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아, 우리 어렸을 때 크면 함께 살기로 약속했잖아. 이제 서유가 돌아왔으니 우리 집에서 함께 지내자.”정가혜가 그 별장을 산 것은, 꿈속에서 서유가 늘 다른 세계에서 집을 짓고 그들을 기다리겠다고 말할 것뿐만 아니라, 어릴 적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리고 많은 일을 겪고 생이별을 경험한 그들이니 응당 함께 살면서 서로의 존재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하지만 김민정은 이를 듣더니 황급히 제지했다.“그건 안돼요. 사월 씨는 이곳을 떠나면 위험해요.”정가혜는 잠시 어리둥절하더니 곧 알아차렸다.김시후가 죽었다고 해서 그가 영원히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김씨 가문 사람들이 아직 그가 살아 있는 것을 발견하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보아하니 그들은 더 이상 어린 시절처럼 자유롭게 함께 있을 수 없을 것 같았다.정가혜, 송사월, 서유 세 사람은 모두 성장으로 인해 각자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정가혜는 이제서야 어떤 약속과 어떤 소원은 이루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정가혜가 낙담하자 김민정은 자신이 송사월의 자유를 제한하는 줄로 오해할까 봐 황급히 설명했다.“가혜 언니, 사월 씨가 여기서 완전히 자유를 잃고 사는 건 아니에요. 영안구 일대는 모두 이씨 가문 사람들이 지키고 있어서 사월 씨는 마스크와 모자를 쓰고 이 일대에서 산책하고 쇼핑하고 영화도 볼 수 있어요. 다만 이 지역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 좋아요. 그러면 이 대표님이 사월 씨의 신변을 보장할 수 없게 되니까요.”줄곧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서유가 그 말에 안색이 변했다.이승하가 송사월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계속 사람을 보내 보호해주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그가 이렇게 하는 것은 서유뿐만 아니라 송사월에게도 자유를 주는 것이다...하지만 영안구 일대가 이렇게 큰데, 대체 얼마나 많은 인력과 재력을 동원해야 송사월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을까?이런 일련의 일들이 하나씩 밝혀지자 서유는 몸을 짓누르고 있던 그 돌이 점점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정가혜도 김민정의 말을 듣고 무의식적으로
송사월은 입꼬리를 올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생명을 빚진 은혜를 어찌 큰 선물로 다 갚을 수 있겠는가.그는 붉어진 눈으로 옆에 서 있는 서유를 바라보았다.이승하가 처음부터 끝까지 원했던 건 그저 서유 하나였음을 잘 알고 있다.하지만 송사월이 원하는 것도 서유였으니, 만약 그녀가 손을 놓는다면 송사월은 어떻게 해야 할까?서유는 무거운 마음을 억누르고 송사월에게 말했다.“내가 평생 너 돌보겠다고 약속했잖아. 그건 절대 변하지 않으니까 괜한 생각하지 마.”정가혜는 약간 놀란 듯 서유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송사월에게 그런 약속을 한 줄은 몰랐다.송사월은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아무 반응도 없는 다리를 필사적으로 눌렀다. 무너진 감정 때문에 더 이상 그들을 마주할 수가 없어 고개를 돌려 김민정에게 말했다.“나 피곤해요. 돌아가죠.”김민정은 자신이 한 말 때문에 세 사람 사이가 이상해진 것 같았지만 구체적인 이유는 알지 못했다.서유와 정가혜에게 미안한 미소를 지으며 송사월을 밀고 별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그 뒷모습을 보며 정가혜는 눈썹을 살짝 찡그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자신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면 서유가 더 난처해질까 봐 걱정되었다.정가혜가 서유를 쳐다보니 그녀는 얼굴이 창백했다. 그래서 얼른 그녀의 팔을 붙잡고 말했다.“서유야, 나랑 같이 절에 가자.”절은 매우 깨끗한 곳이었다. 서유도 그곳에 가면 스트레스와 고통을 덜 수 있을지도 모른다...서유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올 때는 정가혜가 정신이 없어 서유가 운전했지만 돌아갈 때는 서유가 혼미해져서 정가혜가 운전했다.차가 시내의 가장 번화한 지역에 들어섰을 때, 정가혜가 차를 세우고는 공물로 좋은 과일을 사겠다고 했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쇼핑몰로 들어갔다. 막 지하 1층 마트에 들어가려는데 양복 차림의 사람들이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선두에 선 남자는 늘씬한 몸매에 명품 양복을 입고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풍기고 있었다.조각 같은 얼굴은 정교하고
