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예나는 코너를 돌다가 가문의 도우미와 마주쳤고 자신을 부르는 그 호칭에 소스라치게 놀랐다.다행히 허예나는 양혁수가 뒤를 돌아보기 전에 몸을 숨겼다.다시 몸을 돌린 양혁수는 등 뒤로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아가씨? 설마 방금 그 여자가?’‘허씨 가문은 정말 자식이 많구나.’양혁수가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어쩌면 배다른 자매일 수도 있다는 것이었고 두 사람이 사이가 좋지 않다면 허예나에게 약을 건네주지 않을까 봐 걱정되었다.그때, 메시지가 한 통 도착했다.[목감기약이에요?][그래.][방금 받았어요. 고마워요, 오빠.]양혁수는 안심하고 저택을 빠져나갔다.추모식은 온갖 사람들이 한곳에 모였고 소란스러운 걸 질색하는 양혁수는 이런 곳을 절대 스스로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 돌아온 이유는 허예나에게 약을 건네주기 위함이며 허씨 가문 사람들에게 허예나에게 함부로 굴지 말라 경고하기 위함이었다.위층의 변여름은 약을 손에 쥐고 허예나가 건네준 따뜻한 물을 한 모금 마시며 헤실헤실 웃었다. 그러다가 허예나를 바라보며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오빠가 예나 씨 얼굴 본 건 아니죠?”허예나는 미안한 마음에 말을 늘려놨다.”“양 대표님은 저한테 관심이 없으셨어요. 저를 가문 도우미로 착각해 약을 건네주라고 당부만 하셨어요.”변여름은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계속 의심을 했고 허예나는 어쩔 수 없이 어린 애 달래듯 변여름을 달랬다.“걱정하지 마세요. 여름 씨가 저보다 백배 천배는 더 예쁘세요.”“예쁜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오빠는 예쁜 사람을 원하는 게 아니라고요.”“여름 씨는 똑똑하잖아요. 예쁘고 똑똑한 여름 씨가 양 대표님께 가장 어울리는 짝이지요.”“...”자신의 마음에 쏙 드는 말을 해주는 허예나에 변여름은 돈을 마구마구 퍼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그래요.”변여름은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고 안심한 허예나가 몰래 한숨을 내쉬며 자리를 피했다.허예나가 자리를 떠나고 변여름은 손에 쥔 약을 보물처럼 품에 꼭 껴안았다.변여름은 정말 약을
그날 밤, 변여름은 양씨 저택으로 돌아갔지만 양혁수를 만나지는 못했다.양혁수가 집에 돌아왔을 때, 집사는 양혁수에게 변여름이 벌써 잠자리에 들었다고 말했다.잠들기 전 변백호가 양혁수에게 전화를 걸었고 양혁수가 받기 전에 통화는 끊어졌다.양혁수가 다시 걸었으나 이번엔 변백호가 거절을 했다.[?][실수로 잘못 누른 거야.]양혁수는 그러려니 넘어갔고 핸드폰을 내려둔 뒤 젖은 머리카락을 말렸다.다른 한편 위층의 변여름은 바나나를 오물오물 먹고 있었다.한 손으로는 노트북의 거절 버튼을 눌러 변백호의 연락을 일방적으로 무시했다.별수 없어진 변백호는 메시지만 보냈다.[...]하지만 변여름은 절대 굽혀 들지 않았고 오히려 변백호를 협박했다.[오빠, 자꾸 내 일에 끼어들면 나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나 오빠가 생각하는 그런 나쁜 일 하지 않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여름아, 내가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혁수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변여름은 그 메시지를 조금 멈칫했다.변여름 역시 양혁수가 사실을 알아버린다면 불같이 화를 낼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괜찮아. 난 오빠 동생이니까 죽이진 않겠지.][허.]‘이럴 때만 오빠다, 이거지?’남매는 한참 침묵했고 변백호가 다시 침묵을 깨트렸다.[한 달 시간 줄게. 더 이상 선 넘지 마.]변여름은 그 경고를 무시하고 되레 변백호를 이용하려 들었다.[혁수 오빠가 날 의심하면 꼭 먼저 알아차리고 미리 나한테 말해줘.]“...”참다못한 변백호는 핸드폰을 쾅 하고 내려놓았다.변여름은 아주 덤덤하게 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아 시원해.’괜히 시비를 거는 변백호를 처리하고 변여름은 다시 침대에 누웠다.오늘엔 양혁수가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다. 아마도 아버지가 돌아갔는데 꽁냥꽁냥 연애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문자를 보내면 꼬박꼬박 답장은 왔다.변여름은 최근 2개월 동안의 메시지를 처음부터 차근차근 읽었다.오늘의 만남을 뒤로 변여름은 양혁수를 향한 마음이 점점 더 커졌고
