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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9화

작가: 알라리
last update 최신 업데이트: 2024-04-19 15:06:27
심이준은 그 말을 듣고 딱딱한 웃음을 지었다.

“그런 칭찬을 듣게 되다니 대단히 영광이네요.”

서유는 눈을 희번덕거리더니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휴대폰 좀 빌려줘요.”

휴대폰을 가지러 병원에 돌아간 정가혜는 진작 돌아와야 했다. 그런데 계속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 서유는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걱정되었다.

심이준은 휴대폰을 서유에게 던졌다.

“비밀번호는 공 네 개.”

서유는 그에게 왜 이렇게 간단한 비밀번호를 설정했는지 묻고 싶었지만 갑자기 그의 강박증이 생각나서 말을 삼켰다.

그녀는 재빨리 휴대폰을 열어 정가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가혜야, 나야.”

정가혜는 서유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이연석을 쳐다보던 시선을 거두고 물었다.

“서유야, 왜 심이준 씨 휴대폰으로 전화한 거야?”

서유는 방금 일어난 일에 대해 설명한 후 말했다.

“가혜야, 너 아직 병원에 있으면 거기서 기다려. 나 CCTV 영상 찾으러 갈 거야.”

전에 김 씨는 모두 감시되지 않는 상황에서만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일부러 불을 꺼서 그의 용모 차림이 잘 보이지 않게 했다.

하지만 오늘은 대낮에 갑자기 지하 주차장에서 모습을 드러내다니!

비록 가면을 썼지만 그의 실루엣만 있다면 경찰은 그의 신상을 파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서유는 전에 김 씨가 자신을 추모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메시지를 보낸 것을 보고 진짜 자신을 좋아하는 줄 알았다.

게다가 다른 일에 치여 3년 전 일을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

그런데 3년 후인 지금 김 씨가 그렇게 많은 남자들 앞에서 이런 식으로 그녀를 추행하고 또 다치게 할 줄이야!

서유는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반드시 그가 누구인지 알아내서 3년 전의 빚과 오늘의 치욕을 배로 갚을 것이다!

전화를 끊은 서유는 주먹을 불끈 쥐며 심이준에게 말했다.

“병원으로 돌아가요.”

그들은 절대 서유가 다시 병원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할 것이니 지금 병원이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심이준은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서유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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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씨는 늘 어두운 곳에 있으니 서유가 언제든지 위험에 처할 수 있었다. 그러니 가능한 한 빨리 그 신상을 알아내야 했다.그를 감옥에 십몇 년 정도 가둬야만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기사 역할을 하던 심이준은 두 사람이 또 응급실로 가는 것을 보고 한숨을 쉬며 따라갔다.상처는 그리 크지 않았고 간단히 치료한 후, 세 사람은 재빨리 병원을 떠났다.심이준은 두 사람을 집에 데려다주고 간 김에 들어가 저녁까지 얻어먹었다.정가혜와 서유가 어떻게 김 씨를 끌어낼 방법을 의논하고 있을 때, 정신없이 먹던 심이준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뱀을 굴에서 나오게 유인해야죠.”정가혜는 3년 전에도 그 방법을 사용했으니 안 된다고 말하려는데 서유가 먼저 입을 열었다.“제가 살아 있는 걸 알았으니 분명 다시 절 찾아올 거예요. 언제까지 피동적으로 방어만 할 수 없어요. 주동적으로 먼저 끌어내야죠.”그 생각에 서유는 젓가락을 놓고 휴대폰을 꺼내 주소록을 열었다. 김 씨를 차단 명단에서 끌어낸 다음 다시 카톡으로 로그인해서 친구 신청을 찾아 수락 버튼을 눌렀다.그녀는 김 씨의 프로필 사진을 보며 잠시 생각한 후 카톡을 보냈다.[제가 살아 있다는 걸 알았으니 우리 차라리 만나서 확실하게 얘기하죠.]서유는 단도직입적으로 만나자는 뜻을 전했다.김 씨의 똑똑한 머리로 당연히 이는 서유가 자신을 잡으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와 만날 기회가 있다면 반드시 승낙할 것이다.서유는 약속을 잡고 즉시 경찰에 신고할 계획이었다. ‘만나는 그날 경찰을 대동하고 가면 반드시 잡을 수 있을 거야!’그러나 정가혜는 조금 걱정되었다.“저번처럼 나타나지 않으면 어떡하지? 그때 나왔으면 진작 잡는 건데!”서유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미간을 찌푸렸다.“안 나타난다면 다른 방법을 더 생각해야지. 일단 기다려보자.”정가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접시를 거의 다 비우는 심이준을 보았다.“심대칭 씨, 우리 서유 먹을 것 좀 남겨 주실래요?”심이준은 못들은 듯 접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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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약 해지: 놔줘요 대표님   제361화

