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맞은편 방안으로 이승하를 데리고 들어간 택이는 가장 먼저 방안 곳곳을 한번 훑어보았다.다행히 투숙객은 현재 자리를 비웠고 이에 택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는 이승하를 바라보며 방 키를 내보이더니 씩 하고 웃었다.“대표님, 저 때문에 위기를 넘기셨네요.”이승하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피식 웃다가 뭔가 떠오른 듯 다시 표정을 굳히고 물었다.“나한테 사람을 붙였어?”그의 손에 갑자기 힘이 들어가더니 택이의 어깨가 무겁게 짓눌렸다.택이는 몸이 굳어버리고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강세은 씨가 대표님께서 정체를 드러내실까 봐 저한테 꼭 따라다니라고...”이승하의 입꼬리가 무섭게 위로 올라더니 싸늘한 한마디를 던졌다.“네가 지금 누구와 일하는지 까먹지 마.”그 말에 택이는 뜨끔하며 이내 예의를 갖춰 얘기했다.“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제 목숨은 대표님께서 주신 거라 저는 당연히 대표님 말만 들어야죠. 다만 정체가 드러나게 되면 가장 먼저 대표님께서 위험해지실 것 같아 이번만큼은 강세은 씨 말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믿어주세요. 저는 오로지 대표님께만 충성합니다!”이승하는 택이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에 더 질책하지 않고 그의 어깨에 올린 손을 거두어들였다.그러고는 소파에 앉아 서유가 왜 경찰을 대동해 그를 잡으려고 했는지에 대해 고민했다. 바로 그때 그의 개인 휴대폰이 울렸다.그는 서유가 보내온 메시지를 보고 잠깐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한참을 고민한 뒤 답장을 보냈다.[오늘 저녁은 안 될 것 같네요. 내일 아침 8시, 나이트 레일에서 다시 만나는 거로 하죠.]그러고는 택이에게 지시를 내렸다.“심이준이 김 씨와 서유 사이의 일을 어떻게 알게 됐는지 한번 알아봐.”그가 김 씨 신분으로 서유와 만난 건 단 2번으로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오직 둘만 알고 있을 뿐 제삼자가 알 리가 없었다.줄곧 옆에 있던 택이와 소수빈조차 그가 김 씨 신분으로 서유를 만나러 간 줄 몰랐으니까.게다가 그 2번 모두 3년 전 일로
서유의 시선이 다시 한번 맞은편 방으로 향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승하는 우연치고는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났다.게다가 지독한 결벽증인 그가 집을 놔두고 굳이 호텔에 투숙한다는 것 또한 이상했다.그때 심이준이 그녀의 휴대폰을 힐끗 바라보고 큰소리로 외쳤다.“뭐야, 오늘 안 온대요?!”다시 비상계단으로 가 진을 칠 예정이던 경찰들은 그 소리에 우뚝 멈춰 섰다.“그게 무슨 말입니까?”서유는 정신이 번쩍 들어 다급하게 설명했다.“정말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이 남자가 우리의 움직임을 알아챈 것 같아요. 방금 시간과 장소를 바꾸자고 연락이 왔네요.”그녀는 연신 사과하며 허리를 숙였다.“정말 죄송합니다. 시간만 뺏었네요.”경찰들은 허탕에 조금 허무했지만, 신고자를 탓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무슨 일 있으면 다시 연락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서유와 심이준은 그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호텔 앞까지 배웅해준 뒤 두 사람도 지하 주차장에 세워진 차에 올라탔다.심이준은 시동을 걸면서 서유에게 물었다.“그 김 씨라는 남자 생각보다 더 교활한 놈인 것 같은데 내일 그 장소로 갈 거예요?”경찰들까지 대동해도 잡지 못한 상대에 서유도 자신감이 떨어졌다.“나이트 레일은 그 인간 영역이라 아마 가게 되면 이번에는 정말 돌아오지 못할지도 몰라요.”심이준은 차를 몰며 힐끗 조수석을 보고는 입을 열었다.“오늘은 경찰들을 허탕 치게 했으니 내일 또다시 부르는 것도 좀 그렇겠네요. 하지만 서유 씨가 정말 잡고 싶은 거면 내일 내가 깡패 몇 명 불러서 같이 가줄게요.”서유는 그의 마음에 감동해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고마워요.”심이준은 핸들을 꽉 잡은 오른손을 풀고 그녀를 향해 검지를 흔들었다.“오해하지 말아요. 난 그냥 범인을 내 손으로 잡는 것에 흥미가 생겼을 뿐이니까.”“...”‘그럼 그렇지. 감동은 무슨.’한편, 이승하는 복도에서 진을 치던 사람들이 다 떠났다는 보고를 받은 뒤 서둘러 방에서 나왔다.엘리베이터를 타고 서유를 찾아가려고 할 때 택이가
