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NA 감정 결과가 나온 후, 이승하는 서유를 데리고 지가의 본가로 돌아갔다.이태석은 거실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들어오는 것을 보자 얼굴색이 어두워졌고,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탁자에 세게 내려놓았다.“아직도 얼굴을 들고 다니는구나.”이태석의 말은 서유를 향한 것이었다. 그녀는 이태석을 흘깃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승하는 그녀의 손을 잡고 곧바로 노인 앞으로 가 보고서를 던졌다.“직접 보세요.”이승하가 이태석을 대하는 태도는 늘 냉담했고, 이태석 본인도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그는 서유를 경멸하던 시선을 거두고 보고서를 집어 들었다.결과를 보자 이태석의 어두운 표정이 잠시 누그러졌지만, 곧 의심스러운 기색으로 바뀌었다.“혹시 가짜 보고서 아니냐?”이태석은 보고서를 몇 번 넘겨보더니 다시 탁자에 던지고 고개를 들어 이승하를 살펴보았다. “병원이 네 거니까 의사에게 아무 가짜 보고서나 만들라고 하면 어렵지 않을 텐데.”서유는 이 말을 듣고 아까 이승하가 보고서를 봤을 때의 반응을 떠올렸다. 그는 정말 흥분하지 않았었다. 이에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이승하를 바라보았다.하지만 옆에 있는 남자는 전혀 죄책감 있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무표정하게 이태석의 말을 반박했다. “믿든 말든 당신 마음이지만, 난 그저 내 아내와 내가 혈연관계가 없다는 걸 알리러 온 거예요. 앞으로 우리 일에 끼어들지 마세요.”말을 마치자 남자는 그녀의 손을 잡고 돌아섰다. 이태석의 차가운 냉소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네 어머니는 김율이고, 김석진의 딸이야. 서유 어머니는 김영주고, 역시 김석진이 낳은 딸이고. 지금 와서 보고서 하나 들고 혈연관계가 없다고 하는데 내가 믿을 것 같아?”서유는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엄숙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이태석을 바라보았다. “어르신, 전에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제 어머니가 김씨 집안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요. 제 어머니가 김씨 집안 사람이 아니라면 당연히 저
매우 근사하다고?이승하의 얼굴색이 순식간에 먹빛으로 변했다. “내 신분에 대해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그는 육성재의 사촌 오빠가 되고 싶지 않았다. 역겨웠으니까!서유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거부감 가득한 남자의 얼굴을 살펴보고는 일부러 그를 놀리며 말했다. “알겠어요, 사촌 오빠. 비밀 꼭 지킬게요.”운전 중이던 이승하는 잠시 반응하지 못하고 한 번 방향을 틀었다가 이내 서유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방금 뭐라고 불렀어?”서유는 한 손으로 차창 가장자리를 짚으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사촌 오빠라고요, 왜요?”이승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왜 나를 사촌 오빠라고 부르는 거야?”서유는 웃으며 대답했다. “검사하기 전에 당신이 저를 사촌 동생이라고 생각했잖아요. 그러니 사촌 오빠라고 불러도 틀린 말은 아니죠...”이승하: ...서유는 약 올리듯 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사촌 오빠, 당신 도덕관념에 좀 문제가 있네요. 내가 가르쳐줄까요?”귀여운 모습의 여인을 보며 이승하의 눈빛에도 미소가 어렸다. “수업? 좋아, 어떻게 가르치고 싶은데?”서유가 휴대폰을 꺼내 도덕경을 검색해 그에게 들려주려 했지만, 그가 차를 교외의 작은 숲으로 몰고 가는 것을 보고 물었다. “어디 가는 거예요?”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은 남자가 고개를 돌려 똑같이 웃음기 섞인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조용한 곳을 찾아서 네 수업을 들으러 가는 거지.”오랫동안 그에게 농락당해온 서유는 그의 속뜻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러지 말아요. 수업 안 할게요...”이승하는 천천히 입꼬리를 올리며 눈에서 미소가 흘러나왔다. “네가 하기 싫어도 난 하고 싶어. 사촌 동생, 얌전히 수업해주는 게 좋을 거야...”서유: ...일찍 알았더라면 그를 놀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결국 되받아치고 말았다.그녀가 이승하에게 의자로 밀려들어갈 때, 그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사촌 동생, 왜 사촌 오빠라고 안 부르는 거야?”서유는 이를
