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가 서유에게 한 짓은 그가 언니한테 저지른 짓의 십분의 일밖에 안 된다고? 그게 언니가 그를 피해 급급히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유였을까? 지현우... 도대체 어떤 사람인 걸까?서유는 거실 속으로 멀어져가는 고독한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손을 들어 자기 심장을 어루만졌다. 언니가 살아온 삶은 어쩌면 내가 살아온 삶보다 더 처량하고 고통스러웠을지도. 서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언니는 이미 세상을 떴고 더 이상 답을 얻을 곳은 어디에도 없다.서유는 한참 동안 멍하니 소파에 앉아있다가 몸을 일으켜 침실로 향했다. 창문을 열었을 때 그녀는 건물 아래에 아직도 세워져 있는 코닉세그를 발견했다. 서유의 눈초리가 파르르 떨려왔다. 갈기갈기 찢겨버린 마음을 뒤로 한 채 서유는 창문을 닫고 커튼을 친 후 세워져 있던 그 차를 시선에서 완벽히 차단해 버렸다.이승하를 본 탓이었을까, 그날 밤 서유는 악몽에 시달렸다. 그에게 수도 없이 실망하고 절망을 느끼고 상처받던 나날들...셀 수 없이 많은 아픈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와 그녀의 꿈을 파고들었다. 서유가 몽롱한 정신으로 깨어났을 때 이미 날이 밝은 후였다.깨어난 뒤 습관적으로 커튼을 열어젖혔을 때, 코닉세그는 자리에 없었다. 안도의 숨을 내쉬고 서유는 몸을 돌려 욕실로 향했다. 세수를 마치고 내려왔더니 이미 하녀들이 서양식 아침을 차려놓고 있었다.지현우는 식탁 앞에 앉아있었고 빠르지 않은 손길로 여유롭게 빵 위에 치즈를 바르고 있었다. 서유가 앉는 걸 보고는 지현우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한번 훑었다.“어제 그 남자 말이에요. 약을 많이 먹었나 봐요. 기절해서 두세 시쯤인가 구급차에 실려갔어요...”빵을 가져가던 서유의 손이 잠시 멈칫했으나 이내 아무 일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빵조각을 한입 베어 물고 지현우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지현우도 더 이상 서유를 보지 않고 방금 치즈를 다 바른 빵을 그녀에게 건넸다.“서유 씨 언니가 치즈를 참 좋아했는데.”서유는 치즈를 듬뿍 바른 빵을 한 번
서유는 이 싸이코 같은 사람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은 채 조용히 삭제하고 별장으로 돌아갔다. 지현우는 식당에 없었고 서유는 차키를 원위치에 놓아둔 후 몸을 돌려 침실로 향했다.서유가 계단을 오르려는데 공교롭게도 자신의 방에서 나오는 지현우를 마주쳤다. 손가락사이에는 이전에 그녀에게 전해주었던 서류뭉치가 끼워져있었다.“준비해요, Y 국으로 돌아가야 해요.”지현우는 그 말 한마디만 남기고 그녀의 어깨를 스치듯 지나갔다. 서유는 잠시 멍해 있다가 이내 뒤따라갔다.“저 이제 금방 귀국했는데 지금 돌아가는 건 너무 이르지 않나요?”지현우는 발걸음을 멈추고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당신이 귀국한 건 그 송사월이란 남자가 죽었는지 확인하려던 거 아니었나요? 이미 죽은 걸 확인했으니 계속 남아있을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요.”송사월을 언급하자 서유 마음속 깊이 묻혀있던 죄책감이 샅샅이 파헤쳐져 빠르게 그녀의 안색을 창백하게 물들였다. 그녀는 숨을 제대로 쉬려고 노력하며 가슴을 짓누르듯 엄습하는 죄책감을 뒤로 한 채 지현우를 바라봤다.“난 여기에 가족 같은 친구도 있어요. 옆에서 같이 있고 싶어요.”서유는 정가혜한테 앞으로 쭉 곁에 있어 주겠다고 약속했었는데 어찌 이리 빨리 떠날 수 있겠는가.“그 정가혜라는 클럽 사장이요?”서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한테 유일하게 남은 사람이었기에 더더욱 떨어지기 싫었다.“그 여자도 Y국 같이 가요 그럼.”지현우는 무표정으로 한마디를 툭 내뱉고 자기 침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이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닫히며 서유 하나만을 덩그러니 남겨뒀다.“지현우 씨.”서유는 다가가 방문을 두드리며 말했다.“우리 얘기 좀 해요.”정가혜는 이곳에 자기 집과 비즈니스가 있는데 어찌 Y 국으로 훌쩍 떠날 수 있을까. 방안의 남자는 짐 정리하기에 바쁜지 그녀의 노크를 무시해 버렸다. 서유는 연이어 방문을 두드렸음에도 지현우가 문을 열지 않자 직접 문을 열고 들어와 버렸다. 지현우는 고개를 돌리더니 서늘한 눈빛으로 서유를 쏘아봤다
