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혁수는 순순히 차에 올랐다. 사실 고분고분 차에 오른 건 빠르게 차 안의 전등을 켜버려 소녀를 깜짝 놀라게 할 생각이었다.그러나 차에 오르고 변여름은 양혁수의 옆자리에 찰싹 붙었고 점점 더 다가왔다.되레 당황한 건 양혁수 쪽이었고 밀어내지도 못해 몸을 살짝 옆으로 돌렸다.“지금 뭐 하는 거야?”“잠시면 되니까 그대로 움직이지 말고 계세요.”“바른대로 말해. 뭐 하려는 거야?”“설마 내가 허튼수작이라도 부릴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그럼 내가 걱정하지 않게 됐어? 넌 정말 그럴 것 같단 말이지.”“최대한 참아 볼게요.”변여름은 한 손으로 양혁수의 어깨를 꾹 눌렀다.만약 양혁수가 반대 손을 뻗는다면 바로 품에 안을 수 있었다. 변여름이 조금만 더 과감한 사람이었다면 양혁수의 다리 위를 올라탈 수도 있었다.그 모든 가능성이 양혁수의 머릿속을 스치고 있는데 눈가에 천 조각이 느껴졌다.긴 천 조각은 정확하게 양혁수의 눈을 덮었고 은은한 향기가 풍겨왔다. 변여름은 조심스럽게 양혁수의 뒤통수에 매듭을 지었다.“이건 오빠 차니까 오빠가 전등이라도 확 켜버리면 내가 얼마나 놀라겠어요? 그러니까 혹시나 해서 오빠 눈을 가려야겠어요.”“...”‘대체 무슨 의심은 그렇게 많은 건지.’변여름은 점차 렌즈에 적응이 되어 어둠 속에서도 편하게 움직일 수 있었으나 주변이 온통 깜깜한 탓에 양혁수의 표정까지 보이지는 않았다.그래서 상상으로 눈을 가린 양혁수의 모습을 떠올렸고 부드러운 손놀림과는 달리 머릿속엔 아주 불순한 생각만 가득했다.지금이라도 전등을 켜고 그 모습을 눈에 담고 싶었다.“자. 다됐어요.”변여름은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손을 내렸다.양혁수는 두 손을 어디에 두면 좋을지 몰랐고 긴 한숨을 푹 내쉬었다.“얌전히 제 자리에 앉아. 안 그러면 전등 확 켤 거니까.”“네네. 알겠어요.”변여름은 아쉬운 마음을 숨기지 않았고 고분고분 옆자리에 앉았다.천 조작은 불편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런 속박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양혁수는 당장
변여름은 아기 새에게 먹이를 먹이는 것처럼 양혁수에게 음식을 넘겨줬다.“배불러.”양혁수가 멈추라고 하자 변여름은 아쉬운 마음에 남은 과자 한 조각을 제 입에 넣었다.양혁수는 그래도 오늘 저택을 찾은 그 목적을 잊지는 않았다.“아버지 화장 날짜는 정했어?”“내일이에요.”양혁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설마 다른 사생아가 찾아올까 봐 큰어머님이 급하게 화장 날짜를 잡은 거 아니야?”“네. 맞아요.”변여름은 허현무에 대한 질문에는 하나도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허예나 본인도 허현무에게 남은 감정이 없었다.그래도 사건이 마무리된다면 변여름은 허예나 모녀가 편히 지낼 곳은 마련해 줄 것이다.양혁수는 허예나가 적어도 유산에 관해 얘기를 꺼내며 자신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한참이 지나도 허예나는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다.사방이 캄캄해 상대가 잘 보이지는 않아도 양혁수는 상대가 저만을 바라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자신을 이곳으로 부른 이유가 유산 쟁탈이 아니라 고작 연애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이런 생각을 하는데 변여름이 양혁수를 불렀다.“오빠, 차에 마실 물 있어요?”시간이 지날수록 양혁수는 허예나의 목소리가 점점 더 잠기는 걸 발견했다.그래서 손을 더듬어 생수를 찾아 허예나에게 건넸다.변여름은 생수를 받아쥐고 손쉽게 그 뚜껑을 열었다.그러나 이미 누군가 마신 건지 새 생수를 따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자 두 사람은 모두 당황해 버렸다.생각해 보니 양혁수가 방금 마셨던 물 같았다.“앞에 있는 새 생수 가져다줄게.”변여름은 그 말을 무시하고 꿀꺽꿀꺽 물을 마셨다.그 물을 마시는 소리가 귓가에 아주 선명하게 들렸다.‘쯧.’그냥 물을 마셨을 뿐인데 긴장한 양혁수가 느껴져 변여름은 그 상황이 조금 웃겼다.변여름은 이런 양혁수를 빤히 보다가 생수 뚜껑을 닫고 양혁수의 손에 생수를 쥐여주었다.양혁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생수를 원위치에 내려놓았다.그때, 변여름은 양혁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고 양혁수가 고개를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양혁수가 차가운 목소리로 묻자 변여름이 대답했다.“잠깐 기대고 있는 것도 안 돼요?”“...”양혁수는 길게 심호흡하고 뒷말은 삼켰다.이에 만족한 변여름은 양혁수의 오른쪽 팔에 더 바짝 다가가고 깍지 낀 손에도 더 힘을 주었다.양혁수는 과감하게 다가오는 허예나의 행동에 조금 적응이 된 것 같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 상황이 점점 의아하게 느껴졌다.왠지 허예나는 처음부터 자신을 노리고 지금껏 모두 계산된 행동으로 움직인 것 같았다.“예나야.”변여름이 눈을 뜨고 고개를 들어 양혁수를 바라봤다.양혁수도 변여름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우리 혹시 전에 알던 사이이니?”