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사월은 아무 말 없는 그녀를 보며 모든 걸 내려놓은 듯이 웃어 보였다.“서유야, 나는 네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어떤 모습인지 잘 알아. 너는 사랑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는 사람이야... 그래서 네가 그 사람을 대신해 황산을 맞았을 때 그건 단순히 빚을 갚으려고 한 행동이 아니라 그를 사랑해서 그런 거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어...”송사월은 자신의 반평생을 바쳐 사랑한 여자를 보며 조금 목이 메어왔다.“그 사람을 사랑하는 네 모습에서 어릴 적 네가 나를 사랑했던 모습이 떠올랐어. 나는 그런 너를 잃어버린 거고, 다시는 찾지 못하게 된 것뿐이야.”서유의 눈가는 어느새 빨갛게 달아올랐다.“미안해. 내가 먼저 너를 배신한 거야...”송사월은 고개를 저었다.“그날은 나 때문에 네가 화가 난 거고 교통사고는 어쩔 수 없었던 거야. 모든 일의 시발점은 나였어.”사실 하늘은 8년 전 교통사고 때 이미 그에게 두 사람의 인연은 끝이 났다고 얘기해준 거나 다름없었다. 그걸 악착같이 붙잡으며 놓지 못한 건 그였다...“서유야, 미안해. 내 집념 때문에 너를 그동안 놔주지 못했어. 내가 너를 조금만 더 일찍 놔줬더라면, 이 과거의 집념에서 조금만 더 일찍 벗어났더라면 네가 죄책감을 안은 채 내 곁에 남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텐데...”서유는 그를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사월아, 나는...”송사월은 그녀의 말을 자르고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네가 나랑 다시 시작해 보겠다고, 나를 다시 사랑해보겠다고 했던 것도 다 과거에 대한 집념일 뿐이야. 20년이 넘도록 이어온 정이 너무 깊어서 너도 쉽게 놓지 못했던 거야. 하지만 나는 이제 알아. 너와 나 사이에 이제 사랑은 없어...”그는 말을 마친 뒤 옷장에 있는 남자의 정장을 바라보았다.“지금은 나처럼, 아니 어쩌면 나보다 더 너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는데, 내가 무슨 자격으로 너를 계속 잡아둘 수 있겠어. 나는...”송사월은 잠시 뜸을 들이다 활짝 웃으며 말했다.“나는 네 뜨거운 사랑을 받았던 것만으로
송사월은 수중의 계약서를 내려놓고 담담하게 웃었다.서유는 그런 그의 얼굴에서 문득 어린 시절 교실 제일 뒤편에 앉아 한 손을 책상 위에 올린 채 창밖으로 지나는 그녀를 바라봤던 소년이 떠올랐다.그 시절 그는 꼭 지금처럼 온화한 분위기를 풍겼으며 어린 나이치고는 언뜻 진중한 느낌도 있었다.두 사람은 어릴 적의 아쉬움을 달래듯 한참을 더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았다.그러다 시간이 얼마간 지났을 무렵 송사월이 먼저 시선을 거두었다. 손목시계를 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린 그의 눈에 더 이상의 미련은 없어 보였다.“이따 4시 15분 비행기로 나는 이곳을 떠나 부산으로 돌아갈 거야.”서유는 여전히 죄책감 가득한 표정을 짓다가 그의 초연한 얼굴을 보고는 하고 싶은 말을 삼켜버렸다.그녀는 마치 그 시절 경기하는 그를 보내듯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응, 조심히 가.”송사월은 계약서를 쥔 손에 힘을 주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서유야, 혹시 4시 15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 기억해?”서유는 잠시 고민하다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송사월은 꽉 쥔 손을 풀고 쓸쓸한 얼굴로 몸을 돌려버렸다.서유는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휠체어 바퀴 소리가 병실 문 쪽까지 도달했을 때쯤에야 17살이었던 그 시절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당시 송사월은 꽃을 들고 그녀에게 고백했었다.“서유야, 내가 너한테 고백한 시간은 4시 15분이야. 이 시간 꼭 기억해.”“응, 영원히 안 잊을게.”4시 15분은 17살의 송사월이 그녀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했던 시간이었다...서유는 고통을 참으며 병상에서 몸을 일으켜 송사월을 향해 외쳤다.“미안해. 내가 다 잊어버려서 미안해...!”그 말에 송사월은 휠체어를 멈추었다. 하지만 고개는 돌리지 않았다.“괜찮아. 나만 기억하고 있으면 돼.”서유의 눈물이 다시금 떨어지기 시작했고 등이 찢기는 듯한 고통에 식은땀도 미친 듯이 흘렀다.“사월아, 우리 다시 만날 수 있는 거지?”이제껏 잘 참아왔던 눈물이 이 순간 그의 눈에서
