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을 들어서니 그가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뭔가 큰 잘못이라도 한 듯 어쩔 줄 몰라 하는 눈치였다. “가혜야, 주 원장이 오늘 있은 일에 대해 다 얘기했어?”그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먼저 입을 열었다.“네.”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심형진을 향해 걸어갔다.“왜 기다리고 있었어요?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거예요?”그녀는 그의 변명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변명도 없이 한마디만 했다.“주 원장이 한 말이 다 사실이야. 내가 송사월 씨를 이용해 이 대표님을 조롱했어.”그 말에 그녀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이 대표님이 선배를 찾아간 건 우리 두 사람 사이의 일에 끼어들려고 한 게 아니에요. 동생이 억울한 일을 당하고 화가 난 탓에 응급실까지 가게 되었으니 선배한테 따지려 했던 것이겠죠. 그저 선배한테 사과를 요구할 생각이었을 거예요. 근데 어떻게 사월이를 이용해 이 대표님을 반격할 수 있어요?”“먼저 널 귀찮게 한 건 이연석이었어. 사과를 해야 할 사람은 그 사람이라고. 이 대표가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사과를 강요하는 건데?”그녀가 그를 올려다보았다.“그래요. 선배 말처럼 이연석 씨가 먼저 잘못한 거예요. 근데 좀 더 당당할 수는 없었던 거예요? 이 대표님이 선배한테 해결 방법을 내놓으라고 할 때, 이연석 씨가 먼저 선배한테 사과하길 바란다고는 할 수 있었잖아요. 이 대표님은 사리가 밝은 사람이라 그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을 거예요.”“설사 마음에 내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내 체면을 봐서 동의했을 거예요. 근데 사월이를 이용해 이 대표님을 도발해요? 그런다고 이 대표님을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동생이 억울한 일을 당한 데 대해서 다시는 언급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떻게 세 사람의 과거를 들먹거려요?”그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녀의 말대로 도덕적으로 권세를 누리고 있는 그들을 질책하고 싶었으니까. 침묵하는 그를 보며 그녀도 감정을 추스르고 부드
복잡했던 그녀의 눈빛이 점점 실망의 빛깔로 물들어갔다. “선배와 사귄 이후로 단 두 번이었어요. 한번은 부산에서 또 한번은 골프장에 갔던 그날이에요. 이연석 씨는 약속대로 날 만나면 아는 척도 하지 않았고 날 방해하지도 않았어요. 근데 선배는 그 사람이 날 시도 때도 없이 괴롭힌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예요? 선배한테 나도 그런 여자였군요.”무거운 그녀의 말에 심형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런 거 아니야. 난 널 믿어. 네가 계속 이연석 씨를 거절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고. 남자 친구가 있는 너한테 자꾸만 찾아와서 귀찮게 한 그 사람의 잘못인 거지. 그리고 나에게도 잘못이 있어. 널 의심하지 말았어야 했어. 미안해. 내가 말실수를 했나 보다. 널 실망하게 했어.”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그를 쳐다보던 그녀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우리 두 사람 말이에요... 어울리지 않은 것 같아요. 이쯤에서 그만해요.”그 말에 그는 다급해졌다.“이러지 마. 내가 고등학교 때부터 짝사랑했던 여자가 너라는 걸 부모님께서 아시고는 널 각별히 신경 쓰고 계셔. 그래서 모든 일을 미루고 긴 휴가까지 내서 널 보러 오신 거고. 전 남자 친구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나랑 헤어지자는 말 하지 마. 나도 받아들일 수 없고 우리 부모님도 마찬가지야.”고아로 자란 그녀는 부모님이라는 존재에 대해 각별한 감정이 있었다. 심형진과 헤어지는 것이 그의 부모님께 죄송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찌 됐든 이 먼 곳까지 그녀를 만나러 온 분들이니까.망설이고 있는데 그녀의 손을 잡고 있던 그의 손에서 갑자기 피가 흘러나왔다. 선명한 붉은색이 거즈로 스며들어 그의 손등을 붉게 물들이더니 그녀의 손에 떨어졌다. 그는 그녀를 놓아주고 다시 피로 물든 손을 들어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나 지금까지 누구한테 무릎 꿇어본 적 없어. 이 대표가 동생의 억울함을 풀어주겠다고 하면서 나한테 무릎을 꿇으라고 강요했어. 그렇지 않으면 원장실을 나가지 못하게 하겠다고 했어. 그런 사람과 맞서면서 난 사월
