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장 입구에 한참 서 있던 그녀는 이승하의 차가 자신의 앞에 멈춰 서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차창이 내려오고 햇빛이 차 안으로 쏟아지면서 그의 각지고 정교한 이목구비가 눈앞에 드러났다.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고개를 돌리고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차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우람한 체구로 서유를 몸에 감쌌다.선글라스 너머, 눈을 내리깔고 있는 그의 눈동자에는 매력적인 그녀의 모습이 비쳤다. “당신... 오늘...”그는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살짝 기울여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정말 예뻐.”그녀는 손을 뻗어 귀를 막고 손등으로 그의 뜨거운 숨결을 가렸다.“말할 때마다 가까이 다가오지 말래요? 내가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도 아닌데...”남자는 얇은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머리 많이 길었네.”멀지 않아 허리까지 내려오는 그녀의 긴 머리를 볼 수 있을 것 같다.그때까지 자신이 그녀의 옆에 있기를 바랐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그녀를 끌고 가더니 차 문을 열고 그녀를 차에 태운 뒤 트렁크에서 꽃다발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화려한 핑크 장미를 보고 그녀는 고개를 들어 꽃을 들고 있는 이승하를 쳐다보았다. “어제 선물했었잖아요.”그는 꽃을 그녀의 손에 쥐여주며 부드럽게 말했다. “앞으로 매일 한 다발씩...”앞으로 그가 살아 있는 한 매일 한 다발씩 그녀에게 꽃을 선물할 생각이다.그녀는 한참 동안 가만히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그가 건네는 꽃을 받았다. 꽃을 품에 안은 채 그녀는 선글라스를 끝내 벗지 않는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눈 왜 그래요?”아직은 여름이 되기 전이라 햇빛이 그리 강하지 않아서 운전할 때 선글라스를 낄 필요가 없는데 그가 이리 선글라스를 끼고 있으니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 말에 이승하는 그저 담담하게 대답했다.“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눈이 빨갛게 됐어. 당신이 보면 놀랄까 봐.”그녀는 꽃을 들고 있던 손을 살짝 움켜쥐었고 끝내
그는 서유를 데리고 주얼리 코너로 가서 그녀한테 마음에 드는 게 있느냐고 물었다.그녀가 거절하자 그는 더 이상 묻지 않았고 점원에게 다이아몬드 액세서리 신상품을 별장으로 보내라고 당부했다. 점원은 서유를 부러워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깍듯하게 대답했다.“네, 대표님.”주얼리 코너에서 끌려 나온 서유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차도 주고 꽃도 주고 액세서리도 주고 이젠 옷까지 선물하는 건 아니겠지?그녀의 예상대로 이승하는 그녀를 데리고 명품 샵으로 향했고 이번에는 그녀한테 의견조차 묻지 않고 바로 점원들한테 포장하라고 했다.옷과 신발 그리고 가방들을 포장하느라 정신이 없는 점원들을 보며 서유는 머리가 찌근거렸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그녀에게 크리스털 하이힐을 신겨주는 남자를 보며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이런 것들은 도대체 어디서 배운 거예요?”이승하의 성격으로는 절대 이런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뒤에서 그한테 함부로 막 가르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신발을 들고 있던 그의 손이 잠시 멈추었고 그가 짙은 속눈썹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이연석한테서 배웠어.”숨을 들이마시던 그녀는 허리를 굽혀 선글라스를 낀 그의 눈을 쳐다보았다. “다음부터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 믿지 말아요.”갑자기 다가온 그녀에게서 핑크 장미의 향긋한 향이 풍겨왔고 그녀의 바디 향과 함께 그의 콧방울에 은은하게 스며들었다.그녀의 뜨거운 숨결이 볼에 전해져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짜릿했고 그는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붉은 입술에 떨어졌고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 기억 때문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녀는 선글라스에 가려진 남자의 눈빛을 알 수 없었지만 빨갛게 달아오른 남자의 귀 끝을 발견하게 되었다. 잠시 흠칫하던 그녀가 상반신을 일으키려는데 그가 갑자기 그녀의 턱을 치켜들고 그녀의 붉은 입술에 뽀뽀했다. 옆에서 여러 켤레의 신발을 들고 있던 점원은 그 광경을 보고 흥분된 표정을 지으며 동료들에게 눈짓했다.[빨리 봐, 빨리!