폐공장 입구 앞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자 택이가 그에게 가면을 건넸다.“대표님, 저 안에 있는 사칭범은 김 씨라는 존재를 모르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의 지시로 김 씨 모습을 하고 서유 씨를 다치게 한 것 같아요.”상대가 김 씨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S 조직에 관한 것도 아직 모를 것이고 그러면 이승하는 아직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좋다.이승하는 가면을 쓰고 택이가 목 근처에 청룡 문신을 다 붙여주길 기다린 다음 검은색 장갑을 꼈다. 장갑을 끼는 건 오른손에 상처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악인들을 처단하는 것에 큰 지장은 없었다.이승하는 김 씨로 변장한 다음 어느새 뒤로 다가온 한 무리의 가면을 쓴 사람들과 폐공장 안으로 들어갔다.기둥에 묶여있던 남자가 인기척 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거기에는 한 무리의 가면을 쓴 사람들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오고 있었다.그중 제일 중심에 있는 남자는 190은 넘어 보였고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내뿜고 있어 서 있는 것 만으로도 위압감이 들었다.쭉 뻗은 기럭지에 머리카락 한 올도 용납하지 않고 전부 위로 올린 남자는 무척이나 차가운 눈을 하고 있었다. 그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건 오로지 살기밖에 없었다.기둥에 묶여 있던 남자는 금색 가면을 보는 순간 그가 누군지 알아보고 몸을 덜덜 떨었다.그의 옷은 이미 전부 벗겨진 상태로 입안에는 천까지 있어 빌고 싶어도 말을 할 수가 없었다.이승하는 이쪽으로 다가와 마치 죽은 사람 보듯 남자를 바라보았다. 얼굴 생김새는 완전히 달랐지만 체격은 확실히 비슷해 언뜻 보면 김 씨 같기도 했다.하지만 이 세상에서 김 씨는 오직 한 사람뿐이다.이승하는 뒤를 향해 손짓하며 남자의 입에 있는 천을 꺼내주라고 지시했다.“살려주세요.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 저는 그저 돈을 받고 지시에 따랐을 뿐입니다.”남자는 입이 자유로워지자마자 울며불며 살려달라고 외쳤다.“돈을 보낸 사람이 누군지도 모릅니다. 그쪽에서 저한테 옷과 가면 그리고 칼을 보내줬습니다. 그리고 선금을 보내주고 일을 잘
뺨을 한 대 맞은 남자는 고통을 꾹 참고 소리를 지르지 못했다. 그러고는 눈치를 보며 하나부터 열까지 다 얘기했다.“저는 그냥... 그 여자 옷을 찢고 두 손과 두 발을 잡은 뒤에... 몸 위에도 올라탔어요... 하지만 절대 손은 대지 않았어요. 어디 만지거나 이런 적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살려주세요! 사실 전 노모와 아이들까지 있고...”진부한 대사에 택이가 또다시 뺨을 내리쳤다.“시끄러우니까 목소리 낮춰.”택이는 이토록 시끄러운 범죄자는 또 처음이었다. 이승하가 곁에 없었다면 진작에 입을 틀어막아 숨소리도 내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이승하는 수중의 칼을 천천히 아래로 이동했다.“그 여자 어디를 찔렀지?”남자는 무서움에 벌벌 떨며 빠르게 실토했다.“팔이요. 그런데 그냥 칼로 살짝 스쳤을 뿐이에요.”그가 받은 지시는 여자를 겁간하는 것이지 다치게 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큰 상처는 내지 않았다.남자는 겁간에 성공도 못 했고 돈도 받았으며 지금은 복수까지 당하고 있다. 이렇게 무서운 사람들이 찾아올 줄 알았다면 그딴 돈 안 받아도 되니 진작에 무시했을 것이다.이승하는 원하는 대답을 얻은 뒤 칼을 서서히 남자의 몸에서 치웠다.남자가 이대로 사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려던 찰나 이승하가 칼을 고쳐 잡더니 남자의 어깨를 향해 힘껏 찔렀다.그 칼은 무척이나 작았지만 그 어떤 칼보다 더 날카로웠고 마치 도축할 때 쓰는 칼처럼 살을 한 번에 파고들었다.남자는 칼이 살을 뚫고 뼈에까지 닿자 아파서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방금 가면을 쓴 남자들의 고문이 10에서 8 정도였다면 이 일격은 거의 10을 채울 정도였다.이승하는 이대로 남자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그는 남자가 숨을 고르기도 전에 방금 그 칼로 한 번 또 한 번 연속으로 내리 찔렀다.그리고 빠르고 정확하게 다른 쪽 팔도 찔렀다. 어느 한번은 칼이 반대편 살을 뚫고 나올 정도였다.“아악!!”남자는 비명을 몇 번 지르더니 이내 눈이 뒤집히고 그대로 기절해버렸다.택
