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는 이 싸이코 같은 사람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은 채 조용히 삭제하고 별장으로 돌아갔다. 지현우는 식당에 없었고 서유는 차키를 원위치에 놓아둔 후 몸을 돌려 침실로 향했다.서유가 계단을 오르려는데 공교롭게도 자신의 방에서 나오는 지현우를 마주쳤다. 손가락사이에는 이전에 그녀에게 전해주었던 서류뭉치가 끼워져있었다.“준비해요, Y 국으로 돌아가야 해요.”지현우는 그 말 한마디만 남기고 그녀의 어깨를 스치듯 지나갔다. 서유는 잠시 멍해 있다가 이내 뒤따라갔다.“저 이제 금방 귀국했는데 지금 돌아가는 건 너무 이르지 않나요?”지현우는 발걸음을 멈추고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당신이 귀국한 건 그 송사월이란 남자가 죽었는지 확인하려던 거 아니었나요? 이미 죽은 걸 확인했으니 계속 남아있을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요.”송사월을 언급하자 서유 마음속 깊이 묻혀있던 죄책감이 샅샅이 파헤쳐져 빠르게 그녀의 안색을 창백하게 물들였다. 그녀는 숨을 제대로 쉬려고 노력하며 가슴을 짓누르듯 엄습하는 죄책감을 뒤로 한 채 지현우를 바라봤다.“난 여기에 가족 같은 친구도 있어요. 옆에서 같이 있고 싶어요.”서유는 정가혜한테 앞으로 쭉 곁에 있어 주겠다고 약속했었는데 어찌 이리 빨리 떠날 수 있겠는가.“그 정가혜라는 클럽 사장이요?”서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한테 유일하게 남은 사람이었기에 더더욱 떨어지기 싫었다.“그 여자도 Y국 같이 가요 그럼.”지현우는 무표정으로 한마디를 툭 내뱉고 자기 침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이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닫히며 서유 하나만을 덩그러니 남겨뒀다.“지현우 씨.”서유는 다가가 방문을 두드리며 말했다.“우리 얘기 좀 해요.”정가혜는 이곳에 자기 집과 비즈니스가 있는데 어찌 Y 국으로 훌쩍 떠날 수 있을까. 방안의 남자는 짐 정리하기에 바쁜지 그녀의 노크를 무시해 버렸다. 서유는 연이어 방문을 두드렸음에도 지현우가 문을 열지 않자 직접 문을 열고 들어와 버렸다. 지현우는 고개를 돌리더니 서늘한 눈빛으로 서유를 쏘아봤다
서유는 침실로 돌아온 뒤 지현우가 뒤따라와 그녀를 말리지 않는 걸 보고는 살짝 초조해졌다. 지현우가 Y 국으로 가려는 건 아마도 오늘 아침을 먹을 때 그녀가 언니의 대체품이 되고 싶다 하지 않은 것 때문일 것이다. 그는 서유가 남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런 해프닝을 연출해 그녀에게 조건을 제시하고 그녀를 순종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서유 또한 어찌 다른 사람의 껍데기로 살아가겠는가, 그랬기에 그녀는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해 보이며 지현우가 생각을 접게 만들려 했다. 하지만 지현우를 놓고 말하면 주동권은 그가 잡고 있었기 때문에 서유가 어떻게 그와 머리싸움을 하든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서유는 조금 지쳐 침대에 털썩 주저앉아 옹송그리고 머리를 구석에 푹 박았다. 밖에서 지현우가 걸어들어와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고 비웃듯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짐 정리한다면서요? 왜 안 움직이고 있어요?”그의 목소리가 들리자 서유는 지기 싫은 듯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이를 꽉 깨문 뒤 그를 쏘아봤다.“기다려요.”지현우는 서유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짐짓 좋은 사람인 양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좋아요, 나랑 같이 Y 국으로 돌아가면 초희역을 해줄 필요는 없어요.”이승하가 서유를 그리도 사랑하는데 국내에 남아있다면 기필코 귀찮은 일이 생길 것이다. 그때 가서 한 여자를 두고 뺏는데 에너지를 쏟아붓느니 차라리 지금 빨리 뜨는 게 좋았다.서유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정말이에요?”지현우는 서두르지 않고 말했다.“내가 언제 거짓말하는 걸 본 적 있나요?”서유는 별로 지현우를 믿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마음속으로는 확 도망이나 가버릴 까 생각 중이었다.“도망갈 생각 말아요.”지현우는 그녀의 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사정없이 말했다.“도망가봤자 내 손아귀 안이에요.”지현우는 자신이 무슨 신이라도 되는 양 고고하게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뭐 물론 당신의 언니처럼 한다면 성공할 수도...”그가
