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NASA 프로젝트의 자금이 입금되었기 때문에 그녀는 대략 20억 정도의 자산을 가지고 있었고 그 정도면 심이준에게 진 신세를 갚기에는 충분했다.그동안 심이준의 세심한 가르침이 없었다면 그녀는 이렇게 빨리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일을 마치고 난 뒤 서유는 컴퓨터를 켜고 건축에 관련된 각종 앱와 동영상을 클릭하여 공부하기 시작했다. 디자인을 전공했던 그녀는 이 앱들을 예전에 배운 적이 있었고 몇 번만 복습하면 예전의 기억이 떠오를 것 같았다. 지금은 프로젝트를 빨리 마무리해야 했기 때문에 스케치만 그렸지만 나중에 언니의 프로젝트들이 다 마무리가 되면 그녀도 본격적으로 프로젝트를 맡아야 했다. 때문에 스케치부터 후반 작업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을 한 번 진행해 보아야만 모든 단계를 더 빠르고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녀는 10시까지 공부를 하고 눈을 보호하기 위해 제때 컴퓨터를 끄고 침실로 돌아와 휴식을 취했다. 다음 날 아침, 침대 머리맡에 놓여 있던 핸드폰이 울리는 소리에 서유는 잠에서 깼다. 잠결에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이승하한테서 온 문자였다.[일어났어?]이불 속에 틀어박힌 서유는 몸을 뒤척이며 엎드려서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 [깼어요.][9시에 데리러 갈게]아직 9시가 안 된 것을 확인하고 그녀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다시 잠을 청했다.문밖에서 아주머니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서유 씨, 주서희 선생님 오셨어요.”어쩔 수 없이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야만 했다.“아주머니, 서희 씨한테 거실에서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세요.”노현정은 짧게 대답한 후 자리를 떴고 서유는 이내 이불을 젖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빠르게 씻고 난 뒤, 그녀는 흰 셔츠와 청바지로 갈아입고는 어깨까지 오는 단발머리를 반쯤 묶어 올렸다. 거울에 비친 깔끔하고 산뜻한 그녀의 얼굴은 더 귀여워 보였다. 그녀는 가볍게 립스틱을 바르고 황급히 아래층 거실로 내려갔다. 주서희는 그녀가 내려온 것을 보고 손에 든 약상자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별장 입구에 한참 서 있던 그녀는 이승하의 차가 자신의 앞에 멈춰 서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차창이 내려오고 햇빛이 차 안으로 쏟아지면서 그의 각지고 정교한 이목구비가 눈앞에 드러났다.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고개를 돌리고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차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우람한 체구로 서유를 몸에 감쌌다.선글라스 너머, 눈을 내리깔고 있는 그의 눈동자에는 매력적인 그녀의 모습이 비쳤다. “당신... 오늘...”그는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살짝 기울여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정말 예뻐.”그녀는 손을 뻗어 귀를 막고 손등으로 그의 뜨거운 숨결을 가렸다.“말할 때마다 가까이 다가오지 말래요? 내가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도 아닌데...”남자는 얇은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머리 많이 길었네.”멀지 않아 허리까지 내려오는 그녀의 긴 머리를 볼 수 있을 것 같다.그때까지 자신이 그녀의 옆에 있기를 바랐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그녀를 끌고 가더니 차 문을 열고 그녀를 차에 태운 뒤 트렁크에서 꽃다발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화려한 핑크 장미를 보고 그녀는 고개를 들어 꽃을 들고 있는 이승하를 쳐다보았다. “어제 선물했었잖아요.”그는 꽃을 그녀의 손에 쥐여주며 부드럽게 말했다. “앞으로 매일 한 다발씩...”앞으로 그가 살아 있는 한 매일 한 다발씩 그녀에게 꽃을 선물할 생각이다.그녀는 한참 동안 가만히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그가 건네는 꽃을 받았다. 꽃을 품에 안은 채 그녀는 선글라스를 끝내 벗지 않는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눈 왜 그래요?”아직은 여름이 되기 전이라 햇빛이 그리 강하지 않아서 운전할 때 선글라스를 낄 필요가 없는데 그가 이리 선글라스를 끼고 있으니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 말에 이승하는 그저 담담하게 대답했다.“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눈이 빨갛게 됐어. 당신이 보면 놀랄까 봐.”그녀는 꽃을 들고 있던 손을 살짝 움켜쥐었고 끝내