그 장면을 본 서유는 눈꺼풀을 약간 늘어뜨렸다.갑자기 옛날에도 이승하가 연지유의 손을 잡고 떠났던 일이 떠올랐다.당시의 서유는 뭐라 할 자격이 없었고, 지금의 서유는 더더욱 관여할 수 없었다.그들은 이미 끝난 사이이고 이승하가 누구와 함께 있든 서유와 아무 상관이 없었다.정가혜는 두 사람이 고급 차로 향하는 것을 보고는 시선을 돌려 서유를 바라보았다.긴장했던 서유가 이미 평온해진 것을 보고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그냥 팔짱 낀 것뿐이야. 별것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그리고 방금 승하 씨는 널 보지 못했어. 만약 봤더라면 당연히 다른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았겠지.”정가혜는 비록 자신의 동생인 송사월의 편이었지만 만약 서유가 여전히 이승하를 사랑한다면 슬퍼할까 봐 걱정되었다.서유는 입꼬리를 올리더니 정가혜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가혜야. 나 괜찮으니까 걱정 마.”정가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유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그럼 우리 이제 과일 사러 갈까?”서유는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돌아서서 지하 1층 쪽으로 걸어갔다.엘리베이터를 탈 때 서유는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았다.이승하가 매너 있게 차 문을 열어주는 것을 보고는 피식 웃어 보였다.럭셔리 리무진에 올라탄 이승하는 조용히 양복 재킷을 벗었다.여자는 그를 한 번 쳐다보더니 참지 못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결벽증이 아주 날로 심해지네?”맨 뒷줄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이연석은 이 여자의 목소리에 안색이 돌변했다.꼬았던 다리를 풀고 단정히 앉은 뒤 앞줄에 파티 드레스를 입은 여자를 향해 공손히 말했다.“누나.”이승연은 고개를 돌려 두려움에 빠진 이연석을 보더니 웃음이 터졌다.“연석아, 천하에 두려울 것 하나 없는 네가 왜 나만 보면 고양이 만난 쥐가 되는 거야?”이연석은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침을 꿀꺽 삼켰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손사래를 쳤다.“내가 언제... 아니에요.”입으로는 그렇게 말하지만
이승연은 방금 한 네일아트를 만지며 이연석에게 말했다.“네 동생 혼사는 걱정 마. 어려운 건 너니까. 네 평판이 좋지 않아서 많은 재벌가에서 딸을 시집보내고 싶어 하지 않거든.”이연석은 속으로는 ‘나도 싫거든’이라며 중얼거렸지만 겉으로는 개의치 않은 듯 말했다.“급하지 않으니까 천천히 해요.”이승연은 그가 아직 충분히 놀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더 이상 신경 쓰기 귀찮아 다시 이승하에게 시선을 돌렸다.“넌 어때?”시종일관 차창 밖을 바라보던 이승하는 이승연의 물음에 덤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나 신경 쓰지 말아요.”이승연의 아름다운 얼굴에 유감스러운 표정이 그려졌다.“승하야, 그 여자 때문에 평생 혼자 살 거야?”그녀는 이승하의 일을 귀국한 후에야 알게 되었다.어렸을 때부터 사사로운 감정에 흔들리지 말라고 교육받은 이승하가 여자 때문에 자살까지 할 줄은 몰랐다.이승연은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모르지만 이승하가 그 여자를 때렸고 그 바람에 상대가 목숨을 잃었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비록 목숨은 구했지만, 한 번 죽었다 살아난 사람이 어떻게 다시 이승하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이것만 봐도 두 사람은 이미 인연을 다 했는데, 지금 와서 서유에게 강요할 수는 없었다.하지만 타인의 설득에 쉽게 마음이 움직일 이승하가 아니었다.이씨 가문의 권력자로서 가정을 꾸리지 않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이승하는 ‘그 여자’라는 말을 듣고 마음이 아팠다.사지로 번지는 고통에 손바닥까지 아파졌다.그는 눈을 늘어뜨리고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땅바닥에 쓰러져 절망하는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서유에게 깊은 상처를 줬으니 평생 속죄해도 모자라는데 어떻게 다른 여자와 결혼할 수 있을까?