈추고
부승희의 마음이 요동쳤지만 애써 침착한 척하며 얼굴을 돌렸다.“지금 무사히 돌아와서 두 그릇이나 먹었잖아. 그러니까 그렇게 불쌍한 척하지 마.”이승우는 부승희를 더 꽉 안으며 여전히 그녀의 얼굴 가까이에 머물렀다.“불쌍한 척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깜짝 놀랐어. 그때 정말 한 치 차이였어. 범죄자가 액체 폭탄을 가지고 있었고 조종실을 장악하려 했지만 실패해서 객실로 밀려났어. 그때도 미친 듯이 소리쳤고.”부승희는 그의 몸에 묻어 있던 피를 떠올리며 심장이 요동쳤다. 그러나 애써 참고 당장 그가 다친 곳을 확인하려 하지 않았다.긴장감이 감도는 순간 갑자기 이승우가 부승희를 가로로 안아 들었다.“뭐 하는 거야?”깜짝 놀란 부승희가 본능적으로 그의 목을 감싸자 이승우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자기 이마를 맞댔다.“그냥 너랑 얘기 좀 하려고. 너무 급하게 돌아와서 아직도 꿈꾸는 것 같아. 너무 일찍 자고 싶진 않아서.”부승희는 잠시 침묵했다. 사실 그녀도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그냥 이야기를 나누자는 생각이 들었다.이승우는 그녀를 침대에 눕혔고 부승희는 침대 헤드에 기대앉았다. 그도 그녀 곁으로 와 앉으며 이불을 당겨 덮어주었다.“비행기에 특별한 사람이 있었어? 범죄자는 돈을 노린 거야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었던 거야?”부승희가 조용히 물었다.이승우는 고개를 저었다.“잘 모르겠어. 공식 조사 결과를 기다려야 할 것 같아.”“상황이 불분명한데 승객들은 바로 내려올 수 있었어?”“당연히 안 되지.”이승우는 잠시 눈을 내리깔다 이내 고개를 들어 말했다.“만약 대단한 분이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면... 난 오늘 밤 이곳에 돌아오지 못했을 거야.”부승희는 잠시 생각하다가 그를 천천히 훑어보며 물었다.“그러면 너 옷에 묻어 있던 피는 대체 뭐였어?”이승우는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부기장과 그 범죄자의 피야.”그는 평온하게 말하려 했지만 여전히 몸 어딘가에 남아 있는 후유증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비행기가 연락이 끊긴 건 범죄자가
부적의 플라스틱 포장이 여전히 그대로라서 10년이 지나도 색깔은 변하지 않았고 그가 여전히 그 작은 부적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예전에 부승희가 그를 위해 사 준 작은 평안 부적은 그저 대수롭지 않게 주었던 것이었고 서로 주고받은 작은 선물들이 많아서 그때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 작은 물건을 손에 쥐었을 때 그녀는 그게 믿기지 않았다.이승우는 그녀 옆에 누워 말없이 바라보며 말했다.“이 부적 덕분에 내가 지난 10년 동안 무사히 지낸 거야. 그때는 이번에도 반드시 잘 넘길 수 있을 거로 생각했어.”이승우의 시선은 그녀의 멍한 옆얼굴에 닿았고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결국 중요한 순간에 나는 너한테 의지할 수밖에 없었어.”부승희는 코가 시큰해졌고 눈살을 찌푸리며 부적을 그의 손바닥에 툭 쳐서 다시 돌려주었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외국 물건이 뭐가 도움이 된다고 그래?”“네가 무사히 돌아온 건 우리의 부처님이 지켜준 덕분이지.”“방향을 잘못 잡았네.”이승우는 한숨을 쉬며 웃음을 터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맞네. 내가 감사할 대상을 잘못 찾았네.”말을 마친 후 그는 지갑에서 부적을 다시 꺼내 그곳에 넣었다.부승희는 그가 떠날 때 그에게 무사히 돌아오길 말하려 했지만 결국 말하지 못했다. 그때 이승우는 이유도 없이 주머니를 가볍게 두드렸다.이승우는 그녀가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이미 짐작했기 때문에 주머니를 가볍게 두드리며 그 안에 평안 부적이 있다고 말해줬다.