정가혜는 등이 파인 블랙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명품 핸드백을 메고는 거실 소파에 앉아 별장 곳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서유가 계단에서 내려오는 걸 보고 그녀는 냉큼 소파에서 일어나 서유를 향해 달려갔으나 서유가 한 발 더 빨랐다.“천천히, 조심해. 넘어지지 말고.”정가혜는 서유를 부축하고는 다정하게 그녀의 단발을 쓰다듬었다.“예전에는 긴 머리만 유지하더니 지금 단발로 자르니까 더 생기 있어 보여.”서유는 씁쓸한 마음이 들었으나 정가혜 앞에서 내색하지 않았다.“예전에는 맨날 아파서 허약했으니까 생기 있을 때도 됐지.”정가혜가 안심하듯 웃었다.“네가 이렇게 생각한다는 게 뭣보다 중요한 거지.”서유는 미소로 답했다.“가혜야, 아침 먹었어?”정가혜는 고개를 끄덕였다.“먹었어.”그녀는 대답하고 주위를 둘러보더니 서유에게 물었다.“지현우 씨는?”서유는 고개를 들어 2층 침실을 바라보고는 말했다.“아마 방에서 어린이 역할로 분열되어 있을걸.”정가혜는 잠시 멍해서 이해를 못 하고 있었다. 그녀가 이해를 마쳤을 때 서유는 이미 그녀를 끌고 정원 쪽으로 가는 중이었다.“너 방금 지현우 씨를 조현병 환자라 욕한 거야?”서유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를 소파로 끌어당겼다. 하녀들이 커피와 디저트를 갖고 와 정가혜 앞에 놓았다. 정가혜는 고맙다 인사한 뒤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서유에게 물었다.“어린이는 또 무슨 뜻인데?”서유는 스푼으로 케이크를 조금 덜어내 정가혜 입가로 가져간 뒤 해석했다.“그 사람은 우리 언니를 사랑한다는 걸 인정하지 않아. 그래서 그 변함없는 충정과 지조를 기리려고 내가 붙인 별명이야.”정가혜는 케이크를 먹고 웃으며 말했다.“너네 두 사람 진짜 재밌어.”서유는 그 말을 듣고 안색이 살짝 굳어졌다. 씁쓸한 웃음이 그녀의 입가에 퍼졌고 이윽고 그녀는 입을 열었다.“가혜야, 나 곧 Y 국 가.”아까까지만 해도 케이크의 단맛을 느끼던 정가혜는 말을 듣고 순간 식욕이 깡그리 사라진 것 같았다.“왜?”여기서 계속 나랑 있어 준
그 순간, 서유는 차가웠던 마음이 순식간에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정가혜는 늘 서유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기꺼이 바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서유에게 있어 정가혜는 좋은 친구일 뿐만 아니라 까마득한 어둠 속에 깊이 빠져버린 그녀의 유일한 한 줄기의 빛과도 같은 존재이다.하지만 이토록 따뜻한 사람을 어찌 Y국으로 데려가 자신과 함께 위험을 무릅쓰게 한단 말인가?“나와 현우 씨의 관계는 너무 복잡해 앞으로 어떤 문제가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에 난 너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네가 뭘 걱정하는지 알아. 하지만 서유야...”정가혜는 굳건한 눈빛으로 서유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나한테 가족은 이제 너밖에 없어. 네가 어디에 있다면 그곳이 곧 나의 집이야.”네가 어디에 있다면 그곳이 곧 나의 집이다...그 말에 서유는 결국 꾹꾹 눌러 담았던 눈물을 왈칵 터뜨렸고 정가혜는 다급히 손을 뻗어 눈물을 쏟아내는 서유의 등을 부드럽게 두드려주었다.“우리 서유, 착하지. 울지 마. 나 아직 Y국 못 가봤는데 세상 물정 보러 간다 생각하지 뭐.”서유는 계속하여 그녀를 설득하고 싶었지만, 그때, 정가혜가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망했다. 하마터면 깜빡할 뻔했네. 나 학력이 높지 않아서 영어는 몇 마디밖에 할 줄 몰라. 안녕, 고마워 뭐 이런 것들밖에 아는 문장이 없는데 앞으로 어떻게 외국인들과 소통할 수 있을까?”이윽고 정가혜는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리며 골머리를 앓었다.“손짓만 해도 외국인들이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까?”서유는 원래 얼굴이 눈물범벅이 되도록 감정을 억제하지 못했으나 정가혜의 혼잣말을 듣는 순간 모든 감동의 눈물이 쏙 들어가는 기분이었다.그녀는 눈물을 깨끗이 닦아내며 정가혜의 말을 바로잡았다.“Y국에 가면 네가 그 외국인이 되는 거야.”그러자 정가혜는 갑자기 큰 깨달음이라도 얻은 듯 입을 열었다.“맞아. Y국에 가면 내가 외국인이니까 그 사람들이 날 배려해줘야겠네.”서유도 덩달아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다시 한번 물었다.