그는 서유를 데리고 주얼리 코너로 가서 그녀한테 마음에 드는 게 있느냐고 물었다.그녀가 거절하자 그는 더 이상 묻지 않았고 점원에게 다이아몬드 액세서리 신상품을 별장으로 보내라고 당부했다. 점원은 서유를 부러워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깍듯하게 대답했다.“네, 대표님.”주얼리 코너에서 끌려 나온 서유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차도 주고 꽃도 주고 액세서리도 주고 이젠 옷까지 선물하는 건 아니겠지?그녀의 예상대로 이승하는 그녀를 데리고 명품 샵으로 향했고 이번에는 그녀한테 의견조차 묻지 않고 바로 점원들한테 포장하라고 했다.옷과 신발 그리고 가방들을 포장하느라 정신이 없는 점원들을 보며 서유는 머리가 찌근거렸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그녀에게 크리스털 하이힐을 신겨주는 남자를 보며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이런 것들은 도대체 어디서 배운 거예요?”이승하의 성격으로는 절대 이런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뒤에서 그한테 함부로 막 가르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신발을 들고 있던 그의 손이 잠시 멈추었고 그가 짙은 속눈썹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이연석한테서 배웠어.”숨을 들이마시던 그녀는 허리를 굽혀 선글라스를 낀 그의 눈을 쳐다보았다. “다음부터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 믿지 말아요.”갑자기 다가온 그녀에게서 핑크 장미의 향긋한 향이 풍겨왔고 그녀의 바디 향과 함께 그의 콧방울에 은은하게 스며들었다.그녀의 뜨거운 숨결이 볼에 전해져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짜릿했고 그는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붉은 입술에 떨어졌고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 기억 때문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녀는 선글라스에 가려진 남자의 눈빛을 알 수 없었지만 빨갛게 달아오른 남자의 귀 끝을 발견하게 되었다. 잠시 흠칫하던 그녀가 상반신을 일으키려는데 그가 갑자기 그녀의 턱을 치켜들고 그녀의 붉은 입술에 뽀뽀했다. 옆에서 여러 켤레의 신발을 들고 있던 점원은 그 광경을 보고 흥분된 표정을 지으며 동료들에게 눈짓했다.[빨리 봐, 빨리!
이승연은 서유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었고 이미 서유를 만났으니 눈치껏 자리를 피했다. 그녀의 우아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잔뜩 긴장하고 있던 서유는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이씨 가문의 사람들은 전부 박하선처럼 그녀를 경멸하고 무시하며 심지어 악담을 퍼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이승하의 큰누나가 이렇게 온화하고 점잖은 분일 줄은 몰랐다. 그녀한테서 도도하고 까칠한 면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그녀는 진정한 재벌가의 일원으로 교양이 있고 보고 듣고 배운 것이 많아 시야가 넓은 명문가의 자제다운 모습이었다. 이승하는 고개를 숙이고 품에 안긴 여인을 향해 물었다.“언제쯤이면 나랑 같이 우리 집안 행사에 참석할 거야?”서유는 맑은 눈망울을 들어 잘생긴 그의 얼굴을 응시하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말했다.“나중에요.”지금의 그녀는 그와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고 그와 함께 이씨 가문의 행사에 참석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아무 말도 없이 손을 내밀어 쇼핑백을 받아쥐는 그녀를 보고 그는 그녀가 동의했음을 알아차렸다. 이승하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몸을 밀착시킨 뒤 그녀의 턱을 치켜올렸다. “기다릴게.”그의 품에 안겨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안 가요?”옅은 미소를 짓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장미처럼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구름과 안개가 걷힌 뒤의 밝은 달처럼 환해 보였다. “난 당신의 웃는 모습이 좋더라.”가볍게 오므리고 있던 입술이 은은한 곡선을 그리며 즐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는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풀고 그녀와 깍지를 낀 채 백화점을 떠났다. 서유는 쇼핑만 하고 나면 끝인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그는 그녀를 데리고 바닷가로 왔다. 푸른 하늘이 바다와 연결되고 수면에 반사되어 맑은 푸른 빛을 띠었고 멀리서 바라보니 끝이 보이지 않았다. 바닷바람이 불어와 머리가 찰랑거렸고 저 멀리 갈매기가 모래사장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훤칠한 남자가 가녀린 여인을 이끌고 조용히 모래사장을 걷고 있었다. 햇빛이 기울
