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도착한 후, 이승하는 링거를 뽑아 던지고 황급히 비행기에서 내렸다.그는 제대로 걷지도 못했고 억지로 몸을 지탱하며 비틀거렸다.택이는 그런 그에게 달려가 황급히 부축해주며 공항에서 나왔다.이승하가 귀국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던 소수빈은 이미 차를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승하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얼른 다가갔다.“대표님.”이승하는 옆에 있는 택이를 향해 말했다.“넌 이만 가.”택이는 김씨가 움직일 때만 나타나는 사람인지라 예의를 갖춰 알겠다고 대답한 후 자리를 벗어났다.소수빈은 창백한 얼굴로 야윈 모습의 이승하를 보고는 그가 안쓰러워졌다.불과 4개월 전에만 해도 이런 모습은 아니었는데 지금은 봐줄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늘 고고하고 차가운 남자를 이렇게 만든 건 서유라는 여자밖에 없을 것이다.‘워싱턴에서 마주치고 또 갈등이 생겨 지금 이런 상태가 되셨겠지.’소수빈은 이미 모든 걸 파악하고 있었다.그는 별다른 말 없이 이승하를 부축해 차에 태웠다.“대표님, 일단 댁으로 모시겠습니다. 서희한테는 지금 당장 오라고 할게요.”이승하는 핏줄 가득한 눈으로 소수빈을 바라보았다.“정가혜 씨 별장으로 가.”소수빈은 일단 휴식부터 하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이승하의 눈에 어린 조급함을 보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시동을 걸었다.그들의 차가 움직이자 뒤이어 세워진 십몇대의 차 또한 시동을 걸고 줄줄이 따라나섰다.마당에 자란 잡초를 정리하던 정가혜는 고급 차들이 줄지어 별장 앞에 멈춰서는 걸 보고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그러다 차에서 내린 남자의 얼굴을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이승하는 몇 걸음 정도 걷다가 이내 힘이 다 빠진 듯 결국 소수빈의 부축으로 문 앞까지 도달했다.그리고 초인종을 누르려는데 별장 문이 갑자기 열리고 정가혜가 걸어 나왔다.그녀는 이승하의 혈색에 잠깐 흠칫하다가 이내 표정을 바꾸고 물었다.“서유 보러 오셨나요?”이승하가 고개를 끄덕였다.“안에 있습니까? 만나고 싶은데.”그는
이승하는 주먹을 꽉 쥐더니 이내 고고한 머리를 숙이고 정가혜에게 애원했다.“서유한테 해야 할 말이 있어서 그럽니다. 제발 어디 있는지 알려주세요.”정가혜는 그 이승하가 머리까지 숙이고 애원하자 잠시 머뭇거리더니 한숨을 내쉬었다.“저는 정말 몰라요. 하지만 며칠 지나면 돌아온다는 것만은 확실해요. 아니면 서유가 돌아오면 제가 다시 연락 드릴 테니까 일단 먼저 돌아가시는 게...”하지만 이승하는 단 1초라도 더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서유한테 지금 연락해 주시겠어요?”이곳으로 오는 길 이미 몇십 번은 더 전화를 걸어봤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그의 번호는 전부 차단한 것 같고 낯선 번호로 걸면 전화를 받지 않으니 지금은 정가혜에게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다.정가혜는 간절한 얼굴의 이승하에 결국 휴대폰을 꺼내 서유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새 번호와 옛 번호에 전부 걸어봐도 여전히 연락되지 않았다.이에 포기하려는데 이승하가 계속 걸어봐 달라고 하는 바람에 결국 그 뒤로 몇 번이나 더 전화를 걸었다.서유는 지금 가흥시 개발 지역 공사장에서 안전모자를 쓴 채 허리를 숙이고 수치를 측정하고 있어 휴대폰 진동 소리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모든 수치를 다 기록하고 나서야 안전지대로 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응, 가혜야, 왜 전화했어?”정가혜가 답을 하기도 전에 이승하가 휴대폰을 뺏어갔다.“나야, 너 지금 어디야?”낮게 깔린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리자 서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그와 말도 섞기 싫다는 듯 휴대폰을 꺼버렸다.조급해진 이승하가 다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돌아오는 건 기계음뿐이었다.그는 숨통이 조여오는 걸 느끼며 휴대폰을 쥐던 손에 힘을 주었다.“아무래도 서유가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은데 이만 돌아가는 게 어때요...?”이승하는 손아귀 힘을 풀고 그녀에게 휴대폰을 돌려주며 감사 인사를 하더니 도로 차에 올라탔다.소수빈은 그 뒤를 따라 황급히 운전석에 앉았다. 그렇게 시동을 막
