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들의 집중 치료 덕에 서유는 2주가 지난 시점에서 드디어 눈을 뜰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살갗이 찢겨나가는 고통에 그녀는 또다시 기절해버리고 말았다.주서희와 의사들은 다급하게 움직이며 모든 힘을 쏟아 또다시 황천길로 향하려는 그녀를 억지로 끌고 왔다.팔에 영양 수액을 꽂은 채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이승하는 다시 한번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리고 그 황산이 서유의 몸이 아닌 자신의 몸에 뿌려졌어야 했다며 자신을 자책했다.그는 유리창 너머에서 정신을 차렸다가는 또 기절하기를 반복하는 서유를 보며 심장이 아프게 옥죄어 오는 느낌을 받았다.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주서희는 모든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온 것을 확인한 뒤에야 안도의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그녀는 중환자실을 나와 복도에 서 있는 이승하와 정가혜에게 안심하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비는 다 넘겼어요.”정가혜는 그 말에 더는 참지 못하고 다리가 풀려 버렸다. 그리고 2주간 꾹 눌러왔던 감정이 폭발해 바닥에 앉아 엉엉 울어버렸다.주서희는 그런 그녀를 안아주며 동시에 시선을 들어 이승하 쪽을 바라보았다.이승하가 지금 어떤 심정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 정가혜와 마찬가지로 안도하고 있을 것이다...서유는 중환자실에 꼬박 이틀은 더 있고 난 뒤에야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정가혜가 물건을 사 들고 병실로 들어와 보니 어느새 이승하가 수건으로 서유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닦아주고 있었다.그녀는 그 모습을 보고 다시 병실을 나가 송사월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아무리 전화해봐도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서유가 중환자실에서 그 고통을 이겨내고 있을 때 송사월은 단 한 번도 얼굴을 비춘 적이 없다.정가혜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고개를 돌려 두 눈에 온통 서유만 담고 있는 이승하를 바라보다가 문득 송사월이 왜 이곳으로 오지 않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이승하는 아끼는 것을 다루듯 서유의 얼굴과 손을 닦아 주었다. 그리고 수건을 내려놓고 면봉을 꺼내 물을 묻힌 다음
그 뒤로 물을 몇 번을 더 건네준 후 이승하가 물었다.“더 줄까?”서유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우연히 그의 손에 탄 자국이 있는 걸 봐버렸고 고개를 들어 그를 향해 물었다.“손, 왜 이래요...?”이승하는 손끝이 보이지 않도록 말아쥐더니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다른 손으로 깨끗한 수건을 들었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입가를 닦아주었다.서유는 더 묻지 않고 힘겹게 병실을 둘러보았다.“나 얼마나 이러고 있었던 거예요?”“보름 정도.”고작 며칠뿐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예상외로 벌써 보름이라는 시간이 지나버렸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정가혜와 송사월은 어디 있는지 확인했다.그러다 이승하에게 물어보려는데 이승하는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들어 올려 새 베개로 갈아주더니 익숙하게 세면도구를 들고 와 그녀의 얼굴, 입안 그리고 겉에 드러난 살결을 닦아주었다.그의 행동은 그녀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항상 이렇게 돌봐왔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고 있었다.서유는 그의 손길을 받으며 조금 이상한 기분에 그저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승하는 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몇 초간 바라보다 병실에 딸린 욕실로 향했다.서유는 그의 행동을 지켜보다 그가 옷장을 지나칠 때 그 안에서 정장 한 벌을 꺼내는 것을 보았다.열린 옷장 안에는 그의 옷으로 가득했고 그 옆에는 이승하 전용 세면도구도 있었다.결벽증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옷을 이런 곳에 두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승하는 지금 그 모든 걸 감내한 채 병실 옷장에 자신의 옷들을 가득 채워 넣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결벽증 따위 전혀 상관없는듯한 태도였다.서유는 그 생각에 얼굴이 조금 복잡하게 변해 갔고 그때 마침 이승하가 다시 욕실에서 걸어 나왔다.검은색 정장을 입은 그는 몹시도 차갑고 고고해 보였다. 그리고 깔끔하게 빗어 올린 머리는 흐트러짐이 없었고 아까 지저분했던 수염도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그는 피로감을 감추고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이승하는 욕실에서 나오면