JS 그룹 앞에 십몇대의 고급 승용차들이 멈춰 섰다.이승하는 냉랭한 얼굴로 차에서 내리더니 긴 다리로 성큼성큼 대표이사실로 향했다.그 뒤로 소수빈이 따르고 이어서 경호원들까지 따라나섰다.이승하는 걸어가면서 소수빈을 향해 말했다.“워싱턴으로 갈 거니까 전용기 준비해 둬.”“얼마간 머무르실 예정입니까?”“1년.”이에 소수빈은 조금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그렇게나 오래요?”이승하는 아무런 대답 없이 그저 걸어가고 있었고 이에 소수빈도 뭔가 알아챈 듯 더는 묻지 않았다.“준비해두겠습니다.”이승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표이사실 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랐다.한편 대표이사실에는 이연석이 있었고 이승하가 들어오는 걸 본 그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형, 저번 회의에서 워싱턴 관련 항공 프로젝트는 셋째 형한테 맡긴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왜 형이 가요?”이승하는 정장 재킷을 벗어두더니 바로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비서가 미리 준비해둔 커피를 마시며 물었다.“말이 많은 걸 보면 같이 가고 싶은가 보지?”이연석은 그의 눈빛에 흠칫하더니 쭈뼛쭈뼛 대답했다.“아니요. 난 항공 쪽은 관심이 없어요...”이승하는 컴퓨터를 켜고 최신 재계 뉴스를 빠르게 체크한 후 임원진에게 회의 소식을 알렸다.그러고는 소파에 앉아있는 이연석을 향해 얘기했다.“내가 없는 동안 JS 그룹은 너한테 맡길 거야. 이따 너도 회의에 참석해서 2시간 내로 그룹에 관한 모든 걸 인계받도록 해.”이연석은 그 말을 듣더니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형, 나 그냥 지금이라도 아프리카 쪽으로 가면 안 될까요...?”JS 그룹은 아시아에 둔 프로젝트만 해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고 근 몇 년에는 유럽과 미국 시장까지 장악하고 있어 말 그대로 무섭게 치고 나가고 있다.그런데 그런 거대한 그룹을 고작 코딩이나 하던 애송이가 어떻게 인계받을 수 있겠는가?이승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언의 압박을 주었고 그 눈빛 한 방에 이연석은 얌전히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회의실에
최경욱의 도발에 이연석은 휴대폰을 멀리 던져버리더니 팔을 걷고는 있는 힘껏 주먹을 휘둘렀다.“일주일이면 충분해.”최경욱은 얼굴을 가격당하고도 그저 피식 웃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회의실을 나가버렸다.이연석은 자신을 낮잡아 보는듯한 최경욱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어 몇 대 더 때리고 싶었지만, 이승하가 제지하는 바람에 그저 씩씩거리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이승하는 창문밖에 드리워진 노을을 바라보았다. 힘 있고 반짝였던 그의 눈에는 어느새 칠흑 같은 어둠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이연석은 그 모습에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형, 혹시 내가 해줘야 할 게 더 있어요?”이승하는 시선을 내리며 담담하게 답했다.“나 대신 그 여자 잘 지켜보고 있어. 이상한 일에 휘말리게 하지 말고.”이연석은 ‘그 여자’가 누구를 뜻하는지 잘 알고 있다.“형, 어차피 이제는 다시 잘 될 일도 없는 여자잖아요. 그런데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해요?”이승하는 황산으로 타버린 자신의 손가락을 보며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빚진 게 있어서 그래.”그녀에게는 빚진 게 너무나도 많다. 한때는 그녀를 다치게 했고 이번에는 황산까지 대신 맞게 했으니... 이번 일은 서유가 원해서 뛰어든 일이라고는 하나 이승하는 자기 자신을 쉽게 용서할 수 없었다.이연석은 희고 예쁘기까지 했던 형의 손이 이제는 볼품없이 되어버리자 마음이 아팠다.“솔직히 나는 형이 이만큼 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이제 형도 자신을 좀 놔줘요.”“안돼.”이승하는 단호했고 이연석은 이 이상 그 어떤 말도 먹힐 것 같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형이 없는 동안 내가 잘 지켜볼게요.”이승하는 당부하듯 한 마디 더 보탰다.“괜히 신경 쓰이게 옆에서 얼쩡거리지는 말고.”“네, 알겠어요.”이연석이 한숨을 내쉬며 대답을 하고 나서야 이승하도 자리를 떠났다.어쩐지 쓸쓸해 보이는 뒷모습을 보며 이연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항상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질 수밖에 없다...이승하는 처리해야 할 일을 마
