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욱의 도발에 이연석은 휴대폰을 멀리 던져버리더니 팔을 걷고는 있는 힘껏 주먹을 휘둘렀다.“일주일이면 충분해.”최경욱은 얼굴을 가격당하고도 그저 피식 웃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회의실을 나가버렸다.이연석은 자신을 낮잡아 보는듯한 최경욱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어 몇 대 더 때리고 싶었지만, 이승하가 제지하는 바람에 그저 씩씩거리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이승하는 창문밖에 드리워진 노을을 바라보았다. 힘 있고 반짝였던 그의 눈에는 어느새 칠흑 같은 어둠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이연석은 그 모습에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형, 혹시 내가 해줘야 할 게 더 있어요?”이승하는 시선을 내리며 담담하게 답했다.“나 대신 그 여자 잘 지켜보고 있어. 이상한 일에 휘말리게 하지 말고.”이연석은 ‘그 여자’가 누구를 뜻하는지 잘 알고 있다.“형, 어차피 이제는 다시 잘 될 일도 없는 여자잖아요. 그런데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해요?”이승하는 황산으로 타버린 자신의 손가락을 보며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빚진 게 있어서 그래.”그녀에게는 빚진 게 너무나도 많다. 한때는 그녀를 다치게 했고 이번에는 황산까지 대신 맞게 했으니... 이번 일은 서유가 원해서 뛰어든 일이라고는 하나 이승하는 자기 자신을 쉽게 용서할 수 없었다.이연석은 희고 예쁘기까지 했던 형의 손이 이제는 볼품없이 되어버리자 마음이 아팠다.“솔직히 나는 형이 이만큼 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이제 형도 자신을 좀 놔줘요.”“안돼.”이승하는 단호했고 이연석은 이 이상 그 어떤 말도 먹힐 것 같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형이 없는 동안 내가 잘 지켜볼게요.”이승하는 당부하듯 한 마디 더 보탰다.“괜히 신경 쓰이게 옆에서 얼쩡거리지는 말고.”“네, 알겠어요.”이연석이 한숨을 내쉬며 대답을 하고 나서야 이승하도 자리를 떠났다.어쩐지 쓸쓸해 보이는 뒷모습을 보며 이연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항상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질 수밖에 없다...이승하는 처리해야 할 일을 마
연지유는 누군가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다 이승하를 발견하고는 활짝 웃었다.“승하야, 드디어 나 만나주는 거야?”그녀는 빠르게 차 앞으로 다가갔다.“3년 동안 내가 널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알아?”이승하는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웃었다.“내가 보고 싶었다고?”“당연하지. 전에 말했잖아, 나는 너를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다고. 그러니까 당연히 보고 싶지.”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보며 이승하가 싸늘하게 물었다.“그럼 우리 형은?”그 말에 연지유의 눈에 일말의 죄책감이 스쳐 지나갔다가 곧바로 다시 표정을 바뀌며 단호한 말투로 답했다.“나는 네 형 사랑한 적 없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오직 너뿐이었어. 어렸을 때는 네가 하도 곁을 주지 않으니까 어쩔 수 없이 네 형이랑 연애한 거고...”그녀는 자신의 진심을 전해주고자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승하는 그 손을 무시한 채 오히려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고 이에 연지유는 민망한 듯 얼굴을 붉혔다.“내가 그때, 네 프러포즈를 거절하는 게 아니었는데... 네 형이 죽고 나서 바로 너와 결혼했었어야 했어...”연지유는 만약 그때 자신이 이승하와 결혼했었더라면 서유에게 그를 빼앗길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녀는 이승하의 눈에 차고자 해외까지 갔었다. 하지만 그사이 항상 냉정하던 남자의 곁에 처음 보는 여자가 서 있었고 심지어 그 여자의 얼굴은 그녀와 무척이나 비슷했다.분명히 비슷한 얼굴인데 왜 자신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는 걸까?!이제까지 그 결벽증 때문에 손 한 번 내어주지 않았으면서 서유라는 여자와는 온갖 스킨십을 다 했던 걸 떠올리며 연지유는 질투를 넘어 분노의 감정마저 들었다.그녀는 이승하를 향해 억지를 부리며 말했다.“뭐가 어떻게 되었든 간에, 너는 네 형이랑 약속한 거야. 그러니까 나와 결혼하겠다는 그 약속 지켜!”이에 이승하의 미소가 점점 더 싸늘하게 변해갔다.“나한테 접근하기 위해 우리 형을 이용해 놓고 지금 너와 결혼해 달라고? 꿈