척 보아도 허현무의 본처와 아들은 아주 총명한 사람이었다. 허예나 모녀에게는 겨우 두 개의 선택지가 있었는데, 첫째는 앞으로도 왕래하며 지분으로 허예나를 묶어두는 것과, 둘째로는 대충 돈을 쥐여주고 연을 끊는 것이었다.그리고 허예나에게 그 큰돈을 챙겨주고 겨우 연을 끊는다는 건 사실 조금 비합리적이었다.허씨 가문 아들이 멍청해서 돈을 흥청망청 나눠준 거라면 몰라도 허현무 본처는 아주 돈을 밝히고 똑똑한 사람이었다.그래서 왠지 이 결정은 허씨 가문 모자가 내린 게 아닌 것 같았다.다른 한편, 연구실 근처.변여름은 허예나가 보낸 메시지를 통해 유산 분할을 확인했다.그 금액은 바로 변여름이 조종한 것이었다.변여름은 허예나가 멍청하게 당하는 건 싫었으나 또 다른 사람의 눈에 보기에도 큰 금액을 유산 받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너무 큰 금액이라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양혁수의 의심을 살 수도 있었고 의아하게 여긴 양혁수가 조사를 한다면 들통이 날 게 뻔했다.지금껏 양혁수의 눈을 피할 수 있었던 것도 양지원의 ‘소개’로 주선된 만남이라 양혁수가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하지만 허씨 가문 전체 유산 분할을 확인한 변여름은 자신의 실수를 했다고 생각했다.변여름은 자신의 논리대로 그 금액을 책정했지만 허씨 가문 모자가 어떤 사람인지 미처 고려하지 못했다. 그 많은 사람 중에서 허예나가 유산 받은 금액은 너무 눈에 띄었다.양혁수는 그동안 이 업계에 오랜 시간 발을 담그며 이런 이상한 낌새는 바로 눈치를 챌 것이다.그 생각을 하자 변여름은 짜증이 확 치솟았고 허예나의 메시지도 무시한 채로 연구실 근처를 걸었다.그때, 또 핸드폰이 진동했다.양혁수가 보낸 메시지였다.[어디야?]변여름은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조심스레 답장했다.[요양 센터에 있어요.][허씨 가문이 내쫓은 거야? 아니면 너랑 어머님이 스스로 나오겠다고 한 거야?][스스로 나오겠다고 한 거예요. 엄마가 거길 불편해하셔서요.]변여름은 먼저 유산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오빠, 저 아버
[그래도 두 달 동안 내가 해준 도시락이 입에 맞긴 했죠?][혹시, 앞으로도 계속 도시락 챙겨줘도 될까요?][이번 소개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변여름은 질문을 쏟아냈고 점점 더 솔직하고 직접적이었다.양혁수는 허예나의 손맛에 길들어진 것인지 쓴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도시락이 입에 맞긴 했나 보다 싶었다.계속 도시락을 받는 건 아무렴, 괜찮았다. 그런데 이게 정말 소개팅이 맞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소개팅 상대를 지금껏 한 번도 제대로 만나보지 못한 게 말이나 되는가?앞으로라...양혁수는 계속 만남을 이어가려면 반드시 얼굴을 마주하고 얘기를 나눠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러나 답장을 보내기도 전에 핸드폰이 툭 꺼져버렸다.확인해 보니 배터리가 다 돼서 꺼진 것이었다.‘뭐야? 배터리가 떨어진 것도 왜 몰랐지?’양혁수는 행여나 허예나가 자신이 문제를 회피한다고 생각할까 봐 빠르게 충전기를 꽂고 노트북 앞으로 자리를 옮겨 대화를 이어갔다.[핸드폰 배터리가 다되어서 노트북으로 다시 문자 보내.]그러자 변여름은 뾰로통한 이모티콘을 보냈다.[오빠 지금 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지 몰라서 그러는 거죠? 배터리가 떨어졌다니 무슨 그런 뻔한 거짓말을 해요.]“...”[네 착각이야.][그래요, 그럼. 빨리 대답이나 해요.]“...”양혁수는 잠시 뜸을 들였을 뿐인데 상대는 또 재촉했다.[뭐야... 설마 노트북도 배터리가 다 떨어진 건가?]비꼬는 말에 자존심이 상한 양혁수는 바로 영상 통화 버튼을 눌렀다.그러나 상대는 바로 연락을 끊었다.[뭐예요!][지금 대답할 테니 얼굴 보여줘.][오빠, 우린 소울메이트잖아요.][난 얼굴 안 보여주는 소울메이트 필요 없어.]변여름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래도 내가 못생긴 건 아니라 다행인 것 같긴 한데.’그렇게 두 사람은 잠시 대치 상태에 놓였다.변여름은 요즘 들어 더 불안해졌고 이 비밀이 오래 가지 못할 거라는 걸 실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양혁수에게 들통이 나기 전에
“500자가 뭐 어려운가? 손 글씨로 써서 보낼게요.”양혁수는 아주 통쾌하게 대답했고 양지원도 기분이 퍽 좋아졌다. 그리고 양혁수가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물었다.“그냥 그렇죠, 뭐.”“별일 없긴, 너 엄마가 바보인 줄 알아?”양지원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그날 그렇게 급하게 돌아가서 뭘 한 건데?”“말했잖아요. 한강시에 급한 볼일이 있었다고.”“한강시에 볼일이 있었던 걸까? 아니면 허씨 가문에 볼일이 있었던 거야?”‘쯧.’양혁수는 왠지 낯간지러운 마음에 허리를 꼿꼿이 폈다. 그리고 변명이라도 하려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생각되었다.“비서가 어디까지 말해줬는데요?”“뭘 또 비서가 말해줬다고 생각해? 나 아직 정정하고 내 옆에도 눈과 귀가 많아.”“그런데 왜 이제야 물어보세요?”양혁수는 사실 오랫동안 궁금했었다.“전에 소개팅 주선하면 세 날에 한 번씩 물어봤었잖아요.”양지원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거야 네가 항상 소개팅에 무덤덤하니까 그렇지. 