부승희는 입술을 깨물고 시선을 돌렸다.“왜 아직도 그걸 가지고 있어? 다음에 절에 가서 참배나 하고 오지 그래.”“참배는 꼭 해야지. 하지만 이건 버릴 수 없어.”그는 부적을 제자리에 두고 갑자기 이불을 당겨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어차피 나는 어느 신도 믿지 않아.”이승우가 무사히 돌아온 것에 대한 감사가 절정에 달한 부승희는 그 말에 혀를 차며 말했다.그녀는 그를 바로잡으려 했지만 그의 차분하고 진지한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양혁수가 차가운 목소리로 묻자 변여름이 대답했다.“잠깐 기대고 있는 것도 안 돼요?”“...”양혁수는 길게 심호흡하고 뒷말은 삼켰다.이에 만족한 변여름은 양혁수의 오른쪽 팔에 더 바짝 다가가고 깍지 낀 손에도 더 힘을 주었다.양혁수는 과감하게 다가오는 허예나의 행동에 조금 적응이 된 것 같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 상황이 점점 의아하게 느껴졌다.왠지 허예나는 처음부터 자신을 노리고 지금껏 모두 계산된 행동으로 움직인 것 같았다.“예나야.”변여름이 눈을 뜨고 고개를 들어 양혁수를 바라봤다.양혁수도 변여름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우리 혹시 전에 알던 사이이니?”의문문이었지만 왠지 확신에 찬 말투였다.변여름은 양심에 찔려 조금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그럼 날 기억은 해요?”“...”양혁수가 기억을 할 리가 없었다.그전에도 종종 이런 의심을 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허예나를 과거에 만난 적이 없는 것 같았다.“넌 날 알고 있었던 거지?”양혁수는 질문을 바꿨다.하지만 변여름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익숙함을 느끼는 양혁수에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양혁수는 정말 과거에 허예나와 친분이 있었는데 자신이 홀라당 잊어버리는 무례를 저질렀을까 걱정을 했다.한참 침묵이 흐르고 변여름은 솔직하게 말했다.“맞아요. 난 오빠를 알고 있었어요.”“그리고 오빠를 노리고 온 것도 맞아요. 주선 상대가 오빠가 아니었다면 돈을 억만으로 줘도 하지 않았을 거예요.”양혁수는 변여름의 말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대신 상대를 향한 호기심이 점점 더 커졌으며 왼쪽 손은 저도 모르게 조명 버튼을 찾았다.궁금증이 발동하는 순간 양혁수는 행동으로 옮겼다.고민하고 망설이는 건 전혀 양혁수다운 행동이 아니었다.대체 지금 눈앞의 이 사람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딸깍. 조명 버튼이 켜지고 주변이 환해졌다.갑자기 변덕을 부린 양혁수에 변여름은 헛숨을 들이마시었다.하지
변여름은 아기 새에게 먹이를 먹이는 것처럼 양혁수에게 음식을 넘겨줬다.“배불러.”양혁수가 멈추라고 하자 변여름은 아쉬운 마음에 남은 과자 한 조각을 제 입에 넣었다.양혁수는 그래도 오늘 저택을 찾은 그 목적을 잊지는 않았다.“아버지 화장 날짜는 정했어?”“내일이에요.”양혁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설마 다른 사생아가 찾아올까 봐 큰어머님이 급하게 화장 날짜를 잡은 거 아니야?”“네. 맞아요.”변여름은 허현무에 대한 질문에는 하나도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허예나 본인도 허현무에게 남은 감정이 없었다.그래도 사건이 마무리된다면 변여름은 허예나 모녀가 편히 지낼 곳은 마련해 줄 것이다.양혁수는 허예나가 적어도 유산에 관해 얘기를 꺼내며 자신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한참이 지나도 허예나는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다.