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는 임태진이 거짓말을 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에 갑자기 당황스러웠다.이승하는 결벽증을 갖고 있었기에 그녀에게 절대로 다른 사람과 잠자리를 가지면 안 된다고 했었다.그녀는 이승하에게 사실을 말하고 싶었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이미 끝났다. 여기서 뭔가를 더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그녀가 고민하는 동안 이승하는 갑자기 그녀를 턱으로 가리켰다.“그렇게 순수하면 와서 따르라고 해요.”임태진은 이승하게 서유에게 기회를 주자 바로 와인병을 서유에게 건넸다.“빨리 가 봐.”화를 낼 줄 알았던 이승하가 아무런 감정의 변화도 없이 생각을 바꿔 그녀에게 술을 따르라고 했다.서유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임태진의 재촉에 다시 와인병을 건네받은 뒤 허리를 굽혀 술을 따르려고 했다.술을 따르기도 전에 그는 또다시 손마디가 굵은 손을 들어 올려 와인잔을 막았다.그는 무심한 눈빛으로 차갑게 그녀를 바라보았다.“무릎 꿇고 따라.”이제 임태진은 이승하가 서유를 의도적으로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하지만 이승하가 왜 서유를 의도적으로 괴롭히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설마 두 사람이 아는 사이일까?서유는 그 한마디를 듣고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를 보고 무릎을 꿇은 채 술을 따르라는 것인가?그녀가 그의 애인을 한 건 맞았지만 그의 모든 명령을 따르는 하녀 노릇을 한 건 아니었다.서유는 다시 허리를 세우며 이승하에게 말했다.“이 대표님께 제가 실수라도 했나요? 제가 눈에 거슬리시는 거라면 지금 바로 꺼져 드리겠습니다. 실례했습니다.”말을 마친 그녀는 와인병을 테이블에 올려놓은 뒤 가방을 들고 몸을 돌렸다.임태진이 그녀를 잡았다.“왜 이렇게 눈치 없이 굴어. 이 대표님이 널 눈에 거슬려 하셔도 너는 대표님께 실수하면 안 되지.”그는 아직 프로젝트를 얘기해야 했다. 서유 때문에 그의 서부 개발을 놓칠 수는 없었다.그는 좋은 말로 서유를 달랬지만 기어이 가겠다고 고집하는 서유를 차가운 눈빛을 바라보았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서유만 들리게
“형...”혼란 속에서 정신을 차린 이연석이 다급하게 이승하를 불렀지만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임태진은 떠나가는 이승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물었다.“이승하 씨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이연석은 웃으며 말했다.“이씨 가문의 유일한 상속자이니 그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할 겁니다. 가끔 이상하게 성질을 부릴 때가 있어요. 태진 씨와 서유 씨가 이해해 주길 바랍니다.”간단하게 설명을 마친 뒤 이연석은 술잔을 들며 임태진과 서유에게 사과의 의미로 한 잔 마셨다.“제가 형을 대신해 벌주를 마실게요.”원샷한 뒤 이연석은 술잔을 내려놓고 부드럽게 말했다.“다들 계속 즐기세요. 전 형한테 가보겠습니다.”그는 예의 바르게 뒷수습을 끝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임태진도 더 붙잡을 생각이 없었기에 이연석이게 말했다.“다음에 다시 약속을 잡죠.”이연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셔츠를 입은 뒤 재킷을 들고 서둘러 떠났다.안희연도 더 놀고 싶었지만 이연석이 떠나는 것을 보고 손에 들린 카드를 던져버리며 따라나섰다.그들이 떠나자 룸 안은 텅텅 빈 것 같았다. 임태진은 조금 다운된 기분에 미간을 문질렀다.원래는 이승하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 프로젝트 얘기를 꺼내려고 했지만 일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사람이 가버렸다.임태진도 더 놀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 손을 흔들어 방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룸 밖으로 쫓아냈다.사람들이 모두 떠나자 그는 고개를 돌려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서유를 바라보았다.“너 이승하하고 아는 사이야?”처음에는 그저 의도적으로 서유를 곤란하게 만들던 이승하가 임태진이 그녀와 잤다고 말하자 더욱 그녀를 힘들게 했다.이것으로 두 사람이 아는 사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게다가 얕은 사이는 아닌 것 같았다.서유는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녀의 예쁜 얼굴에서 와인이 계속 흘러내렸다. 그 모습은 오히려 하얀 얼굴과 대비되어 망가짐 속에서도 아름다움이 느껴졌다.그녀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얼굴의 와인을 닦아내며 담담하게 한 마디 뱉었다.“알아요