    언니가 설계한 건축물은 아이디어가 기발할 뿐만 아니라 아름답고 화려했다.가장 중요한 것은 이 그림들은 마치 또 다른 시공간에서 온 것처럼 아주 진취적이고 과학적인 느낌이 있었다.‘어쩐지 심이준이 언니가 설계한 건물은 나라와 도시를 대표하는 랜드마크라고 하더라니.’서유가 언니와 같은 성과를 거두기란 매우 어려울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서유는 펜, 자와 종이를 챙겨 책상 앞에 앉아 종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랫동안 펜을 잡지 않았지만 타고난 재능과 내공으로 몇 획만 그리다 보니 어느새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모든 집중력을 그림에 쏟기 시작했다. 어느새 종이에는 독특한 모양의 집이 나타났다.서유는 펜을 내려놓고 그림을 한 번 보더니 약간 믿기지 않았다.분명 설계도는 그려본 적이 없는데, 언니의 그림을 보고 나서 머릿속에 독특한 아이디어가 떠올라 펜을 잡으니 그려낼 수 있었다.설마 그녀도 언니처럼 건축 디자인에 소질이 있는 걸까?서유는 믿기지 않아 이 스케치를 내려놓고 또 다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그녀는 그림을 그리던 중 갑자기 건축 도면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릴수록 흥분 되었다.다음날까지 그림을 그린 서유는 심이준이 방문하자 비로소 펜을 내려놓았다. 기지개를 켠 후 스케치 몇 점을 들고 계단을 내려갔다.심이준은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정가혜와 입씨름을 버리고 있었다.“정고졸 씨, 손님이 집에 왔는데 차 한 잔도 안 내줘요?”정가혜는 두 손으로 가슴을 두르고 벽에 기대어 차가운 눈으로 그를 흘겨보았다.“심대칭 씨가 제가 내린 차를 마실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서유가 걸어가 두 사람의 유치한 말장난을 끊고 손에 든 스케치를 심이준에게 건넸다.“선생님, 제가 그린 그림이 어떤지 좀 봐주실래요?”서유는 기분이 좋을 때 선생님이라 부르고, 기분이 나쁠 때는 이름을 불렀다. 이에 심이준은 이미 익숙해졌다.그는 서유처럼 이론 지식도 통과하지 못한 바보가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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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약 해지: 놔줘요 대표님   제362화

    서유는 심이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 자리에 굳었다.언니가 맡은 첫 번째 프로젝트가 NASA일 줄은 몰랐다.그녀는 현장 답사를 하러 가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다만 주서희가 일전에 이승하는 NASA에 있다고 했는데, 만약 마주치기라도 한다면...정가혜는 서유가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고 곧 그녀의 마음을 알아챘다.그녀는 다정한 목소리로 위로했다.“서유야, 걱정하지 마. NASA가 얼마나 큰데 설마 마주치겠어?”그렇다, 이승하는 우주 비행, 서유는 건축, 하늘과 땅 두 가지 완전히 다른 직종을 담당하고 있는 두 사람이 어떻게 같은 곳에서 업무를 볼 수 있겠는가? 서유는 생각이 많아졌다.그녀는 생각을 정리하고 물었다.“가혜야, 너도 같이 갈래?”정가혜도 바깥의 세상을 만나고 싶었지만 손을 내흔들었다.“난 됐어. 가게 일이 바빠서 못 가.”정가혜는 말을 마치고 또 아이를 달래듯 말했다.“서유야, 심이준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못 되니 외국에서 혼자 자신을 잘 보호해야 해. 알겠어?”서유는 그녀의 팔짱을 끼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겠어. 가혜 언니.”정가혜가 웃으며 그녀의 단발머리를 쓰다듬더니 서둘러 침을 챙기라고 하자 서유는 그제야 위층으로 올라갔다.그녀는 옷을 골라 캐리어에 넣은 후 병원에서 가져온 가방을 열었다.가방에서 여권을 꺼내려 할 때, 이혼 서류를 보았다.서유는 안색이 변하더니 하얗고 가는 손을 내밀어 이혼 서류를 꺼냈다.천천히 펴서 한참을 쳐다보다가 서랍에 넣었다.이번 생에 송사월에게 빚진 것이 너무 많아 이미 다 갚지 못할 정도였다.하지만 송사월은 그녀의 짐이 되지 않기 위해 그녀를 떠났고 영원히 연락하지 않기로 했다.어린 시절처럼 온 마음을 다해 송사월을 사랑할 수 없으므로 서유는 이 양심의 가책을 영원히 마음속에 남겨두고 다시는 그를 방해하지 않는 것이 송사월에 대한 가장 좋은 보답이었다.서유는 서랍을 잠갔다. 마치 밀폐된 공간에 과거를 잠그듯 쉽게 열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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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약 해지: 놔줘요 대표님   제363화

