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성재가 나오는 것을 보자 김선우가 얼른 뛰어왔다.“형, 방금 누나가 나가는 걸 봤는데 표정이 안 좋아 보여서 인사도 못 했어. 큰고모와 얘기가 잘 안됐나 봐?”육성재는 실망스러운 감정에서 정신을 차리고 손을 들어 김선우의 뺨을 세게 때리려 했지만, 김선우가 몸을 재빨리 피해 빗나갔다.“형, 왜 그래?!”헛손질한 육성재는 손을 거두고 주먹을 꽉 쥐었다.“김선우, 김영주가 김씨 집안 사람이 아니라는 걸 왜 먼저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김영주가 김씨 집안 사람이 아니라고?” 김선우가 의아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어떻게 알았어?”육성재는 김선우의 머리 위를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 “서유가 네 머리카락으로 DNA 검사를 했어. 너희 사이에 혈연관계가 전혀 없대.”김선우는 이 말을 듣고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때 할아버지 할머니가 말씀하신 사람이 서유의 어머니였구나...”육성재는 그가 방심한 틈을 타 그의 정수리를 한 대 때렸다. “언제 그런 말을 했어?!”김선우는 머리를 감싸며 아파서 울부짖었다. “형, 좀 살살해. 여기 방금 누가 머리카락 한 뭉치 뽑아갔잖아. 아직 회복도 안 됐다고!”이미 폭주 상태에 빠진 육성재는 더 이상 인내심이 없었다. “남주혁, 얘 머리카락 전부 뽑아버려!!!”김선우는 반 걸음 물러서며 얌전히 실토했다. “나도 어렸을 때 우연히 할아버지 할머니 말씀을 듣게 된 거야. 구체적으로 누가 김씨 집안의 아이가 아닌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육성재는 그가 거짓말하는 것 같지 않아 다시 물었다. “김영주는 네 할아버지 할머니가 입양한 거야, 아니면 주워 온 거야?”김선우는 고개를 저었다. “난 그중 한 명이 김씨 집안 사람이 아니라는 것만 알아. 어떻게 왔는지는 잘 모르겠어.”“그럼 네 아버지는 아셔?”“나 말고는 아무도 이 비밀을 모를 거야...”‘그렇다면 조사해 봐야겠군.’육성재는 귀찮아서 조사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그에게는 어머니와 유전자가 맞지 않는 사람은 가치가 없었고, 그는 시간
김선우는 아직 비밀을 좀 더 간직하고 싶었지만, 사촌 형이 전혀 상대해 주지 않자 할 수 없이 솔직히 말했다.“아버지께서 나한테 말씀하시길, 그 사생아는 할아버지가 밖에서 다른 여자와 낳은 아이래. 할머니가 알아챌까 봐 심씨 집안에 숨겨 키웠대.하지만 나중에 할아버지가 그 사생아를 심씨 집안에서 데려오고 싶어 하셔서 할머니를 속이셨어. 사생아의 사주가 좋아서 양녀로 데려와 키우면 집안의 재산이 끊임없이 이어질 거라고 했대. 그래서 할머니가 동의하셨지.”“그런데 그 사생아가 이승하 아버지의 정부가 되었대. 할아버지는 할머니 모르게 그 사생아를 족보에 올리셨는데, 이 일 때문에 결국 족보에서 제명했대...”“나중에 이씨 집안 사람들이 김씨 집안의 사생아를 죽음으로 몰았다는 소식이 할머니 귀에 들어갔을 때, 심씨 집안에서 키웠고 김윤주, 김영주, 김종수와 비슷한 이름을 가진 김율이 바로 할아버지의 사생아라는 걸 알게 되셨어. 할머니는 그때 너무 화가 나서 큰 싸움이 났고, 거의 이혼할 뻔했대...”김선우가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육성재는 단 하나의 포인트만 잡아냈다: 김씨 집안의 사생아가 이승하 아버지의 정부가 되었다는 것...그는 이 말을 들었을 때 머릿속에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혹시 이승하가 김씨 집안 사생아가 낳은 아이일까?하지만 이 생각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만약 이승하가 정말 김씨 집안 사생아가 낳은 아이라면, 이씨 집안에서 어떻게 그를 권력자로 만들 수 있었겠는가?그러나 만약에...육성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설령 그렇다 해도 이승하가 꼭 유전자가 일치할 리는 없고, 게다가 이승하의 심장을 꺼내올 수도 없을 것이다.육성재가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김선우가 그의 귀에 대고 계속 중얼거렸다. “서유가 내 사촌 누나가 아니라니 정말 아쉬워. 난 늘 그렇게 온화하고 부드러운 누나를 갖고 싶었는데...”육성재는 이 말을 듣고 서유의 아름다운 얼굴이 떠올랐다. “서유가 부드러워?”김선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육성재가 화가 나서 벽을 짚으며 얼굴이 붉어지고 목까지 벌개진 채 숨을 헐떡이는 모습을 보고, 김선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형, 괜, 괜찮아?”육성재가 붉게 충혈된 눈을 들어 김선우를 노려보며 말했다.