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쳐진 윤주원은 주서희의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한참 뒤, 그는 다시 손을 내밀어 주서희를 안으려 했지만 주서희는 피했다.윤주원의 손은 공중에 멈춰 섰고 그의 맑고 깨끗한 눈에는 설명할 수 없는 어두운 빛이 서서히 드리웠다.“그럼 당신은요?”“나?”주서희는 고개를 숙여 밴드로 감싸인 자신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그녀의 인생은 이 손가락들과 같았다. 속은 썩어 문드러졌지만, 겉은 아무런 흠집도 없는 모습.이런 그녀에게 과연 미래가 있을까? 행복을 계속 가질 수 있을까? 주서희는 눈썹을 펴고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윤주원, 어떤 사람은 행복을 가질 자격이 없어. 나 같은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그녀가 유일하게 확실한 건 지금의 자신이 윤주원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미안하지만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당신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내가 알려줄게요.”윤주원은 그녀의 손을 단단히 붙잡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억눌린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주서희 씨, 오늘부터 소준섭은 당신의 원수이자 내 원수에요. 나도 함께 싸울 거예요.”“변호사를 이미 고용했어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내 아내에게 상처 준 그 놈을 고소할 거예요.”“법이 그를 처벌할 수 없다면 내 방식대로 할 거예요. 함께 망하더라도 당신을 구해줄게요.”그렇다. 윤주원은 그 긴 통화에서 뼛속까지 아픈 고통을 겪었지만 전화를 끊는 순간 결심했다.어떻게든 주서희를 도와주겠다고. 그녀 혼자서 그 미친놈과 맞서게 하지 않겠다고.주서희가 가장 힘들 때 떠난다면, 윤주원 자신도 주서희를 사랑할 자격이 없었다.그의 결연한 눈빛, 결심에 찬 말, 그리고 행동은 주서희를 놀라게 했다.이렇게 분명히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윤주원은 여전히 그녀를 선택하고 끝까지 함께 싸우기로 했다.윤주원은 진정으로 그녀를 사랑했고, 진정으로 바보 같았다...다른 남자라면 약혼녀가 다른 남자와 잤다는
윤주원은 정리를 마치고 돌아서서 주서희를 바라보았다.그는 입을 열어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말이 너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방 안에 몇 분간 서 있다가 그는 침실을 나섰다.정가혜와 심형진은 여전히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윤주원이 나오는 것을 보자마자 급히 다가왔다.“서희 씨는 어때요?”윤주원은 다시 침실 쪽을 돌아보았다.“안정된 상태예요, 다만 마음의 벽을 세웠어요.”그는 말을 마치고 시선을 정가혜에게 돌렸다.“가혜 씨, 잠시 여기에 남아서 서희 씨를 돌봐줄 수 있어요?”“물론이죠.”윤주원이 말하지 않아도 정가혜는 이미 주서희를 돌볼 생각이었다.“가능하다면 연이도 데려와 줘요...”주서희는 아이를 좋아하니 아이가 옆에 있으면 그녀에게 위로가 될 것이다.“알겠어요.”정가혜가 고개를 끄덕이자 윤주원은 그제서야 발걸음을 옮겼다.반달이 지난 후, 윤주원은 소준섭을 법정에 고소했다.그리고 주서희는 정가혜와 연이의 보살핌 속에서 점차 예전의 생기를 되찾았다.서유와 이승하가 국내로 돌아오는 날, 심형진과 윤주원은 주서희의 별장으로 향했다.정가혜는 윤주원이 들고 온 식재료를 받아들며 물었다.“소송은 어떻게 되고 있어요?”“막 법원에 제출했으니 아직 소환장을 기다려야 해요.”소송은 그렇게 빨리 끝나지 않았지만 윤주원은 여유가 있었다.정가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파에서 연이를 안고 노는 주서희를 보았다.“최근 서희 씨는 많이 나아졌어요. 주원 씨가 자주 와서 격려해 준 덕분이에요.”윤주원은 식재료를 냉장고에 정리하며 정가혜에게 미소 지었다.“소준섭을 무너뜨리면 서희 씨에게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줄 거예요.”정가혜는 주먹을 꽉 쥐고 윤주원에게 ‘화이팅’ 해라는 포즈를 보였다.“그럼 힘내요. 우리도 기다리고 있을게요.”“나중에 큰 봉투 챙겨와야 해요.”“그건 당연하죠.”정가혜는 웃으며 대답하고 윤주원에게 손짓했다.“가서 서희 씨랑 함께 있어요. 여긴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윤주원은 알겠다고 답하며 주방을 떠났다.“가혜야.