서유는 침실로 돌아온 뒤 지현우가 뒤따라와 그녀를 말리지 않는 걸 보고는 살짝 초조해졌다. 지현우가 Y 국으로 가려는 건 아마도 오늘 아침을 먹을 때 그녀가 언니의 대체품이 되고 싶다 하지 않은 것 때문일 것이다. 그는 서유가 남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런 해프닝을 연출해 그녀에게 조건을 제시하고 그녀를 순종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서유 또한 어찌 다른 사람의 껍데기로 살아가겠는가, 그랬기에 그녀는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해 보이며 지현우가 생각을 접게 만들려 했다. 하지만 지현우를 놓고 말하면 주동권은 그가 잡고 있었기 때문에 서유가 어떻게 그와 머리싸움을 하든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서유는 조금 지쳐 침대에 털썩 주저앉아 옹송그리고 머리를 구석에 푹 박았다. 밖에서 지현우가 걸어들어와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고 비웃듯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짐 정리한다면서요? 왜 안 움직이고 있어요?”그의 목소리가 들리자 서유는 지기 싫은 듯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이를 꽉 깨문 뒤 그를 쏘아봤다.“기다려요.”지현우는 서유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짐짓 좋은 사람인 양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좋아요, 나랑 같이 Y 국으로 돌아가면 초희역을 해줄 필요는 없어요.”이승하가 서유를 그리도 사랑하는데 국내에 남아있다면 기필코 귀찮은 일이 생길 것이다. 그때 가서 한 여자를 두고 뺏는데 에너지를 쏟아붓느니 차라리 지금 빨리 뜨는 게 좋았다.서유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정말이에요?”지현우는 서두르지 않고 말했다.“내가 언제 거짓말하는 걸 본 적 있나요?”서유는 별로 지현우를 믿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마음속으로는 확 도망이나 가버릴 까 생각 중이었다.“도망갈 생각 말아요.”지현우는 그녀의 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사정없이 말했다.“도망가봤자 내 손아귀 안이에요.”지현우는 자신이 무슨 신이라도 되는 양 고고하게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뭐 물론 당신의 언니처럼 한다면 성공할 수도...”그가
정가혜는 등이 파인 블랙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명품 핸드백을 메고는 거실 소파에 앉아 별장 곳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서유가 계단에서 내려오는 걸 보고 그녀는 냉큼 소파에서 일어나 서유를 향해 달려갔으나 서유가 한 발 더 빨랐다.“천천히, 조심해. 넘어지지 말고.”정가혜는 서유를 부축하고는 다정하게 그녀의 단발을 쓰다듬었다.“예전에는 긴 머리만 유지하더니 지금 단발로 자르니까 더 생기 있어 보여.”서유는 씁쓸한 마음이 들었으나 정가혜 앞에서 내색하지 않았다.“예전에는 맨날 아파서 허약했으니까 생기 있을 때도 됐지.”정가혜가 안심하듯 웃었다.“네가 이렇게 생각한다는 게 뭣보다 중요한 거지.”서유는 미소로 답했다.“가혜야, 아침 먹었어?”정가혜는 고개를 끄덕였다.“먹었어.”그녀는 대답하고 주위를 둘러보더니 서유에게 물었다.“지현우 씨는?”서유는 고개를 들어 2층 침실을 바라보고는 말했다.“아마 방에서 어린이 역할로 분열되어 있을걸.”정가혜는 잠시 멍해서 이해를 못 하고 있었다. 그녀가 이해를 마쳤을 때 서유는 이미 그녀를 끌고 정원 쪽으로 가는 중이었다.“너 방금 지현우 씨를 조현병 환자라 욕한 거야?”서유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를 소파로 끌어당겼다. 하녀들이 커피와 디저트를 갖고 와 정가혜 앞에 놓았다. 정가혜는 고맙다 인사한 뒤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서유에게 물었다.“어린이는 또 무슨 뜻인데?”서유는 스푼으로 케이크를 조금 덜어내 정가혜 입가로 가져간 뒤 해석했다.“그 사람은 우리 언니를 사랑한다는 걸 인정하지 않아. 그래서 그 변함없는 충정과 지조를 기리려고 내가 붙인 별명이야.”정가혜는 케이크를 먹고 웃으며 말했다.“너네 두 사람 진짜 재밌어.”서유는 그 말을 듣고 안색이 살짝 굳어졌다. 씁쓸한 웃음이 그녀의 입가에 퍼졌고 이윽고 그녀는 입을 열었다.“가혜야, 나 곧 Y 국 가.”아까까지만 해도 케이크의 단맛을 느끼던 정가혜는 말을 듣고 순간 식욕이 깡그리 사라진 것 같았다.“왜?”여기서 계속 나랑 있어 준
