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하 씨, 우리 계약 아직 6개월 남았는데 좀만 더 기다려주면 안 돼요?""그래.""그럼 나 사진 한 장만 찍어줘요. 나랑 떨어져 있어도 나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게.""알겠어.""그럼..."이승하는 손가락을 들어 서유의 말캉한 입술을 매만지며 말했다."네가 원하는 건 다 들어줄게. 그게 뭐든지."서유는 입꼬리를 올려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이승하를 향해 웃었다."그럼... 우리 다음 생엔 보지 말아요. 이제 다신 보지 말아요."이승하는 가슴에 느껴지는 찌릿찌릿한 통증에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안돼!"뜬 눈에 들어오는 건 하얀 천장뿐이었다. 꿈속에서 보았던 서유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이승하는 천천히 눈을 돌려 자신의 손목에 칭칭 감긴 붕대를 보고는 다시 표정이 어두워졌다.역시 예전처럼 이승하를 가만히 죽게 내버려 둘 사람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승하가 의외라 여겼던 것은 그렇게 잡고 싶었던 서유가 꿈에 나타나 다시는 보지 말자고 한 것이다.이미 이승하한테 실망할 대로 실망해 버렸기에 다음 생에도 엮이고 싶지 않은 걸까...숨이 턱턱 막혀오는 답답함과 심장을 도려낼 듯이 아파오는 느낌이 이승하를 옥죄여 왔다.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통증에 이승하는 애써 무시해 보려 했지만 그럴수록 통증은 전혀 사라지지 않고 가슴으로부터 온몸을 향해 퍼져나갔다.그제야 이승하는 마음이, 누군가를 향한 감정이 그렇게 제 의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게 아님을 깨달았다.누군가를 사랑하는 것, 누군가를 잃는 것, 보고 싶은 사람을 영영 볼 수 없는 것... 그런 것들에서 비롯된 슬픔은 정신력으로 이겨낼 수 없는 것들이었다.이승하는 입꼬리를 올리며 슬픈 웃음을 짓고는 제 감정과 싸우기를 그만두었다. 그냥 그 감정에 자신이 잡아먹히도록 내버려 두었다. 얼마나 지났을까.실핏줄이 터진 두 눈에 생기라는 것이 돌았다. 이승하는 다른 사람에 의해 바뀐 자신의 옷차림에 미간을 찌푸리며 아직 아픈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마치 무언
"도련님, 사모님께서 올라오십니다. 사진 얼른 넣으세요."주태현은 발을 동동 구르며 이승하를 다그쳤지만 이승하는 전혀 급해 하지 않으며 오히려 사진을 더 빤히 쳐다봤다. 서유가 이미 죽은 마당에 이젠 더 두려울 것도 없었다.이승하가 죽는 걸 이토록 막으니 살아 줄 수밖에. 살아서 그들에게 알려줄 것이다. 사람이 아닌 악마를 살린 대가가 무엇인지.휠체어가 굴러가면서 내는 소리가 복도에서부터 점점 가까워졌다.소리가 날 때마다 주태현은 심장이 쪼그라들며 숨도 크게 뱉지 못했다.어두침침하던 방에 그들이 들어오려 하자 순간 불이 켜지며 대낮처럼 환해졌다.휠체어에 앉은 부인 뒤로는 체격이 우람진 남자 한 명이 서 있었다.그 뒤에는 특수부대 출신의 경호원들이 줄지어 따랐다.그들이 들어오고 나서도 이승하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충혈된 눈으로 사진 속의 서유만 바라보았다.이승하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부인의 낯빛이 어두워져 갔다."쟤가 들고 있는 거 가져와."부인의 명령이 들리자 이승하는 사진의 금고 맨 위 칸에 넣고는 그 아래층의 총을 꺼내 들었다.그러고는 명령을 받은 남자가 그의 뒤에까지 다가오길 기다렸다가 총알을 장전하며 뒤를 돌아 남자의 이마를 향해 총구를 겨눴다.그의 행동에 적잖이 놀란 남자가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며 말했다."승하야 내가 그래도 네 삼촌인데 총은 좀 아니지.""삼촌?"이승하는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말했다."어떤 삼촌이 5살 된 조카를 물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게 눌러서 죽게 만들겠어요?"남자는 이승하가 그 옛날 일을 기억할 줄 몰랐다는 듯이 당황하며 변명을 해댔다."나는 너 수영 가르쳐주려고 그랬던 거지."이승하의 올라간 한쪽 입꼬리가 남자를 향한 비웃음을 드러내는 듯했다. 이승하는 그의 말에 더 이상 대꾸를 하지 않고 방아쇠에 손을 올렸다.총알이 금방이라도 튀여나갈 듯한 상황에서 휠체어에 앉아있던 부인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그녀는 사람을 시켜 온몸이 피범벅이 된 여자를 끌고 와 이승하의 앞에 던졌다.제 발치
