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는 거실로 돌아와서 바로 이승하에게 전화를 걸어 육성재가 찾아온 일을 모두 이야기했다.보디가드에게서 이미 소식을 들은 이승하는 부드럽게 서유를 달랬다. “걱정하지 마, 내가 이미 처리하고 있어.”보디가드가 즉시 연락한 후 그는 이탈리아 쪽에 전화를 걸어 보디가드에게 할아버지를 항상 지켜보라고 지시했다.육성재가 서유의 신분을 폭로하려면 첫 번째로 찾아갈 사람이 분명 할아버지일 것이므로 할아버지를 제어하고 나면 다른 사람들은 다룰 만하다.그 차가우면서도 다정한 목소리를 들으며 서유의 불안했던 마음이 점점 안정되었다.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정말 걱정했어요.”사무실에 앉아 있던 남자는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모든 걸 나에게 맡겨.”어떤 상황에서도 이 남자가 가장 자주 하는 말은 바로 이 말이었다.“좋아요, 당신이 있으면 나는 걱정할 게 없어요.”이승하의 얼굴에 번진 미소가 눈에까지 전해졌다. “여보, 당신이 외출하고 싶다면 소진섭을 데리고 다녀. 누구도 두려워할 필요 없어.”소진섭은 S의 태산으로, 그는 이승하의 오른팔이었다. 이승하는 이미 그를 데려와 서유를 보호하게 했다.그는 사실 서유의 신분이 드러나는 상황을 대비하고 있었고 모든 것이 그의 계획 속에 있었다. 그래서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고마워요, 여보”서유는 전화를 들고 달콤하게 말한 후 전화를 끊고 다시 디자인 도면에 집중했다.이승하는 천천히 미소를 거두고 고개를 들어 이동하를 바라보았다. “동하, 북미 지역 접촉 프로젝트는 이미 마무리되었으니 해외에서 잠시 쉬고 와.”이동하의 아버지는 김진태에게 해를 입었다. 육성재가 서유의 출생을 이용해 이씨 집안을 혼란에 빠뜨리려 한다면 그는 충성스러운 동생이 먼저 멀리 떠나기를 바랐다.나중에 이 일로 서유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을 갖지 않도록 말이다.이동하는 뱀파이어 상사가 자신에게 휴가를 준다는 말에 깜짝 놀라 이윤재의 다리를 쳤다. “형, 들었어? 형이 나한테 휴가를 준대. 내가 잘못 들은
이승하는 시계를 한 번 보고 이동하를 바라보며 물었다. “너 안 가고 여기서 점심 먹으려는 거야?”이동하는 손을 흔들며 대답했다. “아니야, 아내가 곧 도시락을 가져다줄 거야. 여기 좀 있다가 갈게.”이승하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제수씨가 매일 점심을 가져다줘?”이동하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맞아, 밖에서 파는 음식이 깨끗하지 않다고 해서 직접 도시락을 만들어줘.”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표실 밖에 우아한 모습의 여인이 도시락 상자를 들고 나타나 손을 흔들었다.자신의 아내가 온 것을 보고 이동하는 서둘러 다리를 내리고 말했다. “형, 나 먼저 갈게. 점심 꼭 챙겨 먹어.”이동하가 아내에게서 도시락을 받아 들고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로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의 표정이 약간 달라졌다.그는 책상 위에 있던 개인 휴대폰을 들어 몇 초간 망설이다가 서유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여보, 회사 식당 음식이 별로야.]그 메시지를 본 서유는 그림을 그리다가 잠시 멈췄다.[그럼 밖에서 먹지 그래요? 회사 밖에 고급 레스토랑이 많잖아요. 아무 데나 골라봐요.]이승하는 잘생긴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답장을 썼다.[밖에서도 맛없어.][그럼 외식을 시킬까요?]대화가 여기서 끊기고 말았다.대화창에 나타난 메시지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이승하는 결국 미소를 지었다.그만두자. 그의 바보 같은 아내를 괴롭히지 말고 편안히 집에 있게 두자.이승하가 더 이상 답장을 보내지 않자 서유는 연필을 내려놓고 한 손으로 턱을 괴며 두 사람의 채팅창을 살펴보았다.혹시... 그가 점심을 가져다 달라고 한 걸까?서유는 아직 아내로서 그룹에 가본 적이 없었으니 한 번 가볼까?이런 생각을 하며 서유는 주방으로 가서 직접 닭고기 수프를 끓이고 몇 가지 담백한 반찬을 준비했다.그녀는 음식을 보온 용기에 담고 소진섭을 불러 보디가드들과 함께 그룹으로 향했다.컴퓨터 앞에서 업무를 처리하던 이승하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들어와