사방이 캄캄해 상대가 잘 보이지는 않아도 양혁수는 상대가 저만을 바라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자신을 이곳으로 부른 이유가 유산 쟁탈이 아니라 고작 연애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이런 생각을 하는데 변여름이 양혁수를 불렀다.“오빠, 차에 마실 물 있어요?”시간이 지날수록 양혁수는 허예나의 목소리가 점점 더 잠기는 걸 발견했다.그래서 손을 더듬어 생수를 찾아 허예나에게 건넸다.변여름은 생수를 받아쥐고 손쉽게 그 뚜껑을 열었다.그러나 이미 누군가 마신 건지 새 생수를 따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자 두 사람은 모두 당황해 버렸다.생각해 보니 양혁수가 방금 마셨던 물 같았다.“앞에 있는 새 생수 가져다줄게.”변여름은 그 말을 무시하고 꿀꺽꿀꺽 물을 마셨다.그 물을 마시는 소리가 귓가에 아주 선명하게 들렸다.‘쯧.’그냥 물을 마셨을 뿐인데 긴장한 양혁수가 느껴져 변여름은 그 상황이 조금 웃겼다.변여름은 이런 양혁수를 빤히 보다가 생수 뚜껑을 닫고 양혁수의 손에 생수를 쥐여주었다.양혁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생수를 원위치에 내려놓았다.그때, 변여름은 양혁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고 양혁수가 고개를
양혁수는 순순히 차에 올랐다. 사실 고분고분 차에 오른 건 빠르게 차 안의 전등을 켜버려 소녀를 깜짝 놀라게 할 생각이었다.그러나 차에 오르고 변여름은 양혁수의 옆자리에 찰싹 붙었고 점점 더 다가왔다.되레 당황한 건 양혁수 쪽이었고 밀어내지도 못해 몸을 살짝 옆으로 돌렸다.“지금 뭐 하는 거야?”“잠시면 되니까 그대로 움직이지 말고 계세요.”“바른대로 말해. 뭐 하려는 거야?”“설마 내가 허튼수작이라도 부릴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그럼 내가 걱정하지 않게 됐어? 넌 정말 그럴 것 같단 말이지.”“최대한 참아 볼게요.”변여름은 한 손으로 양혁수의 어깨를 꾹 눌렀다.만약 양혁수가 반대 손을 뻗는다면 바로 품에 안을 수 있었다. 변여름이 조금만 더 과감한 사람이었다면 양혁수의 다리 위를 올라탈 수도 있었다.그 모든 가능성이 양혁수의 머릿속을 스치고 있는데 눈가에 천 조각이 느껴졌다.긴 천 조각은 정확하게 양혁수의 눈을 덮었고 은은한 향기가 풍겨왔다. 변여름은 조심스럽게 양혁수의 뒤통수에 매듭을 지었다.“이건 오빠 차니까 오빠가 전등이라도 확 켜버리면 내가 얼마나 놀라겠어요? 그러니까 혹시나 해서 오빠 눈을 가려야겠어요.”“...”‘대체 무슨 의심은 그렇게 많은 건지.’변여름은 점차 렌즈에 적응이 되어 어둠 속에서도 편하게 움직일 수 있었으나 주변이 온통 깜깜한 탓에 양혁수의 표정까지 보이지는 않았다.그래서 상상으로 눈을 가린 양혁수의 모습을 떠올렸고 부드러운 손놀림과는 달리 머릿속엔 아주 불순한 생각만 가득했다.지금이라도 전등을 켜고 그 모습을 눈에 담고 싶었다.“자. 다됐어요.”변여름은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손을 내렸다.양혁수는 두 손을 어디에 두면 좋을지 몰랐고 긴 한숨을 푹 내쉬었다.“얌전히 제 자리에 앉아. 안 그러면 전등 확 켤 거니까.”“네네. 알겠어요.”변여름은 아쉬운 마음을 숨기지 않았고 고분고분 옆자리에 앉았다.천 조작은 불편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런 속박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양혁수는 당장
“지금이라도 전등 켜면 방금까지는 장난이라고 쳐줄게.”양혁수의 말에 변여름이 바로 말을 이었다.“오빠, 혹시 내가 못생겼을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그렇지 않으면 굳이 얼굴을 보이지 않을 이유가 있어?”변여름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양혁수의 손을 잡고 서서히 제 얼굴에 내려놓았다.“직접 만져보세요. 이목구비가 어떤지 확인해 봐요.”양혁수는 침묵했다.손끝에 닿는 온도는 조금 차가웠고 피부는 깐 달걀처럼 매끈하고 보드라웠다.소녀는 양혁수의 손에 얼굴을 비비며 제 이마와 코와 입술이 손에 닿도록 했다.