의문문이었지만 왠지 확신에 찬 말투였다.변여름은 양심에 찔려 조금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그럼 날 기억은 해요?”“...”양혁수가 기억을 할 리가 없었다.그전에도 종종 이런 의심을 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허예나를 과거에 만난 적이 없는 것 같았다.“넌 날 알고 있었던 거지?”양혁수는 질문을 바꿨다.하지만 변여름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익숙함을 느끼는 양혁수에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양혁수는 정말 과거에 허예나와 친분이 있었는데 자신이 홀라당 잊어버리는 무례를 저질렀을까 걱정을 했다.한참 침묵이 흐르고 변여름은 솔직하게 말했다.“맞아요. 난 오빠를 알고 있었어요.”“그리고 오빠를 노리고 온 것도 맞아요. 주선 상대가 오빠가 아니었다면 돈을 억만으로 줘도 하지 않았을 거예요.”양혁수는 변여름의 말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대신 상대를 향한 호기심이 점점 더 커졌으며 왼쪽 손은 저도 모르게 조명 버튼을 찾았다.궁금증이 발동하는 순간 양혁수는 행동으로 옮겼다.고민하고 망설이는 건 전혀 양혁수다운 행동이 아니었다.대체 지금 눈앞의 이 사람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딸깍. 조명 버튼이 켜지고 주변이 환해졌다.갑자기 변덕을 부린 양혁수에 변여름은 헛숨을 들이마시었다.하지
진심으로 보이는 변여름의 말에 양혁수는 고개를 돌려 변여름을 바라봤다.천 조각으로 시야는 가려졌지만 왠지 시선이 마주친 기분이 들었다.변여름은 손을 들어 양혁수의 눈썹을 쓸었다.작게 소름이 돋은 양혁수는 변여름의 손길을 피하며 말했다.“그래. 네 말 믿을게.”변여름은 몰래 입꼬리를 올렸다.차고 밖은 점점 더 소란스러워졌고 시간을 확인한 변여름은 더는 지체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가문 저택에서 제 멋대로 굴 수는 없었다.그래서 양혁수의 품에 안겨 있던 변여름은 뺏았던 양혁수의 핸드폰을 다시 돌려주고 안대도 다시 정돈하며 말했다.“오빠 나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내가 내리기 전까지 안대 벗지 않기로 약속해 주면 안 돼요?”“알겠어.”변여름은 양혁수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물끄러미 바라봤다.“아까 오빠가 뱉은 말은 꼭 지킨다고 그랬잖아요.”“...”양혁수는 반박하지 않았고 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렸다.하지만 이렇게 떠나긴 아쉬웠던 변여름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양혁수를 카메라에 담았다.이상함을 느낀 양혁수는 단번에 변여름의 손목을 낚아챘다.“뭐 하는 거야?”“사진 한 장만 찍으려고요.”변여름은 솔직하게 말했다.“너 지금 안 가면 바로 이 안대 벗어버릴 거야.”지금 양혁수가 하고 있는 건 평범한 천 조각이 아니었다. 검은색 레이스가 붙은 조각이 눈가를 감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예쁜지 양혁수는 알지 못할 것이다.변여름은 알겠다고 대답은 했으나 손놀림은 더 빨라졌다. 손을 높게 들고 양혁수가 방심한 사이 빠르게 버튼을 눌렀다.찰칵 소리와 함께 플래시가 켜졌다.양혁수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고 혼내기도 전에 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아귀에서 도망쳐 빠르게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오빠. 나 진짜 가볼게요.”너무 가까워진 거리에 양혁수는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양혁수는 인상을 더 찌푸렸으나 감히 변여름을 혼내지는 못했다.그리고 긴 한숨을 뱉고 있는데 변여름이 안대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이건 첫 만남 선물로 오빠
기사가 돌아오고 양혁수는 무표정으로 안대를 외투 주머니에 숨겼다.“어디 다녀오신 거예요?”양혁수의 질문에 기사는 난처해하며 말했다.“오늘따라 배가 아파서 화장실 좀 다녀왔습니다.”잘은 모르겠지만 허씨 가문 도우미가 내준 차를 마시고 갑자기 배가 끊어지게 아팠다.양혁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이게 우연일 리는 없어. 누군가 수작을 부린 거지.’허예나는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늘 낮은 자세로 보였지만 지금 보니 허현무 본처도 허예나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 같았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기사가 물었다.“추모식을 찾은 사람이 점점 많아지는데 지금 바로 들어가시는 게 어떨까요?”“그래요.”기사가 문을 열며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말했다.“저기 가장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바로 허씨 가문의 장남인데 소문에 따르면 아주 음흉하다고 합니다. 일반적인 장사는 돈이 안 된다고 더러운 일만 골라서 한다고 해요.”