이승하는 병실 문을 열고 휠체어에 앉아있는 송사월을 힐끗 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자리를 떠나버렸다.아까 병실 안에서 두 사람이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송사월은 알 길이 없었고 이승하가 떠나는 걸 보며 급한 일이 있었겠거니 하고 별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그는 휠체어를 끌고 병상에 엎드려 있는 서유 곁으로 다가갔다.서유는 창문만 멍하니 바라보다 누군가의 실루엣에 시야가 차단되고 나서야 정신이 돌아왔다.“사월아...”남자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서유는 입꼬리를 올리며 반겼다.“왔어?”송사월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의 등에 겹겹이 쌓인 붕대를 보며 표정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많이 아프지...?”서유는 웃는 얼굴로 안 아프다고 대답하려 했지만 잠깐 움직이는 순간 또다시 극심한 고통이 찾아왔고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송사월은 다급하게 그녀의 어깨를 잡으려다가 뭔가 떠오른 듯 다시 손을 거두어들였다. 하지만 그 대신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움직이지 마. 상처 또 벌어지면 안 되잖아.”서유는 눈을 깜빡이며 알겠다고 했다.그러고는 결혼식 때보다 더 수척해진 송사월을 보며 마음이 좋지 않아 사과의 말을 건넸다.“미안해. 내가 결혼식을 망쳐버렸...”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송사월이 입을 열었다.“서유야, 네가 미안해 할 건 아무것도 없어. 네가 어떤 행동을 했건 나는 다 이해할 수 있으니까.”그 말에 서유는 더욱더 미안해졌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뭐라고 얘기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송사월은 그런 그녀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그보다 너한테 줘야 할 선물이 하나 있어.”“뭔데?”그는 이혼합의서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네 이름이 적혀 있는 곳에 사인하고 지장만 찍으면 우리는 바로 이혼할 수 있을 거야. 혼인신고도 멋대로 하고 이혼도 멋대로 결정해서 미안해...”서유는 서류를 바라보며 의문 가득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우리 다시 시작하기로 했잖아. 혹시 내가 그 사람 대신 황산을 맞아줘서 이러는 거.
송사월은 아무 말 없는 그녀를 보며 모든 걸 내려놓은 듯이 웃어 보였다.“서유야, 나는 네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어떤 모습인지 잘 알아. 너는 사랑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는 사람이야... 그래서 네가 그 사람을 대신해 황산을 맞았을 때 그건 단순히 빚을 갚으려고 한 행동이 아니라 그를 사랑해서 그런 거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어...”송사월은 자신의 반평생을 바쳐 사랑한 여자를 보며 조금 목이 메어왔다.“그 사람을 사랑하는 네 모습에서 어릴 적 네가 나를 사랑했던 모습이 떠올랐어. 나는 그런 너를 잃어버린 거고, 다시는 찾지 못하게 된 것뿐이야.”서유의 눈가는 어느새 빨갛게 달아올랐다.“미안해. 내가 먼저 너를 배신한 거야...”송사월은 고개를 저었다.“그날은 나 때문에 네가 화가 난 거고 교통사고는 어쩔 수 없었던 거야. 모든 일의 시발점은 나였어.”사실 하늘은 8년 전 교통사고 때 이미 그에게 두 사람의 인연은 끝이 났다고 얘기해준 거나 다름없었다. 그걸 악착같이 붙잡으며 놓지 못한 건 그였다...“서유야, 미안해. 내 집념 때문에 너를 그동안 놔주지 못했어. 내가 너를 조금만 더 일찍 놔줬더라면, 이 과거의 집념에서 조금만 더 일찍 벗어났더라면 네가 죄책감을 안은 채 내 곁에 남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텐데...”서유는 그를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사월아, 나는...”송사월은 그녀의 말을 자르고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네가 나랑 다시 시작해 보겠다고, 나를 다시 사랑해보겠다고 했던 것도 다 과거에 대한 집념일 뿐이야. 20년이 넘도록 이어온 정이 너무 깊어서 너도 쉽게 놓지 못했던 거야. 하지만 나는 이제 알아. 너와 나 사이에 이제 사랑은 없어...”그는 말을 마친 뒤 옷장에 있는 남자의 정장을 바라보았다.“지금은 나처럼, 아니 어쩌면 나보다 더 너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는데, 내가 무슨 자격으로 너를 계속 잡아둘 수 있겠어. 나는...”송사월은 잠시 뜸을 들이다 활짝 웃으며 말했다.“나는 네 뜨거운 사랑을 받았던 것만으로