집으로 돌아간 그는 밤새 잠을 설쳤다. 주서희가 쓸데없는 참견을 해서 그녀가 자신에게 이별 통보를 한 거라고 생각하고는 주서희를 원망했다. 다음 날, 기운 없이 차를 몰고 병원에 도착해 사무실에 들어서니 윤주원이 자료 뭉치를 들고 기뻐하며 그의 앞으로 달려왔다.“심 선생님, 제가 개발한 약제가 성공했습니다.”그 말에 밤새도록 끼어있던 먹구름이 갑자기 걷혔다. 그가 급히 손을 뻗어 윤주원이 건네준 자료를 받았다. “전 세계에서 유명한 전문가들이 내린 찬사 아닌가요?”“그러니까요. 우리 병원도 함께 표창을 줄 겁니다.”감격한 심형진은 자료를 쥐고 있는 손을 벌벌 떨었다. “그럼 이 약으로 노벨 의학상을 받을 수 있는 거 아닌가요?”윤주원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대수롭지 않은 척 손을 저었다.“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중요한 건 이 약이 환자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그들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겁니다.”의사로서 사람을 살리는 것이지 가장 근본적인 의무라고 생각했다. 개인의 명예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심형진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사람을 살리는 것과 개인의 명예 모두 다 중요한 겁니다.”그와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았다. 사람마다 추구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자연히 생각이 다를 수 있다고 생각했고 뭐라 할 일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자료를 들고 기뻐하며 뒤적거리는데 주임교수가 들어와 윤주원의 어깨를 툭 쳤다.“윤 선생, 대단해. 이번 노벨 의학상은 윤 선생이 받게 될 거야.”윤주원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이게 다 팀원들 덕분입니다. 심 선생님도 많이 도와줬고요.”주임교수는 심형진을 힐끗 쳐다보며 웃었다.“심 선생은 옆에서 도와준 것뿐이고 정말 상을 받게 된다면 윤 선생이 직접 가서 상을 받아야지.”말을 마친 주임교수는 앞으로 다가가 심형진의 어깨를 토닥였다. “심 선생, 자네도 훌륭해. 멀지 않아 자네도 윤 선생처럼 큰 성과를 이뤄낼 거야.”자료를 쥐고 있던 심형진의 손에 한껏 힘이 들어갔지만
한 무리의 의사와 간호사들이 세면대로 향하더니 장갑을 벗고 비누로 손을 씻고 살균하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윤 선생님도 정말 재수가 없어요. 심 선생님 도와서 수술 맡으신 거잖아요. 근데 사고가 났으니 이 책임을 누가 져요?”“누구겠어요? 당연히 윤 선생님이 책임을 져야죠.”“그렇긴 하지만 심 선생님에게도 책임이 있는 거 아닌가요?”수간호사가 말을 하는 의사를 힐끗 쳐다보았다.“지금은 누가 책임을 지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유족들이 하나같이 윤 선생님이 일부러 그런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 문제죠.”손을 씻고 있던 의사는 동작을 멈추더니 고개를 들어 수간호사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수간호사는 사방을 둘러보고는 목소리를 낮추며 의사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죽은 환자분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의학 전문가잖아요. 전에 윤 선생님께 진찰을 받으셨는데 두 분 사이의 의견이 좀 달랐다고 해요. 진료실에서 언쟁이 있었고 환자분이 화가 잔뜩 난 모양이에요. 진료실을 나서며 윤 선생님한테 돌팔이 의사라고 욕설을 퍼부었다고 하던데요.”의사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환자분과 윤 선생님 사이에 안 좋은 일이 있었네요. 유족들이 윤 선생님이 일부러 그런 것이라고 고소할만 하네요.”옆에서 듣고 있던 한 의사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윤 선생님은 그렇게 속 좁은 분 아니에요. 어떻게 그런 사소한 일로 환자를 살해하겠어요? 어쩌면 벌써 그 일을 잊어버렸을지도 몰라요. 그렇지 않았다면 심 선생님이 수술을 부탁했을 때 분명 거절했을 거예요. 그런 환자의 수술까지 맡지는 않았겠죠...”세면대 머리맡에 있던 의사가 고개를 돌리고 사람들을 힐끗 쳐다보았다. “이제 와서 그런 말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유족들이 잡아떼는 한 윤 선생님은 입이 열 개라도 해명할 수 없을 겁니다.”“병원에서는 뭐라고 해요?”“아직 회의 중이에요. 어떻게 해결할지는 잘 모르겠어요.”방금 윤주원과 죽은 환자 사이에 안 좋은 일이 있었다는 의사가 다
