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가까이 되는 CCTV 영상이 매일 있었지만, 유독 지아가 사고를 당한 그날 밤의 영상만 사라졌다.골목은 마치 물로 깨끗하게 씻겨 내려간 것처럼, 아무런 끌린 자국이나 혈흔조차 찾을 수 없었다.이에 나는 맥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영상은요? 그날 밤 영상은 어디 있냐고요!”“아줌마, 그날 CCTV가 마침 고장 났어요. 보셨죠? 이제 문제없으니, 저는 일해야 하거든요.”‘정말 이렇게 운이 나쁜 건가?’지아의 힘없이 내려앉은 얼굴이 떠올라, 나는 고통스럽게 눈을 감았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왜 점점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는 걸까.’밤 11시, 억지로 웃으며 병실로 돌아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지아가 겁에 질린 새처럼 침대 머리맡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지아의 눈은 문 뒤를 주시하고 있었다.내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문 뒤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고, 마치 옷이 벽에 스치는 듯한 사각거리는 소리였다.처음에는 신경이 날카로워진 탓에 생긴 환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 분명하게 들려오는 남자의 한숨 소리가 내 귀에 꽂혔다.고요한 병실에서 그 소리는 유난히 또렷했다. 머리카락이 곤두섰고, 지아는 더욱 몸을 떨었다. 지아는 낯선 남자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몸이 굳어 뒤로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희미한 조명에 문틈 사이로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키 크고, 다부진 체격이었다.문 뒤에는 한 남자가 숨어 있었다. 언제든 우리 목숨을 위협할 수 있는 남자가....한 손이 문틈에서 천천히 나와 내 목을 졸랐고, 손의 힘이 점점 세져 숨쉬기가 힘들어졌다.나의 몸은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고, 필사적으로 손발을 휘저어 밀어내려 했지만, 거리와 체격 차이는 너무 컸다.불행 중 다행인지, 나는 주머니 속에 있는 휴대폰을 만질 수 있었고, 있는 힘껏 그것을 들어 남자의 손목을 내리쳤다. 그러자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목을 조이는 힘이 느슨해졌다.그리고 문 뒤에 숨었던 남자가 웃음을 띠며 걸어 나왔다. 그는 오만한 얼굴로 내 머
목격자인 현태성은 순박하고 착해 보였다.내 의도를 듣고 나자, 얼굴빛이 변하며 당장 그날 밤 외출한 적이 없다고 연신 부인했다. 옆에 있던 아내도 거들며 밤새 자신과 함께 있었다고 주장했다.하지만 현태성은 내 마지막 희망이었다. 나는 현태성의 앞에 무릎을 꿇고, 지아를 도와달라고 애원했다. 그러자 나와 함께 무릎을 꿇더니, 연거푸 다섯 번, 여섯 번 머리를 조아렸다.“아주머니, 제발 절 좀 곤란하게 하지 마세요. 저도 먹여 살려야 할 가족이 십여 명이에요. 정말 도와드릴 수가 없어요. 저는 가난이 너무 무서워요!”...경찰 앞에서 나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아무것도 없어요.”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모두 사라졌어요.”기록하던 경찰은 한숨을 쉬며 나에게 물 한 잔을 건넸다.“아주머니 마음은 이해하지만, 이런 사건은 매우 민감해요. 지금 직접적인 증거가 모두 없는 상황에서, 강간과 불법 장기 이식 혐의로 고소한 상태고요.”“우리가 쉽게 사건을 접수할 수 없고, 추가적인 증거 확보가 필요해요. 다시 돌아가서 좀 더 상의해 보시죠.”‘상의하라니? 도대체 뭘 상의하라는 거야?’참아왔던 감정이 그 순간 폭발했고, 나는 울화통이 터져 외쳤다.“당신 딸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당신은 상의할 생각이 있었겠어요? 그게 무슨 뜻이야! 그 애는 내 딸이라고, 내 딸이란 말이야!”경찰서를 나서는 순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싸움은 우리가 이길 수 없다는 것을...오늘은 지아의 퇴원일이었지만, 나는 병원으로 돌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병원에서 전화가 걸려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따님이 자살 시도를 했습니다. 대동맥이 손상되었지만, 다행히도 응급조치로 목숨을 건졌습니다.]그 소리에 나는 미친 듯이 병원으로 달려갔고, 병상에 누운 지아는 마치 낡아버린 헝겊 인형 같았다.“나는 이제 깨끗하지 않아. 나는 더 이상 온전한 사람이 아니야.”“엄마, 내가 잘못한 걸까?”“엄마 말을 들었어야 했나?”지아는 마치 주문이라도 걸린 듯 그 말들
