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은하고 시원한 향기와 와인 향이 뒤섞여 순간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혔다.그가 다가오자 서유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차 문 쪽으로 움직였다.하지만 차 안이 너무 좁았기에 몇 번밖에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등 뒤에 차 문이 닿았다.이승하는 한 손을 차창에 올려놓고 가녀린 그녀를 품 안에 가두었다.눈처럼 차갑고 매혹적인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그녀의 목에 걸린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발견했다.잠시 후 귓가에 경멸이 섞인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새 스폰서가 잘해주나 봐.”그는 원래 잘 웃지 않는 사람이었고 대부분은 차가운 얼굴이었다.하지만 미소가 차가운 얼굴에 걸리니 조금 무서워 보였다.서유는 해명하고 싶었지만 ‘새 스폰서’라는 말에 침묵했다.임태진이 그녀를 자기 여자라고 소개한 그 순간부터 해명하는 것은 이미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이승하는 아무런 말도 설명도 하지 않는 그녀를 보고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그는 길고 예쁜 손을 올려 그녀의 볼을 이어 귓가를 쓰다듬었다.임태진에게서 느껴졌던 역겨움과는 달리 이승하의 스킨쉽은 그녀를 두렵게 만들었다.오랫동안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의 강력한 아우라가 그녀를 숨 막히게 했다.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이승하는 그녀의 뒷머리를 잡아 자신의 눈앞으로 당겼다.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싸늘하게 물었다.“두 사람 언제 잤어? 몇 번이나 잤어?”가까워질수록 남자의 향기가 짙게 풍겼다.서유는 심장이 따끔거려 멈출 것 같아 온몸의 뼈까지 마비되는 느낌을 받았다.그녀는 마음속으로 쓸모없는 자신을 욕하며 다급하게 고개를 돌려 그와의 접촉을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갑자기 그녀의 목을 졸랐다.그는 그녀의 목덜미에 있는 키스 마크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뼛속까지 얼어붙을 것 같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도 하고 온 거야?”서유는 얼굴이 창백해지며 다급하게 손을 들어 올려 귀 뒤에 임태진이 키스를 했던 곳을 가렸다.“아니에요. 그 사람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내가 믿을 것 같아?”그
이승하의 거대한 몸이 순간 얼어붙었다.어두운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한기가 사람을 순간 얼어붙게 할 것 같았다.그는 서유를 바라보며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에서 입가에 걸린 미소에서 부끄러움이나 분노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고 오히려 그를 도발하려는 느낌이 가득했다.그녀의 이런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와 계속되는 도발은 이승한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그는 그녀의 턱을 세게 잡았다.힘을 어찌나 세게 주었는지 작고 하얀 턱에 바로 푸른 멍이 들었다.서유의 얼굴은 고통에 의해 더 창백해졌다. 이승하는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든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얼굴을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내가 너한테 말했었지. 내 물건은 누구도 건드릴 수 없다고.”그는 살기가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의 턱을 뜯어 버리려는 듯이 턱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서유는 이승하가 이렇게 화난 모습을 처음 보는 것이라 조금 멍해졌다.그녀는 이승하를 자극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여러 차례 굴욕을 당했기에 이런 방법으로라도 반격한 것이었다.하지만 그가 이렇게 크게 분노할 줄은 몰랐다. 