그의 제안에 그녀는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모습에 이승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카메라를 다시 켜고 서유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버튼을 누르기 전에 그는 품에 안긴 그녀를 살짝 꼬집었다.아픔이 전해져 그녀는 엉겁결에 고개를 젖히고 옆에 있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붉은 입술이 살짝 벌어지고 그녀가 미처 묻기도 전에 그가 고개를 숙이고 그녀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같은 시각, 그가 기나긴 손가락으로 촬영 버튼을 눌렀다. 그저 평범한 사진 한 장을 원하는 줄 알았는데 그가 원하는 게 이런 사진일 줄은 몰랐다.핸드폰을 거두는 그를 보며 그녀는 급히 발끝을 세우고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고개를 젖히고 올려다보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또다시 고개를 숙였다. 파란 하늘 아래서 달콤한 키스를 나누던 두 사람, 그녀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삭제하고 다시 찍어요.”그는 삭제 버튼을 누르려는 그녀의 손을 잡고는 이내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밥 먹으러 가자.”그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휴게소로 향했고 서유는 그의 양복 주머니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이따가 밥 먹을 때, 그가 재킷을 벗으면 핸드폰을 몰래 빼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핸드폰 비밀번호를 모르고 있다.“비밀번호는 당신 생일이야.”남자는 그녀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거침없이 대답한 뒤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서유의 시선은 핸드폰을 따라 그의 허벅지 쪽으로 향했고 그녀는 몰래 사진을 삭제하려고 했던 마음을 순식간에 접었다. 이승하는 그녀를 데리고 4층 높이의 개인 선박에 올라탔다. 외관은 하얗고 넓고 럭셔리했고 내부는 깨끗하고 심플했다. 배 위에 있던 직원은 두 사람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급히 그들을 안내하여 꼭대기 층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호화롭고 풍성한 음식들이 정교한 식탁 위에 차려졌고 그 옆 창밖으로 웅장한 바다가 펼쳐졌다. 두 사람이 앉아서 식사할 때, 배가 천천히 출발하였고 은백색의 물보라가 뱃전
2층 침실로 올라와 보니 불이 켜지 않는 상태였다. 그녀는 어두운 불빛을 빌려 아래층에 멈춰 있는 코닉세그와 차에 타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반쯤 내려온 차창 너머로 그가 핸드폰을 들고 문자를 보내는 모습이 보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카톡을 열었고 그가 보내온 것은 해변에서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삭제하지 말고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어.]추억이라... 왜 추억이지?그녀는 답장을 보내려다가 그의 프로필 사진이 갑자기 그녀의 사진으로 바뀐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그는 또 문자를 보내왔다.[사랑해, 잘 자.]서유는 몇 초 동안 망설이다가 답장을 보냈다.[잘 자요.]다음 날 아침, 서유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가 보낸 핑크 장미를 받았다. 그날은 그가 아니라 소수빈이 장미를 가지고 왔다. “서유 씨, 오늘 대표님께서 중요한 미팅이 있으셔서 제가 대신 왔습니다. 서운해하지 말아요.”그녀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그 사람한테 고맙다고 전해주세요”소수빈은 짧게 대답하고는 차에 올라탄 뒤 이승하에게 전화를 걸었다.“대표님, 말씀하신 대로 다 처리했습니다.”침대에 누워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픈 남자는 소수빈의 말에도 입을 열지 못하였다. 그는 손가락을 떨며 전화를 끊은 다음 간신히 손을 내밀어 진통제를 집어 입에 넣었다. 한편, 서유는 프랑스어 학원에 가서 하루 종일 수업을 듣고 나와 심이준에게 문자를 보냈다. 두 사람은 클럽에서 만나기로 하였고 서유는 음식을 대충 챙겨 먹고 미리 정가혜의 클럽으로 향했다. 3일 동안 누군가가 통째로 빌린 클럽에는 아직도 손님이 있었다. 정가혜는 허리를 굽혀 술을 따른 뒤, 두 손으로 잔을 들어 그늘진 곳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 건네주었다. “연석 씨, 이건 우리 투 해븐에 남은 마지막 좋은 술이에요. 한번 맛봐요. 여전히 입맛에 맞지 않는다면 나도 이젠 방법이 없네요.”예쁜 그녀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눈 밑에는 피곤함