    비행기가 워싱턴에 도착했을 때 서유는 피곤해서 온몸이 쑤셨다.심이준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줄곧 대칭적인 자세를 유지하며 무려 10여 시간을 버텼다.비행기에서 내린 후, 그녀를 데리고 곧장 호텔로 갔다.그는 워싱턴에 자주 출장 왔는지 따로 가이드가 필요 없을 정도로 익숙해 보였다.그런 모습에 서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외국 땅인지라 여전히 조금 두려웠다.심이준은 체크인을 마친 뒤 방키를 서유에게 건넸다.“오늘은 푹 쉬고 내일 NASA로 가요.”서유는 고개를 끄덕이고 방키를 받은 뒤 물었다.“현장 답사를 하려면 NASA 내부에도 들어가야 하나요?”심이준은 그녀를 방 쪽으로 안내하면서 대답했다.“그건 나도 잘 몰라요. 내일 가봐야 알죠.”서유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고 이승하를 만날까 봐 걱정했다.하지만 또 마주치면 어떻고, 두려울 것이 뭐가 있겠는가?그렇게 생각하니 그녀의 근심이 점차 누그러졌다.서유는 캐리어를 끌고 호텔 방으로 들어갔고, 방문을 닫고 창가로 향했다.그들은 워싱턴에서 가장 호화로운 호텔의 펜트하우스 룸 두 개를 예약했다. 이곳에 서서 번화한 도시의 야경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웅장하고 멋진 고층 건물들은 찬란한 조명으로 장식되어 오색찬란하고 아름답기 그지없었다.멀리 바라보니 교차하는 도로에서 차량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행인들도 끊이지 않았다.서유는 이런 경치를 보면서 마음이 한결 편해졌고 기지개를 켠 후 몸을 돌려 욕실로 가서 있었다.온몸의 피로를 씻은 그녀는 언니의 그림책을 꺼내 그녀의 스타일을 잠시 연구한 후에야 비로소 안심하고 잠자리에 들었다.다음날, 8시도 안 되어 심이준이 그녀의 방문을 두드리며 빨리 일어나 NASA에 가야 한다고 재촉했다.서유는 부랴부랴 일어나 정리를 하고 빨간 원피스를 골라 입고 세련되고 단아한 화장을 한 후에야 문을 열었다.마침 맞은편 방에서 나오던 심이준은 꾸민 서유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왜 언니 흉내를 내요?”“언니 신분으로 온 거잖아요. 들키면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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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SA, 한 무리의 우주 관리자들이 회의실에 앉아 회의를 하고 있었다.선두에 선 남자는 잘 짜인 값비싼 슈트를 입고 늘씬한 다리를 꼬고는 가죽 의자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칼로 조각한 듯한 얼굴은 흠잡을 데 없이 정교하고 오뚝한 콧날과 섹시한 얇은 입술을 가진 그는 이목구비가 무척 또렷했다.가늘긴 긴 눈썹은 가지런하고 섬세했으며 길고 짙은 속눈썹이 얼음처럼 차가운 눈을 살짝 덮고 있었다.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은 차가운 기운뿐 아니라 오랫동안 높은 자리에 앉은 자가 가진 강한 카리스마를 뿜고 있어 다른 사람이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할 정도였다.그림 같은 눈매를 가진 그는 지금 훤칠한 왼손으로 오른손 손바닥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있었다.회의실 안의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싸우고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눈을 늘어뜨리고 그 상처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미스터 이, 이건 우리가 공동 개발한 것이니 특허는 절대 당신들에게 완전히 양보할 수 없어요.”이승하는 자신의 이름을 듣고서야 천천히 고개를 들어 JS 그룹에 화가 나 목까지 빨개진 피터를 보았다.JS 그룹 관계자들은 피터가 이승하를 방해하자 책상을 두드리더니 곧장 욕을 내뱉었다.“뭐? 공동 개발이라고? 지난 3개월 동안 우리 사람들이 연구할 때 당신들은 뭐 하고 있었어? 작은 데이터도 계산하지 못해낸 주제 지금 특허를 욕심 내?”JS 그룹 관계자가 계속 욕하려 하자 이승하가 피터를 향해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얼마를 원하는데? 금액을 말해.”피터는 JS 그룹이 돈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려고 했던 것도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지금 이승하가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자 피터도 더 이상 숨기지 않고 바로 본색을 드러냈다.“100억!”“달라!”JS 그룹 관계자는 화가 나서 소매를 걷어붙이고는 그들과 한바탕 싸우려 했다.이승하는 제지하지 않았고 양측 사람들은 곧 다시 책상을 치며 서로 욕하기 시작했다.그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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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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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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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 계약 해지: 놔줘요 대표님   제1549화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 계약 해지: 놔줘요 대표님   제1548화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 계약 해지: 놔줘요 대표님   제1547화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 계약 해지: 놔줘요 대표님   제1546화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 계약 해지: 놔줘요 대표님   제1545화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 계약 해지: 놔줘요 대표님   제1544화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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