이나라는 이승하가 젓가락을 받지 않고 자신을 차가운 눈빛으로 쳐다보자 순간적으로 두려움이 밀려왔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어 젓가락을 다시 내밀며 말했다. “대표님, 한번 드셔보세요...”이승하의 정교하고 아름다운 얼굴에는 몇 마디의 차가운 말이 떠올랐다. “누가 이 비서한테 식사를 가져다 주라고 했어요?”그의 생활 보조 비서는 단지 식사 시간을 알려주기만 하면 되지 이렇게 비굴하고 아첨하는 행동은 할 필요가 없었다.목소리가 회의 때보다 더 차갑게 들리자 이나라는 약간 두려워하며 말했다. “소... 소 비서님께서 대표님의 위가 좋지 않다고 해서요. 그룹 식당이 위생적이지 않을까 봐 제가 자발적으로 외부에서 사 왔어요.”이승하의 차가운 눈빛에는 혐오감이 가득했다. “나가요!”이나라는 겁에 질려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그녀는 자신이 점심을 가져다주면 그가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나가라고 하다니.이나라는 눈앞의 그림 같은 남자를 바라보며 속상해했지만 그는 그녀를 한 번 쳐다보지도 않았다. 마치 한 번 더 보면 토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이나라는 자신이 조금은 아름답고 재능이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회사의 남자 직원들이 모두 그녀를 떠받들어 주었지만 대표님은 그렇지 않았다.아무리 속상해도 이나라는 상황을 파악하고 물러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입술을 삐죽이며 돌아섰다. 그 순간 이승하가 그녀를 불렀다.“멈춰요!”대표님이 자신을 부르자 이나라는 자신에게 아직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며 떨어진 입꼬리를 다시 올렸다.“대표님, 저...”이승하는 차가운 얼굴로 혐오스럽게 말했다. “그 쓰레기들 가져가고 당신은 해고입니다.”그룹의 고위직과 직원들은 그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이승하가 결혼했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그의 손가락에는 서유의 이니셜이 새겨진 결혼반지가 있었다.이 비서는 자신의 직무를 이용해 그에게 접근하려고 했으니 그런 부정한 행동을 한 사람은 남길 필요가 없었다.이나라는 자신이 단지 점
서유가 돌아갔다는 말에 마음이 급해진 이승하는 벌떡 일어나 뒤쫓아 나갔고 옆을 쳐다볼 새도 없이 앞만 보고 엘리베이터로 달려갔다. 그때, 소지섭과 눈을 마주치던 그녀가 앞으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여보, 나 여기 있어요. 어디 가요?”고개를 돌리니 햇살을 맞으며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두웠던 그의 얼굴이 이내 환해졌다. 그녀는 손에 든 도시락통을 들어 그한테 보여줬다.“가요. 사무실로 가서 같이 점심 먹어요.” 도시락통을 보고 그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아내가 도시락을 챙겨 회사까지 오니 너무 행복했다. 그는 한 손으로 도시락통을 건네받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를 잡고는 사무실로 들어갔다.“주 집사님이 오늘은 셰프한테 뭘 부탁했대?”“아니거든요. 내가 직접 한 요리들이에요. 다 당신이 좋아하는 것들로 만들어왔으니까 많이 먹어요. 연이한테도 이렇게 한 적이 없었는데.”그의 입가에 띤 미소가 더욱 깊어졌다. “연이가 나랑 비교가 돼?”득의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보며 그녀는 참지 못하고 농담을 건넸다.“예쁜 여자가 당신한테 점심을 가져다줄 줄 알았다면 안 왔을 거예요.”도시락통을 열고 있던 그의 손이 멈칫했다. “그 여자가 제멋대로 점심을 가져다준 거였어. 난 허락한 적 없다고. 바로 쫓아냈으니까 괜한 오해 하지 마.”그녀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설마 내가 온 걸 보고 일부러 쫓아낸 건 아니죠?”“난...”“변명하지 말아요. 남자들이 밖에서 일할 때 어떤 모습인지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그가 도시락통을 내려놓고는 그녀의 허리를 꽉 잡더니 그녀를 자신의 다리 위로 앉혔다. “난 다른 남자들과는 달라. 내 마음속엔 당신밖에 없어. 그러니까 이런 일로 나 놀리지 마.”몇 마디만 더 장난치고 싶었지만 정색하며 말하는 그의 모습에 그녀는 더 이상 뭐라 하지 않았다.“농담이에요.”“농담도 안 돼.”그녀는 말이 없었다. 그
