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칼이 목으로 향하려 하는 순간 이승하는 가볍게 옆으로 피한 다음 남자의 손목을 반대로 꺾어버렸다. 그리고 그의 손에서 칼을 뺏어 들고 망설임 없이 그의 가슴에 찔렀다.있는 힘껏 찔러 넣은 터라 이승하의 흰 셔츠가 빨갛게 물들어버렸다.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칼을 뽑은 다음 또 한 번 힘껏 찔렀다...“대표님!”주서희보다 한발 먼저 도착한 소수빈은 그의 살의를 감지하고 다급하게 제지에 나섰다.“살인은 안 됩니다! 나머지는 저희한테 맡겨주세요!”하지만 바로 그때 환경미화원이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이승하, 어디 계속 찔러 봐! 네가 사람 하나 죽인 뒤에도 계속 꼭대기에 앉아있을지 궁금하네!”이에 이승하의 눈이 날카롭게 변하더니 소수빈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칼날을 환경미화원의 목 쪽을 향해 힘껏 찔렀다.다행히 소수빈이 한 발 더 빨랐지만, 그 칼날은 소수빈의 손등을 아프게 파고들었다.소수빈은 고통을 뒤로하고 이승하를 향해 말했다.“대표님 도발에 넘어가지 마세요. 지금은 서유 씨를 구하는 게 먼저입니다.”그때 마침 주서희가 헐레벌떡 뛰어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까맣게 변해버린 서유의 등을 발견하고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버렸다.주변에 뭐라도 있을까 싶어 둘러봤지만, 이곳에 사람을 구할 수 있는 도구 같은 건 아무것도 없었고 야속한 비만이 계속 내릴 뿐이었다.한편 휠체어에 앉은 채 굳어버렸던 송사월은 그제야 이성을 차린 듯 떨리는 목소리로 주서희에게 말했다.“서유를 보육원으로 데려 가.”주서희는 그 말에 초조한 눈빛으로 이승하를 바라보았다.“대표님, 어서 서유 씨를 보육원으로 데려가 주세요!”이승하는 그제야 손에 든 칼을 버리고 조심스럽게 서유를 안아 올린 다음 보육원 방향으로 뛰었다.주서희도 같이 뛰려고 몸을 일으켰다가 이곳으로 달려오는 정가혜를 보고 말했다.“가혜 씨, 구급차 좀 불러주세요!”정가혜는 발걸음 멈추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병원에 연락한 다음 다시 보육원으로 향했다.상황이 급박하게
보육원 내부.이승하는 주서희의 도움 아래 서유를 조심스럽게 카펫 위에 올려놓았다.주서희는 보육원 사람들에게 깨끗한 물을 가져와 달라고 부탁한 다음 서유의 등에 묻은 황산을 수건으로 닦아낸 후 깨끗한 물로 씻어 주었다.그 과정에서 서유는 의식을 잃었음에도 여전히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그리고 이승하는 옆에서 그 모습을 전부 지켜보며 심장이 난도질당하는 기분을 느꼈다.죄책감이 가슴 깊은 곳에서 피어올랐다. 그는 다시 한번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어 아무런 혈색도 없는 얼굴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그의 손끝에 스치는 서유의 피부는 차갑기 그지없었고 이승하는 이 순간 3년 전 그녀를 잃어버렸던 공포가 또다시 자신을 감싸오는 것을 느꼈다.덜덜 떨리는 손이 서유의 코 아래로 향하고 그는 그녀가 숨을 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자마자 온몸이 굳어버렸다.“서유가... 숨을 안 쉬어...”이승하의 떨리는 목소리에 주서희의 손이 멈칫하더니 서둘러 서유의 맥박을 잡아보았다.“미약하지만 아직 숨은 붙어 있어요. 하지만 전에 큰 수술을 받은 적도 있는데 이런 일까지 당해버려서 몸이 얼마나 버텨줄지는...”주서희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이승하의 이성을 잃은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니야. 괜찮을 거야. 아무 일도 일어나서는 안 돼. 내가 그렇게 안 놔둬!”그는 주서희 손에 든 물을 가져와 서유의 몸을 다급하게 씻겨내기 시작했다.정가혜는 그 모습을 보더니 더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친구를 살려달라고 하늘에 빌었다.어느새 문밖에 도착한 송사월은 뭐라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휠체어에 앉아있는 탓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지독한 무력감에 그는 애먼 자신의 다리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지금은 마치 심장 부근이 좀먹는 것처럼 아팠다.주서희는 이승하의 손에 황산이 묻을 것을 염려해 그를 제지하려고 했지만, 이승하는 그녀의 말림 따위는 듣지 않은 채 계속 분주하게 손을 움직였다.그때 보육원 밖에서 구급차 소리가 들려왔다.주
