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는 그 편지가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을 보고 흠칫 놀란 기색을 보였다.그녀는 대체 언제부터 이승하라는 사람한테 실망하고 있었던 걸까?그 남자가 자신을 끌어안고 친밀한 애정행각을 하면서, 입으로는 너를 좋아하게 될 거라는 기대하지 말라고 했던 그때였을까?그 말에 그녀는 깨달았던 것 같다. 남자한테 본인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단지 그냥 그의 분풀이 상대였음을.그런데 지금...서유는 고개를 들어 반쯤 눈이 돌아간 이승하를 바라보았다. 기억 속의 이승하는 늘 콧대 높은 자태로 옆 사람을 대하는 모습이었다. 지금 같은 그의 모습은 그녀도 처음 보는 거라 도통 무슨 감정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함께 있을 때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녀가 전에 쓴 몇 마디 말을 가지고 그녀한테 따지는 행동은 대체 무슨 의미일까?의미라 하면, 아무래도 마침표인 것 같다.그녀가 그런 글을 남겼던 건, 스스로 다짐하고 내려놓기 위해서였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 사람과의 안녕을 글로 썼고 펜을 내려놓았다. 그걸로 마음도 관계도 매듭을 지었고 정리했다. 이 헛된 꿈의 짝사랑은 그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을 때, 완전히 끝났음을 알아차렸다.서유는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그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서 들었고, 잠시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읽어보다가, 망설임 없이 편지를 찢어버렸다. 이승하가 손을 뻗었을 땐 이미 늦었다... 편지가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을 눈으로 볼 수밖에 없었던 그는 붉어진 눈시울로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뭐 하는 거야...”서유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더니 덤덤한 미소를 지었다.“승하 씨, 편지 내가 별 의미 없이 쓴 것에요. 당신한테 뭘 남기고 싶어서 쓴 게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았으면 해요.”이승하의 얼굴은 창백해지고 눈가는 빨개져서 찢어진 편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지난 3년을, 천일 밤낮을 자신이 어떻게 보냈는데...그를 지탱해 왔던 건 수면제와 이 편지에 적힌 몇 자 안 되는 글이 다였다. 지금까
이승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가로등 아래 가냘픈 그림자를 보았다. 삼 년이나 오매불망 기다려왔던 사람이었다.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라도, 단지 한 마디뿐일지라도 불러주기만 한다면 모든 걸 버리고 당장 달려가 품에 안고 싶은 사람이었다.하지만 이승하가 겨우 한 발짝만 내디뎠을 뿐인데 서유는 뒤로 세 걸음 물러났다.“다가오지 마세요.”서유의 얼굴에는 어떠한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그저 한없이 담담하고 평온했을 뿐.“제가 할 말은 이게 전부예요. 그리고 이후에 절 찾는 일이 없었으면 해요.”이승하는 서유가 자신을 불러세운 이유가 붙잡는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이승하더러 더 이상 자신에게 들러붙지 말아달라 부탁하고 있었다.이승하의 수려한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고 온몸이 저릿저릿해 오는 고통은 그로 하여금 숨 쉬는 것조차 버겁게 만들었다. 그러나 서유는 그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위에 말만 남긴 뒤 몸을 돌려 별장으로 걸어들어갔다.너무나도 단호해 보이는 뒷모습이 멀어져가는 걸 보면서 이승하의 몸이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멀리 서 있던 소수빈이 거의 쓰러지려 하는 이승하를 재빨리 다가와 부축했다.“대표님, 괜찮으십니까?”이승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슴을 에는 듯한 고통은 이윽고 지독한 두통으로 이어졌다. 이승하는 차 문 앞에 비스듬히 기대서는 고개를 틀어 소수빈을 바라보며 말했다.“약 가져와...”소수빈은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대표님, 그 약 더 드시면 안 됩니다. 몸에 무리가 갈 겁니다.”이승하는 충혈돼 벌게진 눈으로 소수빈을 노려보며 말했다.“약까지 못 먹게 하면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그 누가 알고 있을까, 어떡해야 하는 건지. 마음 깊숙이 자리 잡은 그 여자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 잊을 수 있는지...“대표님...”소수빈은 일순간 어떻게 이승하를 위로하면 좋을지 몰랐다. 3 년 동안, 이승하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소수빈이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소수빈은 이승하가 약으로 하루하루를
