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승희는 차 사고로 피를 흘리던 배여진의 끔찍한 모습이 떠올라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고 이승우는 사랑에 눈이 멀어 모든 것을 잃어버린 배여진의 마지막을 되새기며 밤새 뒤척였다.부승희가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리고 배여진 역시 그럴 리 없다고 믿었지만 결국 그녀는 선을 넘어버렸다. 그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불안과 두려움이 조용히 가슴을 조여 왔다.배여진의 행동은 마치 거울처럼 그가 부승희에게 준 상처의 깊이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만약 부승희가 강하지 않았다면 혹시...’그 생각이 스치는 순간 이승우는 더 이상 눈을 감을 수 없었다.“이승우, 제발 좀 가만히 누워. 귀신처럼 앉아 있으니까 나까지 잠을 못 자겠어.”침실에서 부승희의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승우는 그녀를 향해 몸을 돌리며 낮게 말했다.“승희야, 자.”“응.”그녀가 조용히 대답하자 이승우는 속삭였다.“내가 네 옆에 있을게. 내일 다시 배여진을 보러 가자.”“알았어.”배여진이 저지른 광기 어린 행동 이후 부승희와 이승우 사이의 평온함은 반년 만에 깨졌고 그들은 며칠 동안 정신없이 배여진의 상태를 지켜보았다.마침내 4일 후 배여진이 깨어났다.목숨은 건졌지만 그녀의 장기는 심각한 손상을 입었고 회복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예정이었다. 게다가 그중 상당수는 영원히 회복할 수 없는 상처였다.병상에서 그녀는 산소 호흡기에 의지한 채 힘겹게 이혼을 요구했다.마치 감정의 실타래가 끊어진 듯 죽음의 문턱을 넘어온 그녀는 얼어붙은 눈빛으로 선기헌을 바라보았다.부승희는 이혼 절차를 지켜보러 병원에 가지 않았다. 대신 이승우가 다녀왔고 그의 말에 따르면 선기헌은 끝까지 이혼을 거부했다고 했다. 뒤늦게나마 양심의 가책을 느낀 듯 배여진을 평생 곁에서 지키겠다고 했다.배여진은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입을 뗐고 겨우 내뱉은 말은 단 한 마디였다.“필요 없어.”배여진의 부모는 한때 화해를 권유했지만 딸의 이혼 의사가 확고하다는 걸 알게 되자 전폭적으로 동의했다. 오히려
배여진의 사건은 이승우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죄책감과 두려움의 그림자를 드리웠다.배여진이 떠났음에도 그는 여전히 부승희 앞에서 조심스러웠고 그녀에게 사과해야 했지만 단 세 글자로는 그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그래서 요즘 그는 오직 일에만 파묻혔다.월말 전에 유럽과의 대형 협력을 성사했고 이제 직접 현지에서 세부 사항을 조율하는 일만 남았다.출국 전날 그는 부승희의 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둘 다 말없이 식사하던 중 부승희가 갑자기 물었다.“혹시 나도 배여진처럼 될까 봐 두려운 거야?”‘컥.’이승우는 반찬을 먹다 사레가 들려 고개를 숙이고 거칠게 기침했다.간신히 숨을 고르고 나서도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미간을 찌푸렸다.“그런 소리 좀 하지 마.”부승희는 태연하게 젓가락을 놓으며 말했다.“그럼 나 대신 퉤퉤퉤 해줄래?”이승우는 침묵했다.한참을 참다가 문득 자신도 모르게 속에서 끓어오르는 충동을 애써 눌렀다.물을 두 모금 마신 뒤 담담하게 말했다.“다음부터 헛소리 금지.”부승희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내일 몇 시 비행기야?”“열 시.”“그럼 오늘 밤에 짐 잘 챙겨.”이승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당부했다.“내일 김 대표 일행이 오는데 사람 많을 거야. 그냥 사무실 건물 옥상에서 연회 열어. 괜히 밖에서 고생하지 말고.”“알았어.”“나 없다고 너무 많이 마시지 마.”“응.”“김 대표 프로젝트는 좀 더 상의하고 결정해. 괜히 그 사람한테 말려들지 말고.” “알았어. 알았어.”...이승우는 마치 잔소리 많은 어머니처럼 한참이나 주의를 주더니 짐을 싸러 집으로 돌아갔다.부승희도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 그를 따라갔다.그가 캐리어에 옷을 넣는 걸 보며 방을 둘러보던 부승희는 거실 탁자 위에 놓인 낡은 지갑을 발견했고 무심코 집어 들며 말했다.“이거 이렇게 낡았는데 아직도 안 버렸어?”그녀가 열어보려 하자 이승우가 재빨리 빼앗았다.“쓰던 게 익숙해서.”부승희는 피식 웃으며 턱을 까딱했다.“완전