병원 회의실에서 주서희가 수술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심문하고 있었다. 그 결과 만장일치로 의사의 실수로 사고가 났다고 했다. 심형진이 일부러 환자의 병세를 숨겼다고 의심한 그녀는 직접 환자의 의료 차트를 확인해 보았다. 근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그녀는 또 CCTV 영상을 가져와 수술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심형진은 그 자리에서 윤주원에게 큰 혈관을 다치지 못하게 하였고 부검 결과 환자의 사인은 큰 혈관을 보수하는 과정에 실수로 죽었다고 했다. 증거가 없으니 아무리 의심스러워도 심형진에게 직접 떠넘길 수는 없었다.그녀는 먼저 나서서 의료분쟁을 해결하고 유족들에게 거액의 비용을 배상한 뒤 윤주원을 해고하고 엄중한 처벌을 내리겠다고 약속했다. 한편, 윤주원이 연구 개발한 약에 대해서 사망한 환자의 학생들이 하나같이 병원으로 달려와 그 일에 개입하였고 윤주원이 연구 개발로 다시 의학계에 발을 붙이는 걸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말이 학생이지 사실은 모두 세계 각지의 의료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들이었다. 사람들은 윤주원이 사사로운 원한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하면서 그의 품행에 문제가 있으니 노벨 의학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했다.만약 그에게 상을 받으라고 한다면 그들은 여러 병원 그리고 의학계 관계자들과 연합하여 병원을 공격하고 상대할 것이라고 했다. 그 말에 주서희는 그 영광을 포기하더라도 약을 연구 개발한 윤주원을 지키겠다고 했다. 그러나 병원의 다른 사람들은 이 연구는 병원에서 허가를 받은 것이고 병원 측에서 윤주원에게 연구를 맡긴 것뿐, 윤주원은 그저 개발팀의 주요 인원일 뿐이니 그 공로를 온전히 윤주원이 차지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상은 반드시 받아야 한다며 이건 병원의 영예라고 했다. 이 약으로 인해 병원이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고 짙은 영향력과 호소력을 얻을 수 있기 위해 병원 측에서는 연구 개발을 도왔던 심형진이 윤주원을 대신해 이 논문을 완성할 것을 제안했다. 윤주원이 노력한 성과
서로를 한참 바라보던 두 사람, 얼마 후 윤주원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알아요. 당신은 내가 상을 받기를 원한다는 걸. 이 영광은 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죠. 하지만 사실 난 그런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아요. 환자들이 내가 개발한 약을 사용하여 완쾌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난 충분해요.”“하지만...”주서희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자 윤주원이 웃으며 그녀의 말을 끊어버렸다.“그거 알아요? 나 약을 개발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어요. 이번에 상을 받지 못하더라도 다음번에는 꼭 받을 수 있을 거예요. 내가 의학 연구를 포기하지 않는 한...”오후 햇살이 유리창을 뚫고 회의실로 비스듬히 들어와 윤주원의 몸을 비추자 은은한 금빛이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와 눈이 부셨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주서희는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주원 씨가 다른 분야의 약도 연구해 낼 수 있을 거라고 난 믿어. 하지만 당신의 명성은...”그녀의 안타까운 심정을 윤주원은 느낄 수 있었다.“서희 씨가 날 믿어주기만 하면 돼요. 명성은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말꼬리 같은 거에요. 난 전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요.”잠시 후, 윤주원은 주서희와 또 상의를 했다.“의료 시스템이 매우 복잡해요. 관련된 사람도 많고 이익도 얽히고설켜 있죠. 이 대표님 끌어들이지 말아요. 나 때문에 환자분의 제자와도 맞서지 말고요.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의사 면허증까지 취소될까 봐 두려워요. 그것만은 남겨두고 싶어요. 제약 회사에 가서 연구개발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고요. 외과수술보다는 약 개발에 몰두하는 게 나한테는 더 적합한 일인 것 같기도 하고요.”사실 주서희는 그가 외과수술을 더 좋아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당분간은 윤주원이 억울함을 당해야 할 것 같다.“주원 씨, 걱정하지 마. 반드시 증거를 찾아 당신의 결백을 증명할 거니까. 다시 이 병원으로 당당하게 돌아오게 할 거야.”윤주원은 미소를 지
