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가혜는 차 문을 열 용기가 나지 않아 창문을 조금 내리고 틈으로 바깥에 있는 이연석을 바라보았다.“당신이... 여기에 왜 있어요?”“신경 쓰지 말고 문 열어요!”“당신이 뭘 하려는지 말하지 않으면, 문 안 열 거예요...”그가 심형진에게 복수하러 온 것일 수도 있는데 어떻게 함부로 문을 열어줄 수 있을까? 이연석은 분노를 참으며 고개를 숙이고 틈 사이로 주가혜와 눈을 마주쳤다.“술꾼을 데려다주려고요!”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사람을 죽여서 화를 풀 수도 없고 손을 쓸 수도 없으니 그냥 바보처럼 따라와서 도울 수 있는지 보는 것밖에 없었다!“선배를 데려다준다고요?”주가혜는 이연석이 이렇게 착하게 굴 줄은 몰라서 약간 놀랐다.“주가혜 씨, 사람 말을 못 알아듣는 거예요?”이연석이 다시 화를 낼 것 같아 보이자 주가혜는 몇 초간 망설이다가 결국 문을 열었다. 이연석은 곧바로 뒷좌석으로 돌아가 차 문을 열고 심형진의 손을 잡아 그를 차 밖으로 끌어냈다.“이봐요, 그렇게 거칠게 하지 마요, 머리가 부딪쳤잖아요!”“자업자득이에요!”“...”주가혜는 차를 주차할 틈도 없이 황급히 따라갔다.“이연석 씨, 좀 조심해요, 머리가 몇 번이나 부딪혔어요!”“이봐요, 안전통로로 끌고 가지 마요, 계단에 머리가 부딪칠 거예요...”“아——”심형진은 계단에 부딪혀 깨었지만 비명을 한 번 지르고는 다시 통증 때문에 기절해 버렸다.뒤따라오던 주가혜는 무서워서 급히 달려가 ‘복수’하는 이연석을 막았다.“몇 살이에요, 왜 그렇게 유치해요?”유치함의 화신인 이연석은 실제로 그를 끌고 가려 했지만 주가혜의 단호한 태도에 결국 그를 업었다.그는 심형진을 문 앞까지 업고 가서 그의 손을 잡고 지문을 인식시켜 문을 열고 그대로 심형진을 던져버렸다.쾅! 큰 소리가 났다!주가혜는 놀라서 급히 심형진의 숨이 붙어있는지 확인했다.다행히 호흡은 여전히 안정적이었다.주가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힘들게 심형진을 소파로 옮겼다.그 후 욕실로 가서 물을
이연석이 자신을 찾아오는 것을 심형진이 싫어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이연석에게 심형진을 위층까지 데리고 가달라고 부탁했다. 만약 심형진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심형진의 입장을 생각해 보면 너무한 것 같아서 그녀는 서둘러 이연석을 밀어내며 그와 거리를 뒀다.“밤에는 쌀쌀하니까 이불 덮어줘야겠어요.”그는 소파에 있던 담요를 잡아당겨 심형진에게 덮어줬다. 무심하게 툭 던지는데 담요가 심형진의 얼굴까지 전부 가렸다. 그 모습에 눈을 부릅뜨던 그녀는 그에게 다가가 담요를 정리해 준 뒤 창문을 두 개 더 열어놓고 자리를 떴다. 자리를 뜨려는 그녀를 보며 계속 어두워져 있던 이연석의 얼굴이 점차 환해졌다. 앞뒤로 서서 아파트 단지를 걷고 있는데 어두운 가로등 아래 그들의 뒷모습은 점점 더 길게 드리워졌다. 앞서가던 이연석은 코너를 돌 때마다 발걸음을 늦추고 그녀의 그림자가 따라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아파트 단지 입구로 나와서는 각자 운전하고 헤어져야 하는데 그녀가 차에 타는 순간 그가 창문을 두드렸다.“나 술 마셔서 운전 못 해요.”그 말에 그녀는 눈을 흘겼다.“그럼 아까는 어떻게 왔어요?”“아까는 음주단속 하는 경찰이 없더라고요.”“돌아가는 길에도 없을 거니까 그냥 가요.”그를 무시한 채 안전벨트를 매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런데 그때 그의 손이 차창 밖에서 비집고 들어와 잠금 해제 버튼을 빠르게 눌렀다.그녀가 고개를 들기도 전에 뒷좌석 문이 열렸고 몸집이 큰 그가 좁은 차 안으로 빠르게 비집고 들어왔다.그녀의 차량은 BMW 미니 쿠퍼로 공간이 넑직한 편이 아니라 건장한 남자가 앉아 있으면 꽤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내가 차 사줬잖아요. 왜 이런 차를 타고 다녀요? 답답해 죽겠네.”허리를 숙인 채 그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답답하면 연석 씨 차 운전해서 돌아가요.”그의 스포츠카도 그다지 넓은 편은 아니었다. 차라리 그녀의 미니 쿠퍼 차량보다도 더 못했다. 그녀의
