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태진은 서유가 그가 원하는 프로젝트를 따낼 수 있도록 도움을 주겠다는 말을 듣고 갑자기 흥미가 생겼다.서부 개발은 다음 달이면 입찰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아버지는 이번에 그가 프로젝트를 따내기만 한다면 상속자를 그로 정하겠다고 말씀하셨다.하지만 이번 경쟁 상대는 부산에서 온 화진 그룹이었다. 국내 굴지의 기업 중 손꼽히는 기업이었다. 화진 그룹의 전문 분야에서 화진을 이기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이승하를 통해 그 프로젝트를 따내려고 했다.하지만 이승하는 상대하기에 너무 어려운 사람이다.이번에도 이연석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이승하를 만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그래서 이승하의 비위를 맞춰 프로젝트를 따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서유가 그를 도와 프로젝트를 성사시켜 준다면야 당연히 좋겠지만...그는 조금 의심스럽게 서유에게 물었다.“넌 손에 이승하의 약점까지 잡고 있으면서 왜 이승하를 협박해서 한몫 단단히 챙기지 않은 거야?”서유는 다급하게 둘러댔다.“누가 요구하지 않았대요? 나도 협박했었어요. 여자 친구를 시켜 달라고 했더니 거절하더라고요.”임태진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이승하가 거절했다면 네가 다시 가서 협박해도 소용없는 거잖아?”서유는 다짐하며 말했다.“만약 이승하가 이번에도 거절한다면 난 그 동영상을 연유진에게 보낼 거예요.”임태진은 눈썹을 추켜세웠다.“너 내가 널 건드리는 게 싫어서 이런 제안을 하는 거지.”“맞아요.”서유는 태연하게 말했다.“내가 말했었죠. 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스킨쉽을 할 수 없다고. 사랑하는 사람과는 자연스럽게 할 수 있어요. 이 대표님처럼요. 하지만 임 대표님은 아직 아니에요. 임 대표님이 나한테 손대는 게 싫으니 어쩔 수 없이 프로젝트라도 도와드려야죠.”임태진은 자기가 그녀의 속셈을 말하면 그녀가 변명을 늘어놓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녀는 인정해 버리자 오히려 임태진은 그녀가 다르게 보였다.며칠 전 자기를 영리하게 설득하던 그녀를 똑똑하다고 생각했지만 오늘은 그녀를 대단하
은은하고 시원한 향기와 와인 향이 뒤섞여 순간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혔다.그가 다가오자 서유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차 문 쪽으로 움직였다.하지만 차 안이 너무 좁았기에 몇 번밖에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등 뒤에 차 문이 닿았다.이승하는 한 손을 차창에 올려놓고 가녀린 그녀를 품 안에 가두었다.눈처럼 차갑고 매혹적인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그녀의 목에 걸린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발견했다.잠시 후 귓가에 경멸이 섞인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새 스폰서가 잘해주나 봐.”그는 원래 잘 웃지 않는 사람이었고 대부분은 차가운 얼굴이었다.하지만 미소가 차가운 얼굴에 걸리니 조금 무서워 보였다.서유는 해명하고 싶었지만 ‘새 스폰서’라는 말에 침묵했다.임태진이 그녀를 자기 여자라고 소개한 그 순간부터 해명하는 것은 이미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이승하는 아무런 말도 설명도 하지 않는 그녀를 보고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그는 길고 예쁜 손을 올려 그녀의 볼을 이어 귓가를 쓰다듬었다.임태진에게서 느껴졌던 역겨움과는 달리 이승하의 스킨쉽은 그녀를 두렵게 만들었다.오랫동안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의 강력한 아우라가 그녀를 숨 막히게 했다.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이승하는 그녀의 뒷머리를 잡아 자신의 눈앞으로 당겼다.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싸늘하게 물었다.“두 사람 언제 잤어? 몇 번이나 잤어?”가까워질수록 남자의 향기가 짙게 풍겼다.서유는 심장이 따끔거려 멈출 것 같아 온몸의 뼈까지 마비되는 느낌을 받았다.그녀는 마음속으로 쓸모없는 자신을 욕하며 다급하게 고개를 돌려 그와의 접촉을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갑자기 그녀의 목을 졸랐다.그는 그녀의 목덜미에 있는 키스 마크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뼛속까지 얼어붙을 것 같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도 하고 온 거야?”서유는 얼굴이 창백해지며 다급하게 손을 들어 올려 귀 뒤에 임태진이 키스를 했던 곳을 가렸다.“아니에요. 그 사람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내가 믿을 것 같아?”그