정가혜와 소수빈이 도착했을 때 이승하는 마치 폐인처럼 앉아있었다.소수빈은 그의 손끝이 까맣게 변한 것을 보고 다급하게 말했다.“대표님, 일단 손부터 치료하시죠!”그러고는 의사를 데려와 그의 손을 치료해주었다.이승하는 자신의 손이 붕대로 감길 때까지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오로지 수술실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정가혜도 꾹 닫혀있는 수술실 문을 보며 두 손을 꽉 쥐고 하늘에 빌고 있었다.영겁 같던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수술실 문이 열렸다.수술복 차림의 주서희가 땀 범벅이 된 채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정가혜가 그녀를 향해 다가가려는 그때 검은 실루엣이 빠르게 그녀의 곁을 지나쳐갔다.“어떻게 됐어?”이승하의 몸은 아직도 흠뻑 젖어있었고 빗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지만 그런 것 따위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 그는 주서희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다행히 잘 버텨줬어요. 하지만 아무래도 상처가 크다 보니 언제 의식을 차릴지는...”이승하가 수술실로 들어가려 하자 주서희가 그를 말렸다.“서유 씨는 이미 중환자실로 옮겨졌어요.”“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어.”이승하의 말에 주서희는 그와 정가혜를 데리고 ICU로 향했다.“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고 이곳에서 얼굴만 볼 수 있어요.”이승하는 유리창을 통해 혈색이 돌지 않는 얼굴로 병상에 엎드린 여인을 보며 눈시울이 붉어졌다.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다가 다시 주서희를 바라보며 물었다.“언제쯤 저기서 나올 수 있지?”주서희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대답했다.“상황을 봐야 알겠지만 최소 2주는 걸릴 거예요. 생명에 위협이 없다고 판단이 되어야 나올 수 있어요.”이승하의 몸이 눈에 띄게 굳어버렸고 그의 시선은 다시 병상 위의 여인에게로 향했다.가슴속에는 죄책감이 물밀 듯 밀려왔다.매번 그가 고집을 피운 일은 꼭 그녀를 다치게만 한다.만약 그녀를 결혼식장까지 데려다주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결혼식에 참가하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황산을 대신 맞아주는 일도 없었을 것을...일전에 그녀를 한 번 다치게 한
의사들의 집중 치료 덕에 서유는 2주가 지난 시점에서 드디어 눈을 뜰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살갗이 찢겨나가는 고통에 그녀는 또다시 기절해버리고 말았다.주서희와 의사들은 다급하게 움직이며 모든 힘을 쏟아 또다시 황천길로 향하려는 그녀를 억지로 끌고 왔다.팔에 영양 수액을 꽂은 채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이승하는 다시 한번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리고 그 황산이 서유의 몸이 아닌 자신의 몸에 뿌려졌어야 했다며 자신을 자책했다.그는 유리창 너머에서 정신을 차렸다가는 또 기절하기를 반복하는 서유를 보며 심장이 아프게 옥죄어 오는 느낌을 받았다.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주서희는 모든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온 것을 확인한 뒤에야 안도의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그녀는 중환자실을 나와 복도에 서 있는 이승하와 정가혜에게 안심하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비는 다 넘겼어요.”정가혜는 그 말에 더는 참지 못하고 다리가 풀려 버렸다. 그리고 2주간 꾹 눌러왔던 감정이 폭발해 바닥에 앉아 엉엉 울어버렸다.주서희는 그런 그녀를 안아주며 동시에 시선을 들어 이승하 쪽을 바라보았다.이승하가 지금 어떤 심정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 정가혜와 마찬가지로 안도하고 있을 것이다...서유는 중환자실에 꼬박 이틀은 더 있고 난 뒤에야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정가혜가 물건을 사 들고 병실로 들어와 보니 어느새 이승하가 수건으로 서유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닦아주고 있었다.그녀는 그 모습을 보고 다시 병실을 나가 송사월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아무리 전화해봐도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서유가 중환자실에서 그 고통을 이겨내고 있을 때 송사월은 단 한 번도 얼굴을 비춘 적이 없다.정가혜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고개를 돌려 두 눈에 온통 서유만 담고 있는 이승하를 바라보다가 문득 송사월이 왜 이곳으로 오지 않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이승하는 아끼는 것을 다루듯 서유의 얼굴과 손을 닦아 주었다. 그리고 수건을 내려놓고 면봉을 꺼내 물을 묻힌 다음