그녀의 안색이 굳어지자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더 이상 아무 말도 없이 그녀를 빤히 노려보았다. 정가혜는 그를 무시한 채 화를 참으며 액셀을 세게 밟았다. 두 사람 사이에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그가 발을 들어 그녀의 의자를 걷어찼다.“난 여자한테 준 건 절대 돌려받지 않아요. 내일 우리 집에 가서 물건들 다시 가져가요.”“어쩌죠. 나도 돌려준 물건은 다시 찾아오는 법이 없는데.”그녀가 핸들을 돌리며 대답했다.“꼭 나한테 이렇게 화풀이를 해야겠어요?”그 말에 그녀는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동안 돈 때문에 당신 만난 게 아니에요. 그래서 다 돌려준 거예요. 헤어졌으니까 그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잠깐 망설이던 그녀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갔다. “자꾸 나 이렇게 찾아오는 거 선배가 많이 싫어해요.”그 말에 화가 치밀어올랐다.“그 사람이 아니라 당신이 싫은 게 아니고?”그녀는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자신의 말을 계속했다.“당신도 들었다시피 조만간 선배 부모님 뵈러 갈 거예요. 그럼 자연히 결혼 얘기도 오가겠죠.”“선배랑 결혼할 사이인데 자꾸만 이렇게 당신 만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러니까 앞으로 만나게 되면 그냥 모른 척하고 지나가요.”가슴이 무너져 내린 그는 저도 모르게 무릎에 올려놓은 손을 불끈 쥐었다. “오늘 밤은 심형진 씨가 먼저 날 도발하고 날 비꼰 거예요. 지난번 나한테 얻어맞은 일 때문에 앙심을 품고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런 거라는 걸 당신도 잘 알고 있잖아요. 그런데 아직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어요?”정직한 의사이기는 하지만 단점이 없는 남자가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이 여자는 사람을 볼 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같다.“그렇다고 밥 한 끼 같이 먹고 사람을 부정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심형진이 그를 먼저 도발했다는 걸 그녀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자꾸만 그녀를 찾아와 귀찮게 했기 때문에 심형진이 그런 것이
정가혜가 떠난 후 윤주원은 대담하게 이승한테 국 한 그릇을 비우게 하고 나서야 비로소 저녁 식사가 끝이 났다. 이연석과 심형진의 힘겨루기로 인해 서유를 주서희를 자세히 보지 못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서희 씨,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안색이 왜 이렇게 안 좋아요?”연이의 손을 잡고 사람들을 배웅하던 주서희가 발걸음을 멈추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서유를 돌아보았다.“아니에요. 감기 기운이 좀 있는 것 같아요.”“아니에요. 얼마 전에 이상한 아저씨가 서희 이모를 데려갔기 때문이에요.”연이의 말에 서유는 그 사람이 누군지 단번에 알아차렸고 이내 주서희를 잡아당기며 위아래로 그녀를 샅샅이 훑어보았다.“소준섭 씨가 또 찾아온 거예요? 서희 씨를 괴롭힌 거예요? 어디 다친 데는 없어요?”주서희는 그 물음에 이내 대답하지 않고 화난 척하며 연이를 노려보았다.“이모한테 말하지 않기로 나랑 약속했었잖아.”아이는 꼬질꼬질한 인형을 안고 입을 삐죽거렸다.“어른들은 왜 자꾸 거짓말을 해요?”아이들의 세상은 매우 단순하다. 연이를 탓할 수 없었던 주서희는 서유를 향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찾아왔었어요. 이젠 괜찮아졌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소준섭이 그녀를 침범했던 사실을 연이는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 사실을 숨긴 채 가볍게 한마디 했다.“정말 괜찮은 거예요?”마치 큰 병에라도 걸린 듯 그녀의 안색은 너무 보기 안 좋았다. “걱정하지 말아요. 정말 무슨 일이 있었다면 오늘 이렇게 많은 음식을 대접할 수도 없었을 테니까.”소준섭이 그녀에게 강요했던 일에 대해서는 꼭 복수할 것이다. 그러나 서유가 자신 때문에 이승하한테 부탁이라도 할까 봐 그게 걱정되어 그녀는 서유에게 알리지 않았다. 지금껏 이승하의 밑에서 일하면서 한 번도 그에게 폐를 끼친 적이 없었고 늘 스스로 모든 일을 해결하는 것이 그녀만의 규칙이었다. 그리고 그녀와 소준섭 사이의 일은 이승하가 나선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서유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챙겨 먹긴 했는데...”“나 임신이 안 될 것 같아요.”서유는 약간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많은 약을 챙겨 먹었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으니 이번 생은 아이와 인연이 없는 것 같았다.“그럼 시험관 시술이라도 한번 해볼래요?”그 말에 서유는 고개를 돌려 차 안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승하 씨가 동의하지 않을 거예요.”