부승희는 회사로 돌아와 하루 종일 바쁘게 일한 후 저녁에는 옥상에서 김 대표 일행을 접대했다.현장의 분위기는 아주 좋았고 들어서자마자 마치 회사 창립 기념일 행사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테이블에 놓인 접시에는 ‘승가농목’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처음 회사를 설립할 때 부승희는 멋있고 고급스러운 이름을 짓고 싶었지만 같은 업계 회사들이 하나같이 ‘신희망’이나 ‘대농합’ 같은 이름을 쓰고 있어 결국 업계의 흐름을 따르자는 팀의 의견을 따랐다.‘승가’라는 이름은 ‘가정을 이루고 사업을 일으킨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 소박한 느낌을 주었다.게다가 ‘승가’는 ‘승희’의 이름과 비슷했기에 ‘이승우는 부승희의 농장과 목장을 줄여서 승가농목이라고 하면 좋겠다’고 말했다.그녀도 괜찮다고 생각했고 결국 그 이름으로 결정했다.예상보다 빠르게 1년도 채 되지 않아 사업은 탄탄한 기반을 갖추어 가고 있었고, 아직 수익이 많이 나진 않았지만 앞으로 잘 될 것이라고 부승희는 확신했다. “부 대표님, 김 대표님 일행이 도착하셨습니다.”직원의 말에 부승희는 정신을 차리고 직접 마중 나갔다.이승우는 먼저 화서시로 간 뒤 유럽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몇 시간 전 비행기 탑승 전에 연락을 받았으니 지금쯤이면 이미 이륙했을 터였다.부승희는 시간을 가늠하며 이승우가 착륙하면 안부를 물어야겠다고 생각했다.옥상을 연회장으로 사용하기로 한 것은 애초에 부승희와 이승우가 상의해서 결정한 일이었다.두 사람 모두 넓은 공간을 그대로 두는 것이 아깝다고 여겼고 그래서 처음부터 설계를 함께 고민했다.지난달 완공된 연회장은 기대 이상으로 멋지게 완성되었다.부승희는 김 대표 일행을 데리고 옥상을 둘러보았다.모두가 감탄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그녀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손님들을 자리로 안내했다.식사 자리에서 사람들은 부승희가 젊고 능력 있다며 칭찬을 늘어놓았고 자연스럽게 이승우에 대한 찬사도 빠지지 않았다. 말이 이어지다 보니 두 사람이 참 잘 어울린다는 말까지 나왔다.부승희는 사
부승희는 이승우와의 결말을 여러 번 상상했지만 어떤 결말도 그들이 함께 설계한 연회장에서 손님들을 대접하며 이승우가 황량한 사막에서 생사도 불분명한 상황에 놓인 그림은 아니었다.화가 나고 이승우를 원망하더라도 부승희는 그에게 재난이 닥치기를 바란 적은 없었다.그녀는 비서의 방향을 강하게 응시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비서의 말은 점점 더 선명하게 들렸고 부승희의 사지는 점점 더 굳어지고 마비되었다.“이걸 어떻게 부승희 씨에게 설명하죠?”“이 대표님이...”비서의 말은 떨리는 목소리로 끝났고 결국 말문이 막혔다.부승희는 발걸음을 멈추고 얼굴에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그쪽에서는 뭐라고 해요?”비서는 깜짝 놀라며 눈에 눈물이 고인 채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부승희의 마음은 더욱 무겁게 내려앉았다.“부, 부 대표님...”비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부승희는 갑자기 몸을 돌렸다.그녀는 얼굴과 몸에 이상한 점이 없었고 발걸음도 정상적이었다. 마치 모든 것이 평범한 듯했다.하지만 그녀가 연회장 대문을 열었을 때 실내의 금빛 화려함과 술잔을 주고받는 소리 그리고 뒤쪽 복도의 고요한 죽음 같은 소리가 그녀를 압박했다. 온몸이 고통스러웠다.강한 이명 소리가 귀를 찌르며 부승희는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고 발걸음을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그런데 마치 절벽 끝에 서 있는 것 같았고 발을 헛디뎌 그대로 떨어졌다.“부 대표님.”부승희는 시야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쿵’“부승희.”혼란 속에서 오랫동안 고요함이 이어졌고 그 후 누군가 부드럽게 그녀를 불렀다.부승희는 정신이 흐릿하게 떠올라 눈을 떴다. 시야가 어두워지고 눈앞이 밝아지면서 무엇이든 흐릿하게 보였다.그녀는 침대에 누워 있었고 침대 머리맡에는 큰 인형이 놓여 있었다. 천장에는 직접 그려진 에치젠 료마의 그림이 있었고 창문에 걸린 흰 커튼이 오후의 미풍에 살랑살랑 흔들리며 아름다운 곡선을 그렸다.창가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고 부승희는 그의 얼굴을 명확히
이틀 전 밤, 이승우는 면도하다가 살짝 긁혔고 부승희는 그 모습을 보고 장난스럽게 말했다.“이것도 재난의 한 조각으로 셀 수 있겠네? 이제 다 채운 거야?”“아직 하나 부족해.”“쳇. 점쟁이가 여덟 번이나 경고했잖아. 아마 다음엔 진짜로 손을 댈지도 몰라. 조심해.”“다음에 또 있으면 우리 둘은 아마 함께 있을 수 있을 거야.”“꿈깨.”...두 사람의 농담은 여전히 귓가에 울리지만 마치 전생의 이야기처럼 멀게 느껴졌고 부승희는 침대에 기대어 앉아 마치 오래전에 죽은 사람처럼 보였다.이승우와의 연락이 끊긴 지 30분이 넘었고 그녀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자신이 얼마나 오래 기절했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 휴대폰을 열면 아마 나쁜 소식을 보게 될 것만 같았다.그렇지 않으면 이승우가 이미 전화를 했을 텐데 그는 하지 않았고 휴대폰에는 그의 메시지가 하나도 없었다.이 생각에 부승희는 온몸이 저려오고 심장이 아파 숨을 쉴 수 없었다. 오감은 엉망이었고 눈앞은 흑백과 채색이 번갈아가며 현실과 꿈이 구분되지 않았다.사람은 이렇게 극도로 아플 때 기절하는 것 같다. 비록 깨어나더라도 그 이름을 떠올리면 고통이 반복되고 몸은 이를 견디지 못해 결국 잠으로 몸을 식히는 방법밖에 없다.부승희는 정신이 흐릿해지고 마치 자신이 비어버린 것처럼 텅 빈 껍데기만 남은 느낌이었다.