이씨 저택.주서희는 진찰을 마친 후 미간을 찌푸리며 당부했다.“대표님은 이미 여러 번 위에 피가 났고 지금은 며칠간 아무것도 먹지 않은 상태에 피로까지 누적돼 몸 상태가 최악이 됐어요. 이대로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정말 큰일 납니다!”이승하는 그녀의 말을 그저 한 귀로 흘려보내고는 서재의 소파에 앉아 창밖만 멍하니 바라보았다.반짝거리고 에너지 넘치던 그의 눈은 지금 공허하기 그지없었고 마치 빛바랜 진주 같았다.주서희는 그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그에게 링거를 놔준 후 다시 한번 얘기했다.“대표님, 서유 씨를 되찾아 오려면 일단 대표님부터 건강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제발 몸 좀 소중히 여기세요.”그녀는 이승하가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없자 속으로 혀를 끌끌 차더니 의료 상자를 들고 서재에서 나갔다.이승하는 그녀가 떠난 후 금고로 시선을 돌려 한참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이내 몸을 일으켰다.그는 링거를 꽂은 채 금고 앞으로 가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에 든 개인 휴대폰을 꺼냈다.몇 분간 충전한 뒤 전원을 켜보자 서유가 보낸 메시지들이 한꺼번에 쏟아졌다.[내가 살아있는 걸 이미 다 아는 것 같으니까 한번 만나는 게 어때요?][이봐요, 전에는 빨리 회신하면서 지금은 왜 아무것도 보내지 않는 거죠? 뭔가 찔리는 거라도 있어요?][나한테 메시지 보낼 배짱은 있으면서 만나러 올 배짱은 없나 봐요?][전화도 안 받고 대체 뭐 하자는 거죠?][한번 만나죠.]그 뒤로 몇 개의 메시지 모두 만나자는 내용이었다.이승하는 그 메시지들을 보며 그저 멍하니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다 메시지가 보내진 시간을 보자 그건 모두 한 달 전 것들이었다.서유는 김초희라는 신분으로 귀국한 뒤 한 번도 김 씨에게 메시지를 보낸 적이 없고 차단까지 했었는데 지금은 왜 갑자기 차단을 풀고 만나자고까지 하는 거지?이승하는 그녀의 목적을 알아내려 다시 한번 메시지를 읽어봤지만, 여전히 의도를 알아채지 못했다.하지만 그게 무슨 이유에서든지 적어도 서유는 김 씨를 만나
이승하는 김 씨의 메시지에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이미 몇 개월이나 그녀의 메시지에 답장을 하지 않았던 그였던 터라 이대로 연락이 끊긴 줄로만 알았는데 예상치 못한 오늘 메시지가 도착했다.서유는 조금 긴장한 듯 심이준을 향해 말했다.“김 씨 기억나요? 그 사람이 나한테 만나자는 메시지를 보내왔어요.”심이준은 그 메시지를 보더니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얘기했다.“만나요. 내가 대신 죽여줄 테니까!”서유는 지난번 병원 지하 주차장에서 심이준에게 밀리던 그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메시지를 보내려다가 또다시 심이준을 바라보았다.“언제가 좋을까요? 장소는요? 불러내오면 어떻게 잡을 건데요?”계획도 없이 어설프게 상대를 불러냈다가는 오히려 이쪽이 당할 수도 있었다.심지우는 그녀의 휴대폰을 빼앗아 들고 자신이 직접 메시지를 적었다.[내일 밤 10시, 해운 호텔 2203로 오세요.]서유는 그 메시지를 보더니 순식간에 미간을 찌푸렸다.“왜 호텔로 불러요?!”“그 놈의 목적은 당신을 어떻게 해보려는 거잖아요. 그럼 호텔로 부르는 게 가장 효과적이죠.”서유는 곰곰이 생각했다. 확실히 김 씨와는 3번 정도 만났지만, 매번 그는 그녀와 잠자리를 갖고 싶어 했다. 게다가 한 달 전에는 그녀와 한번 자보려고 그녀의 팔에 칼까지 들이밀었다.서유는 그 생각에 또다시 분노로 몸이 떨렸고 주먹을 꽉 쥐었다.“이번에는 반드시 잡을 거예요!”심이준은 그녀와 달리 꽤 평온한 표정이었다.“어떻게 답장하나 한번 보죠.”이승하는 서유가 정말 답장을 보내올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게다가 더 놀랐던 건 그녀가 호텔에서 만나자는 내용을 보내왔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제대로 본 것이 맞나 몇 번이나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서유가 왜 굳이 장소를 호텔로 정했지?의문을 품은 그였지만 그럼에도 손은 멋대로 [그러죠.]라고 답장을 보냈다.지금은 서유를 만날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심이준은 이승하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하더니 피식 웃었다.“봤죠? 호텔에서 만나자
