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안색이 굳어지자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더 이상 아무 말도 없이 그녀를 빤히 노려보았다. 정가혜는 그를 무시한 채 화를 참으며 액셀을 세게 밟았다. 두 사람 사이에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그가 발을 들어 그녀의 의자를 걷어찼다.“난 여자한테 준 건 절대 돌려받지 않아요. 내일 우리 집에 가서 물건들 다시 가져가요.”“어쩌죠. 나도 돌려준 물건은 다시 찾아오는 법이 없는데.”그녀가 핸들을 돌리며 대답했다.“꼭 나한테 이렇게 화풀이를 해야겠어요?”그 말에 그녀는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동안 돈 때문에 당신 만난 게 아니에요. 그래서 다 돌려준 거예요. 헤어졌으니까 그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잠깐 망설이던 그녀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갔다. “자꾸 나 이렇게 찾아오는 거 선배가 많이 싫어해요.”그 말에 화가 치밀어올랐다.“그 사람이 아니라 당신이 싫은 게 아니고?”그녀는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자신의 말을 계속했다.“당신도 들었다시피 조만간 선배 부모님 뵈러 갈 거예요. 그럼 자연히 결혼 얘기도 오가겠죠.”“선배랑 결혼할 사이인데 자꾸만 이렇게 당신 만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러니까 앞으로 만나게 되면 그냥 모른 척하고 지나가요.”가슴이 무너져 내린 그는 저도 모르게 무릎에 올려놓은 손을 불끈 쥐었다. “오늘 밤은 심형진 씨가 먼저 날 도발하고 날 비꼰 거예요. 지난번 나한테 얻어맞은 일 때문에 앙심을 품고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런 거라는 걸 당신도 잘 알고 있잖아요. 그런데 아직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어요?”정직한 의사이기는 하지만 단점이 없는 남자가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이 여자는 사람을 볼 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같다.“그렇다고 밥 한 끼 같이 먹고 사람을 부정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심형진이 그를 먼저 도발했다는 걸 그녀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자꾸만 그녀를 찾아와 귀찮게 했기 때문에 심형진이 그런 것이
정가혜가 떠난 후 윤주원은 대담하게 이승한테 국 한 그릇을 비우게 하고 나서야 비로소 저녁 식사가 끝이 났다. 이연석과 심형진의 힘겨루기로 인해 서유를 주서희를 자세히 보지 못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서희 씨,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안색이 왜 이렇게 안 좋아요?”연이의 손을 잡고 사람들을 배웅하던 주서희가 발걸음을 멈추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서유를 돌아보았다.“아니에요. 감기 기운이 좀 있는 것 같아요.”“아니에요. 얼마 전에 이상한 아저씨가 서희 이모를 데려갔기 때문이에요.”연이의 말에 서유는 그 사람이 누군지 단번에 알아차렸고 이내 주서희를 잡아당기며 위아래로 그녀를 샅샅이 훑어보았다.“소준섭 씨가 또 찾아온 거예요? 서희 씨를 괴롭힌 거예요? 어디 다친 데는 없어요?”주서희는 그 물음에 이내 대답하지 않고 화난 척하며 연이를 노려보았다.“이모한테 말하지 않기로 나랑 약속했었잖아.”아이는 꼬질꼬질한 인형을 안고 입을 삐죽거렸다.“어른들은 왜 자꾸 거짓말을 해요?”아이들의 세상은 매우 단순하다. 연이를 탓할 수 없었던 주서희는 서유를 향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찾아왔었어요. 이젠 괜찮아졌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소준섭이 그녀를 침범했던 사실을 연이는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 사실을 숨긴 채 가볍게 한마디 했다.“정말 괜찮은 거예요?”마치 큰 병에라도 걸린 듯 그녀의 안색은 너무 보기 안 좋았다. “걱정하지 말아요. 정말 무슨 일이 있었다면 오늘 이렇게 많은 음식을 대접할 수도 없었을 테니까.”소준섭이 그녀에게 강요했던 일에 대해서는 꼭 복수할 것이다. 그러나 서유가 자신 때문에 이승하한테 부탁이라도 할까 봐 그게 걱정되어 그녀는 서유에게 알리지 않았다. 지금껏 이승하의 밑에서 일하면서 한 번도 그에게 폐를 끼친 적이 없었고 늘 스스로 모든 일을 해결하는 것이 그녀만의 규칙이었다. 그리고 그녀와 소준섭 사이의 일은 이승하가 나선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서유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챙겨 먹긴 했는데...”