“어때요?”변여름은 낮은 소리로 물었고 양혁수는 몰래 숨을 참았다. 그리고 입술을 꾹 다문 채로 손을 휙 뺐다.“눈, 코, 입은 제 위치에 있네. 그럼 못생긴 건 아니지 뭐.”“제대로 만져봐요.”소녀는 다시 손을 잡아당겨 제 머리 위로 내려놓았다.양혁수는 손가락을 움찔했고 손끝에 머리핀이 닿았다.변여름은 잠시 멈칫한 양혁수가 느껴졌고 말을 덧붙였다.“내가 산 머리핀인데 고양이 캐릭터예요.”“...”‘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무슨 말을 하는 거야.’그런 생각을 하며 양혁수는 또 손을 빼내려 했다.그러나 변여름은 그 손목을 잡고 절대 도망가지 못하게 했다.그렇게 잡힌 양혁수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고 갑자기 유치한 생각이 떠올랐다.변여름은 양혁수를 계속 놀려주려 했으나, 예상과 달리 양혁수는 풀어 헤친 변여름의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쓸어 넘겨주고 정확하게 귀를 잡고 힘을 주어 잡아당겼다.“...”“오빠!”양혁수는 장난이었으나 가빠진 상대의 숨소리에 바로 힘을 풀고 손을 거뒀다.이에 변여름은 입을 삐죽였다.‘왜 손을 거두고 그래. 조금 놀란 거지 만지지 못하게 하려는 거 아니었는데.’양혁수는 아예 손을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대체 뭐 하자는 거야?”“아무것도 아니에요. 추모식 말고 오빠 따로 만나고 싶어서 그랬어요.”변여름은 아주 솔직했고 제 감정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양혁수는 살짝 찌푸리던 인상을 풀었으나 일부러 계속 쌀
양혁수는 멍하니 셔터가 떨어지는 걸 지켜보았다. 작은 문부터 셔터까지 거리가 있었는데 죽을힘을 다해서 달리지 않는 이상 탈출하는 건 불가능했다.솔직히 말해 양혁수는 그렇게 전력 질주하는 게 귀찮았다.그리고 굳이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셔터가 고장으로 인해 오작동한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딸깍.셔터가 아예 닫히고 차고의 전등도 모조리 꺼졌다.순식간에 차고 안은 암흑이 되었다.‘허.’‘역시. 그러면 그렇지.’‘나를 먼저 만나자고 한 건 다 이유가 있겠어.’7년 전이었다면 양혁수는 바로 작은 문을 걷어차고 내키는 대로 움직였을 것이다.그러나 나이를 먹고 나니 인내심이 는 건지 어린아이의 수작에 그렇게 화를 내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침착하게 핸드폰을 찾아 손전등을 켰고 켜자마자 작은 문의 손잡이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양혁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고 문 뒤의 사람도 그 자리 그대로 멈췄다.잠시 침묵이 이어지고, 양혁수는 쯧 하고 소리를 내며 몸을 돌렸다.그리고 예상대로 문이 열렸다.조심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양혁수의 뒤로 들려왔다.“이게 네가 날 만나자고 한 이유야?”말을 마치자마자 등 뒤로 다가온 소녀는 바로 양혁수를 덥석 안았다. 자연스러운 손놀림이 마치 몇 번이고 시물레이션을 해본 것 같았다.“...”양혁수는 핸드폰을 들어 주변을 환하게 비추려 했다.그러나 등 뒤의 사람이 한 발 더 빨랐고 양혁수의 손을 잡고 핸드폰을 빼앗았다.양혁수는 당연히 핸드폰을 뺏기지 않으려 했다.하지만 순순히 핸드폰을 내어준 건, 차에서 내리며 외투를 걸치지 않아 얇은 셔츠만 입은 상태에서 등 뒤로 소녀의 말랑한 볼이 느껴져 반항할 의지가 사라진 것이었다.핸드폰을 뺏기고 2초 뒤 주변은 다시 캄캄해졌다.보통 캄캄한 게 아니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양혁수는 차라리 두 눈을 감았고 속으로 욕을 읊조렸다.‘하. 미치겠네.’“손 풀어.”그리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변여름은 고분고분 손을 풀고 망설임 없이 양혁수의 앞으로 다가갔다.
