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는 몸에 좋은 다른 요리를 서유에게 먹여주며 조금만 더 자고 타일렀다. 그렇게 식사가 끝나고 이승하는 서유를 안고 개인 영화관으로 향했다.서유는 이 별장의 지하 1층이 주차장인 줄 알았는데 한 층이 통으로 영화관이었다.평소 다니던 영화관보다도 몇 배 더 큰 개인 영화관을 보며 살짝 놀란 서유가 이승하를 바라봤다.“평소에 영화 보기 좋아해요?”이승하는 고개를 숙여 그녀를 힐끔 쳐다보더니 대꾸했다.“아니, 안 좋아해.”병원에 있을 때 특별히 사람을 불러 개조한 것이었다. 혹시나 집에 있으면서 심심할까 봐 준비했다.이승하는 서유를 안고 2인용 가죽 소파로 향하더니 방영 준비를 가동하며 물었다.“서유야, 어떤 영화 좋아해?”서유는 거대한 스크린을 바라보며 외국 영화를 아무렇게나 가리켰다.이승하는 방영 버튼을 누르고 불을 끄더니 서유의 옆으로 다가가 앉아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는 같이 영화를 감상했다.처음 몇분은 그래도 스토리가 그나마 정상이었는데 뒤로 갈수록 내용이 점점 이상해졌다.이승하는 수위가 꽤 높은 화면이 나오자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그는 스크린에서 시선을 떼더니 고개를 숙여 얼굴이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서유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이런 영화 좋아하는구나.”서유가 잽싸게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아니에요. 나는 이 영화가 이런 내용일 줄은…”이승하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서유의 빨간 입술을 막으며 말했다.“해명하지 않아도 돼.”서유는 정말 억울했다.오뉴월에 서리가 내릴 정도였다.영화가 끝나고 이승하는 서유를 안아 자기 몸 위에 엎드리게 하더니 담요를 당겨와 덮어주었다.땀이 송골송골 맺힌 서유를 안고 그녀의 머리에 키스하며 이렇게 말했다.“서유야, 방에 가서 자야지?”서유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고 그러다 뭔가 생각난 듯 이렇게 말했다.“피임약 아직이니까 가져다줘요.”서유의 말에 그녀의 등을 토닥이던 이승하의 손이 순간 멈췄다.숨이 멎을 것만 같은 아픔이 손가락 끝에서 점점 안으로 밀려 들어와 뼈 마디마디
서유는 기분이 좋아졌다 나빠지기를 반복하는 이승하를 보며 그의 예전 모습이 떠올랐다. 예전의 그도 이렇게 기분이 오락가락했었다.그녀는 이런 그가 약간 무서웠지만 예전처럼 침묵하지 않고 우선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았다.서유는 아까 나눈 대화를 하나하나 되짚어 보았고 금세 이승하가 왜 이러는지 알아챘다.그녀는 자신에게 뽀뽀하는 이승하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승하 씨, 내가 아이를 가지기 무섭다는 건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돼서 그러는 거니까 오해하지 마요.”이승하는 서유의 해명을 듣고 죄책감이 들었다.그는 서유를 끌어안은 채 그녀의 어깨에 힘없이 머리를 기댔다.“서유야, 미안해. 내 잘못이야.”안전감이 없었기에 두려웠다. 언젠가 그녀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를 떠나버릴까 봐 너무 무서웠다.이런 불안한 정서는 늘 그의 주위를 맴돌면서 그를 갉아 먹었고 아무리 그녀가 옆에 있다해도 그는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서유는 이승하가 많이 불안해하자 적극적으로 그의 목을 감싸더니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승하 씨, 난 지금 당신과 함께 에요. 그러니 불안해하지 마요…”그녀는 이승하에게 키스하며 예전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이승하는 멈칫하더니 약간은 서툴게 키스해 오는 서유를 몇 초간 뚫어져라 쳐다보고는 고개를 숙여 더 적극적으로 키스에 동참했다.서유의 말이 맞았다. 그녀가 이렇게 옆에 있는데 더 불안해할 필요가 없었다.서유는 햇살이 잘 비쳐 든 방에서 깨어났고 되게 푹 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피곤이 말끔하게 가시고 정신도 조금 드는 것 같았다.그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보았지만 익숙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욕실에서 나는 물소리만 들렸다.그는 욕실 창문에 비친 기다린 그림자를 보고 입꼬리가 올라갔다.서유는 침대에서 일어나 가운을 챙겨입고 다른 욕실로 가서 샤워하려는데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이 쉴 새 없이 울리기 시작했다.보름 동안 심이준과 서유는 연락을 유지하곤 했다.하지만 이승하는 심이준이 서유의 집 앞까지 찾아가는
