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승희는 이승우와의 결말을 여러 번 상상했지만 어떤 결말도 그들이 함께 설계한 연회장에서 손님들을 대접하며 이승우가 황량한 사막에서 생사도 불분명한 상황에 놓인 그림은 아니었다.화가 나고 이승우를 원망하더라도 부승희는 그에게 재난이 닥치기를 바란 적은 없었다.그녀는 비서의 방향을 강하게 응시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비서의 말은 점점 더 선명하게 들렸고 부승희의 사지는 점점 더 굳어지고 마비되었다.“이걸 어떻게 부승희 씨에게 설명하죠?”“이 대표님이...”비서의 말은 떨리는 목소리로 끝났고 결국 말문이 막혔다.부승희는 발걸음을 멈추고 얼굴에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그쪽에서는 뭐라고 해요?”비서는 깜짝 놀라며 눈에 눈물이 고인 채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부승희의 마음은 더욱 무겁게 내려앉았다.“부, 부 대표님...”비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부승희는 갑자기 몸을 돌렸다.그녀는 얼굴과 몸에 이상한 점이 없었고 발걸음도 정상적이었다. 마치 모든 것이 평범한 듯했다.하지만 그녀가 연회장 대문을 열었을 때 실내의 금빛 화려함과 술잔을 주고받는 소리 그리고 뒤쪽 복도의 고요한 죽음 같은 소리가 그녀를 압박했다. 온몸이 고통스러웠다.강한 이명 소리가 귀를 찌르며 부승희는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고 발걸음을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그런데 마치 절벽 끝에 서 있는 것 같았고 발을 헛디뎌 그대로 떨어졌다.“부 대표님.”부승희는 시야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쿵’“부승희.”혼란 속에서 오랫동안 고요함이 이어졌고 그 후 누군가 부드럽게 그녀를 불렀다.부승희는 정신이 흐릿하게 떠올라 눈을 떴다. 시야가 어두워지고 눈앞이 밝아지면서 무엇이든 흐릿하게 보였다.그녀는 침대에 누워 있었고 침대 머리맡에는 큰 인형이 놓여 있었다. 천장에는 직접 그려진 에치젠 료마의 그림이 있었고 창문에 걸린 흰 커튼이 오후의 미풍에 살랑살랑 흔들리며 아름다운 곡선을 그렸다.창가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고 부승희는 그의 얼굴을 명확히
이틀 전 밤, 이승우는 면도하다가 살짝 긁혔고 부승희는 그 모습을 보고 장난스럽게 말했다.“이것도 재난의 한 조각으로 셀 수 있겠네? 이제 다 채운 거야?”“아직 하나 부족해.”“쳇. 점쟁이가 여덟 번이나 경고했잖아. 아마 다음엔 진짜로 손을 댈지도 몰라. 조심해.”“다음에 또 있으면 우리 둘은 아마 함께 있을 수 있을 거야.”“꿈깨.”...두 사람의 농담은 여전히 귓가에 울리지만 마치 전생의 이야기처럼 멀게 느껴졌고 부승희는 침대에 기대어 앉아 마치 오래전에 죽은 사람처럼 보였다.이승우와의 연락이 끊긴 지 30분이 넘었고 그녀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자신이 얼마나 오래 기절했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 휴대폰을 열면 아마 나쁜 소식을 보게 될 것만 같았다.그렇지 않으면 이승우가 이미 전화를 했을 텐데 그는 하지 않았고 휴대폰에는 그의 메시지가 하나도 없었다.이 생각에 부승희는 온몸이 저려오고 심장이 아파 숨을 쉴 수 없었다. 오감은 엉망이었고 눈앞은 흑백과 채색이 번갈아가며 현실과 꿈이 구분되지 않았다.사람은 이렇게 극도로 아플 때 기절하는 것 같다. 비록 깨어나더라도 그 이름을 떠올리면 고통이 반복되고 몸은 이를 견디지 못해 결국 잠으로 몸을 식히는 방법밖에 없다.부승희는 정신이 흐릿해지고 마치 자신이 비어버린 것처럼 텅 빈 껍데기만 남은 느낌이었다.자신이 얼마나 아픈지 설명할 수 없었지만 가슴이 무겁고 숨을 쉴 수 없었으며 뇌 속의 모든 생각은 끝없이 반복되는 기억들로 가득 차 있었다.부승희는 이승우와 함께 걸었던 거리 그가 사준 선물 그녀 앞에서 던졌던 장난스러운 말들 그리고 그가 돼지 농장에서 내기했던 내기를 기억했다.눈을 떠보니 베개가 다 젖어 있었다.그녀는 소리 내어 울 힘조차 없었다. 온몸의 힘은 이승우의 소식을 본 순간 모두 사라져 버렸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몇 번이고 기절했고 누군가가 왔다 갔다 하며 부승희의 상태를 확인했다.매번 깨어날 때마다 부승희는 그것이 꿈일 뿐이라고 믿고 싶었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뜨거운 온기를 느낀 후에도 부승희는 여전히 그것이 현실임을 믿을 수 없었다.그때 밖에서 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며 누군가 소리쳤다.“이 대표님, 무사히 돌아오셨어요.”마치 누군가 부승희를 인간 세상으로 이끌어 당기듯 온몸에 굳어 있던 혈액이 서서히 흐르기 시작하고 심장의 압박이 사라지며 뇌의 사고 능력도 조금씩 되살아났다.입을 열어 말해보려 했지만 그녀는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이승우가 어떻게 이렇게 빨리 돌아왔는지에 대해 이상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이승우...”“부승희 나야. 