시험관 시술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이를 낳은 게 얼마나 아픈 건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는 서유의 몸이 걱정되어 아이를 낳지 않기로 했다. 이승하의 뜻을 알아차린 주서희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약 처방을 조금 바꿀 테니까 일단 먹어봐요.”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주서희가 그녀를 차 안으로 밀어 넣으며 단호하게 말했다.“내일 약 보내줄게요.”말을 마친 그녀는 차 문을 닫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는 서유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집에 도착하면 연락해요.”“서희 씨도 얼른 쉬어요.”서유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운전기사는 차에 시동을 걸고 블루리도로 향했다.고급 차들이 줄지어 별장을 떠난 뒤, 주서희는 윤주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주원 씨도 얼른 돌아가.”소준섭의 강요로 잠자리를 하게 된 후부터 그녀는 윤주원을 볼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윤주원이 이곳에 있는 게 불편했다. “뒷정리하고 돌아갈게요.”며칠 동안 기분이 가라앉은 그녀를 보며 윤주원은 그녀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늘 조심스러웠다. “그래.”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서서 힘없이 방 안으로 걸어갔다.뒤에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몇 번이나 말을 꺼내고 싶었던 그는 결국 말을 하지 못하였다. 묵묵히 설거지를 마치고 식탁과 주방 청소를 마무리한 뒤에야 소매를 내리고 그녀의 앞으로 걸어갔다. “정리 다 됐어요. 이만 돌아갈게요.”한편, 리모컨을 들고 채널을 돌리고 있던 그녀는 그의 뜻을 알아듣고는 모른 척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조심히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이미 결정 끝난 일이야...”그녀는 눈물을 닦으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미안해...”소준섭에게 복수한 뒤 윤주원과 행복하게 지내려고 했었다. 근데 평온하고 누구한테 사랑받으면 사는 삶은 그녀한테 사치였다. “서희 씨가 아무리 거절해도 난 끝까지 당신 기다릴 거예요.”그녀를 침범한 소준섭에 대해서도 꼭 그 원수를 갚아줄 것이다.“주원 씨, 바보 같은 짓 하지 마.”윤주원을 밀어내는 것은 오히려 그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소준섭 그 미친놈은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는 인간이니까.“내가 바보인 줄 알면 나한테 이러지 마요.” 그 말을 내팽개치고 별장을 빠져나가는 그의 단호한 뒷모습에서 그녀는 맥없이 계단에 주저앉았다.블루리도로 향하는 차 안.“이모부...”인형을 안고 있던 연이가 서유에게 담요를 덮어주고 있는 이승하를 불렀다.“목소리 낮춰. 이모 깨우지 말고.”그가 짙은 눈썹을 들어 아이를 힐끗 쳐다보았다.분명 낮은 목소리였는데...아이는 뾰로통한 얼굴을 한 채 손에 들고 있던 인형을 그에게 건넸다.“이 인형. 가질 거예요? 말 거예요?”손때가 많이 묻은 꼬질꼬질한 인형을 그는 보기도 싫었다.“싫어.”너무 더러워서 그걸 받으면 반년 동안은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았다. 그 모습에 아이는 그에게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다. “쳇. 엄마가 이 인형을 내가 가장 믿는 사람한테 주라고 했었어요. 이모부한테 안 줄 거예요.”그제야 그는 서유에게서 시선을 떼고 아이의 손에 있는 인형을 쳐다보았다.“이 인형을 김초희가 너한테 준 거야?”아이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엄마가 직접 만들어준 거예요. 어때요? 멋있지 않아요?”인형을 바라보며 한동안 말이 없던 그가 손가락을 뻗어 소수빈의 등을 두드렸다.“장갑 좀 줘봐.” 조수석에 앉아 잠이 들었던 소수빈은 이승하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고 이내 서랍을 열어 장갑 한 켤레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남자는 장갑을 낀 뒤 아이가