갑자기 얼굴에 뿌려진 와인의 차가운 기운에 정가혜는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았지만 움츠러들지 않았고 여전히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고 낭패한 모습이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매우 연약해 보였고 쓸쓸해 보였고 힘없는 아이 같아 보였다. 늘 당당하던 정가혜가 이렇게 혼자 힘없이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이연석은 갑자기 마음이 아팠다. 그는 안희연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재빨리 거두고는 책상 위의 휴지를 잡아당기려 했다. 바로 이때, 정가혜가 그보다 한발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휴지를 몇 장 뽑아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와인을 닦고 난 뒤,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는 턱을 치켜올렸다.차가운 그녀의 시선이 안희연을 넘어 이연석에게로 떨어졌다. “이연석 씨, 이제 끝났어요.”그녀가 말한 것은 서비스 시간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연석은 두 사람 사이가 끝났다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약간 긴장한 표정을 지으며 정가혜의 손목을 잡아당기려고 했다. 그러나 손이 닿기도 전에 그녀가 맥주 한 병을 집어 들었다. 그녀는 맥주병을 몇 번 흔들더니 이빨로 깨물었고 안에 있던 맥주가 순식간에 튀어나왔다.정가혜가 갑자기 왜 맥주를 따는 것인지에 대해 두 사람이 반응하기도 전에 갑자기 얼굴에서 차가운 기운이 전해졌다. 그녀는 건방진 자세로 입에 물고 있던 병뚜껑을 뱉고는 소파에 있는 두 사람을 향해 맥주를 퍼부었다.“3일 동안 당신들 비위 맞추느라고 엄청 힘들었네요. 이젠 시간 다 됐으니까 역할을 바꿔야죠.”맥주는 레드 와인보다 더 자극적이었고 얼굴을 맞으니 불편하기 짝이 없었던 터라 안희연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얼굴을 가리고 정가혜를 향해 소리쳤다.“천박하기는. 당장 멈추지 못해요?”차갑게 피식 웃던 정가혜는 그들에게 맥주를 끼얹으면서 웨이터에게 계속해서 술을 오픈하라고 지시했다.“오늘 아주 제대로 맥주 목욕을 시켜줄 테니까 머리까지 잘 씻기는지 한버 두고 보자고요.”지난번에 서유와 영상 통화를 할 때,
정가혜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매혹적인 웃음을 보였다. “당신과 상관없는 일이에요.”상관없다고?늘 여자에게 다정하고 신사적이던 이연석의 얼굴은 먹물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어둡게 변해버렸다.“정가혜 씨, 지금 날 도발하는 겁니까?”방귀 뀐 놈이 먼저 성낸다고 뻔뻔한 그의 모습에 그녀는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연석 씨, 당신이 먼저 다른 여자를 데리고 와서 날 도발한 거잖아요.”“내가 왜 이러는 것 같아요? 당신이 주제 파악도 못 하고 날 거절했기 때문이에요.”분노로 가득 찼던 그녀의 눈빛이 갑자기 의혹으로 가득 채워졌다. 그동안 이연석은 여자들을 많이 만났었지만 한 번도 그녀들에게 진심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의 성격이라면 헤어진 후 먼저 찾아와서 그녀에게 재결합을 청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날 밤, 그는 술기운을 빌려 그녀를 안고 어린아이처럼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가혜 씨, 보고 싶었어요. 우리 헤어지지 말아요.”그녀는 그의 몸에서 나는 짙은 술 향기를 맡으며 그가 헛소리를 하는 줄 알았고 그가 진심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하였다. 한참 의아해하던 그녀는 이내 냉정을 되찾았다. 그가 진심이든 아니든 3일 동안 그는 정말 너무 심했다. 절대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연석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해 그에게서 벗어나고는 뒤돌아서서 문을 밀고 나갔다.쿨하게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그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복잡해졌다. 한편, 룸을 나온 정가혜는 매니저를 따라 하이힐을 신은 채 재빨리 위층에 있는 룸으로 향했다.“육성재 씨 온 지 얼마나 됐어요?”“방금 도착하셨습니다.”그녀는 엘리베이터에 들어가서 버튼을 누르고는 매니저에게 당부했다.“하 매니저님, 방금 내가 육성재 씨를 내 남자라고 한 것에 대해서는 비밀에 부쳐야 할 거예요. 현장에 있던 사람들 아무 데서나 떠들지 못하게 입단속 잘 시켜요. 육성재 씨는 우리가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하 매니저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