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표의 재질이 꽤 두꺼워 그녀의 얼굴에 생채기를 냈고 아픈 고통이 느껴졌다.그녀는 몇 초간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조용히 허리를 굽혀 표를 집어 들었다.액수를 본 순간 입안에 맴돌던 쓴맛이 순식간에 가슴 전체로 퍼졌다.5년이라는 시간으로 맞바꾼 1,000억. 이 정도면 꽤 가치 있는 거래인 것 같았다. 5년 전의 그녀는 정말 돈이 필요했었지만 지금은 죽어서 가져갈 수도 없는 돈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서유는 담담한 표정으로 수표를 다시 차 안으로 던졌다.“이 대표님 돈 많으시네요. 그런데 그 돈을 받으면 정정당당하게 임씨 가문에 시집갈 수가 없어서요.”그녀의 말은 임씨 가문의 며느리 자리에 비해 1,000억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었다.오히려 그의 돈을 받으면 재벌가에 시집가는데 방해가 될 뿐이었다.이승하는 그제야 그녀가 왜 한푼도 받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알았다. 알고 보니 재벌가에 시집갈 계획이었다.그는 마음속에 의문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고개를 들어 마치 모르는 사람을 보는 것처럼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너 앞으로 영원히 내 앞에 나타나지 마.”서유는 상관없다는 듯이 웃었다.“걱정하지 마요.”그녀에게는 미래가 없었기에 영원히 그의 앞에 나타날 기회가 없을 것이다. 그를 향한 깊은 사랑도 시간이 지나면 무덤에 묻혀 아무도 모를 텐데 말이다.이승하는 개인 별장에 도착했다. 비서가 차를 문 앞에 세우자 이연석이 재빨리 차에서 내렸다. 마침 별장에 들어가서 이승하를 만나려고 했는데 코닉세그가 한 대가 정원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멈춰 섰다.190센치에 가까운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큰 키에 탄탄한 몸매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비율을 자랑했다.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오만한 아우라에서 강한 카리스마가 느껴져 쉽게 다가갈 수 없었다. 이연석조차도 이승하를 보면 조금 겁을 먹을 때가 있었는데 그의 경쟁상대들은 더 할 것이다.그는 마음을 정리하며 이승하에게 다가갔다.“형, 왔
이승하의 무심한 얼굴이 점점 싸늘해지더니 눈꼬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기가 뼈를 에일 것만 같았다.그는 손에 들린 와인잔을 내려놓고 차강운 눈을 치켜뜨며 이연석을 바라보았다.“넌 어떻게 생각하는데?”이연석은 대담하게 추측했다.“내 생각에는 형이 조금 좋아하는 것 같은데요. 그렇지 않으면 임태진이 서유와 잤다고 말했을 때 왜 갑자기 화를 내면서 서유 씨한테 술까지 부은 거예요?”이연석은 비웃음을 날렸다.“그 여자가 나와 헤어진 지 얼마 안 됐는데 임태진하고 잤다고 하니까 순간 적응이 안 되더라고. 그래서 혼 좀 낸 건데 좋아하는 게 돼버린 건가?”이 말을 할 때 그의 눈가에 서린 차가운 한기는 사라진 지 오래였고 무심함과 소외감만 남아 있었다. 마치 그 여자를 혼낸 것을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이.이연석은 그런 그의 모습에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그의 형인 이승하는 결벽증 환자였기에 한순간 자기가 만났던 여자가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가지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더욱이 연지유가 귀국한 뒤 이승하는 서유와 헤어졌으니 그의 형 마음속에는 대용품일 뿐인 서유는 그렇게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다.이연석은 더 말하지 않고 손에 들린 와인잔에 술을 한 번에 마신 뒤 일어났다.“형, 그럼 나 먼저 갈게요.”이승하는 대답하지 않고 무심하게 고개만 끄덕였다.이연석은 어릴 때부터 냉정한 성격인 이승하가 익숙했기에 화도 나지 않았다. 바로 재킷을 가지고 떠났다.밖에는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 비서는 다급하게 달려와 우산을 들고 그를 차에 탈 수 있게 도왔다. 그는 비서에게 시 중심으로 가 달라고 했다.교차로에서 신호등에 걸려 기다리는 동안 그는 드레스만 입은 서유가 폭우를 맞으며 길가에서 택시를 잡는 것을 보았다.작은 키에 체구가 작은 그녀의 마른 몸매에 드레스가 비에 젖어 달라붙으니 더욱 가냘파 보였다.비에 젖은 머리가 손바닥만 한 그녀의 작은 얼굴에 헝클어져 조금 지저분해 보이긴 했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에 영향을 주진