여기까지 생각한 이승하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소수빈에게 말했다.“지현우와 김초희에 대해서 알아봐.”“네, 알겠습니다.”소수빈이 몸을 돌려 차를 타려는 그때, 이승하가 소수빈을 불러세웠다.“그리고...”“대표님, 말씀하십시오.”이승하는 입을 뻐끔거리더니 말을 뱉었다.“지현우가 서유를 구했는지 알아봐. 화장터에서부터 싹 다.”조지가 말하기를 몸이 있고 뇌가 죽어버리지만 않는다면 심장을 바꿔 살아남을 수 있다고 했다. 서유의 몸에 아무런 결함도 없는 걸 보면 아마 그녀가 화장될 때 누군가에 의해 은밀히 옮겨진 게 틀림없었다. 몸을 옮긴 사람은 심지어 그녀에게 새로운 심장을 주었고 그녀를 살렸다. 이승하는 지현우의 짓이라 생각했지만 도대체 무슨 목적에서 비롯된 행동인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이승하는 손안의 담배를 갖고 이리저리 굴리며 재차 소수빈한테 당부했다.“절대 영국에서 전해오는 어떠한 소식도 믿지 말고 직접 알아봐.”...서유는 별장 안에 들어서자마자 정원 소파에 앉아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자신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지현우를 발견했다.“얘기 끝났어요?”서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더 이상 말하기 싫다는 듯 거실로 발걸음을 옮겼다.“이리 와요.”지현우는 그녀를 향해 이리 와 앉으라는 듯 턱짓했다.“피곤해요, 좀 자야겠어요.”서유는 자신을 가만히 내버려둬달라는 뜻을 내비쳤다.“그래요, 그럼.”지현우의 대답을 듣고 난 서유는 다시 발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아직 두 발짝도 채 가지 않았을 때 지현우의 담담한 목소리가 뒤에서 전해져왔다.“이후부터 출입 금지예요.”그가 이리 나올 거라 예상했던 서유였다. 그 지현우가 조용히 넘어갈 리 없지, 서유는 이를 갈며 다시 돌아와 그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앉는 행동에 분이 담겼지만 지현우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테이블 위의 와인을 잔에 부어 그녀에게 건넸다.“이건 마실 수 없어요...”그렇게 큰 수술을 하고 술담배를 입에 대서는 좋을
이승하가 서유에게 한 짓은 그가 언니한테 저지른 짓의 십분의 일밖에 안 된다고? 그게 언니가 그를 피해 급급히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유였을까? 지현우... 도대체 어떤 사람인 걸까?서유는 거실 속으로 멀어져가는 고독한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손을 들어 자기 심장을 어루만졌다. 언니가 살아온 삶은 어쩌면 내가 살아온 삶보다 더 처량하고 고통스러웠을지도. 서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언니는 이미 세상을 떴고 더 이상 답을 얻을 곳은 어디에도 없다.서유는 한참 동안 멍하니 소파에 앉아있다가 몸을 일으켜 침실로 향했다. 창문을 열었을 때 그녀는 건물 아래에 아직도 세워져 있는 코닉세그를 발견했다. 서유의 눈초리가 파르르 떨려왔다. 갈기갈기 찢겨버린 마음을 뒤로 한 채 서유는 창문을 닫고 커튼을 친 후 세워져 있던 그 차를 시선에서 완벽히 차단해 버렸다.이승하를 본 탓이었을까, 그날 밤 서유는 악몽에 시달렸다. 그에게 수도 없이 실망하고 절망을 느끼고 상처받던 나날들...셀 수 없이 많은 아픈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와 그녀의 꿈을 파고들었다. 서유가 몽롱한 정신으로 깨어났을 때 이미 날이 밝은 후였다.깨어난 뒤 습관적으로 커튼을 열어젖혔을 때, 코닉세그는 자리에 없었다. 안도의 숨을 내쉬고 서유는 몸을 돌려 욕실로 향했다. 세수를 마치고 내려왔더니 이미 하녀들이 서양식 아침을 차려놓고 있었다.지현우는 식탁 앞에 앉아있었고 빠르지 않은 손길로 여유롭게 빵 위에 치즈를 바르고 있었다. 서유가 앉는 걸 보고는 지현우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한번 훑었다.“어제 그 남자 말이에요. 약을 많이 먹었나 봐요. 기절해서 두세 시쯤인가 구급차에 실려갔어요...”빵을 가져가던 서유의 손이 잠시 멈칫했으나 이내 아무 일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빵조각을 한입 베어 물고 지현우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지현우도 더 이상 서유를 보지 않고 방금 치즈를 다 바른 빵을 그녀에게 건넸다.“서유 씨 언니가 치즈를 참 좋아했는데.”서유는 치즈를 듬뿍 바른 빵을 한 번