연남동 카페, 육성재의 차가 그늘진 곳에 숨어 있었다.한편, 카페에 미리 도착한 김선우는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서유를 기다리고 있었다.8시쯤 되어서야 서유는 차에서 내렸고 노란 원피스를 입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육성재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이상했다. 서유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하고 있었다니, 그것도 한눈에 알아봤다. 안면인식장애가 없어지기라도 했단 말인가?그는 고개를 돌려 옆에 앉아 있는 경호원을 바라보았지만 경호원의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당신 누구야?”3년 동안 그의 곁을 지켜왔던 경호원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도련님, 저 남주혁입니다.”육성재는 그를 노려보며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생긴 게 왜 그래? 좀 특별하게 생길 것이지. 네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잖아.”그는 말문이 막혔다. 육성재는 고개를 들고 대형 고급 차를 바라보았다. 서유의 뒤를 이어 우뚝 솟은 그림자가 차에서 내려왔다. 뼈에 깊숙이 박힌 그 얼굴을 본 순간 그는 화가 나서 얼굴이 빨개졌다.“저 인간이 있으면 어떻게 납치해?”이때, 옆에 있던 남주혁이 그를 다독였다.“도련님, 걱정하지 마세요. 이승하도 같이 납치하면 됩니다.”육성재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호되게 때렸다. “네가 저 인간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같이 납치를 한다고? 생각이 있긴 한 거야?”그가 이마를 가린 채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도련님, 이렇게 합시다. 이따가 도련님께서 이승하를 따돌리세요. 그 틈을 타서 저희가 서유를 데려가겠습니다.”불같이 화를 내던 육성재는 그제야 마음을 가라앉혔다.“명심해. 가면 꼭 쓰고 들어가. 납치범으로 위장하여 김선우까지 같이 데려와.”이승하가 서유를 데리고 카페로 들어가려는 찰나 옆에 있던 소지섭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대표님, 맞은편에 있는 차가 좀 이상합니다.”그 말에 그녀가 뒤를 돌아보려고 하자 이승하가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감쌌다.“아마도 육성재일 거야...”그녀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설마 나와 김선우
마음이 심란한 남자는 머리를 약간 기울이다가 싸늘한 눈빛과 마주쳤고 그 눈 밑에서는 피에 굶주린 섬뜩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그 모습을 보 김선우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이상하다. 예전에는 이리 무서운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왜 이렇게 섬뜩한 거야?사촌 형이 화를 낼 때 저도 모르게 겁을 잔뜩 먹던 것처럼 등골이 오싹해졌다.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김선우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을 돌렸다.“저기... 서유 누나. 왜 보자고 한 거예요? 혹시 나랑 같이 Y국으로 돌아가서 큰고모를 만나려는 거예요?”서유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오늘 이리 보자고 한 건 선우 씨의 머리카락이 필요해서예요.”그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돈을 빌려달라고 하면 결혼생활이 불행해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머리카락을 빌려달라고요? 그게 무슨 뜻인지...” 이승하를 조롱하는 말이라는 걸 서유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김선우 이 인간, 간도 크지. 감히 승하 씨 앞에서 이리 깐족대다니. 또 얻어맞으려고 이러나? “유전자 검사를 하려고 해요.” 그제야 이유를 알게 된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누나는 우리 작은고모랑 똑같이 생겼어요. 분명 우리 김씨 가문의 사람일 거예요. 검사할 필요도 없을 것 같은데요.”“이 세상에는 닮은 사람들이 많아요. 많이 닮았다고 해서 내가 선우 씨 작은고모의 딸이라고는 할 수 없죠. 유전자 검사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안 그러면 믿을 수가 없어서요.”김선우는 고래를 끄덕였다. “그래요. 내 머리카락으로 해요. 검사 끝나면 나랑 같이 Y국으로 가서 큰고모 만날 거죠?”서유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김씨 가문의 사람이라는 결과가 나온다면 마지막으로 만나러 가는 게 도리겠죠. 하지만 아니라면 가지 않을 거예요.” Y국으로 가겠다고 한 그녀의 말에 그가 기쁜 표정을 지으며 가슴을 쳤다.“걱정하지 말아요. 누나는 분명 우리 김씨 가문의 사람일 거예요...”이내 그가 옆에 있는 잘생긴 이승하를