자신이 얼마나 아픈지 설명할 수 없었지만 가슴이 무겁고 숨을 쉴 수 없었으며 뇌 속의 모든 생각은 끝없이 반복되는 기억들로 가득 차 있었다.부승희는 이승우와 함께 걸었던 거리 그가 사준 선물 그녀 앞에서 던졌던 장난스러운 말들 그리고 그가 돼지 농장에서 내기했던 내기를 기억했다.눈을 떠보니 베개가 다 젖어 있었다.그녀는 소리 내어 울 힘조차 없었다. 온몸의 힘은 이승우의 소식을 본 순간 모두 사라져 버렸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몇 번이고 기절했고 누군가가 왔다 갔다 하며 부승희의 상태를 확인했다.매번 깨어날 때마다 부승희는 그것이 꿈일 뿐이라고 믿고 싶었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뜨거운 온기를 느낀 후에도 부승희는 여전히 그것이 현실임을 믿을 수 없었다.그때 밖에서 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며 누군가 소리쳤다.“이 대표님, 무사히 돌아오셨어요.”마치 누군가 부승희를 인간 세상으로 이끌어 당기듯 온몸에 굳어 있던 혈액이 서서히 흐르기 시작하고 심장의 압박이 사라지며 뇌의 사고 능력도 조금씩 되살아났다.입을 열어 말해보려 했지만 그녀는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이승우가 어떻게 이렇게 빨리 돌아왔는지에 대해 이상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이승우...”“부승희 나야. 무서워하지 마. 괜찮아.”이승우는 계속해서 강조했고 그녀의 눈물은 다시 걷잡을 수 없이 주룩주룩 흐르기 시작했다.그제야 반우희는 소리 내어 울음을 터뜨리며 흐느꼈다.부승희는 이승우를 꽉 붙잡고 울면서 입술은 갈라지고 눈은 불타는 듯 아팠다.이승우는 부승희가 아파하는 모습에 마음이 아팠지만 자신의 상태를 돌보지 않고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괜찮아’, ‘내가 있어’ 같은 말을 반복했다.부승희는 중간에 그를 놓았고 여전히 눈빛에는 혼란과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너 어떻게 돌아온 거야?”이승우는 웃으며 대답했다.“비행기 타고 왔어. 네가 걱정할까 봐.”그런데 그녀의 얼굴은 급격히 변했고 입을 벌리며 마치 악성의 짓궂은 말을 하듯 대성통곡했다. 한참을 울면서 그의 어깨를 때렸다.“너 감히 또 비행기를 탔어?”‘미쳤어. 비행기에서 겨우 목숨을 건졌으면서 또 다른 비행기를 타다니.’이승우는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만큼 부승희가 때려도 마음속에서는 기뻤다.“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전화가 왔어. 네가 기절했다길래 너무 걱정돼서 당장 돌아왔지.”부승희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고 그를 욕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의 어깨를 잡고 힘없이 때렸다.그녀는 이제까지 이렇게 많은 눈물을 흘린 적이 없었다.차분해지자 온몸의 세포들이 모두 지치고 피곤한 듯 느껴졌고 특히 얼굴은 여기저기 아프게 울렸다.이승우는 작은 스탠드 등을 켜고
부승희는 당연히 엄우한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들 세대의 인물 중에서, 세운에서 큰 영향을 미치는 인물이자 엄 씨 항공의 총책임자이기도 했다.부승희는 의자에 앉히며 물었다.“너 엄우한 씨와 친분이 있어?”“없어.”“그럼 어떻게...”“난 뻔뻔하거든.”이승우는 입꼬리를 올리고 약간 자랑스럽게 말했다.“엄우한 씨에게 집에 있는 아내가 소식을 듣고 기절해 버렸으니까 빨리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지.”부승희는 말문이 막혔다.“...”평소라면 그녀는 그를 바로 때렸을 텐데 오늘은 힘이 없다.그녀는 그와 마주 앉아 젓가락을 건네며 휴대폰에서는 최신 보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전에 내부에서 유출된 소식에 대해 티선항공은 응답을 거부했지만 이제는 비행기가 안전하게 착륙했다는 보도가 쏟아지고 있었다.그녀가 잠드는 동안 엄 씨 항공과 티선항공은 그 사건에 대해 공식적으로 구출 작업을 하고 있다는 태도를 발표했다.[현재 비행기는 안전하게 몽운시에 착륙했으며 사고 원인은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비행기의 기장인 설지윤 씨가 티선항공에서 최초로 임명된 여성 기장이라는 사실입니다. 최근에는 설지윤 씨가 티선항공 대표인 감우지 씨와 연인 관계라는 소식도 전해졌습니다.]이것은 단순한 찌라시 뉴스에 불과했다.부승희가 그 뉴스를 넘기려던 찰나 이승우가 밥을 두 입 먹고 말했다.“그게 사실이야.”“뭐?”“그 여자 기장이 감우지 씨의 여자친구야.”부승희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이승우는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있다는 게 정말 대단하다.“도대체 비행기가 왜 사고를 낸 거야? 날씨 때문이었나?”“아니야. 누군가가 비행기를 납치했어.”“뭐?!”부승희는 놀라서 식은땀이 났다.이승우는 그녀의 표정이 좋지 않자 일부러 가볍게 부승희의 얼굴을 눌렀다.“괜찮아. 나 지금 이렇게 멀쩡하게 있잖아. 비행기 탑승한 사람들 모두 다 무사해.”부승희의 마음이 조금 가라앉으면서 그녀는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고 그를 보았다. 잠시 멈추고