이승하의 거대한 몸이 순간 얼어붙었다.어두운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한기가 사람을 순간 얼어붙게 할 것 같았다.그는 서유를 바라보며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에서 입가에 걸린 미소에서 부끄러움이나 분노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고 오히려 그를 도발하려는 느낌이 가득했다.그녀의 이런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와 계속되는 도발은 이승한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그는 그녀의 턱을 세게 잡았다.힘을 어찌나 세게 주었는지 작고 하얀 턱에 바로 푸른 멍이 들었다.서유의 얼굴은 고통에 의해 더 창백해졌다. 이승하는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든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얼굴을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내가 너한테 말했었지. 내 물건은 누구도 건드릴 수 없다고.”그는 살기가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의 턱을 뜯어 버리려는 듯이 턱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서유는 이승하가 이렇게 화난 모습을 처음 보는 것이라 조금 멍해졌다.그녀는 이승하를 자극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여러 차례 굴욕을 당했기에 이런 방법으로라도 반격한 것이었다.하지만 그가 이렇게 크게 분노할 줄은 몰랐다. 이승하는 그녀를 신경도 쓰지 않는 것 아니었나?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거지?서유는 아픔을 겨우 참았다. 그녀는 이승하를 바라보며 용기를 내 물었다.“왜 이렇게 내가 다른 사람하고 잤는지 신경 써요? 설마 나 좋아하는 거예요?”그와 5년을 함께 하면서 한 번도 그가 이 정도로 이성을 잃은 것을 보지 못했다. 이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면 뭘까?여기까지 생각하자 서유의 흐릿한 눈빛이 점차 희망으로 빛났다.그녀는 그의 눈빛에서 한줄기 좋아하는 감정이라도 읽어내려는 듯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읽어내지 못했고 오히려 혐오와 짜증만 느껴졌다.“내가 뭘 신경 쓰는지 그걸 네가 몰라?”이승하의 차가운 질문에 서유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이승하가 뭘 신경 쓰는지 그녀는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포기할 수가 없었다.한 사람을 오랫동안 사
수표의 재질이 꽤 두꺼워 그녀의 얼굴에 생채기를 냈고 아픈 고통이 느껴졌다.그녀는 몇 초간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조용히 허리를 굽혀 표를 집어 들었다.액수를 본 순간 입안에 맴돌던 쓴맛이 순식간에 가슴 전체로 퍼졌다.5년이라는 시간으로 맞바꾼 1,000억. 이 정도면 꽤 가치 있는 거래인 것 같았다. 5년 전의 그녀는 정말 돈이 필요했었지만 지금은 죽어서 가져갈 수도 없는 돈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서유는 담담한 표정으로 수표를 다시 차 안으로 던졌다.“이 대표님 돈 많으시네요. 그런데 그 돈을 받으면 정정당당하게 임씨 가문에 시집갈 수가 없어서요.”그녀의 말은 임씨 가문의 며느리 자리에 비해 1,000억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었다.오히려 그의 돈을 받으면 재벌가에 시집가는데 방해가 될 뿐이었다.이승하는 그제야 그녀가 왜 한푼도 받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알았다. 알고 보니 재벌가에 시집갈 계획이었다.그는 마음속에 의문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고개를 들어 마치 모르는 사람을 보는 것처럼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너 앞으로 영원히 내 앞에 나타나지 마.”서유는 상관없다는 듯이 웃었다.“걱정하지 마요.”그녀에게는 미래가 없었기에 영원히 그의 앞에 나타날 기회가 없을 것이다. 그를 향한 깊은 사랑도 시간이 지나면 무덤에 묻혀 아무도 모를 텐데 말이다.이승하는 개인 별장에 도착했다. 비서가 차를 문 앞에 세우자 이연석이 재빨리 차에서 내렸다. 마침 별장에 들어가서 이승하를 만나려고 했는데 코닉세그가 한 대가 정원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멈춰 섰다.190센치에 가까운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큰 키에 탄탄한 몸매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비율을 자랑했다.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오만한 아우라에서 강한 카리스마가 느껴져 쉽게 다가갈 수 없었다. 이연석조차도 이승하를 보면 조금 겁을 먹을 때가 있었는데 그의 경쟁상대들은 더 할 것이다.그는 마음을 정리하며 이승하에게 다가갔다.“형, 왔