양혁수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양혁수는 내부로 통하는 문이 아닌 다른 사람들처럼 정문으로 정원을 향했다. 그리고 방금 기사의 말을 곱씹으며 자기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했다.허예나는 작은 수작은 부려도 허씨 가문 장남 같은 사람에게 걸린다면 죽어도 자신이 어떻게 죽음을 맞이한 건지 알지 못할 것이다.다른 한편 저택 안에서.변여름이 드디어 돌아오자 허예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금방 떠날 거니까 오빠가 가면 예나 씨도 나가세요. 괜히 마주치지 말고요.”“네. 알겠습니다.”변여름은 다시 작은 방으로 돌아가 창가에 기대 밖을 바라봤다. 감히 커튼을 완전히 열지는 못하고 작은 틈 사이로 밖을 훔쳐봤다.허예나는 이런 변여름을 힐끔대며 이상하게 생각했다.허예나와 변여름의 첫 만남은 사실 변여름의 납치로 시작되었다. 허예나는 이번엔 정말 죽겠구나 싶었는데 변여름이 갑자기 거액을 제시하며 거래하자고 했다.변여름은 돈을 건네며 한강시에서 가장 기세 높은 그 남자를 속이자고 했고 허예나는 속으로 변여름이 이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변태라고 생각했다.
허예나는 코너를 돌다가 가문의 도우미와 마주쳤고 자신을 부르는 그 호칭에 소스라치게 놀랐다.다행히 허예나는 양혁수가 뒤를 돌아보기 전에 몸을 숨겼다.다시 몸을 돌린 양혁수는 등 뒤로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아가씨? 설마 방금 그 여자가?’‘허씨 가문은 정말 자식이 많구나.’양혁수가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어쩌면 배다른 자매일 수도 있다는 것이었고 두 사람이 사이가 좋지 않다면 허예나에게 약을 건네주지 않을까 봐 걱정되었다.그때, 메시지가 한 통 도착했다.[목감기약이에요?][그래.][방금 받았어요. 고마워요, 오빠.]양혁수는 안심하고 저택을 빠져나갔다.추모식은 온갖 사람들이 한곳에 모였고 소란스러운 걸 질색하는 양혁수는 이런 곳을 절대 스스로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 돌아온 이유는 허예나에게 약을 건네주기 위함이며 허씨 가문 사람들에게 허예나에게 함부로 굴지 말라 경고하기 위함이었다.위층의 변여름은 약을 손에 쥐고 허예나가 건네준 따뜻한 물을 한 모금 마시며 헤실헤실 웃었다. 그러다가 허예나를 바라보며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오빠가 예나 씨 얼굴 본 건 아니죠?”허예나는 미안한 마음에 말을 늘려놨다.”“양 대표님은 저한테 관심이 없으셨어요. 저를 가문 도우미로 착각해 약을 건네주라고 당부만 하셨어요.”변여름은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계속 의심을 했고 허예나는 어쩔 수 없이 어린 애 달래듯 변여름을 달랬다.“걱정하지 마세요. 여름 씨가 저보다 백배 천배는 더 예쁘세요.”“예쁜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오빠는 예쁜 사람을 원하는 게 아니라고요.”“여름 씨는 똑똑하잖아요. 예쁘고 똑똑한 여름 씨가 양 대표님께 가장 어울리는 짝이지요.”“...”자신의 마음에 쏙 드는 말을 해주는 허예나에 변여름은 돈을 마구마구 퍼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그래요.”변여름은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고 안심한 허예나가 몰래 한숨을 내쉬며 자리를 피했다.허예나가 자리를 떠나고 변여름은 손에 쥔 약을 보물처럼 품에 꼭 껴안았다.변여름은 정말 약을
그날 밤, 변여름은 양씨 저택으로 돌아갔지만 양혁수를 만나지는 못했다.양혁수가 집에 돌아왔을 때, 집사는 양혁수에게 변여름이 벌써 잠자리에 들었다고 말했다.잠들기 전 변백호가 양혁수에게 전화를 걸었고 양혁수가 받기 전에 통화는 끊어졌다.양혁수가 다시 걸었으나 이번엔 변백호가 거절을 했다.[?][실수로 잘못 누른 거야.]양혁수는 그러려니 넘어갔고 핸드폰을 내려둔 뒤 젖은 머리카락을 말렸다.다른 한편 위층의 변여름은 바나나를 오물오물 먹고 있었다.한 손으로는 노트북의 거절 버튼을 눌러 변백호의 연락을 일방적으로 무시했다.별수 없어진 변백호는 메시지만 보냈다.[...]하지만 변여름은 절대 굽혀 들지 않았고 오히려 변백호를 협박했다.[오빠, 자꾸 내 일에 끼어들면 나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나 오빠가 생각하는 그런 나쁜 일 하지 않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여름아, 내가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혁수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변여름은 그 메시지를 조금 멈칫했다.변여름 역시 양혁수가 사실을 알아버린다면 불같이 화를 낼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괜찮아. 난 오빠 동생이니까 죽이진 않겠지.][허.]‘이럴 때만 오빠다, 이거지?’남매는 한참 침묵했고 변백호가 다시 침묵을 깨트렸다.[한 달 시간 줄게. 더 이상 선 넘지 마.]변여름은 그 경고를 무시하고 되레 변백호를 이용하려 들었다.[혁수 오빠가 날 의심하면 꼭 먼저 알아차리고 미리 나한테 말해줘.]“...”참다못한 변백호는 핸드폰을 쾅 하고 내려놓았다.변여름은 아주 덤덤하게 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아 시원해.’괜히 시비를 거는 변백호를 처리하고 변여름은 다시 침대에 누웠다.오늘엔 양혁수가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다. 아마도 아버지가 돌아갔는데 꽁냥꽁냥 연애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문자를 보내면 꼬박꼬박 답장은 왔다.변여름은 최근 2개월 동안의 메시지를 처음부터 차근차근 읽었다.오늘의 만남을 뒤로 변여름은 양혁수를 향한 마음이 점점 더 커졌고
