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지유는 돌려서 말했다.서유에게 사직서를 아직 승인하지 않았으니 아직 이온의 직원으로서 대표님이 시키는 업무를 처리하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었다.또 하나 서유에게 알려주는 것은 이 자리에서 대표님을 명령을 거절하는 것은 대표님의 체면을 잃게 만드는 일이기에 불가능하더라도 해내라는 것이다.서유는 연지유의 뜻을 알아듣고 마음속으로 긴 한숨을 쉬었다.방금 그녀는 조금 충동적으로 생각도 하지 않고 입 밖으로 말을 뱉었다.지금 이런 상황에서 그녀도 다시 거절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배은망덕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서유는 어쩔 수 없이 마지막 업무라고 생각하며 화진의 일을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그녀가 돌아서서 나가자 연중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불만스러운 시선을 거두고서는 이승하에게 물었다.“승하야, 오늘 저녁 식사 자리에 너도 함께 가는 건 어떠니?”이승하와 대화할 때 연중서의 목소리는 아주 부드러웠고 눈빛마저 다정했다.이승하는 소파에 기대어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서는 다른 한 손으로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 내내 고개를 들지 않고 핸드폰 화면만 바라보고 있었다.연중서는 아무 말도 없는 이승하의 모습에 가고 싶지 않아 한다고 생각해 다급하게 말했다.“내 정신 좀 봐. 화진과 우리 이온은 이제 서부 프로젝트 때문에 갈등이 있을 거야. 당연히 화진 대표가 조율하자고 찾아온 걸 텐데 입찰 주최자인 네가 그 자리에 오는 건 불편하지.”화진의 사람은 그의 딸과 이승하의 관계 때문에 이승하가 이온의 편의를 봐줄까 봐 은밀히 이온에 문제를 만들어 스스로 입찰을 포기하게 만들려고 했었다.연중서가 이렇게 좋은 땅을 포기할 리가 없었다. 이승하 앞에서 특별히 오늘 식사 자리를 잡으며 이승하에게 함께 갈 것인지 물은 것도 사실 그가 연지유를 도와 양측의 관계를 조절해 주길 바랐기 때문이다. 이승하가 주최자였기에 화진 사람들이 얌전히 순종할 것 같았다. 오직 그의 딸 연지유에게 이 일의 조율을 맡기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물론 이승하가 내켜 하지
서유가 핸드폰으로 레스토랑 예약을 막 마쳤을 때 연중서에게서 또 전화가 왔다.“서 비서, 레스토랑 주소를 이 대표에게 보내줘.”그는 지시를 내린 뒤 서유에게 말할 기회도 주지 않은 채 전화를 끊었다.그녀는 싸늘한 얼굴로 전화를 내려놓았다. 그런 다음 카톡을 열어 주소를 이승하 스케줄 담당 비서에게 보내주었다.그 결과 상대 비서에게서 답장이 왔다.「서유 씨, 제가 지금 이 대표님과 연락이 되지 않아 직접 카톡을 보내시죠.」서유는 어쩔 수 없이 이를 악물며 차단했던 이승하의 전화번호를 풀고 신속하게 주소를 보낸 뒤 다시 차단했다.그런 다음 그녀는 업무용 차량의 차키를 들고 회사 주차장으로 향했다.그녀가 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 옆에 대표 전용 엘리베이터도 열렸다.검은색 코트를 입은 이승하가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서유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고 그녀는 못 본 척 재빠르게 돌아섰다.그녀는 이승하가 그녀를 무시하고 바로 떠날 줄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를 향해 다가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서유는 긴장해서 손을 꽉 움켜쥐었다. 발을 떼고 싶었지만 마음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그녀의 뒤에 천천히 멈춰 서는 발걸음 소리가 선명하게 느껴졌다.그는 그녀의 뒷모습을 깊은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서유는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이승하가 어떤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을지 전부 상상할 수 있었다.냉담함, 무관심, 경멸, 혐오감, 이런 감정들이 섞여 있을 것이다.그녀가 손을 꽉 쥐며 숨을 참는 순간 앞에서 부가티가 울렸다.이승하는 그녀를 지나쳐 운전석의 문을 열고 앉았다. 그는 눈을 내리깔고 차에 시동을 건 뒤, 한 손으로 핸들을 돌려 후진했다.그는 그녀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그저 차를 몰고 주차장을 빠져나갔다.서유는 긴장했던 몸이 그가 떠나는 순간 완전히 힘이 풀렸다.그녀는 또 한 번 혼자서 사랑에 빠지는 자신이 너무 우스웠다. 겨우 감정을 진정하고서는 7인승 업무용 차 쪽으로 걸어갔다.요 며칠 비가 많이 내렸다. 이런 날씨가 되면