임태진은 서유가 그가 원하는 프로젝트를 따낼 수 있도록 도움을 주겠다는 말을 듣고 갑자기 흥미가 생겼다.서부 개발은 다음 달이면 입찰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아버지는 이번에 그가 프로젝트를 따내기만 한다면 상속자를 그로 정하겠다고 말씀하셨다.하지만 이번 경쟁 상대는 부산에서 온 화진 그룹이었다. 국내 굴지의 기업 중 손꼽히는 기업이었다. 화진 그룹의 전문 분야에서 화진을 이기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이승하를 통해 그 프로젝트를 따내려고 했다.하지만 이승하는 상대하기에 너무 어려운 사람이다.이번에도 이연석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이승하를 만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그래서 이승하의 비위를 맞춰 프로젝트를 따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서유가 그를 도와 프로젝트를 성사시켜 준다면야 당연히 좋겠지만...그는 조금 의심스럽게 서유에게 물었다.“넌 손에 이승하의 약점까지 잡고 있으면서 왜 이승하를 협박해서 한몫 단단히 챙기지 않은 거야?”서유는 다급하게 둘러댔다.“누가 요구하지 않았대요? 나도 협박했었어요. 여자 친구를 시켜 달라고 했더니 거절하더라고요.”임태진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이승하가 거절했다면 네가 다시 가서 협박해도 소용없는 거잖아?”서유는 다짐하며 말했다.“만약 이승하가 이번에도 거절한다면 난 그 동영상을 연유진에게 보낼 거예요.”임태진은 눈썹을 추켜세웠다.“너 내가 널 건드리는 게 싫어서 이런 제안을 하는 거지.”“맞아요.”서유는 태연하게 말했다.“내가 말했었죠. 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스킨쉽을 할 수 없다고. 사랑하는 사람과는 자연스럽게 할 수 있어요. 이 대표님처럼요. 하지만 임 대표님은 아직 아니에요. 임 대표님이 나한테 손대는 게 싫으니 어쩔 수 없이 프로젝트라도 도와드려야죠.”임태진은 자기가 그녀의 속셈을 말하면 그녀가 변명을 늘어놓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녀는 인정해 버리자 오히려 임태진은 그녀가 다르게 보였다.며칠 전 자기를 영리하게 설득하던 그녀를 똑똑하다고 생각했지만 오늘은 그녀를 대단하
은은하고 시원한 향기와 와인 향이 뒤섞여 순간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혔다.그가 다가오자 서유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차 문 쪽으로 움직였다.하지만 차 안이 너무 좁았기에 몇 번밖에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등 뒤에 차 문이 닿았다.이승하는 한 손을 차창에 올려놓고 가녀린 그녀를 품 안에 가두었다.눈처럼 차갑고 매혹적인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그녀의 목에 걸린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발견했다.잠시 후 귓가에 경멸이 섞인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새 스폰서가 잘해주나 봐.”그는 원래 잘 웃지 않는 사람이었고 대부분은 차가운 얼굴이었다.하지만 미소가 차가운 얼굴에 걸리니 조금 무서워 보였다.서유는 해명하고 싶었지만 ‘새 스폰서’라는 말에 침묵했다.임태진이 그녀를 자기 여자라고 소개한 그 순간부터 해명하는 것은 이미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이승하는 아무런 말도 설명도 하지 않는 그녀를 보고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그는 길고 예쁜 손을 올려 그녀의 볼을 이어 귓가를 쓰다듬었다.임태진에게서 느껴졌던 역겨움과는 달리 이승하의 스킨쉽은 그녀를 두렵게 만들었다.오랫동안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의 강력한 아우라가 그녀를 숨 막히게 했다.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이승하는 그녀의 뒷머리를 잡아 자신의 눈앞으로 당겼다.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싸늘하게 물었다.“두 사람 언제 잤어? 몇 번이나 잤어?”가까워질수록 남자의 향기가 짙게 풍겼다.서유는 심장이 따끔거려 멈출 것 같아 온몸의 뼈까지 마비되는 느낌을 받았다.그녀는 마음속으로 쓸모없는 자신을 욕하며 다급하게 고개를 돌려 그와의 접촉을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갑자기 그녀의 목을 졸랐다.그는 그녀의 목덜미에 있는 키스 마크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뼛속까지 얼어붙을 것 같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도 하고 온 거야?”서유는 얼굴이 창백해지며 다급하게 손을 들어 올려 귀 뒤에 임태진이 키스를 했던 곳을 가렸다.“아니에요. 그 사람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내가 믿을 것 같아?”그