새로 사람 만나는 것도 너무 꺼리니까 나도 더 이상 희망을 품지 않고 있었어.”양지원은 조금 고민하다가 말했다.“그 아이 나도 두 번 만나봤는데 참 온순하고 좋은 여자 같더라.”‘잘못 보셔도 한참 잘못 보신 거네요. 그렇게 온순하고 착한 건 모두 연기이고 사실 여우가 따로 없어요.’양혁수가 다시 입을 열려는데 또 무언가 떠올랐다.허예나는 양시연을 많이 닮았다. 양지원은 양혁수가 양시연을 향한 마음을 아주 잘 알고 있었기에 그동안 양혁수의 마음을 다른 곳으로 옮기려 부단히 노력했었다.그런데 왜 하필 양시연을 닮은 여자를 소개해 준 걸까?그 생각까지 마치자 양혁수는 점점 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양지원의 말이 더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양지원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이름을 불렀다.“혁수야?”양혁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이번엔 꽤 마음이 잘 맞나보네. 앞으로도 잘 지내볼 생각인 거니?”양지원의 질문에 양혁수는 조금 넋이 나간 목소리로 말했다.“사진 한 장 보
“허씨 가문의 딸이 참 괜찮더라. 너도 괜찮다고 생각하면 한 번 진지하게 만나봐.”양지원은 차분히 인내하며 말했다.그녀의 본심은 양혁수에게 양시연이 머물던 과거에서 벗어나 앞으로 나아가라고 일깨워 주는 것이었다.그러나 양혁수의 귀에는 전혀 다르게 들렸고 그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했다.‘괜찮다고? 대체 어디가?’비서가 아직 치우지 않은 테이블 위의 음식이 다시 눈에 들어오자 그는 거슬려서 목에 가시라도 걸린 듯 불편했다.양혁수는 두 달 동안 낯선 사람이 보낸 음식만 먹었다.만약 상대방이 음식에 무슨 짓을 했으면 그는 지금쯤 허현무와 함께 포커라도 칠 판이었다.안전 문제를 제쳐두고 그를 진짜 화나게 한 것은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이었다.이렇게 조금씩 다가오는 함정은 절대 어린 여자아이가 꾸밀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그는 자신이 인터넷을 통해 접촉했고 그날 실제로 만났던 사람이 진짜 허예나 인지 아니면 자신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함정인지 알고 싶었다.물론 어느 쪽이든 양시연의 사진을 이용해 자신을 오도하려고 했다는 것 자체가 악의적이었다.그가 감정을 가다듬고 양지원과의 통화를 끝낸 뒤 사무실은 죽음처럼 고요했다.잠시 후 양혁수는 차가운 얼굴로 휴대폰을 집어 들고 변백호에게 전화를 걸었다.멀리서 커피숍에서 정보를 찾고 있던 변여름은 심하게 재채기했다.그녀는 휴지를 뽑아 닦고 코를 살짝 문질렀다. 감기에 걸린 것 같았다.변여름은 이틀 후에 그를 만나야 했기에 아프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곧 집에 가서 약을 먹어야 한다고 결심했다.그녀는 아무런 의심 없이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숙이고 계속 글을 썼다.모든 것이 평범해 보였다. 밤에 양씨 가문으로 돌아왔을 때 양혁수는 돌아오지 않았고 오히려 친오빠에게 전화가 걸려왔다.변여름은 매우 예민해서 전화를 받자마자 예상했고 역시 변백호는 그녀에게 솔직하게 말했다.“양혁수가 문제를 발견했어. 그 사진이 허예나가 아니라는 걸 알았어.”이 허점은 원래 변여름이 의도적으로 남긴 것이었고 양혁수가 발견했
양혁수는 다음 날 집으로 돌아왔지만 변여름은 그를 만나지 못했다.집사는 양혁수의 기분이 매우 좋지 않다고 전하며 이런 상황은 오랫동안 없었다고 덧붙였다.그날 이후로 이틀 동안 그들은 통화를 하지 않았지만 변여름은 허예나의 신분으로 아무렇지 않게 메시지를 보냈고 그는 여전히 답장했으며 말투에도 아무런 허점이 없었다.토요일 밤 그는 갑자기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변여름은 실험실 밖에 도착했을 때 전화를 받고 마음이 긴장되었고 마치 단두대의 칼이 떨어지려는 느낌이 들었다.“여보세요?”저쪽에서는 즉시 대답하지 않고 기침 소리가 두 번 들렸다.변여름은 민감하게 그 소리를 포착하고 무의식적으로 물었다.“오빠, 감기 걸렸어?”잠시 후 저쪽에서 대답이 들렸다.“응. 조금.”잘 듣지 않으면 그의 목소리에 담긴 차가운 냉정함은 그렇게 분명하지 않았다.변여름은 고개를 숙였다.잠시 생각한 후 그녀는 입을 열고 함정일 가능성이 있는 구덩이로 순순히 들어갔다.“어디에 있어요?”“회사에서 야근 중.”“집에 안 가세요?”“귀찮아. 오늘은 회사에서 자려고.”변여름은 다시 물었다.“저녁 먹었어요?”“아직.”변여름은 입술을 깨물며 가방끈을 쥐었다. 그 손길에선 미묘한 주저함과 망설임이 엿보였다.더 나아가면 그와 제대로 대화할 수 없겠지만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나아가야 했다.그녀가 말이 없자 양혁수는 오히려 먼저 물었다.“뭐 하고 있어?”그는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물었고 변여름은 마치 그가 여자 친구에게 묻는 것처럼 착각했다.그녀의 심장은 두 번이나 쿵쾅거렸고 살짝 침을 삼켰다.“방금... 엄마랑 산책하고 왔어요.”“그러면 지금은 할 일 없어?”“...네.”“나한테 와. 같이 저녁 먹자.”이것은 그가 처음으로 그녀에게 약속을 잡은 것이다.변여름은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저는 지금...”“이 층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내보냈고 불도 다 꺼 놨어. 너를 볼 사람은 없을 거야. 너는 계속 신비로운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어.”마지막 몇 마디를