서유는 조수석에 앉은 이규민을 힐끔 쳐다봤다.이연석은 고개를 돌린 채 창밖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서유는 그제야 난감함이 좀 가라앉은 듯했다.서유는 티슈를 들고 머리를 숙인 채 조용히 몸에 묻은 빗물을 닦아냈다.이연석은 백미러를 통해 뒷좌석에 앉은 가냘픈 몸짓을 바라봤다.그는 이렇게 추운 날에 서유가 외투 하나 걸치지 않고 밖에서 비를 맞으며 차를 잡는다는 게 이상했다.“서유 씨, 임태진 도련님이 집까지 데려다주지 않던가요?”임태진 이 세글자에 서유는 잠시 어리둥절해서 미간을 찌푸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갔다. 그녀는 지금 임태진의 여자였다.서유는 티슈를 꽉 움켜쥐더니 아무렇게나 둘러댔다.“다퉜는데 차에서 내리라고 하더라고요.”이연석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군요.”오들오들 떠는 그녀를 보고 이연석은 난방을 더 크게 틀어주며 더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갑자기 올라간 차 안의 온도 덕분에 꽁꽁 얼었던 서유의 몸도 점차 따듯해졌다.그녀는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이연석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설명했다.“원래는 그냥 콜택시 부르려고 했는데 핸드폰 배터리가 다 되었더라고요. 근처 슈퍼도 문을 닫아서 비를 피할 데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냥 길거리로 나와 지나가는 택시를 잡으려고 했는데, 번거롭게 해서 미안해요.”이연석이 한 손으로 턱을 괴고는 백미러로 안절부절못하는 서유를 보더니 따듯하게 위로를 건넸다.“괜찮아요.”서유는 그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머리를 창문에 기대고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너무 피곤했는데 따듯한 난방까지 있으니 바로 깊은 잠이 들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아파트 단지 앞에 멈춰 섰다.이연석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서유 씨, 다 왔네요.”한참이 지나도 뒷좌석에서 대답이 없자 이연석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서유가 창문에 기댄 채 쌔근쌔근 단잠을 자고 있었다. 이를 본 순간 이연석의 눈이 조금 커졌다.참 대범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낯선 사람의 차에서 저렇게 시름 놓고 자다니 말이다.
서유는 비를 뚫으며 집으로 돌아와 입었던 드레스와 목에 걸었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박스에 던져넣었다.그녀는 내일 이 물건들을 임태진에게 택배로 돌려줄 생각이었다. 너무 역겨운 물건이라 한시도 가지고 있기가 싫었다.박스를 닫고 그녀는 샤워실로 향했다. 욕조의 물을 틀어놓고는 안에 들어가 누웠다.그녀는 샤워볼로 미친 듯이 자기 얼굴과 등을 비볐고 피부는 어느새 빨개졌다. 그제야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바라봤다.화장을 지우자 병약함과 창백함만이 남았고, 기력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눈빛은 암울한게 생기가 없었다.그녀에겐 빛이 보이지 않았고 따듯함도 느낄 수 없었다.마치 하찮은 개미처럼 누구든 짓밟을 수 있는 존재 같았다.하지만 그녀도 자존심이 있는 사람이었다.“자존심이라.”서유는 이를 되뇌며 그런 자신을 비웃었다. 이승하에게 팔려 간 날부터 그녀에게 자존심 따위는 없었다.그녀는 머리를 말린 채 침대에 누웠다. 너무 피곤해서인지 바로 깊은 잠이 들었다.비를 맞으니 병세가 많이 악화했고 그녀는 그렇게 이튿날 오후까지 잠만 잤다.정가혜가 밤새 야간 당직을 서고 오후까지 자다가 일어나서 식사 준비까지 마쳤는데도 서유는 깨어나지 않았다.정가혜는 하는 수 없이 서유의 방문을 두드리며 서유의 이름을 두 번 불렀다. 그래도 방안은 아무런 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정가혜는 그제야 수상함을 눈치챘다.정가혜는 신속하게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누워 있는 서유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정가혜는 얼른 손으로 서유의 이마를 짚어보았다.너무 뜨거웠다.장가혜는 다급하게 이불을 걷어 서유를 일으켜 세웠다.“서유야, 너 고열이야. 얼른 일어나서 병원 가자.”고열에 정신이 흐릿했지만 병원이라는 두 글자를 들은 서유는 자기도 모르게 거절했다.“병원 안 가...”“열이 이렇게 나는데 어떻게 안 가?”정가혜는 서유가 거절하기도 저에 그녀를 업어서는 차로 병원에 데려갔다.응급으로 들어갔고 링거와 호흡기도 달았다.감기로 인한 고열은 쉽