부승희의 마음이 요동쳤지만 애써 침착한 척하며 얼굴을 돌렸다.“지금 무사히 돌아와서 두 그릇이나 먹었잖아. 그러니까 그렇게 불쌍한 척하지 마.”이승우는 부승희를 더 꽉 안으며 여전히 그녀의 얼굴 가까이에 머물렀다.“불쌍한 척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깜짝 놀랐어. 그때 정말 한 치 차이였어. 범죄자가 액체 폭탄을 가지고 있었고 조종실을 장악하려 했지만 실패해서 객실로 밀려났어. 그때도 미친 듯이 소리쳤고.”부승희는 그의 몸에 묻어 있던 피를 떠올리며 심장이 요동쳤다. 그러나 애써 참고 당장 그가 다친 곳을 확인하려 하지 않았다.긴장감이 감도는 순간 갑자기 이승우가 부승희를 가로로 안아 들었다.“뭐 하는 거야?”깜짝 놀란 부승희가 본능적으로 그의 목을 감싸자 이승우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자기 이마를 맞댔다.“그냥 너랑 얘기 좀 하려고. 너무 급하게 돌아와서 아직도 꿈꾸는 것 같아. 너무 일찍 자고 싶진 않아서.”부승희는 잠시 침묵했다. 사실 그녀도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그냥 이야기를 나누자는 생각이 들었다.이승우는 그녀를 침대에 눕혔고 부승희는 침대 헤드에 기대앉았다. 그도 그녀 곁으로 와 앉으며 이불을 당겨 덮어주었다.“비행기에 특별한 사람이 있었어? 범죄자는 돈을 노린 거야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었던 거야?”부승희가 조용히 물었다.이승우는 고개를 저었다.“잘 모르겠어. 공식 조사 결과를 기다려야 할 것 같아.”“상황이 불분명한데 승객들은 바로 내려올 수 있었어?”“당연히 안 되지.”이승우는 잠시 눈을 내리깔다 이내 고개를 들어 말했다.“만약 대단한 분이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면... 난 오늘 밤 이곳에 돌아오지 못했을 거야.”부승희는 잠시 생각하다가 그를 천천히 훑어보며 물었다.“그러면 너 옷에 묻어 있던 피는 대체 뭐였어?”이승우는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부기장과 그 범죄자의 피야.”그는 평온하게 말하려 했지만 여전히 몸 어딘가에 남아 있는 후유증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비행기가 연락이 끊긴 건 범죄자가
양혁수는 보지 않아도 현재 변여름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상상이 되었다. 아마도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순수 무구한 표정을 하고 있으나 그 얼굴엔 장난기가 가득할 것이다.양혁수는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말했다.“그럴 가능성없지 않잖아.”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죠.”“그럼 내 걱정이 터무니없는 걱정은 아니지 않아?”“네. 맞아요.”이번에도 변여름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양혁수는 수비 대신 공격을 하면 뻔뻔한 변여름을 제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그러나 변여름은 생각보다도 더 강적이었다.“걱정도 참. 내가 정말 보고 싶었다면 여기 카메라라도 달아놓으면 그만이잖아요.”양혁수는 경악을 했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렸고 고개를 들어 양혁수를 바라보며 말했다.“농담이에요.”“오빠 걱정하지 마요. 나 그렇게 변태 아니에요.”‘그건 내가 판단할 일이고.’변여름의 말에 양혁수는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고 이 욕실에 정말 카메라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됐다.그때, 변여름이 갑자기 손을 뻗어 셔츠 가장 윗단추를 건드렸다.깜짝 놀란 양혁수는 서둘러 뒷걸음치며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변여름.”그러나 변여름은 전혀 당황한 기색 없이 다시 천천히 걸어와 계속 단추를 하나둘 풀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손목을 잡았고 변여름이 덤덤하게 말했다.“오빠, 셋 셀 때까지 이 손 안 놓으면 오빠 목욕할 때 나 몰래 들어올 거예요. 그리고 오빠가 잠 들었을 때 몰래 방으로 들어올 거예요.”이어 변여름은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셋...”양혁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내렸다.변여름은 정말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긴장에 숨을 헐떡이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을 웃음을 꾹 참고 남은 셔츠 단추를 모두 풀었다.그리고 양혁수가 셔츠를 벗는 동안 뒤를 돌아 프라이버시를 지켜줬다.몇 초 뒤, 변여름은 양혁수의 셔츠를 받아 쥐고 문밖으로 향했다.“오빠 나 정말 나가요. 도움 필요하면 남자 도우미 부를 테니 말해요.”
