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연은 서유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었고 이미 서유를 만났으니 눈치껏 자리를 피했다. 그녀의 우아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잔뜩 긴장하고 있던 서유는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이씨 가문의 사람들은 전부 박하선처럼 그녀를 경멸하고 무시하며 심지어 악담을 퍼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이승하의 큰누나가 이렇게 온화하고 점잖은 분일 줄은 몰랐다. 그녀한테서 도도하고 까칠한 면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그녀는 진정한 재벌가의 일원으로 교양이 있고 보고 듣고 배운 것이 많아 시야가 넓은 명문가의 자제다운 모습이었다. 이승하는 고개를 숙이고 품에 안긴 여인을 향해 물었다.“언제쯤이면 나랑 같이 우리 집안 행사에 참석할 거야?”서유는 맑은 눈망울을 들어 잘생긴 그의 얼굴을 응시하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말했다.“나중에요.”지금의 그녀는 그와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고 그와 함께 이씨 가문의 행사에 참석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아무 말도 없이 손을 내밀어 쇼핑백을 받아쥐는 그녀를 보고 그는 그녀가 동의했음을 알아차렸다. 이승하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몸을 밀착시킨 뒤 그녀의 턱을 치켜올렸다. “기다릴게.”그의 품에 안겨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안 가요?”옅은 미소를 짓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장미처럼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구름과 안개가 걷힌 뒤의 밝은 달처럼 환해 보였다. “난 당신의 웃는 모습이 좋더라.”가볍게 오므리고 있던 입술이 은은한 곡선을 그리며 즐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는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풀고 그녀와 깍지를 낀 채 백화점을 떠났다. 서유는 쇼핑만 하고 나면 끝인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그는 그녀를 데리고 바닷가로 왔다. 푸른 하늘이 바다와 연결되고 수면에 반사되어 맑은 푸른 빛을 띠었고 멀리서 바라보니 끝이 보이지 않았다. 바닷바람이 불어와 머리가 찰랑거렸고 저 멀리 갈매기가 모래사장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훤칠한 남자가 가녀린 여인을 이끌고 조용히 모래사장을 걷고 있었다. 햇빛이 기울
그의 제안에 그녀는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모습에 이승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카메라를 다시 켜고 서유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버튼을 누르기 전에 그는 품에 안긴 그녀를 살짝 꼬집었다.아픔이 전해져 그녀는 엉겁결에 고개를 젖히고 옆에 있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붉은 입술이 살짝 벌어지고 그녀가 미처 묻기도 전에 그가 고개를 숙이고 그녀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같은 시각, 그가 기나긴 손가락으로 촬영 버튼을 눌렀다. 그저 평범한 사진 한 장을 원하는 줄 알았는데 그가 원하는 게 이런 사진일 줄은 몰랐다.핸드폰을 거두는 그를 보며 그녀는 급히 발끝을 세우고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고개를 젖히고 올려다보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또다시 고개를 숙였다. 파란 하늘 아래서 달콤한 키스를 나누던 두 사람, 그녀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삭제하고 다시 찍어요.”그는 삭제 버튼을 누르려는 그녀의 손을 잡고는 이내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밥 먹으러 가자.”그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휴게소로 향했고 서유는 그의 양복 주머니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이따가 밥 먹을 때, 그가 재킷을 벗으면 핸드폰을 몰래 빼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핸드폰 비밀번호를 모르고 있다.“비밀번호는 당신 생일이야.”남자는 그녀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거침없이 대답한 뒤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서유의 시선은 핸드폰을 따라 그의 허벅지 쪽으로 향했고 그녀는 몰래 사진을 삭제하려고 했던 마음을 순식간에 접었다. 이승하는 그녀를 데리고 4층 높이의 개인 선박에 올라탔다. 외관은 하얗고 넓고 럭셔리했고 내부는 깨끗하고 심플했다. 배 위에 있던 직원은 두 사람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급히 그들을 안내하여 꼭대기 층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호화롭고 풍성한 음식들이 정교한 식탁 위에 차려졌고 그 옆 창밖으로 웅장한 바다가 펼쳐졌다. 두 사람이 앉아서 식사할 때, 배가 천천히 출발하였고 은백색의 물보라가 뱃전
