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내가 너 쫓아다녀도 된다며? 너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게 대체 무슨 태도야?”성이나의 질문에 준수한 이승하의 얼굴빛이 조금씩 어두워졌다.“3개월 이미 지났어. 그러니까 꺼져.”성이나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이승하의 얼굴을 보며 달리 방법이 없었다.당시 그녀가 제시한 조건은 3년을 쫓아다니는 것이었는데, 이승하는 3개월만 주었다.지난 3개월 동안 그는 마치 시간을 계산한 것처럼 NASA에 숨어서 나오지 않았다.‘역시 이승하야. 시간 계산 한번 정확하네! 그런데 이거 어쩌나? 나 성이나는 갖고 싶은 남자를 반드시 갖는 사람이야. 네 기분 따위는 상관없다고!’성이나는 이승하가 결벽증이 있고 또 성적으로 무감각하다는 것을 알고 방금 그의 무례한 행동을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그녀는 잡고 있던 엘리베이터 문에서 손을 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베이터가 닫히는 순간 그녀는 이승하를 바라보며 자신 있게 웃었다.전에는 학교에서 가까이 갈 기회조차 없었지만 지금은 그와 연결되어 있으니 그녀는 이승하를 가질 수 있는 자신이 있었다.이승하는 그녀를 안중에도 두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가 역겹게 느껴졌다.그는 기다란 손가락을 미친 듯이 닦으며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빠른 걸음으로 사무 센터로 했다.라이더는 회전의자에 앉아 오늘 밤 두 디자이너를 위한 만찬을 준비하기 위해 전화를 걸고 있었다.준비를 끝내고 고개를 들어보니 글쎄 존귀한 신분의 이승하가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라이더는 즉시 전화를 끊고 의자에서 일어나 공손히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이승하는 그의 인사치레를 들어줄 인내심이 없었고 차갑게 말을 끊었다.“방금 당신 찾아온 사람은 어디 있어?”라이더는 머쓱해 하며 손을 거두며 대답했다.“혹시 김초희 씨와 심이준 씨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두 분은 건설 현장에 갔습니다.”이승하는 짙은 눈썹을 찡그렸다. 서유는 지금 김초희의 신분을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초희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건축 디자이너였다.마침
제니는 서유를 설득한 뒤, 차를 몰고 미용실로 향했다. 외국 사람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파티를 매우 중요시하는 편이었고 그들은 보통 드레스를 차려입고 파티에 참석하곤 한다. 브이넥으로 깊게 파인 블랙 롱드레스를 입자 서유의 굴곡적인 몸매가 훤히 드러났다. 어깨까지 오는 단발머리에 볼록한 가슴, 잘록한 허리에 희고 늘씬한 허벅지까지 모든 것이 훤히 드러났다. 그녀는 드레스가 너무 야하다는 생각에 다른 것으로 갈아입으려 했지만 제니는 시간이 없다며 그녀를 재촉했다. 어쩔 수 없었던 그녀는 심이준의 슈트 재킷을 빌려 최대한 노출된 등을 가렸다. 잠시 후, 호텔에 도착한 심이준은 차에서 내린 후 신사답게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두 사람이 레드카펫을 밟는 순간 심이준은 고개를 돌리며 서유를 향해 입을 열었다. “팔짱 껴요. 그럼 누구도 서유 씨한테 찝쩍대지 않을 거예요.”서유는 냉큼 하얀 손을 들어 그의 팔짱을 꼈고 두 사람은 나란히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파티에는 많은 사람이 참석하였다. 그러나 파티에서 참석한 사람들은 NASA의 관리층 인사도 핵심 기술도 아닌 사무 센터의 사람들뿐이었다. 그들은 디자이너 두 명이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보고 급히 다가가서 적극적으로 인사를 건넸다. 심이준은 딱딱한 미소를 지으며 웨이터가 가져온 와인을 받아 들고 서유를 끌고 푸드코트로 향했다. 서유는 한 줄로 늘어선 음식 앞에 서서 간식을 집어 입에 넣었다. 바로 이때,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이 대표님, 오셨습니까?”이 대표님이라는 말에 서유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파티장 안으로 걸어오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싸늘한 눈빛으로 파티장을 둘러보는 그 남자를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리고 심이준을 향해 입을 열었다.“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그녀는 디저트를 내려놓고는 치맛자락을 들고 화장실 쪽으로 걸어갔다.화장실 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늘씬한 손이 그녀의 팔을 잡아당기더니 이내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의 탄탄한 가슴에 기댄 그녀