시간을 되돌려 지아가 자살을 시도한 그날로 돌아가 보자. 열 달을 품고 낳은 딸, 원래라면 학교에서 청춘을 만끽해야 할 그녀가 지금은 병원 침대에 누워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다. 분노와 후회가 내 가슴속에서 뒤엉켰다.모든 일의 시작은, 결국 엄성훈이 일부러 지아를 송재준에게 소개한 그날부터였다. 지금 송재준이 벌이고 있는 일들에 대해 성훈이 전혀 몰랐을 리가 없다.깊은 밤이 되자, 나는 몰래 성훈의 집으로 들어가, 그를 마취제로 잠들게 하고 묶어놓았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내가 자신의 앞에 있는 걸 보자 성훈의 눈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으며, 겁에 질린 목소리로 외쳤다.“내가 파혼한 거면 됐죠, 그렇다고 날 이렇게 묶을 필요는 없잖아요!”“정말 파혼뿐인가? 지아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아, 너 혼자 한 짓이 아니겠지?”성훈은 말을 더듬으며 여전히 거짓말로 둘러대려 했다.“난 그냥 평범한 사람일 뿐이에요.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어요. 권지아가 그런 일을 당한 건 나도 원하지 않았다고요!”‘평범한 사람이 교외에 있는 별장을 살 수 있을까? 평범한 사람이 수억 원짜리 차를 탈 수 있을까? 평범한 사람이 월수입이 수천만 원일 수 있을까?’“엄성훈, 이런 말 들어본 적 있어?”“여자가 한이 맺히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맺힌다는 말. 특히 한이 맺힌 어머니를 건들지 말라는 말.”나는 칼을 들고 성훈의 옷을 찢으며, 펜으로 그의 신장이 있는 부위를 표시했다. 칼끝이 성훈의 피부를 따라 미끄러지자, 그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지아가 신장을 잃었어. 네 신장을 꺼내 지아에게 줄게. 맞지 않으면, 개밥으로나 줘야지.”“이건 불법이에요! 불법이라고요! 지아 어머니! 이러다 감옥에 가세요!”성훈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소리쳤지만, 처음의 뻔뻔함은 이미 사라졌었다.나는 가볍게 웃으며 칼을 쥔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그의 피부에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내가 과연 못 할 것 같아? 지아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 돌보고 있어.”
갑자기, 날카롭고 귀를 찢는 듯한 긁히는 소리가 이 밀폐된 공간에 울려 퍼졌다. 하얗게 창백한 손이 벽돌 틈을 붙잡고, 커튼 뒤에서 천천히 기어 나왔다.“이모, 빨리 도망쳐요.”기괴하게 생긴, 절반만 남은 몸통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괴물이 내 이름을 부르며 힘겹게 기어 오고 있었다. 내가 멍하니 서 있는 걸 보고 그 여자가 고개를 번쩍 들어 나에게 미소 지었다. “저예요.”입가가 갈라진 얼굴로, 반쯤 잘린 혀를 내밀고, 움푹 파인 볼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누군지 알아차렸다.유다현, 나의 옛 제자이자 지아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그 순간, 나는 언제나 순하고 착했던 딸이 왜 두 명의 미친 남자 사이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어쩌다가, 네가...”‘왜 여기에? 왜 이렇게 된 거야?’어느 질문도, 예전의 착하고 예쁜 여학생을 마주한 내 입에서는 쉽게 나오지 않았다.바닥에 구두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송재준이 다현의 드문드문한 머리카락을 잡아채며 말했다.“안 돼, 비밀을 누설하는 사람은 벌을 받아야지.”그 말과 함께, 송재준은 허리춤에서 칼을 꺼내어 다현의 손가락 다섯 개를 잘라냈다.예상했던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나는 송재준이 다현의 숨을 확인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실망이 서려 있었고, 쓰레기를 처리하듯 다현이를 발로 차버렸다.“쓸모없는 것, 몇 번을 팼다고 죽어버리다니.”“당신 딸은 참 오래 버티더라고요.”송재준은 미친 듯 웃으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또한 그의 얼굴에는 만족감이 역력했다.나는 떨리는 몸을 참으며, 크게 외쳤다.“넌 미쳤어, 왜 죄없는 애들을 다치게 한 거야!”송재준은 표정을 굳혔지만, 이내 다시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든 칼을 흔들었다.“왜냐고요? 당연히 재미있으니까요. 쾌감을 느끼면서 돈도 벌 수 있으니까요.”그는 내 턱을 강하게 움켜쥐며 나와 시선을 맞추며 가까이 다가왔다.“누가 이걸 거절할 수 있겠어, 하하하!”나는 온몸이 떨리는 걸 느꼈다. 그것