공항에서 전용기가 멈추자, 이승하는 품에 안긴 채 가볍게 잠든 아내를 내려다보았다.“여보, 집에 도착했어.”서유는 눈을 뜨고 기창 밖을 희미하게 바라보았다. 석양의 황혼이 아직도 황금빛으로 반짝여 눈부셨다.이승하는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눈을 가려 빛을 막아주고는 앞자리에 앉아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내리지 않을 거야? 우리 집에 같이 가려고?”앞자리의 남자는 게임기를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이승하를 돌아보았다.“형, 내가 차로 모셔다드릴게요.”“필요 없어.”이승하의 차가운 시선에 이연석의 옆에 앉아 있던 소수빈도 몸서리를 쳤다.소문에 따르면, 이 대표와 아내의 허니문은 그렇게 즐겁지 않았다고 한다. 둘의 여행이 점차 일행이 늘어나는 상황으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첫 반달 동안, 김선우라는 아이가 따라다녔고 나중에 그의 아버지까지 끌어들여 사모님께서 매일 스카프로 몸을 감싸야 했다.후반부에는, 이연석이 기분이 안 좋다며 여행을 같이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이 대표는 매일 화가 나 있었다.더 심각한 것은, 이연석이 이승하보다 여성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서유가 유럽 거리를 누비며 쇼핑할 때, 여성 제품에 대해 전혀 모르는 이승하는 말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반면 이연석은 각종 브랜드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그의 미적 감각도 뛰어나 입에 달콤한 말까지 자주 담았다.“형수님, 이거 정말 잘 어울려요”“형수님, 이 브랜드는 형수님을 위해 나온 거예요”“형수님, 믿어봐요. 이게 형수님 피부톤에 딱 맞아요” 이 같은 말로 이승하를 완전히 제쳐두었다.소수빈의 기억 속에서 그때의 이 대표는 자신처럼 문 앞에서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차가운 눈으로 이연석이 서유를 위해 선물을 고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장면을 떠올리면 아직도 두려움이 밀려온다. 이연석은 이렇게 사모님과 가까워져서 여행팀에 쉽게 합류했고, 이 대표의 분노를 무사히 피했다.이연석은 이승하에게 거절당하자 서유를 향해 다가갔다.“형수님...”이연석은 가끔 귀찮
이연석은 차를 몰고 이승하와 서유를 주서희의 별장까지 데려다주었다. 정가혜와 다른 사람들은 마중을 나왔고, 운전석에 있는 사람은 신경도 쓰지 않고 뒷좌석에서 내리는 서유에게로 달려갔다.“서유, 한 달 넘게 못 봤더니 너무 보고 싶었어!”서유는 웃으며 두 팔을 벌려 정가혜를 안았고, 이어서 주서희도 안아주었다.“나도 보고 싶었어.”“그럼 나는? 나는?”어디선가 나타난 연이가 서유의 다리를 안고는 동그란 얼굴을 들어 올리며 안아달라고 했다.“이모, 빨리 안아줘요. 나 살쪘는지 봐줘요!”한 달 남짓 못 본 사이 연이는 정가혜와 주서희 덕분에 통통하게 살이 쪄 있었다. 서유가 안기에도 조금 힘들 정도였다.“연이야, 이제 이름을 ‘작은 반달’로 바꾸는 게 낫겠다...”“왜 ‘작은 반달’이에요?”정가혜와 주서희가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네 이모가 네가 살쪘다고 하는 거야.”연이는 그제야 ‘작은 반달’이 ‘작은 뚱뚱이’를 의미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살이 오른팔을 껴안고 서유에게 불만스러운 소리를 냈다.“흥, 이모 미워, 이모부 안아줘요...”이승하가 막 차에서 내리자마자 연이의 통통한 손가락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이승하는 그 손을 쳐다보며 짙은 눈썹을 살짝 찡그리고 싫어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먼저 손부터 씻어.”“...”연이는 상처받은 듯 입을 벌리고 울음을 터뜨리려 했지만 이승하의 한마디에 막혀버렸다.“네가 울면 더 지저분해 보여.”“...”연이는 입을 크게 벌린 채로 멈췄다가 잠시 후 소리를 질렀다.“아아아아아, 연이 너무 화나...”연이는 작은 주먹을 꼭 쥐고 이번 생에는 절대로 이모부와 말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정말이지 너무 화가 나서 눈물이 날 정도였다.서유는 화가 잔뜩 난 연이를 보고 웃으며 하얗고 부드러운 손을 들어 그 통통한 얼굴을 쓰다듬었다.“연이야, 네 이모부가 너에게 많은 선물을 사 왔어. 가서 볼래?”“어디요?”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모부와 말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연이는 선물을 보자마자
