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은 잘못이 없다는 듯 그가 고개를 빳빳이 들고 이승하를 맞섰다. “그처럼 대단한 집안 배경도 없고 모든 걸 해결해 주는 형도 없으니 당연히 못 할 수밖에요.”이승하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그리고 연석이는 이런 수작 안 부려도 정가혜 씨의 연민을 얻을 수 있습니다.”말을 하면서 그가 거즈를 감고 있는 심형진의 손을 쳐다보았다. 이연석처럼 자신도 사고를 당했다고 꾸민 일을 이승하에게 들킬 줄은 몰랐다. 그 순간,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벌거벗은 사람처럼 한 치의 숨김도 없이 그에게 속마음을 다 들키고 말았다.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이승하가 싸늘한 눈빛을 보이며 차갑게 콧방귀를 뀌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랑 연석이가 가장 큰 차이점이 뭔지 알아요? 연석이는 이런 수작까지 부리면서 정가혜 씨를 빼앗을 생각이 없다는 겁니다. 그랬다면 당신은 그를 이길 수 없었을 거예요.”사람을 깔보는 그의 말이 듣기 참 거북했다. 가시처럼 가슴 깊숙이 박혔고 그의 가장 은밀한 마음을 들춰버렸다. 그걸 그가 어찌 모르겠나? 이연석은 바람둥이지만 늘 당당하고 자유롭게 사는 사람이었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보면 그와 같은 사람이 무엇을 얻으려면 뭐든지 방법을 써야만 했다.이게 잘못된 걸까?“당신이 틀린 건 아니에요. 하지만 연석이었다면 그는 분명 이런 일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가장 큰 차이점은 본성이다. 그가 바람둥이라고 해도 좋고 정가혜에게 매달린 것도 잘못이라고 할 수 있지만 수작을 부린 심형진에 비하면 그는 잘못한 게 없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심형진은 고개를 숙였다. 뭔가 찔리는 게 있다는 뜻이었다.이승하를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 앞에서는 비밀이 다 들통나게 될 테니까. 그러나 그는 여전히 이승하를 반박하며 자존심을 되찾으려 하였다. “대표님 동생이니 당연히 이연석 씨의 편을 들겠죠 .”“그건 당연한 일 아닌가요?”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인정하는 그 모습에 심형진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연석의 일을 처리한 뒤 또다시 말길을 돌리는 걸 보면 분명 그에게 이 일을 따지려는 것이었다. 그가 몸을 돌려 이승하를 쳐다보았고 매처럼 날카로운 눈을 마주한 순간 몸이 살짝 떨렸다.“두 분 사이의 일은 전 잘 모릅니다. 더 이상 할 말 없습니다. 대표님께서 잘 알고 계시면 되는 일이지요.”“그런가요?”서늘한 웃음을 짓고 있는 그에게서 한기가 뿜어져 나와 사람을 두렵게 만들었다. “얼마 전에 정가혜 씨가 심 선생을 데리고 부산으로 가서 송사월을 만났다고 하던데요?”무슨 의도로 묻는 건지 잘 알지 못했던 그는 함부로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가혜 씨한테 송사월은 친동생이나 다름없는 존재입니다. 당신을 데리고 그를 만나러 갔다는 건 송사월이 당신을 인정해 주길 바라서였겠죠. 송사월이 당신을 만나보고 마음 놓고 자신을 당신한테 맡길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근데 이리 내 아내와 송사월에 대해 막말을 하는 겁니까? 송사월한테 사과해야 할 것 같은데...”“전 두 사람에 관해 함부로 말한 적 없습니다. 단지 대표님께서 강제로 서유 씨를 빼앗은 걸 비꼬았을 뿐이죠.”급히 변명을 하던 그가 결국은 이승하에게 꼬투리를 잡히고 말았다. “그러니까 날 조롱한 건 사과 안 해도 된다 뜻인가요?”결국은 송사월을 빌미로 그에게 사과하라고 강요하는 게 아닌가? 그 생각을 하고 있는데 뜻밖에도 이승하가 핸드폰을 꺼내 인터넷에서 김시후에 관한 자료를 찾아 사진을 클릭하고는 테이블 위에 있는 핸드폰 거치대에 핸드폰을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뻗어 핸드폰 화면을 살짝 두드렸다.“송사월은 여기 있으니까 미안하다고 무릎 꿇고 사과해요. 그럼 이 일은 없던 일로 하죠.”옆에 서 있던 소수빈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이건 송사월한테 고개 숙여 사과하라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사과하라는 것이잖아.어찌 됐든 사진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송사월이 아니라 대표님이니까.소수빈의 웃음소리를 듣고 심형진은 난처한 표정을 지