그 순간, 서유는 차가웠던 마음이 순식간에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정가혜는 늘 서유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기꺼이 바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서유에게 있어 정가혜는 좋은 친구일 뿐만 아니라 까마득한 어둠 속에 깊이 빠져버린 그녀의 유일한 한 줄기의 빛과도 같은 존재이다.하지만 이토록 따뜻한 사람을 어찌 Y국으로 데려가 자신과 함께 위험을 무릅쓰게 한단 말인가?“나와 현우 씨의 관계는 너무 복잡해 앞으로 어떤 문제가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에 난 너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네가 뭘 걱정하는지 알아. 하지만 서유야...”정가혜는 굳건한 눈빛으로 서유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나한테 가족은 이제 너밖에 없어. 네가 어디에 있다면 그곳이 곧 나의 집이야.”네가 어디에 있다면 그곳이 곧 나의 집이다...그 말에 서유는 결국 꾹꾹 눌러 담았던 눈물을 왈칵 터뜨렸고 정가혜는 다급히 손을 뻗어 눈물을 쏟아내는 서유의 등을 부드럽게 두드려주었다.“우리 서유, 착하지. 울지 마. 나 아직 Y국 못 가봤는데 세상 물정 보러 간다 생각하지 뭐.”서유는 계속하여 그녀를 설득하고 싶었지만, 그때, 정가혜가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망했다. 하마터면 깜빡할 뻔했네. 나 학력이 높지 않아서 영어는 몇 마디밖에 할 줄 몰라. 안녕, 고마워 뭐 이런 것들밖에 아는 문장이 없는데 앞으로 어떻게 외국인들과 소통할 수 있을까?”이윽고 정가혜는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리며 골머리를 앓었다.“손짓만 해도 외국인들이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까?”서유는 원래 얼굴이 눈물범벅이 되도록 감정을 억제하지 못했으나 정가혜의 혼잣말을 듣는 순간 모든 감동의 눈물이 쏙 들어가는 기분이었다.그녀는 눈물을 깨끗이 닦아내며 정가혜의 말을 바로잡았다.“Y국에 가면 네가 그 외국인이 되는 거야.”그러자 정가혜는 갑자기 큰 깨달음이라도 얻은 듯 입을 열었다.“맞아. Y국에 가면 내가 외국인이니까 그 사람들이 날 배려해줘야겠네.”서유도 덩달아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다시 한번 물었다.
과거 이연석이 가장 걱정하던 일은 바로 이승하가 서유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었다.하여 몇 번을 떠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모두 부정이었고 그 뒤로는 더 이상 그를 건드리지 않았다.하지만 서유가 죽고 형이 그 여자를 위해 손목을 긋거나 미친 듯이 약을 먹으며 자살 시도를 하리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지금 막 죽음의 문턱에서 구조되어 돌아왔는데 깨어나자마자 주사기를 뽑고는 집에 돌아와 필사적으로 술을 마셔대니 정말 죽으려고 작정한듯싶다.이승하는 이연석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듣지 못했고 뼈마디가 분명한 손가락으로 그를 향해 까딱였다. “그거 줘.”이연석은 술병을 붙잡고 결코 놓아주지 않았다.“형 계속 이렇게 마시면 죽어버릴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제발 더 마시지 말아요.”그러자 이승하는 갑자기 냉소를 지으며 대꾸했다.“난 원래 살고 싶지 않았어.”이연석의 안색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버렸다. 그의 뇌리에는 순간 어릴 적 이승하가 박화영에게 시달리다 죽을 뻔했던 장면이 스쳐 지나갔고 결국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씨 가문을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이승하는 진즉 세상을 떴을지도 모른다...결국, 술병을 누르던 손가락을 풀고 다시 이승하에게 건네주었다.“적당히 마셔요.”이승하는 술을 따라 마신 후 잔을 들고 안에 든 와인을 바라보며 이연석에게 물었다.“술은 왜 쓸까?”이연석은 이승하를 힐끗 바라보고는 무거운 목소리로 답했다.“형 마음이 너무 쓰니까 술이 쓰게 느껴지는 거예요.”입꼬리가 움찔거리더니 곧이어 흰 눈처럼 차가운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그렇구나...”이연석은 과거 차갑고 무정하기만 하던 남자가 한 여인 때문에 이토록 망가지는 걸 보며 가슴이 답답했다.“형, 죽은 사람은 부활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이만 놓아주세요.”이승하는 이연석의 말에 답하지 않았고 계속하여 고개를 들어 술을 들이켰다.이연석이 계속하여 설득하려 할 때 소수빈이 바깥에서 걸어들어왔다.“대표님, 제가 진실을 알아냈습니다. 서유 아가씨는...”이연석도 이곳에 있을