서유는 이 싸이코 같은 사람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은 채 조용히 삭제하고 별장으로 돌아갔다. 지현우는 식당에 없었고 서유는 차키를 원위치에 놓아둔 후 몸을 돌려 침실로 향했다.서유가 계단을 오르려는데 공교롭게도 자신의 방에서 나오는 지현우를 마주쳤다. 손가락사이에는 이전에 그녀에게 전해주었던 서류뭉치가 끼워져있었다.“준비해요, Y 국으로 돌아가야 해요.”지현우는 그 말 한마디만 남기고 그녀의 어깨를 스치듯 지나갔다. 서유는 잠시 멍해 있다가 이내 뒤따라갔다.“저 이제 금방 귀국했는데 지금 돌아가는 건 너무 이르지 않나요?”지현우는 발걸음을 멈추고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당신이 귀국한 건 그 송사월이란 남자가 죽었는지 확인하려던 거 아니었나요? 이미 죽은 걸 확인했으니 계속 남아있을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요.”송사월을 언급하자 서유 마음속 깊이 묻혀있던 죄책감이 샅샅이 파헤쳐져 빠르게 그녀의 안색을 창백하게 물들였다. 그녀는 숨을 제대로 쉬려고 노력하며 가슴을 짓누르듯 엄습하는 죄책감을 뒤로 한 채 지현우를 바라봤다.“난 여기에 가족 같은 친구도 있어요. 옆에서 같이 있고 싶어요.”서유는 정가혜한테 앞으로 쭉 곁에 있어 주겠다고 약속했었는데 어찌 이리 빨리 떠날 수 있겠는가.“그 정가혜라는 클럽 사장이요?”서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한테 유일하게 남은 사람이었기에 더더욱 떨어지기 싫었다.“그 여자도 Y국 같이 가요 그럼.”지현우는 무표정으로 한마디를 툭 내뱉고 자기 침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이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닫히며 서유 하나만을 덩그러니 남겨뒀다.“지현우 씨.”서유는 다가가 방문을 두드리며 말했다.“우리 얘기 좀 해요.”정가혜는 이곳에 자기 집과 비즈니스가 있는데 어찌 Y 국으로 훌쩍 떠날 수 있을까. 방안의 남자는 짐 정리하기에 바쁜지 그녀의 노크를 무시해 버렸다. 서유는 연이어 방문을 두드렸음에도 지현우가 문을 열지 않자 직접 문을 열고 들어와 버렸다. 지현우는 고개를 돌리더니 서늘한 눈빛으로 서유를 쏘아봤다
서유는 침실로 돌아온 뒤 지현우가 뒤따라와 그녀를 말리지 않는 걸 보고는 살짝 초조해졌다. 지현우가 Y 국으로 가려는 건 아마도 오늘 아침을 먹을 때 그녀가 언니의 대체품이 되고 싶다 하지 않은 것 때문일 것이다. 그는 서유가 남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런 해프닝을 연출해 그녀에게 조건을 제시하고 그녀를 순종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서유 또한 어찌 다른 사람의 껍데기로 살아가겠는가, 그랬기에 그녀는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해 보이며 지현우가 생각을 접게 만들려 했다. 하지만 지현우를 놓고 말하면 주동권은 그가 잡고 있었기 때문에 서유가 어떻게 그와 머리싸움을 하든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서유는 조금 지쳐 침대에 털썩 주저앉아 옹송그리고 머리를 구석에 푹 박았다. 밖에서 지현우가 걸어들어와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고 비웃듯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짐 정리한다면서요? 왜 안 움직이고 있어요?”그의 목소리가 들리자 서유는 지기 싫은 듯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이를 꽉 깨문 뒤 그를 쏘아봤다.“기다려요.”지현우는 서유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짐짓 좋은 사람인 양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좋아요, 나랑 같이 Y 국으로 돌아가면 초희역을 해줄 필요는 없어요.”이승하가 서유를 그리도 사랑하는데 국내에 남아있다면 기필코 귀찮은 일이 생길 것이다. 그때 가서 한 여자를 두고 뺏는데 에너지를 쏟아붓느니 차라리 지금 빨리 뜨는 게 좋았다.서유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정말이에요?”지현우는 서두르지 않고 말했다.“내가 언제 거짓말하는 걸 본 적 있나요?”서유는 별로 지현우를 믿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마음속으로는 확 도망이나 가버릴 까 생각 중이었다.“도망갈 생각 말아요.”지현우는 그녀의 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사정없이 말했다.“도망가봤자 내 손아귀 안이에요.”지현우는 자신이 무슨 신이라도 되는 양 고고하게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뭐 물론 당신의 언니처럼 한다면 성공할 수도...”그가