이승하의 수단은 서유도 아는 바 있기에 더 깊이 생각하기 싫어 이렇게만 대답했다.“아마도 워싱턴을 떠났나 보죠.”심이준도 이를 크게 신경 쓰지 않는지 인사만 하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서유가 핸드폰 연락처에서 빠져나오는데 정가혜가 영상통화를 걸어왔다.통화를 수락하자 바텐더에 기댄 정가혜가 화면에 나타났다.“서유야, 워싱턴에 간 지 보름이나 되는데 나 안 보고 싶어?”“보고 싶지.”서유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다 정가혜 손에 든 담배를 발견하고는 잔소리를 늘어놓았다.“가혜야, 담배 좀 적게 펴.”정가혜는 담배에 대한 의존성이 꽤 심한 편이었다. 금연한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다시 담배를 꺼내 들었다.여자는 그래도 술과 담배를 적게 하는 게 좋은데 정가혜는 신경 쓰지 않았다.맨날 술과 담배를 달고 살았고 클럽에 있는 시간이 많았기에 끊으려 해도 끊을 수가 없었다.정가혜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눈썹을 추켜세우며 말했다.“고급 담배라 몸 안 상해. 걱정하지 마.”서유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물었다.“가혜야, 보름 동안 잘 지냈어?”정가혜가 예쁜 눈을 흘기며 말했다.“이제야 내 생각이 난 거야? 보름 동안 뭐 했어? 문자해도 한참 뒤에나 답장하고...”서유는 민망한 듯 고개를 숙였다.“나...”“잠깐만.”정가혜는 뭔가 발견한 듯 눈을 크게 뜨고 서유의 목을 뚫어져라 쳐다봤다.“너 목에 그 빨간 흔적들은 뭐야?”이 말을 들은 서유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지더니 얼른 잠옷을 위로 당겼다.목을 가리고 싶었지만 잠옷은 마치 그녀와 심술이라도 부리듯 올리자마자 바로 아래로 떨어졌다.눈치가 빠른 정가혜는 그녀의 궁색한 모습을 보고 단번에 무슨 상황인지 알아챘고 일부러 서유를 놀려댔다.“모기한테 물리기라도 했나보지?”서유가 서둘러 해명하려 했지만 정가혜가 한발 먼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워싱턴의 모기가 이렇게 큰 줄은 몰랐네.”정가혜의 말에 웃음이 터진 서유는 올라왔던 홍조가 조금 가라앉았지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서유는 얼굴에 너무 화끈거려 몇 마디 반박하려는데 영상에서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하얀 슈트를 입은 남자가 정가혜 손에 들린 담배를 낚아채 비벼서 끄고는 쓰레기통에 버리더니 정가혜를 바라봤다.“담배 피우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 왜 말을 안 들어요?”화면 너머로 갑자기 나타난 이연석을 보고 넋을 잃었다.정가혜는 서유보다 더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 이연석이 클럽으로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고 먼저 그녀에게 말을 걸 줄은 몰랐다.전에 클럽에서 그렇게 얼굴을 붉히고 나서는 만난 적이 없었다. 마치 죽을 때까지 마주치지 않을 듯한 기세였다.하지만 몇 달이 지난 지금 이연석은 자세를 낮추고 다시 정가혜의 클럽에 찾아왔고 예전처럼 그녀의 담배를 뺏어갔다.정가혜는 도대체 뭐 하자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저번에 병원에서 그가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자와 함께 산부인과로 가는 걸 분명 봤는데 말이다.조심스럽게 부축하는 모습은 여자를 임신시켜 놓고는 낙태하러 가는 게 틀림없어 보였다.이연석은 여자를 자주 바꿨지만 그래도 한번 만나면 꽤 일편단심이라는 걸 정가혜는 알고 있었다. 다른 여자가 생겼으면서 왜 그녀를 찾아온 걸까?정가혜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이연석은 딱히 표정이라고 할게 없이 그저 화면 속의 서유를 힐끔 쳐다봤다.“서유 씨, 친구 좀 빌려 갈게요.”이연석은 이렇게 말하더니 영상 통화를 끝냈다.서유는 그렇게 끝나버린 영상통화 화면을 보며 점차 정신을 차렸다.정가혜와 이연석의 사이는 사실 어딘가 복잡했다.서유는 정가혜에게 이연석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정가혜는 그냥 스쳐 가는 바람이라고 했다.하지만 3년이라는 시간을 사귀었는데 정말 스쳐 가는 바람이 맞을까?둘 사이의 감정은 두 사람이 알아서 해결하겠지.서유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원형 계단을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요 며칠 정말 너무 삭신이 쑤셨다. 계단 하나 내려가는 것도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였다.서유는 한 걸음 한 걸음 간신히 계단에서 내려와 거실로 향했다.