2층 침실로 올라와 보니 불이 켜지 않는 상태였다. 그녀는 어두운 불빛을 빌려 아래층에 멈춰 있는 코닉세그와 차에 타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반쯤 내려온 차창 너머로 그가 핸드폰을 들고 문자를 보내는 모습이 보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카톡을 열었고 그가 보내온 것은 해변에서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삭제하지 말고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어.]추억이라... 왜 추억이지?그녀는 답장을 보내려다가 그의 프로필 사진이 갑자기 그녀의 사진으로 바뀐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그는 또 문자를 보내왔다.[사랑해, 잘 자.]서유는 몇 초 동안 망설이다가 답장을 보냈다.[잘 자요.]다음 날 아침, 서유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가 보낸 핑크 장미를 받았다. 그날은 그가 아니라 소수빈이 장미를 가지고 왔다. “서유 씨, 오늘 대표님께서 중요한 미팅이 있으셔서 제가 대신 왔습니다. 서운해하지 말아요.”그녀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그 사람한테 고맙다고 전해주세요”소수빈은 짧게 대답하고는 차에 올라탄 뒤 이승하에게 전화를 걸었다.“대표님, 말씀하신 대로 다 처리했습니다.”침대에 누워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픈 남자는 소수빈의 말에도 입을 열지 못하였다. 그는 손가락을 떨며 전화를 끊은 다음 간신히 손을 내밀어 진통제를 집어 입에 넣었다. 한편, 서유는 프랑스어 학원에 가서 하루 종일 수업을 듣고 나와 심이준에게 문자를 보냈다. 두 사람은 클럽에서 만나기로 하였고 서유는 음식을 대충 챙겨 먹고 미리 정가혜의 클럽으로 향했다. 3일 동안 누군가가 통째로 빌린 클럽에는 아직도 손님이 있었다. 정가혜는 허리를 굽혀 술을 따른 뒤, 두 손으로 잔을 들어 그늘진 곳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 건네주었다. “연석 씨, 이건 우리 투 해븐에 남은 마지막 좋은 술이에요. 한번 맛봐요. 여전히 입맛에 맞지 않는다면 나도 이젠 방법이 없네요.”예쁜 그녀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눈 밑에는 피곤함
갑자기 얼굴에 뿌려진 와인의 차가운 기운에 정가혜는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았지만 움츠러들지 않았고 여전히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고 낭패한 모습이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매우 연약해 보였고 쓸쓸해 보였고 힘없는 아이 같아 보였다. 늘 당당하던 정가혜가 이렇게 혼자 힘없이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이연석은 갑자기 마음이 아팠다. 그는 안희연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재빨리 거두고는 책상 위의 휴지를 잡아당기려 했다. 바로 이때, 정가혜가 그보다 한발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휴지를 몇 장 뽑아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와인을 닦고 난 뒤,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는 턱을 치켜올렸다.차가운 그녀의 시선이 안희연을 넘어 이연석에게로 떨어졌다. “이연석 씨, 이제 끝났어요.”그녀가 말한 것은 서비스 시간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연석은 두 사람 사이가 끝났다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약간 긴장한 표정을 지으며 정가혜의 손목을 잡아당기려고 했다. 그러나 손이 닿기도 전에 그녀가 맥주 한 병을 집어 들었다. 그녀는 맥주병을 몇 번 흔들더니 이빨로 깨물었고 안에 있던 맥주가 순식간에 튀어나왔다.정가혜가 갑자기 왜 맥주를 따는 것인지에 대해 두 사람이 반응하기도 전에 갑자기 얼굴에서 차가운 기운이 전해졌다. 그녀는 건방진 자세로 입에 물고 있던 병뚜껑을 뱉고는 소파에 있는 두 사람을 향해 맥주를 퍼부었다.“3일 동안 당신들 비위 맞추느라고 엄청 힘들었네요. 이젠 시간 다 됐으니까 역할을 바꿔야죠.”맥주는 레드 와인보다 더 자극적이었고 얼굴을 맞으니 불편하기 짝이 없었던 터라 안희연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얼굴을 가리고 정가혜를 향해 소리쳤다.“천박하기는. 당장 멈추지 못해요?”차갑게 피식 웃던 정가혜는 그들에게 맥주를 끼얹으면서 웨이터에게 계속해서 술을 오픈하라고 지시했다.“오늘 아주 제대로 맥주 목욕을 시켜줄 테니까 머리까지 잘 씻기는지 한버 두고 보자고요.”지난번에 서유와 영상 통화를 할 때,