변여름은 전신 검은색 의상에 캡모자를 눌러쓰고 완전히 무장한 채 밖으로 나섰다.결국 그 팔찌와 목걸이는 착용하지 않았다. 양혁수가 보면 더 화를 낼까 봐 두려웠다.건물 아래에 도착한 그녀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섰다.휴대폰에는 그가 보낸 메시지가 남아 있었다. 사무실 층수를 알려주고 그녀가 어디까지 왔는지 물었다.이런 평화로운 대화는 차라리 하지 않는 편이 나았고 그녀는 타이핑하는 것조차 버거웠다.엘리베이터가 높이 올라갈수록 그녀는 마스크를 더욱 깊숙이 올렸다.36층에 도착하자 엘리베이터가 멈췄고 문이 열리자 어둠이 주변을 뒤덮고 있었다.그녀는 밝은 엘리베이터에서 재빨리 나와 밖에서 들어오는 밤의 빛을 따라 그의 사무실 쪽으로 향했다.가는 길에 양혁수가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사무실 위치를 알려주었다.“찾았어요.”변여름이 말했다.양혁수는 잠시 멈칫했다.“응. 들어와.”변여름은 심호흡을 하고 휴대폰을 내려놓고 문으로 걸어갔다.문이 자동으로 열리고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자 그의 사무실 커튼이 쳐져 있었고 실내는 밖보다 더 어두워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문을 닫자 이전에 주차장에서와 다를 바 없었다.변여름의 심장은 북처럼 쿵쾅거렸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오빠?”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그녀는 약간 당황했고 양혁수가 곧 불을 켜서 이 절대적인 사냥의 승리를 끝낼까 봐 두려웠다.“계속 앞으로 걸어가서 소파를 만지면 왼쪽으로 돌아. 10미터쯤 가면 테이블이 있어.”옆에서 갑자기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 변여름은 깜짝 놀랐다.어둠 속에서 팅 하는 소리와 함께 비싼 금속 라이터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변여름의 신경은 순간 긴장되었고 그녀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는 소리를 듣고 그가 소파 맞은편 책상에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목적지로 가기 위해 그의 앞을 지나쳐야 했다.그녀는 그가 갑자기 라이터를 켤까 봐 두려웠다.하지만 양혁수는 라이터를 켜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양혁수는 느긋하게 마치 인내심 있는 사냥꾼처럼 그녀의 발소
양혁수가 어제 에든베타에 가고 싶었던 건 순간적인 감정에 휩쓸린 탓이었고 실은 아직 그곳으로 향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어젯밤의 일을 떠올리자 지금 그냥 떠나는 것은 너무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어쨌든 변여름은 아직 어린 소녀였고 그는 어른이었다. 그러니 책임을 져야 했다. 무엇보다 순간적인 충동에 휘말렸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변여름은 아침 일찍 나간 뒤 몇 시간째 돌아오지 않았다.떠나겠다고 해놓고도 한낮이 되도록 변씨 가문에 머물고 있는 자신이 양혁수는 조금 어색했다.점심시간이 되자 변씨 가문의 사람들은 그를 배웅하기 위해 모였다. 집을 비운 둘째 부부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자리했다.한 상 가득 차려진 식사 자리였지만 변여름만 보이지 않았다.마크가 갑자기 양혁수의 왼쪽으로 다가와 그의 어깨를 잡아당기며 물었다.“왜 목까지 올라오는 셔츠를 입었어요?”함은화가 곧바로 타일렀다.“삼촌이라고 불러야지.”“삼촌, 왜 목까지 올라오는 셔츠를 입었어요?”마크는 즉시 호칭을 바꾸었다.양혁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침묵했다.“...”잠시 후 그는 멍한 얼굴로 대답했다.“추워서.”“집은 안 추운데요.”하니가 반대쪽에서 다가와 그를 유심히 살폈다.“땀까지 나는데 거짓말하지 마세요.”양혁수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는 칼과 포크를 내려놓고 하니를 살짝 옆으로 밀어냈다. 더 이상 대꾸하지 않은 채 모두에게 ‘천천히 드세요.’라고 한 마디 남기고 찻잔을 들었다. 그러고는 말없이 거실 창가로 향했다.두 꼬맹이는 끈질기게 그에게 달라붙었다. 그러다 마크가 마침내 그의 목에 난 자국을 발견하고는 크게 외쳤다.“다쳤어요.”하니도 눈을 반짝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보라색이에요. 엄청 커요.”양혁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멀리서 변백호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누르며 엄격한 표정으로 두 아이를 불렀다.식탁에서 함은화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다행히 너희들 아버지께서 안 계셔서 속상해하지 않으시겠네.”변여름의 셋째 형수는 외