무서워하지 마. 괜찮아.”이승우는 계속해서 강조했고 그녀의 눈물은 다시 걷잡을 수 없이 주룩주룩 흐르기 시작했다.그제야 반우희는 소리 내어 울음을 터뜨리며 흐느꼈다.부승희는 이승우를 꽉 붙잡고 울면서 입술은 갈라지고 눈은 불타는 듯 아팠다.이승우는 부승희가 아파하는 모습에 마음이 아팠지만 자신의 상태를 돌보지 않고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괜찮아’, ‘내가 있어’ 같은 말을 반복했다.부승희는 중간에 그를 놓았고 여전히 눈빛에는 혼란과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너 어떻게 돌아온 거야?”이승우는 웃으며 대답했다.“비행기 타고 왔어. 네가 걱정할까 봐.”그런데 그녀의 얼굴은 급격히 변했고 입을 벌리며 마치 악성의 짓궂은 말을 하듯 대성통곡했다. 한참을 울면서 그의 어깨를 때렸다.“너 감히 또 비행기를 탔어?”‘미쳤어. 비행기에서 겨우 목숨을 건졌으면서 또 다른 비행기를 타다니.’이승우는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만큼 부승희가 때려도 마음속에서는 기뻤다.“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전화가 왔어. 네가 기절했다길래 너무 걱정돼서 당장 돌아왔지.”부승희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고 그를 욕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의 어깨를 잡고 힘없이 때렸다.그녀는 이제까지 이렇게 많은 눈물을 흘린 적이 없었다.차분해지자 온몸의 세포들이 모두 지치고 피곤한 듯 느껴졌고 특히 얼굴은 여기저기 아프게 울렸다.이승우는 작은 스탠드 등을 켜고
부승희는 당연히 엄우한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들 세대의 인물 중에서, 세운에서 큰 영향을 미치는 인물이자 엄 씨 항공의 총책임자이기도 했다.부승희는 의자에 앉히며 물었다.“너 엄우한 씨와 친분이 있어?”“없어.”“그럼 어떻게...”“난 뻔뻔하거든.”이승우는 입꼬리를 올리고 약간 자랑스럽게 말했다.“엄우한 씨에게 집에 있는 아내가 소식을 듣고 기절해 버렸으니까 빨리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지.”부승희는 말문이 막혔다.“...”평소라면 그녀는 그를 바로 때렸을 텐데 오늘은 힘이 없다.그녀는 그와 마주 앉아 젓가락을 건네며 휴대폰에서는 최신 보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전에 내부에서 유출된 소식에 대해 티선항공은 응답을 거부했지만 이제는 비행기가 안전하게 착륙했다는 보도가 쏟아지고 있었다.그녀가 잠드는 동안 엄 씨 항공과 티선항공은 그 사건에 대해 공식적으로 구출 작업을 하고 있다는 태도를 발표했다.[현재 비행기는 안전하게 몽운시에 착륙했으며 사고 원인은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비행기의 기장인 설지윤 씨가 티선항공에서 최초로 임명된 여성 기장이라는 사실입니다. 최근에는 설지윤 씨가 티선항공 대표인 감우지 씨와 연인 관계라는 소식도 전해졌습니다.]이것은 단순한 찌라시 뉴스에 불과했다.부승희가 그 뉴스를 넘기려던 찰나 이승우가 밥을 두 입 먹고 말했다.“그게 사실이야.”“뭐?”“그 여자 기장이 감우지 씨의 여자친구야.”부승희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이승우는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있다는 게 정말 대단하다.“도대체 비행기가 왜 사고를 낸 거야? 날씨 때문이었나?”“아니야. 누군가가 비행기를 납치했어.”“뭐?!”부승희는 놀라서 식은땀이 났다.이승우는 그녀의 표정이 좋지 않자 일부러 가볍게 부승희의 얼굴을 눌렀다.“괜찮아. 나 지금 이렇게 멀쩡하게 있잖아. 비행기 탑승한 사람들 모두 다 무사해.”부승희의 마음이 조금 가라앉으면서 그녀는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고 그를 보았다. 잠시 멈추고
부승희의 마음이 요동쳤지만 애써 침착한 척하며 얼굴을 돌렸다.“지금 무사히 돌아와서 두 그릇이나 먹었잖아. 그러니까 그렇게 불쌍한 척하지 마.”이승우는 부승희를 더 꽉 안으며 여전히 그녀의 얼굴 가까이에 머물렀다.“불쌍한 척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깜짝 놀랐어. 그때 정말 한 치 차이였어. 범죄자가 액체 폭탄을 가지고 있었고 조종실을 장악하려 했지만 실패해서 객실로 밀려났어. 그때도 미친 듯이 소리쳤고.”부승희는 그의 몸에 묻어 있던 피를 떠올리며 심장이 요동쳤다. 그러나 애써 참고 당장 그가 다친 곳을 확인하려 하지 않았다.긴장감이 감도는 순간 갑자기 이승우가 부승희를 가로로 안아 들었다.“뭐 하는 거야?”깜짝 놀란 부승희가 본능적으로 그의 목을 감싸자 이승우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자기 이마를 맞댔다.“그냥 너랑 얘기 좀 하려고. 너무 급하게 돌아와서 아직도 꿈꾸는 것 같아. 너무 일찍 자고 싶진 않아서.”부승희는 잠시 침묵했다. 사실 그녀도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그냥 이야기를 나누자는 생각이 들었다.이승우는 그녀를 침대에 눕혔고 부승희는 침대 헤드에 기대앉았다. 그도 그녀 곁으로 와 앉으며 이불을 당겨 덮어주었다.“비행기에 특별한 사람이 있었어? 