척 보아도 허현무의 본처와 아들은 아주 총명한 사람이었다. 허예나 모녀에게는 겨우 두 개의 선택지가 있었는데, 첫째는 앞으로도 왕래하며 지분으로 허예나를 묶어두는 것과, 둘째로는 대충 돈을 쥐여주고 연을 끊는 것이었다.그리고 허예나에게 그 큰돈을 챙겨주고 겨우 연을 끊는다는 건 사실 조금 비합리적이었다.허씨 가문 아들이 멍청해서 돈을 흥청망청 나눠준 거라면 몰라도 허현무 본처는 아주 돈을 밝히고 똑똑한 사람이었다.그래서 왠지 이 결정은 허씨 가문 모자가 내린 게 아닌 것 같았다.다른 한편, 연구실 근처.변여름은 허예나가 보낸 메시지를 통해 유산 분할을 확인했다.그 금액은 바로 변여름이 조종한 것이었다.변여름은 허예나가 멍청하게 당하는 건 싫었으나 또 다른 사람의 눈에 보기에도 큰 금액을 유산 받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너무 큰 금액이라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양혁수의 의심을 살 수도 있었고 의아하게 여긴 양혁수가 조사를 한다면 들통이 날 게 뻔했다.지금껏 양혁수의 눈을 피할 수 있었던 것도 양지원의 ‘소개’로 주선된 만남이라 양혁수가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하지만 허씨 가문 전체 유산 분할을 확인한 변여름은 자신의 실수를 했다고 생각했다.변여름은 자신의 논리대로 그 금액을 책정했지만 허씨 가문 모자가 어떤 사람인지 미처 고려하지 못했다. 그 많은 사람 중에서 허예나가 유산 받은 금액은 너무 눈에 띄었다.양혁수는 그동안 이 업계에 오랜 시간 발을 담그며 이런 이상한 낌새는 바로 눈치를 챌 것이다.그 생각을 하자 변여름은 짜증이 확 치솟았고 허예나의 메시지도 무시한 채로 연구실 근처를 걸었다.그때, 또 핸드폰이 진동했다.양혁수가 보낸 메시지였다.[어디야?]변여름은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조심스레 답장했다.[요양 센터에 있어요.][허씨 가문이 내쫓은 거야? 아니면 너랑 어머님이 스스로 나오겠다고 한 거야?][스스로 나오겠다고 한 거예요. 엄마가 거길 불편해하셔서요.]변여름은 먼저 유산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오빠, 저 아버
양혁수는 보지 않아도 현재 변여름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상상이 되었다. 아마도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순수 무구한 표정을 하고 있으나 그 얼굴엔 장난기가 가득할 것이다.양혁수는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말했다.“그럴 가능성없지 않잖아.”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죠.”“그럼 내 걱정이 터무니없는 걱정은 아니지 않아?”“네. 맞아요.”이번에도 변여름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양혁수는 수비 대신 공격을 하면 뻔뻔한 변여름을 제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그러나 변여름은 생각보다도 더 강적이었다.“걱정도 참. 내가 정말 보고 싶었다면 여기 카메라라도 달아놓으면 그만이잖아요.”양혁수는 경악을 했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렸고 고개를 들어 양혁수를 바라보며 말했다.“농담이에요.”“오빠 걱정하지 마요. 나 그렇게 변태 아니에요.”‘그건 내가 판단할 일이고.’변여름의 말에 양혁수는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고 이 욕실에 정말 카메라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됐다.그때, 변여름이 갑자기 손을 뻗어 셔츠 가장 윗단추를 건드렸다.깜짝 놀란 양혁수는 서둘러 뒷걸음치며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변여름.”그러나 변여름은 전혀 당황한 기색 없이 다시 천천히 걸어와 계속 단추를 하나둘 풀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손목을 잡았고 변여름이 덤덤하게 말했다.“오빠, 셋 셀 때까지 이 손 안 놓으면 오빠 목욕할 때 나 몰래 들어올 거예요. 그리고 오빠가 잠 들었을 때 몰래 방으로 들어올 거예요.”이어 변여름은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셋...”양혁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내렸다.변여름은 정말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긴장에 숨을 헐떡이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을 웃음을 꾹 참고 남은 셔츠 단추를 모두 풀었다.그리고 양혁수가 셔츠를 벗는 동안 뒤를 돌아 프라이버시를 지켜줬다.몇 초 뒤, 변여름은 양혁수의 셔츠를 받아 쥐고 문밖으로 향했다.“오빠 나 정말 나가요. 도움 필요하면 남자 도우미 부를 테니 말해요.”