새벽 두 시를 넘긴 침실은 적막에 잠겨 있었다.양혁수의 셔츠는 변여름의 겉옷과 뒤엉킨 채 침대 옆 바닥에 나른히 놓여 있었다.거실의 시곗바늘이 똑똑 소리를 내며 양혁수의 심장과 신경을 조여 왔다.양혁수는 자신이 형편없는 놈이라며 N 번째로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그런데 그의 품에 안겨 있던 변여름이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순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다시 키스하려 다가왔다.양혁수는 약간 불편해서 변여름의 양 볼을 잡았다.“뭐 하려고 그래?”그는 깊은 만족 뒤에 밀려오는 나른함 속에서 약간 쉰 목소리로 물었다.변여름은 살짝 눈을 굴리더니 능숙하게 고개를 돌려 그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양혁수는 어이없었다.“...”그는 마치 뜨거운 물건을 만진 듯 무의식적으로 손을 뗐다.변여름은 이미 그럴 줄 알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정도 자극으로는 그를 무너뜨릴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그녀는 얌전히 그의 품에 안기며 조용히 속삭였다.“오빠, 나 졸려요.”양혁수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몸을 돌려 이불을 끌어당겨 둘을 덮었다.“자.”지금 변여름을 돌려보낸다 한들 헛수고라는 걸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변여름은 그의 속내를 알아챈 듯 만족스럽게 미소 짓고는 양혁수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달콤하게 눈을 감았다.양혁수는 그녀의 조용한 숨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숙여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섬세한 얼굴 위로 연분홍빛이 감돌았고 입가엔 희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그는 머리가 아파졌다. 몇 시간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변여름을 방 안으로 들인 자신을 주저 없이 없애버리고 싶었다.지금 상황은 이미 벌어졌고 양혁수는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아무리 되짚어 봐도 도대체 어느 순간 문제가 생긴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하지만 확실한 건 이 모든 일이 결국 변여름의 계획대로 흘러갔다는 사실이었다.‘아니면 정말 변여름이 말한 대로 내가 경험이 부족해서 이렇게 쉽게 넘어간 걸까?’양혁수는 그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한강시에서만 몇 년을 지내며 수많은
변여름이 두 번째로 양혁수에게 키스하자 그는 여전히 피하려 했지만 마치 작은 마녀의 마법에 걸린 듯 저항은 미약했다.그녀는 투피스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언제 풀었는지 겉옷 단추가 풀려 있었으며 그 아래에는 끈 나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그는 잠시 눈길을 돌렸을 뿐인데 그녀의 가슴 라인이 스쳐 지나갔다. 오른쪽에 분홍색 만화 꽃이 그려져 있었고 그 모습이 그녀의 행동과 대조되어 양혁수는 더욱 죄책감을 느꼈다.“입술이 닫히자 변여름은 그의 목을 감싸며 손끝으로 뒷머리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돌려 무심한 듯 두 번 당겼다. 그 작은 통증이 오히려 자극되어 그의 감각을 더 예민하게 만들었다.이번에는 더 인내심을 갖고 천천히 양혁수의 입술을 따라갔다. 중간에 멈추어 그의 표정을 살펴보며 그가 ‘침착함을 잃지 않으려는’모습을 보고는 살짝 미소 지으며 다시 그의 턱에 입맞춤을 했다. 그 후 더 애정을 담아 양혁수의 목젖에 부드럽게 입술을 옮겼다.양혁수는 자신이 미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대로 가만히 있으며 그녀가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게 두었다.심장 박동과 호흡이 서로 경쟁하는 듯했다. 그는 계속해서 아래로 눌러 내려가며 누가 먼저 참지 못할지 시험하려는 듯했다.그는 겉으로는 무심한 척했지만 등이 뻣뻣하게 굳어 있는 것을 분명히 느꼈다. 그녀가 그를 껴안고 무심하게 척추를 쓸어내리자 날카로운 전류가 온몸을 타고 내려가 배까지 흘러갔다.변여름이 양혁수의 귓가에 입을 가까이 대고 속삭이며 그의 옆얼굴에 가만히 입맞췄다.“오빠, 이런 거 좋아해요? 좋아하면 저한테도 이렇게 해도 돼요…아니면 오빠가 다른 걸 원해도 뭐든 저한테 해도 괜찮아요.”변여름의 태도는 바닥까지 내려앉아 마치 겸손해 보였지만 양혁수는 알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그들 같은 사람들이 가장 자주 쓰는 약탈 방식이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과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결과만이 전부였다.그가 조금만 방심하면 그녀의 덫에 걸려들어 단단히 붙잡힐 테고 다시는 벗