연지유는 누군가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다 이승하를 발견하고는 활짝 웃었다.“승하야, 드디어 나 만나주는 거야?”그녀는 빠르게 차 앞으로 다가갔다.“3년 동안 내가 널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알아?”이승하는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웃었다.“내가 보고 싶었다고?”“당연하지. 전에 말했잖아, 나는 너를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다고. 그러니까 당연히 보고 싶지.”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보며 이승하가 싸늘하게 물었다.“그럼 우리 형은?”그 말에 연지유의 눈에 일말의 죄책감이 스쳐 지나갔다가 곧바로 다시 표정을 바뀌며 단호한 말투로 답했다.“나는 네 형 사랑한 적 없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오직 너뿐이었어. 어렸을 때는 네가 하도 곁을 주지 않으니까 어쩔 수 없이 네 형이랑 연애한 거고...”그녀는 자신의 진심을 전해주고자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승하는 그 손을 무시한 채 오히려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고 이에 연지유는 민망한 듯 얼굴을 붉혔다.“내가 그때, 네 프러포즈를 거절하는 게 아니었는데... 네 형이 죽고 나서 바로 너와 결혼했었어야 했어...”연지유는 만약 그때 자신이 이승하와 결혼했었더라면 서유에게 그를 빼앗길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녀는 이승하의 눈에 차고자 해외까지 갔었다. 하지만 그사이 항상 냉정하던 남자의 곁에 처음 보는 여자가 서 있었고 심지어 그 여자의 얼굴은 그녀와 무척이나 비슷했다.분명히 비슷한 얼굴인데 왜 자신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는 걸까?!이제까지 그 결벽증 때문에 손 한 번 내어주지 않았으면서 서유라는 여자와는 온갖 스킨십을 다 했던 걸 떠올리며 연지유는 질투를 넘어 분노의 감정마저 들었다.그녀는 이승하를 향해 억지를 부리며 말했다.“뭐가 어떻게 되었든 간에, 너는 네 형이랑 약속한 거야. 그러니까 나와 결혼하겠다는 그 약속 지켜!”이에 이승하의 미소가 점점 더 싸늘하게 변해갔다.“나한테 접근하기 위해 우리 형을 이용해 놓고 지금 너와 결혼해 달라고? 꿈
이승하는 뒷말을 잇지 않았지만 연지유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형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이승하는 진작 그녀를 처리했을 것이다.연지유는 얼굴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화가 나면서도 갑자기 오싹해졌다.만약 이승하가 그때 일을 알게 된다면...연지유는 더 이상 상상할 수 없었고, 더 이상 이승하 앞에서 소란을 피울 용기가 없었다.그녀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악물며 코닉세그 차량이 저택으로 들어가는 것을 매섭게 노려보기만 했다.이승하는 절대 그때 일을 알아내지 못할 것이고 연지유는 오히려 그의 약점을 잡고 있었다.‘이승하, 곧 네 행동에 대한 뼈아픈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어디 두고 봐!’이승하는 별장으로 돌아와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하인에게 건네고는 소독수 한 병을 가져오라고 명령했다.하인은 재빨리 소독수를 가져왔고 이승하는 그것을 받은 후 방금 연지유의 손길이 닿은 손가락에 뿌리기 시작했다.깨끗이 소독한 후, 이승하는 서재로 걸음을 옮겨 업무와 관련된 자료를 정리한 후 서랍을 열었다.시선이 그 개인 휴대폰에 닿자 심장이 조여오더니 숨 멎을 듯한 질식감에 호흡이 가빠졌다.그는 심호흡을 하고 휴대폰을 꺼내 주소록에 적힌 유일한 이름을 가만히 쳐다보았다.서유는 이승하가 그녀의 전화번호조차 저장하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그 숫자들은 이승하의 마음속에 오래전부터 굳게 새겨졌다.그리고 이승하의 개인 휴대폰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그녀 한 사람만 존재했다.휴대폰을 들고 있던 이승하의 손이 조금씩 조여오더니 결국 고통을 참으며 휴대폰을 놓았다.그는 일어나서 금고 앞으로 가서 휴대폰을 넣고 굳게 잠갔다.이제부터 그녀와 관련된 모든 것을 만지지 않을 것이다. 그럼 아프지 않을 것이다...이승하는 금고를 만지작거리다가 돌아서서 서류와 휴대폰을 들고 서재 밖으로 나왔다.이승하의 개인 물품을 다 챙긴 소수빈은 서재에서 나오는 이승하를 보더니 급히 다가가 말했다.“대표님, 이제 출발하시죠.”이승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중의 모든 물건을 건
