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표의 재질이 꽤 두꺼워 그녀의 얼굴에 생채기를 냈고 아픈 고통이 느껴졌다.그녀는 몇 초간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조용히 허리를 굽혀 표를 집어 들었다.액수를 본 순간 입안에 맴돌던 쓴맛이 순식간에 가슴 전체로 퍼졌다.5년이라는 시간으로 맞바꾼 1,000억. 이 정도면 꽤 가치 있는 거래인 것 같았다. 5년 전의 그녀는 정말 돈이 필요했었지만 지금은 죽어서 가져갈 수도 없는 돈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서유는 담담한 표정으로 수표를 다시 차 안으로 던졌다.“이 대표님 돈 많으시네요. 그런데 그 돈을 받으면 정정당당하게 임씨 가문에 시집갈 수가 없어서요.”그녀의 말은 임씨 가문의 며느리 자리에 비해 1,000억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었다.오히려 그의 돈을 받으면 재벌가에 시집가는데 방해가 될 뿐이었다.이승하는 그제야 그녀가 왜 한푼도 받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알았다. 알고 보니 재벌가에 시집갈 계획이었다.그는 마음속에 의문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고개를 들어 마치 모르는 사람을 보는 것처럼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너 앞으로 영원히 내 앞에 나타나지 마.”서유는 상관없다는 듯이 웃었다.“걱정하지 마요.”그녀에게는 미래가 없었기에 영원히 그의 앞에 나타날 기회가 없을 것이다. 그를 향한 깊은 사랑도 시간이 지나면 무덤에 묻혀 아무도 모를 텐데 말이다.이승하는 개인 별장에 도착했다. 비서가 차를 문 앞에 세우자 이연석이 재빨리 차에서 내렸다. 마침 별장에 들어가서 이승하를 만나려고 했는데 코닉세그가 한 대가 정원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멈춰 섰다.190센치에 가까운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큰 키에 탄탄한 몸매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비율을 자랑했다.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오만한 아우라에서 강한 카리스마가 느껴져 쉽게 다가갈 수 없었다. 이연석조차도 이승하를 보면 조금 겁을 먹을 때가 있었는데 그의 경쟁상대들은 더 할 것이다.그는 마음을 정리하며 이승하에게 다가갔다.“형, 왔
이승하의 무심한 얼굴이 점점 싸늘해지더니 눈꼬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기가 뼈를 에일 것만 같았다.그는 손에 들린 와인잔을 내려놓고 차강운 눈을 치켜뜨며 이연석을 바라보았다.“넌 어떻게 생각하는데?”이연석은 대담하게 추측했다.“내 생각에는 형이 조금 좋아하는 것 같은데요. 그렇지 않으면 임태진이 서유와 잤다고 말했을 때 왜 갑자기 화를 내면서 서유 씨한테 술까지 부은 거예요?”이연석은 비웃음을 날렸다.“그 여자가 나와 헤어진 지 얼마 안 됐는데 임태진하고 잤다고 하니까 순간 적응이 안 되더라고. 그래서 혼 좀 낸 건데 좋아하는 게 돼버린 건가?”이 말을 할 때 그의 눈가에 서린 차가운 한기는 사라진 지 오래였고 무심함과 소외감만 남아 있었다. 마치 그 여자를 혼낸 것을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이.이연석은 그런 그의 모습에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그의 형인 이승하는 결벽증 환자였기에 한순간 자기가 만났던 여자가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가지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더욱이 연지유가 귀국한 뒤 이승하는 서유와 헤어졌으니 그의 형 마음속에는 대용품일 뿐인 서유는 그렇게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다.이연석은 더 말하지 않고 손에 들린 와인잔에 술을 한 번에 마신 뒤 일어났다.“형, 그럼 나 먼저 갈게요.”이승하는 대답하지 않고 무심하게 고개만 끄덕였다.이연석은 어릴 때부터 냉정한 성격인 이승하가 익숙했기에 화도 나지 않았다. 바로 재킷을 가지고 떠났다.밖에는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 비서는 다급하게 달려와 우산을 들고 그를 차에 탈 수 있게 도왔다. 그는 비서에게 시 중심으로 가 달라고 했다.교차로에서 신호등에 걸려 기다리는 동안 그는 드레스만 입은 서유가 폭우를 맞으며 길가에서 택시를 잡는 것을 보았다.작은 키에 체구가 작은 그녀의 마른 몸매에 드레스가 비에 젖어 달라붙으니 더욱 가냘파 보였다.비에 젖은 머리가 손바닥만 한 그녀의 작은 얼굴에 헝클어져 조금 지저분해 보이긴 했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에 영향을 주진