“나 임신이 안 될 것 같아요.”서유는 약간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많은 약을 챙겨 먹었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으니 이번 생은 아이와 인연이 없는 것 같았다.“그럼 시험관 시술이라도 한번 해볼래요?”그 말에 서유는 고개를 돌려 차 안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승하 씨가 동의하지 않을 거예요.”시험관 시술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이를 낳은 게 얼마나 아픈 건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는 서유의 몸이 걱정되어 아이를 낳지 않기로 했다. 이승하의 뜻을 알아차린 주서희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약 처방을 조금 바꿀 테니까 일단 먹어봐요.”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주서희가 그녀를 차 안으로 밀어 넣으며 단호하게 말했다.“내일 약 보내줄게요.”말을 마친 그녀는 차 문을 닫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는 서유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집에 도착하면 연락해요.”“서희 씨도 얼른 쉬어요.”서유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운전기사는 차에 시동을 걸고 블루리도로 향했다.고급 차들이 줄지어 별장을 떠난 뒤, 주서희는 윤주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주원 씨도 얼른 돌아가.”소준섭의 강요로 잠자리를 하게 된 후부터 그녀는 윤주원을 볼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윤주원이 이곳에 있는 게 불편했다. “뒷정리하고 돌아갈게요.”며칠 동안 기분이 가라앉은 그녀를 보며 윤주원은 그녀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늘 조심스러웠다. “그래.”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서서 힘없이 방 안으로 걸어갔다.뒤에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몇 번이나 말을 꺼내고 싶었던 그는 결국 말을 하지 못하였다. 묵묵히 설거지를 마치고 식탁과 주방 청소를 마무리한 뒤에야 소매를 내리고 그녀의 앞으로 걸어갔다. “정리 다 됐어요. 이만 돌아갈게요.”한편, 리모컨을 들고 채널을 돌리고 있던 그녀는 그의 뜻을 알아듣고는 모른 척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조심히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이미 결정 끝난 일이야...”그녀는 눈물을 닦으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미안해...”소준섭에게 복수한 뒤 윤주원과 행복하게 지내려고 했었다. 근데 평온하고 누구한테 사랑받으면 사는 삶은 그녀한테 사치였다. “서희 씨가 아무리 거절해도 난 끝까지 당신 기다릴 거예요.”그녀를 침범한 소준섭에 대해서도 꼭 그 원수를 갚아줄 것이다.“주원 씨, 바보 같은 짓 하지 마.”윤주원을 밀어내는 것은 오히려 그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소준섭 그 미친놈은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는 인간이니까.“내가 바보인 줄 알면 나한테 이러지 마요.” 그 말을 내팽개치고 별장을 빠져나가는 그의 단호한 뒷모습에서 그녀는 맥없이 계단에 주저앉았다.블루리도로 향하는 차 안.“이모부...”인형을 안고 있던 연이가 서유에게 담요를 덮어주고 있는 이승하를 불렀다.“목소리 낮춰. 이모 깨우지 말고.”그가 짙은 눈썹을 들어 아이를 힐끗 쳐다보았다.분명 낮은 목소리였는데...아이는 뾰로통한 얼굴을 한 채 손에 들고 있던 인형을 그에게 건넸다.“이 인형. 가질 거예요? 말 거예요?”손때가 많이 묻은 꼬질꼬질한 인형을 그는 보기도 싫었다.“싫어.”너무 더러워서 그걸 받으면 반년 동안은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았다. 그 모습에 아이는 그에게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다. “쳇. 엄마가 이 인형을 내가 가장 믿는 사람한테 주라고 했었어요. 이모부한테 안 줄 거예요.”그제야 그는 서유에게서 시선을 떼고 아이의 손에 있는 인형을 쳐다보았다.“이 인형을 김초희가 너한테 준 거야?”아이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엄마가 직접 만들어준 거예요. 어때요? 멋있지 않아요?”인형을 바라보며 한동안 말이 없던 그가 손가락을 뻗어 소수빈의 등을 두드렸다.“장갑 좀 줘봐.” 조수석에 앉아 잠이 들었던 소수빈은 이승하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고 이내 서랍을 열어 장갑 한 켤레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남자는 장갑을 낀 뒤 아이가