정가혜는 송사월과 이승하가 모두 떠난 걸 알고 급히 병원으로 달려왔다.,서유는 병상에 엎드려있었는데 등의 상처에 약을 발랐지만 여전히 헐어버린 상태였다.그녀는 머리를 옆으로 한 채 초점 없는 눈으로 꼼짝도 하지 않고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정가혜가 가까이 다가가 보니 서유는 식은땀이 날 정도로 아파하고 있었지만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작은 손으로 침대 시트를 움켜쥐고 고통을 달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그런 서유를 본 정가혜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서유야...”정가혜의 소리에 서유는 천천히 눈을 들었지만 초점을 맞출 수 없어 눈앞의 사람을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희미하게 정가혜의 모습이 보이자 서유는 메마른 입술을 벌리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가혜 언니...”서유는 보통 그렇게 정가혜를 부르지 않는다. 이렇게 정가혜를 부른다는 것은 서유가 가장 무기력한 상황이라는 걸 설명한다.정가혜는 마음이 아팠고 옆에 있던 수건을 집어 들고 허리를 굽혀 서유 이마의 땀을 닦아 주었다.“서유야, 주 선생이 아무도 널 돌봐주지 않는다고 해서 인제야 도착했어. 늦어서 미안해!”서유는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고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정가혜가 그녀의 이마를 세심하게 닦아줄 때, 그녀의 시야 속에 베개 옆의 이혼합의서가 들어왔다.그녀는 이혼합의서를 들어 위에 적힌 이름을 확인하고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어쩐지 사월이에게 전화를 거니 전원이 꺼져있더라니! 알고 보니 서유와 이혼한 거였어!’정가혜는 얼굴이 창백한 서유를 보면 볼수록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서유야, 사월이는 아마 승하 씨가 네 곁에 있을 줄 알고 이혼을 결심한 것 같아...”서유는 입꼬리를 올리며 덤덤하게 웃었다. 마치 이 일에 대해 아주 피곤한 듯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 보였다.정가혜는 병상 앞에 앉아 서유의 손을 잡고 마치 힘을 전달해주려는 듯 힘껏 주물렀다.“서유야, 괜찮아. 내가 있잖아. 난 영원히 네 옆에
주서희는 휴대폰을 의사 가운에 넣자마자 옷을 잘 차려입은 잘생긴 남자가 VIP실을 향해 걸어오는 걸 보았다.그는 주서희를 보더니 눈썹을 치켜 올리고 해맑은 눈으로 환하게 웃었다.“안녕하세요, 의사 선생님. 혹시 서유 씨 병실이 여기인가요?”그가 서유를 찾아왔다는 말을 듣고 주서희는 표정이 굳어졌다.‘벌써 서유 씨를 좋아하는 사람이 나타난 거야?’주서희는 속이 뒤집힐 것 같았지만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고 말했다.“그렇긴 한데 누구시죠?”그는 양복 주머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건네주며 말했다.“심이준입니다.”주서희는 그 금박 명함에 적힌 ‘초아 건설 회사 수석 디자이너’를 보고는 입꼬리를 씩 올렸다.“안녕하세요.”심이준은 그녀의 손을 잡고 명함을 손에 넣은 뒤 웃으며 말했다.“집 디자인 필요하시면 연락 주세요. 제가 20% 할인해 드릴게요.”말을 마친 그는 몸을 돌려 병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다만 돌아서는 순간 얼굴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심이준은 병실 입구까지 걸어간 후 걸음을 멈추고 다시 미소를 띠고는 문을 두드렸다.“서유 씨, 들어가도 될까요?”서유의 다리를 마사지 해주던 정가혜가 소리를 듣고 문밖 남자를 올려다보았다.“누구시죠?”심이준은 한 손을 문설주에 대고 적당하게 짧은 머리카락을 넘겼다.“심이준입니다.”서유는 그 이름을 듣고서야 지현우가 사람을 보내 건축에 관한 지식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고개를 돌릴 수 없었던 서유는 대답만 했다.“들어오세요.”심이준은 그제야 들어왔지만 거즈로 겹겹이 감긴 서유의 등을 보더니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하지만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고 걱정스레 말했다.“서유 씨 지금 상태로는 펜을 들 수 없을 것 같네요.”서유는 약간 겸연쩍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죄송해요. 당분간은 건축 디자인을 배울 수 없을 것 같아요.”심이준은 티끌 한 점 없이 맑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괜찮아요. 그럼 이론부터 배우죠.”그는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본 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