택이는 2시간도 채 안 돼 자료를 한가득 안아 들고 나이트 레일 제일 위층 로열 스위트룸으로 들어왔다.이승하는 창문 앞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꼰 채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택이는 그의 앞 탁자에 자료를 내려놓으며 말했다.“대표님, 그 남자에게 지시한 사람은 연씨 집안 아가씨 연지유 씨입니다.”이승하는 핏줄이 가득한 눈을 뜨더니 자료를 힐끗 보고는 다시 택이를 바라보았다.“3년 전, 대표님 분부대로 달마다 사람을 보내 곤란하게 만들었더니 그 일로 앙심을 품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김 씨 신분으로 서유 씨에게 복수한 것 같고요.”이승하는 눈썹을 찌푸렸다.“내 정체는 어떻게 알고?”“대표님께서 김 씨라는 건 모르는 것 같습니다.”이승하가 계속 얘기해보라며 눈짓했다.“기억나실지 모르겠지만 2년 전 서유 씨 기일 날 대표님께서 술에 취해 저희를 데리고 연지유 씨에게 복수하러 가셨잖습니까. 그때 가면 쓴 대표님을 보고 저희 보스라는 걸 단번에 파악한 것 같습니다. 그 뒤로 김 씨 특징에 맞춰 체격이 비슷한 사람을 데려와 서유 씨를 해친 것 같고요. 목적은 아마 두 가지일 겁니다. 하나는 김 씨를 사칭해 서유 씨를 해치게 하면 대표님은 가장 소중한 사람을 잃게 되고 둘째는 사실을 알게 된 대표님께서 김 씨를 찾아 죽이려고 할 테니 연지유 씨는 손대지 않고 코 푼 격이겠죠. 계획은 언뜻 완벽해 보이지만 유일한 실책이 바로 김 씨가 대표님인 걸 몰랐다는 거죠.”택이의 말이 끝나자 나른하게 앉아 있던 이승하의 얼굴에 살기가 피어올랐다.연지유를 여태껏 살려둔 건 죽은 형님이 좋아했던 여자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고작 그딴 여자의 편의를 봐주려고 하마터면 사랑하는 여자에게 지울 수 없는 고통을 줄 뻔했다!“지금 당장 연지유 찾아서 가둬놔.”8시까지 이제 고작 1시간밖에 남지 않았기에 이승하는 일단 연지유를 가둬놓고 서유에게 모든 걸 다 해명한 뒤에 다시 처리할 예정이다.“네, 알겠습니다.”그 시각, 심이준은 서유와 함께 깡패들을 데리고 나이트 레일에 도
굳게 닫힌 문 너머로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한 걸음 한 걸음 문 가까이 다가오더니 갑자기 멈춰 섰다.서유는 상대방이 금방이라도 문을 열줄 알았지만, 예상외로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한번 노크하려고 손을 올리던 찰나 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누군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재빠르게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문밖에 있던 심이준은 그저 누군가의 손이 갑자기 서유를 홱 끌고 들어간 것밖에 보지 못했다. 그가 데리고 온 깡패들은 제 값어치도 하지 못하고 그녀를 이대로 적진으로 보내버리고 말았다.심이준의 입꼬리가 경련을 일으키며 위로 올라갔다.그때 어디선가 경호원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더니 그중 제일 건장한 체구의 남자가 큰소리로 외쳤다.“이놈들을 영업 방해도 싹 다 경찰서로 끌고 가!”깡패들은 경찰서라는 말에 어수선해지더니 무기를 버리고 헐레벌떡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들이 버린 무기들은 하나둘 심이준 발 쪽에 떨어졌다. 심이준은 도망갈 겨를도 없이 발을 부여잡으며 고통에 식은땀을 흘렸다.숨을 제대로 고르기도 전에 경호원이 다가와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형씨, 우리랑 같이 가줘야겠는데?”심이준은 네 명의 경호원 손에 몸이 들려진 채 엘리베이터에 올랐다.한편, 방안으로 끌려 들어간 서유는 놀라서 얼굴이 창백해졌다가 익숙한 향기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은은한 불빛과 활짝 열린 창문으로 쏟아진 햇빛 덕에 잘생긴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이승하는 한 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잡고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서유는 이승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눈동자에 어렸던 두려움이 사라지고 대신 깜짝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승하 씨, 왜 당신이...”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승하의 뒤로 누군가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들렸다.서유가 뒤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거기에는 무릎을 꿇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남자의 얼굴에는 금색 가면이 씌워져 있었고 목에는 청룡 문신이 있었다.그녀는 김 씨로 추정되는 남자