이승하는 그녀를 신경도 쓰지 않는 것 아니었나?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거지?서유는 아픔을 겨우 참았다. 그녀는 이승하를 바라보며 용기를 내 물었다.“왜 이렇게 내가 다른 사람하고 잤는지 신경 써요? 설마 나 좋아하는 거예요?”그와 5년을 함께 하면서 한 번도 그가 이 정도로 이성을 잃은 것을 보지 못했다. 이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면 뭘까?여기까지 생각하자 서유의 흐릿한 눈빛이 점차 희망으로 빛났다.그녀는 그의 눈빛에서 한줄기 좋아하는 감정이라도 읽어내려는 듯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읽어내지 못했고 오히려 혐오와 짜증만 느껴졌다.“내가 뭘 신경 쓰는지 그걸 네가 몰라?”이승하의 차가운 질문에 서유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이승하가 뭘 신경 쓰는지 그녀는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포기할 수가 없었다.한 사람을 오랫동안 사
수표의 재질이 꽤 두꺼워 그녀의 얼굴에 생채기를 냈고 아픈 고통이 느껴졌다.그녀는 몇 초간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조용히 허리를 굽혀 표를 집어 들었다.액수를 본 순간 입안에 맴돌던 쓴맛이 순식간에 가슴 전체로 퍼졌다.5년이라는 시간으로 맞바꾼 1,000억. 이 정도면 꽤 가치 있는 거래인 것 같았다. 5년 전의 그녀는 정말 돈이 필요했었지만 지금은 죽어서 가져갈 수도 없는 돈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서유는 담담한 표정으로 수표를 다시 차 안으로 던졌다.“이 대표님 돈 많으시네요. 그런데 그 돈을 받으면 정정당당하게 임씨 가문에 시집갈 수가 없어서요.”그녀의 말은 임씨 가문의 며느리 자리에 비해 1,000억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었다.오히려 그의 돈을 받으면 재벌가에 시집가는데 방해가 될 뿐이었다.이승하는 그제야 그녀가 왜 한푼도 받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알았다. 알고 보니 재벌가에 시집갈 계획이었다.그는 마음속에 의문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고개를 들어 마치 모르는 사람을 보는 것처럼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너 앞으로 영원히 내 앞에 나타나지 마.”서유는 상관없다는 듯이 웃었다.“걱정하지 마요.”그녀에게는 미래가 없었기에 영원히 그의 앞에 나타날 기회가 없을 것이다. 그를 향한 깊은 사랑도 시간이 지나면 무덤에 묻혀 아무도 모를 텐데 말이다.이승하는 개인 별장에 도착했다. 비서가 차를 문 앞에 세우자 이연석이 재빨리 차에서 내렸다. 마침 별장에 들어가서 이승하를 만나려고 했는데 코닉세그가 한 대가 정원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멈춰 섰다.190센치에 가까운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큰 키에 탄탄한 몸매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비율을 자랑했다.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오만한 아우라에서 강한 카리스마가 느껴져 쉽게 다가갈 수 없었다. 이연석조차도 이승하를 보면 조금 겁을 먹을 때가 있었는데 그의 경쟁상대들은 더 할 것이다.그는 마음을 정리하며 이승하에게 다가갔다.“형, 왔
이승하의 무심한 얼굴이 점점 싸늘해지더니 눈꼬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기가 뼈를 에일 것만 같았다.그는 손에 들린 와인잔을 내려놓고 차강운 눈을 치켜뜨며 이연석을 바라보았다.“넌 어떻게 생각하는데?”이연석은 대담하게 추측했다.“내 생각에는 형이 조금 좋아하는 것 같은데요. 그렇지 않으면 임태진이 서유와 잤다고 말했을 때 왜 갑자기 화를 내면서 서유 씨한테 술까지 부은 거예요?”이연석은 비웃음을 날렸다.“그 여자가 나와 헤어진 지 얼마 안 됐는데 임태진하고 잤다고 하니까 순간 적응이 안 되더라고. 그래서 혼 좀 낸 건데 좋아하는 게 돼버린 건가?”이 말을 할 때 그의 눈가에 서린 차가운 한기는 사라진 지 오래였고 무심함과 소외감만 남아 있었다. 마치 그 여자를 혼낸 것을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이.