“바디워시에요.”“변여름.”변여름은 입을 꾹 다문 채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정말로 우유 향이 나는 바디워시에요.”양혁수는 방금 그 순간 특히 그녀의 눈과 마주쳤을 때 그리고 그녀가 그의 손을 핥던 단 몇 초 동안 온몸의 피가 거꾸로 흐르는 듯한 감각에 사로잡혔다.‘말도 안 돼.’그는 분명 그녀의 향기에 무언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변여름이 방에 들어선 순간부터 그녀의 은은한 향이 퍼지더니 이상하게도 양혁수의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변여름이 키스하려 하자 그는 마치 폭발할 것 같았다.변여름은 그의 의심스러운 눈빛을 마주하며 미동도 없이 침착했다.“오빠, 어디 불편해요?”“네가 그 이유를 더 잘 알잖아.”“...?”변여름은 잠시 생각하다가 그의 가빠진 호흡과 붉어진 귀 끝을 보고는 눈을 깜빡였다.그 순간 그녀의 마음속 흥분 수치가 급격히 상승했다.“오빠, 제가 오빠한테 약이라도 먹였다고 생각해요?”양혁수는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가슴이 요동쳤고 침묵이 곧 대답이 되었다.변여름은 살짝 시선을 내리깔며 중얼거렸다.“진짜 아니에요.”“오빠는 경험이 부족해서 딥 키스 한 번에 정신을 못 차리는 거예요.”양혁수는 순간 멍해졌다.???방금 키스 때조차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다.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얼굴이 굳었고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리려는 본능을 꾹 참으며 조용히 손을 빼려 했다.그러나 양혁수는 다시 그녀의 손목을 붙잡으며 무뚝뚝하게 말했다.“또 멋대로 움직이면?”변여름은 가늘게 신음하며 눈에 희미한 물기를 맺었다.“오빠, 아파요.”양혁수는 변여름이 꾀병을 부린다고 90% 확신했지만 그녀의 눈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모습을 보자 무의식적으로 손에 힘을 풀었다.그 틈을 놓치지 않고 변여름은 손을 빼냈다.양혁수는 얼굴에 서리가 낀 듯 차가운 표정으로 그녀를 경계했고 변여름은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잠시 팽팽한 정적이 흐른 후 변여름은 애원하는 듯
양혁수는 그녀가 갑자기 대담해진 것에 깜짝 놀랐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꾸짖었다.“변여름, 내려가.”변여름은 말을 듣지 않고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살며시 쓸어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그의 어깨를 감쌌다.그녀가 고집을 부리는 모습을 보고 양혁수는 어지러운 머리를 억지로 참고 그녀를 몸에서 밀어내려 했지만 손이 그녀의 몸에 닿자 손바닥이 부드러운 감촉에 젖어들었다.그는 마치 번개에 맞은 듯 머리가 하얘졌다. 손에 힘이 빠졌다.‘젠장. 이 꼬맹이 속옷도 안 입었어.’양혁수는 변여름이 꽁꽁 싸맨 옷차림을 보고 적어도 선을 지킬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녀는 허세를 부린 것이었다.목을 감싼 변여름은 이미 그의 반응을 예상한 듯 조급해하지 않고 마치 요정처럼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양혁수는 변여름의 팔을 잡고 얼굴을 찡그리며 진짜 화가 난 척 말했다.“계속 선을 넘으면 나 진짜로 화 낼 거야.”그 말을 듣고 변여름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목을 감싼 손이 약간 풀렸다.양혁수는 속으로 안도하며 변여름을 제압할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그는 그녀의 팔을 떼어내고 그녀를 완전히 떼어내려고 했지만 변여름은 갑자기 그를 공격하며 손을 꽉 잡고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양혁수는 멍해졌다.마치 머리가 텅 빈 것처럼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 몸을 뒤로 짚으며 눈을 크게 떴다.변여름은 그에게 강제로 키스할 뿐만 아니라 양혁수의 입술에 닿는 순간 능숙하게 두 입술로 그의 아랫입술을 감싸 안았다. 양혁수가 놀란 틈을 타서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전례 없는 경험에 양혁수는 숨이 가빠지고 두피가 저릿저릿했다.변여름에게서 나는 은은한 향기가 코를 찔렀고 마치 마법에 걸린 듯 정신이 몽롱해졌다. 온몸이 굳어 버렸지만 저항할 힘이 없었다.양혁수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려 그녀의 키스를 피하면서 손에 힘을 주어 변여름을 밀어내려고 했다.변여름은 양혁수가 자신에게 주먹을 쓰지 않을 것을