서유는 조수석에 앉은 이규민을 힐끔 쳐다봤다.이연석은 고개를 돌린 채 창밖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서유는 그제야 난감함이 좀 가라앉은 듯했다.서유는 티슈를 들고 머리를 숙인 채 조용히 몸에 묻은 빗물을 닦아냈다.이연석은 백미러를 통해 뒷좌석에 앉은 가냘픈 몸짓을 바라봤다.그는 이렇게 추운 날에 서유가 외투 하나 걸치지 않고 밖에서 비를 맞으며 차를 잡는다는 게 이상했다.“서유 씨, 임태진 도련님이 집까지 데려다주지 않던가요?”임태진 이 세글자에 서유는 잠시 어리둥절해서 미간을 찌푸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갔다. 그녀는 지금 임태진의 여자였다.서유는 티슈를 꽉 움켜쥐더니 아무렇게나 둘러댔다.“다퉜는데 차에서 내리라고 하더라고요.”이연석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군요.”오들오들 떠는 그녀를 보고 이연석은 난방을 더 크게 틀어주며 더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갑자기 올라간 차 안의 온도 덕분에 꽁꽁 얼었던 서유의 몸도 점차 따듯해졌다.그녀는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이연석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설명했다.“원래는 그냥 콜택시 부르려고 했는데 핸드폰 배터리가 다 되었더라고요. 근처 슈퍼도 문을 닫아서 비를 피할 데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냥 길거리로 나와 지나가는 택시를 잡으려고 했는데, 번거롭게 해서 미안해요.”이연석이 한 손으로 턱을 괴고는 백미러로 안절부절못하는 서유를 보더니 따듯하게 위로를 건넸다.“괜찮아요.”서유는 그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머리를 창문에 기대고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너무 피곤했는데 따듯한 난방까지 있으니 바로 깊은 잠이 들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아파트 단지 앞에 멈춰 섰다.이연석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서유 씨, 다 왔네요.”한참이 지나도 뒷좌석에서 대답이 없자 이연석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서유가 창문에 기댄 채 쌔근쌔근 단잠을 자고 있었다. 이를 본 순간 이연석의 눈이 조금 커졌다.참 대범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낯선 사람의 차에서 저렇게 시름 놓고 자다니 말이다.
서유는 비를 뚫으며 집으로 돌아와 입었던 드레스와 목에 걸었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박스에 던져넣었다.그녀는 내일 이 물건들을 임태진에게 택배로 돌려줄 생각이었다. 너무 역겨운 물건이라 한시도 가지고 있기가 싫었다.박스를 닫고 그녀는 샤워실로 향했다. 욕조의 물을 틀어놓고는 안에 들어가 누웠다.그녀는 샤워볼로 미친 듯이 자기 얼굴과 등을 비볐고 피부는 어느새 빨개졌다. 그제야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바라봤다.화장을 지우자 병약함과 창백함만이 남았고, 기력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눈빛은 암울한게 생기가 없었다.그녀에겐 빛이 보이지 않았고 따듯함도 느낄 수 없었다.마치 하찮은 개미처럼 누구든 짓밟을 수 있는 존재 같았다.하지만 그녀도 자존심이 있는 사람이었다.“자존심이라.”서유는 이를 되뇌며 그런 자신을 비웃었다. 이승하에게 팔려 간 날부터 그녀에게 자존심 따위는 없었다.그녀는 머리를 말린 채 침대에 누웠다. 너무 피곤해서인지 바로 깊은 잠이 들었다.비를 맞으니 병세가 많이 악화했고 그녀는 그렇게 이튿날 오후까지 잠만 잤다.정가혜가 밤새 야간 당직을 서고 오후까지 자다가 일어나서 식사 준비까지 마쳤는데도 서유는 깨어나지 않았다.정가혜는 하는 수 없이 서유의 방문을 두드리며 서유의 이름을 두 번 불렀다. 그래도 방안은 아무런 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정가혜는 그제야 수상함을 눈치챘다.정가혜는 신속하게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누워 있는 서유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정가혜는 얼른 손으로 서유의 이마를 짚어보았다.너무 뜨거웠다.장가혜는 다급하게 이불을 걷어 서유를 일으켜 세웠다.“서유야, 너 고열이야. 얼른 일어나서 병원 가자.”고열에 정신이 흐릿했지만 병원이라는 두 글자를 들은 서유는 자기도 모르게 거절했다.“병원 안 가...”“열이 이렇게 나는데 어떻게 안 가?”정가혜는 서유가 거절하기도 저에 그녀를 업어서는 차로 병원에 데려갔다.응급으로 들어갔고 링거와 호흡기도 달았다.감기로 인한 고열은 쉽