“그래요?”곽시양은 부하들을 물리고, 손에 든 국을 한 모금 들이켰다.“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건 돼지고기 같은데요?”“고기는 돼지고기지만, 다른 건 볼 수 없죠.”내 말을 듣자마자 곽 팀장은 바닥에 떨어진 뼛조각을 집어 들고는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러자 그의 얼굴은 금세 굳어졌다.“임숙희 씨, 당신을 살인 혐의로 체포하겠습니다.”나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형사님은 베테랑 형사잖아요. 사망 시간을 보면, 제가 말한 것이 맞다는 걸 알 수 있을 거예요.”“무슨 뜻이죠?”“이 뼛조각은 제가 송재준의 지하 공장에서 가져온 거예요. 그곳에는 한두 구뿐만 아니라, 제 학생이었던 유다현도 그 남자 손에 죽었어요.”“하지만 이 정도로는 송재준을 법정에 세울 수 없다는 걸 잘 아시잖아요.”“만약 내가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면요?”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곽 팀장은 전화를 받았다. 통화를 마친 후, 약간의 동정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엄성훈이 당신을 납치 혐의로 고소했어요. 사건은 이미 법원으로 넘어갔고요.”곽시양은 내게서 증거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지금은 그 증거를 드릴 수 없어요. 법정에서 제출할 거라서요.”곽시양은 무언가를 말하려다 멈칫하더니, 마지막으로 한 마디 남겼다.“행운을 빌게요.”...법정에서, 엄성훈은 휠체어에 앉은 채로 나왔다. 성훈이 나를 보자마자, 나는 그의 입가에 억누를 수 없는 조소가 떠오르는 것을 감지했다.순간, 등 뒤에서부터 섬뜩한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피고 임숙희 씨, 당신은 원고 엄성훈을 납치한 혐의가 있으며, 증거가 확실합니다. 이에 하실 말씀 있습니까?”“저는 엄성훈을 납치한 것을 인정합니다.”“하지만, 엄성훈과 엄성훈의 상사 송재준이 사람을 납치하고, 장기를 밀매했으며, 수많은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을 고소하는 바입니다.”이 말에 법정이 술렁였다.“증거는 이미 제출했습니다. 그리고 법정에서 증거 영상을 상영해 주시길 바
‘모두가 나를 미쳤다고 말하니, 차라리 완전히 미쳐 보지 뭐.’“퉤.”핏덩어리가 된 무언가를 나는 뱉어냈다. 엄성훈은 귀에서 계속 흘러내리는 피를 두 손으로 막으며 거의 기절할 듯 비틀거렸다.“미친 사람이 하는 짓이니, 그건 그냥 이번 게임의 보상으로 받아들이시죠.”나는 피로 범벅된 이빨을 드러내며 그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집으로 돌아온 지 사흘째 되던 날, 곽시양 형사가 모든 사람의 눈을 피해 어두운 밤 몰래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만났을 때 첫 마디는 이랬다.“당신이 한 말이 모두 사실이라는 걸 알고 있어요.”형사는 품에서 증거 봉투를 꺼내 보였다.“공장에서 이걸 발견했어요. 화학 감정 결과 유다현의 왼쪽 새끼손가락이라는 게 확인됐고요.”“그럼 왜 그때 말하지 않았던 거예요?”“송재준의 세력이 얼마나 큰지,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거예요.”그래, 검은 것도 하얗다고 말하는 세상에서 손가락 하나로 무엇을 증명할 수 있겠는가?“우리는 이미 송재준과 거래했던 사람들과 일부 실종자들의 신원을 파악했어요.”“하지만 송재준이 새로운 공장을 차린 곳을 찾지 못하는 한, 우리는 체포할 수 없어요.”“어떻게 제가 당신을 도와야 하는 거죠?”“다음 주 금요일에, 새로운 물건을 주문한 구매자가 있어요. 송재준의 손에는 재고가 없으니 다른 곳에서 확보해야 해요. 그래서...”곽시양은 말을 멈추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지아 씨를 미끼로 사용할 생각이에요.”“그건 절대 안 돼요! 내 딸은 이미 신장을 하나 잃었어요. 내가 어떻게 다시 우리 딸을 위험에 내몰 수 있겠어요!”“임숙희 씨, 다른 아이들을 생각해 주세요. 송재준을 잡지 못하면 진성시는 계속해서 불안할 거예요.”“나가요. 당장 나가라고요!”나는 내 모든 힘을 다 쏟아내 곽시양을 문밖으로 밀어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다가오는 딸을 보았다.“엄마, 저 괜찮아요. 제가 할게요.”...