그 뒤로 물을 몇 번을 더 건네준 후 이승하가 물었다.“더 줄까?”서유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우연히 그의 손에 탄 자국이 있는 걸 봐버렸고 고개를 들어 그를 향해 물었다.“손, 왜 이래요...?”이승하는 손끝이 보이지 않도록 말아쥐더니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다른 손으로 깨끗한 수건을 들었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입가를 닦아주었다.서유는 더 묻지 않고 힘겹게 병실을 둘러보았다.“나 얼마나 이러고 있었던 거예요?”“보름 정도.”고작 며칠뿐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예상외로 벌써 보름이라는 시간이 지나버렸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정가혜와 송사월은 어디 있는지 확인했다.그러다 이승하에게 물어보려는데 이승하는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들어 올려 새 베개로 갈아주더니 익숙하게 세면도구를 들고 와 그녀의 얼굴, 입안 그리고 겉에 드러난 살결을 닦아주었다.그의 행동은 그녀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항상 이렇게 돌봐왔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고 있었다.서유는 그의 손길을 받으며 조금 이상한 기분에 그저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승하는 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몇 초간 바라보다 병실에 딸린 욕실로 향했다.서유는 그의 행동을 지켜보다 그가 옷장을 지나칠 때 그 안에서 정장 한 벌을 꺼내는 것을 보았다.열린 옷장 안에는 그의 옷으로 가득했고 그 옆에는 이승하 전용 세면도구도 있었다.결벽증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옷을 이런 곳에 두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승하는 지금 그 모든 걸 감내한 채 병실 옷장에 자신의 옷들을 가득 채워 넣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결벽증 따위 전혀 상관없는듯한 태도였다.서유는 그 생각에 얼굴이 조금 복잡하게 변해 갔고 그때 마침 이승하가 다시 욕실에서 걸어 나왔다.검은색 정장을 입은 그는 몹시도 차갑고 고고해 보였다. 그리고 깔끔하게 빗어 올린 머리는 흐트러짐이 없었고 아까 지저분했던 수염도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그는 피로감을 감추고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이승하는 욕실에서 나오면
이승하는 병실 문을 열고 휠체어에 앉아있는 송사월을 힐끗 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자리를 떠나버렸다.아까 병실 안에서 두 사람이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송사월은 알 길이 없었고 이승하가 떠나는 걸 보며 급한 일이 있었겠거니 하고 별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그는 휠체어를 끌고 병상에 엎드려 있는 서유 곁으로 다가갔다.서유는 창문만 멍하니 바라보다 누군가의 실루엣에 시야가 차단되고 나서야 정신이 돌아왔다.“사월아...”남자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서유는 입꼬리를 올리며 반겼다.“왔어?”송사월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의 등에 겹겹이 쌓인 붕대를 보며 표정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많이 아프지...?”서유는 웃는 얼굴로 안 아프다고 대답하려 했지만 잠깐 움직이는 순간 또다시 극심한 고통이 찾아왔고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송사월은 다급하게 그녀의 어깨를 잡으려다가 뭔가 떠오른 듯 다시 손을 거두어들였다. 하지만 그 대신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움직이지 마. 상처 또 벌어지면 안 되잖아.”서유는 눈을 깜빡이며 알겠다고 했다.그러고는 결혼식 때보다 더 수척해진 송사월을 보며 마음이 좋지 않아 사과의 말을 건넸다.“미안해. 내가 결혼식을 망쳐버렸...”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송사월이 입을 열었다.“서유야, 네가 미안해 할 건 아무것도 없어. 네가 어떤 행동을 했건 나는 다 이해할 수 있으니까.”그 말에 서유는 더욱더 미안해졌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뭐라고 얘기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송사월은 그런 그녀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그보다 너한테 줘야 할 선물이 하나 있어.”“뭔데?”그는 이혼합의서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네 이름이 적혀 있는 곳에 사인하고 지장만 찍으면 우리는 바로 이혼할 수 있을 거야. 혼인신고도 멋대로 하고 이혼도 멋대로 결정해서 미안해...”서유는 서류를 바라보며 의문 가득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우리 다시 시작하기로 했잖아. 혹시 내가 그 사람 대신 황산을 맞아줘서 이러는 거.