범죄자는 돈을 노린 거야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었던 거야?”부승희가 조용히 물었다.이승우는 고개를 저었다.“잘 모르겠어. 공식 조사 결과를 기다려야 할 것 같아.”“상황이 불분명한데 승객들은 바로 내려올 수 있었어?”“당연히 안 되지.”이승우는 잠시 눈을 내리깔다 이내 고개를 들어 말했다.“만약 대단한 분이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면... 난 오늘 밤 이곳에 돌아오지 못했을 거야.”부승희는 잠시 생각하다가 그를 천천히 훑어보며 물었다.“그러면 너 옷에 묻어 있던 피는 대체 뭐였어?”이승우는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부기장과 그 범죄자의 피야.”그는 평온하게 말하려 했지만 여전히 몸 어딘가에 남아 있는 후유증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비행기가 연락이 끊긴 건 범죄자가
부적의 플라스틱 포장이 여전히 그대로라서 10년이 지나도 색깔은 변하지 않았고 그가 여전히 그 작은 부적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예전에 부승희가 그를 위해 사 준 작은 평안 부적은 그저 대수롭지 않게 주었던 것이었고 서로 주고받은 작은 선물들이 많아서 그때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 작은 물건을 손에 쥐었을 때 그녀는 그게 믿기지 않았다.이승우는 그녀 옆에 누워 말없이 바라보며 말했다.“이 부적 덕분에 내가 지난 10년 동안 무사히 지낸 거야. 그때는 이번에도 반드시 잘 넘길 수 있을 거로 생각했어.”이승우의 시선은 그녀의 멍한 옆얼굴에 닿았고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결국 중요한 순간에 나는 너한테 의지할 수밖에 없었어.”부승희는 코가 시큰해졌고 눈살을 찌푸리며 부적을 그의 손바닥에 툭 쳐서 다시 돌려주었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외국 물건이 뭐가 도움이 된다고 그래?”“네가 무사히 돌아온 건 우리의 부처님이 지켜준 덕분이지.”“방향을 잘못 잡았네.”이승우는 한숨을 쉬며 웃음을 터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맞네. 내가 감사할 대상을 잘못 찾았네.”말을 마친 후 그는 지갑에서 부적을 다시 꺼내 그곳에 넣었다.부승희는 그가 떠날 때 그에게 무사히 돌아오길 말하려 했지만 결국 말하지 못했다. 그때 이승우는 이유도 없이 주머니를 가볍게 두드렸다.이승우는 그녀가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이미 짐작했기 때문에 주머니를 가볍게 두드리며 그 안에 평안 부적이 있다고 말해줬다.부승희는 입술을 깨물고 시선을 돌렸다.“왜 아직도 그걸 가지고 있어? 다음에 절에 가서 참배나 하고 오지 그래.”“참배는 꼭 해야지. 하지만 이건 버릴 수 없어.”그는 부적을 제자리에 두고 갑자기 이불을 당겨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어차피 나는 어느 신도 믿지 않아.”이승우가 무사히 돌아온 것에 대한 감사가 절정에 달한 부승희는 그 말에 혀를 차며 말했다.그녀는 그를 바로잡으려 했지만 그의 차분하고 진지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널 좋아한다고 여러 번 말했지만 정작 제대로 사과한 적은 없었어. 배여진이 사고 난 그날 밤 사실 너한테 말하려고 했거든. 그런데 막상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이 왠지 공허하게 느껴지더라. 그냥 한마디 말로는 부족할 것 같았어. 그래서 시간을 두고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더 진심을 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하늘은 내게 그런 시간을 허락하지 않더라. 마치 나에게 기회조차 주지 않겠다는 듯이. 그때는 정말로 이대로 끝이라고 생각했어.”그 말을 할 때 이승우의 목소리는 살짝 떨렸고 잠시 말을 멈췄다.부승희는 눈가가 뜨거워졌고 평소에는 잘 터지지 않던 눈물샘이 한밤중에 초과근무를 시작했다.베개를 눈물로 적시기 싫어 못마땅한 듯이 휴지를 뽑아 들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입을 열어 그만하라고 하려 했지만 목이 잠겨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짜증 나. 도대체 왜 이렇게 말이 많아.’“너 도대체...”그녀는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도대체 잘 거야. 안 잘 거야?”“이제 잘게.”“말하지 마.”“...응.”이승우는 한숨을 쉬고는 그대로 그녀를 바라보는 자세를 유지했다.한참이 지나고 부승희는 이승우가 여전히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 시선이 확신을 주지 않아 불안했다.이승우의 고른 숨소리를 들으며 부승희는 잠시 코를 훌쩍인 뒤 천천히 몸을 돌렸다.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부승희는 안도하며 조용히 몸을 눕히고 잠을 청했다. 그리곤 시선의 끝자락으로 이승우를 슬쩍 바라보았다.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흉터가 남아 있었다. 옆으로 누운 채 살짝 웅크린 모습 한 손을 베개 위에 올려놓고 자는 모습은 평소 180cm가 넘는 크고 듬직한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쓸쓸해 보였다.그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 당시 상황을 상상하니 부승희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두려움과 걱정이 뒤섞여 심장이 먹먹해졌다.부승희가 생각에 잠긴 사이 갑자기 이승우가 눈을 떴다.그들은 시선이 맞닿자 부승희는 당황한 듯 잠시 멈칫했다.“...”이승우는 평온한 표