정가혜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매혹적인 웃음을 보였다. “당신과 상관없는 일이에요.”상관없다고?늘 여자에게 다정하고 신사적이던 이연석의 얼굴은 먹물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어둡게 변해버렸다.“정가혜 씨, 지금 날 도발하는 겁니까?”방귀 뀐 놈이 먼저 성낸다고 뻔뻔한 그의 모습에 그녀는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연석 씨, 당신이 먼저 다른 여자를 데리고 와서 날 도발한 거잖아요.”“내가 왜 이러는 것 같아요? 당신이 주제 파악도 못 하고 날 거절했기 때문이에요.”분노로 가득 찼던 그녀의 눈빛이 갑자기 의혹으로 가득 채워졌다. 그동안 이연석은 여자들을 많이 만났었지만 한 번도 그녀들에게 진심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의 성격이라면 헤어진 후 먼저 찾아와서 그녀에게 재결합을 청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날 밤, 그는 술기운을 빌려 그녀를 안고 어린아이처럼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가혜 씨, 보고 싶었어요. 우리 헤어지지 말아요.”그녀는 그의 몸에서 나는 짙은 술 향기를 맡으며 그가 헛소리를 하는 줄 알았고 그가 진심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하였다. 한참 의아해하던 그녀는 이내 냉정을 되찾았다. 그가 진심이든 아니든 3일 동안 그는 정말 너무 심했다. 절대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연석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해 그에게서 벗어나고는 뒤돌아서서 문을 밀고 나갔다.쿨하게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그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복잡해졌다. 한편, 룸을 나온 정가혜는 매니저를 따라 하이힐을 신은 채 재빨리 위층에 있는 룸으로 향했다.“육성재 씨 온 지 얼마나 됐어요?”“방금 도착하셨습니다.”그녀는 엘리베이터에 들어가서 버튼을 누르고는 매니저에게 당부했다.“하 매니저님, 방금 내가 육성재 씨를 내 남자라고 한 것에 대해서는 비밀에 부쳐야 할 거예요. 현장에 있던 사람들 아무 데서나 떠들지 못하게 입단속 잘 시켜요. 육성재 씨는 우리가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하 매니저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사
그녀는 포악한 기운이 온몸에 배어 있는 남자를 보고 있자니 어느새 스트레스가 가득 차올랐다. 문뜩 이승하를 처음 봤을 때의 광경이 떠올랐다. 비슷한 게 아니라 완전 똑같은 상황이었고 엄청난 카리스마에 압박감이 장난 아니었다.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매우 다른 점이 있었다. 이승하는 고귀함과 차가움이 몸에 배어 있었지만 육성재는 조울증이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지금 이 순간, 아무 말도 없는 그를 쳐다보며 정가혜는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하였고 심지어 그의 앞에서조차 숨조차 쉬지 못하였다. 지난번 육성재가 이곳에 왔을 때, 웨이터가 술을 따르다가 실수를 하자 그는 바로 술잔을 깨뜨려 버렸었다. 그녀는 이 손님이 성질이 급하여 상대하기 어려운 손님인 걸 깨닫고 보고 급히 웨이터에게 물러나라고 하고는 직접 가서 그를 접대했다. 그녀의 서비스가 마음에 들었던 건지 육성재는 이번에 다시 와서 특별히 그녀에게 접대해 주기를 바란다고 요구했다. 그녀는 육성재가 자신에게 술을 따르라고 할 줄 알았는데 그는 검은 눈동자를 치켜든 채 그녀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았다.그의 거침없는 눈빛에 늘 침착하던 정가혜는 참지 못하고 침을 꿀꺽 삼켰다.‘육성재 씨, 이곳은 정상적인 클럽이에요. 주류 서비스 외에 다른 장사는 하지 않는다고요.’다른 손님이었으면 아마도 이 말을 바로 내뱉었을 텐데 눈앞의 육성재는 그녀가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가 마음속으로 육성재한테 불만을 털어놓을 때, 그가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입을 열었다.“김초희를 알고 있나요?”낮고 둔탁하며 듣기 좋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그녀는 ‘김초희'라는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역시 그녀와 같은 여인을 육성재가 어찌 마음에 들어 할 수 있겠는가? 서유 정도가 되어야 그의 눈에 들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서유는 이승하의 여자이다. 육성재가 지금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드는 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육성재를 바라보았다. “알아요. 무슨 일로 찾아요?”그