그는 로얄 블루 컬러의 셔츠에 같은 컬러의 코트를 입고 있어 멀리서도 큰 키에 아우라가 넘치는 모습이었다.가까이 다가가니 금테 안경 아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유치함은 이미 사라지고 깨끗하면서도 성숙한 느낌만이 남아 있었다.오랜 세월이 흐른 뒤 그를 이렇게 다시 만났지만 그녀의 마음속은 아주 평온했고 아무런 감정변화도 없었다.그녀는 손을 들어 올리며 그들을 향해 손을 저었다.“여기입니다.”남자는 인파 속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그녀를 발견하더니 숨이 멎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그가 사람들을 이끌고 서울로 출장을 온 이유는 서부 부지 입찰을 위해서였다.태안 그룹 사람들에게 자기가 왔다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았는데 이렇게 사람까지 보내 마중을 오다니, 거기에 식사까지 준비할 줄은 몰랐다.그는 어쩔 수 없이 동의했다. 하지만 자기를 마중 나온 사람이 서유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그는 몇 초 동안 멈칫하더니 다시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사람들을 이끌고 서유에게로 다가갔다.187센치가 넘는 남자가 그녀의 앞에 서니 그녀보다 머리 하나는 더 높은 것 같았다.그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서유 씨, 오랜만입니다.”서유 씨라는 한마디에 어렸을 적 두 사람의 감정은 완전히 깨끗하게 정리가 되었다.서유는 차갑게 웃으며 사무적인 태도로 말했다.“김 대표님, 절 따라오시면 됩니다.”그 한마디를 던지고서는 뒤로 돌았다. 그녀는 싸늘한 표정으로 구두를 또각거리며 지하 주차장 방향으로 걸어갔다.뒤따라가던 남자는 그녀의 불쾌한 표정을 보고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긴 다리를 움직여 재빨리 서유에게 다가갔다.“서유 씨, 아직도 나한테 화났어요?”서유는 그 말을 듣고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쪽에게 화를 내겠어요?”김시후는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사과했다.“미안해요, 서유 씨. 난 기억을 잃었어요. 정말 서유 씨가 기억나지 않아요. 그래서 5년 전에 그렇게 서유 씨를 대한 거예
“왜?”그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깔끔하고 단정한 얼굴이 순식간에 사악함과 증오로 뒤바뀌었다.“지금 왜냐고 물었어? 내가 병원에 혼수상태로 누워있는 동안 넌 다른 남자하고 바람을 피우고 있었어.”“그렇게 더러워졌으면서 감히 나하고 계속 만나겠다는 생각을 해?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네.”‘이것 봐. 기억을 잃지 않았어.’안타깝게도 그녀는 그가 기억을 잃은 척한 것이 자기를 버리기 위해서였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그런데도 바보 같은 그녀는 눈앞에 쓰레기보다 못한 남자를 예전에 자기와 평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했던 소년이라고 생각했다.그녀는 김씨 저택 앞에서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은 채 무릎 꿇고서 소년을 붙잡으려고 했던 것을 후회했다.하지만 이미 김시후라고 이름과 성을 바꾼 남자는 그녀에게 후회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서유는 그가 당시 열 걸음 정도 물러나더니 갑자기 온 힘을 다해 앞으로 돌진하던 모습을 기억했다.그는 달려오며 추진력까지 이용해 두꺼운 가죽 부츠로 다시 한번 그녀의 심장을 걷어찼다.그도 그녀에게 선천적인 심장병이 있어 외부의 충격을 받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일부러 위치를 정확하게 계산해서 단숨에 치명타를 날렸다.그녀는 입에서 피를 토해내며 자기가 알고 있던 소년이 그녀가 죽기를 바란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녀는 피를 토하며 바닥에 쓰러져 온몸을 추위에 덜덜 떨었다. 그런 그녀를 소년은 내려다보며 차갑게 비웃었다.“서유야, 난 이제 널 사랑하지 않아. 너하고 계속 만나고 싶지도 않으니까 다시는 찾아오지 마. 그리고 너 똑똑히 알아둬. 난 지금 화진 그룹의 후계자야. 더 이상 고아원의 송사월이 아니라고. 너하고 정가혜 내 옛날 신분 폭로하기만 해. 그리고 그걸로 김씨 가문을 협박하면 내가 너희들 삶을 지옥보다 더 힘들게 만들어줄 거니까.”서유는 이승하의 차가운 면을 보았지만 송사월에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그러니 이승하가 그녀를 대용품으로 생각한다고 해도 그녀는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이승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