양혁수는 축축한 건 질색이라 평소 머리가 완전히 건조될 때까지 말리는 편이었다.양혁수는 드라이어를 들고 능숙하게 방향을 바꿔가며 바람을 조절했고 그 바람에 양혁수가 입은 셔츠 자락이 말리면서 양혁수의 탄탄한 몸이 그대로 드러냈다.변여름은 원래 가만히 서서 양혁수가 필요할 때 물건을 건네줄 생각이었다.하지만 주변에 은은하게 샴푸 향이 퍼지고 변여름의 시선은 자꾸 두어 개 단추를 풀어 헤쳐 드러난 양혁수의 쇄골로 향했다.순간적으로 머릿속이 멍해지고 저도 모르게 자꾸 양혁수를 힐끔대다가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음... 이건 좀 아닌 것 같아.’변여름은 슬그머니 자세를 틀어 양혁수를 등지고 벽을 바라보며 반성했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드라이어 소리가 멈췄다.변여름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고 양혁수는 무심하게 머리를 정리하고 있었다.그런데 길고 하얀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모습이 너무나도 예뻤다.‘안돼! 이 음란 마귀야 멈춰!’변여름은 인상을 팍 찌푸렸고 다른 사람의 시선을 피해 제 볼을 꽉 꼬집었다.‘좀 참으라고!’“여름아.”양혁수의 부름에 변여름이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왜요, 오빠?”“목욕물 받아놓고 나가줘.”이제 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변여름을 부려 먹었다.“알았어요.”변여름은 양혁수가 소파에 앉는 걸 확인하고 욕실로 향했다.그 사이, 양혁수는 소파에 기대앉아 시원한 과일 주스를 마시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잠시 후, 유리컵을 내려놓자마자 변여름이 욕실에서 나오며 말했다.“오빠, 준비 끝났으니까 들어가요.”“혼자 할 수 있으니까 이만 나가.”“오빠 들어가는 것까지 도와주고 나갈게요.”양혁수는 내심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머리를 대신 감겨주는 건 그렇다 쳐도, 씻는 건 꽤 사적인 영역이었다.솔직히 변여름이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면 목욕물과 갈아입을 옷도 부탁하고 싶지 않았다.욕실 안은 바깥보다 더 축축했다.변여름은 양혁수를 부축해 안으로 들어가며 어느 물건은 어디에 두었는지 설명해 줬다.양혁수는 일
양혁수는 어릴 때부터 타고난 인기에 지금껏 받은 고백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그런데 서른네 살이 되는 해에 족히 열 살은 더 어린 꼬마에게 고백 폭탄을 받을 거라고는 예상치도 못했다.며칠을 곱씹어본 끝에, 양혁수는 결론을 내렸다.이건 마치 산적 두목한테 납치당한 기분이었다!그러나 단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산적 두목은 말투가 부드럽고 귀에 착 감기는 데다, 모든 일에 적당히를 알고, 양혁수를 모시는 방식도 너무 완벽해서 반박할 구석이 없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양혁수는 불평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양혁수가 두 번의 진료를 받고 일상생활이 가능해지자, ‘두목’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양혁수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비서 노릇도 하고, 가끔은 가정부 노릇도 했다.변여름은 양혁수가 읽어야 하는 서류들은 미리 검토한 후 요점만 깔끔하게 정리해 주었고, 업무 효율은 원래 비서보다 더 뛰어났다. 게다가 식사 시간이 되면, 준비한 과일을 다양한 모양 틀로 찍어냈다.처음엔 유치하다고 생각했는데, 몇 번 먹다 보니 과일을 입에 넣기 전에 오늘엔 별 모양인가, 하트 모양인가 확인하는 버릇까지 생겼다.그리고 무엇보다 변여름은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즐거워했다. 가끔 양혁수가 작은 부탁을 하면, 대단한 일이라도 된 듯 기뻐하며 도왔다.지친 기색 없이 기꺼이 헌신하는 변여름 덕분에 양혁수는 점점 더 게을러졌고, 어느새 낮잠까지 챙겼다.낮잠 자다가 조금이라도 뒤척이면 어김없이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빠, 깼어요?”‘지금 일상이 신선놀음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반려동물이 된 것 같다고 해야 하나...’양지원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양혁수는 내심 양지원이 오지 않길 바라고 있었다. 양지원이 봤다면 또 놀려댈 게 뻔했다.차츰 이곳 생활에 적응이 되고 굳이 급히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겠다 생각한 양혁수는 바로 양지원에게 전화를 걸어, 오지 않아도 된다고 전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 붕대만 풀면 바로 떠날 것이라 계획을 차렸다.해가 질 녘, 변여