양혁수는 축축한 건 질색이라 평소 머리가 완전히 건조될 때까지 말리는 편이었다.양혁수는 드라이어를 들고 능숙하게 방향을 바꿔가며 바람을 조절했고 그 바람에 양혁수가 입은 셔츠 자락이 말리면서 양혁수의 탄탄한 몸이 그대로 드러냈다.변여름은 원래 가만히 서서 양혁수가 필요할 때 물건을 건네줄 생각이었다.하지만 주변에 은은하게 샴푸 향이 퍼지고 변여름의 시선은 자꾸 두어 개 단추를 풀어 헤쳐 드러난 양혁수의 쇄골로 향했다.순간적으로 머릿속이 멍해지고 저도 모르게 자꾸 양혁수를 힐끔대다가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음... 이건 좀 아닌 것 같아.’변여름은 슬그머니 자세를 틀어 양혁수를 등지고 벽을 바라보며 반성했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드라이어 소리가 멈췄다.변여름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고 양혁수는 무심하게 머리를 정리하고 있었다.그런데 길고 하얀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모습이 너무나도 예뻤다.‘안돼! 이 음란 마귀야 멈춰!’변여름은 인상을 팍 찌푸렸고 다른 사람의 시선을 피해 제 볼을 꽉 꼬집었다.‘좀 참으라고!’“여름아.”양혁수의 부름에 변여름이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왜요, 오빠?”“목욕물 받아놓고 나가줘.”이제 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변여름을 부려 먹었다.“알았어요.”변여름은 양혁수가 소파에 앉는 걸 확인하고 욕실로 향했다.그 사이, 양혁수는 소파에 기대앉아 시원한 과일 주스를 마시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잠시 후, 유리컵을 내려놓자마자 변여름이 욕실에서 나오며 말했다.“오빠, 준비 끝났으니까 들어가요.”“혼자 할 수 있으니까 이만 나가.”“오빠 들어가는 것까지 도와주고 나갈게요.”양혁수는 내심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머리를 대신 감겨주는 건 그렇다 쳐도, 씻는 건 꽤 사적인 영역이었다.솔직히 변여름이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면 목욕물과 갈아입을 옷도 부탁하고 싶지 않았다.욕실 안은 바깥보다 더 축축했다.변여름은 양혁수를 부축해 안으로 들어가며 어느 물건은 어디에 두었는지 설명해 줬다.양혁수는 일
양혁수는 어릴 때부터 타고난 인기에 지금껏 받은 고백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그런데 서른네 살이 되는 해에 족히 열 살은 더 어린 꼬마에게 고백 폭탄을 받을 거라고는 예상치도 못했다.며칠을 곱씹어본 끝에, 양혁수는 결론을 내렸다.이건 마치 산적 두목한테 납치당한 기분이었다!그러나 단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산적 두목은 말투가 부드럽고 귀에 착 감기는 데다, 모든 일에 적당히를 알고, 양혁수를 모시는 방식도 너무 완벽해서 반박할 구석이 없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양혁수는 불평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양혁수가 두 번의 진료를 받고 일상생활이 가능해지자, ‘두목’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양혁수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비서 노릇도 하고, 가끔은 가정부 노릇도 했다.변여름은 양혁수가 읽어야 하는 서류들은 미리 검토한 후 요점만 깔끔하게 정리해 주었고, 업무 효율은 원래 비서보다 더 뛰어났다. 게다가 식사 시간이 되면, 준비한 과일을 다양한 모양 틀로 찍어냈다.처음엔 유치하다고 생각했는데, 몇 번 먹다 보니 과일을 입에 넣기 전에 오늘엔 별 모양인가, 하트 모양인가 확인하는 버릇까지 생겼다.그리고 무엇보다 변여름은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즐거워했다. 가끔 양혁수가 작은 부탁을 하면, 대단한 일이라도 된 듯 기뻐하며 도왔다.지친 기색 없이 기꺼이 헌신하는 변여름 덕분에 양혁수는 점점 더 게을러졌고, 어느새 낮잠까지 챙겼다.낮잠 자다가 조금이라도 뒤척이면 어김없이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빠, 깼어요?”‘지금 일상이 신선놀음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반려동물이 된 것 같다고 해야 하나...’양지원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양혁수는 내심 양지원이 오지 않길 바라고 있었다. 양지원이 봤다면 또 놀려댈 게 뻔했다.차츰 이곳 생활에 적응이 되고 굳이 급히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겠다 생각한 양혁수는 바로 양지원에게 전화를 걸어, 오지 않아도 된다고 전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 붕대만 풀면 바로 떠날 것이라 계획을 차렸다.해가 질 녘, 변여