“꺼져!”김선우는 다리에 힘을 주고 도망쳤다. 떠나기 전에 남주혁에게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도련님께 약 드시라고 꼭 말씀드려...”남주혁은 항상 지니고 다니는 약을 꺼내고 물을 가져와 육성재에게 건넸다.“도, 도련님, 먼저 약을 드시고 마음을 가라앉히세요...”분노를 억누르려 애쓰는 육성재는 손을 뻗어 약을 받아 들고 고개를 젖혀 삼켰다.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시 눈을 들었을 때, 그의 눈에는 차가운 기색만 남아있었다.그는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을 다시 주워 들고 이태석의 전화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이태석은 육성재의 설명을 듣고 완전히 멍해졌다.“뭐, 뭐라고, 서유가 정말 김씨 집안의 사람이 아니라고?”육성재는 참을성 없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귀가 먹었습니까, 아니면 눈이 멀었습니까? 사람 말을 못 알아들으세요? 대체 몇 번을 말해야 믿으시겠습니까?”노인은 처음으로 누가 그한테 이렇게 소리 지르는 것을 보자 갑자기 화를 냈다.“난 귀도 멀지 않았고 눈도 멀지 않았어. 네가 말을 제대로 못해서 이렇게 된 거잖아. 그러고도 너 지금 나한테 화를 내?”육성재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이씨 집안 사람들과 연관될 때마다 왜 이 꼴로 되는 거야?’‘어린 녀석이 내 앞에서 오만방자하게 굴더니, 이제는 늙은이까지 으스대다니!’‘도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제 말 잘 들어요. 당신 저주할 거예요. 밥 먹다 이에 끼고, 물 마시다 목에 걸려 죽고, 차 타면 타이어 없고, 외출하면 치여 죽고, 자손은 3대를 못 넘기길 바랍니다!”육성재는 한 번에 다 욕을 하고 나서 바로 전화를 끊고 어르신을 차단했다.이태석은 온몸을 떨며 화가 났고, 욕을 하려다 자신이 차단된 것을 알고 더욱 화가 났다!“이 망할 놈!”“이 망할 놈의
택이는 침을 삼키며 육성아에게 다가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아 사과했다.“미안해요, 일부러 성아 씨를 묶으려고 한 게 아니에요.”육성아의 입에는 수건이 물려 있어 말을 할 수 없었고, 그저 눈으로 택이를 노려볼 뿐이었다.그녀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증오심에 택이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떨었다.“이제 풀어줄 테니까 제발 그런 눈빛으로 날 보지 마요.”자신을 돌려보내 준다는 말을 듣자 육성아는 천천히 눈을 내리깔아 눈 속의 분노를 감추고 순순히 택이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택이는 처음으로 그녀가 이렇게 불쌍해 보이는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약해져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입에 물린 수건을 빼냈다.육성아는 신선한 공기를 한 모금 들이마신 후 호흡을 가다듬고 붉게 충혈된 눈으로 자신의 온몸을 묶고 있는 밧줄을 바라보았다.“풀어줘요.”그녀의 시선을 따라 택이는 그녀의 몸을 반 정도 감싸고 있는 밧줄을 힐끗 보고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저었다.“풀어주면 그쪽이 날 때릴 게 분명해요...”택이는 상상할 필요도 없었다. 밧줄을 풀어주면 아마 주먹으로 그를 저승으로 보낼 것이다.이제 루드웰에서 주인님을 위해 일 해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빨리 죽을 수 없었다.그가 자신을 풀어주지 않자 육성아는 묶인 두 손을 꽉 쥐었지만, 가슴 속의 분노를 참으며 맑고 투명한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현우택 씨, 난 당신이 좋아졌어요. 그러니 때리지 않을 거예요...”‘난 당신이 좋아졌어요...”:택이는 약간 놀란 듯 지친 표정에 밧줄로 꽁꽁 묶인 육성아를 바라보았다.“제가 당신께 약을 먹이고 묶어 놓았는데도 제가 좋다고요?”그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다시 묻자 육성아는 서둘러 꽃처럼 환한 미소를 지으며 살짝 웃었다.“우택 씨가 이렇게 한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 믿어요.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절대 날 해치지 않았을 거예요. 결국...”육성아는 잠시 말을 멈추고 2초 후 시선을 택이의 하반신으로 옮겼다.“우리가 그렇게 여러 번 잤는데, 어떻게 감정이 생기지 않
