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는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녀를 쉽게 믿었던 건 서유가 그 때문에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다.예전에 그는 그녀한테 엄청난 상처를 줬었다. 상처투성이인 마음이 아직 회복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한테 믿음이 있겠는가?그는 성이나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차가운 얼굴을 한 채 작은 칼을 움켜쥐고 그녀의 다른 손을 베려고 했다. 자신을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이승하를 보고 그녀는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너 때문이야. 네가 그 여자한테 차갑게 대해서 그 여자가 너한테 실망한 거라고. 나랑은 아무 상관이 없어.”그녀의 말에 그는 안색이 굳어졌다.‘내가 언제 서유를 차갑게 대했던가?’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고는 칼을 들어 그녀의 손끝을 힘껏 찔렀다.“똑바로 말해.”그녀는 이게 자신이 목숨을 부지하는 무기라는 생각에 쉽게 말하려 하지 않았다. “날 놓아주겠다고 약속하면 말해줄게.”이승하는 약속하면 반드시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입만 뗀다면 그녀는 목숨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이승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 때, 문밖에서 자신감 넘치는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알려줄 필요 없어요, 내가 다 알아냈으니까.”빨간 롱드레스에 하이힐을 신은 여자가 팔짱을 낀 채 여자 경호원을 데리고 당당하게 걸어 들어왔다. 그녀는 손에 넣은 CCTV를 택이에게 던져주고 이승하에게 다가가 손을 흔들었다.“이 대표님, 먼저 진실부터 확인해요. 이 여자 혼 좀 내게 나한테 시간 내줘요.”그 말에 성이나는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강세은을 올려다보았다.“강세은 씨, 당신한테 미움을 산 적도 없는데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날 혼내는 거예요?”강세은은 성이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변가람이 건네준 하얀 장갑을 받아 천천히 장갑을 꼈다. 그러더니 성이나의 멱살을 움켜쥐고는 그녀를 바닥에서 들어 올려 그녀의 뺨을 세차게 내리쳤다. “왜 때리냐고요?”“당신이 고의로 만든 사진 때문에 내 명성이 바닥까지 떨어졌으니 혼 내야죠?”“당신이
속으로 혀를 차던 강세은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하지만 서유 씨도 용감한 것 같더라고요. 잠깐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오려고 했어요. 아마도 당신한테 직접 물어보고 싶었던 것 같은데 경호원들이 그녀를 막아섰죠.”“이건 내 탓이에요. 누군가 엿들을까 봐 레스토랑 전체를 빌렸었거든요. 그리고 조직의 사람들이 언제든지 날 찾아올까 봐 경호원들에게 초대장을 확인하고 안으로 들여보내라고 했었어요. 알잖아요. 초대장은 조직의 암호...”CCTV 화면은 이내 서유가 유리창을 두드리는 걸 성이나가 제지하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를 보고 강세은은 또다시 성이나의 뺨을 내리쳤다.“그 레스토랑에 LOW-E 유리가 설치되어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당신은 서유 씨한테 말해주기는커녕 그녀를 막았어요. 정말 괘씸하군요.”성이나는 반격할 힘도 없었고 손가락과 손목 그리고 뺨에서 전해진 고통으로 인해 바닥에 엎드려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뺨을 때리고 난 뒤, 강세은은 고개를 돌려 온몸을 떨고 있는 이승하를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미안해요. 레스토랑을 나올 때 다른 사람과 연락할 수 있도록 무선 이어폰을 착용해 달라고 요청했었어요. 그래서 서유 씨가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쫓아온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죠. 게다가 그날 밤 빗소리가 너무 커서 본사와 연락하고 있었던 우리는 전혀 그 소리를 듣지 못했어요.”말 한마디 없이 CCTV를 주시하고 있던 이승하는 서유가 그의 뒤를 따라오다가 그들의 발걸음을 따라잡지 못해 넘어져 더러운 물구덩이에 빠진 것을 보고 가슴이 아파 눈시울을 붉혔다.서유는 레스토랑에 갔을 뿐만 아니라 그를 따라잡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였다. 태블릿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은 벌벌 떨렸고 그가 절망적인 표정을 지으며 화면에 있는 여인의 모습을 어루만졌다. 