[내가 뭘 어떻게 도왔으면 하는데?]변여름은 메시지를 확인하고 심장이 쿵쿵 뛰었다. 정말 본인이 허예나가 되어 당장이라도 양혁수를 만나고 싶었다.[정말 저를 도우실 건가요?]변여름이 다시 묻자 양혁수는 잠시 뜸을 들이며 말했다.[봐서.]변여름이 재빨리 타자하는데 양혁수가 말을 보탰다.[살인, 방화는 안 돼.]변여름은 핸드폰을 꼭 쥐었다.‘그러니까 돕는다는 거네. 살인, 방화만 아니면.’변여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으며 계속 질문을 이었다.[벌써 저택 정원에 추모식까지 마련해 뒀는데 내일 조문하러 올 거예요?][오전에 시간 되면 갈게.][오기 전에 꼭 연락해야 해요. 제가 마중 갈게요.]먼저 만나자고 하는 허예나에 양혁수는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이 시작되었다. 사진으로 얼굴을 확인했으니 허예나의 얼굴은 이미 알고 있었으나 저도 모르게 내일의 만남이 기대되었다.양혁수는 이런 기대를 단순한 호기심으로 치부하였다. 온라인으로 만난 친구를 만나면 설레는 마음과 같은 거로 생각했다.[그래.]양혁수의 대답에 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렸다.[오늘은 더는 연락하지 못할 것 같아요. 엄마가 너무 속상해하셔서 곁을 지켜드려야 할 것 같아요.][응. 너도 일찍 쉬어.]평소와 다름없는 안녕이었지만 두 사람 사이 분위기는 사뭇 달라졌다.양혁수가 일정을 앞당겨 돌아온 건 허씨 가문에 조문하러 가기 위함이 맞았다. 더 솔직하게 말한다면 허예나의 처지를 생각하니 가문에서 당하고 있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비행기에 오르면서도 양혁수는 이런 자신이 어이가 없었다.한 번도 만난 적이 없던 여자에게 이렇게 마음을 쓰다니. 정말 말이 되지 않았다.하지만 주선으로 만난 사이이고 그동안 그렇게 많은 통화와 문자를 주고받았으니 정이 든 것도 당연했다.다른 한편, 변여름은 핸드폰을 내려두고 가슴이 너무 두근거려 잠에 들 수 없었다.두근거리는 이유를 굳이 꼽자면, 양혁수의 마음속에 허예나가 들어선 걸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하지
변여름은 사람을 시켜 허예나 모녀를 집 안으로 데려가 줬고 차에서 내리던 허예나는 걱정이 가득했다.그러나 5분 뒤, 허예나는 아주 기뻐하는 목소리로 변여름에게 전화를 걸었다.“여름 씨, 저 지금 들어왔는데 큰어머니가 저한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네.”변여름은 아주 침착했다.“지금 밖으로 조용히 나오셔서 저를 마중 오세요. 다른 사람이 저에 관해 묻는다면 어머님의 도우미라고 말해주세요.”“네. 알겠습니다.”밖은 어느새 굵은 빗줄기가 뚝뚝 떨어졌고 날이 어느새 어두워졌다.허예나는 우산을 쓴 채로 변여름과 함께 뒷문을 통해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허예나는 변여름을 지민영의 작은 방으로 데려가 줬다.“여름 씨, 죄송하지만 잠시만 여기에 계세요.”변여름은 창가 자리에 서서 커튼을 살짝 든 채로 정원 쪽 상황을 살폈다. 머릿속엔 방금 들어오던 경로와 저택 구조를 되짚었다.“저는 괜찮아요. 혹시 다른 사람이 예나 씨가 이곳에 온 걸 알고 있나요?”“아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거예요.”“얼굴을 자주 보이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꼭 외출해야 한다면 마스크 착용하세요.”허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세요. 그전에도 늘 그래왔어요.”변여름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현정임은 정원에 작은 추모식을 마련했고 허현무의 유골함도 곧 집으로 이송이 될 것이다. 이르면 오늘 저녁, 늦으면 내일 점심까지도 추모하러 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질 것이다.변여름은 작은 방에 머물며 양혁수의 일정을 살폈다.그런데!한 시간 전에 양혁수가 벌써 일정을 바꿔 비행기에 탑승한 게 아니겠는가! 사실을 알아차린 변여름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허현무가 세상을 떠나기 전, 변여름은 양혁수가 행여나 허현무의 생일 연회에 참석할까 전전긍긍하며 몰래 양혁수에게 한가득 프로젝트를 떠안겼었다. 그래서 예정대로라면 적어도 3일 뒤에나 한강시에 돌아올 수 있는 일정이었다.그러니 양혁수가 지금 돌아온다는 게 뭘 의미하겠는가?변여름은 침묵했고