“내가 널 위해 운 건 내 안에 양심이 있기 때문이야.”부승희 변명하듯 말했다.“양심 말고는?”“...”부승희가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돌아누우려 하자 이승우가 재빠르게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멈춰 세웠다.그녀는 그를 흘겨보았지만 이승우는 담담히 말했다.“너 자꾸 나한테 얼버무리기만 하잖아. 가끔은 진짜 속마음도 좀 털어놔. 다 말하고 나면 바로 잘게.”“자든 말든 네 마음대로 해.”이승우는 부승희의 날 선 말투를 흘려듣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네가 나 때문에 울었던 건 아직도 나를 조금은 좋아해서지?”부승희는 그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친 순간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고 그녀는 침을 삼키며 화난 듯 외쳤다.“좋아하면 어쩌라고? 나 좋아하는 사람 많거든?”이승우가 낮게 웃음을 흘렸다.“뭐가 그렇게 웃겨?”“기분 좋아서. 웃으면 안 돼?”“한 번만 더 웃으면 당장 나가.”부승희는 못마땅한 듯 등을 돌리고 깊이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잠시 정적이 흐른 뒤 그녀가 입을 열었다.“너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내가 너를 조금 좋아하고 네 걱정을 했다고 해서 이번 일을 계기로 너랑 더 가까워질 거란 생각은 하지 마.”“알아.”그녀가 이 정도까지 말해준 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만족했다.“나 진짜 운 좋은 놈이지.”그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그동안 그렇게 막살아도 결국 이렇게 살아 돌아왔고 너랑 같이 사업도 하고 매일 널 볼 수도 있었어. 심지어 죽을 뻔한 날엔 네가 날 위해 울어줬지.”이승우는 무심한 듯 손을 뻗어 부승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부승희 네가 아직도 날 조금이라도 좋아하고 걱정해 준다는 게 너무 좋다.”부승희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아주 조금일 뿐이야.”“...그것만으로도 충분해.”그녀는 콧방귀를 뀌었다.이승우가 또 무슨 말을 하려 하자 그녀는 재빨리 몸을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한마디라도 더 하면 가만 안 둬.”이승우는 웃음을 참으며 입을 지퍼로 잠그는 시늉을 했다.‘입 닫고
오성호가 죽자 양혁수는 그냥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모든 걸 혼자 감당할 거로 생각했다.누군가 그에게 ‘네가 악몽 꿀까 봐 걱정돼’, ‘슬플까 봐 걱정돼’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자신 안에서 일어난 미세한 감정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그날 밤 변여름은 마치 작은 수호신처럼 조용히 그의 곁을 지켰다.그는 처음으로 마음속 어딘가에 기대어도 된다는 감정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시곗바늘이 돌아가는 미세한 소리를 들으며 전보다 훨씬 평온한 마음으로 잠들었다.해가 막 떠오르려는 새벽에 오성호는 고요히 숨을 거두었다.양혁수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가장 간단한 절차로 화장을 준비했다.며칠 전 한강시에서 오래된 집사가 찾아왔다. 겉으로는 인사차 왔다고 했지만 양혁수는 양지원이 그를 대신해 장례를 챙기도록 보낸 거로 생각했다.이틀 만에 모든 절차가 끝났고 그는 유골함을 집에 임시로 안치한 뒤 며칠 후 한강시로 옮길 준비를 했다.설날이 다가오자 양지원이 전화를 걸어 어디서 보낼지 물었다.십 대 후반부터 이십 대 초반까지는 북적이는 곳을 즐겼지만 요즘은 성격이 한층 차분해져 설날에도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꺼렸다. 그래서 할아버지를 한강시로 모셔 함께 명절을 보내거나 그가 경인으로 가는 편이 가장 편하고 좋았다.하지만 올해는 곁에 변여름이 있었다.그녀는 설날을 특별히 챙기지 않는 집안 출신이라 굳이 집에 갈 필요도 없었다.양혁수는 그녀를 어디로 데려갈지 결정하지 못했고 일단 양지원에게 말을 돌렸다.그는 변여름이 나이는 어리지만 자신보다 훨씬 더 많은 걸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그때 노지혜가 끼어들었다.“그쪽에서는 설날이 큰 행사예요. 진짜 사귀는 여자 친구라면 데려가야죠.”변여름이 알아본 바로는 그 말이 꼭 들어맞는 건 아니었다. 여자 친구들도 대부분 설날에는 자기 집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집에 가는 게 귀찮았고 이번만큼은 양혁수가 자신을 데려가는 것도 자연스러운 상황이