김시후가 데려온 사람이 많았기에 업무용 차량에 모두 앉을 수가 없었다. 서유는 어쩔 수 없이 차량 두 대를 더 불렀다.고위직 인사들은 다른 차량에 앉고 김시후와 그의 경호원들은 그녀의 차에 앉았다.서유는 가는 동안 김시후와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고 운전에 집중했다. 그를 5성급 레스토랑에 데려다줬다.화려한 룸 안, 연지유와 이온의 몇몇 부사장들이 도착해 있었지만 이승하는 아직 오지 않았다.연지유는 룸 안에 김시후쪽 사람들이 앉을 자리를 마련한 뒤 걸어 나와 서유에게 물었다.“주소 이 대표님에게 보내줬죠?”서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이승하가 문자를 확인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그에게 주소를 보내주었다. 그가 오든 오지 않든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연 대표님, 저 먼저 가 보겠습니다.”사람을 모두 데려왔으니 그녀가 계속 있을 필요는 없었다.몸을 돌려 떠나려는데 연지유가 그녀를 잡았다.“서유 씨 잠깐만요. 가서 김 대표님에게 호텔 좀 예약해 줘요. 끝나길 기다렸다가 서유 씨가 호텔까지 데려다줬으면 좋겠는데.”“전...”서유가 거절하려는데 연지유는 그녀에게 부탁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그만두고 싶어 한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아직 그만두지는 않았잖아요. 이 일도 서유 씨의 업무예요. 맞죠? 오늘 김 대표님 잘 케어해주면 내가 돌아가서 사직서 처리해 줄게요.”연지유의 말은 약간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돌아가면 바로 그만둘 수 있다는 생각에 서유도 거절하지 않았다.그녀는 김시후의 비서에게 신원 정보를 달라고 해 룸 밖에 앉아 핸드폰을 꺼내 호텔을 예약했다.이번 식사는 이온과 화진의 관계를 중재하기 위해 특별히 만든 자리였다.참석하러 온 사람들은 당연히 대표님들과 고위직 임원들이었다.그녀는 호텔은 예약한 뒤 핸드폰을 넣고 화장실에 가려고 했다.몸을 일으키려는데 머리가 어지러워 바닥에 쓰러질 뻔했다.그때 마친 단단한 손이 그녀의 허리를 붙잡아 온몸을 지탱해 주었다.“서유 씨, 괜찮아요?”서유는 그의 힘에 의지해
얇은 흰 셔츠 사이로 그의 익숙한 향기가 느껴지자 갑자기 온몸이 그 자리에서 얼어붙는 것 같았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그의 쇄골에 청룡의 문신이 없는 것을 확인했다.정말 그가 금빛 가면 남자는 아닌 것 같아 그녀는 조금 실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이승하는 한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한쪽으로 밀어버렸다.“역시 누군가의 품에 안기는 걸 제일 잘하나 봐?”방금 김시후의 품에 기대어 있는 자신을 그가 본 것 같았다.“난...”서유가 해명하려는데 그는 마치 더러운 것에 닿기라도 한 것처럼 물티슈를 꺼내 미친 듯이 손가락을 닦았다.다 닦은 뒤 물티슈를 서유의 얼굴에 던졌다.싸늘한 눈빛이 하찮은 것을 바라보듯 그녀를 훑고서는 룸으로 들어갔다.이번에는 그녀가 문을 열 필요도 없었지만 그저 이 굴욕의 순간에 멈춰 있는 것 같았다.서유는 굳은 얼굴로 물티슈를 떼어내 쓰레기통에 버렸다.그녀는 가슴에서 불타오르는 분노를 진정시키며 핸드폰을 꽉 쥐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인내심을 가져야 했다. 어떤 사람도 어떤 일도 그녀를 쉽게 무너뜨릴 수 없다며 마음속으로 되뇌었다.그들은 연씨 가문이 주최한 식사 자리에 이승하가 참석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충격을 받은 뒤 그들은 연씨 가문의 깊은 뜻을 이해했다.김씨 가문이 요즘 연씨 가문을 표적으로 삼고 문제를 만들었었다. 이승하가 연지유를 위해 이 자리에 온 것이다.이승하가 나섰으니 김씨 가문의 사람들도 연지유를 더는 난감하게 만들진 않을 테다.그들은 오히려 웃는 얼굴로 이승하에게 상석을 내어주며 아부를 떨었다. 이승하는 무심하게 그들이 따라주는 술을 받았다.김시후가 룸에 다시 돌아오고 나서야 이승하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방금 화장실에서 김시후는 다른 임원이 보낸 이승하가 왔다는 문자를 확인했다.연지유와 이승하에 대해 잘 몰랐지만, 이씨 가문과 연씨 가문이 이후 결혼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결혼 상대이기 때문에 이승하가 연지유를 도와주는 것이라면 이해되었다. 그렇지 않으