원래 매우 화가 나 있던 육성아는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아파왔다...젠장, 정말로 그를 좋아하게 된 것 같았다...‘육성아, 넌 정말 못난 년이야...’그녀는 마음속으로 자신을 저주한 후 다시 현우택에게 수배령을 내렸다. “당신이 어디로 가든 내가 당신을 꼭 찾아내서 오늘의 원한을 갚을 거예요!”택이는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꼬리만 살짝 올렸다. S 조직의 멤버를 어떻게 마음대로 찾을 수 있겠는가. 자신이 자발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한 불가능했다.하지만 그는 여자 하나 때문에 바보처럼 죽으러 갈 리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 육성아와 헤어진 후에는 다시 만나지 않을 것이다.거울을 통해 현우택의 눈에서 단호함이 흘러나오는 것을 본 육성아는 분노와 증오에 휩싸였다.“현우택, 넌 정말 남자도 아니야!”그녀를 유혹해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몸을 가졌다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녀를 속이고 나서 이길 수 없으니까 도망가려고 하다니.이건 짐승이었다. 이 세상에 어떻게 현우택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지? 그런데 하필 이런 남자를 좋아하게 되다니, 정말 말도 안 돼!택이는 죄책감으로 인한 고통을 참으며 차를 육씨 집안 저택 문 앞에 멈추고 속도를 줄여 길가에 정차한 후 차에서 내려 뒷좌석으로 갔다.그는 차 문을 열고 몸을 굽혀 안으로 들어가 육성아를 부축했고, 이 동작으로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게 되었다...만약 자세히 본다면 육성아의 분노 가득한 눈 밑에 그를 보내기 아쉬워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하지만 택이는 스스로를 강제로 그녀를 보지 않게 했고 고개를 숙인 채 그녀의 오른손을 묶은 밧줄을 풀었다. “한 손만 풀어줄게요. 당신이 원하는 만큼 날 때려도 돼요. 다만 때리고 나서는 더 이상 화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한의학에서 말하길... 여자가 화내는 건 몸에...”말이 끝나기도 전에 구속에서 풀려난 육성아가 현우택의 얼굴을 세게 때렸고, 곧이어 그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택이가 반응할 겨를도 없이 그녀는 한
육성재가 육성아를 찾았을 때, 그녀는 차 안에 앉아 멍한 눈으로 먼 숲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는 이 사나운 여동생이 이렇게 넋이 나간 모습을 처음 보았고, 순간 가슴이 아팠다.“성아야, 이승하 사람들이 너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육성아의 움직이지 않던 눈동자가 천천히 돌아 자신의 묶인 것을 풀어주고 있는 육성재에게로 향했다.“오빠, 나를 납치한 게 이승하 사람들이었어?”육성재는 힘들게 밧줄을 풀면서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이승하 아내가 김초희 친동생이야. 서유와 어머니가 조직적합성이 있을 거라 생각해서 데려왔는데, 그 전에 이승하가 사람을 보내 너를 납치했어. 이승하가 이렇게 한 건 나를 견제하기 위해서였지만, 너를 고생시켰네. 다 오빠 잘못이야...”육성재는 밧줄을 다 푼 뒤 육성아에게 사과했다.상황을 이해한 육성아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그러니까 현우택은 이승하의 사람이었구나. 전에 그녀에게 접근한 것은 아마도 그들이 왜 서유를 찾고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서였겠지?이제 이승하가 오빠의 계획을 이용해 그들의 목적을 파악했으니 그녀는 더 이상 이용 가치가 없어진 거였다.현우택이 그렇게 무정하게 떠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생각지도 못했다. 자신이 그에게는 단지 이승하를 돕기 위한 하나의 도구일 뿐이었다니. 쓸모 없어지니 곧장 내치는 그런 도구.육성아는 이해하고 나서 갑자기 냉소를 지었다...그 차가운 웃음에 육성재는 마음이 섬뜩해졌다. “성아야, 괜찮아?”육성아는 여전히 아무 표정 없이 고개를 저었다. “오빠, 검사는 성공했어?”육성재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의 얼굴에 드러난 무력감이 이미 육성아에게 답을 주었다.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고 한마디만 했다. “엄마한테 가볼게.”육성재를 차에서 내리게 한 후, 육성아는 재빠르게 뒷좌석에서 운전석으로 뛰어올라 곧바로 후진을 하여 빠르게 저택을 빠져나갔다.먼지를 일으키며 사라지는 차를 보며 육성재는 걱정스럽게 눈썹을 찌푸렸다. “남주혁, 따라가서