이승하는 쌍꺼풀을 살짝 치켜든 채 다급한 모습의 육성재를 힐끔 쳐다보았다.“당신이 나오라면 하면 나가야 하는 건가? 당신이 뭔데?” 잘난 척 사람을 깔보는 그 모습이 너무 싫었지만 육성재는 어쩔 수 없이 이를 악물고 애써 참았다.“당신과 관련된 일이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당신을 찾아올 일도 없었겠지.”그 말에 이승하는 피식 웃었다.“육성재, 내 기억이 맞는다면 우리 두 사람은 서로 죽일 만큼 원수 사이 아니었나? 나한테 정말 급한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게 당신이 바라는 거 아니야? 이리 날 찾아올 리도 없지.”맞는 말이었다.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이 세상에서 첫 번째로 좋아할 사람은 육성재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티를 내면 안 되었다. “마음대로 해. 이따가 심혜진이 서유를 데리고 가도 내 탓은 하지 마. 난 이미 당신한테 알려줬으니까.”최근 심혜진은 꽤 유명한 국제 변호사를 구해서 국내로 돌아왔고 며칠 뒤에 서유와 소송을 할 예정이었다. 심혜진의 계획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심혜진이 아이를 빼앗으려 한다는 핑계를 대며 이승하를 따돌리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승하는 별 반응이 없었고 그저 깊은 눈동자만 치켜든 채 무뚝뚝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무슨 수작을 부리는 지 벌써 알아차렸다는 듯한 눈빛에 그는 찝찝하기만 했다. 이승하가 큰 반응이 없는 것은 정상이었다. 그러나 연이의 이모인 서유는 뭔가 반응이 있어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성재 씨, 심혜진이 내 조카딸을 데려가려 한다는 걸 어떻게 알았어요?”그녀는 다급한 척하며 그에게 물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의자 위에 손을 짚고는 옆에 서 있는 육성재를 쳐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승하와 키와 비슷한 육성재가 시선을 돌리는데 호수처럼 맑은 그녀의 눈망울과 마주쳤다. 그 순간 가슴이 살짝 떨린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눈을 피했다. “방금 만났는데 아이를 뺏으러 간다고 사람들을 엄청 많이 데리고 가더라고요
그제야 이상함을 느낀 육성재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어디 가는데?”이승하가 운전기사를 향해 턱을 치켜들자 운전기사는 이내 차 문을 잠갔고 곧이어 차는 빠른 속도로 달려갔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남주혁은 쫓고 싶어도 따라갈 수가 없게 되자 차 번호판을 외워 육씨 가문의 경호원들에게 연락해서 얼른 육성재를 찾으라고 당부했다. 그러고는 때를 노리고 납치범으로 위장한 뒤 마대 두 개를 들고 사람들을 함께 카페로 돌진했다.서유를 잡아가서 도련님과 맞바꿔도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서유와 김선우를 쉽게 납치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이승하가 엄청난 힘을 가진 사람 이곳에 둘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소지섭은 S 조직에서 가장 실력이 좋은 팀원이었고 택이조차도 그한테는 상대가 안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주혁이 데리고 온 절반의 경호원들이 소지섭에 의해 바닥에 쓰러졌다. 바닥에 누워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는 경호원들을 보며 주먹을 불끈 쥐고 소지섭과 겨루어 보려던 남주혁은 겁이 덜컥 났다.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속전속결해야 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이미 경찰에 신고를 했기 때문에 경찰들이 오면 그들은 잡혀갈지도 모른다.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남주혁은 여전히 이를 악물고 뻔뻔스럽게 다른 경호원들을 불러 함께 소지섭을 상대했다.“억지로 싸우지 말고 그냥 바닥에 눌러서 움직이지 못하게 해.”전략을 바꾼 후 경호원들은 소지섭에게 매를 맞으면서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중 한 경호원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에게 돌진하더니 마치 문어처럼 그의 등에 뛰어올라 그의 목덜미를 한사코 껴안고는 아무리 떼어내려 해도 절대 손을 놓지 않았다. 그 광경을 보고 다른 경호원들도 하나같이 소지섭의 몸 위로 뛰어오르기 시작했고 이내 소지섭은 바닥에 깔리고 말았다. 아무리 힘이 세도 십여 명의 사람들이 누르고 있으니 힘을 쓸 수가 없었다. 게다가 방금 그에게 맞고 쓰러진 사람들도 다리를 쩔뚝거리며 다가와 그 위로 몸을 쌓았고 소지섭