김씨 가문은 언제나 프로페셔널했기에 김시후는 화진 그룹의 실력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당연히 실력에 달렸죠.”소 이사는 김 대표가 입을 열자 이어서 한마디 했다.“연 이사님, 저희 화진에서 동아 그룹에 프로젝트를 중단한 건 제 부하가 사적으로 벌인 일입니다. 연 이사님께서 신경 쓰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제가 이미 그들을 처벌했으니까요.”당연히 연지유는 비즈니스 전쟁에서 하는 말을 믿지 않았지만 이 자리에서 화진이 체면을 잃지 않게 소 이사의 말에 따랐다.“그렇다면 저희도 더 걱정이 없습니다. 이제부터 서로 파트너쉽을 이어가 보죠.”말을 마친 그녀는 술잔을 들어 김시후와 소 이사에게 건배한 뒤 술을 원샷했다. 그러고 나서 웃는 얼굴로 그들에게 말했다.“그럼, 오늘은 다들 일찍 돌아가서 쉬시죠. 입찰 현장에서 뵙겠습니다.”연지유는 이승하가 짜증을 낼까 봐 서둘러 식사 자리를 끝냈다.김씨 가문과 이씨 가문의 실력은 국내에서는 비슷했지만 아시아 시장에서는 이씨 가문이 독보적인 기업이었다.김씨 가문도 식사 자리를 끝내자는 연지유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고 오히려 이승하를 바라보았다.얼음처럼 차가운 남자가 가지 않으면 그들 중 누구도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이승하는 담담하게 한마디 했다.“일어나 보죠.”그런 다음 바로 연지유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여자를 가까이하지 않는다던 이승하가 먼저 연지유의 손을 잡고 나가자 다들 경악했다.두 사람의 사이는 모두의 예상보다 훨씬 더 가까웠다.이걸 김씨 가문에서는 가장 걱정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온갖 수단을 이용해서 연씨 가문을 괴롭혔을 것이다.룸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서유는 다급하게 일어났다.이승하가 연지유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왔다. 두 사람이 손깍지를 낀 모습을 보고 서유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그녀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시선을 돌리려고 했지만 시선은 계속 연지유의 손을 잡은 이승하의 손으로 향했다.힘 있게 잡은 손의 핏줄이 터질 것 같
이미 멀리 갔던 김시후는 뒤에서 들려오는 큰 소리에 돌라서 얼굴이 창백해졌다.그는 다급하게 달려가서 핸들에 머리를 박고 있는 서유를 발견했다. 그녀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심장을 부여잡고 있었다.그는 굳은 얼굴로 손잡이를 잡아당겼지만 안에서 문이 잠겨 열 수가 없었다.그는 창문을 세게 두드렸다.“서유 씨 문 열어 봐요.”서유는 핸들을 잡고 가슴을 움켜쥐고서는 숨을 크게 쉬었다.머리가 너무 어지러워 김시후의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았고 귀에서는 윙윙 울려대는 이명만이 가득했다.김시후는 그녀가 의식을 잃었다고 생각해 더 말하지 않고 바로 뒷좌석 창문을 부쉈다.문을 연 뒤, 차 안에 들어가서 운전석의 문을 연 다음 신속하게 차에서 내려 서유를 빼냈다.서유는 누군가 자기를 구해주고 있다는 것을 느꼈고 마치 죽기 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손을 들어 그의 손목을 잡으며 겨우 한마디를 뱉어냈다.“산소 좀...”심부전으로 인한 혈액 공급 부족으로 쉽게 저산소증을 유발했다. 그녀는 현재 심한 저산소증 상태였기에 반드시 산소를 흡입해야 했다.김시후는 그 한마디에 하얗게 된 머릿속에 한 장면이 너무 빨리 지나가 버렸고 갑자기 머리가 아팠다.그는 머리를 흔들며 서유를 안아 올렸다. 그러고서는 소 이사에게 말했다.“호텔 직원한테 산소통 좀 가져오라고 하세요.”지금 병원에 가기에는 너무 늦었다.다행히 이 호텔은 김씨 가문이 운영하는 호텔이었고 고객들을 위해 언제나 응급구조키트를 준비해 두고 있었다.호텔 지배인은 본사의 이사님이 온 걸 보고서는 다급하게 부하 직원에게 산소통을 가져가라고 했다.김시후는 서유를 품에 안고 그녀가 예약해 준 프레지던트 룸으로 향했다. 핏기 하나도 없이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서는 그녀가 갑자기 이렇게 죽을까 봐 걱정되었다. 그는 다급하게 서울에서 학회에 참가하고 있는 자기의 친구 소진섭을 불렀다.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소준섭은 시끄럽게 울리는 핸드폰 벨소리에 잠에서 깼다. 김시후는 주소를 말하고서는 빨리 사람을 구하러 오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