서유는 아이의 울음소리에 잠이 깼다. 눈을 떠보니 소수빈은 한창 인형 속에 솜을 쑤셔 넣고 있었고 연이는 인형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울고 있었다.“왜 그래?”그녀는 휴지를 잡아당겨 아이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아저씨... 거짓말쟁이에요...”훌쩍거리던 아이는 이모가 깨어난 걸 보고 인형 머리까지 내팽개치고는 서유의 팔을 껴안고 울먹였다. “엄마가 남겨준 인형을 아저씨가 뜯어버렸어요. 다시 제대로 꿰매지 못하고...”이게 뭔 마른하늘에 날벼락인지...소수빈은 옆에 앉아 있는 이승하를 힐끗 쳐다보았다. 마침 이승하도 그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이 일은 네가 책임지라고 하는 눈치였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어쩔 수 없지. 대표님한테서 별장까지 선물 받았는데 이 정도는 내가 책임져야지. “사모님, 인형 안에 칩이 들어있었습니다.”그는 이승하의 손에 있는 칩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면서 그녀한테 누가 진짜 주범인지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눈짓까지 했다. 칩에 시선이 뺏긴 서유는 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이게 왜 여기 들어있어요?”이승하가 손에 든 칩을 만지작거렸다.“언니가 아이한테 물려준 것일 수도 있고 당신한테 물려준 것일 수도 있어.”칩을 건네받은 그녀는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그를 향해 물었다.“이거 보안 처리해야 열어볼 수 있는 거 아니에요?”고개를 살짝 끄덕이던 이승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울고 있는 연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네 엄마가 인형 속에 물건을 남겨두었어. 그걸 꺼내려면 인형을 뜯을 수밖에 없었어. 이 도리는 너도 잘 알지?”아이는 소매로 눈물 콧물을 닦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알아요. 근데 너무 슬퍼요. 이건 엄마가 나한테 남겨준 건데. 인형이 없으면 엄마도 사라지는 거잖아요.”마음이 아픈 서유는 이내 아이를 끌어안았다.“연이야, 걱정하지 마. 이모가 인형 다시 꿰매어줄 테니까. 인형은 계속 우리 연이랑 같이 있을 거야.”그제야 아이는 그녀의 품에 기대어 조금은 진정된 듯했다.“고마워요. 이모
차가 블루리도에 멈춘 뒤, 서유는 연이를 안고 1층 거실에 향했고 아이가 곤히 자고 있어 깨우지 않고 그냥 두기로 했다. 아이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로 들어가니 칩을 처리하느라고 집중하고 있는 그의 빛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문에 기대어 스탠드 조명 아래 남자를 잠시 바라보다가 가사 도우미한테 우유를 데워 오라고 부탁했다. “어떻게 됐어요? 얼마나 더 걸릴 것 같아요?”전기 회로를 통합한 남자가 짙은 눈썹을 드리우며 입을 열었다.“아마 하룻밤 정도는 걸릴 것 같아.”하룻밤?뭐든 다 잘하는 사람 아니었나?칩을 처리하는 데 하룻밤이나 걸린다고?“내 옆에 있어 줘.”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그가 맑은 눈망울로 그녀를 쳐다보며 소파에 앉으라고 눈짓했다. 남편이 칩을 처리하고 있는데 옆에서 같이 있어 주지 않으면 말이 안 되는 것 같아 그녀는 책상을 지나쳐 그의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가 키보드를 빠르게 두드리자 컴퓨터 화면에는 그녀가 알아볼 수 없는 코드들이 빠르게 나타났다.간단할 줄 알았는데 비밀번호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의 잘생긴 얼굴이 점점 찡그러졌다.“당신 언니 말이야. 건축 디자인을 전공했다고 하지 않았어?”“네? 무슨 뜻이에요?”못 하는 게 없는 남편이 이번에는 적수를 제대로 만난 듯했다. “해커를 부르는 게 어때요?”“다시 해볼게.”새벽 5시, 서유는 하품을 하면서 이승하를 타일렀다.“여보, 제발. 그냥 해커 불러서 해요.”그제야 그가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핸드폰을 꺼내 이연석에게 전화를 걸었다.한편, 겨우 잠이 든 이연석은 둘째 형의 전화를 보고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형...”“지금 당장 불루리도로 와.”말도 채 끝나기 전에 전화기 너머로 펑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바로 전화가 끊어졌다.형이 넷이나 되니까 둘째 형은 안 보고 지내도 상관없겠지?마음을 가라앉힌 그가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차를 몰고 블루리도로 향했다. 도착한 뒤, 서유는 상