주서희는 죽기 직전의 하연을 보고 나서 몇 달간 악몽만 꾸었었다.왜 어머니라는 사람이 자기 배로 낳은 아들에게 이런 극악무도한 짓을 하는지 주서희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이승하가 신경 쓰는 것이면 그게 사람이든 물건이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망가뜨리는 게 그의 어머니라는 작자였다.주서희가 이승하의 연인인척할 때도 어느 날엔가 하연이라는 사람처럼 죽게 될까 봐 늘 두려웠었다.하지만 주서희는 위험한 걸 알면서도 자처하고 나섰다. 주서희는 소준섭이 보낸 사람에게 강간당했을 때 이미 이 세상에서 사라진 사람이었으니까.그때 이승하가 어떤 원수는 천천히 갚는 거라고, 그러다 보면 성공하는 날이 올 거라고 주서희에게 손을 내밀어주지 않았더라면 정말 살 수 없었을 것이다.이승하의 도움을 받아 주서희는 해외에서 의학을 전공하고 돌아오게 된 것이다.이승하에 의해 살게 된 두 번째 인생이었으니 주서희가 이승하에게 충성하는 것은 당연했다.그래서 자신이 직접 이승하를 만나며 서유를 이승하의 가족들로부터 보호해 왔건만 그게 서유에게 해가 될 줄은 미처 몰랐었다.주서희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며 마음속에 가득한 죄책감을 떨쳐 내보려 애썼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이승하를 보며 외쳤다."대표님! 얼른요!"최악의 결과라 해도 그저 죽는 것일 텐데 그런 건 이제 두렵지 않았다.이승하는 주서희를 한번 보더니 그 차가운 시선을 다시 자신의 어머니에게로 옮겼다."저 사람은 제가 아끼는 사람이 아니에요. 이런걸론 저 협박 못 하십니다."부인은 그 말을 듣더니 채찍을 돌리던 손을 멈추고는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이승하를 올려다보았다.그녀가 웃을 때마다 불에 탄 얼굴이 따라서 움직이는 게 어딘가 소름이 돋으면서 꼭 지옥의 마녀가 하고 있을 모습 같았다."그래. 그냥 그 아이 방패막이였으니까 당연히 너를 협박하진 못하겠지."여자는 휠체어에 기대앉으며 이 상황이 퍽 재밌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렸다."근데 너 참 대단하더라. 나 몰래 여자도 만나고 다니고."
이승하는 천천히 방아쇠를 당기려던 손에 힘을 풀었다.서유가 이승에서 마음을 주었던 사람이 송사월과 정가혜 둘뿐인데 알량한 제 복수심 때문에 서유의 친구였던 사람들을 자신이 사는 지옥으로 끌어들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눈에 가득 찼던 독기도 점차 사라져 다시 아무 감정이 없는 듯한 표정으로 돌아왔다.이승하는 감정을 추슬러가며 총을 내려놓았다.이렇게 될 걸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부인은 더 가증스러운 웃음을 지어가며 말했다."이게 네가 나한테 안되는 이유야. 너한테는 약점이 있잖아. 난 없는데."총구 앞에서 구사일생한 남자가 그 말을 듣더니 낯빛이 창백해졌다.이승하가 물러났으니 망정이지 그러지 않는다 해도 누나라는 사람은 동생의 목숨 따윈 안중에도 없었을 것 같다. 이승하가 더 상대하기도 귀찮다는 듯 굴자 그 여유로운 모습에 또 화가 난 부인이 손에 든 채찍을 매만졌다."내 말 잘 들어. 죽을 생각 따윈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네가 또 자살 시도하면 나는 너를 따르는 사람들을 건드릴 수밖에 없어.""물론 안하연 그 아이처럼 죽이지는 않겠지만 감옥 들여보내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야.""아니면..."부인은 바닥에 쓰러져있는 주서희를 고갯짓으로 가리키며 입꼬리를 올렸다."저 아이처럼 만들어 줄 수도 있고."잠시 사라졌던 증오가 이승하의 눈에 다시 가득 차오르며 부인을 향해 말했다."나를 그렇게 싫어하면서 왜 죽지는 못하게 하는 겁니까?"부인은 채찍을 돌리며 이승하의 질문이 꽤나 흥미롭다는 듯이 웃으며 답했다."아직 재미를 다 보지 못했잖니. 그렇게 쉽게 죽게 놔둘 순 없지."예전 같았으면 저 말을 듣고 속상하기라도 했겠지만 지금은 유달리 평온했다.아버지와 형이 죽고 난 뒤 어머니의 악행은 더 심해졌다.지금 들고 있는 채찍을 버티다 못해 도망치면 그 끝은 늘 자살이었다.하지만 약을 삼키든 약물을 주사하든 그 어떤 것도 성공하지 못했다. 어머니라는 사람으로부터 한 치의 동정도 얻지 못했다. 그때는 마냥 어렸기에 그런 방법이라면 어머