“네가 무슨 방법이라도 대서 날 국내로 보내줘.”양혁수가 변백호를 향해 말했다.양혁수가 정신을 차린 뒤로 변백호는 처음 병실을 찾았다.변여름은 방금 병실을 나섰고 엉망인 양혁수의 입가를 보며 변백호는 방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상이 되었다.“눈이 회복될 때까지 두 날만 더 쉬어.”양혁수는 고민도 하지 않고 말했다.“타박상뿐이고 안구는 다치지도 않았다면서 뭔 회복을 기다리는 거야?”“서둘러줘. 오늘 밤, 늦어서 내일 아침엔 돌아가야 해. 국내에 할 일이 많다고.”변백호는 바로 양혁수의 마음을 쿡 찔렀다.“너 여름이 무서워서 그러는 거지?”“...”양혁수는 긴 한숨을 내쉬었고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너희 부모님께 말 좀 잘해줘. 난 네 매부 되고 싶은 마음 추호도 없으니까.”“말해봤자 소용없어. 여름이는 너만 좋아하니까.”변백호가 바로 받아쳤고 양혁수는 이런 변백호를 노려보고 싶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너 정말 미쳤어? 나한테 여동생이 있었다면 띠동갑 되는 남자한테는 다리를 분질러서라도 절대 보내지 않을 거야. 너라도 정신 제대로 차려야 하는 거 아니야?”“내가, 여름이 다리를 분질러라고?”변백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양혁수는 아직도 상황의 심각성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하지만 사실 양혁수는 누구보다도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었고 그래서 더 마음이 무거웠다.“그러니까 너희 부모님께 말해서 여름이 좀 잘 타일러줘.”“소용없어. 오히려 두 분이 여름이 돕겠다고 나설지도 몰라. 우리가 오랜 친구인 걸 보아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은걸.”“...”변백호는 양혁수에게 충고를 남겼다.“네가 정말 여름에게 마음이 없다면 너무 티 내지는 말고 당분간만 참아줘. 갖지 못하는 것에 더 목을 매게 된다는 말도 있잖아. 일단은 옆에 두고 여름이가 차츰 관심이 식을 때까지 내버려둬. 그렇게 같이 지내다가 너한테 질리면 가버릴 수도 있잖아.”“...”‘그걸 충고라고! 정말 하나도 도움이 안 돼!’양혁수는
양혁수는 숟가락에 닿는 걸 느끼며 조심스레 입에 넣었다.그러나 국물 맛은 여전했으며 짭짤한 새우젓의 맛만 추가되었을 뿐이었다.말없이 입안의 것을 씹고 있는데 변여름이 물었다.“입에는 맞아요?”“그래...”변여름은 다행이라며 중얼거렸고 자연스럽게 양혁수의 숟가락 위로 반찬을 집어주었다. 양혁수는 본인이 우연히 반찬을 집은 건지 아니면 반찬이 밥에 잘 섞여 있던 건지 구별이 되지 않았지만 애써 무덤덤하게 입에 넣고 국물도 한술 떴다.양혁수는 본인의 의지대로 스스로 밥을 먹었고 변여름도 자신이 먹여주겠다고 떼를 쓰지 않고 몰래 집어주고 있으니 두 사람 분위기도 차츰 풀렸다.하지만 몰래 반찬을 집어주는 것도 사실 먹여주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일이었다.양혁수가 이를 눈치챘을 때는 이미 늦어버렸고 변여름은 어느새 깨끗하게 씻은 딸기를 양혁수 입가에 가져다 대고 있었다.“아...”그러나 양혁수는 입을 벌리지 않고 손으로 받으려 했다.“오빠는 손도 안 씻었잖아요.”“...”겨우 딸기 하나라는 생각에 양혁수는 못 이기는 척 입을 벌렸다.그렇게 물꼬를 트고 나니 점점 걷잡을 수 없이 일이 번졌다.딸기에 이어 변여름은 손수 치킨을 한입 크기로 잘라 양혁수에게 건넸다.그렇게 한입씩 먹여주며 변여름이 말했다.“오빠가 자고 있을 때 연락이 네 통 정도 걸려 왔는데 하나는 지원 이모이고 다른 전화는 회사 사람인 것 같아요.”입을 꾹 다물고 있던 양혁수는 핸드폰을 건네달라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변여름이 건네온 치킨에 말문이 막혔다.“오빠, 이 집 치킨 맛있으니까 많이 먹어요.”양혁수는 입 안 가득 찬 치킨에 말을 잇지 못했으나 변여름은 양혁수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알아서 핸드폰을 건넸다.그러다 보니 양혁수는 지금 변여름이 자신을 ‘먹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잊었고 아주 자연스레 변여름에게 몸을 맡기고 있었다.변여름이 질문을 이었다.“조원희라는 사람이 두 번이나 전화를 걸었는데 다시 걸까요?”두 번이나 걸었다는 건 필시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을 설명했