송사월은 수중의 계약서를 내려놓고 담담하게 웃었다.서유는 그런 그의 얼굴에서 문득 어린 시절 교실 제일 뒤편에 앉아 한 손을 책상 위에 올린 채 창밖으로 지나는 그녀를 바라봤던 소년이 떠올랐다.그 시절 그는 꼭 지금처럼 온화한 분위기를 풍겼으며 어린 나이치고는 언뜻 진중한 느낌도 있었다.두 사람은 어릴 적의 아쉬움을 달래듯 한참을 더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았다.그러다 시간이 얼마간 지났을 무렵 송사월이 먼저 시선을 거두었다. 손목시계를 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린 그의 눈에 더 이상의 미련은 없어 보였다.“이따 4시 15분 비행기로 나는 이곳을 떠나 부산으로 돌아갈 거야.”서유는 여전히 죄책감 가득한 표정을 짓다가 그의 초연한 얼굴을 보고는 하고 싶은 말을 삼켜버렸다.그녀는 마치 그 시절 경기하는 그를 보내듯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응, 조심히 가.”송사월은 계약서를 쥔 손에 힘을 주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서유야, 혹시 4시 15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 기억해?”서유는 잠시 고민하다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송사월은 꽉 쥔 손을 풀고 쓸쓸한 얼굴로 몸을 돌려버렸다.서유는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휠체어 바퀴 소리가 병실 문 쪽까지 도달했을 때쯤에야 17살이었던 그 시절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당시 송사월은 꽃을 들고 그녀에게 고백했었다.“서유야, 내가 너한테 고백한 시간은 4시 15분이야. 이 시간 꼭 기억해.”“응, 영원히 안 잊을게.”4시 15분은 17살의 송사월이 그녀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했던 시간이었다...서유는 고통을 참으며 병상에서 몸을 일으켜 송사월을 향해 외쳤다.“미안해. 내가 다 잊어버려서 미안해...!”그 말에 송사월은 휠체어를 멈추었다. 하지만 고개는 돌리지 않았다.“괜찮아. 나만 기억하고 있으면 돼.”서유의 눈물이 다시금 떨어지기 시작했고 등이 찢기는 듯한 고통에 식은땀도 미친 듯이 흘렀다.“사월아, 우리 다시 만날 수 있는 거지?”이제껏 잘 참아왔던 눈물이 이 순간 그의 눈에서
JS 그룹 앞에 십몇대의 고급 승용차들이 멈춰 섰다.이승하는 냉랭한 얼굴로 차에서 내리더니 긴 다리로 성큼성큼 대표이사실로 향했다.그 뒤로 소수빈이 따르고 이어서 경호원들까지 따라나섰다.이승하는 걸어가면서 소수빈을 향해 말했다.“워싱턴으로 갈 거니까 전용기 준비해 둬.”“얼마간 머무르실 예정입니까?”“1년.”이에 소수빈은 조금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그렇게나 오래요?”이승하는 아무런 대답 없이 그저 걸어가고 있었고 이에 소수빈도 뭔가 알아챈 듯 더는 묻지 않았다.“준비해두겠습니다.”이승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표이사실 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랐다.한편 대표이사실에는 이연석이 있었고 이승하가 들어오는 걸 본 그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형, 저번 회의에서 워싱턴 관련 항공 프로젝트는 셋째 형한테 맡긴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왜 형이 가요?”이승하는 정장 재킷을 벗어두더니 바로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비서가 미리 준비해둔 커피를 마시며 물었다.“말이 많은 걸 보면 같이 가고 싶은가 보지?”이연석은 그의 눈빛에 흠칫하더니 쭈뼛쭈뼛 대답했다.“아니요. 난 항공 쪽은 관심이 없어요...”이승하는 컴퓨터를 켜고 최신 재계 뉴스를 빠르게 체크한 후 임원진에게 회의 소식을 알렸다.그러고는 소파에 앉아있는 이연석을 향해 얘기했다.“내가 없는 동안 JS 그룹은 너한테 맡길 거야. 이따 너도 회의에 참석해서 2시간 내로 그룹에 관한 모든 걸 인계받도록 해.”이연석은 그 말을 듣더니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형, 나 그냥 지금이라도 아프리카 쪽으로 가면 안 될까요...?”JS 그룹은 아시아에 둔 프로젝트만 해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고 근 몇 년에는 유럽과 미국 시장까지 장악하고 있어 말 그대로 무섭게 치고 나가고 있다.그런데 그런 거대한 그룹을 고작 코딩이나 하던 애송이가 어떻게 인계받을 수 있겠는가?이승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언의 압박을 주었고 그 눈빛 한 방에 이연석은 얌전히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회의실에