이승하는 피식 냉소를 터뜨렸고 그의 냉담하고 요염한 눈매에는 자조적인 웃음기가 가득 차 있었다.그는 당장이라도 질식할 것 같은 고통을 억누르며 잔을 들어 다시 한번 원샷했다.섹시한 목젖을 타고 아픔을 삼키는 방식으로 술과 함께 모조리 삼켜버렸다.술도 통증을 마비시키지 못했는지 이승하는 아예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2층 쪽으로 비틀비틀 걸어갔다...그 쓸쓸하고 도도한 뒷모습을 보면서 이연석은 문득 할아버지의 감정이란 건 절대 묻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하필이면 이승하는 어릴 적 부터 사랑에 빠지면 안 된다고 가르침을 받았지만 동시에 그는 감정이 가장 극심했던 사람이었고 오히려 이연석은 줄곧 감정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이었다.이연석은 술잔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그와 같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소수빈을 힐끗 바라보았다.“서유 아가씨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알고도 여전히 우울해하는 걸 보니 그 사람을 찾아가 재결합을 요청했는데 거절 당한 거 아니에요?”그러다 소수빈은 우려의 시선을 거두고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서유 아가씨께서 대표님께 실망한 모양입니다.”서유 아가씨가 이 대표를 사랑하지 않는다고는 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녀는 분명 이승하를 사랑했었다.예전에 서유 아가씨를 데리러 갈 때마다 얼굴에는 웃음꽃이 만개하곤 했다.그리고 이승하가 위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직접 국을 끓여 그를 통해 몰래 이승하에게 전해주곤 하였다.이승하와 함께 있을 때 그녀는 줄곧 착하고 순종적이며 세심한 배려심을 가지고 있었다.사실 두 사람은 8호 맨션에 머물면서 오붓하게 지낼 때가 많다.다만 가끔 이승하가 갑자기 화를 내고 떠나면 오랫동안 서유에게 냉담하게 대할 때가 있었다.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이승하에게 직접 묻지도 못한 채, 두 사람은 5년 동안 이런저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나중에 이승하가 계약을 종료하기로 했을 때, 서유는 이승하로부터 단 한 푼도 요구하지 않았고 꿋꿋하게 몸판 돈을 다시 돌려줄 정도로
말을 마친 이연석은 술잔을 내려놓고 외투를 집어 들고 자리를 떴다.밖으로 나오자마자 차 문을 당기는데 마침 정가혜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그는 차에 타면서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입니까?”정가혜는 휴대폰을 꼭 쥐며 물었다.“연석 씨, 어디에 있어요? 연석 씨에게 볼 일이 생겨서요.”이연석은 하늘에 걸린 태양을 올려다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낮에 보지 말고 저녁에 보자고 하지 않았나요?”그는 이혼한 여자를 애인으로 삼았다가 부잣집 도련님들에게 수없이 많은 조롱을 받았다.또 그녀의 매력이 아까워 이연석은 조롱당하는 압력을 무릅쓰고 그녀를 여자 친구 자리에 앉혔다.하지만 대신 낮에 그녀를 만날 일은 절대 없었다. 만약 그 불량배들과 마주치게 된다면 또 비웃음 어린 조롱을 받게 될 것이고 그는 이제 더 이상 그 압력을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그러자 정가혜는 이연석의 별장을 힐끗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저 이미 연석 씨 집 앞에 있으니까 잠깐 와봐요.”이연석은 조금 짜증이 났지만 그래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받아들였다.“알겠어요. 잠깐만 기다려줘요.”이연석은 여자의 요구라면 항상 별말 없이 모두 들어주는 사람이었고 물론 여자 친구는 더 말할 것도 없다.하여 그는 전화를 끊고 차에 시동을 걸어 곧장 자신의 별장으로 돌아갔다.그리고 저 멀리 검은색 롱드레스를 입고 입구에 서서 우아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는 정가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특별히 아름다운 얼굴은 아니었지만 뚜렷한 이목구비와 온화한 눈매, 그리고 늘씬한 몸매가 더해져 매우 아름다운 자태를 뽐냈다.이연석은 세상 물정에 눈을 뜰 때부터 이런 성숙한 여인에게 관심을 가졌는데 정가혜가 마침 그의 이상형과 가장 가까웠다.그래서 그는 클럽에서 자신에게 두 번째 골절상을 입힌 여자를 만나 일부러 자신을 꼬드길 때 일부러 쉽게 넘어져 준 것이었다.그런데 자고 일어나니 갑자기 눈물을 터뜨릴 줄 누가 생각이나 했겠나. 정가혜는 눈물이 다 메마를 때까지 화장이 다 벗겨진 얼굴로 그를 가리키며 욕을 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