이승하가 심형진을 찾아가 따진 일을 정가혜는 곧 알게 되었다. 쇼핑도 하고 밥도 같이 먹으며 함께하고 있던 서유가 자신이 이승하한테 잘 얘기해 둘 거라고 하자 그녀는 거절했다. 심형진이 저지른 일이니 그가 책임지는 게 맞다고 생각했고 이승하가 이러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다만 두 사람이 결혼까지 약속했으니 계속 만남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한편, 서유는 정가혜의 재혼이 걱정되었다. 재혼까지 불행하다면 아마 다시는 결혼하지 못할 테니까. 그러나 정가혜는 자신에게 이연석 또한 좋은 선택이 아니라고 했다. 심형진의 행동이 조금 문제가 있긴 하지만 바람둥이인 이연석도 문제가 많다고 했다. 들어보니 정가혜의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이연석에게 한평생을 걸 여인은 없을 테니까. 다만...“연석 씨가 너 때문에 울었었잖아.”음식을 집고 있던 그녀의 손이 순간 멈칫하더니 뭔가 생각이 떠오르는 듯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오피스텔에 있을 때, 한밤중에 일어나다가 쥐를 밟고는 울었던 적이 있었어.”“진짜?”흥미진진한 얘기에 서유가 눈을 반짝였다.“다 큰 어른이 쥐에 놀라서 울었다고?”“응, 정말이야. 내가 뭐 거짓말까지 하겠어?”생선 가시를 발라낸 후 그녀가 한 젓가락 집어 서유의 접시에 담아주었다. “그 사람은 아직 애야. 울었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이연석의 편을 들려고 할 때쯤, 주서희가 급히 그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그녀가 자리에 앉더니 원장실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한바탕 수다를 떨었다.이승하가 그녀를 원장실에서 쫓아내지 않은 건 분명 그녀의 입을 빌려 정가혜에게 심형진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이승하의 목적은 분명했다. 심형진이 어떤 사람인지를 똑똑히 알고 다시 한번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굳이 이연석을 선택할 필요는 없지만 심형진도 잘 생각해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결혼은 인생과 관련된 큰일이니까. 하여 송사월의 얘기도 있었지만 주서희는 있는
심형진은 해외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병원에 온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평소에 동료나 환자에게는 늘 신사적이었고 말투도 부드러웠고 한 번도 까칠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사적으로 사람이 이리 다를 줄 누가 알았겠는가?심형진이 이연석을 상대한 방법이 크게 잘못된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떳떳하지 못한 건 사실이었고 이승하가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그가 회피한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의 저지른 일에 대해 책임을 회피하고 이승하를 설득하기 위해 변명을 늘어놓았으니까. 결국 그의 핑계는 정가혜였고 두 번씩이나 그녀를 방패막이 삼았다. 남자 친구로서 자신이 앞장서지는 못할망정 여자 친구를 앞세우다니. 정가혜의 체면을 봐서라도 자신을 놓아줄 것을 바랐지만 정가혜의 체면을 누가 세워주는 건지는 잘 알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 사람이 서유라는 걸 왜 모를까? 서유가 아니었다면 이씨 가문의 사람을 괴롭히고도 간단히 사과로만 끝날 일이었을까?그러나 심형진은 송사월을 들먹였다. 사실 송사월에 대해 말하는 건 괜찮았다. 다만 그들 사이에 있던 지난 일에 그 당사자가 서유인데 어찌 자신의 말이 서유를 겨냥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건지? 주서희의 이런 생각을 정가혜도 잘 알고 있었다. 미안한 마음에 그녀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 서유야. 선배가 이 대표님을 조롱하기 위해 사월이까지 이용할 줄은 몰랐어. 이럴 줄 알았더라면 선배를 데리고 사월이를 만나러 가는 게 아니었는데.”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는 송사월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서 심형진을 데리고 그를 만나러 간 것이었다. 한번 결혼에 실패했어도 다시 일어설 수 있고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럼 사월이도 서유를 내려놓고 우울증에서 점차 벗어날 줄 알았다. 그리고 그한테 심형진이라는 사람을 매형이라고 소개해 주고 싶었다. 근데 심형진이 이승하를 상대하는 무기로 그를 이용할 줄이야...송사월에 대해 서유는 여전히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여