변여름의 한마디에 양혁수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만이 가슴에 가득 찼다.그가 이를 악물자 변여름은 진심 어린 아쉬움이 스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70점은 너무 적어요. 내가 오빠한테 키스 몇 번 더 할 테니 80점으로 올려줄 수 있어요?”양혁수는 어이없었다.“...”그는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끝내 시선을 들지 못한 채 도망치듯 발걸음을 옮겼다.변여름은 그의 등 뒤를 꼭 끌어안았다. 마치 끈적하게 달라붙는 상큼한 레몬 맛 엿처럼 좀처럼 떨어질 줄 몰랐다.양혁수는 도무지 그녀를 떼어낼 수 없어 결국 그녀를 끌어안은 채 조용히 들어 올렸다.변여름은 놀란 숨을 삼키며 그를 꼭 껴안았고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그의 얼굴에 바싹 닿아 있었다.그는 숨을 깊게 들이쉰 뒤 변여름을 흘겨보며 냉정하게 말했다.“지금은 59점이야.”‘푸. 80점을 바라다니.’변여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잽싸게 다가가 양혁수의 입술에 짧게 키스했다.“60점이면 좋아요. 80점까지는 욕심내지 않을게요.”양혁수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리며 코웃음을 흘렸다.그녀를 안은 채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변여름은 그의 옆모습을 가까이서 바라보았다. 심장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그녀는 늘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크고 작은 사고도 잦았다. 하지만 어떤 성취보다 지금 이 남자의 마음을 얻는 일이 더 벅차고 소중했다.그가 몇 점을 주든 그녀는 그저 기뻤다.양혁수는 그녀의 시선을 눈치채고 곁눈질로 그녀를 슬쩍 바라보았다.그녀는 조용히 입꼬리를 올리며 그의 품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목에 닿는 그녀의 힘은 마치 목줄 같았다. 양혁수는 속으로 생각했다.‘이제 이 골칫덩이를 정말 떼어낼 수 없겠어.’하지만 떼어내고 싶지도 않았다.그가 화서시에 온 이유는 오성호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서였지만 오성호가 바로 죽지 않아 그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처음 며칠은 우울했지만 그 뒤로는 일주일 넘게 변여름에게 꼼짝없이 붙잡혀 있었다.함께 먹고 함께
양혁수는 목을 가다듬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한 얼굴을 지었다.“...조금?”‘응?’변여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지더니 이내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실험실의 연구자처럼 엄정한 표정을 지었다.“조금이면 몇 퍼센트쯤 되는 건가요?”양혁수는 잠시 생각했다.변여름은 계속해서 추궁했다.“만점이 백 점이면 조금은 몇 점쯤 될까요?”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고 방금의 말이 너무 경솔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너무 높게 말하면 선을 넘을 것 같고 너무 낮게 말하면...’양혁수는 변여름의 얼굴에 스친 심각한 표정을 보고 그 생각을 떨쳐냈다. 너무 낮게 말했다간 변여름이 당장이라도 사람을 잡아먹을 것만 같았다.그는 조심스럽게 그래도 비교적 안전해 보이는 점수를 입에 올렸다.“60점.”‘60점밖에?’변여름은 입술을 꾹 깨물고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양혁수는 순간 멈칫했다.‘너무 낮았나?’그가 서둘러 말을 수습하려던 찰나 변여름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잠시 이를 악문 채 감정을 눌러 담고는 이내 다시 고개를 들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오빠, 60점은 좀 적어요. 다시 말해줄 수 있어요?”‘네?’그녀는 가볍게 말했지만 양혁수는 그 말이 왠지 모르게 섬뜩하게 느껴졌다.머릿속이 지끈거리는 동시에 그는 어이없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변여름은 예전에 연기를 참 잘했는데 요즘은 점점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것 같다.에든베타에 있을 때부터 그를 부려 먹더니 이제는 그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마음대로 휘두르려 드는 것이다.‘하하. 말도 안 돼.’지금 그녀는 감히 그의 머리 위에서 놀아보겠다는 듯 행동하고 있었고 앞으로 이 관계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60점이면 많아.”그는 눈빛을 바꾸며 마지못해 후회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사실 50점 정도인 거야.”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변여름은 한 발짝 다가와 그의 발끝에 그녀의 발끝을 겹쳤다.양혁수는