이승하의 무심한 얼굴이 점점 싸늘해지더니 눈꼬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기가 뼈를 에일 것만 같았다.그는 손에 들린 와인잔을 내려놓고 차강운 눈을 치켜뜨며 이연석을 바라보았다.“넌 어떻게 생각하는데?”이연석은 대담하게 추측했다.“내 생각에는 형이 조금 좋아하는 것 같은데요. 그렇지 않으면 임태진이 서유와 잤다고 말했을 때 왜 갑자기 화를 내면서 서유 씨한테 술까지 부은 거예요?”이연석은 비웃음을 날렸다.“그 여자가 나와 헤어진 지 얼마 안 됐는데 임태진하고 잤다고 하니까 순간 적응이 안 되더라고. 그래서 혼 좀 낸 건데 좋아하는 게 돼버린 건가?”이 말을 할 때 그의 눈가에 서린 차가운 한기는 사라진 지 오래였고 무심함과 소외감만 남아 있었다. 마치 그 여자를 혼낸 것을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이.이연석은 그런 그의 모습에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그의 형인 이승하는 결벽증 환자였기에 한순간 자기가 만났던 여자가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가지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더욱이 연지유가 귀국한 뒤 이승하는 서유와 헤어졌으니 그의 형 마음속에는 대용품일 뿐인 서유는 그렇게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다.이연석은 더 말하지 않고 손에 들린 와인잔에 술을 한 번에 마신 뒤 일어났다.“형, 그럼 나 먼저 갈게요.”이승하는 대답하지 않고 무심하게 고개만 끄덕였다.이연석은 어릴 때부터 냉정한 성격인 이승하가 익숙했기에 화도 나지 않았다. 바로 재킷을 가지고 떠났다.밖에는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 비서는 다급하게 달려와 우산을 들고 그를 차에 탈 수 있게 도왔다. 그는 비서에게 시 중심으로 가 달라고 했다.교차로에서 신호등에 걸려 기다리는 동안 그는 드레스만 입은 서유가 폭우를 맞으며 길가에서 택시를 잡는 것을 보았다.작은 키에 체구가 작은 그녀의 마른 몸매에 드레스가 비에 젖어 달라붙으니 더욱 가냘파 보였다.비에 젖은 머리가 손바닥만 한 그녀의 작은 얼굴에 헝클어져 조금 지저분해 보이긴 했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에 영향을 주진
서유는 조수석에 앉은 이규민을 힐끔 쳐다봤다.이연석은 고개를 돌린 채 창밖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서유는 그제야 난감함이 좀 가라앉은 듯했다.서유는 티슈를 들고 머리를 숙인 채 조용히 몸에 묻은 빗물을 닦아냈다.이연석은 백미러를 통해 뒷좌석에 앉은 가냘픈 몸짓을 바라봤다.그는 이렇게 추운 날에 서유가 외투 하나 걸치지 않고 밖에서 비를 맞으며 차를 잡는다는 게 이상했다.“서유 씨, 임태진 도련님이 집까지 데려다주지 않던가요?”임태진 이 세글자에 서유는 잠시 어리둥절해서 미간을 찌푸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갔다. 그녀는 지금 임태진의 여자였다.서유는 티슈를 꽉 움켜쥐더니 아무렇게나 둘러댔다.“다퉜는데 차에서 내리라고 하더라고요.”이연석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군요.”오들오들 떠는 그녀를 보고 이연석은 난방을 더 크게 틀어주며 더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갑자기 올라간 차 안의 온도 덕분에 꽁꽁 얼었던 서유의 몸도 점차 따듯해졌다.그녀는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이연석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설명했다.“원래는 그냥 콜택시 부르려고 했는데 핸드폰 배터리가 다 되었더라고요. 근처 슈퍼도 문을 닫아서 비를 피할 데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냥 길거리로 나와 지나가는 택시를 잡으려고 했는데, 번거롭게 해서 미안해요.”이연석이 한 손으로 턱을 괴고는 백미러로 안절부절못하는 서유를 보더니 따듯하게 위로를 건넸다.“괜찮아요.”서유는 그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머리를 창문에 기대고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너무 피곤했는데 따듯한 난방까지 있으니 바로 깊은 잠이 들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아파트 단지 앞에 멈춰 섰다.이연석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서유 씨, 다 왔네요.”한참이 지나도 뒷좌석에서 대답이 없자 이연석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서유가 창문에 기댄 채 쌔근쌔근 단잠을 자고 있었다. 이를 본 순간 이연석의 눈이 조금 커졌다.참 대범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낯선 사람의 차에서 저렇게 시름 놓고 자다니 말이다.