그는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호텔로 향했다.서유는 크게 상처를 받았어도 여전히 그를 찾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문득 그녀가 전에 서재에 가서 그림 도구를 찾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당시 서유는 이미 잃어버린 물건들을 발견한 것은 아닌지? 그저 못 본 척한 건 아닌지? 그와 정말로 함께하고 싶어서 그랬던 건 아닌지...그가 또다시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 서유가 잃어버린 물건들을 빌미로 그와의 관계를 끊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고 장난이라는 그녀의 말에 화가 나서 이성을 잃고 그녀를 강요하고 가둬두고 앞뒤 가리지 않고 그녀와 아이를 낳으려고 했다. 가뜩이나 상처가 깊은 서유가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얼마나 실망스러웠으면 그와 말한마디조차 하고 싶어 하지 않았겠는가?정말 어리석었다. 그녀와 관련된 일이라면 머리가 돌아가지 않고 감정도 이성도 제대로 통제가 안 됐다. 이승하는 손을 떨며 태블릿을 버린 뒤, 한 손으로 눈을 가린 채 고개를 숙이고 미친 듯이 후회했다. 그와 그녀 사이의 문제는 단순히 오해뿐만이 아니었다. 서유의 마음은 한 번 또 한 번 상처를 받게 되었고 다시 회복되기가 어려웠다. 한편, 옆에 있던 강세은은 그런 그의 모습에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이 대표님, 제가 귀국해서 서유 씨한테 잘 설명할게요. 다만 조직이나 신분에 대해 밝힐 수가 없어서 설득력이 부족할 거예요. 하지만 최대한 확실히 설명할게요.”비록 사랑에 목숨 거는 이승하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자신 때문에 두 사람이 헤어지게 된 것이니 그녀는 죄책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때, 바닥에 쓰러져있던 성이나는 강세은이 계속 조직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고 이내 그들이 숨기고 있는 신분에 대해 눈치챘다. 두 사람의 약점이라도 잡은 듯 그녀가 찢어진 손가락을 들어 두 사람을 가리키며 그들을 위협했다. “아버지한테서 들었던 적이 있어. 국제적으로 ‘S’라는 조직이 있는데 그 배후에 두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네.”“이젠 내가 모든 걸 알게 되었으니 두 사람 이제 두고 봐. 반드시 두 사람의 가면을 벗겨 패가망신 당하게 할 거야.”그녀의 떠들썩한
이승하의 뜻은 자신이 알아서 할 테니 나서지 말라는 뜻이었다.차라리 이러는 것이 훨씬 더 나을지도 모른다. 남녀 사이의 문제는 당사자들이 직접 해결하는 것이 불필요한 오해도 줄어들거니와 진정성이 더 돋보일 테니까.하지만 강세은은 여전히 걱정됐다. 이승하가 행여나 해명을 위해 조직 일을 말하고 정체를 드러낼까 봐...몇 초간 고민하던 강세은은 이승하에게 당부했다.“대표님, 대표님께서 정체를 드러내시면 S 전체가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니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해명해주세요.”이승하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차갑게 바라보았다.“난 서유를 믿어.”이승하는 서유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얘기해 줄 생각이다. 그래야만 앞으로의 조직 활동에도 제약이 없게 되고 서유도 불필요한 오해를 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강세은은 그에게 지독한 팔불출이라고 한마디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하지만 결국은 아무 말 하지 않고 택이에게 슬쩍 눈치를 주더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병실을 나갔다.택이는 그녀의 눈짓을 받고 기절한 성이나 쪽을 한번 보더니 입을 열었다.“대표님, 저는 일단 성이나 씨를 데리고 나가겠습니다.”소파에 앉은 남자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이에 택이는 두 명의 경호원에게 성이나를 끌고 나갈 것을 명하고 자신은 그 틈을 타 코너를 돌아 병실 밖으로 나왔다.나와보니 강세은이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 그가 나오는 걸 기다리고 있었다.“대표님께서 정체를 드러낼 일 없게 옆에서 잘 지켜봐 주세요.”택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몰론 그렇게 할 겁니다만 제 말을 들으실지는 보장 못 하겠네요.”강세은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택이를 향해 손을 저었다.“이만 가보세요.”당부할 건 이미 다 했다. 이승하가 기어코 정체를 드러내겠다고 하면 이제는 서유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길 바라는 수밖에 없다.강세은은 변가람이 성이나 일을 처리한 걸 확인한 뒤 캐리어를 끌고 병원을 떠나 비행기 장으로 향했다.병실 안, 이승하는 소파에 앉아 한 손으로 이마를 주무르며