그들이 나가고 이승하는 얼굴이 창백해진 채 한쪽에 서 있는 주태현을 불렀다."의사 불러서 서희 씨 좀 봐주라고 해.""네. 지금 바로 부를게요."주태현이 급히 방을 나서고 바닥에 축 늘어져 있던 주서희가 힘겹게 고개를 들어 이승하를 바라봤다.정확히는 피가 새어 나온 붕대를 바라봤다. 아까 총을 잡으며 힘을 준 탓에 상처가 벌어졌던 것 같다."대표님, 손 지혈부터 해드릴게요."주서희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이승하는 단호히 거절했다."괜찮아."이승하는 다른 말 없이 소파에 앉은 채 창밖의 노을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 그 얼굴은 마치 생기라곤 없는 사람 같았다. 더는 밝아질 일이 없어 보이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주서희는 또 죄책감이 몰려들기 시작했다.주서희는 피가 맺힌 입술을 움직여 말했다."죄송해요, 대표님..."이승하가 직접 그런 목소리로 주서희에게 말하기 전까진 주서희도 이승하가 서유를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줄 알았었다."서희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알잖아. 내가 서유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그 말을 이승하에게서 직접 듣고 나서야 주서희는 서유를 향한 이승하의 마음이 아주 크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그 마음을 오랫동안 홀로 숨겨왔다는 것도.주서희가 멋대로 착각한 탓에 이승하는 끝까지 서유의 몸 상태를 몰랐고 서유와 함께할 수 있었을 시간도 서로를 등진 채 흘려보내고 말았다.주서희가 일부러 사실을 알리지 않아 서유의 마지막 모습도 보지 못하고 둘 사이는 그렇게 영원히 끝이 나고 말았다.주서희는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으면 자신을 집어삼킬 듯 커져가는 죄책감에 가슴이 아파왔다. "대표님 죄송해요... 서유 씨한테도 너무 미안해요... 저만 아니었어도 서유 씨가 박하선 씨랑 엮일 일도 없었을 텐데. 그러면 그렇게 일찍 가지도 않았을 텐데... 다 제 탓이에요. 죄송해요. 대표님..."눈물이 주서희의 얼굴에 난 상처 위로 흘러내렸다. "죄송해요..."이승하는 그런 주서희를 보고
"네 보스. 자금 바로 모시러 가겠습니다."전화를 끊은 이승하의 시리도록 차가운 시선이 불빛으로 환히 밝혀진 정원에 닿았다.그 환한 불빛들이 마치 박씨 집안 같아 이승하의 분노를 더 돋구고 있었다.'박화영, 내가 아버지랑 한 약속이 있으니 당신을 죽이진 않겠지만 당신이 내 사람들을 망가뜨렸던 것처럼 나도 당신 사람들한테 똑같이 해줄게."누가 이기나 해보자고.이승하는 피로 물든 붕대를 다시 감고는 검은색 가죽 장갑을 끼고 드레스 룸으로 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머리까지 손질했다.모든 준비를 마친 이승하가 가면을 들고 내려오자 그 모습을 본 주태현이 걱정스럽게 물었다."도련님 정말 사모님과 싸우실 생각이십니까?"박씨 집안 역시 재벌가였고 물론 JS 그룹보단 못하다지만 그래도 비슷한 수준의 기업이었다.더군다나 박씨 집안의 실세가 싸이코라고 소문난 박화영이니 이승하가 그에게 맞서다 또 어릴 때처럼 피바람이 불게 될까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이승하는 고개를 돌려 가면을 바라보더니 속삭이듯 말했다."박화영이랑 싸우는 건 내가 아니야."금색 가면 남의 신분으로 박화영을 무너뜨린다면 서유가 아끼던 송사월과 정가혜에게 피해가 갈 일은 없을 것이다.그 전에 먼저 처리해야 할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나 미행하던 놈 다리 하나 부러뜨려서 박씨 집안에 보내."주태현은 이승하가 걱정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승하의 명령을 거역하진 못했다."네 알겠습니다."이승하가 말을 마치고 집을 나서자 이미 도착해있던 택이가 급히 검은색 벤츠를 이승하 앞에 세웠다.이승하가 찬 타가 출발하고 열 몇 대의 차가 그 뒤를 따랐다.한쪽에서 이를 지켜보던 흰색 승용차가 뒤를 밟으려 하자 주태현이 그 앞을 막아섰다.기사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검은 양복 차림의 경호원들이 차 문을 열고 기사를 끌어내렸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연장으로 기사의 다리를 내리쳤다.전에 이승하는 미행하던 사람들을 그저 따돌리기만 하고 손은 대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더 참지 않겠다는 듯 보였다.