“네가 무슨 방법이라도 대서 날 국내로 보내줘.”양혁수가 변백호를 향해 말했다.양혁수가 정신을 차린 뒤로 변백호는 처음 병실을 찾았다.변여름은 방금 병실을 나섰고 엉망인 양혁수의 입가를 보며 변백호는 방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상이 되었다.“눈이 회복될 때까지 두 날만 더 쉬어.”양혁수는 고민도 하지 않고 말했다.“타박상뿐이고 안구는 다치지도 않았다면서 뭔 회복을 기다리는 거야?”“서둘러줘. 오늘 밤, 늦어서 내일 아침엔 돌아가야 해. 국내에 할 일이 많다고.”변백호는 바로 양혁수의 마음을 쿡 찔렀다.“너 여름이 무서워서 그러는 거지?”“...”양혁수는 긴 한숨을 내쉬었고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너희 부모님께 말 좀 잘해줘. 난 네 매부 되고 싶은 마음 추호도 없으니까.”“말해봤자 소용없어. 여름이는 너만 좋아하니까.”변백호가 바로 받아쳤고 양혁수는 이런 변백호를 노려보고 싶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너 정말 미쳤어? 나한테 여동생이 있었다면 띠동갑 되는 남자한테는 다리를 분질러서라도 절대 보내지 않을 거야. 너라도 정신 제대로 차려야 하는 거 아니야?”“내가, 여름이 다리를 분질러라고?”변백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양혁수는 아직도 상황의 심각성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하지만 사실 양혁수는 누구보다도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었고 그래서 더 마음이 무거웠다.“그러니까 너희 부모님께 말해서 여름이 좀 잘 타일러줘.”“소용없어. 오히려 두 분이 여름이 돕겠다고 나설지도 몰라. 우리가 오랜 친구인 걸 보아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은걸.”“...”변백호는 양혁수에게 충고를 남겼다.“네가 정말 여름에게 마음이 없다면 너무 티 내지는 말고 당분간만 참아줘. 갖지 못하는 것에 더 목을 매게 된다는 말도 있잖아. 일단은 옆에 두고 여름이가 차츰 관심이 식을 때까지 내버려둬. 그렇게 같이 지내다가 너한테 질리면 가버릴 수도 있잖아.”“...”‘그걸 충고라고! 정말 하나도 도움이 안 돼!’양혁수는
양혁수는 숟가락에 닿는 걸 느끼며 조심스레 입에 넣었다.그러나 국물 맛은 여전했으며 짭짤한 새우젓의 맛만 추가되었을 뿐이었다.말없이 입안의 것을 씹고 있는데 변여름이 물었다.“입에는 맞아요?”“그래...”변여름은 다행이라며 중얼거렸고 자연스럽게 양혁수의 숟가락 위로 반찬을 집어주었다. 양혁수는 본인이 우연히 반찬을 집은 건지 아니면 반찬이 밥에 잘 섞여 있던 건지 구별이 되지 않았지만 애써 무덤덤하게 입에 넣고 국물도 한술 떴다.양혁수는 본인의 의지대로 스스로 밥을 먹었고 변여름도 자신이 먹여주겠다고 떼를 쓰지 않고 몰래 집어주고 있으니 두 사람 분위기도 차츰 풀렸다.하지만 몰래 반찬을 집어주는 것도 사실 먹여주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일이었다.양혁수가 이를 눈치챘을 때는 이미 늦어버렸고 변여름은 어느새 깨끗하게 씻은 딸기를 양혁수 입가에 가져다 대고 있었다.“아...”그러나 양혁수는 입을 벌리지 않고 손으로 받으려 했다.“오빠는 손도 안 씻었잖아요.”“...”겨우 딸기 하나라는 생각에 양혁수는 못 이기는 척 입을 벌렸다.그렇게 물꼬를 트고 나니 점점 걷잡을 수 없이 일이 번졌다.딸기에 이어 변여름은 손수 치킨을 한입 크기로 잘라 양혁수에게 건넸다.그렇게 한입씩 먹여주며 변여름이 말했다.“오빠가 자고 있을 때 연락이 네 통 정도 걸려 왔는데 하나는 지원 이모이고 다른 전화는 회사 사람인 것 같아요.”입을 꾹 다물고 있던 양혁수는 핸드폰을 건네달라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변여름이 건네온 치킨에 말문이 막혔다.“오빠, 이 집 치킨 맛있으니까 많이 먹어요.”양혁수는 입 안 가득 찬 치킨에 말을 잇지 못했으나 변여름은 양혁수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알아서 핸드폰을 건넸다.그러다 보니 양혁수는 지금 변여름이 자신을 ‘먹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잊었고 아주 자연스레 변여름에게 몸을 맡기고 있었다.변여름이 질문을 이었다.“조원희라는 사람이 두 번이나 전화를 걸었는데 다시 걸까요?”두 번이나 걸었다는 건 필시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을 설명했