그 시각 한창 연구에 매진하던 이윤재는 전화벨 소리에 장갑을 벗더니 작업복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그러고는 발신자가 이승하라는 걸 보자마자 서둘러 밖으로 가 전화를 받았다.“형, 이제야 연락이 되면 어떡해요. 이연석 그놈이 지금 회사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다고요. 내가 진짜 그놈 때문에 요즘 아주 미치겠...”이윤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승하가 입을 열었다.“너 지금 당장 워싱턴으로 와야겠다. 나 대신 이쪽 업무를 맡아.”이윤재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고 잠시 말이 없다가 이내 심각해진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 있어요?”원래 NASA 쪽 적임자로 이윤재가 가장 먼저 거론되었지만 결국은 이승하가 맡았다. 그런데 지금 또 그 업무를 자신한테 준다고 하니 이건 큰일이 난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혹시 이연석 그놈이 JS 그룹을 팔아버리기라도 한 건가?잔뜩 진지한 얼굴로 설명을 기다리는 데 들려오는 건 간단한 명령이었다.“지금 당장 이쪽으로 와.”이승하는 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더니 택이를 바라보았다.“지금 바로 전용기 준비해.”그는 지금 한시라도 빨리 서유를 만나고 싶었다.택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도우미에게 짐을 싸라고 명령한 다음 NASA 쪽에도 연락을 넣었다.업무 휴대폰에는 지속해서 메시지가 날아들었고 이승하는 이에 눈썹을 찌푸리더니 아무 휴대폰이나 들어 쭉 훑었다.그러다 4개월 전 주서희가 보내온 메시지를 보더니 눈빛이 흔들렸다.서유를 돌봐주는 사람이 없다니? 그때 분명 송사월이 있는 걸 보고 이곳으로 온 건데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송사월이 돌봐주지 않았다는 건가?이승하는 의문을 품고 주서희에게 전화를 걸었다.주서희의 휴대폰이 울리기 몇 분 전.주서희는 꽃다발을 손에 든 채 눈앞에 있는 잘생긴 의사를 보며 예쁘게 웃었다.“윤 선생, 꽃다발 고마워. 이번 생일은 잊지 못할 거야.”윤주원은 그녀의 미소에 부끄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그럼... 다음에 데이트 신청해도 돼요?”그 말에 주서희의 손이 멈칫했다
사실 윤주원은 주서희와 의대 세미나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미 첫눈에 반해버린 상태였다. 그 뒤로 그녀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고 최근 의계에서 좋은 성적을 내 드디어 고백하게 된 것이었다.하지만 매번 그는 거절을 당했고 그 거절의 이유를 드디어 알게 되었다. 자궁을 들어낼 정도면 큰 사건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게 단순 사고가 아닌 남자와 얽혀있다는 것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하지만 그 모든 게 윤준원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가 좋아하는 건 주서희라는 여자일 뿐이니까.그러니 그녀가 어떤 과거를 가졌던지 그걸 포용하고 받아드릴 생각이다.주서희가 다시 한번 거절하려고 입을 연 그때, 갑자기 기다란 손이 다가와 그녀의 허리를 껴안았다.“윤 선생, 평소 아무거나 다 주워 먹는 스타일인가 봐? 내가 가지고 놀던 여자도 다 좋다 하고.”주서희는 그의 상스러운 말에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분노를 담아 소준섭을 밀쳤다.뒤로 밀쳐진 그의 얼굴에 잠깐 어둠이 드리워졌다가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손으로 주서희의 턱을 들었다.“왜, 윤 선생 앞에서 우리가 침대에서 어떤 짓을 했는지 얘기할까 봐 두려워?”주서희는 주먹을 꽉 쥔 채 경멸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지금 질투해요?”“하?”소준섭은 이에 코웃음을 쳤다.“먹다 버린 음식에 미련 두는 사람도 있나?”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윤주원이 그에게 주먹을 휘둘렀다.“그래도 한때는 의계에서 유명한 분이라 존경도 했었는데 이렇게 더러운 사람일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그 주먹이 어찌나 셌던지 소준섭의 얼굴은 옆으로 돌아갔고 입에서는 피까지 흘렀다.소준섭은 혀로 상처를 짓누른 후 바로 곧바로 윤주원의 멱살을 잡고 벽까지 끌고 가 있는 힘껏 주먹을 휘둘렀다.그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그렇게 몇 번을 윤주원의 잘생긴 얼굴에 주먹을 내다 꽂았다.이건 한 대 맞아서가 아니라 윤주원이 그의 여자를 건드렸기 때문이었다.주서희는 일방적으로 당하는 윤주원을 보더니 화가 머리끝까지