그녀가 살짝 몸을 숙이며 남자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당신이 매일 아침 핑크 장미를 한 송이 꺾어서 나한테 주잖아요. 그래서 나도 매일 점심 당신한테 도시락을 챙겨줄 생각이에요. 누가 끝까지 견지하는지 우리 내기해요.”그의 눈 밑에 물든 웃음은 창밖에서 쏟아지는 햇살처럼 화사했다.“어떻게 이런 기특한 생각을 했어?”“김칫국부터 마시지 말아요. 오늘은 첫날이니까 내가 직접 한 거고 다음부터는 셰프가 만든 거 챙겨오기만 할 거예요.”사실 그녀에게 요리할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중요한 기념일 같은 날에는 직접 요리를 해줄 의향은 있어요.”말을 하면서 그녀는 가글을 집어 그에게 건네주었다.그는 식사 후에 입안을 깨끗이 씻는 습관이 있었다. 남자는 가글을 받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잠시 후, 화장실에서 나오자 마침 책장 앞에 기대어 경영학에 관한 책을 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따스한 햇볕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자 옅은 솜털이 훤히 보였고 햇빛 아래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햇빛 아래 그녀의 피부는 하얗고 껍질을 벗긴 계란처럼 매끈해 보였다.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맑고 깨끗했던 남자의 눈이 점점 흐릿해졌다. 사무실 안에 있는 휴게실을 들여다보면서 문득 그 안에 침대가 놓여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여보...” 그가 시선을 거두며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우리 회사에서는 한 적 없지? 한번 할까?”그 말에 그녀는 몸을 곧게 세우고 다급히 뒤로 물러나 그에게서 떨어졌다.“가까이 오지 말아요.”알았다고 하면서도 그는 저도 모르게 앞으로 다가가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마침 점심시간이라 아무도 방해하는 사람 없어.”그가 휴게실 문을 박차고 들어가더니 이내 발로 문을 닫아버렸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잠기더니 자동 커튼이 닫히면서 휴게실 안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회사에서 이게 무슨 짓이에요. 이건 정말 아니에요...”욕정이 가득 차
자신을 이불 속에 감싼 채 손가락 하나만 드러낸 여인을 보며 그의 입꼬리가 휘어졌다. “이리 와.”쑥스러워서 그한테 오라고 한 건데 그가 오히려 그녀한테 가까이 오라고 한다. 그건 내가 먼저 다가간 게 되잖아. 난 싫은데...눈이 가늘게 떨리던 그가 그녀를 안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고개를 숙인 채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계속 옷을 입었다.벨트를 채우는 모습에 마음이 급해진 그녀가 이불을 젖히고 달려들어 그의 허리를 감싸안았다.“당신이 날 이렇게 만든 거예요.”그녀의 작은 손이 허리를 감싸는 순간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1초만 더 늦었더라면 참지 못하고 항복할 생각이었다. 아내가 그보다 더 참을성이 없을 줄은 몰랐다. 근데 그게 너무 좋았다. 그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몸을 돌렸다. 한 손으로 그녀의 몸을 잡고 위로 들어 올려 자신의 품속으로 그녀를 끌어당겼다. 고개를 숙이고 키스를 하려는데 그녀의 하얀 손이 입술에 닿았다.“서두르지 말아요. 내가 할게...” 그가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당신이? 어떻게 하고 싶은데?”복수심에 불타 있던 그녀는 그에게서 내려오더니 갑자기 그의 벨트를 잡아당기며 뒤로 넘어뜨렸다.두 사람이 푹신한 침대에 나란히 쓰러졌고 그녀의 차가운 손이 남자의 복근에서 벨트 쪽으로 천천히 미끄러져 갔다. 남자의 아랫배 부근을 어루만지던 그녀가 갑자기 그의 벨트를 확 풀었다.“뭐... 하려고?”간드러진 눈망울로 그를 쳐다보며 고개를 숙여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당신이 하고 싶었던 거요.”그녀의 몸에 밴 향기가 입안을 가득 채우자 빽빽하게 저린 느낌이 밀려왔다.아랫쪽 배에서 뜨거운 느낌이 몰려왔고 몸이 한껏 달아올라 구름 위에 떠 있는 것만 같았다. 마음이 급해진 그가 그녀의 허리를 꽉 조르고는 몸을 뒤척이며 그녀를 자신의 아래에 가두려고 했다. 그녀의 허벅지를 헤집고 있는데 그녀가 그의 손등을 눌렀다. 그가 어리둥절한 눈동자를 치켜들었다.“왜? 싫어?”고개를