이승하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한테만 불공평한 세상에 다시 분노가 차올랐다.더는 시간을 끌 필요가 없어 보여 그는 금색 가면을 쓰고 차에서 내렸다.이승하가 내리자 열 몇 대의 차에 탔던 사람들도 일제히 내려 이승하를 따랐다.키스하는 도중에 가면 남들에게 둘러싸인 그 둘은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특히나 박하선은 여유롭게 차에 기대 서 있는 금빛 청동색 가면을 쓴 남자를 보고 낯빛이 창백해졌다."금... 금색 가면..."이 나이 먹도록 박하선은 누군가를 두려워해 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금색 가면 남은 그 칭호만으로도 그녀를 두려움에 떨게 했다.매번 박하선이 나쁜 짓을 하려 할 때마다 금색 가면 남은 그걸 귀신같이 알고 찾아왔다. 박하선도 물론 그에 대해 알아보았지만 마치 일부러 신분을 숨기기라도 한 듯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었다.신분을 알 수 없으니 복수도 할 수 없었다. 금색 가면 남은 항상 어떻게 아는지 박하선이 경호원 없이 혼자 다닐 때만 나타나곤 했다.오늘은 데이트가 끝나고 호텔로 바로 갈 생각이어서 경호원도 먼저 보냈는데 하필 이럴 때 또 금색 가면 남을 만난 것이다."당, 당신들 뭐야! 왜 이러는 거야!"그때 박하선 옆에 같이 있던 남자가 나서며 소리쳤다. 물론 그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다리가 풀릴 지경이었지만 그래도 남자랍시고 나선 것이다.어떻게 찾은 돈줄인데 일단은 힘닿는 데까지 지켜야 했다. 그러다 상황이 꼬이면 그때 도망가도 늦지 않으니까.박하선은 남자가 혼자 그런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르고 그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저 사람들 얼른 비키라고 해."남자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저 혼자 상대하라는 박하선에 속으로 욕을 뱉었지만 돈 때문에 덜덜 떨며 말을 했다."당신들 이 여자 누군지 알아? 박씨 집안 손녀 박하선이라고! 이 여자 건드리고 당신들이 무사할 것 같아? 얼른 꺼져!"택이는 다리까지 떠는 그 모습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잘됐네. 우리가 찾던 사람도 박씨 집안 손녀 박하선이거든."옆에 있
아직 자기를 버리고 도망간 연하 애인에 화를 내고 있던 박하선이 전혀 다른 목소리로 내뱉은 이승하의 소름 돋는 말을 듣고는 몸에 잔뜩 주고 있던 힘이 풀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박하선은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금색 가면 남을 올려다보았다."난 당신 건드린 적 없잖아! 왜 나한테만 이러는 건데!"전에는 사람을 시켜 겁주는 정도로 끝냈었는데 오늘은 몸에 손을 대는 것도 모자라 호스티스로 넘기라니.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도대체 그 빽이 누구길래 서울에서 제일 큰 클럽을 제 맘대로 움직이냐는 것이다.그리고 자신이 이승하의 사촌 동생이며 박씨 집안 유일한 손녀인 것도 다 알면서 감히 손을 대는 사람이었다.머릿속은 수많은 의문들로 가득했지만 아마 그 답은 듣지 못할 것 같다.택이가 손을 젓자 맨 앞에 서 있던 남자가 달려 나와 박하선의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태어나서 뺨이라곤 처음 맞아보는 박하선이 화가 나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발악했다.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연이어 내리쳐지는 손에 박하선은 더 발악할 힘도 없었다. 이승하가 명령했던 백 대가 끝나니 박하선의 얼굴은 그 형체를 알아보기도 힘들게 부어있었다.이제 곧 그녀를 나이트 레일로 데려가야 했기에 박하선을 때리던 남자는 나름 힘 조절을 하며 그녀를 죽지 않을 정도로만 때렸다.이승하는 바닥에 쓰러진 채 움직이지도 못하는 박하선을 보며 차갑게 말했다."임미연, 나이트 레일로 데려가."임미연은 이승하의 명령에 바로 박하선에게로 다가가 그녀의 머리채를 잡은 채로 차에 태웠다.임미연이 떠나고 이승하는 다시 택이를 쳐다보았다.그 짧은 시선이 무슨 뜻인지 단번에 캐치한 택이는 옆에 있는 부하들에게 말했다."애들 데리고 가서 주차장 CCTV 처리해."명령을 받은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몇 명 더 데리고 백화점 안으로 들어갔다.일 처리를 마친 나머지 사람들은 다시 차에 타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연지유는 방금 박화영과 통화를 마치고서야 주서희는 이승하의 숨겨진 애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이