이연석은 그런 그의 모습에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그의 형인 이승하는 결벽증 환자였기에 한순간 자기가 만났던 여자가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가지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더욱이 연지유가 귀국한 뒤 이승하는 서유와 헤어졌으니 그의 형 마음속에는 대용품일 뿐인 서유는 그렇게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다.이연석은 더 말하지 않고 손에 들린 와인잔에 술을 한 번에 마신 뒤 일어났다.“형, 그럼 나 먼저 갈게요.”이승하는 대답하지 않고 무심하게 고개만 끄덕였다.이연석은 어릴 때부터 냉정한 성격인 이승하가 익숙했기에 화도 나지 않았다. 바로 재킷을 가지고 떠났다.밖에는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 비서는 다급하게 달려와 우산을 들고 그를 차에 탈 수 있게 도왔다. 그는 비서에게 시 중심으로 가 달라고 했다.교차로에서 신호등에 걸려 기다리는 동안 그는 드레스만 입은 서유가 폭우를 맞으며 길가에서 택시를 잡는 것을 보았다.작은 키에 체구가 작은 그녀의 마른 몸매에 드레스가 비에 젖어 달라붙으니 더욱 가냘파 보였다.비에 젖은 머리가 손바닥만 한 그녀의 작은 얼굴에 헝클어져 조금 지저분해 보이긴 했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에 영향을 주진
서유는 조수석에 앉은 이규민을 힐끔 쳐다봤다.이연석은 고개를 돌린 채 창밖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서유는 그제야 난감함이 좀 가라앉은 듯했다.서유는 티슈를 들고 머리를 숙인 채 조용히 몸에 묻은 빗물을 닦아냈다.이연석은 백미러를 통해 뒷좌석에 앉은 가냘픈 몸짓을 바라봤다.그는 이렇게 추운 날에 서유가 외투 하나 걸치지 않고 밖에서 비를 맞으며 차를 잡는다는 게 이상했다.“서유 씨, 임태진 도련님이 집까지 데려다주지 않던가요?”임태진 이 세글자에 서유는 잠시 어리둥절해서 미간을 찌푸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갔다. 그녀는 지금 임태진의 여자였다.서유는 티슈를 꽉 움켜쥐더니 아무렇게나 둘러댔다.“다퉜는데 차에서 내리라고 하더라고요.”이연석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군요.”오들오들 떠는 그녀를 보고 이연석은 난방을 더 크게 틀어주며 더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갑자기 올라간 차 안의 온도 덕분에 꽁꽁 얼었던 서유의 몸도 점차 따듯해졌다.그녀는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이연석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설명했다.“원래는 그냥 콜택시 부르려고 했는데 핸드폰 배터리가 다 되었더라고요. 근처 슈퍼도 문을 닫아서 비를 피할 데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냥 길거리로 나와 지나가는 택시를 잡으려고 했는데, 번거롭게 해서 미안해요.”이연석이 한 손으로 턱을 괴고는 백미러로 안절부절못하는 서유를 보더니 따듯하게 위로를 건넸다.“괜찮아요.”서유는 그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머리를 창문에 기대고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너무 피곤했는데 따듯한 난방까지 있으니 바로 깊은 잠이 들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아파트 단지 앞에 멈춰 섰다.이연석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서유 씨, 다 왔네요.”한참이 지나도 뒷좌석에서 대답이 없자 이연석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서유가 창문에 기댄 채 쌔근쌔근 단잠을 자고 있었다. 이를 본 순간 이연석의 눈이 조금 커졌다.참 대범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낯선 사람의 차에서 저렇게 시름 놓고 자다니 말이다.
서유는 비를 뚫으며 집으로 돌아와 입었던 드레스와 목에 걸었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박스에 던져넣었다.그녀는 내일 이 물건들을 임태진에게 택배로 돌려줄 생각이었다. 너무 역겨운 물건이라 한시도 가지고 있기가 싫었다.박스를 닫고 그녀는 샤워실로 향했다. 욕조의 물을 틀어놓고는 안에 들어가 누웠다.그녀는 샤워볼로 미친 듯이 자기 얼굴과 등을 비볐고 피부는 어느새 빨개졌다. 그제야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바라봤다.화장을 지우자 병약함과 창백함만이 남았고, 기력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눈빛은 암울한게 생기가 없었다.