정가혜는 등이 파인 블랙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명품 핸드백을 메고는 거실 소파에 앉아 별장 곳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서유가 계단에서 내려오는 걸 보고 그녀는 냉큼 소파에서 일어나 서유를 향해 달려갔으나 서유가 한 발 더 빨랐다.“천천히, 조심해. 넘어지지 말고.”정가혜는 서유를 부축하고는 다정하게 그녀의 단발을 쓰다듬었다.“예전에는 긴 머리만 유지하더니 지금 단발로 자르니까 더 생기 있어 보여.”서유는 씁쓸한 마음이 들었으나 정가혜 앞에서 내색하지 않았다.“예전에는 맨날 아파서 허약했으니까 생기 있을 때도 됐지.”정가혜가 안심하듯 웃었다.“네가 이렇게 생각한다는 게 뭣보다 중요한 거지.”서유는 미소로 답했다.“가혜야, 아침 먹었어?”정가혜는 고개를 끄덕였다.“먹었어.”그녀는 대답하고 주위를 둘러보더니 서유에게 물었다.“지현우 씨는?”서유는 고개를 들어 2층 침실을 바라보고는 말했다.“아마 방에서 어린이 역할로 분열되어 있을걸.”정가혜는 잠시 멍해서 이해를 못 하고 있었다. 그녀가 이해를 마쳤을 때 서유는 이미 그녀를 끌고 정원 쪽으로 가는 중이었다.“너 방금 지현우 씨를 조현병 환자라 욕한 거야?”서유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를 소파로 끌어당겼다. 하녀들이 커피와 디저트를 갖고 와 정가혜 앞에 놓았다. 정가혜는 고맙다 인사한 뒤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서유에게 물었다.“어린이는 또 무슨 뜻인데?”서유는 스푼으로 케이크를 조금 덜어내 정가혜 입가로 가져간 뒤 해석했다.“그 사람은 우리 언니를 사랑한다는 걸 인정하지 않아. 그래서 그 변함없는 충정과 지조를 기리려고 내가 붙인 별명이야.”정가혜는 케이크를 먹고 웃으며 말했다.“너네 두 사람 진짜 재밌어.”서유는 그 말을 듣고 안색이 살짝 굳어졌다. 씁쓸한 웃음이 그녀의 입가에 퍼졌고 이윽고 그녀는 입을 열었다.“가혜야, 나 곧 Y 국 가.”아까까지만 해도 케이크의 단맛을 느끼던 정가혜는 말을 듣고 순간 식욕이 깡그리 사라진 것 같았다.“왜?”여기서 계속 나랑 있어 준
그 순간, 서유는 차가웠던 마음이 순식간에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정가혜는 늘 서유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기꺼이 바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서유에게 있어 정가혜는 좋은 친구일 뿐만 아니라 까마득한 어둠 속에 깊이 빠져버린 그녀의 유일한 한 줄기의 빛과도 같은 존재이다.하지만 이토록 따뜻한 사람을 어찌 Y국으로 데려가 자신과 함께 위험을 무릅쓰게 한단 말인가?“나와 현우 씨의 관계는 너무 복잡해 앞으로 어떤 문제가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에 난 너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네가 뭘 걱정하는지 알아. 하지만 서유야...”정가혜는 굳건한 눈빛으로 서유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나한테 가족은 이제 너밖에 없어. 네가 어디에 있다면 그곳이 곧 나의 집이야.”네가 어디에 있다면 그곳이 곧 나의 집이다...그 말에 서유는 결국 꾹꾹 눌러 담았던 눈물을 왈칵 터뜨렸고 정가혜는 다급히 손을 뻗어 눈물을 쏟아내는 서유의 등을 부드럽게 두드려주었다.“우리 서유, 착하지. 울지 마. 나 아직 Y국 못 가봤는데 세상 물정 보러 간다 생각하지 뭐.”서유는 계속하여 그녀를 설득하고 싶었지만, 그때, 정가혜가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망했다. 하마터면 깜빡할 뻔했네. 나 학력이 높지 않아서 영어는 몇 마디밖에 할 줄 몰라. 안녕, 고마워 뭐 이런 것들밖에 아는 문장이 없는데 앞으로 어떻게 외국인들과 소통할 수 있을까?”이윽고 정가혜는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리며 골머리를 앓었다.“손짓만 해도 외국인들이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까?”서유는 원래 얼굴이 눈물범벅이 되도록 감정을 억제하지 못했으나 정가혜의 혼잣말을 듣는 순간 모든 감동의 눈물이 쏙 들어가는 기분이었다.그녀는 눈물을 깨끗이 닦아내며 정가혜의 말을 바로잡았다.“Y국에 가면 네가 그 외국인이 되는 거야.”그러자 정가혜는 갑자기 큰 깨달음이라도 얻은 듯 입을 열었다.“맞아. Y국에 가면 내가 외국인이니까 그 사람들이 날 배려해줘야겠네.”서유도 덩달아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다시 한번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