키스는 쉽지만 그것이 끝나자마자 머리가 아파졌다.입술을 떼자 양혁수는 웃고 있는 변여름의 눈과 마주쳤고 그 순간 그는 망했다고 느꼈다. 그녀에게 완전히 휘둘릴 것 같았다.역시 변여름은 그에게 물었다.“오빠, 이번에는 오빠가 먼저 키스한 거죠?”“...”“사실 처음이 아니잖아요. 에든베타에서도 오빠가 갑자기 나를 안고 키스했잖아요.”“...”“왜 일어나요?”‘왜? 너를 피하려고.’양혁수는 도망치고 싶었다.변여름은 그를 따라가 그의 앞을 가로막고 양손을 느긋하게 등 뒤로 모은 채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오빠, 인정 안 할 거예요?”양혁수는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핥고는 억지로 말했다.“네가 몇 번이나 키스했는데 내가 따지기라도 했어?”변여름이 말했다.“따져요. 난 인정할게요.”양혁수는 어이없었다.“...”그는 그녀를 쳐다보고 입술을 깨물었다가 갑자기 틈을 찾아 옆으로 빠져나가려 했다.변여름은 재빨리 움직여 그의 품에 안기며 꽉 껴안았다.양혁수는 그녀의 턱에 부딪혔다. 세게 부딪힌 것은 아니었지만 아픔보다는 놀란 듯 심장이 쿵쾅거렸다.그는 침을 삼키고 그녀의 한숨 소리를 들었다.“오빠, 그러면 안 돼요. 내가 키스하게 했잖아요...”양혁수의 얼굴이 빨개졌고 오랫동안 바른 사람으로 살아온 그에게 악당 역할은 서툴렀다.갑자기 키스해 놓고 인정하지 않으려니 좀 어색했다.양혁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폼을 잡으며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물었다.“내가 인정 안 한다고 했어?”변여름은 1초 만에 고개를 들었다.“응?”그녀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키스 한 번에 이렇게 큰 진전이 있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양혁수는 전에 변여름을 꼬마 변태라고 부르며 지능이 뛰어나다고 했지만 지금 보니 그 말이 맞지 않았던 것 같았다. 몇 번이나 자신에게 이득을 보게 했는데 오늘에서야 그에게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변여름은 그에게 물었다.“오빠, 진짜 인정할 거예요?”양혁수는 마음속으로 변여름이 어디까지 나아가려는지 알 수 없어 불
집사가 창문을 여는 순간 계단에 앉아 있는 양혁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쯧쯧. 요즘 젊은 사람들은 엉덩이가 안 차가운지 몰라.’아래층에서 변여름은 스스로 제안한 낭만을 즐기려 분위기를 내보려 했지만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후회했다.“오빠, 우리 들어가요.”양혁수는 일부러 모르는 척하며 물었다.“낭만은 벌써 끝난 거야?”변여름이 말했다.“...엉덩이 안 차가워요?”양혁수는 물론 알고 있었다. 앉자마자 속으로 거친 말이 먼저 떠올랐다.그녀를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절대 앉지 않았겠지만 정원 풍경이 제법 괜찮아 기분이 좋아진 그는 곧장 들어가지 않고 차고에 들러 방석 두 개를 가져왔다. 그리고 하나를 변여름이게 건넸다.엉덩이는 보호했지만 변여름은 다시 양혁수 곁으로 바싹 다가앉았다.그는 아무 말 없이 핫초코를 마셨고 그녀 역시 말없이 그와 함께 따뜻한 시간을 나눴다.잠시 후 온몸이 데워진 양혁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그 소리를 들은 변여름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오빠, 기분 좀 나아졌어요?”양혁수는 그녀가 죽어가는 친아버지를 보고 마음이 복잡할까 봐 일부러 자신을 찾아온 것임을 알아챘다.‘사람이 살면서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진심을 받을 수 있을까.’그는 속으로 꽤 흐뭇했지만 양지원을 제외하고도 어떻게 누군가가 그것도 여자가 자신에게 이렇게 따뜻하게 대할 수 있는지 문득 궁금했다.그는 변여름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이렇게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거 힘들지 않아?”“힘들지 않아요.”변여름은 핫초코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마치 오래 준비했던 듯 담담히 말했다.“내가 오빠 좋아하잖아요.”양혁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내가 뭐가 좋아?”변여름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답했다.“오빠가 양혁수여서요.”순간 양혁수의 마음은 멍해졌다.변여름은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미소 지었다.“오빠가 양혁수인 이상 전 계속 좋아할 거예요.”흔들리는 마음을 숨기려 그는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정원은 고요했고 언제부터인가 그