“내가 바로 김 씨야.”이승하는 그녀의 하얀 볼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었다. 그의 눈에서는 그녀를 향한 애정과 미련이 뚝뚝 흘러내렸다.서유는 눈앞에 있는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김 씨가 이 사람이지 않을까 하는 의심도 했었지만 막상 그의 입으로 들으니 놀라울 따름이었다...그녀는 한참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손에 들린 금색 가면을 그의 얼굴에 씌워주었다.이승하와 기억 속의 김 씨가 완벽하게 일치하는 순간 서유의 동공이 흔들렸다. 시선을 아래로 내려보니 그의 목에는 청룡문신이 있었다.“이건 그린 거야.”이승하는 그녀의 의문을 읽은 듯 대답해주었다.그러면 옷을 입는 스타일과 흐트러진 머리, 조금 걸걸한 목소리 그리고 풍기던 분위기까지 전부 일부러 바꾼 것일까?서유는 조금 받아들이기 힘든 듯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대체 왜... 가짜 신분까지 만들어서 나를 속이고 강제로 취하려고까지 했어요?”그녀의 추궁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그의 심장을 찔렀다. 그는 죄책감을 느꼈고 또 무서웠다.그녀를 잃을까 봐 무서워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녀를 와락 품에 끌어안았다.서유는 그의 품속에서 꼼짝할 수 없는 걸 느끼고는 그저 고개를 들어 이승하를 바라보았다.“내가 멍청하고 바보 같아서 일부러 데리고 논 거예요?”“아니야!”이승하는 그녀를 풀어주고 다급하게 해명하려고 했다.“그럼 뭔데요?”“그건...”“내가 만만하니까! 내가 당신 장난감처럼 보였어요?”마음속 깊은 곳에서 폭발한 분노에 서유는 지금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를 바라보는 눈에는 실망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이승하, 당신과 함께한 지 벌써 5년이에요. 그런데 당신은 나한테 상처만 주고 강제로 취하려고나 하고 또 속이고! 대체 날 뭐로 본 거예요?!”원망과 분노로 가득한 그녀의 눈에 눈물까지 고이자 이승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숨통이 조여진 것처럼 숨을 쉬는 것도 힘들었다.“서유야, 내 말 좀 들어 봐...”이승하가 그녀에게 한 발 더 다가가려고 하자
“말도 안 돼요.”서유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화가 가득한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당신은 가짜 신분으로 내 몸을 탐했어요. 난 줄곧 낯선 사람에게 침범당한 줄 알았다고요!”“내가 얼마나 답답하고 괴로웠는 줄 알아요? 얼마나 오랫동안 계속 내 머릿속을 맴돌았는지 아냐고요!”“그런데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일부러 날 속여요? 내 기분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거예요?”서유의 말은 이승하의 귓가에 떨어져 은침처럼 그의 고막을 뚫고 남자의 이성을 무너지게 했다.“서유야, 일부러 속이려던 건 아니었어. 네가 돌아온 후에 우리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서 어쩔 수 없었어.”“어떻게 내 잘못을 만회해야 할지 생각하느라 김씨 신분은 완전히 뒷전으로 놓고 있었어.”그는 말을 마치고 서유를 다시 품에 와락 껴안았다.“미안해. 모두 내 잘못이야. 너무 이기적이라서 네 기분을 고려하지 못했어.”서유는 그를 밀어내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그의 힘에 못 이겨 작은 몸은 떨리고 있었다.이승하는 뼈마디가 뚜렷한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서유야, 이것도 내가 당시 저지른 잘못이야. 날 욕하고 원망해도 상관없는데 네 몸을 생각해서라도 절대 화내지 마. 응?”그는 부드럽게 여자를 달랬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당신이 날 놓아주는 게 진짜 날 위하는 거예요.”이승하는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잠긴 목소리에는 슬픔이 깃들었다.“그건 절대 안 돼, 서유야. 애초에 널 놓을 수 있었다면 내가 이렇게 고통스럽게 살지도 않았겠지.”그 말을 들은 서유는 그의 품에서 고개를 들어 자신을 꼭 껴안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그렇게 고통스러우면서 왜 또 날 찾아온 거예요?”영원히 만나지 않으면 시간이 모든 것을 잊게 만들고 마음의 상처도 치유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서로를 괴롭힐 필요가 있을까?이승하는 몸이 뻣뻣해지고 피곤한 눈 밑에 온통 핏줄이 뒤덮였고 마음은 텅 빈 것 같았다.“서유야, 나에 대한 마음이 조금도 없는 거야?”여전히 분노에 휩싸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