이승연은 서유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었고 이미 서유를 만났으니 눈치껏 자리를 피했다. 그녀의 우아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잔뜩 긴장하고 있던 서유는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이씨 가문의 사람들은 전부 박하선처럼 그녀를 경멸하고 무시하며 심지어 악담을 퍼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이승하의 큰누나가 이렇게 온화하고 점잖은 분일 줄은 몰랐다. 그녀한테서 도도하고 까칠한 면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그녀는 진정한 재벌가의 일원으로 교양이 있고 보고 듣고 배운 것이 많아 시야가 넓은 명문가의 자제다운 모습이었다. 이승하는 고개를 숙이고 품에 안긴 여인을 향해 물었다.“언제쯤이면 나랑 같이 우리 집안 행사에 참석할 거야?”서유는 맑은 눈망울을 들어 잘생긴 그의 얼굴을 응시하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말했다.“나중에요.”지금의 그녀는 그와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고 그와 함께 이씨 가문의 행사에 참석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아무 말도 없이 손을 내밀어 쇼핑백을 받아쥐는 그녀를 보고 그는 그녀가 동의했음을 알아차렸다. 이승하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몸을 밀착시킨 뒤 그녀의 턱을 치켜올렸다. “기다릴게.”그의 품에 안겨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안 가요?”옅은 미소를 짓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장미처럼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구름과 안개가 걷힌 뒤의 밝은 달처럼 환해 보였다. “난 당신의 웃는 모습이 좋더라.”가볍게 오므리고 있던 입술이 은은한 곡선을 그리며 즐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는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풀고 그녀와 깍지를 낀 채 백화점을 떠났다. 서유는 쇼핑만 하고 나면 끝인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그는 그녀를 데리고 바닷가로 왔다. 푸른 하늘이 바다와 연결되고 수면에 반사되어 맑은 푸른 빛을 띠었고 멀리서 바라보니 끝이 보이지 않았다. 바닷바람이 불어와 머리가 찰랑거렸고 저 멀리 갈매기가 모래사장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훤칠한 남자가 가녀린 여인을 이끌고 조용히 모래사장을 걷고 있었다. 햇빛이 기울
그의 제안에 그녀는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모습에 이승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카메라를 다시 켜고 서유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버튼을 누르기 전에 그는 품에 안긴 그녀를 살짝 꼬집었다.아픔이 전해져 그녀는 엉겁결에 고개를 젖히고 옆에 있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붉은 입술이 살짝 벌어지고 그녀가 미처 묻기도 전에 그가 고개를 숙이고 그녀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같은 시각, 그가 기나긴 손가락으로 촬영 버튼을 눌렀다. 그저 평범한 사진 한 장을 원하는 줄 알았는데 그가 원하는 게 이런 사진일 줄은 몰랐다.핸드폰을 거두는 그를 보며 그녀는 급히 발끝을 세우고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고개를 젖히고 올려다보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또다시 고개를 숙였다. 파란 하늘 아래서 달콤한 키스를 나누던 두 사람, 그녀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삭제하고 다시 찍어요.”그는 삭제 버튼을 누르려는 그녀의 손을 잡고는 이내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밥 먹으러 가자.”그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휴게소로 향했고 서유는 그의 양복 주머니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이따가 밥 먹을 때, 그가 재킷을 벗으면 핸드폰을 몰래 빼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핸드폰 비밀번호를 모르고 있다.“비밀번호는 당신 생일이야.”남자는 그녀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거침없이 대답한 뒤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서유의 시선은 핸드폰을 따라 그의 허벅지 쪽으로 향했고 그녀는 몰래 사진을 삭제하려고 했던 마음을 순식간에 접었다. 이승하는 그녀를 데리고 4층 높이의 개인 선박에 올라탔다. 외관은 하얗고 넓고 럭셔리했고 내부는 깨끗하고 심플했다. 배 위에 있던 직원은 두 사람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급히 그들을 안내하여 꼭대기 층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호화롭고 풍성한 음식들이 정교한 식탁 위에 차려졌고 그 옆 창밖으로 웅장한 바다가 펼쳐졌다. 두 사람이 앉아서 식사할 때, 배가 천천히 출발하였고 은백색의 물보라가 뱃전