변여름은 남자를 유혹할 때 감정을 자극하는 전략에 집중했다.그녀의 이해력과 용기를 보면 오토바이를 배우는 건 식은 죽 먹기였고 양혁수는 각 부분의 기능만 설명해 주면 그녀는 곧바로 탈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하지만 변여름은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고 설명을 다 들은 뒤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어려워요. 오빠는 어떻게 이렇게 잘해요? 이것도 다 알고… 그래도 오빠가 태워줘요. 안 그러면 저, 넘어질까 봐 무서워요.”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변여름이 순진하고 귀여운 척 연기할 때마다 마치 덩치 큰 남자가 억지로 애교 부리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말하고 싶었다.‘능숙하긴 한데 그런 애교는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아.’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변여름은 작은 가방에서 가죽 장갑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며 그의 주머니에서 털실 장갑을 꺼냈다.“난 오빠가 장갑 안 낄 줄 알았어요.”변여름은 한숨을 쉬며 끈 장갑을 목에 걸고 장갑을 낀 뒤 손뼉을 쳐가며 그 따뜻함을 느꼈다.양혁수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따뜻하게 옷을 챙겨 입은 걸 알아차렸다.목도리가 높게 올라와 작은 코를 가렸고 머리에는 털실 모자를 썼으며 짧은 울 코트와 스커트 세트에 검은색 이너와 롱부츠까지 갖춰 입은 모습은 멍청하지도 과하지도 않았다.순진함과 달콤함을 동시에 지닌 그녀를 보며 그는 듬직한 남자가 애교 부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오히려 귀엽다고 생각했다.“모자 벗고 헬멧 써.”그가 말하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모자 끝에 달린 털 방울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날리는 머리카락을 눌러주고 그녀의 손을 잡아 천천히 모자를 벗겼다.변여름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자 역시나 양혁수는 직접 그녀에게 헬멧을 씌워줬다.마스크 너머로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마스크를 위로 올렸다.그러자 양혁수는 다시 그녀의 마스크를 아래로 내려주며 말했다.“나중에 차 타고 가면 얼어 죽을 거야. 함부로 벗지 마.”‘네.’그
오성호가 한창 잘나가던 시절에도 양혁수는 그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지 않았다. 하물며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죽음을 앞두고 짧게 마주한 이 순간엔 더욱 그랬다.묘지 이야기가 끝나자 부자 사이에는 말 한마디조차 스며들 수 없는 침묵이 내려앉았다.오성호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과연 그는 지금 자신의 아이를 보고 있는 건지 단지 피를 나눈 존재를 바라보는 건지 아니면 양혁수를 통해 잊힌 과거를 떠올리며 전혀 다른 누군가를 보고 있는 건지 모른다.양혁수는 그것을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그는 오성호가 양지원을 만나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했고 오성호는 한참 뒤 남아 있는 힘을 다 짜내 그에게 물었다.“네 엄마는...잘 지내니?”양혁수는 사실대로 말했다.“말씀하신 대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요.”오성호가 웃자 산소마스크에 김이 서렸고 그는 눈을 감은 채 다시 조용해졌다.양혁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다른 부탁은 없어요?”오성호는 양혁수가 떠나려는 기척을 느끼고 다시 눈을 떠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날씨가 추워...빨리... 집에 가...”양혁수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고 사람들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데 익숙했지만 지금 이 사람의 마지막 두 마디가 진심인지 거짓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진심이든 거짓이든 그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성호를 마지막으로 한 번 바라본 뒤 돌아섰다.서로 30년 넘게 부자로 살아왔지만 결국 남은 건 몇 마디 말뿐이었다.문을 닫으려던 순간 양혁수는 침대에 누운 이가 힘겹게 문 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뒤돌아보지 않고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섰다.올 때와는 달리 밖으로 나서자 마치 어둠에서 밝은 곳으로 나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차가운 달빛 아래 고요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좁은 공간에 갇혀 있던 답답함이 뻥 뚫리는 듯했다.양혁수는 계단에 멈춰 서서