욕정에 불타오른 남자는 화장실 안 아리따운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그제야 자신이 그녀의 꼼수에 넘어갔다는 걸 알아차리게 되었다. 간신히 욕망을 참으며 그가 옆에 있던 타올을 집어 하반신을 감싼 뒤 화장실 문 앞으로 다가갔다.“그 안에서 얼마나 있을 거야?”옷을 입고 있던 그녀는 그의 목소리에 고개조차 들지 않고 대답했다.“당신이 김빠질 때까지요.”뜨겁게 달아오른 그의 몸이 식어갈 때쯤 화장실에서 뛰쳐나와 바로 도망칠 생각이었다. 그가 피식 웃었다.“그래 그럼. 그 안에 있어. 난 회의하러 갈 거야.”이 사람이 또 날 속이려고? 이번에는 절대 속지 않을 거야. 여기 앉아서 핸드폰을 보더라도 절대 나가지 않을 거라고.한편, 걸음을 옮기던 그는 그녀가 문을 열지 않는 것을 보고 발걸음을 멈추었다.우리 와이프 그새 많이 똑똑해졌네.화장실 문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던 그가 옷을 갈아입고 휴게실을 나섰다.문을 열고 닫는 소리에 그녀는 그가 정말 간 줄 알고 자리에서 일어나 살금살금 다가가 문을 열었다.틈새 사이로 눈을 깜박이며 휴게실을 둘러보는데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서둘러 밖으로 걸어 나왔다. 쏜살같이 휴게실의 문을 열고는 사무실을 뛰쳐나가려는데 남자의 단단한 가슴팍에 부딪히고 말았다. 단단한 가슴을 타고 올려다보니 흠잡을 데 없이 잘생긴 얼굴이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향해 피식 웃고 있었다.“당신이 날 놀린 벌이야.”“싫어요.”한 걸음 뒤로 물러나 화장실 안으로 뛰어 들어가려는데 그가 그녀의 허리를 낚아챘다. 남자는 그녀를 벌떡 안아 올려 침대로 내던진 후 거침없이 그녀의 위로 올라왔다.“당신 뜻대로는 안 될 거야.”불을 지펴놓았으니 책임지고 불을 꺼줘야지. 그렇지 않으면 몸이 타버릴 것만 같았다.잠시 후, 그의 만족스러운 눈빛 아래서 기진맥진한 그녀가 차에 올라탔다. 그녀는 힘없이 차창에 기대어 잠시 숨을 돌린 후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4시 반이었다. 기가 막혔다. 오후 시간을 이리
눈앞에는 이태석을 비롯한 이씨 가문의 사람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이연석이 말했던 셋째 할아버지, 고모님 그리고 결혼식에서 딱 한 번 만났던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은 서유를 보자마자 증오에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사나운 그들의 눈빛을 보며 저도 모르게 식은땀이 흘러나와 순식간에 그녀의 옷을 적셨다. 이태석은 용머리 지팡이를 짚고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내가 널 서유라고 불러야 할까 아니면 김초아라고 불러야 할까?”육성재가 어르신께 말씀드린 것 같다. 그녀는 핸드폰을 꽉 잡고 소지섭을 돌아보았다.차에 타고 있던 소지섭은 바로 이승하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러고는 자신을 보고 있는 그녀를 향해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그 뜻을 알아차린 그녀는 그제야 다시 용기를 내어 이태석을 마주했다. “할아버님, 안으로 드세요.”“그리 부르지 말거라.”이태석이 손을 뻗으며 그녀를 막았다.“할아버지라고 부르지 말거라. 난 너 같은 손주며느리 없다.”마음이 약간 아팠지만 그녀는 최대한 감정을 추스르며 상냥하게 그를 대했다.“그럼 어르신이라고 부르겠습니다.”그가 못마땅한 얼굴로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날 어떻게 불러도 네가 김씨 가문의 사람이라는 사실은 바뀔 수가 없는 거야. 말해보거라. 이름도 성도 다 바꾸고 우리 승하한테 접근해서 온갖 수단을 다 써 그와 결혼한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냐? 복수를 위한 것이냐? 아니면 우리 이씨 가문의 가업을 모조리 빼앗을 생각인 것이냐?”흠칫하던 그녀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어르신, 전 어렸을 때부터 서울에 있는 보육원에서 자랐습니다. 제 이름은 원장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이고 신분증도 원장님께서 대신 해주신 겁니다. 서유라는 이름을 바꾼 적이 없습니다. 믿지 못하시겠다면 조사해 보시죠. 모두 기록이 남아있을 테니까.”그는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너희 김씨 가문은 신분 조작을 감쪽같이 하더구나. 내가 한 번 속았는데 또 두 번 속겠느냐?”한 번 속았다니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