이승하의 거대한 몸이 순간 얼어붙었다.어두운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한기가 사람을 순간 얼어붙게 할 것 같았다.그는 서유를 바라보며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에서 입가에 걸린 미소에서 부끄러움이나 분노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고 오히려 그를 도발하려는 느낌이 가득했다.그녀의 이런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와 계속되는 도발은 이승한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그는 그녀의 턱을 세게 잡았다.힘을 어찌나 세게 주었는지 작고 하얀 턱에 바로 푸른 멍이 들었다.서유의 얼굴은 고통에 의해 더 창백해졌다. 이승하는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든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얼굴을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내가 너한테 말했었지. 내 물건은 누구도 건드릴 수 없다고.”그는 살기가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의 턱을 뜯어 버리려는 듯이 턱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서유는 이승하가 이렇게 화난 모습을 처음 보는 것이라 조금 멍해졌다.그녀는 이승하를 자극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여러 차례 굴욕을 당했기에 이런 방법으로라도 반격한 것이었다.하지만 그가 이렇게 크게 분노할 줄은 몰랐다. 이승하는 그녀를 신경도 쓰지 않는 것 아니었나?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거지?서유는 아픔을 겨우 참았다. 그녀는 이승하를 바라보며 용기를 내 물었다.“왜 이렇게 내가 다른 사람하고 잤는지 신경 써요? 설마 나 좋아하는 거예요?”그와 5년을 함께 하면서 한 번도 그가 이 정도로 이성을 잃은 것을 보지 못했다. 이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면 뭘까?여기까지 생각하자 서유의 흐릿한 눈빛이 점차 희망으로 빛났다.그녀는 그의 눈빛에서 한줄기 좋아하는 감정이라도 읽어내려는 듯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읽어내지 못했고 오히려 혐오와 짜증만 느껴졌다.“내가 뭘 신경 쓰는지 그걸 네가 몰라?”이승하의 차가운 질문에 서유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이승하가 뭘 신경 쓰는지 그녀는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포기할 수가 없었다.한 사람을 오랫동안 사
수표의 재질이 꽤 두꺼워 그녀의 얼굴에 생채기를 냈고 아픈 고통이 느껴졌다.그녀는 몇 초간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조용히 허리를 굽혀 표를 집어 들었다.액수를 본 순간 입안에 맴돌던 쓴맛이 순식간에 가슴 전체로 퍼졌다.5년이라는 시간으로 맞바꾼 1,000억. 이 정도면 꽤 가치 있는 거래인 것 같았다. 5년 전의 그녀는 정말 돈이 필요했었지만 지금은 죽어서 가져갈 수도 없는 돈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서유는 담담한 표정으로 수표를 다시 차 안으로 던졌다.“이 대표님 돈 많으시네요. 그런데 그 돈을 받으면 정정당당하게 임씨 가문에 시집갈 수가 없어서요.”그녀의 말은 임씨 가문의 며느리 자리에 비해 1,000억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었다.오히려 그의 돈을 받으면 재벌가에 시집가는데 방해가 될 뿐이었다.이승하는 그제야 그녀가 왜 한푼도 받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알았다. 알고 보니 재벌가에 시집갈 계획이었다.그는 마음속에 의문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고개를 들어 마치 모르는 사람을 보는 것처럼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너 앞으로 영원히 내 앞에 나타나지 마.”서유는 상관없다는 듯이 웃었다.“걱정하지 마요.”그녀에게는 미래가 없었기에 영원히 그의 앞에 나타날 기회가 없을 것이다. 그를 향한 깊은 사랑도 시간이 지나면 무덤에 묻혀 아무도 모를 텐데 말이다.이승하는 개인 별장에 도착했다. 비서가 차를 문 앞에 세우자 이연석이 재빨리 차에서 내렸다. 마침 별장에 들어가서 이승하를 만나려고 했는데 코닉세그가 한 대가 정원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멈춰 섰다.190센치에 가까운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큰 키에 탄탄한 몸매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비율을 자랑했다.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오만한 아우라에서 강한 카리스마가 느껴져 쉽게 다가갈 수 없었다. 이연석조차도 이승하를 보면 조금 겁을 먹을 때가 있었는데 그의 경쟁상대들은 더 할 것이다.그는 마음을 정리하며 이승하에게 다가갔다.“형, 왔