육성아는 잠시 멍해졌다. “오빠가 검사가 실패했다고 하지 않았나요?”검사가 성공하지 않으면 심장을 이식해도 소용없고, 이식하면 거부 반응이 일어나 즉시 사망할 수도 있다.이미 미쳐버린 김윤주는 가능 여부를 상관하지 않았다.“서유는 김초희 심장을 사용했어. 서유가 가능했다면 나도 분명 가능할 거야.”김윤주가 이 말을 할 때 그녀의 눈 밑으로 흐르는 잔인함에 육성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녀의 어머니는 항상 온화하고 우아했는데, 왜 방금 그런 표정을 지은 걸까? 혹시 자신이 잘못 본 걸까?육성아가 고개를 숙여 다시 자세히 보려 할 때, 김윤주는 이미 날카로운 기색을 감추고 연약하고 무기력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성아야, 엄마가 계속 네 곁에 있었으면 좋겠니?”“당연하죠.”그렇지 않다면 그녀와 오빠가 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기여자를 찾았을까? 어머니가 살아서 계속 그들 곁에 있기를 바라는 것 때문이었다.“그렇게 바란다면, 엄마를 위해 김초희 심장을 가져다줄 수 있겠니?”“그게...”육성아는 약간 망설였다.김초희의 심장은 이미 서유에게 이식되었다. 서유는 살아있는 사람인데, 살아있는 사람의 심장을 가져온다는 건...“보아하니 너도 오빠처럼 내가 살기를 그다지 바라지 않는 것 같구나...”“아니에요. 제가 이 세상에서 가장 보내드리기 싫은 분이 바로 어머니세요...”김윤주는 떨리는 손으로 육성아의 손등을 토닥였다.“엄마는 네가 너무 아까워서 그래. 그래서 서유를 찾아달라고 하는 거야...”육성아는 여전히 약간 거부감이 들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김윤주는 이를 보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의사가 김초희의 심장으로 내가 몇 년 더 살 수 있다고 했지만,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그만두자. 엄마는 네가 원치 않는 일을 강요하지 않을 거야.”“의사가 가능하다고 했어요?”의사는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김윤주는 의사의 말을 듣지 않았다.“그래, 의사가 그건 김초희의 심장이라 내 조직과 잘 맞아서 몸에 이식할 수 있다고 했어.”이
상대방의 목소리를 듣고 서유는 잠시 멍해졌다. 바보가 육성재일 줄은 예상치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순간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혈액형이 안 맞는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런데 왜 또 내 심장을 꺼내려고 하는 거예요? 당신들 제정신이에요?”꺼내서 쓸 수나 있을까, 이식하고 나서 바로 거부반응으로 죽을까 봐 두렵지도 않나...정말 살기 위해서라면 어떤 터무니없는 짓도 할 수 있나 보다.육성재도 매우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아마 심리적으로 조금 아프신 것 같아. 하지만 성아는 아직 이성적이야. 이제 성아를 찾으면 설득할게.”상대방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서유는 가득 찬 분노를 억눌렀다. “당신이 꼭 설득하길 바래요. 그렇지 않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왜인지 모르겠지만, 서유가 이 위협적인 말을 할 때 육성재는 그녀가 이를 악물고 귀엽게 화난 모습을 상상하게 되었다...이 생각이 들자마자 그는 겁에 질려 즉시 전화를 끊었다!이승하의 여자는 독이 있나 보다. 그의 머릿속에 이런 저급한 장면이 떠오르다니!육성재는 휴대폰을 던지고 소파에 거꾸로 앉았다. “흥, 몸 파는 여자야, 이승하 그런 바보가 좋아할 만하지!”그가 혼잣말을 하는 동안 귓가에는 여전히 “그렇지 않으면 내가 화낼 거예요...”라는 말이 맴돌았다.이어서 머릿속에 귀엽게 화난 그녀의 모습이 다시 떠오르자 육성재는 폭발했다!“젠장, 이 또라이!”그가 휴대폰을 집어 의사에게 전화를 걸려고 할 때, 남주혁의 전화가 먼저 걸려 왔다.“도련님, 아가씨가 공항에 갔어요. 귀국하려는 것 같은데, 제가 아가씨를 이길 수도 없고 막을 수도 없어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육성재는 잠시 생각하더니 차갑게 말했다. “전용기를 준비해. 내가 귀국해서 성아를 막겠어.”이승하가 욕실에서 나오자 마침 서유가 그의 휴대폰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부인께서 제 폰을 감시하고 계시나요?”서유는 휴대폰을 쥐고 몸을 돌려 그를 향해 말했다. “네, 남편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