잠깐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그의 제안을 승낙했다. 이승하는 그녀를 데리고 테라스로 향했고 이내 웨이터가 와인 두 잔을 들고 와 그들에게 건네주었다.그와 단둘이 있으니 어색하고 숨이 막혔다. 원래 술을 못 마시던 그녀는 술잔을 들고 고개를 숙인 채 와인을 한 모금 마셨고 이 답답한 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 바랐다. 술을 마시는 그녀를 보고 이승하는 손을 뻗어 그녀가 들고 있는 술잔을 빼앗았다.“큰 수술 받았던 사람이잖아. 술은 적당히 마셔.”그는 술잔을 옆 테이블에 올려놓고는 고개를 돌려 서유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두운 불빛이 손바닥만 한 얼굴을 비추자 그녀의 하얀 피부가 더 빛이 났고 정교한 그녀의 이목구비는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다웠다. 그의 시선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고 단발머리가 그녀의 하얀 목덜미를 감싸고 있었다. 잠깐 눈길을 스친 것뿐인데 그는 온몸에 피가 끓어올랐다. 또다시 이성을 잃어버리게 될까 봐 그는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그는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뒤, 앞을 바라보며 옆에서 꼿꼿하게 서 있는 서유를 향해 물었다.“일은 시작했어?”서유는 짧게 대답하고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바의 가장자리를 만졌다. 그는 또다시 고개를 돌려 그녀의 등을 바라보았다. 훤히 드러난 피부에 몇 개의 흉터가 있는 것을 보고 그는 안쓰러운 마음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자신을 대신해 황산을 막아주다가 생긴 상처들을 보며 그는 손을 뻗어 쓰다듬고 싶었지만 이내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그녀를 생각하며 행동을 멈추었다. 손이 허공에서 굳어져 버린 그는 마음속으로 거듭 자신은 그녀를 다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경고했다. 그가 천천히 손을 거두고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회복된 지 얼마 안 됐잖아. 좀 더 쉬지 그랬어.”서유는 고개를 숙인 채 바를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언니가 죽기 전에 남기고 간 프로젝트가 있는데 스케줄이 빠듯해서요.”그녀의 말에 고개를 살짝 끄덕이던 이승하는 그녀의 오른손 약지에 결혼반지가 없는 걸 발견하고는 참지
그는 몸이 움찔거렸다. 3년 넘게 가져본 적 없는 여자다. 그녀의 눈빛 하나만으로도 그는 이성을 잃게 된다. 하물며 이렇게 그녀가 먼저 다가와 그를 원한다고 하니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미 결혼한 그녀가 이리 그의 귓불을 물고 이런 말을 한다는 건 분명 누군가의 함정에 빠져 마시지 말아야 할 것을 마셨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귓가에서 전해지는 뜨거운 숨결과 그녀의 키스 때문에 그는 온몸이 저렸고 불과 몇 초 만에 이성은 순식간에 욕망에 사로잡혀 버렸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고는 그녀의 여린 몸을 반쯤 안아 올려 바 위에 그녀를 앉혔다. 또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꽉 잡고 고개를 숙인 채 미친 듯이 그녀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이성을 잃은 그는 그녀를 미치게 원했다. 다만 한 가닥의 이성이 남아있는 그는 지금 이런 상황에서 그녀를 안으면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승하는 그녀를 꼭 껴안고 고개를 숙인 채 진한 키스를 하고는 고통을 참으며 그녀를 밀어냈다.그에게서 떨어진 서유는 고개를 들고 희미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허리를 숙이고 가냘픈 그녀를 안아 올린 뒤, 고개를 숙이며 다정하게 말했다.“서유야, 착하지. 병원 가자.”그의 품에 안겨 있는 그녀는 그의 목덜미에 마구 키스를 퍼부었고 그는 한 손으로 그녀를 껴안고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한편, 김초희를 찾으러 테라스로 온 라이더는 이승하가 그녀를 안고 있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김초희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이승하를 보고 그는 이승하가 그녀한테 관심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대담하게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이 대표님.”그가 이승하의 앞길을 막아서며 신사답게 입을 열었다. “초희 씨의 파트너분이 술에 많이 취해서 저한테 초희 씨를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저한테 맡기세요.”그 말에 이승하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당신이 약을 탄 건가?”흠칫하던 라이더는 그제야 이승하의 품에 안겨있는 그녀를 쳐