과거 이연석이 가장 걱정하던 일은 바로 이승하가 서유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었다.하여 몇 번을 떠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모두 부정이었고 그 뒤로는 더 이상 그를 건드리지 않았다.하지만 서유가 죽고 형이 그 여자를 위해 손목을 긋거나 미친 듯이 약을 먹으며 자살 시도를 하리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지금 막 죽음의 문턱에서 구조되어 돌아왔는데 깨어나자마자 주사기를 뽑고는 집에 돌아와 필사적으로 술을 마셔대니 정말 죽으려고 작정한듯싶다.이승하는 이연석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듣지 못했고 뼈마디가 분명한 손가락으로 그를 향해 까딱였다. “그거 줘.”이연석은 술병을 붙잡고 결코 놓아주지 않았다.“형 계속 이렇게 마시면 죽어버릴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제발 더 마시지 말아요.”그러자 이승하는 갑자기 냉소를 지으며 대꾸했다.“난 원래 살고 싶지 않았어.”이연석의 안색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버렸다. 그의 뇌리에는 순간 어릴 적 이승하가 박화영에게 시달리다 죽을 뻔했던 장면이 스쳐 지나갔고 결국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씨 가문을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이승하는 진즉 세상을 떴을지도 모른다...결국, 술병을 누르던 손가락을 풀고 다시 이승하에게 건네주었다.“적당히 마셔요.”이승하는 술을 따라 마신 후 잔을 들고 안에 든 와인을 바라보며 이연석에게 물었다.“술은 왜 쓸까?”이연석은 이승하를 힐끗 바라보고는 무거운 목소리로 답했다.“형 마음이 너무 쓰니까 술이 쓰게 느껴지는 거예요.”입꼬리가 움찔거리더니 곧이어 흰 눈처럼 차가운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그렇구나...”이연석은 과거 차갑고 무정하기만 하던 남자가 한 여인 때문에 이토록 망가지는 걸 보며 가슴이 답답했다.“형, 죽은 사람은 부활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이만 놓아주세요.”이승하는 이연석의 말에 답하지 않았고 계속하여 고개를 들어 술을 들이켰다.이연석이 계속하여 설득하려 할 때 소수빈이 바깥에서 걸어들어왔다.“대표님, 제가 진실을 알아냈습니다. 서유 아가씨는...”이연석도 이곳에 있을
이승하는 피식 냉소를 터뜨렸고 그의 냉담하고 요염한 눈매에는 자조적인 웃음기가 가득 차 있었다.그는 당장이라도 질식할 것 같은 고통을 억누르며 잔을 들어 다시 한번 원샷했다.섹시한 목젖을 타고 아픔을 삼키는 방식으로 술과 함께 모조리 삼켜버렸다.술도 통증을 마비시키지 못했는지 이승하는 아예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2층 쪽으로 비틀비틀 걸어갔다...그 쓸쓸하고 도도한 뒷모습을 보면서 이연석은 문득 할아버지의 감정이란 건 절대 묻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하필이면 이승하는 어릴 적 부터 사랑에 빠지면 안 된다고 가르침을 받았지만 동시에 그는 감정이 가장 극심했던 사람이었고 오히려 이연석은 줄곧 감정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이었다.이연석은 술잔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그와 같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소수빈을 힐끗 바라보았다.“서유 아가씨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알고도 여전히 우울해하는 걸 보니 그 사람을 찾아가 재결합을 요청했는데 거절 당한 거 아니에요?”그러다 소수빈은 우려의 시선을 거두고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서유 아가씨께서 대표님께 실망한 모양입니다.”서유 아가씨가 이 대표를 사랑하지 않는다고는 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녀는 분명 이승하를 사랑했었다.예전에 서유 아가씨를 데리러 갈 때마다 얼굴에는 웃음꽃이 만개하곤 했다.그리고 이승하가 위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직접 국을 끓여 그를 통해 몰래 이승하에게 전해주곤 하였다.이승하와 함께 있을 때 그녀는 줄곧 착하고 순종적이며 세심한 배려심을 가지고 있었다.사실 두 사람은 8호 맨션에 머물면서 오붓하게 지낼 때가 많다.다만 가끔 이승하가 갑자기 화를 내고 떠나면 오랫동안 서유에게 냉담하게 대할 때가 있었다.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이승하에게 직접 묻지도 못한 채, 두 사람은 5년 동안 이런저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나중에 이승하가 계약을 종료하기로 했을 때, 서유는 이승하로부터 단 한 푼도 요구하지 않았고 꿋꿋하게 몸판 돈을 다시 돌려줄 정도로