정가혜는 경호원들이 또다시 손을 뻗는 것을 보고 심장이 떨릴 정도로 긴장되었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잡고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Y국에 있어요. 지현우 씨와 함께 있으니까 그녀를 찾고 싶다면 Y국으로 가요.”‘어디 한번 가서 지현우와 싸워봐. 둘 중 누가 이기는지 한번 보자고.’그녀의 말에 억누를 수 없는 엄청난 분노가 육성재의 검은 눈동자에서 터져 나왔.“ Y국에서 이미 돌아온 걸 알고 있어요. 그 여자가 처음 만난 사람이 바로 당신이었고 그 장소가 바로 이곳이었죠.”그가 처음 이곳에 온 것도 정가혜한테 김초희의 행방을 묻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웨이터 때문에 화가 치밀어 올라 말을 꺼내지 못 하였다. 이번에는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찾아왔다. 그런데 뜻밖에도 정가혜가 감히 자신 앞에서 시치미를 뗄 줄은 몰랐다. 정말 죽고 싶어서 환장한 것인지?말을 마친 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고 우람한 체격이 하이힐을 신고 그녀를 포위했다. 그는 허리를 굽히고 악한 눈으로 정가혜를 빤히 쳐다보았다. “정가혜 씨,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윽박지르는 그의 모습에 놀라서 그녀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섰지만 그가 그녀의 팔을 부러질 정도로 꽉 붙잡았다. “워싱턴에 있어요.”조금 반항적인 기질이 있는 그녀는 윽박지르면 윽박지를수록 더 그에게 사실대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망망대해에서 바늘을 찾듯 어디 한번 찾아봐.육성재는 그녀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려는 듯 정가혜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녀가 큰 눈을 깜박이며 그를 향해 유혹의 눈빛을 보냈다.뭐지?갑자기 속이 메스꺼워진 그는 그녀를 뿌리치고 몸을 곧게 세우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그 여자가 워싱턴에 없으면 난 돌아와서 당신 눈을 뽑아버릴 거예요.”그 말에 정가혜는 침을 꿀꺽 삼켰다.“항공편 기록 조사해 보면 알 거 아니에요. 그녀는 한 달 전에 이미 워싱턴으로 갔어요. 정말이에요.”그녀는 성격이 급한 육성재가 항공편 기록에 대해 조사할
평소에 쿨하고 제멋대로인 바람둥이 도련님이 이렇게 당황한 모습은 처음 본다. 설마 이 사람...“연석 씨, 왜 그렇게 신경 쓰고 긴장해요? 정말 날 좋아하는 건 아니겠죠?”그녀의 말에 그는 행동을 멈추고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순식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이 여자한테 마음이 생겼다니. 그럴 리가 있나? 3년이라는 세월, 함께 몸을 섞었던 사이라 그저 마음이 놓이지 않았을 뿐이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여자들을 만났었는데 어떻게 이혼한 여자에게 마음이 갈 수 있겠는가? 그럴 리가 없다. “육성재는 우리 둘째 형의 원수예요. 그리고 당신은 내 전 여자 친구고. 그 사람과 얽히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납득할 수 없을 정도로 억지스러운 이유였지만 정가혜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바람둥이인 이연석은 그녀와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고 이혼녀인 그녀도 그와는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두 사람이 함께한 지난 3년은 그저 장난에 불과했을 뿐, 그 누구도 누구에게 신경 써서는 안 되는 사이었다. 정가혜는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아니면 말고요.”그녀는 저 멀리 복도 끝에 서서 이연석을 기다리고 있는 안희연을 쳐다보았다.“안희연 씨는 투정도 많이 부리고 성격도 안 좋지만 그게 다 당신을 좋아해서 그런 거예요. 이왕 재결합한 거 잘 해줘요. 또다시 사람 갖고 놀지 말고. 여자한테 꽃 같은 시절은 얼마 안 되니까.”말을 마친 그녀는 이연석을 밀어내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것을 쳐다보면서 이연석은 벽을 짚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한편, 서유는 디저트 가게에서 정가혜가 좋아하는 디저트를 몇 가지 구입한 뒤, 클럽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물건을 들고 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마자 음흉하고 악랄한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그 눈빛에 소스라치게 놀라던 그녀는 재빨리 눈을 내리깔고 옆으로 걸어갔다.“잠깐만요.”TV 속 성우의 목소리처럼 듣기 좋은 그 남자의 목소리는 마치 마력이 있는 것처럼 그녀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