2층 침실로 올라와 보니 불이 켜지 않는 상태였다. 그녀는 어두운 불빛을 빌려 아래층에 멈춰 있는 코닉세그와 차에 타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반쯤 내려온 차창 너머로 그가 핸드폰을 들고 문자를 보내는 모습이 보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카톡을 열었고 그가 보내온 것은 해변에서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삭제하지 말고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어.]추억이라... 왜 추억이지?그녀는 답장을 보내려다가 그의 프로필 사진이 갑자기 그녀의 사진으로 바뀐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그는 또 문자를 보내왔다.[사랑해, 잘 자.]서유는 몇 초 동안 망설이다가 답장을 보냈다.[잘 자요.]다음 날 아침, 서유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가 보낸 핑크 장미를 받았다. 그날은 그가 아니라 소수빈이 장미를 가지고 왔다. “서유 씨, 오늘 대표님께서 중요한 미팅이 있으셔서 제가 대신 왔습니다. 서운해하지 말아요.”그녀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그 사람한테 고맙다고 전해주세요”소수빈은 짧게 대답하고는 차에 올라탄 뒤 이승하에게 전화를 걸었다.“대표님, 말씀하신 대로 다 처리했습니다.”침대에 누워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픈 남자는 소수빈의 말에도 입을 열지 못하였다. 그는 손가락을 떨며 전화를 끊은 다음 간신히 손을 내밀어 진통제를 집어 입에 넣었다. 한편, 서유는 프랑스어 학원에 가서 하루 종일 수업을 듣고 나와 심이준에게 문자를 보냈다. 두 사람은 클럽에서 만나기로 하였고 서유는 음식을 대충 챙겨 먹고 미리 정가혜의 클럽으로 향했다. 3일 동안 누군가가 통째로 빌린 클럽에는 아직도 손님이 있었다. 정가혜는 허리를 굽혀 술을 따른 뒤, 두 손으로 잔을 들어 그늘진 곳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 건네주었다. “연석 씨, 이건 우리 투 해븐에 남은 마지막 좋은 술이에요. 한번 맛봐요. 여전히 입맛에 맞지 않는다면 나도 이젠 방법이 없네요.”예쁜 그녀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눈 밑에는 피곤함
갑자기 얼굴에 뿌려진 와인의 차가운 기운에 정가혜는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았지만 움츠러들지 않았고 여전히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고 낭패한 모습이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매우 연약해 보였고 쓸쓸해 보였고 힘없는 아이 같아 보였다. 늘 당당하던 정가혜가 이렇게 혼자 힘없이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이연석은 갑자기 마음이 아팠다. 그는 안희연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재빨리 거두고는 책상 위의 휴지를 잡아당기려 했다. 바로 이때, 정가혜가 그보다 한발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휴지를 몇 장 뽑아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와인을 닦고 난 뒤,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는 턱을 치켜올렸다.차가운 그녀의 시선이 안희연을 넘어 이연석에게로 떨어졌다. “이연석 씨, 이제 끝났어요.”그녀가 말한 것은 서비스 시간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연석은 두 사람 사이가 끝났다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약간 긴장한 표정을 지으며 정가혜의 손목을 잡아당기려고 했다. 그러나 손이 닿기도 전에 그녀가 맥주 한 병을 집어 들었다. 그녀는 맥주병을 몇 번 흔들더니 이빨로 깨물었고 안에 있던 맥주가 순식간에 튀어나왔다.정가혜가 갑자기 왜 맥주를 따는 것인지에 대해 두 사람이 반응하기도 전에 갑자기 얼굴에서 차가운 기운이 전해졌다. 그녀는 건방진 자세로 입에 물고 있던 병뚜껑을 뱉고는 소파에 있는 두 사람을 향해 맥주를 퍼부었다.“3일 동안 당신들 비위 맞추느라고 엄청 힘들었네요. 이젠 시간 다 됐으니까 역할을 바꿔야죠.”맥주는 레드 와인보다 더 자극적이었고 얼굴을 맞으니 불편하기 짝이 없었던 터라 안희연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얼굴을 가리고 정가혜를 향해 소리쳤다.“천박하기는. 당장 멈추지 못해요?”차갑게 피식 웃던 정가혜는 그들에게 맥주를 끼얹으면서 웨이터에게 계속해서 술을 오픈하라고 지시했다.“오늘 아주 제대로 맥주 목욕을 시켜줄 테니까 머리까지 잘 씻기는지 한버 두고 보자고요.”지난번에 서유와 영상 통화를 할 때,