이제 막 열여덟 살이 된 제시카는 그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그러나 그가 걸음을 옮길 때까지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이를 악물고 애써 참았다. 이하준, 이번 생에 절대 내 손안에 떨어지지 마. 평생 후회하게 만들어줄 거니까. 그러나 아직까지 감정이라는 게 뭔지 몰랐던 이하준은 그녀의 복수심을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잠시 후, 연이를 업고 계단을 내려오면서 하준이는 연이가 뚱뚱하다고 투덜댔고 화가 난 연이는 그의 머리카락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렇게 두 남매는 웨딩카에 올라타는 그 순간까지도 옥신각신 다투었다. 두 사람을 지켜보며 고개를 가볍게 흔들던 이승하는 서유의 손을 잡고 웨딩카의 뒤를 따라 결혼식장으로 향했다. 아빠가 없는 연이에게 오늘 이승하는 아빠 노릇을 해주기로 했다. 연이의 손을 잡고 버진로드를 걸어가 그녀의 손을 신랑에게 맡겼다.입장하기 전, 문밖에 서 있던 연이가 곱게 화장한 얼굴을 치켜들고는 그를 쳐다보았다.“이모부, 제가 어렸을 때부터 이모부한테 손도 못 대게 하시더니. 오늘은 어쩔 수 없죠?”검은 정장 차림의 그가 담담한 얼굴로 하이힐을 신고 있는 연이를 내려다보았다.“오늘만이야. 다음은 없어.”연이가 입을 삐죽거리며 눈을 흘겼다.“어쩜 이리 하준이랑 똑같아요? 이렇게 좋은 날 꼭 그런 말을 해야겠어요?”한참을 고민하던 그가 덕담 한마디 내뱉었다.“우주랑 평생 행복하길 바란다. 이번 생에 이리 네 손 잡고 입장하는 건 한 번으로 족해...”연이는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가 연이의 손을 잡고 입장하여 그녀의 손을 심우주에게 건네주었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조카한테 경고했다.“내 딸한테 잘해. 안 그러면 내가 너 가만 안 둬.”그 말 한마디에 연이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흐릿한 시선 속에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이승하의 얼굴이 들어왔다.이모부한테 그녀는 처음부터 딸이었다...감동을 받은 연이는 발길을 돌리려는 이승하를 덥석 끌어안고 낮은
그가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힘겹게 말을 뱉었다.“연이야, 뒤돌아서 나 좀 봐봐.”화를 참으며 고개를 돌리니 얇은 셔츠 차림에 눈밭에 서서 눈시울을 붉히고 있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잠깐 멈칫하던 그녀는 차갑게 시선을 돌렸다. “심우주, 나 이제 너한테 관심 없어. 그러니까 더 이상 귀찮게 찾아오지 마.”말을 마친 연이는 전화를 끊고 남자 친구의 손을 잡은 채 숙소로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이때, 남자 친구가 허를 찌르는 물음을 내던졌다.“그렇게 귀찮아할 거면서 왜 연락처를 아예 차단하지 않았어?”차단하면 다시는 연락할 수 없을 것이다. 눈을 내리깔며 한동안 망설이던 연이는 남자 친구 앞에서 심우주의 연락처를 차단해 버렸다.연이를 찾을 수 없었던 심우주는 2년 동안 혼이 빠진 사람처럼 살았다. 문자를 받지도 못하는 그녀의 핸드폰으로 2년 동안 수없이 많은 문자를 보냈다. 시간이 지나 졸업을 앞두고 연이의 남자 친구는 바람을 피우고 연이를 차버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화가 나야 할 상황인데 연이는 오히려 침착하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그를 찾아가 따지지도 않았다. 그후, 심우주 학교의 퀸카가 그를 미친 듯이 따라다닌다는 소식을 듣고 연이는 그제야 남자 친구의 바람에 자신이 왜 전혀 개의치 않았던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남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심우주였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누구한테 먼저 고개를 숙일 사람이 아니었다. 졸업식 당일 밤, 우연히 심우주를 다시 만난 그녀는 지난 4년 동안 그가 수없이 몰래 찾아와서 자신을 보고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마음이 변치 않은 그를 보며 그녀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어렸을 때부터 날 좋아하지 않았던 애가 언제부터 날 좋아하게 된 걸까?그녀의 의혹에 그는 대답을 하지 않고 진한 키스로 뒤늦게 알아버린 자신의 진심을 쏟아냈다. 그의 고백을 받아들일 때, 연이는 뼛속까지 보수적이었던 자신을 다행으로 여겼다. 첫 번째 남자 친구와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지 않았기 때
이승하를 따라 차에 올라탄 하준이는 서유의 모습을 발견하고 어안이 벙벙해졌다.“엄마, 엄마가 여긴 어떻게...”오랜만에 만난 아들이 이젠 어엿한 어른이 된 모습에 그녀는 눈시울이 붉어졌다.“몰래 네 얼굴만 보고 갈 생각이었는데. 이런 일이 있을 줄이야...”얼굴에 찍힌 신발 자국을 보니 서유는 더 마음이 아팠다. 손을 뻗어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지려다가 아이가 어색해할까 봐 허공에서 손이 굳어버렸다. 조심스러워하는 엄마를 보고 하준이는 예전처럼 무뚝뚝하게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수척해진 아이의 얼굴에 손끝이 닿는 순간, 그녀는 비에 흠뻑 젖은 아들을 품에 꽉 끌어안았다.“네가 외국에서 이렇게 괴롭힘을 당하는 걸 알았더라면 5년 전에 엄마는 절대 널 외국으로 보내지 않았을 거야.”아이가 그녀보다 더 큰 손을 뻗어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어쩌다 이런 일이 생긴 거예요. 평소에는 제가 애들을 괴롭히는 편이에요.”아이가 당하는 꼴을 직접 눈으로 본 서유는 자신을 위로하는 아이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그녀는 아이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어디 다친 데는 없어?”