오늘 밤, 그가 만약 이 파티에 참석하지 않았다면 서유는 라이더의 손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녀가 이런 늙은 남자에게 괴롭힘을 당할 뻔했다는 생각에 그는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그녀를 송사월에게는 양보할 수 있지만 다른 남자가 그녀를 탐내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었고 눈길조차 주는 것도 용납할 수 없었다. 자신을 죽이라는 이승하의 말을 듣고 라이더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당신이 뭔데 날 총살하는 겁니까?”그러나 이승하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서유를 안은 채 재빨리 테라스를 빠져나와 파티장을 지나 바로 리무진 차량에 올라탔다. 그는 그녀를 넓은 뒷좌석에 앉힌 뒤 차가운 눈빛으로 운전기사를 쳐다보았다.“가림막 내려.”차가운 그의 눈빛에 놀란 운전기사는 급히 몸을 떨며 가림막을 내렸다.잠시 후, 이승하의 싸늘한 목소리가 또다시 차 안에서 울려 퍼졌다.“10분 내로 병원에 도착해.”운전기사는 공손히 대답한 후 재빨리 시동을 걸고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달려갔다. 한편, 심이준이 쫓아 나왔을 때 차는 이미 떠난 상태였고 화가 치밀어오른 심이준은 택시를 잡아타고 그 뒤를 따라갔다. 뒷좌석에 앉아있는 이승하는 서유를 옆에 두고 감히 그녀에게로 다가가지 못하였다. 그러나 서유는 손끝을 더듬거리며 그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이승하는 고개를 젖히고 뒷좌석의 쿠션에 기대어 얼굴이 잔뜩 붉어진 여인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온몸이 뜨거워진 그녀는 이성을 잃은 듯 풍성한 그의 머리카락 사이로 두 손을 집어넣고는 고개를 숙이고 다급히 그에게 키스하려 했다. 그 모습에 이승하는 그녀의 턱을 잡고 흐리멍덩한 그녀의 눈을 쳐다보며 물었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서유는 자신을 밀어내는 그를 향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못된 아이처럼 입을 삐죽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승하는 옅은 한숨을 쉬고는 물티슈를 꺼내 그녀의 뺨을 닦아주었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그녀를 자신의 품에 안았다.
이승하는 병상 옆에 앉아 얼음주머니로 그녀의 열을 식혀주었다. 뜨겁고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몸은 점차 정상적인 핏빛으로 회복되었다. 그가 얼음주머니를 내려놓고는 손을 뻗어 그녀의 볼을 어루만졌다. 뜨겁던 그녀의 얼굴이 점차 식어가자 그는 그제야 잔뜩 찌푸리고 있던 미간을 천천히 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미련이 가득한 얼굴로 손바닥만 한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시간은 1분 1초 흘러갔고 이튿날 날이 밝아서야 병상에 누워있던 그녀가 찌푸리고 있던 미간을 펴며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을 떠보니 베일 듯한 날카로운 그의 턱선이 눈에 들어왔고 그가 매혹적인 눈빛으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서유는 무의식적으로 눈을 내리깔고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는 온통 자신이 그에게 먼저 다가가 키스하는 장면이었다. 그 기억이 떠올라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어젯밤, 술을 몇 모금 마신 뒤 몸이 이상해지고 그다음...그녀는 이승하를 슬쩍 쳐다보았고 그의 목덜미에는 키스 자국이 가득했다. 술을 먹은 그녀가 그한테 엉뚱한 짓을 한 것이다. 그 생각이 떠오른 서유는 이내 얼굴이 빨개졌고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이승하가 그녀를 다시 침대에 눕혔다. “아직 약 효과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야. 병원에 남아서 좀 더 지켜봐야 해.”그의 말에 서유는 그제야 자신이 병원에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러니까 승하 씨가 날 병원으로 데려다준 거고 우리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뜻이네.’두 사람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결 편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고 이승하는 갑자기 안색이 어두워졌다. “내가 당신을 건드리지 않아서 다행으로 생각하는 건가?”가뜩이나 민망해 죽겠는데 이승하가 이리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하니 그녀는 더 난감해졌다. 화가 난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더 이상 그를 쳐다보지 않았지만 그의 손이 그녀