이승하는 그녀의 질문에 입술을 달싹였다.이대로 진실을 얘기해버리고 싶었지만, 경찰들과 직원들이 가득 있는 이 상황에서 정체를 드러낼 수는 없었다.심이준은 상대가 이승하인 것을 보고는 서유보다 더 놀란 표정을 지었다.“이 대표님, 혹시나 해서 묻는 겁니다만 혹시 정체를 숨기고 여자를 겁간하는 취미를 가지고 있으신 건 아니죠?”그 말에 이승하의 싸늘한 눈빛이 그에게로 향했다.이에 심이준은 몸을 움찔 떨더니 자기도 모르게 손을 덜덜 떨었다.이승하는 그에게 머물렀던 시선을 천천히 서유에게로 돌렸다. 그녀의 올곧은 시선이 마주해오자 그는 심장이 답답해 나는 느낌이었다.지금이라도 당장 그녀에게 모든 걸 밝히고 싶었지만 문득 전에 김 씨의 모습으로 그녀를 어떻게 대했는지 떠올라버렸다.만약 자신이 바로 김 씨라는 걸 그녀가 알아버린다면 아마 더욱더 원망하고 분노할 것이다.그녀의 눈에 김 씨는 용서할 수 없는 범죄자일 뿐일 테니까...이승하는 그 자리에서 잠깐 고민하더니 이내 담담한 목소리로 반문했다.“김 씨라니?”서유는 그 말에 놀라운 기색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방금 이승하가 2203방 문 앞에 멈춰 섰을 때는 정말 그가 김 씨가 아닌가 의심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한 달 전 이승하는 줄곧 NASA에 있었기에 그녀를 해친 김 씨일 수가 없었다.하지만 한 가지 의문인 게 이승하는 왜 갑자기 이 호텔에 나타나 그것도 2203방 문을 두드린 걸까?그녀의 의문이 점점 더 커질 때 엘리베이터가 열리더니 택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이마에 땀이 가득 맺힌 것 치고는 담담한 얼굴로 이승하에게 다가왔다.“대표님, 제가 예약한 방은 그쪽이 아니라 이쪽입니다.”택이는 방 키를 꺼내 들며 반대편 방을 가리켰다.강세은의 당부로 이승하에게 사람을 붙였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지금쯤 조직의 비밀이 새어나갈 뻔했다.택이의 목소리에 이승하는 서유에게 향했던 시선을 애써 돌리고는 싸늘한 눈빛으로 주위 사람들을 한번 훑었다.그를 에워싼 경찰과 직원들은 그
한편, 맞은편 방안으로 이승하를 데리고 들어간 택이는 가장 먼저 방안 곳곳을 한번 훑어보았다.다행히 투숙객은 현재 자리를 비웠고 이에 택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는 이승하를 바라보며 방 키를 내보이더니 씩 하고 웃었다.“대표님, 저 때문에 위기를 넘기셨네요.”이승하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피식 웃다가 뭔가 떠오른 듯 다시 표정을 굳히고 물었다.“나한테 사람을 붙였어?”그의 손에 갑자기 힘이 들어가더니 택이의 어깨가 무겁게 짓눌렸다.택이는 몸이 굳어버리고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강세은 씨가 대표님께서 정체를 드러내실까 봐 저한테 꼭 따라다니라고...”이승하의 입꼬리가 무섭게 위로 올라더니 싸늘한 한마디를 던졌다.“네가 지금 누구와 일하는지 까먹지 마.”그 말에 택이는 뜨끔하며 이내 예의를 갖춰 얘기했다.“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제 목숨은 대표님께서 주신 거라 저는 당연히 대표님 말만 들어야죠. 다만 정체가 드러나게 되면 가장 먼저 대표님께서 위험해지실 것 같아 이번만큼은 강세은 씨 말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믿어주세요. 저는 오로지 대표님께만 충성합니다!”이승하는 택이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에 더 질책하지 않고 그의 어깨에 올린 손을 거두어들였다.그러고는 소파에 앉아 서유가 왜 경찰을 대동해 그를 잡으려고 했는지에 대해 고민했다. 바로 그때 그의 개인 휴대폰이 울렸다.그는 서유가 보내온 메시지를 보고 잠깐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한참을 고민한 뒤 답장을 보냈다.[오늘 저녁은 안 될 것 같네요. 내일 아침 8시, 나이트 레일에서 다시 만나는 거로 하죠.]그러고는 택이에게 지시를 내렸다.“심이준이 김 씨와 서유 사이의 일을 어떻게 알게 됐는지 한번 알아봐.”그가 김 씨 신분으로 서유와 만난 건 단 2번으로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오직 둘만 알고 있을 뿐 제삼자가 알 리가 없었다.줄곧 옆에 있던 택이와 소수빈조차 그가 김 씨 신분으로 서유를 만나러 간 줄 몰랐으니까.게다가 그 2번 모두 3년 전 일로