모두 얻을 수 없으면 포기하고 다른 사람과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하지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한마음으로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이승하는 사랑이 곧 소유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김시후가 그에게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이연석의 형제 관계는 복잡하지만 또 너무 복잡한 건 아니었다.이씨 가문의 아버지 대에는 다섯 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이 다섯 명의 형제가 모두 여덟 명의 아이를 낳았다.큰형 이시원과 둘째 형 이승하는 큰아버지 댁의 자식이고, 큰누나 이승연은 둘째아버지댁의 딸이었다.이승하와 이승연은 같은 해에 태어났기 때문에 형제자매들도 모두 그들을 큰형, 큰 누나라고 불렀다.셋째 형과 넷째 형은 셋째 아버지 댁 아들이고, 다섯째 형과 여섯째 형은 넷째 아버지댁 아들이며, 이연석과 이지민은 막내 아버지의 자식이었다.손자 세대는 남자가 많고 여자가 적어서 서열 8위인 이지민은 가문의 보물 같은 존재였다.모두가 그녀의 혼사를 주시하고 있었고, 혹여나 좋은 시댁에 시집가지 못할까 봐 3, 4년부터 결혼 상대를 고르기 시작했다.처음에는 김씨 가문을 예의주시했지만 김시후가 거절해서 그만두었고, 이제 이지민이 학업을 마치고 돌아왔으니 당연히 다시 선택해야 했다.럭셔리 리무진이 시동을 걸자 뒤따르던 10여 대의 리무진이 빠르게 따라붙었다.차는 이내 이지민이 있는 아파트에 멈춰 섰고, 이승연은 차에서 내려 우아한 발걸음으로 마중 나갔다.이연석은 큰누나가 가는 것을 보고 급히 이승하에게 물었다.“형, 아까 왜 갑자기 차에서 내려 쇼핑몰에 뛰어 들어갔어요?”그의 행동에 놀란 경호원들은 모두 차에서 내려 재빨리 뒤쫓아 들어갔다.이연석은 그렇게 많은 경호원들이 있는 것을 보고 별로 걱정하지 않았지만 이승하가 대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이승하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고 덤덤한 눈동자에는 약간의 두려움이 피어올랐다.방금 서유와 닮은 뒷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몇 번 더 쳐다보았다.공교롭게도 연지유가 그 뒷모습을 따라 쇼핑몰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그는 무의식적으로 기사에게 차를 세우라고 하고 재빨리 달려갔지만 서유가 아니었다.그 순간 온몸에 식은땀을 흘리던 이승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지난날의 트라우마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3년 동안 그는
두 사람은 웃으며 차에 탄 뒤, 차를 몰고 정가혜가 자주 다니는 절로 향했다.산기슭에 도착하자마자 깊고 아득한 종소리와 염불 소리가 들렸다.이 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상쾌하고 평온하게 해 주었고 몸을 짓누르는 돌멩이마저도 가벼워지게 했다.서유는 과일을 들고 정가혜의 뒤를 따라 계단을 하나씩 오르며 더할 나위 없이 경건하게 절 안으로 들어갔다.금빛 불상들을 보았을 때, 눈에서 눈물이 솟구쳤다.마음속 가득 서러움을 안은 서유는 잠시나마 이곳에서 안정을 되찾는 기분이었다.그들이 들어간 후 한 스님이 그들을 인도하여 향불과 점괘를 흔들었고 정가혜는 절실하게 소원을 빌었다.스님이 서유의 점괘를 보더니 친절하게 말했다.“너무 많은 빚을 졌군요. 이 빚을 다 갚지 않으면 이번 생은 평안할 수 없습니다.”서유는 마음을 간파당한 듯 멍하니 있었고 얼굴빛이 조금씩 창백해졌다.스님은 빨간 소원 띠 세 개를 가져와 위에 소원을 적어 나무에 걸어놓으라고 했다.서유는 천천히 정신을 차리고 스님이 건네준 펜을 받아 소원 세 가지를 적었다.첫째, 가혜가 평안하기를.둘째, 사월이가 건강하기를.셋째...여기까지 쓴 서유는 손가락을 멈추더니 그와 관련된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스님은 서유의 망설임을 눈치채고 인자하게 말했다.“생각나는 분을 쓰셔도 됩니다. 고민하지 마세요.”그 말을 들은 서유는 다시 펜을 들었다.셋째, 이승하가 행복하기를.서유는 이승하가 행복하기를 바라며, 또한 하루빨리 여생의 동반자를 찾기를 바란다.소원을 적은 서유는 스님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돌아서서 절을 나섰다.그리고 그리 크지 않은 나무를 찾아 소원 세 개를 모두 매달았다.빨간 소원 띠가 바람에 휘날리는 것을 보며 서유는 깨끗이 내려놓았다.이승하의 부득이한 사정과, 그녀를 위해 한 일을 알고 나서 서유는 확실히 심경에 영향을 받았다.하지만 그가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것을 볼 때, 그 복잡한 마음도 서서히 사라졌다.앞으로 그는 새로운 삶을 살 것이고, 서유도 자신만의