말을 마친 이연석은 술잔을 내려놓고 외투를 집어 들고 자리를 떴다.밖으로 나오자마자 차 문을 당기는데 마침 정가혜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그는 차에 타면서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입니까?”정가혜는 휴대폰을 꼭 쥐며 물었다.“연석 씨, 어디에 있어요? 연석 씨에게 볼 일이 생겨서요.”이연석은 하늘에 걸린 태양을 올려다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낮에 보지 말고 저녁에 보자고 하지 않았나요?”그는 이혼한 여자를 애인으로 삼았다가 부잣집 도련님들에게 수없이 많은 조롱을 받았다.또 그녀의 매력이 아까워 이연석은 조롱당하는 압력을 무릅쓰고 그녀를 여자 친구 자리에 앉혔다.하지만 대신 낮에 그녀를 만날 일은 절대 없었다. 만약 그 불량배들과 마주치게 된다면 또 비웃음 어린 조롱을 받게 될 것이고 그는 이제 더 이상 그 압력을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그러자 정가혜는 이연석의 별장을 힐끗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저 이미 연석 씨 집 앞에 있으니까 잠깐 와봐요.”이연석은 조금 짜증이 났지만 그래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받아들였다.“알겠어요. 잠깐만 기다려줘요.”이연석은 여자의 요구라면 항상 별말 없이 모두 들어주는 사람이었고 물론 여자 친구는 더 말할 것도 없다.하여 그는 전화를 끊고 차에 시동을 걸어 곧장 자신의 별장으로 돌아갔다.그리고 저 멀리 검은색 롱드레스를 입고 입구에 서서 우아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는 정가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특별히 아름다운 얼굴은 아니었지만 뚜렷한 이목구비와 온화한 눈매, 그리고 늘씬한 몸매가 더해져 매우 아름다운 자태를 뽐냈다.이연석은 세상 물정에 눈을 뜰 때부터 이런 성숙한 여인에게 관심을 가졌는데 정가혜가 마침 그의 이상형과 가장 가까웠다.그래서 그는 클럽에서 자신에게 두 번째 골절상을 입힌 여자를 만나 일부러 자신을 꼬드길 때 일부러 쉽게 넘어져 준 것이었다.그런데 자고 일어나니 갑자기 눈물을 터뜨릴 줄 누가 생각이나 했겠나. 정가혜는 눈물이 다 메마를 때까지 화장이 다 벗겨진 얼굴로 그를 가리키며 욕을 퍼부
낮에 찾아왔다고 짜증부터 낼 줄 알았는데 그녀를 보자마자 하는 말이 담배를 피우지 말라는 말일 줄 예상하지 못했다.정가혜는 원래 멋지게 연석 씨, 우리 헤어져요. 라고 말한 뒤 다시 돌아설 예정이었으나 뜻밖의 상황에 갑자기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이연석은 그녀의 손을 잡고 함께 별장 안으로 걸어갔다. “무슨 급한 일이 있어 저를 찾았어요? 오랜만에 하고 싶은 거예요?”정가혜는 약간 감동하는 듯싶었으나 이연석의 말을 듣고 얼굴이 굳어지고 말았다. “그게 아니라, 저는...”정가혜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연석은 갑자기 돌아서더니 그녀의 턱을 잡고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추었다.슬픔에 잠긴 깊은 키스에 질식할 뻔했던 정가혜는 그의 허리를 힘껏 꼬집고 나서야 멈출 수 있었다.겨우 한숨을 돌리자 이연석은 또 갑자기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는 침실로 걸어갔다.이연석은 그녀를 침대로 내던진 뒤 넥타이를 풀고 셔츠 깃을 풀며 그대로 눌러버렸다.모든 과정이 끝나고 정가혜는 습관적으로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담배를 피웠지만, 이연석은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왜 그렇게 말을 안 들어요...”정가혜는 그의 품에 안겨 목선이 뚜렷한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다시는 안 필게요.”그녀만의 서유가 다시 돌아왔으니 이제 술과 담배로 마음의 고통을 완화할 필요도 없었고 단지 중독되어 끊는 데 시간이 걸릴 뿐입니다.이연석은 갑자기 고개를 숙이더니 그녀의 반들반들한 이마에 입술을 포갰다.“그래요. 이래야 착하지.”이연석의 응석 부리는 말투는 정가혜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지만, 이연석이 어떤 여자를 대하든 줄곧 부드럽게 대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으니 애써 마음속의 잔잔한 물결을 억누르기 위해 노력했다.정가혜는 이연석을 밀어내고 일어나 옷을 잘 차려입은 후 침대 옆에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이연석 씨, 우리 헤어져요...”그러자 이연석은 멍해져서 깊은 눈을 들어 정가혜를 바라보았고 제때 대답하지 못한 채 말없이 그녀를 훑어보기만 했다.정가혜는 항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