일 처리를 마친 후 이승하는 이연석의 부모에 의해 애경 병원으로 불려 갔다.이연석이 교통사고를 내서 육성재에게 골절상을 입힌 일 때문에 이연석의 부모는 합의에 애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육성재는 가시가 돋친 사람처럼 그들이 어떻게 타협을 하든 절대 합의할 생각이 없어 보였고 이연석을 감옥에 보내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한편, 이승하가 사람들을 데리고 육성재의 병실로 들어갔을 때, 그는 침대에 앉아 택이와 육성아 그리고 김선우와 카드 게임을 하고 있었다. 택이는 보스가 들어온 것을 보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인사를 건넸고 육성재는 침대에 기대어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떴나? 이 대표가 이곳까지 다 납시고.”육성재의 비아냥거림을 참으며 택이는 모른 척 뒤통수를 긁적거렸다.“글쎄요... 전 잘 모르겠는데요. 한번 확인해 볼까요?”창문을 여는 택이를 향해 육성재는 눈을 흘겼고 그 눈빛에 택이는 쭈뼛쭈뼛 다시 자리에 앉았다.택이가 놀라는 것을 보고 육성아가 육성재를 사납게 쳐다보았다.“오빠, 우리 택이 씨 그렇게 노려보지 마. 내 마음이 아프단 말이야.”말을 마친 그녀가 택이의 팔짱을 끼고 그를 달래주었다.“우리 오빠 원래 저런 성격이야. 신경 쓰지 마.”택이는 그녀의 얼굴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걱정하지 마, 자기야. 마음에 두지 않을 테니까.”이내 두 사람은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뽀뽀를 했다. 그 모습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너무 꼴불견이어서 참을 수 없었던 육성재가 크게 소리쳤다.“그만해 좀!”그제야 택이와 육성아는 서로를 놓아주었고 얌전히 옆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카드 게임을 하면서 웃고 떠들었다....잠시 후, 육성재가 이승하를 쳐다보며 물었다.“여긴 왜 온 거야?” 택이에게서 시선을 거둔 이승하가 육성재를 향해 턱을 치켜들었다.“정신과 의사한테 쟤들 상담 좀 부탁하지 그래?”멀쩡하던 사람이 여자 친구를 사귀고 나니 갑자기 확 바뀌었다. 정신
병실 안의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3-5명의 눈길이 병상에 누워있는 육성재에게 쏟아졌다.불륜은 영광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육 대표님이 이런 지경까지 내몰리다니.육성재는 심장이 잠깐 뛰었지만, 금세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했다. “내가 눈이 먼 것도 아니고.”그는 이승하의 차가운 시선을 흘긋 보았는데 그 눈빛에는 혐오감이 가득했다. 마치 서유가 무서운 짐승이라도 된 것처럼.이승하는 육성재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그의 눈에 담긴 감정을 읽으려고 했다.“그래서 왜 굳이 서유한테 당신을 돌보게 했어?”육성재는 태연히 팔짱을 끼고 턱을 치켜세웠다. “내 외조부 댁이 서유 어머니한테 빚진 게 있어. 가족들 대신해 갚고 싶어서 부른 거야. 그리고 관계를 돈독히 하고 보상해주고 싶었지.”이렇게 말하며 그는 다시 한번 이승하를 흘끗 쳐다보았다. 무엇을 숨기려는 건지, 아니면 그를 안심시키고 싶어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비록 후에 김씨 가문 사람이 아님이 밝혀졌지만, 어쨌든 김씨 가문에서 자랐으니 내겐 사촌 동생이나 다름없어.”이승하의 차가운 눈동자는 육성재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그의 속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듯했다.육성재도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당당히 응시했다. 비록 심장이 쿵쾅거려 두려웠지만, 감히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잠시 후, 이승하는 차가운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서유에게 이상한 생각이 없길 바래. 아니면 네 다리를 부러뜨릴 테니까.”이승하의 눈동자에서 의구심이 사라지자, 육성재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왜 안도의 숨을 쉬었는지는 육성재 본인조차 잘 몰랐다.그는 서유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단지 그녀의 얼굴을 기억했을 뿐인데 왜 이승하 앞에서 죄인처럼 행동했을까?이런 감정이 육성재를 괴롭혔다. “넌 네 아내를 보물처럼 여겨지겠지만, 누구나 서유한테 눈독을 들이지는 않을 거야.”이승하가 길쭉한 손가락으로 소매를 털며 말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도 내 아내만 못해. 넌 부러워하기나 해.”이 말에 육성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