이승하는 뒷말을 잇지 않았지만 연지유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형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이승하는 진작 그녀를 처리했을 것이다.연지유는 얼굴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화가 나면서도 갑자기 오싹해졌다.만약 이승하가 그때 일을 알게 된다면...연지유는 더 이상 상상할 수 없었고, 더 이상 이승하 앞에서 소란을 피울 용기가 없었다.그녀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악물며 코닉세그 차량이 저택으로 들어가는 것을 매섭게 노려보기만 했다.이승하는 절대 그때 일을 알아내지 못할 것이고 연지유는 오히려 그의 약점을 잡고 있었다.‘이승하, 곧 네 행동에 대한 뼈아픈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어디 두고 봐!’이승하는 별장으로 돌아와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하인에게 건네고는 소독수 한 병을 가져오라고 명령했다.하인은 재빨리 소독수를 가져왔고 이승하는 그것을 받은 후 방금 연지유의 손길이 닿은 손가락에 뿌리기 시작했다.깨끗이 소독한 후, 이승하는 서재로 걸음을 옮겨 업무와 관련된 자료를 정리한 후 서랍을 열었다.시선이 그 개인 휴대폰에 닿자 심장이 조여오더니 숨 멎을 듯한 질식감에 호흡이 가빠졌다.그는 심호흡을 하고 휴대폰을 꺼내 주소록에 적힌 유일한 이름을 가만히 쳐다보았다.서유는 이승하가 그녀의 전화번호조차 저장하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그 숫자들은 이승하의 마음속에 오래전부터 굳게 새겨졌다.그리고 이승하의 개인 휴대폰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그녀 한 사람만 존재했다.휴대폰을 들고 있던 이승하의 손이 조금씩 조여오더니 결국 고통을 참으며 휴대폰을 놓았다.그는 일어나서 금고 앞으로 가서 휴대폰을 넣고 굳게 잠갔다.이제부터 그녀와 관련된 모든 것을 만지지 않을 것이다. 그럼 아프지 않을 것이다...이승하는 금고를 만지작거리다가 돌아서서 서류와 휴대폰을 들고 서재 밖으로 나왔다.이승하의 개인 물품을 다 챙긴 소수빈은 서재에서 나오는 이승하를 보더니 급히 다가가 말했다.“대표님, 이제 출발하시죠.”이승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중의 모든 물건을 건
정가혜는 송사월과 이승하가 모두 떠난 걸 알고 급히 병원으로 달려왔다.,서유는 병상에 엎드려있었는데 등의 상처에 약을 발랐지만 여전히 헐어버린 상태였다.그녀는 머리를 옆으로 한 채 초점 없는 눈으로 꼼짝도 하지 않고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정가혜가 가까이 다가가 보니 서유는 식은땀이 날 정도로 아파하고 있었지만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작은 손으로 침대 시트를 움켜쥐고 고통을 달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그런 서유를 본 정가혜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서유야...”정가혜의 소리에 서유는 천천히 눈을 들었지만 초점을 맞출 수 없어 눈앞의 사람을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희미하게 정가혜의 모습이 보이자 서유는 메마른 입술을 벌리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가혜 언니...”서유는 보통 그렇게 정가혜를 부르지 않는다. 이렇게 정가혜를 부른다는 것은 서유가 가장 무기력한 상황이라는 걸 설명한다.정가혜는 마음이 아팠고 옆에 있던 수건을 집어 들고 허리를 굽혀 서유 이마의 땀을 닦아 주었다.“서유야, 주 선생이 아무도 널 돌봐주지 않는다고 해서 인제야 도착했어. 늦어서 미안해!”서유는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고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정가혜가 그녀의 이마를 세심하게 닦아줄 때, 그녀의 시야 속에 베개 옆의 이혼합의서가 들어왔다.그녀는 이혼합의서를 들어 위에 적힌 이름을 확인하고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어쩐지 사월이에게 전화를 거니 전원이 꺼져있더라니! 알고 보니 서유와 이혼한 거였어!’정가혜는 얼굴이 창백한 서유를 보면 볼수록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서유야, 사월이는 아마 승하 씨가 네 곁에 있을 줄 알고 이혼을 결심한 것 같아...”서유는 입꼬리를 올리며 덤덤하게 웃었다. 마치 이 일에 대해 아주 피곤한 듯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 보였다.정가혜는 병상 앞에 앉아 서유의 손을 잡고 마치 힘을 전달해주려는 듯 힘껏 주물렀다.“서유야, 괜찮아. 내가 있잖아. 난 영원히 네 옆에