한편, 세 사람이 레스토랑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심형진은 이연석을 찾아가 사과를 전했다.병상에 누워 있던 이연석은 심형진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옆으로 고개를 돌리고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지난번처럼 그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이연석이 흥분하면서 손찌검이라도 할 줄 알았다.근데 이렇게 담담하게 행동하는 걸 보면 정가혜와 얘기가 잘 끝났고 이미 체념한 것 같았다. 그가 이연석의 앞으로 다가가 미안하다고 한마디 내뱉었다.무엇 때문에 사과를 하는 것인지 말하지 않아도 이연석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그가 빛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눈망울로 담담하게 심형진을 흘겨보았다.“내가 만약 당신이라면 다리가 부서지는 한이 있다고 하더라고 나한테 사과를 하러 오지는 않을 겁니다.”이미 저지른 일을 뭐 하러 사과까지... 남들이 얕잡아 보기만 할 뿐인데.“강자의 앞에서는 일단 고개를 숙여야 하는 법이죠. 난 당신이 아니에요. 무슨 일이든 저지르고 나면 뒤처리 해주는 형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심형진의 말에 이연석은 차갑게 웃었다. “가혜 씨 남자 친구잖아요. 당신이 머리를 숙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형이 당신을 어떻게 하지는 못할 거예요. 그 점은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것 같은데.”심형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연석의 말이 맞았다. 정가혜의 체면을 봐서라도 이승하가 그를 어찌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그한테 바라는 건 사과일 뿐. 그러나 그 당시 이승하가 대표 이사의 신분을 가지고 동생을 대신해 복수하러 온 걸 보고 부럽고 질투나는 마음에 그는 귀신에 홀린 듯 송사월을 이용해 이승하를 도발하고 비꼬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송사월을 언급하지 않고 이연석이 정가혜를 귀찮게 한 일을 가지고 계속 물고 늘어졌더라면 이승하가 그에게 사과를 강요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자신을 비꼬는 이연석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그 생각은 말끔히 사라졌고 모든 것이 이연석의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연석이 아니었다면 그가 그런 말을 하지도 않았을 테고 정가혜의 앞에서 불쌍한
가시가 박힌 심형진의 말은 밖에서 듣고 있던 사람들까지 화나게 만들었다.“연석이가 여자들을 많이 만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양다리를 걸친 적은 없습니다. 단 한 번도 여자를 배신한 적도 없고요.”단이수가 친구들의 어깨를 밀치고는 당당하게 걸어 들어왔다. 뒤돌아보던 심형진은 시선을 거두고는 이연석을 향해 하찮은 표정을 지었다.“여자 친구를 그렇게나 많이 사귀다니. 그게 바람둥이 아닌가요?”그 말을 듣고 화가 치밀어오른 이연석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단이수가 손을 뻗어 그를 막아섰다.“여자들과 놀며 시간을 때웠을 뿐. 함부로 여자를 건드린 건 아닙니다.”한마디 내뱉은 단이수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그 점에서는 연석이도 심형진 씨를 이길 수 없을 것 같네요.”그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무슨 뜻입니까?”단이수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담담하게 웃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해외로 갔다고 했었죠. 그쪽은 워낙 자유분방한 곳 아닌가요? 사람도 적으니까 뭔가를 알아내는데 그리 어려울 것 같지는 않은데.”심형진의 과거에 대해 돈만 조금 쓰면 바로 알아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잘난 척하다가 결국 자신의 잘못이 이 세상에 드러나면 그땐 어찌하려고...주먹을 불끈 쥐고 있던 심형진은 차마 재주가 있으면 한번 조사해 보라는 말을 하지 못하였다.“난 고등학교 때부터 가혜를 좋아했었어요. 외국에 있는 동안에도 늘 가혜 생각뿐이었지요. 그러니 날 이연석 씨와 똑같은 사람으로 취급하지 말아요.”단이수는 아무런 반박 없이 인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그쪽이 한 말도 일리가 없는 건 아니네요. 다만...”그가 심형진을 쳐다보면서 위아래로 한 번 훑어보았다.“고등학교 때부터 가혜 씨를 짝사랑했다고 했었죠?”왜 그렇게 묻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던 심형진은 단호하게 딱 잘라 말했다. “네.”단이수가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으며 의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짝사랑을 이렇게 오랜 시간 한 걸 보면 가혜 씨를 많이