“오빠, 다른 사람이 오빠를 돌보는 건 내가 못 믿겠어서 그래요.”양혁수는 속으로 생각했다.‘네가 날 돌보는 게 더 말이 안 되는 일이야.’변여름은 그런 그의 속마음을 꿰뚫어 본 듯 아무 말없이 손을 잡아 화장실로 이끌었다. 문을 열고 세면대 근처까지 안내한 뒤 침착하게 설명했다.“오빠, 화장실 공간이 좀 작아요. 왼쪽으로 1미터 가면 변기이고 난 바로 밖에 있을 테니까 끝나면 불러요.”말을 마치자마자 변여름은 조용히 문을 닫고 얌전히 문 앞에서 기다렸다.양혁수는 더 이상 변여름과 말다툼할 여력이 없었다. 지금 당장 급한 일을 해결하지 않으면 정말 큰 일이었다.“변여름.”“네. 저 여기 있어요.”“멀리 떨어져.”“아...”잠시 뒤, 문밖에서 변여름이 침대에 앉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변여름은 두 손 검지손가락을 귀에 쏙 집어넣고는 친절하게 외쳤다.“오빠, 나 귀도 막았어요!”“...”얼마 후, 양혁수가 화장실에서 나왔다.변여름은 어느새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창문을 등지고 앉은 양혁수는 바깥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수다를 들었다. 어제 결혼식 이야기를 하는데 그 누구도 두려운 기색은 없었으며 오히려 웃음소리까지 섞여 있었다.이 집안 사람들뿐만 아니라 두 사람의 친구들까지도 정상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이 근처 1km 반경 안에서 유일하게 정상적인 인간은 자기 혼자뿐인 것 같았다.양혁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가만 생각해 보니 그동안 양혁수는 안일하고 평온한 일상에 익숙해졌고 이번 일은 꽤나 오랜만에 겪는 황당한 사건이었다.옆에서 변여름은 뜨거운 국밥을 숟가락으로 저으며 온도를 식히고 있었다. 그러다 양혁수의 작은 움직임에도 관심을 보였다.“너희 가문에는 이런 일이 자주 있는 거야?”“아니요.”변여름은 침착하게 답했다.“우리도 오랜만에 겪는 일이에요. 이번 일은 그냥 사업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 벌인 짓이래요.”양혁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변씨 가문 사업에 사고가 안 나는
“그럼 뭐라고 말해야 하나요?”“무조건 괜찮다고 말하세요. 만약 문제 생기면 본인의 눈을 대신 주겠다고 말이에요!”양혁수가 눈을 뜨기도 전에, 먼저 들려온 건 노지혜가 의사를 윽박지르는 소리였다.양혁수는 천천히 몸의 감각을 확인했다. 팔다리는 멀쩡했고, 감각도 정상이었다. 다만 눈앞이 온통 어두웠지만 실명한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병실 문이 열렸고 들어온 사람은 변여름이었다. 변여름은 들어오자마자 노지혜와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의사는 지체 없이 대답했다.“아무 문제없습니다! 만약 문제가 생기면 제 눈을 바치겠습니다!”“...”이제 변여름이 대답할 차례였으나 그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대신 종이를 넘기는 사각거리는 소리만 들렸다.한참 후에야 변여름이 입을 열었다.“됐어요. 이제 가보셔도 돼요. 여긴 제가 있을게요.”“네네! 알겠습니다!”의사는 마치 해방이라는 듯 밝게 대답하고 황급히 병실을 나갔다.양혁수는 조용히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변여름.”그 순간, 변여름이 얼마나 빠르게 다가왔는지 침대 옆으로 바람이 일렁이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오빠! 깨어났어요?”“응.”양혁수는 변여름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지금 내 상태는 어때?”“눈꺼풀이 유리 파편에 긁혔지만 안구는 문제없대요.”그 말을 듣자 양혁수는 안심하며 긴 숨을 내쉬었다.변여름은 양혁수가 행여나 걱정할까 봐 말을 덧붙였다.“지금 눈이 안 보이는 건 눈을 뜨지 못하게 고정 장치랑 붕대를 감아둬서 그런 거예요. 잠시 휴식하고 붕대를 풀면 정상적으로 돌아올 거예요.”“다른 건?”“미약한 뇌진탕이랑 등에 충격으로 인한 타박상이 있어요.”양혁수는 천천히 몸을 움직여봤고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앞이 보이지 않는 게 꽤 불안했다.“다른 사람들은?”“부상자는 있지만, 사망자는 없어요.”그건 그나마 다행이었다.변여름은 붕대로 가려진 양혁수의 눈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오빠, 미안해요. 내가 판단을 잘못해서... 그 길로