이승하의 무심한 얼굴이 점점 싸늘해지더니 눈꼬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기가 뼈를 에일 것만 같았다.그는 손에 들린 와인잔을 내려놓고 차강운 눈을 치켜뜨며 이연석을 바라보았다.“넌 어떻게 생각하는데?”이연석은 대담하게 추측했다.“내 생각에는 형이 조금 좋아하는 것 같은데요. 그렇지 않으면 임태진이 서유와 잤다고 말했을 때 왜 갑자기 화를 내면서 서유 씨한테 술까지 부은 거예요?”이연석은 비웃음을 날렸다.“그 여자가 나와 헤어진 지 얼마 안 됐는데 임태진하고 잤다고 하니까 순간 적응이 안 되더라고. 그래서 혼 좀 낸 건데 좋아하는 게 돼버린 건가?”이 말을 할 때 그의 눈가에 서린 차가운 한기는 사라진 지 오래였고 무심함과 소외감만 남아 있었다. 마치 그 여자를 혼낸 것을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이.이연석은 그런 그의 모습에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그의 형인 이승하는 결벽증 환자였기에 한순간 자기가 만났던 여자가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가지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더욱이 연지유가 귀국한 뒤 이승하는 서유와 헤어졌으니 그의 형 마음속에는 대용품일 뿐인 서유는 그렇게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다.이연석은 더 말하지 않고 손에 들린 와인잔에 술을 한 번에 마신 뒤 일어났다.“형, 그럼 나 먼저 갈게요.”이승하는 대답하지 않고 무심하게 고개만 끄덕였다.이연석은 어릴 때부터 냉정한 성격인 이승하가 익숙했기에 화도 나지 않았다. 바로 재킷을 가지고 떠났다.밖에는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 비서는 다급하게 달려와 우산을 들고 그를 차에 탈 수 있게 도왔다. 그는 비서에게 시 중심으로 가 달라고 했다.교차로에서 신호등에 걸려 기다리는 동안 그는 드레스만 입은 서유가 폭우를 맞으며 길가에서 택시를 잡는 것을 보았다.작은 키에 체구가 작은 그녀의 마른 몸매에 드레스가 비에 젖어 달라붙으니 더욱 가냘파 보였다.비에 젖은 머리가 손바닥만 한 그녀의 작은 얼굴에 헝클어져 조금 지저분해 보이긴 했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에 영향을 주진
서유는 조수석에 앉은 이규민을 힐끔 쳐다봤다.이연석은 고개를 돌린 채 창밖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서유는 그제야 난감함이 좀 가라앉은 듯했다.서유는 티슈를 들고 머리를 숙인 채 조용히 몸에 묻은 빗물을 닦아냈다.이연석은 백미러를 통해 뒷좌석에 앉은 가냘픈 몸짓을 바라봤다.그는 이렇게 추운 날에 서유가 외투 하나 걸치지 않고 밖에서 비를 맞으며 차를 잡는다는 게 이상했다.“서유 씨, 임태진 도련님이 집까지 데려다주지 않던가요?”임태진 이 세글자에 서유는 잠시 어리둥절해서 미간을 찌푸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갔다. 그녀는 지금 임태진의 여자였다.서유는 티슈를 꽉 움켜쥐더니 아무렇게나 둘러댔다.“다퉜는데 차에서 내리라고 하더라고요.”이연석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군요.”오들오들 떠는 그녀를 보고 이연석은 난방을 더 크게 틀어주며 더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갑자기 올라간 차 안의 온도 덕분에 꽁꽁 얼었던 서유의 몸도 점차 따듯해졌다.그녀는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이연석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설명했다.“원래는 그냥 콜택시 부르려고 했는데 핸드폰 배터리가 다 되었더라고요. 근처 슈퍼도 문을 닫아서 비를 피할 데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냥 길거리로 나와 지나가는 택시를 잡으려고 했는데, 번거롭게 해서 미안해요.”이연석이 한 손으로 턱을 괴고는 백미러로 안절부절못하는 서유를 보더니 따듯하게 위로를 건넸다.“괜찮아요.”서유는 그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머리를 창문에 기대고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너무 피곤했는데 따듯한 난방까지 있으니 바로 깊은 잠이 들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아파트 단지 앞에 멈춰 섰다.이연석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서유 씨, 다 왔네요.”한참이 지나도 뒷좌석에서 대답이 없자 이연석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서유가 창문에 기댄 채 쌔근쌔근 단잠을 자고 있었다. 이를 본 순간 이연석의 눈이 조금 커졌다.참 대범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낯선 사람의 차에서 저렇게 시름 놓고 자다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