“오빠, 다른 사람이 오빠를 돌보는 건 내가 못 믿겠어서 그래요.”양혁수는 속으로 생각했다.‘네가 날 돌보는 게 더 말이 안 되는 일이야.’변여름은 그런 그의 속마음을 꿰뚫어 본 듯 아무 말없이 손을 잡아 화장실로 이끌었다. 문을 열고 세면대 근처까지 안내한 뒤 침착하게 설명했다.“오빠, 화장실 공간이 좀 작아요. 왼쪽으로 1미터 가면 변기이고 난 바로 밖에 있을 테니까 끝나면 불러요.”말을 마치자마자 변여름은 조용히 문을 닫고 얌전히 문 앞에서 기다렸다.양혁수는 더 이상 변여름과 말다툼할 여력이 없었다. 지금 당장 급한 일을 해결하지 않으면 정말 큰 일이었다.“변여름.”“네. 저 여기 있어요.”“멀리 떨어져.”“아...”잠시 뒤, 문밖에서 변여름이 침대에 앉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변여름은 두 손 검지손가락을 귀에 쏙 집어넣고는 친절하게 외쳤다.“오빠, 나 귀도 막았어요!”“...”얼마 후, 양혁수가 화장실에서 나왔다.변여름은 어느새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창문을 등지고 앉은 양혁수는 바깥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수다를 들었다. 어제 결혼식 이야기를 하는데 그 누구도 두려운 기색은 없었으며 오히려 웃음소리까지 섞여 있었다.이 집안 사람들뿐만 아니라 두 사람의 친구들까지도 정상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이 근처 1km 반경 안에서 유일하게 정상적인 인간은 자기 혼자뿐인 것 같았다.양혁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가만 생각해 보니 그동안 양혁수는 안일하고 평온한 일상에 익숙해졌고 이번 일은 꽤나 오랜만에 겪는 황당한 사건이었다.옆에서 변여름은 뜨거운 국밥을 숟가락으로 저으며 온도를 식히고 있었다. 그러다 양혁수의 작은 움직임에도 관심을 보였다.“너희 가문에는 이런 일이 자주 있는 거야?”“아니요.”변여름은 침착하게 답했다.“우리도 오랜만에 겪는 일이에요. 이번 일은 그냥 사업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 벌인 짓이래요.”양혁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변씨 가문 사업에 사고가 안 나는
“그럼 뭐라고 말해야 하나요?”“무조건 괜찮다고 말하세요. 만약 문제 생기면 본인의 눈을 대신 주겠다고 말이에요!”양혁수가 눈을 뜨기도 전에, 먼저 들려온 건 노지혜가 의사를 윽박지르는 소리였다.양혁수는 천천히 몸의 감각을 확인했다. 팔다리는 멀쩡했고, 감각도 정상이었다. 다만 눈앞이 온통 어두웠지만 실명한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병실 문이 열렸고 들어온 사람은 변여름이었다. 변여름은 들어오자마자 노지혜와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의사는 지체 없이 대답했다.“아무 문제없습니다! 만약 문제가 생기면 제 눈을 바치겠습니다!”“...”이제 변여름이 대답할 차례였으나 그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대신 종이를 넘기는 사각거리는 소리만 들렸다.한참 후에야 변여름이 입을 열었다.“됐어요. 이제 가보셔도 돼요. 여긴 제가 있을게요.”“네네! 알겠습니다!”의사는 마치 해방이라는 듯 밝게 대답하고 황급히 병실을 나갔다.양혁수는 조용히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변여름.”그 순간, 변여름이 얼마나 빠르게 다가왔는지 침대 옆으로 바람이 일렁이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오빠! 깨어났어요?”“응.”양혁수는 변여름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지금 내 상태는 어때?”“눈꺼풀이 유리 파편에 긁혔지만 안구는 문제없대요.”그 말을 듣자 양혁수는 안심하며 긴 숨을 내쉬었다.변여름은 양혁수가 행여나 걱정할까 봐 말을 덧붙였다.“지금 눈이 안 보이는 건 눈을 뜨지 못하게 고정 장치랑 붕대를 감아둬서 그런 거예요. 잠시 휴식하고 붕대를 풀면 정상적으로 돌아올 거예요.”“다른 건?”“미약한 뇌진탕이랑 등에 충격으로 인한 타박상이 있어요.”양혁수는 천천히 몸을 움직여봤고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앞이 보이지 않는 게 꽤 불안했다.“다른 사람들은?”“부상자는 있지만, 사망자는 없어요.”그건 그나마 다행이었다.변여름은 붕대로 가려진 양혁수의 눈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오빠, 미안해요. 내가 판단을 잘못해서... 그 길로