정가혜는 서유가 연속으로 소리를 지르자 깜짝 놀라 다급하게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서유야, 왜 그래?”서유는 점차 의식이 돌아왔고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 보이던 이승하와 송사월은 어느새 사라졌고 수심으로 가득 찬 정가혜만 보였다.그녀는 그제야 자기가 방금 악몽을 꿨다는 걸 알아챘다. 꿈에서 과거가 나왔고 보고 싶지 않은 사람도 보았다.그녀는 아직 머릿속에 남은 화면을 애써 지웠다.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는데 손등에 링커 바늘이 꽂혀 있는 게 보였다.“고열이 나길래 병원으로 데려왔어.”정가혜는 고열로 어리둥절해진 서유를 보며 부드럽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고는 그녀를 부축해 물을 마시게 했다.달콤한 물이 목구멍을 타고 들어가자 서유는 다시 일말의 생기를 얻은 것 같았다.“가혜야...”“응?”정가혜가 부드럽게 대답하며 땀에 젖은 채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을 서유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배고파?”서유는 조금 힘겹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의사 선생님이 뭐라 안 하셔?”그녀는 심부전에 걸린 걸 어떻게 정가혜에게 털어놓을지 아직 고민 중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아파서 병원에 왔으니 정가혜가 이미 다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의사 선생님 별말씀 없으셨어. 그냥 고열에 쓰러지니까 링거를 놓아주더라고. 근데 채혈은 하셨어. 결과가 이때쯤이면 나온다고 하셨는데.”정가혜는 이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결과를 가지러 가려고 했다.“가서 결과 좀 가져올게.”서유가 다급하게 그녀를 말렸다.“가혜야, 나 배고파. 혹시 먼저 먹을 것 좀 사다주면 안 될까...”가혜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럼 조금만 기다려. 가서 죽 사다줄게.”가방을 들고 나가는 정가혜를 보고 나서야 서유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링거 폴대를 밀고 결과를 받는 단말기로 가서 결과를 뽑았다.심부전이라 피검사를 하면 심장 기능 상실이라고 나올 것이다.그녀는 정가혜가 이 결과를 보는 게 싫었다. 정가혜가 슬퍼하는
서유는 링거 폴대를 밀고 자기 병실로 향했다. 정가혜도 마침 죽을 사 들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러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를 보고는 다급하게 걸어왔다.“열 내린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이렇게 돌아다녀? 죽고 싶어?”정가혜가 그녀를 침대에 눌러 앉히더니 엄숙한 표정으로 한 소리 했다.“심장병 있는 거 알면서 조심해야지.”서유는 마음이 따듯해져 웃었다.“나 결과 가지러 갔었어.”정가혜가 죽 그릇을 열며 말했다.“내가 가서 가져오면 되지, 뭐가 급하다고 돌아다녀.”정가혜는 이렇게 말하더니 손을 내밀었다.“결과는? 나도 좀 보자.”정가혜를 속이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기에 서유는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선생님께 결과를 확인받아야 할 것 같아서 갖고 갔다가 거기 흘리고 나왔나 봐.”이 말을 들은 정가혜는 별다른 의심 없이 그저 서유의 몸 상태만 걱정했다.“뭐라셔?”서유가 느긋하게 대답했다.“그냥 채혈인데 뭐, 별거 없었어.”정가혜는 죽을 젓던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서유를 바라봤다.“너는 일반인과는 달라. 심장 질환이 있어서 채혈은 매우 중요한 검사라고.”서유가 웃으며 말했다.“알겠어. 의사 선생님이 별문제 없대. 심장도 정상이래. 걱정하지 마.”정가혜는 그제야 시름이 놓이는지 먹기 좋게 식은 죽을 서유에게 건네주었다.“네가 제일 좋아하는 고기죽이야. 일단 좀 먹어.”서유는 죽을 건네받아 한 숟가락씩 입에 넣었다.정가혜는 핼쑥한 서유를 보며 무언가 말하려다 다시 삼켰다.아까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서유가 외친 이름은 송사월이다.그 소년은 서유에게 금지어나 다름없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그녀가 꿈에서 송사월이란 이름을 부른 건 처음이었다.서유에 묻고 싶었다. 아직 마음속 깊은 곳에 송사월을 품고 있는 건 아닌지 말이다. 하지만 이는 서유의 상처를 다시 드러내는 거나 다름없었기에 정가혜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송사월은 이미 죽은 사람이고 지금 얘기해봤자 그냥 고민만 늘어날 뿐이다.