주서희는 휴대폰을 의사 가운에 넣자마자 옷을 잘 차려입은 잘생긴 남자가 VIP실을 향해 걸어오는 걸 보았다.그는 주서희를 보더니 눈썹을 치켜 올리고 해맑은 눈으로 환하게 웃었다.“안녕하세요, 의사 선생님. 혹시 서유 씨 병실이 여기인가요?”그가 서유를 찾아왔다는 말을 듣고 주서희는 표정이 굳어졌다.‘벌써 서유 씨를 좋아하는 사람이 나타난 거야?’주서희는 속이 뒤집힐 것 같았지만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고 말했다.“그렇긴 한데 누구시죠?”그는 양복 주머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건네주며 말했다.“심이준입니다.”주서희는 그 금박 명함에 적힌 ‘초아 건설 회사 수석 디자이너’를 보고는 입꼬리를 씩 올렸다.“안녕하세요.”심이준은 그녀의 손을 잡고 명함을 손에 넣은 뒤 웃으며 말했다.“집 디자인 필요하시면 연락 주세요. 제가 20% 할인해 드릴게요.”말을 마친 그는 몸을 돌려 병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다만 돌아서는 순간 얼굴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심이준은 병실 입구까지 걸어간 후 걸음을 멈추고 다시 미소를 띠고는 문을 두드렸다.“서유 씨, 들어가도 될까요?”서유의 다리를 마사지 해주던 정가혜가 소리를 듣고 문밖 남자를 올려다보았다.“누구시죠?”심이준은 한 손을 문설주에 대고 적당하게 짧은 머리카락을 넘겼다.“심이준입니다.”서유는 그 이름을 듣고서야 지현우가 사람을 보내 건축에 관한 지식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고개를 돌릴 수 없었던 서유는 대답만 했다.“들어오세요.”심이준은 그제야 들어왔지만 거즈로 겹겹이 감긴 서유의 등을 보더니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하지만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고 걱정스레 말했다.“서유 씨 지금 상태로는 펜을 들 수 없을 것 같네요.”서유는 약간 겸연쩍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죄송해요. 당분간은 건축 디자인을 배울 수 없을 것 같아요.”심이준은 티끌 한 점 없이 맑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괜찮아요. 그럼 이론부터 배우죠.”그는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본 뒤
정가혜는 남자가 가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말했다.“저 사람 대체 뭐야? 이상하게 웃으면서 사람 깔보잖아!”서유는 이미 많은 말을 해서 온몸에 힘이 없었지만 애써 몸을 지탱하며 정가혜를 달랬다.“어떤 디자이너들은 확실히 좀 성격이 이상할 수 있어. 너무 신경 쓰지 마.”정가혜는 여전히 화가 나서 휴대폰을 들고 심이준을 검색했다. 대체 얼마나 능력 있는 사람이기에 이렇게 안하무인인지 확인하고 싶었다.하지만 심이준의 이력을 보고 난 정가혜는 이런 유명인과 따지기 귀찮아 바로 백기를 들었다.정가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휴대폰을 내려놓고는 다정하게 물었다.“서유야, 배 안 고파? 내가 뭐라도 사 올까?”서유는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고 초점을 맞출 수 없었던 터라 정가혜의 모습이 점차 희미해졌다.“가혜야, 너희 집으로 이사갈 때 내가 약 한 상자를 가지고 갔었어. 다음에 올 때 그 약 좀 가져다줄래?”정가혜는 무의식적으로 서유의 심장을 보더니 긴장해서 말했다.“혹시 면역 억제제 안 먹어서 심장이 아픈 거야?”서유는 지친 눈을 깜박거렸다.“몇 번 울고 나서 눈이 잘 안 보여.”정가혜는 마음이 아파서 서유의 이마를 쓰다듬었다.“내가 지금 바로 가져올게.”서유는 그녀에게 급하지 않다고 말하려 했지만 정가혜는 이미 일어나 휴대폰을 들고 재빨리 병실을 떠났다.정가혜가 떠나자 텅 빈 병실에 그녀 혼자 남아 지독한 외로움이 드리웠다.그녀는 흐릿한 눈으로 옷장 안에 늘어선 남성 정장들을 보고는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승하 씨 옷 안 가져갔네. 아마 버리는 거겠지? 한 번 버린 물건은 절대 뒤돌아보지 않는 사람이니까...’마침 방에 들어오던 주서희는 서유가 옷장 안의 옷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것을 보고 이승하가 그녀에게 여전히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챘다.비록 서유 앞에서 이승하를 언급하지 않겠다고 이승하와 약속했지만 주서희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대표님은 사월 씨가 서유 씨를 돌봐 주는 줄 알고 떠나신 거예요. 만약 두 사람이 이혼했다는