양혁수가 변여름을 발견한 건 우연이었지만 그 이후로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자신을 계속해서 훔쳐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조심스럽지만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시선이었다.그때 음악이 울려 퍼지며 결혼식이 시작되었다.양혁수는 핸드폰을 꺼내 들고 어디에서 차를 탈 거냐는 비서의 질문에 답장을 보냈다.식장은 축복의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신부가 드디어 신랑 앞에 마주했고, 주례는 뻔한 멘트를 읊기 시작했다.양혁수는 시큰둥했다. 아침부터 그 쌍둥이들한테 시달려서인지 아직도 정신이 혼미했다.미간을 지그시 누르며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변여름이 양손으로 휴대폰을 들고 어설프게 각도를 조절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대충 봐도, 자기랑 같이 찍히려고 하는 것 같았다.휴대폰 화면에 뭐가 찍혔는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변여름이 잠깐 동작을 멈춘 걸 보니, 마침 양혁수가 쳐다보는 순간이 찍힌 모양이었다.스크린 속에서 서로의 시선이 맞닿는 묘한 순간 변여름이 망설이지 않고 셔터를 눌렀다.찰칵!양혁수는 변여름의 뻔뻔한 태도에 어이가 없어 웃음이 피식 나갔다.그렇게 두 사람은 말없이 몇 초간 시선을 마주했다.그런데 그때.콰과광!귀청이 찢어질 듯한 폭발음이 식장을 뒤흔들었다.순간적으로 엄청난 충격이 몰아쳤고, 사방에서 날아온 파편들이 양혁수를 비롯한 주변의 하객들을 노렸다.그리고 비명과 구조 요청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폭탄이야!”정신을 차린 양혁수는 힘겹게 몸을 지탱하며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아직 경호원들이 도착하지 않았는데 누군가가 그의 손목을 잡아챘다.“오빠! 이쪽으로 가요!”변여름이었다.지금은 시시비비를 따질 때가 아니었고 양혁수는 곧장 변여름을 따라 움직였다.하객들은 모두 호텔 밖으로 도망치고 있었지만 변여름은 반대로 움직였다. 양혁수를 데리고 호텔 내부로 들어가, 가장 외진 길을 선택해 빠르게 이동했다.그리고 무선 장비를 이용해 가족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전원이 무사하다는 걸
와이너리.노지혜가 고개를 빼꼼 내밀어 위층을 확인하더니 여유롭게 머리카락 한 올을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두 사람 떠났어.”변여름은 테이블에 엎드린 채로 노트북을 조작했고 영상을 앞으로 당겨 양혁수와 변백호가 투덕거리는 장면을 되돌아봤다.노지혜도 관심을 보이더니 콕 집어 이렇게 말했다.“백호 오빠가 이겼네.”변여름은 노지혜를 힐끗 쳐다보았고 노지혜는 미소를 지었다.그러자 변여름은 안 보여줄 거라는 듯이 아예 노트북을 옆으로 밀어버렸다.“...”“아, 근데 말이야. 네가 고백했을 때 혁수 씨 반응 어땠어?”변여름은 턱을 괴고 다시 영상의 타임라인을 조정했다. 이번엔 양혁수가 카메라를 쳐다보던 순간을 되돌려보았다.“우리한테 들킨 거 알고 있었네.”“어쩐지 네가 심하게 오글거리더라.”변여름은 아무렇지 않은 듯 굴었지만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다.‘그러게 왜 날 그렇게 매몰차게 밀어낸 거야.’‘난 그냥 고백만 하고 싶었을 뿐인데 그것도 못 하게 하고. 흥’노지혜가 다시 다가와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었다.“근데 이제 두 사람 모두 자리 비웠는데 약 정말 줘?”“음... 일단 지혜 씨가 갖고 있어요.”노지혜는 단번에 눈치챘고 변여름의 어깨를 감싸안더니, 귀에 대고 더 위험한 계획을 속삭였다.변여름은 순진한 얼굴로 연신 손을 휘저으며 거부 의사를 표했지만 눈이 반짝거렸다.양혁수는 변여름이 일부러 그랬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질질 끌지 않고 고백 같은 건 아예 못 하게 단칼에 잘라, 최대한 빨리 집에 돌려보냈다.하지만 변여름은 꼭 끝까지 가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그래서 할 수 없이 양혁수는 변여름을 애써 모른 척했다. 평소처럼 행동하면서 결혼식이 끝나는 대로 곧장 떠날 계획을 세웠고 앞으로 엮일 일은 절대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그런데, 밤에 혼자 있으면 자꾸 변여름 생각이 났다.‘대체 내 어디가 좋다는 거야?’‘몇 년 동안 얼굴도 자주 못 봤고... 그때는 완전 어린애였는데?’어린아이의 짝사랑이니 그렇지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