양혁수가 말했다.“네가 날 좋아하는 건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야. 그러면 나중에 더 좋은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도 좋아하게 될 거야.”양혁수는 마침내 변여름의 논리적 허점을 찾아내 정확하게 반박했다.변여름은 고개를 저었다.“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나중에 노지혜 씨가 그러더라고요. 내가 오빠를 좋아하기 때문에 오빠가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거라고요. 노지혜 씨는 오빠를 좋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직 저의 오빠만 좋아하죠. 그래서 저는 다른 사람이 오빠보다 더 좋을 수 없어요. 왜냐하면 저는 오빠만 바라보니까요. 다른 사람이 아무리 좋아도 제 눈에는 오빠밖에 안 보여요.”양혁수는 침묵했다.“...”‘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또다시 변여름의 고백 타임이 되어버렸네.’그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내일 무사히 떠날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침묵 속에서 변여름이 그에게 물었다. “오빠, 오늘 오빠 옆에서 잠들어도 돼요? 내일이면 떠나잖아요. 오빠가 절 데려가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아요. 제가 또 붙잡으면 오빠가 화낼 테니까 그냥 조용히 옆에 있을게요. 내일 아침 꼭 웃으며 오빠를 보내드릴게요.”양혁수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의 말이 왠지 믿음직스럽지 않다고 느꼈다.변여름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지만 눈에는 실망이 스며들어 있었다.“우리가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했는데도 오빠는 나를 단 한 번도 좋아한 적 없는 것 같아요. 떠날 땐 아무렇지도 않게 떠나겠죠. 전에 했던 건방진 말들은 모두 허세였어요. 나도 사람이에요. 아무리 기다려도 답을 받지 못하면 슬퍼질 수밖에 없어요. 오빠가 화내는 것도 정말 싫어하는 것도 다 싫어요. 그리고 이번엔 오빠를 붙잡을 자신이 없어요. 오빠, 에든베러로 가는 거죠? 거기에는 오빠와 양시연 언니의 추억이 있잖아요.”말을 마치자 그녀는 한순간에 기운이 빠진 듯 축 처졌고 머리 위에는 걷히지 않는 먹구름이 드리워진 듯했다.양혁수는 사랑을 얻지 못하는 아픔을 알았기에 그녀의 감정을 외면할 수 없었다.
변여름은 항상 양혁수에게 변백호를 놀리는 농담을 했지만 사실 그 농담 속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단지 그녀가 처음 그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는 그가 변백호에게 미친 영향 때문이라는 것을 양혁수는 알지 못했다.변백호는 그녀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고 그녀의 많은 행동은 변백호의 묵인 아래 이루어졌다.분명 전에는 모두 ‘비정상’이었는데 변백호가 한 번 외출하고 오더니 정상적인 사람을 만나고 나서 갑자기 그녀에게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변여름은 그걸 참을 수 없었다.양혁수는 변씨 가문의 가풍에 싫증을 느꼈는지 다음 날 떠난 것을 변여름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아침 일찍 양혁수는 가방을 메고 혼자 외출했고 그 흰 고양이도 데려갔다.변여름이 맨발로 방에서 뛰쳐나왔을 때 복도는 희미한 빛으로 가득 차 있었고 변백호는 혼자 창가에 서서 아래층을 깊게 응시하고 있었다.그녀는 변백호의 소매를 잡아당겼지만 변백호는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변여름은 조용히 작은 발판을 옮겨 놓고 그 위에 올라섰다. 변백호를 안고 변백호처럼 아래층을 내려다보았다.그의 모습이 마당에서 사라지는 마지막 순간 그녀는 봤다. 흰 고양이가 그의 어깨에 앉아 있었고 부드러웠다.그녀는 변백호에게 물었다.“다시 올 거예요?”그들의 모국어는 라틴어였고 평소 집에서 대화할 때도 라틴어를 썼다.변백호는 그녀에게 대답했지만 한국어로 말했다.“왜 돌아와? 네가 고양이를 괴롭히는 걸 보려고?”변여름은 의문스러웠다.???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녀는 변백호의 심정을 이해했다. 친구가 없던 기묘한 소년이 친구를 데려왔는데 결국 그 친구가 자기 가족이 모두 비정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는 창피했을 것이다.다행히 양혁수는 나중에 변백호와 여전히 친하게 지냈다.추억에서 벗어나 변여름은 양혁수에게 물었다.“그 흰 고양이는 어떻게 됐어요?”양혁수는 말했다.“내가 집으로 데려가서 집사에게 맡겼어. 재작년에도 잘 지내고 있었어.”“다행이네요.”그녀가 안도하는 것을 듣고 양혁수는 그녀를 여