한 달 후, 서유의 등은 이미 2차 감염 기간을 넘겼고 이전만큼 아프지 않았다.하지만 피부 이식에 대해 주서희는 너무 걱정스러웠다.“제가 국제적으로 유명한 성형 의사에게 연락했지만 계속 전화를 받지 않더라고요.”다른 건 몰라도 피부 재생 방면에 있어 성이나의 의술은 아주 뛰어났지만 거금을 주고도 그녀를 찾기란 어려웠다.서유는 주서희를 향해 말했다.“괜찮아요. 일반 성형외과 의사면 돼요. 어차피 옷을 입으니 흉터가 남아도 티 안 나잖아요.”서유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저 심장 이식 수술할 때 이미 흉터가 남았어요. 몇 개 더 추가된다고 해도 별로 상관없어요.”정가혜는 마음이 아파서 그녀를 쳐다보았다.“이렇게 예쁜 너한테 하필 몸에 흉터가 남다니. 속상해라.”서유는 웃으며 말했다.“내가 뭐 연예인이야? 괜찮아.”주서희가 막 말을 하려는데 병실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다가가 문을 연 그녀는 눈앞의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랐지만 이내 환한 미소를 지었다.“선생님!”성이나는 흰색 정장을 입고 아름다운 얼굴에는 우아하고 당당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주 원장님. 여기 황산으로 등이 망가진 환자가 있다고 들었어요. 제가 도움이 될까요?”“너무 잘 됐어요. 제가 그동안 선생님을 얼마나 애타게 찾았다고요. 계속 연락이 안 되더니 이렇게 병원에 와주실 줄이야!”주서희의 흥분에 비해 성이나는 덤덤한 표정이었다.“일단 환자부터 보죠.”주서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를 데리고 병실로 갔다.그녀에게 서유를 소개하려고 했지만, 성이나는 성큼성큼 서유에게 다가가더니 먼저 하얀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 서유 씨. 저는 성이나예요.”서유와 정가혜는 어리둥절했고 주서희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그녀가 어떻게 서유를 알고 있을까?서유는 예의상 손을 뻗어 악수하며 말했다.“안녕하세요, 선생님.”성이나는 서유를 어떻게 알았는지 설명하지 않고 손을 들어 서유의 등 거즈를 젖히더니 상태를 확인했다.위아래로 검사를 마친 뒤 주서희를 돌아보았다.“
서유의 손가락이 조금씩 조여왔지만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선생님, 그건 저랑 상관없는 두 분 일이세요.”성이나는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서유 씨가 그렇게 말씀하시니 무슨 뜻인지 알겠네요.”성이나는 말을 마치고 우아하게 몸을 돌려 주서희를 바라보았다.“주 원장님, 수술실에서 봬요.”그녀는 이 말을 남기고는 걸음을 옮겨 서둘러 병실을 떠났다.성이나가 떠난 후, 정가혜가 이를 갈며 말했다.“네 수술 집도의만 아니었어도 나 진작 욕하고도 남았어!”주서희도 조금 화났지만 별말 없이 휴대폰을 꺼내 계속 이승하에게 전화를 걸었다.벌써 한 달째 항공기지에 머물면서 외부와의 연락을 단절하고 있는데, 그래도 한 번쯤 나와서 휴대폰을 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하지만 상대방은 여전히 전원이 꺼진 상태였고, 주서희는 약간 맥이 빠져 휴대폰을 놓고 서유를 바라보았다.“서유 씨,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요 두 달 동안, 주서희도 정가혜처럼 서유의 곁을 지켜주면서 그녀들과 더 가까워졌고 예전처럼 인사치레도 하지 않았다.서유는 조였던 손가락의 힘을 풀고 두 사람을 보며 웃었다.“나보다 두 사람이 더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은데?”서유가 신경을 쓰든 안 쓰든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앞으로 남은 삶 동안 이승하는 그녀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일 것이다.주서희와 정가혜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서유의 성격을 알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주서희는 수술 전 준비 사항을 알려준 후 일하러 나갔고, 정가혜는 계속 병실에 남아 서유를 돌봤다.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피부 이식 수술 당일이 되었다.비록 성이나는 서유를 라이벌로 여겼지만, 의사로서의 덕목은 아주 훌륭했기에 수술 중에 허튼짓을 하지 않았다.심지어 그녀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수술 후 외국에서 가져온 값비싼 약을 주기도 했다.서유는 두 달 동안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 수많은 극심한 고통 끝에 서서히 회복되었다.퇴원하는 날, 서유는 욕실 거울 앞에 서서 몸을 기울여 자신의 등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