서유는 비를 뚫으며 집으로 돌아와 입었던 드레스와 목에 걸었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박스에 던져넣었다.그녀는 내일 이 물건들을 임태진에게 택배로 돌려줄 생각이었다. 너무 역겨운 물건이라 한시도 가지고 있기가 싫었다.박스를 닫고 그녀는 샤워실로 향했다. 욕조의 물을 틀어놓고는 안에 들어가 누웠다.그녀는 샤워볼로 미친 듯이 자기 얼굴과 등을 비볐고 피부는 어느새 빨개졌다. 그제야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바라봤다.화장을 지우자 병약함과 창백함만이 남았고, 기력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눈빛은 암울한게 생기가 없었다.그녀에겐 빛이 보이지 않았고 따듯함도 느낄 수 없었다.마치 하찮은 개미처럼 누구든 짓밟을 수 있는 존재 같았다.하지만 그녀도 자존심이 있는 사람이었다.“자존심이라.”서유는 이를 되뇌며 그런 자신을 비웃었다. 이승하에게 팔려 간 날부터 그녀에게 자존심 따위는 없었다.그녀는 머리를 말린 채 침대에 누웠다. 너무 피곤해서인지 바로 깊은 잠이 들었다.비를 맞으니 병세가 많이 악화했고 그녀는 그렇게 이튿날 오후까지 잠만 잤다.정가혜가 밤새 야간 당직을 서고 오후까지 자다가 일어나서 식사 준비까지 마쳤는데도 서유는 깨어나지 않았다.정가혜는 하는 수 없이 서유의 방문을 두드리며 서유의 이름을 두 번 불렀다. 그래도 방안은 아무런 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정가혜는 그제야 수상함을 눈치챘다.정가혜는 신속하게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누워 있는 서유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정가혜는 얼른 손으로 서유의 이마를 짚어보았다.너무 뜨거웠다.장가혜는 다급하게 이불을 걷어 서유를 일으켜 세웠다.“서유야, 너 고열이야. 얼른 일어나서 병원 가자.”고열에 정신이 흐릿했지만 병원이라는 두 글자를 들은 서유는 자기도 모르게 거절했다.“병원 안 가...”“열이 이렇게 나는데 어떻게 안 가?”정가혜는 서유가 거절하기도 저에 그녀를 업어서는 차로 병원에 데려갔다.응급으로 들어갔고 링거와 호흡기도 달았다.감기로 인한 고열은 쉽
정가혜는 서유가 연속으로 소리를 지르자 깜짝 놀라 다급하게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서유야, 왜 그래?”서유는 점차 의식이 돌아왔고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 보이던 이승하와 송사월은 어느새 사라졌고 수심으로 가득 찬 정가혜만 보였다.그녀는 그제야 자기가 방금 악몽을 꿨다는 걸 알아챘다. 꿈에서 과거가 나왔고 보고 싶지 않은 사람도 보았다.그녀는 아직 머릿속에 남은 화면을 애써 지웠다.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는데 손등에 링커 바늘이 꽂혀 있는 게 보였다.“고열이 나길래 병원으로 데려왔어.”정가혜는 고열로 어리둥절해진 서유를 보며 부드럽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고는 그녀를 부축해 물을 마시게 했다.달콤한 물이 목구멍을 타고 들어가자 서유는 다시 일말의 생기를 얻은 것 같았다.“가혜야...”“응?”정가혜가 부드럽게 대답하며 땀에 젖은 채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을 서유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배고파?”서유는 조금 힘겹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의사 선생님이 뭐라 안 하셔?”그녀는 심부전에 걸린 걸 어떻게 정가혜에게 털어놓을지 아직 고민 중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아파서 병원에 왔으니 정가혜가 이미 다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의사 선생님 별말씀 없으셨어. 그냥 고열에 쓰러지니까 링거를 놓아주더라고. 근데 채혈은 하셨어. 결과가 이때쯤이면 나온다고 하셨는데.”정가혜는 이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결과를 가지러 가려고 했다.“가서 결과 좀 가져올게.”서유가 다급하게 그녀를 말렸다.“가혜야, 나 배고파. 혹시 먼저 먹을 것 좀 사다주면 안 될까...”가혜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럼 조금만 기다려. 가서 죽 사다줄게.”가방을 들고 나가는 정가혜를 보고 나서야 서유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링거 폴대를 밀고 결과를 받는 단말기로 가서 결과를 뽑았다.심부전이라 피검사를 하면 심장 기능 상실이라고 나올 것이다.그녀는 정가혜가 이 결과를 보는 게 싫었다. 정가혜가 슬퍼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