변여름은 병원에서 소식을 기다리는 동안 변백호와 먼저 한바탕 말싸움을 벌여야 했다. 이전까지는 변백호가 설령 자신이 일을 꾸미고 있다는 걸 알더라도 양혁수에게 알리지는 않을 거라 확신했지만, 지금 보니 변백호는 확실히 양혁수를 남다르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번엔 정말로 변여름의 만행을 폭로할 태세였다.일이 틀어지려는 순간, 허예나에게서 메시지가 왔다.[여름 씨,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변여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허현무의 죽음은 너무 갑작스러워 변여름의 계획에 변수가 생겼다.양혁수가 ‘허예나’에게 얼마나 빠져든 건지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다면 장례식에 직접 조문을 가지 않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허예나와 마주치는 것도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게다가 이 시점에서 허현무의 아내는 아마 유산을 독차지하는 데만 신경을 쏟고 있을 것이며 허예나 모녀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게 뻔했다.그러니 양혁수가 허예나를 위해 나선다면, 두 사람이 만나는 건 필연적이었다.변여름은 여러 상황을 저울질하며 물었다.[집에서 장례는 어떻게 치른대요?][큰어머니가 한강시에서 장례식하고, 유골은 화서시에 있는 선산에 묻겠다고 하세요.][그럼 큰어머니는 예나 씨와 어머님께 어떤 태도인가요? 허씨 가문에 와도 좋다고 하셨나요?]이 질문이야말로 허예나가 가장 많이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었다. 양혁수와의 만남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고 오직 변여름의 계획이 중요했다.[병원에 있을 때부터 큰어머니가 우릴 대하는 태도는 별로 좋지 않았어요. 원래부터 우리 모녀를 경계했으니 이번엔 재산 문제로 저를 집에 못 들어오게 막을 겁니다.]변여름은 단번에 결정을 내렸다.[짐 챙기세요. 어머니 짐도 챙기시고 두 시간 후에 데리러 갈 테니까 직접 가서 조문하세요.][그래도...][예나 씨 몫의 재산은 제가 챙겨줄게요. 그리고 따로 100억 더 챙겨줄 테니까 수고비라고 생각하세요.]허예나는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어 바로 승낙했다.다시 핸드폰을 확인하니 변백호가 계속 메시
양혁수는 오후에 세운에 도착했다. 거래처 대표와 함께 점심을 나눈 뒤 저녁에는 테니스 약속이 있었다.아직 시간이 남아 그는 양지원에게 전화를 걸어 만남을 청했다.양지원과 양혁수는 자주 통화했지만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반년 전이었다. 두 사람 모두 바빴고 최근 두 달간 양석진이 중요한 업무를 맡으면서 양지원 역시 여러 차례 귀빈을 접대하느라 자식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네가 올 수는 없어? 꼭 내가 네 사무실까지 가야 해?”“양지원이 전화 너머로 투덜거리자 양혁수는 의자에 기대어 느긋하게 말했다.”“내가 거기로 가서 양석진 씨를 만나면 어떻게 해요?”“뭐가?”“양석진 씨를 삼촌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아니면 아빠라고 해야 하나요?”양지원이 말했다.“...아빠라고 부르면 뭐 어때?”“내가 낯가려서 못 부르겠어요.”“그냥 핑계 대는 거잖아.”양지원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그만 해요. 할머니도 됐고 엄마도 이제 성격을 좀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변해야죠. 좀 더 성숙해지고 혼자 운전해서 나를 만나러 와요.”양혁수는 입꼬리를 올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내가 신선한 코코넛 두 개도 가져왔어요.”양지원은 다시 한번 황당하다는 듯 침묵했다.“...정말 효자네.”‘그 먼 곳에서 코코넛을 가져오다니.’양혁수가 웃으며 덧붙였다.“감동이죠? 감동했으면 빨리 와요. 늦으면 난 집에 갈 거예요.”“집에 가. 몇 달만 더 안 보면 넌 다른 사람 아들 될 거야. 어차피 내게는 아들이 있어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양혁수는 피식 웃었다.결혼 후 오히려 더 어려지고 젊어진 듯한 양지원을 보며 그는 새삼 그녀가 마음 편히 잘살고 있다는 걸 느꼈다. 예전보다 말투는 부드러워졌고 차가운 기운 대신 애교스러움이 묻어났다.‘참 좋네.’가벼운 대화가 이어졌고 자연스럽게 양시연이 둘째를 임신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다 문득 양혁수는 양시연과 닮은 그 얼굴을 떠올렸다. 순간적으로 입을 열었지만 허예나에 대한 질문이 튀어나올 뻔한 걸 깨닫고 곧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