변여름은 잠깐만 있겠다고 했지만 결국 커다란 베개를 양혁수 옆에 두고 몸을 기대었다. 그녀는 얼굴을 베개에 살짝 묻은 채 마치 아기 고양이처럼 조용히 눈을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았다.그녀가 곁에서 잠든 모습을 본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양혁수는 이미 익숙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몸을 눕히고 눈을 감은 채 그녀의 말을 들었다.“오빠,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해요?”양혁수는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응...”그는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때 네가 여덟이나 아홉 살쯤 되었겠지.”“아니에요.”변여름은 그의 말을 부정했다.그는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아니라고? 내가 변백호랑 뉴성에 놀러 갔을 때 변백호가 널 데리고 왔잖아.”“저희 오빠랑 혁수 오빠가 처음 만나고 오빠를 집에 데려다줄 때 우리가 만났어요.”변여름이 바로잡았다.양혁수는 기억이 났다.놀란 표정으로 손을 베개 삼아 머리를 기대고 진지하게 되물었다.“그때 네... 네 살?”“거의 그렇죠.”‘정말 대단해. 그때 일을 다 기억하다니.’양혁수는 깊이 회상했다.그해 갓 성인이 된 그는 양지원과 함께 뉴성에서 열린 한국 상회의 파티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변백호와 불편한 일이 있었다.두 사람의 첫 만남은 서로를 싫어하는 사이였다.하지만 그날 밤 숙소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려던 순간 마당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밖으로 나가 확인했을 때 그는 피투성이가 된 변백호를 발견했고 변백호는 누군가의 습격을 받아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였다.열여덟 살의 소년은 정의감이 넘쳐흘렀고 모른 척할 수 없었다.양혁수는 변백호를 구한 뒤 그의 집까지 데려다주었다.그리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변여름을 보았다.그는 변씨 가문에 머물렀고 변씨 가문의 사람들은 변백호를 구해준 것에 감사하며 귀빈으로 대접했다.해가 질 무렵 그는 뒷정원을 거닐다가 정교한 인형 같은 아이를 발견했다. 그는 변여름은 너무 귀여워서 마치 꿈속에서 그리던 여동생 같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가까이 가서 보니 그녀
집으로 돌아오니 저택은 조용했다.양혁수는 간단하게 샤워하고 내일 떠날 준비를 하려고 전화를 걸려 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그는 문을 열었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가래떡 베개였다. 하얀색 베개가 변여름의 품에 안겨 있었고 크기는 거의 그녀의 키와 같았다.변여름은 고개를 살짝 들어 먼저 눈을 보였다.“오빠.”그녀는 긴 원피스 잠옷을 입고 겉옷은 작은 재킷을 입어서 긴 소매로 몸을 꽁꽁 싸맸다.양혁수는 술을 마셔서 머리가 띵했지만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달콤한 향기를 맡자 오장육부가 맑아지는 듯했으며 꽤 기분이 좋았다.그는 이마를 눌렀고 물었다.“무슨 일이야?”“오빠랑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어요?”시간이 늦었고 양혁수는 그녀를 경계하며 입을 열어 거절하려 했지만 변여름이 말했다.“잠깐만요. 오빠는 내일 떠나잖아요. 오빠랑 얘기 좀 하고 싶어요.”그녀는 품에 안은 베개를 꽉 껴안았고 양혁수는 베개가 눌린 주름을 보며 그녀의 마음속 갈등을 느꼈다.그녀를 달래지 않으면 내일 그는 떠날 수 없을 것 같았다.양혁수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옆으로 돌려 변여름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그녀의 눈빛이 반짝였고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양혁수는 가정부에게 야식을 만들어 달라고 했고, 그녀에게 영화를 틀어주었다. 음식은 따로따로 들어왔고 그로 인해 오랫동안 단둘이 있는 시간이 끊어졌다.침대 끝 쪽 카펫에 앉아 그는 변여름과 나란히 앉았다. 앞에는 음식이 가득했고 맞은편에는 변여름이 선택한 추리 영화가 나왔다.처음에는 그는 변여름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려고 했다. 그는 계속 멕하든에 머물며 변여름과 함께 어리석은 짓을 할 수 없었다.하지만 영화를 보기 위해 방 안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졸음이 쏟아졌다. 그는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르게 잠시 졸았다.짧은 잠 동안 그는 꿈꾸었고 꿈속에는 피뿐이었다.한을 품고 죽은 사람처럼 한 쌍의 눈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양혁수는 식은땀을 흘리며 혼란스러운 어둠 속에서 변여름의 연이은 부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