정가혜는 서유가 연속으로 소리를 지르자 깜짝 놀라 다급하게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서유야, 왜 그래?”서유는 점차 의식이 돌아왔고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 보이던 이승하와 송사월은 어느새 사라졌고 수심으로 가득 찬 정가혜만 보였다.그녀는 그제야 자기가 방금 악몽을 꿨다는 걸 알아챘다. 꿈에서 과거가 나왔고 보고 싶지 않은 사람도 보았다.그녀는 아직 머릿속에 남은 화면을 애써 지웠다.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는데 손등에 링커 바늘이 꽂혀 있는 게 보였다.“고열이 나길래 병원으로 데려왔어.”정가혜는 고열로 어리둥절해진 서유를 보며 부드럽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고는 그녀를 부축해 물을 마시게 했다.달콤한 물이 목구멍을 타고 들어가자 서유는 다시 일말의 생기를 얻은 것 같았다.“가혜야...”“응?”정가혜가 부드럽게 대답하며 땀에 젖은 채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을 서유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배고파?”서유는 조금 힘겹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의사 선생님이 뭐라 안 하셔?”그녀는 심부전에 걸린 걸 어떻게 정가혜에게 털어놓을지 아직 고민 중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아파서 병원에 왔으니 정가혜가 이미 다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의사 선생님 별말씀 없으셨어. 그냥 고열에 쓰러지니까 링거를 놓아주더라고. 근데 채혈은 하셨어. 결과가 이때쯤이면 나온다고 하셨는데.”정가혜는 이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결과를 가지러 가려고 했다.“가서 결과 좀 가져올게.”서유가 다급하게 그녀를 말렸다.“가혜야, 나 배고파. 혹시 먼저 먹을 것 좀 사다주면 안 될까...”가혜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럼 조금만 기다려. 가서 죽 사다줄게.”가방을 들고 나가는 정가혜를 보고 나서야 서유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링거 폴대를 밀고 결과를 받는 단말기로 가서 결과를 뽑았다.심부전이라 피검사를 하면 심장 기능 상실이라고 나올 것이다.그녀는 정가혜가 이 결과를 보는 게 싫었다. 정가혜가 슬퍼하는
서유는 링거 폴대를 밀고 자기 병실로 향했다. 정가혜도 마침 죽을 사 들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러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를 보고는 다급하게 걸어왔다.“열 내린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이렇게 돌아다녀? 죽고 싶어?”정가혜가 그녀를 침대에 눌러 앉히더니 엄숙한 표정으로 한 소리 했다.“심장병 있는 거 알면서 조심해야지.”서유는 마음이 따듯해져 웃었다.“나 결과 가지러 갔었어.”정가혜가 죽 그릇을 열며 말했다.“내가 가서 가져오면 되지, 뭐가 급하다고 돌아다녀.”정가혜는 이렇게 말하더니 손을 내밀었다.“결과는? 나도 좀 보자.”정가혜를 속이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기에 서유는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선생님께 결과를 확인받아야 할 것 같아서 갖고 갔다가 거기 흘리고 나왔나 봐.”이 말을 들은 정가혜는 별다른 의심 없이 그저 서유의 몸 상태만 걱정했다.“뭐라셔?”서유가 느긋하게 대답했다.“그냥 채혈인데 뭐, 별거 없었어.”정가혜는 죽을 젓던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서유를 바라봤다.“너는 일반인과는 달라. 심장 질환이 있어서 채혈은 매우 중요한 검사라고.”서유가 웃으며 말했다.“알겠어. 의사 선생님이 별문제 없대. 심장도 정상이래. 걱정하지 마.”정가혜는 그제야 시름이 놓이는지 먹기 좋게 식은 죽을 서유에게 건네주었다.“네가 제일 좋아하는 고기죽이야. 일단 좀 먹어.”서유는 죽을 건네받아 한 숟가락씩 입에 넣었다.정가혜는 핼쑥한 서유를 보며 무언가 말하려다 다시 삼켰다.아까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서유가 외친 이름은 송사월이다.그 소년은 서유에게 금지어나 다름없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그녀가 꿈에서 송사월이란 이름을 부른 건 처음이었다.서유에 묻고 싶었다. 아직 마음속 깊은 곳에 송사월을 품고 있는 건 아닌지 말이다. 하지만 이는 서유의 상처를 다시 드러내는 거나 다름없었기에 정가혜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송사월은 이미 죽은 사람이고 지금 얘기해봤자 그냥 고민만 늘어날 뿐이다.