서유의 시선이 다시 한번 맞은편 방으로 향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승하는 우연치고는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났다.게다가 지독한 결벽증인 그가 집을 놔두고 굳이 호텔에 투숙한다는 것 또한 이상했다.그때 심이준이 그녀의 휴대폰을 힐끗 바라보고 큰소리로 외쳤다.“뭐야, 오늘 안 온대요?!”다시 비상계단으로 가 진을 칠 예정이던 경찰들은 그 소리에 우뚝 멈춰 섰다.“그게 무슨 말입니까?”서유는 정신이 번쩍 들어 다급하게 설명했다.“정말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이 남자가 우리의 움직임을 알아챈 것 같아요. 방금 시간과 장소를 바꾸자고 연락이 왔네요.”그녀는 연신 사과하며 허리를 숙였다.“정말 죄송합니다. 시간만 뺏었네요.”경찰들은 허탕에 조금 허무했지만, 신고자를 탓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무슨 일 있으면 다시 연락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서유와 심이준은 그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호텔 앞까지 배웅해준 뒤 두 사람도 지하 주차장에 세워진 차에 올라탔다.심이준은 시동을 걸면서 서유에게 물었다.“그 김 씨라는 남자 생각보다 더 교활한 놈인 것 같은데 내일 그 장소로 갈 거예요?”경찰들까지 대동해도 잡지 못한 상대에 서유도 자신감이 떨어졌다.“나이트 레일은 그 인간 영역이라 아마 가게 되면 이번에는 정말 돌아오지 못할지도 몰라요.”심이준은 차를 몰며 힐끗 조수석을 보고는 입을 열었다.“오늘은 경찰들을 허탕 치게 했으니 내일 또다시 부르는 것도 좀 그렇겠네요. 하지만 서유 씨가 정말 잡고 싶은 거면 내일 내가 깡패 몇 명 불러서 같이 가줄게요.”서유는 그의 마음에 감동해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고마워요.”심이준은 핸들을 꽉 잡은 오른손을 풀고 그녀를 향해 검지를 흔들었다.“오해하지 말아요. 난 그냥 범인을 내 손으로 잡는 것에 흥미가 생겼을 뿐이니까.”“...”‘그럼 그렇지. 감동은 무슨.’한편, 이승하는 복도에서 진을 치던 사람들이 다 떠났다는 보고를 받은 뒤 서둘러 방에서 나왔다.엘리베이터를 타고 서유를 찾아가려고 할 때 택이가
폐공장 입구 앞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자 택이가 그에게 가면을 건넸다.“대표님, 저 안에 있는 사칭범은 김 씨라는 존재를 모르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의 지시로 김 씨 모습을 하고 서유 씨를 다치게 한 것 같아요.”상대가 김 씨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S 조직에 관한 것도 아직 모를 것이고 그러면 이승하는 아직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좋다.이승하는 가면을 쓰고 택이가 목 근처에 청룡 문신을 다 붙여주길 기다린 다음 검은색 장갑을 꼈다. 장갑을 끼는 건 오른손에 상처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악인들을 처단하는 것에 큰 지장은 없었다.이승하는 김 씨로 변장한 다음 어느새 뒤로 다가온 한 무리의 가면을 쓴 사람들과 폐공장 안으로 들어갔다.기둥에 묶여있던 남자가 인기척 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거기에는 한 무리의 가면을 쓴 사람들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오고 있었다.그중 제일 중심에 있는 남자는 190은 넘어 보였고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내뿜고 있어 서 있는 것 만으로도 위압감이 들었다.쭉 뻗은 기럭지에 머리카락 한 올도 용납하지 않고 전부 위로 올린 남자는 무척이나 차가운 눈을 하고 있었다. 그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건 오로지 살기밖에 없었다.기둥에 묶여 있던 남자는 금색 가면을 보는 순간 그가 누군지 알아보고 몸을 덜덜 떨었다.그의 옷은 이미 전부 벗겨진 상태로 입안에는 천까지 있어 빌고 싶어도 말을 할 수가 없었다.이승하는 이쪽으로 다가와 마치 죽은 사람 보듯 남자를 바라보았다. 얼굴 생김새는 완전히 달랐지만 체격은 확실히 비슷해 언뜻 보면 김 씨 같기도 했다.하지만 이 세상에서 김 씨는 오직 한 사람뿐이다.이승하는 뒤를 향해 손짓하며 남자의 입에 있는 천을 꺼내주라고 지시했다.“살려주세요.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 저는 그저 돈을 받고 지시에 따랐을 뿐입니다.”남자는 입이 자유로워지자마자 울며불며 살려달라고 외쳤다.“돈을 보낸 사람이 누군지도 모릅니다. 그쪽에서 저한테 옷과 가면 그리고 칼을 보내줬습니다. 그리고 선금을 보내주고 일을 잘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