그 물음에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저 나름 솜씨가 좋아요. 그러니까 아빠가 올 때까지 버티고 있었던 거고요.”말을 마치고 그가 고개를 들어 앞줄에 앉아 수건으로 머리를 닦고 있는 남자를 우러러보았다.“아빠, 방금 절 구해주던 아빠의 모습은 진짜 영웅 같았어요.”옅은 미소를 짓던 이승하는 소수빈이 건네준 수건을 받아 아이에게 건네줬다.“너도 이제 다 큰 어른인데. 언제까지 내가 와서 구해주기만을 기다릴 거야? 나중에 아빠가 없으면 어떡하려고 그래?”수건을 받아 대충 머리를 닦던 아이는 모처럼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우리 아빠가 얼마나 대단하고 위풍당당한 사람인데 어떻게 없을 수가 있겠어요?”아이의 말에 차가운 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서유도 소수빈도 아무 말이 없었고 차 안의 분위기가
비가 쏟아진 그날 밤, 이하준은 우산을 쓰고 학교를 나와 골목으로 들어갔다. 마침 쇠몽둥이를 든 외국인 무리와 마주쳤고 그들은 하나 같이 근육질 몸매에 흉악한 얼굴이었다. 가끔 멍청이 같은 사람들이 그를 귀찮게 할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그는 이승하의 말을 명심하고 애써 참았지만 상대의 모함을 받게 되었다. 한 번은 누군가 그가 개발한 약을 교수의 물컵에 넣었다. 다른 친구가 발견하지 않았다면 사람이 죽었을지도 모른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던 이하준은 그들을 응징하기로 결심했다. 하루 만에 수십 명의 사람들을 응징했고 학교 측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교수가 그를 믿고 지켜주지 않았더라면 학교에서 쫓겨났을지도 모른다. 그를 무너뜨리지 못한 악당들은 교수의 신임을 받고 있는 그를 질투하고 증오했다. 지금 눈앞의 놈들은 분명 그들이 그를 혼내주려고 부른 사람들일 것이다.학교에 다니면서도 소지섭에게 격투 기술을 배우는 걸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두렵지가 않았다. 우산을 살짝 받쳐 드는 순간, 얼음처럼 차가운 눈이 드러났고 그 눈 밑에 살의가 가득했다.근육질 남자들은 순식간에 그를 에워쌌고 이하준은 손에 든 우산을 접어 날카로운 한끝으로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을 세게 찔렀다. 싸움 실력이 뛰어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을 쓰러뜨렸다. 그러나 아무리 실력이 대단하더라도 점점 더 많이 달려오는 근육질의 남자들을 혼자 당해낼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손을 대지 않겠다고 교수님과 약속했었지만 수세에 몰리자 그는 어쩔수 없이 허리춤에 있던 금빛 칼을 빼 들고 근육질 남자의 복부를 향해 찔렀다. 어린 나이에 칼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고 몇몇 근육질의 남자는 흠칫했다. 그러나 이내 쇠몽둥이를 들어 온 힘을 다해 이하준의 머리를 내리쳤다.이하준의 목숨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바보로 만들어달라는 요구가 있었다. 한 사람을 바보로 만들려면 머리를 쳐야 한다. 바보가 안 된다면 적어도 식물인간으로 만들어야 하니까. 근육질의 남자들은 이하준을 제압하기 위해
그가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입을 열었다.“난 죽는 게 두려운 사람이 아니었어. 그런데 당신을 만난 후부터 죽는 게 그렇게 겁이 나더라.”죽는 게 두려웠기 때문에 전 서계를 돌아다니며 의사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원하는 결과는 끝내 얻지 못하였고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기만 했다. 겁이 난 서유는 그를 꼭 껴안았다. 그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당신한테는 내가 있고 우리 하준이가 있어요. 그러니까 절대 죽으면 안 돼요. 당신이 죽으면 우리는 어떡하라고요?”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미 5년을 버텨온 그는 점점 더 통증이 심해졌고 하느님이 조금씩 조금씩 그의 목숨을 빼앗아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통이 전해지는 횟수가 갈수록 늘어나고 통증은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칩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것 같았다. 다만 떠나기 전에 모든 일을 다 마치고 가야 하는데...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품 안에 있는 여인이 가장 걱정되었다. 소리 없이 흐느끼는 그녀의 모습에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깊이 파고들었다.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릴 만큼 뜨겁고 짜릿한 느낌, 슬픈 마음을 녹일 수 있을 것 같아 두 사람은 뜨겁게 몸을 섞으며 하나가 되었다. 그녀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할 때쯤, 두 사람의 아찔한 행위가 끝이 났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녀의 몸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고 소중한 물건을 끌어안듯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유람선 안으로 들어온 희미한 달빛을 빌려 그가 세월의 흔적도 없는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다음 생에도 당신이 내 여자였으면 좋겠는데. 당신의 다음 생은 송사월한테 주기로 약속했었나?”아직 잠들지 않은 서유가 그의 가슴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번 생에 당신이 나보다 먼저 가면 나 절대 당신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다음 생에 당신 안 만날 거라고요.”그가 슬픈 표정을