자리에 앉은 후, 코드를 한번 보고는 그가 키보드를 마구 두드리기 시작했다.이승하보다 더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역시 남자들은 자기가 잘하는 일을 할 때만이 가장 진지한 모습인 것 같다. 밤새 잠을 못 잤더니 피곤이 몰려왔다. 이승하는 그녀에게 암호를 풀면 부를 테니까 가서 쉬라고 했다. 그녀는 가사도우미에게 아침 식사를 준비해 달라고 부탁한 뒤, 연이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 아이를 안고 잠시 눈을 붙였다.컴퓨터의 고수이긴 하지만 이 칩을 처리하는 데는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두 시간쯤 지나서야 그가 컴퓨터에서 손을 뗐다. “김초희라는 여자 대단한 분인 것 같아요. 암호가 겹겹이 쌓여있었어요. 하나를 풀면 하나가 또 나타나고 이 안에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건지...”팔짱을 낀 채 그의 뒤에 서 있던 남자가 화면에 나타나는 코드를 노려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다 풀었어?”“그럼요. 이 세상에 내가 풀지 못하는 코드는 없어요.”형제들 사이에서 컴퓨터에 관해서는 제일 자신 있었다. 그는 다소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다리를 꼬고 코드가 바뀌기를 기다렸다. “다 풀었으면 이제 그만 나가.”그 뜻은 이 안의 내용을 나한테 보여주기 싫다는 건가? “형, 이 안에 있는 건 동영상이에요. 하나하나 조각들을 맞춰야 하는데 보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봐야 한다고요.”이승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서유의 출생에 관한 것이라면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지만...“이따가 뭘 보든 다 못 본 걸로 해.”이연석은 고개를 들고 아침 햇살을 등지고 있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니 혹시 이 안에 놀라운 비밀이라도 있는 거예요?”“뭔 말이 그렇게 많아?” 형의 차가운 눈빛을 보자마자 그는 바로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정말 재수가 없네. 이 엄청난 비밀이 알려지기라도 하면 제일 먼저 나부터 죽이려 하는 건 아니겠지? 그 생각에 저도 모르게 몸이 떨렸다.“형, 앞으로 컴퓨터 좀 더 배워요. 이런
이연석은 동영상의 퍼즐을 맞추고 형식을 변환한 후 스페이스바를 눌렀다. 스페이스바를 클릭하자 어두운 화면에 밝고 선명한 색이 서서히 떠올랐다. 영상 속 배경은 바닷가였고 그 옆은 전부 다 어촌 마을이었으며 환경이 아름답고 조용해 보였다. 주변 환경을 훑던 카메라는 모래사장을 비추며 천천히 좁혀갔고 작은 그림자가 허리를 굽혀 조개껍데기를 줍고 있었다.“초희야, 조심해. 바닷가에 너무 가까이 가지 마.”영상 속에서 갑자기 부드럽고 단아한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곧이어 어린 김초희가 고개를 돌렸다. 연이와 아주 많이 닮은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말아요. 엄마.”엄마?서유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영상을 찍은 사람이 그녀와 김초희의 어머니란 말인가?그녀는 다리에 얹은 손가락을 살짝 웅크린 채 기대와 긴장이 가득한 얼굴로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어린 김초희가 조개를 줍고 달려오자 카메라는 유모차에 누워 있는 아기를 향했다. “엄마, 동생이 한 살이 되면 이 조개껍데기로 팔찌를 만들어 생일 선물로 줄 거예요.”“그래.”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가녀린 손이 아기의 뺨을 쓰다듬고 있었다. “우리 초아, 내일 엄마랑 같이 외할아버지 외할머니한테 가자. 외할아버지랑 외할머니가 분명 엄마한테 돈을 줄 거야. 엄마가 우리 초아 심장 꼭 고쳐줄 거니까 반드시 이겨내야 해.”그 말에 이승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김영주가 도움을 청하러 김씨 가문으로 가지 전에 찍은 영상인 걸까?“우리 동생, 꼭 이겨내야 해.”김초희도 가까이 다가와서 빨갛게 달아오른 아기의 작은 볼에 뽀뽀했다.이어 카메라가 몇 번 흔들리더니 가느다란 실루엣이 화면에 나타났다.낯설지만 부드럽고 선한 기운이 감도는 얼굴을 보자 서유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이 사람은... 성형을 한 엄마일까? “초희야, 초아야. 엄마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몰라서 이렇게 영상을 남기게 되었어. 너희들한테 진실을 말해줘야 할 것 같구나.” “엄마의 본명은 김영주. Y국 4대 가문 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