이번 일을 김선우와 육성재가 함께 꾸민 줄 알았다. 하지만 방금 실실거리며 동영상을 촬영하고 아무것도 모른 채 납치범에게 잡힐 뻔한 그 모습을 보니 김선우와 육성재는 한 편이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안심하고 김선우에게 물었다.“어떻게 나가는지 알아요?”그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깜빡거렸다.“따라와요.”뒤를 돌아 배전함 쪽으로 가는 그의 모습을 보고 그녀는 황급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테이블을 지나가던 길에 그가 양식용 칼을 집어 들고는 다른 사람의 와인을 한 잔 집어 들었다. 느긋하게 배전함 자리로 가서는 손에 들고 있던 와인을 단숨에 들이키더니 술잔을 내동댕이쳤다.술잔이 바닥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는 소리가 들리더니 카페 전체의 불빛이 갑자기 꺼져버렸다. 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그가 손목을 잡아당겼고 머리 위에서 맑고 듣기 좋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누나, 날 따라와요.”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익숙하게 사람들의 눈을 피해 캄캄한 복도를 지나 이리저리 굽이 돌아 뒤에 있는 주방 쪽을 통과해 카페를 빠져나왔다.도로 위에는 오토바이가 한 대 세워져 있었고 오토바이를 탄 그가 헬멧을 벗겨 그녀에게 건네주며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올라와요.”오토바이를 보자마자 지난번 김선우와 이승하의 대결이 생각나서 그녀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나 혼자 돌아갈게요.”장난하나. 지난번에 그의 뒤에 앉았다가 혼이 쏙 빠졌었다. 두번 다시는 타고 싶지 않았다. 그 말에 헬멧을 쓰고 있던 그가 흠칫했다.“급한 일이 있어서 정가혜 씨한테 가야 한다면서요. 집으로 돌아가려고요?”그제야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생각이 들어 그녀는 바로 말을 바꾸었다.“심혜진이 강제로 연이를 데리고 갈까 봐 걱정돼서요. 아무래도 가보는 게 좋겠어요.”그가 반신반의한 얼굴을 한 채 뒷좌석을 가리키며 말했다.“오토바이 타고 가면 되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그가 카페 쪽을 향해 턱을 치켜들었다.“경찰들이 오면 누나네 경호원들도 경찰서로 가서 진술해야 할 거예
눈을 내리깔고 목에 닿은 날카로운 칼을 보던 그가 피식 웃었다.“알고 싶어?”이승하가 자신을 어찌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기라도 하듯 그는 도발적인 미소를 지었다.“안 알려줄 거야.”손에 칼을 쥔 남자는 자신을 향해 눈썹을 치켜세우는 그의 모습에 아무런 감정도 없던 눈 밑이 점점 싸늘하게 변해갔다.“마음대로 해.”손에 든 칼은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가슴 쪽으로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갔고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낀 후 칼끝이 정확하게 심장 위치를 겨누었다.“하지만 당신 심장은 무사하지 못할 거야.”육성재는 잘 알고 있었다. 이승하가 그에게 손을 댄다면 어떤 피바람이 불어올 것인지. 그래서 전혀 두렵지가 않았다.“당신의 후대들이 김씨 가문의 사람들과 같은 삶을 살기를 바란다면 어디 한번 마음대로 해봐.”그가 누구인가? 육씨 가문의 권력자이다. 이승하가 그를 죽인다면 육씨 가문도 김씨 가문처럼 이씨 가문과 원수가 될 것이다.아무리 이승하가 실력이 좋다고 하더라도 후대들도 그렇다는 보장은 없으니까.그는 이승하가 후대들을 배려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승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칼자루를 움켜쥐고 단칼에 찔러버렸다. 심장이 멎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불과 몇 초 만에 육성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승하를 바라보았다.“당신...”이승하는 칼을 뽑아 들고 칼로 그의 입술을 막았다.“그동안 당신이 왜 나한테 안 되는 줄 알아?”그가 손을 뻗어 가슴에서 콸콸 쏟아지는 피를 가린 채 아픔을 참으며 이를 악물었다.“내가 독하지 못해서.”이승하는 물티슈를 한 장 뽑아 침착하게 피로 물든 칼을 닦으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 “독하지 못한 게 아니라 나보다는 독하지 않아서 그런 거야.”어렸을 때부터 강중헌은 그에게 미래의 권력자로서 S 조직의 리더로서 누구보다도 잔인해야 한다고 말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죽는 사람은 분명 그 자신일 것이라고 했다. 어릴 때부터 이승하는 그 말을 새겨들었고 원수를 대할 때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