지아의 안전을 위해, 나는 지아를 집 안에 가둬 두고 한 발짝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하지만 시간이 하루하루 지나도, 여전히 아무런 조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지아의 상태가 점점 나빠지는 것을 보며, 나는 마음이 찢어질 듯한 고통을 느꼈다. 지아는 링거를 맞고 있으면서도 나를 위로하려 애썼다.“엄마, 나 이제 아주 좋아진 것 같아. 식욕도 좋아요.”“우리 전에 같이 먹었던 그 만둣집에서 만두 좀 사다 주세요. 배가 고파요.”...내가 다시 돌아왔을 때, 곽시양은 이미 지아의 병실에 와 있었다.“지아씨의 상태가...”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이건 송재준이 한 짓이에요.”곽시양은 한숨을 쉬며,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다시 한번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또 다른 사람이 실종됐어요.”지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우리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고, 만두를 허겁지겁 먹었다. 그런데 지아의 입에서는 이가 저절로 빠져나왔다.나는 지아가 가볍게 내뱉는 말을 들었다.“엄마, 내가 죽더라도, 절대 슬퍼하지 마세요.”...나는 엄성훈의 집으로 달려가 그에게 뺨을 갈겼다.“지아가 이제 곧 죽어가. 이제 좀 만족스러워?”“20년 동안 함께 자란 소꿉친구였는데, 엄성훈, 너는 정말 잔인한 사람이구나.”성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요. 송재준이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했었어요.”“송재준, 송재준, 넌 그 새끼의 충실한 개에 불과해. 근데 그 새끼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하지?”“어릴 때부터 내가 너에게 얼마나 잘했는지 생각해 봐. 지아는 너를 소중히 여겼고, 모든 것을 네 위주로 생각했어.”“그런데 너는 오히려 지아를 상처입혔어. 엄성훈, 정말 실망이구나.”성훈은 멍하니 서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지아를 한번 보고 싶어요.”...병원으로 돌아오자, 성훈은 병실 밖에 서서 들어가지 못하고, 문틈으로 지아를 바라보고 있었다.간호사가 약을 갈아주러 들어간 순간, 그제야 성훈은 나에게 시선을 돌리고 USB 하나를 건넸다.“지난번에 네가 공장에서 녹화한 영상이 여기에 있어요.”
나는 죽은 개처럼 바닥에 누워 지아를 바라보며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 무대 아래에서는 이 공연의 절정을 기념하며 박수가 터져 나왔다.송재준은 손을 들어 지아의 뺨을 세게 때렸고, 순식간에 그녀의 뺨이 부어올랐다.“이 속에는 너는 포함되지 않아.”지아는 순순히 무릎을 꿇고, 송재준의 발에 머리를 내맡겼다.나는 갑자기 몸을 일으켜 그를 죽이려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쇠사슬에 묶여 있는 탓에, 쿵 소리와 함께 바닥에 세차게 내팽개쳐졌다.그때,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알아차렸다. 우리가 있는 곳은 땅이 아니라, 배 위였다. 아까 배가 미세하게 흔들렸고, 아직 기회가 있었다. 배에서만 뛰어내릴 수 있다면 말이다.송재준은 지아에게 명령을 내렸다.“죽여.”그는 재미있다는 듯, 흥미로운 눈빛으로 우리를 지켜보았다. 지아는 칼을 손에 들고 점점 나에게 다가왔고, 칼날이 떨어지려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방향을 돌렸다.지아는 몸으로 나를 가로막으며, 뒤를 돌아보며 조용히 속삭였다.“엄마, 어서 도망쳐.”뜻밖의 상황에 송재준은 분노에 휩싸였고, 긴 칼을 들고 빠르게 우리에게 다가왔다. 나는 지아를 붙잡고 옆으로 몸을 날려, 간신히 그의 칼날을 피했다.송재준은 다시 달려와 지아의 긴 드레스를 발로 밟고, 지아의 머리채를 왼손으로 잡아당겼다.“도망쳐 봐, 도망쳐 보라고, 이 새끼들아!”송재준의 모습은 완전히 광기에 휩싸여 있었다. 나는 송재준이 지아와 나의 사이 거리를 좁혀올 때까지 기다렸다.그러다가 송재준이 내 팔 길이 안에 들어온 순간, 비녀를 거꾸로 잡아 그의 눈을 찔렀다. 이윽고 송재준은 왼쪽 눈을 감싸 쥐고 나를 노려보았다.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어, 사람들은 저마다 도망치거나 철수하기에 급급했고, 오직 우리 셋만이 무대 위에 남아 있었다.“임숙희, 네가 감히!”송재준은 손에 든 버튼을 눌렀고, 우리 위로 철창이 떨어지며 우리를 가둬버렸다.‘이제는 도망칠 수 없는 걸까?’나는 지아를 내 품에 감싸며, 지아의 눈을 가린 채, 운명을 기다렸다.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