그녀에겐 빛이 보이지 않았고 따듯함도 느낄 수 없었다.마치 하찮은 개미처럼 누구든 짓밟을 수 있는 존재 같았다.하지만 그녀도 자존심이 있는 사람이었다.“자존심이라.”서유는 이를 되뇌며 그런 자신을 비웃었다. 이승하에게 팔려 간 날부터 그녀에게 자존심 따위는 없었다.그녀는 머리를 말린 채 침대에 누웠다. 너무 피곤해서인지 바로 깊은 잠이 들었다.비를 맞으니 병세가 많이 악화했고 그녀는 그렇게 이튿날 오후까지 잠만 잤다.정가혜가 밤새 야간 당직을 서고 오후까지 자다가 일어나서 식사 준비까지 마쳤는데도 서유는 깨어나지 않았다.정가혜는 하는 수 없이 서유의 방문을 두드리며 서유의 이름을 두 번 불렀다. 그래도 방안은 아무런 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정가혜는 그제야 수상함을 눈치챘다.정가혜는 신속하게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누워 있는 서유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정가혜는 얼른 손으로 서유의 이마를 짚어보았다.너무 뜨거웠다.장가혜는 다급하게 이불을 걷어 서유를 일으켜 세웠다.“서유야, 너 고열이야. 얼른 일어나서 병원 가자.”고열에 정신이 흐릿했지만 병원이라는 두 글자를 들은 서유는 자기도 모르게 거절했다.“병원 안 가...”“열이 이렇게 나는데 어떻게 안 가?”정가혜는 서유가 거절하기도 저에 그녀를 업어서는 차로 병원에 데려갔다.응급으로 들어갔고 링거와 호흡기도 달았다.감기로 인한 고열은 쉽
정가혜는 서유가 연속으로 소리를 지르자 깜짝 놀라 다급하게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서유야, 왜 그래?”서유는 점차 의식이 돌아왔고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 보이던 이승하와 송사월은 어느새 사라졌고 수심으로 가득 찬 정가혜만 보였다.그녀는 그제야 자기가 방금 악몽을 꿨다는 걸 알아챘다. 꿈에서 과거가 나왔고 보고 싶지 않은 사람도 보았다.그녀는 아직 머릿속에 남은 화면을 애써 지웠다.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는데 손등에 링커 바늘이 꽂혀 있는 게 보였다.“고열이 나길래 병원으로 데려왔어.”정가혜는 고열로 어리둥절해진 서유를 보며 부드럽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고는 그녀를 부축해 물을 마시게 했다.달콤한 물이 목구멍을 타고 들어가자 서유는 다시 일말의 생기를 얻은 것 같았다.“가혜야...”“응?”정가혜가 부드럽게 대답하며 땀에 젖은 채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을 서유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배고파?”서유는 조금 힘겹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의사 선생님이 뭐라 안 하셔?”그녀는 심부전에 걸린 걸 어떻게 정가혜에게 털어놓을지 아직 고민 중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아파서 병원에 왔으니 정가혜가 이미 다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의사 선생님 별말씀 없으셨어. 그냥 고열에 쓰러지니까 링거를 놓아주더라고. 근데 채혈은 하셨어. 결과가 이때쯤이면 나온다고 하셨는데.”정가혜는 이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결과를 가지러 가려고 했다.“가서 결과 좀 가져올게.”서유가 다급하게 그녀를 말렸다.“가혜야, 나 배고파. 혹시 먼저 먹을 것 좀 사다주면 안 될까...”가혜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럼 조금만 기다려. 가서 죽 사다줄게.”가방을 들고 나가는 정가혜를 보고 나서야 서유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링거 폴대를 밀고 결과를 받는 단말기로 가서 결과를 뽑았다.심부전이라 피검사를 하면 심장 기능 상실이라고 나올 것이다.그녀는 정가혜가 이 결과를 보는 게 싫었다. 정가혜가 슬퍼하는