“나 혼자 가면 돼.”양혁수가 말했다.변여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뒤 끈 달린 장갑을 꺼내 들며 말했다.“알아요. 그냥 장갑 가져다주려고요.”양혁수는 장갑을 보자 절로 웃음이 나왔고 침잠했던 기분이 조금씩 풀렸다.“나가서 끼면 돼.”“분명히 거짓말이에요.”변여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으나 끝내 그를 다그치지 않고 장갑을 조용히 그의 품에 안겼다.그녀는 그를 배웅하며 갑자기 물었다.“주차장에 오토바이 있던데 내가 타도 돼요?”“오토바이 탈 줄 알아?”변여름은 고개를 저었다.“몰라요. 하지만 배울 수 있어요.”“배울 필요 없어.”양혁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헝클이며 말했다.“추운 날 오토바이 타면 귀 얼어서 떨어질지도 몰라.”변여름은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러면 나중에 오빠가 가르쳐줘요.”“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자.”양혁수는 계단을 내려갔다.차에 타기 전 창밖 너머로 변여름이 손을 흔들며 목에 무언가를 거는 시늉을 하자 양혁수의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번졌다.오성호가 입원한 곳은 조용한 곳에 자리한 개인 병원이었고 밤 9시가 넘자 주변은 소란스러움이 가라앉았다.저택에서 병원까지는 잠깐이었지만 병원 밖에서 병실까지는 20분이나 걸렸다.양혁수는 정원을 지나 사람 하나 없는 긴 복도를 걸었고 부드러운 조명이 어슴푸레하게 빛나는 개인 정원에 도착했다. 그 사이 그는 오성호의 모습을 떠올리며 최악의 상황을 상상했다.그러나 병상에 누워 있는 오성호의 모습을 보고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그의 얼굴은 검게 그을린 데다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고 양쪽 볼은 부어 있었으며 눈은 천장의 형광등을 멍하니 응시한 채 공허했다.소리를 들은 오성호는 낡은 자루처럼 거칠게 숨을 내쉬며 몸을 움직여 문 쪽을 바라보았다.양혁수가 들어서는 걸 보자 그의 눈에 희미한 빛이 스쳤지만 이유를 알 수 없이 곧 사그라졌고 낯선 이를 보는 듯한 평온만이 남았다.“왔구나...”그가 입을 열었지만 그 목소리는 듣는 이를 거슬리게 할 만큼 거칠고 불쾌한 소리
변여름은 스웨터와 목도리 장갑 한 켤레를 챙겨 왔다.양혁수가 스웨터를 걸쳐보니 몸에 맞았고 목도리 역시 흠잡을 데 없이 자연스럽게 어울렸다.하지만 그는 끈 장갑을 들어 올리며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여름아, 이런 장갑은 아이들이 잃어버릴까 봐 쓰는 거잖아.”변여름은 말없이 그러나 단호하게 장갑 끈을 그의 목에 걸어주었다.“오빠, 평생 오빠를 위해 장갑을 떠줄 거지만 내가 뜬 장갑은 소중하니까 잃어버리면 안 돼요.”“...”양혁수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착용은 할 수 있겠지만 끈만큼은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털실 장갑은 별로 따뜻하지 않아. 보온성은 가죽 장갑이 훨씬 낫지.”그가 넌지시 말하자 변여름이 고개를 들었다.“그러면 끈을 가죽끈으로 바꿔줄게요.”양혁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됐어. 됐어.’두 사람은 한참을 고집스럽게 맞서다가 결국 다시 분위기가 누그러졌다.기분이 좋았던 그는 결국 변여름의 달콤한 설득에 넘어가 담요 뜨는 법까지 배우게 되었지만 이내 장난스럽게 시범을 보여달라며 매우 긴 부분은 늘 여름이 대신 떠주곤 했다.“곧 설날이네요.”조용하던 틈에 변여름이 말을 꺼내자 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잠시 정적이 흘렀고 변여름은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오빠, 저희 화서시에 가요.”양혁수의 손이 멈췄다....양혁수는 기억이 시작된 순간부터 오성호에게 호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다른 아이들이 간절히 바라는 부성애가 필요할 나이였지만 그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양지원이 준 사랑이 넘쳐흘렀기에 ‘아버지’라는 감정의 빈칸조차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그러나 혈연이란 참으로 기묘하고도 무서운 것이었다. 오성호가 아무리 끔찍한 사람일지라도 그는 분명 양혁수의 친아버지였다.그리고 생사의 경계 앞에서 누구도 완전히 무심할 수는 없었다.결국 양지원은 오성호를 죽이지 못했다. 대신 화서시에 가둬 더 이상 악행을 저지르지 못하게 했다.양혁수는 그 후로 단 한 번도 오성호를 찾아가지 않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