하룻밤 병원에 입원해 있으니 서유의 고열도 완전히 내려갔다. 그냥 몸이 아직 허약할 뿐 더는 병원에서 지낼 필요가 없었다.서유는 정가혜에게 병원비를 환불받으라 하고는 퇴원 절차를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정가혜는 집에 도착하고부터 주방에서 분주하게 돌아쳤다. 서유가 도와주려고 해도 정가혜는 안 된다고 했다.“들어가서 푹 쉬어. 여기는 내가 알아서 할게.”정가혜가 손을 흔들며 서유를 주방에서 밀어냈다.서유는 열은 내리긴 했으나 심부전은 더 악화했다.가슴 쪽이 너무 아팠고 머리도 어지러웠다. 혈액 공급과 산소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온몸에 힘이 빠졌고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이런 상태로 정가혜를 도와줄 수는 없었기에 말을 듣고 겨우 몸을 가눠 방으로 향했다.침대에 누워 깊은 잠에 들려는데 머리맡에 두었던 핸드폰에 알림이 하나 떴다. 그녀가 늘 보던 연예 뉴스 계정이었다.이승하를 만나면서 그의 일정을 파악하기 어려웠기에 가끔 뉴스에 나오는 걸 알고 연예 뉴스 계정을 몇 개 팔로우했었다.핸드폰을 열어 확인해 보니 이승하가 연지유를 안고 병원 응급실로 향하는 파파라치 컷에 둘이 다시 만난다는 내용이 곁들어져 있었다.서유는 조금씩 아래로 내렸다. 댓글은 모두 두 사람의 외모와 집안을 칭찬하면서 잘 어울리는 선남선녀라고 했다.서유도 그렇게 생각했다. 남자는 도도하면서도 귀티 나고 여자는 우아하면서도 대범하니 잘 어울리는 건 사실이었다.서유는 씁쓸하게 웃으며 뉴스 창을 끄고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는데 미처 확인하지 못한 메시지 한 통이 보였다.메시지를 열어보니 낯선 번호였다. 내용은 이러했다.「병원은 왜 간 거야?」서유는 멈칫했다.‘이 사람이 어떻게 알고 있지?’그녀는 시간을 확인했다. 어젯밤에 보내온 메시지였다. 마침 그녀가 병원에서 눈을 뜬 시간과 맞물렸다.서유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 메시지를 여러 번 확인했다.어제 병원에서 마주친 사람이라고는 이승하밖에 없는데, 설마 그가 보낸 건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서유는 떨리는 손으로
깊은 잠이 들어 비몽사몽인데 핸드폰이 또다시 진동해 대기 시작했다.서유는 피곤한 듯 힘겹게 눈을 뜨고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전화를 받았다.“자기야.”임태진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어제 고열이 났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어때?”서유는 임태진의 목소리를 듣고 얼마 남지 않은 정신머리를 다시 끄집어냈다.오늘따라 임태진이 너무 이상했다. 어떻게 잠자리를 가질지만 생각하더니 사람이 왜 갑자기 그녀의 몸 상태를 걱정하는지 의문이었다.‘문자에 전화에, 시한부라는 걸 알고 놓아주려는 건가?’서유는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덤덤하게 말했다.“다 나았어요.”“나았다니 됐어.”임태진은 성의 없게 대꾸하더니 다급하게 물었다.“근데 아까 나한테 전화한 거, 혹시 그 일 마무리한 거야?”역시나 서유의 예상에 적중했다. 임태진은 그녀의 몸 상태를 걱정한 게 아니라 이걸 물어보고 싶었던 거다.그녀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한 손으로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 찾아갔는데 고민해 보겠다고 했어요.”면피를 위해 그녀가 그날 둘러댄 핑계는 불법 촬영한 동영상으로 이승하를 협박해 프로젝트를 손에 넣겠다는 것이었다.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는 임태진을 속이기 위한 거짓말이라는 걸 임태진은 몰랐다.하지만 그녀에게 동영상 따위는 없었고 그녀가 이승하를 찾아갈 일도 없었다. 그러니 이승하를 협박해 프로젝트를 따내는 건 더 불가능했다.그녀는 이 핑계로 계속 임태진을 계속 기다리게 할 심산이었다.정가혜가 결혼을 잘 마치면 그녀는 임태진을 찾아가 끝장을 낼 것이다.그녀는 이미 생각을 다 정리한 상태다. 그녀의 목숨으로 정가혜의 평안함을 바꾸겠다고 말이다.임태진은 많이 안달 난 상태였다.“입찰 다음 달 10일이면 시작이야. 언제까지 고민한다는 거야?”서유가 미간을 찌푸렸다. 정가혜의 결혼식은 다음 달 9일이었다.정가혜가 결혼을 마치면 임태진을 찾아가 끝장낼 생각이었는데 입찰이 10일이라니,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