서유는 맑고 깨끗한 눈동자로 이 물건들을 한참이나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다시 봉지를 닫았다.뽀얀 얼굴은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이미 결정을 내렸으니 이런 작은 일에 휘둘리지는 않을 것이다.사실 서유는 잘 알고 있었다. 잃어버린 물건을 찾았음에도 제때 그녀에게 돌려주지 않은 건 그녀와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어서였을 것이다.이승하가 그녀를 위해 몸을 던졌을 때, 많이 다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부터 걱정할 때, 그때 이미 결정은 끝났다.서로에게 기회를 주기로 했으면 이런 작은 꼼수쯤은 신경 쓰지 않을 생각이었다.서유는 봉지를 잘 닫은 뒤 아까 챙긴 도구들도 다시 원래 자리로 가져다 놓았다.그녀가 이 도구들을 가져간다면 이승하도 눈치챌 테니 아예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할 생각이었다.욕실에서 나온 이승하는 서유가 보이지 않자 마음이 불안해져 얼른 아래층으로 내려왔다.도우미들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이승하의 모습에 놀라 옆으로 비켜섰고 찍소리도 내지 못했다.한바퀴 빙 둘러봐도 서유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잘생긴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혼자 나가게 하지 말라고 내가 당부하지 않았나요?”화를 억지로 누르는 듯한 목소리에 도우미들은 그가 왜 갑자기 이렇게 화가 났는지 알게 되었다.“미스터 이…”아까 서유와 얘기를 나누었던 도우미가 부들부들 떨며 앞으로 나왔다.“미스 서는 어디 간 게 아니라 서재에 그림 도구 찾으러 갔습니다.”이를 들은 이승하는 분노가 사그라들긴 했지만 이내 극도의 공포에 휩싸였다.그는 주먹을 불끈 쥔 채 서재로 향했고 마침 서재에서 나오는 서유와 마주쳤다.그는 멈칫하더니 앞으로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두려움이 그를 잠식했다.서유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얼굴에는 큰 감정 기복이 없어 보였다. 그저 그를 향해 입꼬리를 올릴 뿐이었다.“승하 씨, 니콜이 서재에 그림 도구가 있다고 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못 찾겠어요. 좀 찾아줄래요?”이 말에 딱딱하게 굳었던 이승하의 얼굴이 조금 풀렸고 꽉 움켜쥐었던 주먹에도 슬슬 힘이 풀렸다.그는 단숨
오전 내내 시달리고 나서야 이승하는 서재에서 그림 도구를 꺼냈다.서유는 손을 내밀어 받으려 했지만 이승하가 서유의 손을 잡더니 다른 서재로 데리고 갔다.이 서재는 전에 봤던 서재보다 더 컸다. 해살이 유럽풍 인테리어를 한 방안에 비쳐 들자 너무 따듯해 보였다.이승하는 물품을 기다란 테이블에 내려놓더니 고운 손으로 서유의 단발을 매만졌다.“서유야, 이 서재 괜찮아?”“괜찮네요.”건축 도면을 그리려면 긴 테이블이 필요했는데 원목으로 만든 이 테이블은 크고 넓은 게 치수를 재고 구도를 그리는데 딱이었다.서유는 테이블 앞에 앉아 도면을 펼치고 구도를 설계하려는데 이승하가 그녀를 안아 올렸다.이승하의 품에 안긴 이승하는 수줍어하며 밀어냈다.“아니...”이를 들은 이승하의 창백한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너 아직 점심 식사 전이잖아. 내려가서 뭐 좀 먹자.”이승하를 오해한 서유는 얼굴이 빨개지더니 머리를 그의 튼실한 가슴에 파묻고 품에 안긴 채 주방으로 향했다.오후에 심이준은 상대가 원하는 스타일을 소통한 후 서유에게 보내주며 먼저 초안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서유는 핸드폰 화면을 슬라이드 해서 여러 번 확인했고 설계 방향을 대략 정했다.그녀는 서재로 돌아와 테이블 앞에 앉아 펜슬과 자를 들고 도면을 그리기 시작했다.워싱턴의 사오월은 초봄이라 햇살이 따듯했다. 햇살은 창밖의 나뭇잎 사이를 뚫고 방 안으로 들어와 그녀의 몸을 따듯하게 비춰줬다.원래도 충분히 아름다운 얼굴에 햇살이 언뜻언뜻 비치니 더욱 매혹적으로 보였다.이승하는 창문 아래에 놓인 소파에 앉아 한 손으로는 책을 들고 한 손으로는 머리를 짚고 있었다.이승하는 덤덤한 눈빛으로 책을 보다가 열심히 도면을 그리고 있는 서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시선 한 번에 이승하는 그대로 빠져들었다. 어두웠던 눈동자에 점점 빛이 스며들었다.그는 서유가 도면을 그리는 걸 조용히 바라봤다. 두 사람이 서재에 앉아 있는 모습이 너무 따듯하고 아름다워 보였다.그렇게 앉아서 몇 시간을 그린 서유는 깔깔해진