양혁수가 변여름을 발견한 건 우연이었지만 그 이후로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자신을 계속해서 훔쳐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조심스럽지만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시선이었다.그때 음악이 울려 퍼지며 결혼식이 시작되었다.양혁수는 핸드폰을 꺼내 들고 어디에서 차를 탈 거냐는 비서의 질문에 답장을 보냈다.식장은 축복의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신부가 드디어 신랑 앞에 마주했고, 주례는 뻔한 멘트를 읊기 시작했다.양혁수는 시큰둥했다. 아침부터 그 쌍둥이들한테 시달려서인지 아직도 정신이 혼미했다.미간을 지그시 누르며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변여름이 양손으로 휴대폰을 들고 어설프게 각도를 조절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대충 봐도, 자기랑 같이 찍히려고 하는 것 같았다.휴대폰 화면에 뭐가 찍혔는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변여름이 잠깐 동작을 멈춘 걸 보니, 마침 양혁수가 쳐다보는 순간이 찍힌 모양이었다.스크린 속에서 서로의 시선이 맞닿는 묘한 순간 변여름이 망설이지 않고 셔터를 눌렀다.찰칵!양혁수는 변여름의 뻔뻔한 태도에 어이가 없어 웃음이 피식 나갔다.그렇게 두 사람은 말없이 몇 초간 시선을 마주했다.그런데 그때.콰과광!귀청이 찢어질 듯한 폭발음이 식장을 뒤흔들었다.순간적으로 엄청난 충격이 몰아쳤고, 사방에서 날아온 파편들이 양혁수를 비롯한 주변의 하객들을 노렸다.그리고 비명과 구조 요청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폭탄이야!”정신을 차린 양혁수는 힘겹게 몸을 지탱하며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아직 경호원들이 도착하지 않았는데 누군가가 그의 손목을 잡아챘다.“오빠! 이쪽으로 가요!”변여름이었다.지금은 시시비비를 따질 때가 아니었고 양혁수는 곧장 변여름을 따라 움직였다.하객들은 모두 호텔 밖으로 도망치고 있었지만 변여름은 반대로 움직였다. 양혁수를 데리고 호텔 내부로 들어가, 가장 외진 길을 선택해 빠르게 이동했다.그리고 무선 장비를 이용해 가족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전원이 무사하다는 걸
와이너리.노지혜가 고개를 빼꼼 내밀어 위층을 확인하더니 여유롭게 머리카락 한 올을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두 사람 떠났어.”변여름은 테이블에 엎드린 채로 노트북을 조작했고 영상을 앞으로 당겨 양혁수와 변백호가 투덕거리는 장면을 되돌아봤다.노지혜도 관심을 보이더니 콕 집어 이렇게 말했다.“백호 오빠가 이겼네.”변여름은 노지혜를 힐끗 쳐다보았고 노지혜는 미소를 지었다.그러자 변여름은 안 보여줄 거라는 듯이 아예 노트북을 옆으로 밀어버렸다.“...”“아, 근데 말이야. 네가 고백했을 때 혁수 씨 반응 어땠어?”변여름은 턱을 괴고 다시 영상의 타임라인을 조정했다. 이번엔 양혁수가 카메라를 쳐다보던 순간을 되돌려보았다.“우리한테 들킨 거 알고 있었네.”“어쩐지 네가 심하게 오글거리더라.”변여름은 아무렇지 않은 듯 굴었지만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다.‘그러게 왜 날 그렇게 매몰차게 밀어낸 거야.’‘난 그냥 고백만 하고 싶었을 뿐인데 그것도 못 하게 하고. 흥’노지혜가 다시 다가와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었다.“근데 이제 두 사람 모두 자리 비웠는데 약 정말 줘?”“음... 일단 지혜 씨가 갖고 있어요.”노지혜는 단번에 눈치챘고 변여름의 어깨를 감싸안더니, 귀에 대고 더 위험한 계획을 속삭였다.변여름은 순진한 얼굴로 연신 손을 휘저으며 거부 의사를 표했지만 눈이 반짝거렸다.양혁수는 변여름이 일부러 그랬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질질 끌지 않고 고백 같은 건 아예 못 하게 단칼에 잘라, 최대한 빨리 집에 돌려보냈다.하지만 변여름은 꼭 끝까지 가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그래서 할 수 없이 양혁수는 변여름을 애써 모른 척했다. 평소처럼 행동하면서 결혼식이 끝나는 대로 곧장 떠날 계획을 세웠고 앞으로 엮일 일은 절대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그런데, 밤에 혼자 있으면 자꾸 변여름 생각이 났다.‘대체 내 어디가 좋다는 거야?’‘몇 년 동안 얼굴도 자주 못 봤고... 그때는 완전 어린애였는데?’어린아이의 짝사랑이니 그렇지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