송사월은 아무 말 없는 그녀를 보며 모든 걸 내려놓은 듯이 웃어 보였다.“서유야, 나는 네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어떤 모습인지 잘 알아. 너는 사랑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는 사람이야... 그래서 네가 그 사람을 대신해 황산을 맞았을 때 그건 단순히 빚을 갚으려고 한 행동이 아니라 그를 사랑해서 그런 거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어...”송사월은 자신의 반평생을 바쳐 사랑한 여자를 보며 조금 목이 메어왔다.“그 사람을 사랑하는 네 모습에서 어릴 적 네가 나를 사랑했던 모습이 떠올랐어. 나는 그런 너를 잃어버린 거고, 다시는 찾지 못하게 된 것뿐이야.”서유의 눈가는 어느새 빨갛게 달아올랐다.“미안해. 내가 먼저 너를 배신한 거야...”송사월은 고개를 저었다.“그날은 나 때문에 네가 화가 난 거고 교통사고는 어쩔 수 없었던 거야. 모든 일의 시발점은 나였어.”사실 하늘은 8년 전 교통사고 때 이미 그에게 두 사람의 인연은 끝이 났다고 얘기해준 거나 다름없었다. 그걸 악착같이 붙잡으며 놓지 못한 건 그였다...“서유야, 미안해. 내 집념 때문에 너를 그동안 놔주지 못했어. 내가 너를 조금만 더 일찍 놔줬더라면, 이 과거의 집념에서 조금만 더 일찍 벗어났더라면 네가 죄책감을 안은 채 내 곁에 남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텐데...”서유는 그를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사월아, 나는...”송사월은 그녀의 말을 자르고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네가 나랑 다시 시작해 보겠다고, 나를 다시 사랑해보겠다고 했던 것도 다 과거에 대한 집념일 뿐이야. 20년이 넘도록 이어온 정이 너무 깊어서 너도 쉽게 놓지 못했던 거야. 하지만 나는 이제 알아. 너와 나 사이에 이제 사랑은 없어...”그는 말을 마친 뒤 옷장에 있는 남자의 정장을 바라보았다.“지금은 나처럼, 아니 어쩌면 나보다 더 너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는데, 내가 무슨 자격으로 너를 계속 잡아둘 수 있겠어. 나는...”송사월은 잠시 뜸을 들이다 활짝 웃으며 말했다.“나는 네 뜨거운 사랑을 받았던 것만으로
송사월은 수중의 계약서를 내려놓고 담담하게 웃었다.서유는 그런 그의 얼굴에서 문득 어린 시절 교실 제일 뒤편에 앉아 한 손을 책상 위에 올린 채 창밖으로 지나는 그녀를 바라봤던 소년이 떠올랐다.그 시절 그는 꼭 지금처럼 온화한 분위기를 풍겼으며 어린 나이치고는 언뜻 진중한 느낌도 있었다.두 사람은 어릴 적의 아쉬움을 달래듯 한참을 더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았다.그러다 시간이 얼마간 지났을 무렵 송사월이 먼저 시선을 거두었다. 손목시계를 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린 그의 눈에 더 이상의 미련은 없어 보였다.“이따 4시 15분 비행기로 나는 이곳을 떠나 부산으로 돌아갈 거야.”서유는 여전히 죄책감 가득한 표정을 짓다가 그의 초연한 얼굴을 보고는 하고 싶은 말을 삼켜버렸다.그녀는 마치 그 시절 경기하는 그를 보내듯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응, 조심히 가.”송사월은 계약서를 쥔 손에 힘을 주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서유야, 혹시 4시 15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 기억해?”서유는 잠시 고민하다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송사월은 꽉 쥔 손을 풀고 쓸쓸한 얼굴로 몸을 돌려버렸다.서유는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휠체어 바퀴 소리가 병실 문 쪽까지 도달했을 때쯤에야 17살이었던 그 시절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당시 송사월은 꽃을 들고 그녀에게 고백했었다.“서유야, 내가 너한테 고백한 시간은 4시 15분이야. 이 시간 꼭 기억해.”“응, 영원히 안 잊을게.”4시 15분은 17살의 송사월이 그녀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했던 시간이었다...서유는 고통을 참으며 병상에서 몸을 일으켜 송사월을 향해 외쳤다.“미안해. 내가 다 잊어버려서 미안해...!”그 말에 송사월은 휠체어를 멈추었다. 하지만 고개는 돌리지 않았다.“괜찮아. 나만 기억하고 있으면 돼.”서유의 눈물이 다시금 떨어지기 시작했고 등이 찢기는 듯한 고통에 식은땀도 미친 듯이 흘렀다.“사월아, 우리 다시 만날 수 있는 거지?”이제껏 잘 참아왔던 눈물이 이 순간 그의 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