최경욱의 도발에 이연석은 휴대폰을 멀리 던져버리더니 팔을 걷고는 있는 힘껏 주먹을 휘둘렀다.“일주일이면 충분해.”최경욱은 얼굴을 가격당하고도 그저 피식 웃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회의실을 나가버렸다.이연석은 자신을 낮잡아 보는듯한 최경욱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어 몇 대 더 때리고 싶었지만, 이승하가 제지하는 바람에 그저 씩씩거리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이승하는 창문밖에 드리워진 노을을 바라보았다. 힘 있고 반짝였던 그의 눈에는 어느새 칠흑 같은 어둠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이연석은 그 모습에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형, 혹시 내가 해줘야 할 게 더 있어요?”이승하는 시선을 내리며 담담하게 답했다.“나 대신 그 여자 잘 지켜보고 있어. 이상한 일에 휘말리게 하지 말고.”이연석은 ‘그 여자’가 누구를 뜻하는지 잘 알고 있다.“형, 어차피 이제는 다시 잘 될 일도 없는 여자잖아요. 그런데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해요?”이승하는 황산으로 타버린 자신의 손가락을 보며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빚진 게 있어서 그래.”그녀에게는 빚진 게 너무나도 많다. 한때는 그녀를 다치게 했고 이번에는 황산까지 대신 맞게 했으니... 이번 일은 서유가 원해서 뛰어든 일이라고는 하나 이승하는 자기 자신을 쉽게 용서할 수 없었다.이연석은 희고 예쁘기까지 했던 형의 손이 이제는 볼품없이 되어버리자 마음이 아팠다.“솔직히 나는 형이 이만큼 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이제 형도 자신을 좀 놔줘요.”“안돼.”이승하는 단호했고 이연석은 이 이상 그 어떤 말도 먹힐 것 같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형이 없는 동안 내가 잘 지켜볼게요.”이승하는 당부하듯 한 마디 더 보탰다.“괜히 신경 쓰이게 옆에서 얼쩡거리지는 말고.”“네, 알겠어요.”이연석이 한숨을 내쉬며 대답을 하고 나서야 이승하도 자리를 떠났다.어쩐지 쓸쓸해 보이는 뒷모습을 보며 이연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항상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질 수밖에 없다...이승하는 처리해야 할 일을 마
연지유는 누군가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다 이승하를 발견하고는 활짝 웃었다.“승하야, 드디어 나 만나주는 거야?”그녀는 빠르게 차 앞으로 다가갔다.“3년 동안 내가 널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알아?”이승하는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웃었다.“내가 보고 싶었다고?”“당연하지. 전에 말했잖아, 나는 너를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다고. 그러니까 당연히 보고 싶지.”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보며 이승하가 싸늘하게 물었다.“그럼 우리 형은?”그 말에 연지유의 눈에 일말의 죄책감이 스쳐 지나갔다가 곧바로 다시 표정을 바뀌며 단호한 말투로 답했다.“나는 네 형 사랑한 적 없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오직 너뿐이었어. 어렸을 때는 네가 하도 곁을 주지 않으니까 어쩔 수 없이 네 형이랑 연애한 거고...”그녀는 자신의 진심을 전해주고자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승하는 그 손을 무시한 채 오히려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고 이에 연지유는 민망한 듯 얼굴을 붉혔다.“내가 그때, 네 프러포즈를 거절하는 게 아니었는데... 네 형이 죽고 나서 바로 너와 결혼했었어야 했어...”연지유는 만약 그때 자신이 이승하와 결혼했었더라면 서유에게 그를 빼앗길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녀는 이승하의 눈에 차고자 해외까지 갔었다. 하지만 그사이 항상 냉정하던 남자의 곁에 처음 보는 여자가 서 있었고 심지어 그 여자의 얼굴은 그녀와 무척이나 비슷했다.분명히 비슷한 얼굴인데 왜 자신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는 걸까?!이제까지 그 결벽증 때문에 손 한 번 내어주지 않았으면서 서유라는 여자와는 온갖 스킨십을 다 했던 걸 떠올리며 연지유는 질투를 넘어 분노의 감정마저 들었다.그녀는 이승하를 향해 억지를 부리며 말했다.“뭐가 어떻게 되었든 간에, 너는 네 형이랑 약속한 거야. 그러니까 나와 결혼하겠다는 그 약속 지켜!”이에 이승하의 미소가 점점 더 싸늘하게 변해갔다.“나한테 접근하기 위해 우리 형을 이용해 놓고 지금 너와 결혼해 달라고? 꿈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