그 당시 풋풋한 어린 소녀였던 연이는 심우주가 자신과 같은 학교에 간다는 말을 듣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교과서는 정말 내가 가져오지 않았어. 아마도 애들이 가져간 것 같은데 내일 학교에 가면 돌려주라고 할게.”연이도 하준이와 마찬가지로 학교에서는 짱이었다. 친구를 괴롭히는 일은 없었지만 너무 인기가 많아서 여자아이들이 그녀를 짱으로 받들고 남자아이들도 하루 종일 그녀의 주위를 맴돌며 꼬리를 흔들었다.반면, 심우주는 착실히 공부만 했고 가끔 연이의 괴롭힘에 그는 반격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였기 때문에 심우주는 그런 그녀가 얄미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가 제멋대로 하는 걸 사랑스럽게 지켜보았았다. 다들 오냐오냐하니까 연이는 학교에서도 늘 제멋대로였다. 그러나 그 당시 자신의 마음을 잘 몰랐던 심우주는 연이의 그런 모습에 조금 짜증이 나기도 했다. 잠시 후, 어른들에게 차례로 작별 인사를 마친 이하준이 차에 올라탔다. 늘 차갑기만 하던 아이가 한동안 머뭇거리더니 차에서 내려와 서유를 덥석 끌어안았다.“엄마, 몸 잘 챙겨요.”갑작스러운 아이의 행동에 서유는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하준아, 엄마 아빠는 집에서 우리 하준이 기다리고 있을게.”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있는 힘껏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손을 풀고 옆에 있던 이승하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아빠, 제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아빠도 절 이길 수 없을 거예요.”입꼬리를 살짝 올리던 그가 손을 뻗어 아이의 어깨를 토닥였다.“자부심이 강한 사람은 남의 칼에 찔리기 쉬운 법이야. 자세를 낮추는 법을 배우거라.”아빠의 충고를 아이는 가슴 깊이 새겼다.“네, 그렇게 할게요.”이내 그가 허리춤에서 ‘S'라고 새겨진 금빛 칼을 꺼내 아이한테 건네주었다. “돌잡이 때 네가 잡은 칼이야. 이제는 네가 갖고 있어.”전에 소지섭한테서 아빠의 이야기를 들은
서유는 어쩔 수 없이 의사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문밖을 지키고 있던 소지섭은 의사가 떠나는 것을 보고 급히 물었다.“방금 연이랑 하준이가 와서 묻더라고요. 대표님한테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냐고...”서유가 입을 열기도 전에 안에서 이승하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감기라고 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고개를 끄덕이던 소지섭은 자리를 떴고 그녀 혼자 덩그러니 문밖에 서 있었다. 그가 얼마나 더 그녀와 함께 할 수 있을지...어느 순간 갑자기 그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가 옆에 있어도 그녀는 여전히 불안한 마음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하준이 유학길에 오른 그날, 이씨 가문과 상씨 가문 사람들이 그를 배웅하러 왔다. 마치 하준이의 돌잡이 때처럼 정원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어른들의 모습이 이미 많이 변했고 아이들도 훌쩍 자란 상태였다. 서유와 이승하의 우월한 유전자만 이어받은 이하준은 10살밖에 안 된 나이지만 정교한 이목구비에 곧은 몸매를 가지고 있어 보기만 해도 귀티가 철철 흘러넘쳤다. 게다가 180 가까이 되는 아이큐를 가지고 있어 누가 봐도 엄친아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특히 이연석은 흰색 스웨터 차림에 한 손은 주머니에 넣고 한 손에 가방을 든 채로 계단을 내려오는 이하준의 모습을 보고 숨이 턱 막힐 것만 같았다. 그는 옆에서 초등학생 교복을 입은 채 케이크를 뺏어 먹고 있는 오뚝이와 깡순이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똑같은 10살인데 이게 뭐냐? 누구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명문 학교에 입학하고 누구는 아직도 초등학교나 다니고 있으니.”그 말에 정가혜가 그를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팥 심은 데 팥 나고 콩 심은 데 콩 나는 거죠. 내가 몇 번을 말해요. 자꾸만 애들 다그치지 말라고 했죠.”이를 갈던 그가 두 아이 앞으로 다가가 케이크를 낚아채 입에 쑤셔 넣었다.“너희들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로 일찍 진학 못 하면 아빠 진짜 가만 안 둬.”두 아이는