정가혜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매혹적인 웃음을 보였다. “당신과 상관없는 일이에요.”상관없다고?늘 여자에게 다정하고 신사적이던 이연석의 얼굴은 먹물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어둡게 변해버렸다.“정가혜 씨, 지금 날 도발하는 겁니까?”방귀 뀐 놈이 먼저 성낸다고 뻔뻔한 그의 모습에 그녀는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연석 씨, 당신이 먼저 다른 여자를 데리고 와서 날 도발한 거잖아요.”“내가 왜 이러는 것 같아요? 당신이 주제 파악도 못 하고 날 거절했기 때문이에요.”분노로 가득 찼던 그녀의 눈빛이 갑자기 의혹으로 가득 채워졌다. 그동안 이연석은 여자들을 많이 만났었지만 한 번도 그녀들에게 진심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의 성격이라면 헤어진 후 먼저 찾아와서 그녀에게 재결합을 청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날 밤, 그는 술기운을 빌려 그녀를 안고 어린아이처럼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가혜 씨, 보고 싶었어요. 우리 헤어지지 말아요.”그녀는 그의 몸에서 나는 짙은 술 향기를 맡으며 그가 헛소리를 하는 줄 알았고 그가 진심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하였다. 한참 의아해하던 그녀는 이내 냉정을 되찾았다. 그가 진심이든 아니든 3일 동안 그는 정말 너무 심했다. 절대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연석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해 그에게서 벗어나고는 뒤돌아서서 문을 밀고 나갔다.쿨하게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그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복잡해졌다. 한편, 룸을 나온 정가혜는 매니저를 따라 하이힐을 신은 채 재빨리 위층에 있는 룸으로 향했다.“육성재 씨 온 지 얼마나 됐어요?”“방금 도착하셨습니다.”그녀는 엘리베이터에 들어가서 버튼을 누르고는 매니저에게 당부했다.“하 매니저님, 방금 내가 육성재 씨를 내 남자라고 한 것에 대해서는 비밀에 부쳐야 할 거예요. 현장에 있던 사람들 아무 데서나 떠들지 못하게 입단속 잘 시켜요. 육성재 씨는 우리가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하 매니저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사
그녀는 포악한 기운이 온몸에 배어 있는 남자를 보고 있자니 어느새 스트레스가 가득 차올랐다. 문뜩 이승하를 처음 봤을 때의 광경이 떠올랐다. 비슷한 게 아니라 완전 똑같은 상황이었고 엄청난 카리스마에 압박감이 장난 아니었다.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매우 다른 점이 있었다. 이승하는 고귀함과 차가움이 몸에 배어 있었지만 육성재는 조울증이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지금 이 순간, 아무 말도 없는 그를 쳐다보며 정가혜는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하였고 심지어 그의 앞에서조차 숨조차 쉬지 못하였다. 지난번 육성재가 이곳에 왔을 때, 웨이터가 술을 따르다가 실수를 하자 그는 바로 술잔을 깨뜨려 버렸었다. 그녀는 이 손님이 성질이 급하여 상대하기 어려운 손님인 걸 깨닫고 보고 급히 웨이터에게 물러나라고 하고는 직접 가서 그를 접대했다. 그녀의 서비스가 마음에 들었던 건지 육성재는 이번에 다시 와서 특별히 그녀에게 접대해 주기를 바란다고 요구했다. 그녀는 육성재가 자신에게 술을 따르라고 할 줄 알았는데 그는 검은 눈동자를 치켜든 채 그녀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았다.그의 거침없는 눈빛에 늘 침착하던 정가혜는 참지 못하고 침을 꿀꺽 삼켰다.‘육성재 씨, 이곳은 정상적인 클럽이에요. 주류 서비스 외에 다른 장사는 하지 않는다고요.’다른 손님이었으면 아마도 이 말을 바로 내뱉었을 텐데 눈앞의 육성재는 그녀가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가 마음속으로 육성재한테 불만을 털어놓을 때, 그가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입을 열었다.“김초희를 알고 있나요?”낮고 둔탁하며 듣기 좋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그녀는 ‘김초희'라는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역시 그녀와 같은 여인을 육성재가 어찌 마음에 들어 할 수 있겠는가? 서유 정도가 되어야 그의 눈에 들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서유는 이승하의 여자이다. 육성재가 지금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드는 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육성재를 바라보았다. “알아요. 무슨 일로 찾아요?”그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