친구의 남자 친구를 이렇게 태도를 보니, 정가혜도 눈치를 채고 서둘러 소수빈에게서 물티슈를 받아 이승하에게 건넸다.“손 좀 닦으세요.”“이 대표님, 결벽증 있으신가요?”물티슈를 받으려던 이승하는 냉랭한 눈빛을 들며 의미심장하게 심형진을 훑어보았다.하지만 한 번 쓱 보고는 시선을 거두고 정가혜가 건넨 물티슈를 받아 들고 느긋하게 손을 닦았다.“약간 있습니다. 심 선생님께서 이해해 주세요.”이승하가 손을 다 닦고 나서 덤덤하게 말했다. 그의 표정은 읽기 어려웠다.“괜찮습니다, 이해해요.”심형진도 형식적으로 답하고 나서 두 사람에게 손짓했다.“이 대표님, 지 부인님, 안으로 들어가시죠.”아마도 처음 만나는 자리라 심형진은 지나치게 공손했고, 그로 인해 분위기는 다소 어색해졌다.서유가 모두 친구라며 긴장할 필요 없다고 웃으며 말하자 그제야 분위기가 풀렸다.몇 사람이 웃고 떠들며 별장 안으로 들어가는 사이, 이연석이 차창을 내리고 잘생긴 얼굴을 드러냈다.뒤돌아보던 정가혜는 이를 보고 약간 놀란 눈치로 이연석을 흘깃 쳐다보았다.차 안에 느긋하게 기대어 있던 남자는 가늘고 긴 손가락을 뻗어 아무렇지 않게 손을 흔들었다.“하이, 정가혜 씨...”잘생기고 반듯한 얼굴에는 태평한 미소가 걸려 있었고, 얼마 전의 갈등이 전혀 없었던 것처럼 보였다.정가혜는 그가 먼저 인사하자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안으로 걸어갔다.정가혜의 매끈한 뒷모습이 멀어져 갈 때 이연석의 느긋한 표정은 점차 어두워졌다...그녀를 몇 초 동안 바라본 후 이연석은 시선을 거두고 운전대를 돌렸다.차를 후진시키려던 그는 심형진이 정가혜의 허리를 감싸는 모습을 보자 가슴 한구석이 갑자기 답답해지며 불편한 기분이 들었고, 그 느낌에 짜증이 확 몰려왔다!그는 급히 브레이크를 밟고 망설임 없이 차 문을 열고 별장 안으로 걸어갔다.식탁 앞에 막 앉은 사람들은 초대받지 않은 이연석을 보고 모두 멍해졌다.오직 연이만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심 선생님, 정말 저랑 술을 마시겠다는 건가요?”의자에 기대앉아 있던 이연석은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심형진을 경멸스럽게 훑어보았다.심형진은 술을 다 따르고 나서 병을 내려놓고, 순수하고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입꼬리를 올렸다.“이 도련님, 설마 술을 못 마시겠다는 건가요?”“내가 못 마신다고?”이연석은 냉소를 터뜨렸다. 그는 오랜 시간 유흥업소에서 활동하며 천 잔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는 명성을 얻었다. 심형진이 그와 술을 마시겠다는 건 목숨을 버리겠다는 건가? 아니면 자존심?“용기가 있다면 이걸 마셔보세요.”심형진의 이 말은 분명히 도전장을 내미는 것이었다.이연석의 표정은 순식간에 차분함에서 분노로 변했다.“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나에게 술을 마시라고 하는 겁니까?”이연석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심형진의 입가에 미소가 점점 더 커졌다.“이 도련님, 그저 한 잔의 술일 뿐이에요. 그렇게 흥분할 필요 없잖아요.”말을 마친 심형진은 한 마디를 덧붙였다.“굳이 이유를 찾자면 지난번 일을 마무리하는 셈 치죠.”지난번 일을 마무리한다고? 이 말은 이연석이 여자 문제로 심형진에게 굴복했다는 것을 비꼬는 것이었다.이연석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고 일어나서 심형진에게 주먹을 날리려 했다. 그때 옆에 있던 이승하가 입을 열었다.“심 선생님께서 마시라고 하면 마시면 되지, 왜 일어나?”이승하의 말이 아니었다면 이연석은 당연히 심형진과 싸움을 벌여 난장판이 됐을 것이다.이 점을 깨달은 이연석은 분노를 억누르고 다시 앉았고 눈빛에 인내심이 엿보였다.“심 선생님, 아무도 당신에게 술을 권하기 전에 먼저 자기가 한 잔을 마셔야 한다는 걸 배워주지 않았나요?”“그래요?”심형진은 반문하며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태연하게 술병을 집어 자신의 잔에 술을 따랐다.“그럼 제가 먼저 한잔하죠.”심형진이 고개를 들어 술을 마시려 하자 이연석이 갑자기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잔을 채워요.”모든 사람 앞에서 그가 술을 마시게 하려면 먼