주서희는 머지않아 곧 느끼게 될 승리의 희열을 거두어들이고 그를 향해 기대의 미소를 지었다.“알겠어요. 기다릴게요.”소준섭은 그녀의 눈에 담긴 실망이 기대로 변하자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그는 주서희를 놓아주고 바닥에 있는 그녀를 안아 들더니 그 어느 때보다 더 힘껏 껴안았다.하지만 마음속 어딘가에서는 품 안에 있는 여자가 언젠가 자신을 헌신짝 버리듯 버리고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것만 같았다.소준섭은 만약 그런 때가 오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상상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그저 지금 품속에 있는 여자를 꼭 끌어안을 뿐...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맞아댄 윤주원은 멀어져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그저 주먹을 꽉 쥐었다.소준섭은 주서희를 안은 채 원장실로 데려와 그녀를 거칠게 벽으로 내몰더니 키스도 없이 몸을 가지려고 들었다.소준섭의 어깨에 매달려 그저 가만히 그의 것을 받아낼 뿐인 주서희의 눈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두 사람이 한창 서로를 탐하고 있을 때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주서희가 받으려고 하자 소준섭은 그러지 못하게 힘으로 밀어붙였고 몇 번을 더 만족하고 나서야 그녀를 놓아주었다.그는 두 다리에 힘이 풀린 주서희를 안아 들고 의자에 앉혀준 다음 옆에 있는 티슈를 뽑아 자신의 손을 닦았다.주서희는 떨리는 몸으로 휴대폰을 집어 들어 발신자가 이승하라는 것을 보더니 황급하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이제 막 전용기에 오른 이승하는 그녀의 콜 백에 통화버튼을 눌렀다.“대표님, 왜 이제야 연락이 되는 거예요!”전화기 너머의 앙칼진 목소리에 이승하는 미간을 찌푸렸다.“메시지 뭐야.”주서희는 휴대폰을 꽉 쥐면서 다급하게 말했다.“4개월 전, 대표님께서 병실을 나가자마자 송사월 씨가 서유 씨에게 이혼합의서를 내밀었어요. 그래서 대표님께 이 사실을 알리려고 연락을 드렸는데 휴대폰을 꺼놓으셨잖아요.”이승하의 몸이 몇 초간 굳었다가 힘겹게 되물었다.“두 사람이 이혼을... 했다고?”“네. 진작에 이혼했어
서울에 도착한 후, 이승하는 링거를 뽑아 던지고 황급히 비행기에서 내렸다.그는 제대로 걷지도 못했고 억지로 몸을 지탱하며 비틀거렸다.택이는 그런 그에게 달려가 황급히 부축해주며 공항에서 나왔다.이승하가 귀국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던 소수빈은 이미 차를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승하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얼른 다가갔다.“대표님.”이승하는 옆에 있는 택이를 향해 말했다.“넌 이만 가.”택이는 김씨가 움직일 때만 나타나는 사람인지라 예의를 갖춰 알겠다고 대답한 후 자리를 벗어났다.소수빈은 창백한 얼굴로 야윈 모습의 이승하를 보고는 그가 안쓰러워졌다.불과 4개월 전에만 해도 이런 모습은 아니었는데 지금은 봐줄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늘 고고하고 차가운 남자를 이렇게 만든 건 서유라는 여자밖에 없을 것이다.‘워싱턴에서 마주치고 또 갈등이 생겨 지금 이런 상태가 되셨겠지.’소수빈은 이미 모든 걸 파악하고 있었다.그는 별다른 말 없이 이승하를 부축해 차에 태웠다.“대표님, 일단 댁으로 모시겠습니다. 서희한테는 지금 당장 오라고 할게요.”이승하는 핏줄 가득한 눈으로 소수빈을 바라보았다.“정가혜 씨 별장으로 가.”소수빈은 일단 휴식부터 하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이승하의 눈에 어린 조급함을 보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시동을 걸었다.그들의 차가 움직이자 뒤이어 세워진 십몇대의 차 또한 시동을 걸고 줄줄이 따라나섰다.마당에 자란 잡초를 정리하던 정가혜는 고급 차들이 줄지어 별장 앞에 멈춰서는 걸 보고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그러다 차에서 내린 남자의 얼굴을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이승하는 몇 걸음 정도 걷다가 이내 힘이 다 빠진 듯 결국 소수빈의 부축으로 문 앞까지 도달했다.그리고 초인종을 누르려는데 별장 문이 갑자기 열리고 정가혜가 걸어 나왔다.그녀는 이승하의 혈색에 잠깐 흠칫하다가 이내 표정을 바꾸고 물었다.“서유 보러 오셨나요?”이승하가 고개를 끄덕였다.“안에 있습니까? 만나고 싶은데.”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