대문을 들어서니 그가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뭔가 큰 잘못이라도 한 듯 어쩔 줄 몰라 하는 눈치였다. “가혜야, 주 원장이 오늘 있은 일에 대해 다 얘기했어?”그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먼저 입을 열었다.“네.”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심형진을 향해 걸어갔다.“왜 기다리고 있었어요?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거예요?”그녀는 그의 변명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변명도 없이 한마디만 했다.“주 원장이 한 말이 다 사실이야. 내가 송사월 씨를 이용해 이 대표님을 조롱했어.”그 말에 그녀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이 대표님이 선배를 찾아간 건 우리 두 사람 사이의 일에 끼어들려고 한 게 아니에요. 동생이 억울한 일을 당하고 화가 난 탓에 응급실까지 가게 되었으니 선배한테 따지려 했던 것이겠죠. 그저 선배한테 사과를 요구할 생각이었을 거예요. 근데 어떻게 사월이를 이용해 이 대표님을 반격할 수 있어요?”“먼저 널 귀찮게 한 건 이연석이었어. 사과를 해야 할 사람은 그 사람이라고. 이 대표가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사과를 강요하는 건데?”그녀가 그를 올려다보았다.“그래요. 선배 말처럼 이연석 씨가 먼저 잘못한 거예요. 근데 좀 더 당당할 수는 없었던 거예요? 이 대표님이 선배한테 해결 방법을 내놓으라고 할 때, 이연석 씨가 먼저 선배한테 사과하길 바란다고는 할 수 있었잖아요. 이 대표님은 사리가 밝은 사람이라 그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을 거예요.”“설사 마음에 내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내 체면을 봐서 동의했을 거예요. 근데 사월이를 이용해 이 대표님을 도발해요? 그런다고 이 대표님을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동생이 억울한 일을 당한 데 대해서 다시는 언급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떻게 세 사람의 과거를 들먹거려요?”그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녀의 말대로 도덕적으로 권세를 누리고 있는 그들을 질책하고 싶었으니까. 침묵하는 그를 보며 그녀도 감정을 추스르고 부드
복잡했던 그녀의 눈빛이 점점 실망의 빛깔로 물들어갔다. “선배와 사귄 이후로 단 두 번이었어요. 한번은 부산에서 또 한번은 골프장에 갔던 그날이에요. 이연석 씨는 약속대로 날 만나면 아는 척도 하지 않았고 날 방해하지도 않았어요. 근데 선배는 그 사람이 날 시도 때도 없이 괴롭힌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예요? 선배한테 나도 그런 여자였군요.”무거운 그녀의 말에 심형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런 거 아니야. 난 널 믿어. 네가 계속 이연석 씨를 거절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고. 남자 친구가 있는 너한테 자꾸만 찾아와서 귀찮게 한 그 사람의 잘못인 거지. 그리고 나에게도 잘못이 있어. 널 의심하지 말았어야 했어. 미안해. 내가 말실수를 했나 보다. 널 실망하게 했어.”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그를 쳐다보던 그녀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우리 두 사람 말이에요... 어울리지 않은 것 같아요. 이쯤에서 그만해요.”그 말에 그는 다급해졌다.“이러지 마. 내가 고등학교 때부터 짝사랑했던 여자가 너라는 걸 부모님께서 아시고는 널 각별히 신경 쓰고 계셔. 그래서 모든 일을 미루고 긴 휴가까지 내서 널 보러 오신 거고. 전 남자 친구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나랑 헤어지자는 말 하지 마. 나도 받아들일 수 없고 우리 부모님도 마찬가지야.”고아로 자란 그녀는 부모님이라는 존재에 대해 각별한 감정이 있었다. 심형진과 헤어지는 것이 그의 부모님께 죄송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찌 됐든 이 먼 곳까지 그녀를 만나러 온 분들이니까.망설이고 있는데 그녀의 손을 잡고 있던 그의 손에서 갑자기 피가 흘러나왔다. 선명한 붉은색이 거즈로 스며들어 그의 손등을 붉게 물들이더니 그녀의 손에 떨어졌다. 그는 그녀를 놓아주고 다시 피로 물든 손을 들어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나 지금까지 누구한테 무릎 꿇어본 적 없어. 이 대표가 동생의 억울함을 풀어주겠다고 하면서 나한테 무릎을 꿇으라고 강요했어. 그렇지 않으면 원장실을 나가지 못하게 하겠다고 했어. 그런 사람과 맞서면서 난 사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