“서유야.”이승하는 도면을 손으로 누르며 열심히 도면을 그리고 있는 서유를 내려다봤다.“내가 신분도 다시 찾아주고 회사도 만들어줄게. 앞으로는 네 신분으로 마음껏 설계해.”자를 들고 있던 서유가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이승하를 바라보며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신분을 되찾는 일은 언니 꿈 이뤄주고 나서 보는 걸로 해요.”언니 김초희는 좋아하는 프로젝트를 50개 넘게 받아왔지만 설계를 완성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서유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언니 신분으로 이 프로젝트를 잘 끝내 하늘에 있는 언니가 편히 쉴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다.“하지만 회사를 만드는 일은 됐어요.”언니의 꿈을 완성하고 나면 혼자만의 힘으로 이승하와 견줄 수 있는 자리까지 올라가고 싶었다.그와 맞먹는 위치까지는 아니더라도 지금처럼 학력도 배경도 없는 여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이승하는 마치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이렇게 말했다.“서유야, 난 너를 위해 그 무엇도 만들어줄 수 있어. 그러니 다른 생각은 안 해도 돼.”자리에서 일어난 서유는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이승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알아요. 하지만 어떤 일은 스스로 해내고 싶어요.”정말 어느날엔가 이승하가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한다면 스스로 정상까지 올라가지 않는 이상 남자 덕으로 성공했다는 타이틀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서유의 굳건한 눈빛에서 이승하는 전에는 보지 못했던 자신감을 느꼈다. 지금의 서유는 마치 다시 태어난 것처럼 우러러보게 했다.이에 서유에 대한 이승하의 사랑은 점점 깊어져만 갔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해야 할 게 있다면 반드시 해줄 테니 말이다.서유는 설계 도면에 집착했고 이승하가 말려도 듣지 않았다. 이승하는 별수 없이 그녀에게 먹거리와 약을 준비해 주고는 묵묵히 곁을 지켰다.새벽까지 노력한 끝에 초안의 틀은 거의 잡았지만 아직 더 다듬어야 했다.그녀가 다시 허리를 숙이고 그림에 몰두하려 하자 이승하가 그녀를 번쩍 안아 올리더니 안방으로 향했다.서유는
서유는 멈칫하더니 아무 생각 없이 이승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이승하는 턱을 살짝 들고 그녀의 눈동자를 조용히 바라보며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서유는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고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기억이 안 나는데…”만약 서유가 예전처럼 꿈에서 송사월의 이름을 외쳤다면 둘 사이는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다.이승하의 가슴에 올려진 서유의 손에 힘이 들어갔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미안해요. 나갈게요…”서유가 몸을 일으켜 나가려는데 이승하가 그녀를 안고 방향을 돌려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그러더니 예쁜 눈으로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이승하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볼에 키스하고는 그녀를 안고 욕실로 향했다.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소리가 물소리와 함께 간간히 들려왔다.이승하가 아직 욕구를 채 쏟아내지 못한 듯 매혹적인 목소리로 말했다.“서유야, 드디어 네가 꿈에서 내 이름을 불렀어…”서유는 너무 피곤했지만 그래도 억지로 버티면서 도면을 그렸다. 그리면서도 속으로 이승하를 욕했다.그렇게 분노로 가득 찬 마지막 한 획이 그어졌고 자를 내려놓는 순간 서유는 의자에 그대로 널브러졌다.얼마 쉬지도 못했는데 심이준이 전화를 걸어와 도면을 재촉했다.“도면 완성했어요?”서유는 힘이 다 빠진 목소리로 답했다.“완성했어요. 사진으로 보내줄게요…”“사진은 안 되고 원본이 필요해요. 주소 보내주면 내가 그쪽으로 갈게요.”서유는 창가에 앉아 경제 잡지를 보고 있는 이승하를 힐끔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심이준 씨가 직접 원본을 가지러 오겠다는데요?”이승하가 덤덤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말했다.“올 용기는 있고?”수화기 너머로 듣고 있던 심이준은 이승하의 차가운 목소리에 얼른 이렇게 대답했다.“실례가 많았네요. 그럼.”서유는 꺼진 화면을 바라보며 몇초간 멍해 있더니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심이준은 왜 이승하를 이렇게 두려워하는 걸까?서유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있는데 심이준의 문자가 하나둘 날아왔다.[이승하 씨 너무 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