그가 미련이 가득 찬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워싱턴에 머무는 동안 나랑 같이 있어.”서유는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고 이내 곧 담담한 얼굴로 대답했다.“이승하 씨, 그건 경우가 아니에요.”이번에 이승하와 이렇게 얽히게 된 건 마시지 말아야 할 술을 마셨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더 이상 서로 얽힐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승하는 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쓴웃음을 지었다.“서유, 설마 남편이 신경 쓸까 봐서 그래?”서유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입을 열었다.“이승하 씨, 나 당신 사랑했을 때 정말 많이 힘들었었어요. 이젠 두 번 다시 그러고 싶지 않아요.”그녀가 처음으로 자신을 사랑했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이승하는 순식간에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고 눈시울이 붉어졌다.“서유, 당신의 이 말을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는지 몰라.”서유는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나도 당신이 나한테 사랑한다고 말해주기를 오랜 시간 기다렸었어요.”담담하게 웃는 그녀를 보고 이승하는 마음이 아파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손바닥만 한 얼굴을 어루만지며 그녀를 향해 물었다.“우리 두 사람 서로 사랑하는 데 왜 함께할 수 없다는 거야?”서유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그의 말을 바로 잡았다.“이승하 씨,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랑했었다고요.”그 말에 그가 갑자기 쓴웃음을 지었다.“사랑했었다고?”그가 그녀를 죽을 만큼 사랑한다는 것을 그 누가 알겠는가? 그가 자신의 마음을 알았을 때, 그녀는 이미 마음이 떠난 뒤였다. 5년 동안 그들은 서로를 사랑했지만 그는 그걸 알지 못했다. 자신에 대한 그녀의 사랑도 느껴보지 못한 채 그녀를 이리 놓치게 되었으니 그가 어찌 쉽게 단념할 수 있겠는가?그는 포기하지 않을 것처럼 서유의 얼굴을 만지며 다정하게 물었다.“날 다시 사랑할 수는 없는 거야? 조금이라도.”그녀는 그저 담담하게 웃었다.“이승하 씨, 한때 서로 사랑했으니 그걸로 충분해요. 우리 더 이상 얽히지
아무 말이 없는 그녀를 쳐다보며 이승하는 그녀의 뜻을 알아차렸다. 그는 뼈마디가 뚜렷한 손가락을 뻗어 침대 옆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곧이어 병원 원장이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대표님, 무슨 일이십니까?”그는 소파에 등을 기댄 채 창백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며 차갑게 말했다.“이 여자 신체검사 한 번 해봐요. 약물 때문에 다른 곳에 문제라도 있는 건 아닌지 한번 검사해 봐요.”원장은 그런 약 때문에 장기가 손상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었다.서유도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고 말리려고 했지만 그녀가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원장은 이미 병실을 빠져나갔다. 병원의 대주주가 분부한 일이니 원장은 거기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신속하게 각 과에 연락해 전문의를 파견하여 검사를 진행하도록 하였다. 서유는 몸 전체를 검사받았고 하다못해 약간의 빈혈 증세까지도 전부 다 이승하에게 보고되었다. 예전에 가짜 보고를 받았던 트라우마가 있기라도 하듯 그는 의사를 바꿔가면서 검사를 진행하도록 하였고 의사들의 답이 일치하자 비로소 그들의 말을 믿었다. 마지막으로 검사를 맡은 안과의사는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고 이상하다는 점을 눈치챘다. 그는 즉시 옆에 서 있는 남자를 돌아보며 물었다.“이 대표님, 혹시 환자분께서 실명한 적이 있으신지요?”그 말에 몸이 굳어진 이승하는 고개를 숙이고 서유를 쳐다보았다.“실명한 적이 있었어?”서유는 그 말에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대답했다.“네.”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그는 허리를 굽히고 손을 뻗어 그녀의 눈을 어루만졌다.“언제?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보며 서유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죽기 전에 한동안 실명했었어요.”죽기 전이라는 말이 칼처럼 그의 심장을 찔렀고 피를 철철 흘릴 정도로 엄청난 고통이 전해졌다. 그녀는 여태껏 심부전증의 고통뿐만이 아니라 실명의 고통도 겪고 있었다. 반면, 그는 그녀의 몸이 가장 무기력할 때 그녀의 곁에서 그녀를 돌봐주기는커녕 무자비하게 그녀에게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