“승하 씨...”깜짝 놀란 그녀는 미친 듯이 핸드폰을 찾았지만 온몸에 힘이 빠져 일어서지도 못하였다. 어떻게 의사를 찾아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애틋한 그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긴장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녹아내렸고 바닥을 짚고 있던 손에도 덩달아 힘이 풀렸다.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고 입술이 파르르 떨려 말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당신... 왜... 그래요?”지난 10년 동안, 이승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지내온 그녀는 거의 울어본 적이 없다. 잠깐 정신을 잃은 모습에도 이렇게 펑펑 우는 것을 보니 그는 너무 마음이 아팠다. 애써 두통을 참으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던 그가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녀를 품에 안고 소파에 쓰러지더니 세월조차 비껴간 잘생긴 얼굴을 살짝 치켜들었다.“깊게 잠이 든 것뿐이야. 왜 이렇게 겁을 먹어?”말을 하면서 손을 뻗어 눈물로 뒤덮인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부러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당신 요즘 살이 좀 오른 것 같은데.”화제를 돌리려고 했지만 그녀는 눈물이 글썽한 두 눈을 들어 그의 창백한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아무리 깊은 잠에 빠져도 그렇죠. 어떻게 사람이 깨우는데 아무 반응이 없어요?”맑고 깨끗한 그녀의 눈을 그는 차마 마주칠 수가 없었다.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떼어 그녀의 등을 눌러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얹었다. “바보,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거야. 피곤할 때는 꿈을 꾸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거든.”그 말을 그녀는 당연히 믿지 못하였다.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어서 그의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왜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졌는지 그녀는 짐작할 수 있었다.단단한 가슴 위에 얹혀있던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미안해요. 당신 머릿속에 있는 칩을 꺼낼 의사를 찾아야 하는데...”겁이 났다. 이승하를 잃을까 봐 두려웠다. 자신을 목숨보다 더
지난주, 토론 대회에 나간다고 말하는 연이를 향해 이하준은 엄청 비꼬았다. 그 모습에 화가 난 연이는 씩씩거리며 이하준과 내기를 했고 뜻밖에도 그녀가 이기게 될 줄은 몰랐다.눈꺼풀을 내리깔던 하준이가 손을 힐끗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평소에 그렇게 재잘재잘하더니 실력 한번 제대로 발휘했네. 축하해.”진심으로 축하하는 것 같지 않고 그가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아무튼 이번에는 네가 졌어. 그러니까 잊지 말고 돈 입금해.”이하준은 천천히 냅킨을 깔면서 담담하게 말했다.“밥 먹고 나서 줄게. 근데 누나...”그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기세등등하게 연이를 쳐다보았다.“누나 올해 열일곱이지? 아직까지 고등학교에 다니고. 수시 자격도 따내지 못했으니 수능 봐서 어떤 대학에 합격할 수 있을지 정말 걱정이다.”그 말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너... 명문대에 합격했다고 잘난 척하지 마. 내년에 나도 그 학교에 합격할지 모르니까.”이하준은 칼과 포크를 집어 들고 스테이크를 썰어서 입에 넣었다.“그럼 내 후배가 되는 건가?”화가 난 연이가 반격할 겨를도 없이 그가 또 빈정거렸다.“내년에 학교에서 만나. 만나면 나한테 선배라고 부르는 거 잊지 말고.”“아악. 열받아 죽겠네.”연이가 가슴을 내리치더니 옆에 있던 의자를 끌어당겨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서유의 팔짱을 끼고 어깨에 기댄 채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이모, 하준이 쟤 정말 얄미워죽겠어요. 빨리 학교에 보내버려요.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요.”서유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막상 가고 나면 또 보고 싶을걸?”“아니요. 그럴 일은 절대 없어요.”입을 삐죽거리면서 시선은 이하준의 얼굴로 향해 있었다. 솔직히 이 녀석과 10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많이 싸우기도 했지만 정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얄미운 동생인 건 사실이다. “빨리 갔으면 좋겠어요.”웃음을 짓던 서유가 포크로 과일을 집어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 연이는 과일을 받아먹으면서 이하준을 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