서유는 언니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사진을 통해서만 보았는데도 아주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그런 사람이 사심 없이 자신의 심장을 내주었고 서유는 다시 태어날 기회를 얻게 되었다.하지만 김초희는 자신의 이름도 갖지 못한 채 이런 식으로 여기 묻히게 되었다...서유는 언니를 그렇게 사랑하는 지현우가 왜 그렇게 시신을 빨리 화장했는지 이해하지 못했었다.나중에 언니가 지현우를 배신했다는 말을 듣고, 지현우가 언니를 사랑하는 동시에 또 미워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지현우는 그 원한으로 언니의 시선을 무자비하게 버리게 되었고, 이 차가운 땅속에 언니를 3년 동안이나 묻혀두고 있었다.‘지현우 같은 사람이랑 평생 얽히느라 언니도 힘들었겠네. 그런데 언니가 그 사람을 10년이나 쫓아다녔다니. 진짜 지현우를 사랑했을까?’이렇게 생각한 서유는 약지에 낀 반지를 내려다보고는 빼서 묘지 앞에 놓았다.“만약 언니가 그 사람을 사랑했다면 내가 이미 언니 이름으로 영국 교회에서 결혼식을 마쳤어.”“만약 이미 마음이 떠났다고 해도 내가 이미 언니 이름으로 우리나라에서 이 결혼을 끝냈어.”10년을 쫓아다녔다는 것으로 보아, 언니는 아마도 지현우를 사랑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생명을 끝내면서 그에게서 도망치려 했다는 것은 어쩌면 마음이 변했을지도 모른다.김초희는 이미 사라졌으니 서유는 그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언니가 다음 생에는 자신을 사랑해주고 지킬 수 있는 사람을 만나기 바랄 뿐이었다.서유는 묘비 앞에서 조용히 언니의 곁을 지켰다.옆에 있던 정가혜는 서유가 언니에게 하는 말을 조용히 듣던 중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졌다.송사월도 가족을 찾았고 서유도 가족을 찾았는데 정가혜만 찾지 못했다.그녀는 어느 집안의 자식일까? 그녀의 가족은 또 어디에 있을까?정가혜는 고개를 들어 애써 눈물을 삼켰다. 원장님은 그녀가 부모에게 버림받아서 가족이 그녀를 찾아올 리 없다고 말했다.석양이 지고 묘원 마감 시간이 되자 서유는 천천히 일어나 언니와 작별을 고하
서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뭔데요?”지현우의 냉랭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그림 그릴 줄 알아요?”서유는 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했다.“네.”그녀는 어려서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어서 디자인을 배웠다.“계약 첫 번째 조항은 초희가 완성하지 못한 프로젝트를 대신해주는 거예요.”서유는 여전히 어리둥절했다. 김초희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건축 설계사이고, 서유는 그저 디자인 학과를 졸업했을 뿐인데 어떻게 언니를 대신해 프로젝트를 완성할 수 있을까?지현우는 그녀가 완성하든 못하든 계속 차갑게 말했다.“초희가 전에 설계했던 건축 도면을 초안이랑 완제품 모두 서유 씨에게 보냈어요. 그 중에 빈 그림책이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초희가 맡은 프로젝트예요. 순서대로 완성하면 돼요.”서유는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하지만 저는 건축 디자인이 아니라 브랜드 디자인을 공부해서 건축 도면은 그릴 줄 몰라요.”지현우는 몇 초 동안 침묵했다. 그의 어이없음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서울에 초희 건축회사가 있어요. 심이준이라는 사람이 수석 디자이너인데 내가 직접 서유 씨를 가르치라고 할게요. 절대 언니 명성에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배워요.”서유의 작은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하지만...”지현우는 약간 짜증스러운 말투로 말했다.“됐고 내 말대로 해요.”서유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지현우는 이번만큼은 그녀를 속이지 않았다. 확실히 언니와 관련된 일을 시켰으니 말이다.하지만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근데 왜 저보고 언니 프로젝트를 맡으라는 거죠?”지현우는 몇 초간 침묵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저도 방금 알았거든요. 초희가 이루지 못한 꿈이 있다는 거...”서유는 그의 말을 듣고 따라서 침묵했다. 알고 보니 언니는 아쉬움을 안고 세상을 떠났다.지현우는 점차 마음을 가다듬고 무심코 말했다.“서유 씨가 초희 이름으로 이 프로젝트를 완성하면 초희 대신 꿈을 이루는 거나 마찬가지예요.”서유는 언니를 위한 것임을 알고 더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