하룻밤 병원에 입원해 있으니 서유의 고열도 완전히 내려갔다. 그냥 몸이 아직 허약할 뿐 더는 병원에서 지낼 필요가 없었다.서유는 정가혜에게 병원비를 환불받으라 하고는 퇴원 절차를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정가혜는 집에 도착하고부터 주방에서 분주하게 돌아쳤다. 서유가 도와주려고 해도 정가혜는 안 된다고 했다.“들어가서 푹 쉬어. 여기는 내가 알아서 할게.”정가혜가 손을 흔들며 서유를 주방에서 밀어냈다.서유는 열은 내리긴 했으나 심부전은 더 악화했다.가슴 쪽이 너무 아팠고 머리도 어지러웠다. 혈액 공급과 산소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온몸에 힘이 빠졌고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이런 상태로 정가혜를 도와줄 수는 없었기에 말을 듣고 겨우 몸을 가눠 방으로 향했다.침대에 누워 깊은 잠에 들려는데 머리맡에 두었던 핸드폰에 알림이 하나 떴다. 그녀가 늘 보던 연예 뉴스 계정이었다.이승하를 만나면서 그의 일정을 파악하기 어려웠기에 가끔 뉴스에 나오는 걸 알고 연예 뉴스 계정을 몇 개 팔로우했었다.핸드폰을 열어 확인해 보니 이승하가 연지유를 안고 병원 응급실로 향하는 파파라치 컷에 둘이 다시 만난다는 내용이 곁들어져 있었다.서유는 조금씩 아래로 내렸다. 댓글은 모두 두 사람의 외모와 집안을 칭찬하면서 잘 어울리는 선남선녀라고 했다.서유도 그렇게 생각했다. 남자는 도도하면서도 귀티 나고 여자는 우아하면서도 대범하니 잘 어울리는 건 사실이었다.서유는 씁쓸하게 웃으며 뉴스 창을 끄고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는데 미처 확인하지 못한 메시지 한 통이 보였다.메시지를 열어보니 낯선 번호였다. 내용은 이러했다.「병원은 왜 간 거야?」서유는 멈칫했다.‘이 사람이 어떻게 알고 있지?’그녀는 시간을 확인했다. 어젯밤에 보내온 메시지였다. 마침 그녀가 병원에서 눈을 뜬 시간과 맞물렸다.서유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 메시지를 여러 번 확인했다.어제 병원에서 마주친 사람이라고는 이승하밖에 없는데, 설마 그가 보낸 건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서유는 떨리는 손으로
깊은 잠이 들어 비몽사몽인데 핸드폰이 또다시 진동해 대기 시작했다.서유는 피곤한 듯 힘겹게 눈을 뜨고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전화를 받았다.“자기야.”임태진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어제 고열이 났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어때?”서유는 임태진의 목소리를 듣고 얼마 남지 않은 정신머리를 다시 끄집어냈다.오늘따라 임태진이 너무 이상했다. 어떻게 잠자리를 가질지만 생각하더니 사람이 왜 갑자기 그녀의 몸 상태를 걱정하는지 의문이었다.‘문자에 전화에, 시한부라는 걸 알고 놓아주려는 건가?’서유는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덤덤하게 말했다.“다 나았어요.”“나았다니 됐어.”임태진은 성의 없게 대꾸하더니 다급하게 물었다.“근데 아까 나한테 전화한 거, 혹시 그 일 마무리한 거야?”역시나 서유의 예상에 적중했다. 임태진은 그녀의 몸 상태를 걱정한 게 아니라 이걸 물어보고 싶었던 거다.그녀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한 손으로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 찾아갔는데 고민해 보겠다고 했어요.”면피를 위해 그녀가 그날 둘러댄 핑계는 불법 촬영한 동영상으로 이승하를 협박해 프로젝트를 손에 넣겠다는 것이었다.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는 임태진을 속이기 위한 거짓말이라는 걸 임태진은 몰랐다.하지만 그녀에게 동영상 따위는 없었고 그녀가 이승하를 찾아갈 일도 없었다. 그러니 이승하를 협박해 프로젝트를 따내는 건 더 불가능했다.그녀는 이 핑계로 계속 임태진을 계속 기다리게 할 심산이었다.정가혜가 결혼을 잘 마치면 그녀는 임태진을 찾아가 끝장을 낼 것이다.그녀는 이미 생각을 다 정리한 상태다. 그녀의 목숨으로 정가혜의 평안함을 바꾸겠다고 말이다.임태진은 많이 안달 난 상태였다.“입찰 다음 달 10일이면 시작이야. 언제까지 고민한다는 거야?”서유가 미간을 찌푸렸다. 정가혜의 결혼식은 다음 달 9일이었다.정가혜가 결혼을 마치면 임태진을 찾아가 끝장낼 생각이었는데 입찰이 10일이라니,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