서유는 아이의 울음소리에 잠이 깼다. 눈을 떠보니 소수빈은 한창 인형 속에 솜을 쑤셔 넣고 있었고 연이는 인형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울고 있었다.“왜 그래?”그녀는 휴지를 잡아당겨 아이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아저씨... 거짓말쟁이에요...”훌쩍거리던 아이는 이모가 깨어난 걸 보고 인형 머리까지 내팽개치고는 서유의 팔을 껴안고 울먹였다. “엄마가 남겨준 인형을 아저씨가 뜯어버렸어요. 다시 제대로 꿰매지 못하고...”이게 뭔 마른하늘에 날벼락인지...소수빈은 옆에 앉아 있는 이승하를 힐끗 쳐다보았다. 마침 이승하도 그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이 일은 네가 책임지라고 하는 눈치였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어쩔 수 없지. 대표님한테서 별장까지 선물 받았는데 이 정도는 내가 책임져야지. “사모님, 인형 안에 칩이 들어있었습니다.”그는 이승하의 손에 있는 칩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면서 그녀한테 누가 진짜 주범인지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눈짓까지 했다. 칩에 시선이 뺏긴 서유는 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이게 왜 여기 들어있어요?”이승하가 손에 든 칩을 만지작거렸다.“언니가 아이한테 물려준 것일 수도 있고 당신한테 물려준 것일 수도 있어.”칩을 건네받은 그녀는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그를 향해 물었다.“이거 보안 처리해야 열어볼 수 있는 거 아니에요?”고개를 살짝 끄덕이던 이승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울고 있는 연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네 엄마가 인형 속에 물건을 남겨두었어. 그걸 꺼내려면 인형을 뜯을 수밖에 없었어. 이 도리는 너도 잘 알지?”아이는 소매로 눈물 콧물을 닦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알아요. 근데 너무 슬퍼요. 이건 엄마가 나한테 남겨준 건데. 인형이 없으면 엄마도 사라지는 거잖아요.”마음이 아픈 서유는 이내 아이를 끌어안았다.“연이야, 걱정하지 마. 이모가 인형 다시 꿰매어줄 테니까. 인형은 계속 우리 연이랑 같이 있을 거야.”그제야 아이는 그녀의 품에 기대어 조금은 진정된 듯했다.“고마워요. 이모
차가 블루리도에 멈춘 뒤, 서유는 연이를 안고 1층 거실에 향했고 아이가 곤히 자고 있어 깨우지 않고 그냥 두기로 했다. 아이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로 들어가니 칩을 처리하느라고 집중하고 있는 그의 빛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문에 기대어 스탠드 조명 아래 남자를 잠시 바라보다가 가사 도우미한테 우유를 데워 오라고 부탁했다. “어떻게 됐어요? 얼마나 더 걸릴 것 같아요?”전기 회로를 통합한 남자가 짙은 눈썹을 드리우며 입을 열었다.“아마 하룻밤 정도는 걸릴 것 같아.”하룻밤?뭐든 다 잘하는 사람 아니었나?칩을 처리하는 데 하룻밤이나 걸린다고?“내 옆에 있어 줘.”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그가 맑은 눈망울로 그녀를 쳐다보며 소파에 앉으라고 눈짓했다. 남편이 칩을 처리하고 있는데 옆에서 같이 있어 주지 않으면 말이 안 되는 것 같아 그녀는 책상을 지나쳐 그의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가 키보드를 빠르게 두드리자 컴퓨터 화면에는 그녀가 알아볼 수 없는 코드들이 빠르게 나타났다.간단할 줄 알았는데 비밀번호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의 잘생긴 얼굴이 점점 찡그러졌다.“당신 언니 말이야. 건축 디자인을 전공했다고 하지 않았어?”“네? 무슨 뜻이에요?”못 하는 게 없는 남편이 이번에는 적수를 제대로 만난 듯했다. “해커를 부르는 게 어때요?”“다시 해볼게.”새벽 5시, 서유는 하품을 하면서 이승하를 타일렀다.“여보, 제발. 그냥 해커 불러서 해요.”그제야 그가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핸드폰을 꺼내 이연석에게 전화를 걸었다.한편, 겨우 잠이 든 이연석은 둘째 형의 전화를 보고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형...”“지금 당장 불루리도로 와.”말도 채 끝나기 전에 전화기 너머로 펑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바로 전화가 끊어졌다.형이 넷이나 되니까 둘째 형은 안 보고 지내도 상관없겠지?마음을 가라앉힌 그가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차를 몰고 블루리도로 향했다. 도착한 뒤, 서유는 상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