이연석이 들어온 다음부터 정가혜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전 남자 친구가 맞은편에 앉아 있고 현 남자 친구가 옆에 앉아 있는 상황보다 더 난감한 일은 없었다. 원래는 어색함을 참고 이 식사만 끝내고 가려고 했지만 심형진이 이런 상황에서 부모님을 만나자는 말을 꺼내면서 더 난처해졌다.정가혜는 접시 속 음식을 몇 초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리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최대한 평정을 유지하며 심형진에게 물었다.“선배 부모님께서 이렇게 빨리 아셨어요?”“응, 부모님한테 너를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해서 말했어.”심형진은 말하고 나서 정가혜의 얼굴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그녀가 가고 싶지 않아 한다고 생각해 얼른 덧붙였다.“가혜야, 네가 원하지 않으면 안 가도 돼. 내가 거절할게.”심형진의 부모님이 만나고 싶다고 했으니, 정가혜가 심형진에게 거절하라고 하면 그녀가 예의 없고 눈치 없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었다. 결국 그들은 결혼을 전제로 만난 사이였기 때문에 부모님을 만나지 않는다면 정가혜는 비난받을 가능성이 있었다.정가혜는 잠시 생각해 보았다. 비록 한 달밖에 사귀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기 때문에 서로를 잘 알고 있었다. 이 정도 시간이 지나 부모님을 만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라 생각하고 그녀는 동의했다.“괜찮아요. 만날게요.”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예의 바르게 흘러가는 대화였지만 이연석은 손에 쥐고 있던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고 정가혜를 쏘아보며 말했다.“정가혜 씨와 심 선생님은 꽤 빠르네요. 이렇게 빨리 부모님을 만나고 결혼까지 하려고 하는 건가요?”이런 빈정거리는 말에 정가혜는 대꾸하지 않았다. 하지만 옆에 있던 심형진은 고개를 들어 이연석을 바라보며 웃었다.“결혼을 전제로 부모님을 만나러 가는 거죠. 이 도련님은 여자 친구를 부모님께 소개해 본 적 없나요?”“전...”이연석이 반박하려 했지만 심형진이 말로 끊어버렸다.“거의 잊을 뻔했네요. 이 도련님은 연애를 그저 재미로 하는 거니까 부모님께 소개할 필요가 없겠네요.”
심형진은 이승하가 이연석을 돕고 있는지 의심스러웠지만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었다. 깊이 생각할 시간도 없이 그는 서둘러 와인 병을 들고 이승하에게 다가가 이승하의 잔에 조금의 와인을 따르고 자신의 잔에도 한 잔 따랐다.“이 대표님, 제가 한 잔 올리겠습니다. 편하게 드세요.”아까 그의 동생에게 술을 따를 때는 가득 채웠으니 이례적으로 계속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심형진은 이승하의 잔도 가득 채웠다. 심형진은 단숨에 잔을 비웠지만 이승하는 살짝 입을 적실 정도로만 마셨다. 이는 심형진에게 체면을 주는 듯하면서도 조금은 난처하게 만들었다.심형진은 높은 EQ를 가진 사람답게 아무 말 없이 잔을 한 번 쳐다보고는 시선을 돌리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그럼 이 대표님, 천천히 즐기세요.”심형진이 술을 마시고 자리를 뜨려 하자 이승하가 그를 불렀다.“소 비서도 심 선생님과 몇 잔 마시고 싶어 하네요. 심 선생님 괜찮으시죠?”폭풍처럼 음식을 먹고 있던 소수빈은 이 대표님의 부름에 얼른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고 술잔을 들고 심형진에게 다가갔다.“자자, 심 선생님. 오늘은 좋은 날이니 우리 옆에서 실컷 마셔봅시다.”덩치가 큰 소수빈이 심형진의 어깨를 감싸안자 심형진은 저항할 힘도 없이 끌려가 구석에서 술을 마시게 되었다.서유는 술 게임을 하며 술을 마시고 있는 심형진을 보고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무릎 위에 놓인 손이 이승하에게 잡혀 멈칫했다.“걱정 마. 소 비서는 정도가 있으니까.”“알아요.”서유의 시선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정가혜에게로 옮겨갔다.“난 가혜가 난처해할까 봐 걱정이에요. 아무래도 지금 가혜의 남자 친구는 심형진이니까요.”이승하는 사정은 사정대로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멋진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정가혜 씨가 내가 과했다고 생각하면 말리겠지.”이승하는 단지 정가혜의 마음속에 심형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도 정가혜가 심형진을 걱정한다면, 이연석은 완전히 희망이 없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