서유는 링거 폴대를 밀고 자기 병실로 향했다. 정가혜도 마침 죽을 사 들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러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를 보고는 다급하게 걸어왔다.“열 내린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이렇게 돌아다녀? 죽고 싶어?”정가혜가 그녀를 침대에 눌러 앉히더니 엄숙한 표정으로 한 소리 했다.“심장병 있는 거 알면서 조심해야지.”서유는 마음이 따듯해져 웃었다.“나 결과 가지러 갔었어.”정가혜가 죽 그릇을 열며 말했다.“내가 가서 가져오면 되지, 뭐가 급하다고 돌아다녀.”정가혜는 이렇게 말하더니 손을 내밀었다.“결과는? 나도 좀 보자.”정가혜를 속이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기에 서유는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선생님께 결과를 확인받아야 할 것 같아서 갖고 갔다가 거기 흘리고 나왔나 봐.”이 말을 들은 정가혜는 별다른 의심 없이 그저 서유의 몸 상태만 걱정했다.“뭐라셔?”서유가 느긋하게 대답했다.“그냥 채혈인데 뭐, 별거 없었어.”정가혜는 죽을 젓던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서유를 바라봤다.“너는 일반인과는 달라. 심장 질환이 있어서 채혈은 매우 중요한 검사라고.”서유가 웃으며 말했다.“알겠어. 의사 선생님이 별문제 없대. 심장도 정상이래. 걱정하지 마.”정가혜는 그제야 시름이 놓이는지 먹기 좋게 식은 죽을 서유에게 건네주었다.“네가 제일 좋아하는 고기죽이야. 일단 좀 먹어.”서유는 죽을 건네받아 한 숟가락씩 입에 넣었다.정가혜는 핼쑥한 서유를 보며 무언가 말하려다 다시 삼켰다.아까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서유가 외친 이름은 송사월이다.그 소년은 서유에게 금지어나 다름없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그녀가 꿈에서 송사월이란 이름을 부른 건 처음이었다.서유에 묻고 싶었다. 아직 마음속 깊은 곳에 송사월을 품고 있는 건 아닌지 말이다. 하지만 이는 서유의 상처를 다시 드러내는 거나 다름없었기에 정가혜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송사월은 이미 죽은 사람이고 지금 얘기해봤자 그냥 고민만 늘어날 뿐이다.
지난주, 토론 대회에 나간다고 말하는 연이를 향해 이하준은 엄청 비꼬았다. 그 모습에 화가 난 연이는 씩씩거리며 이하준과 내기를 했고 뜻밖에도 그녀가 이기게 될 줄은 몰랐다.눈꺼풀을 내리깔던 하준이가 손을 힐끗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평소에 그렇게 재잘재잘하더니 실력 한번 제대로 발휘했네. 축하해.”진심으로 축하하는 것 같지 않고 그가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아무튼 이번에는 네가 졌어. 그러니까 잊지 말고 돈 입금해.”이하준은 천천히 냅킨을 깔면서 담담하게 말했다.“밥 먹고 나서 줄게. 근데 누나...”그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기세등등하게 연이를 쳐다보았다.“누나 올해 열일곱이지? 아직까지 고등학교에 다니고. 수시 자격도 따내지 못했으니 수능 봐서 어떤 대학에 합격할 수 있을지 정말 걱정이다.”그 말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너... 명문대에 합격했다고 잘난 척하지 마. 내년에 나도 그 학교에 합격할지 모르니까.”이하준은 칼과 포크를 집어 들고 스테이크를 썰어서 입에 넣었다.“그럼 내 후배가 되는 건가?”화가 난 연이가 반격할 겨를도 없이 그가 또 빈정거렸다.“내년에 학교에서 만나. 만나면 나한테 선배라고 부르는 거 잊지 말고.”“아악. 열받아 죽겠네.”연이가 가슴을 내리치더니 옆에 있던 의자를 끌어당겨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서유의 팔짱을 끼고 어깨에 기댄 채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이모, 하준이 쟤 정말 얄미워죽겠어요. 빨리 학교에 보내버려요.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요.”서유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막상 가고 나면 또 보고 싶을걸?”“아니요. 그럴 일은 절대 없어요.”입을 삐죽거리면서 시선은 이하준의 얼굴로 향해 있었다. 솔직히 이 녀석과 10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많이 싸우기도 했지만 정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얄미운 동생인 건 사실이다. “빨리 갔으면 좋겠어요.”웃음을 짓던 서유가 포크로 과일을 집어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 연이는 과일을 받아먹으면서 이하준을 향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 회사에서 돌아온 서유는 정원에서 칼자루를 쥔 채 아이한테 칼을 다스리는 법을 가르치고 있는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다가가 말을 건네려고 했지만 아름다운 광경에 발걸음을 멈추고는 문 옆에 살짝 기대어 잔디밭의 크고 작은 그림자를 멀리서 바라보았다. 아이한테 관심이 없었던 남자는 아이를 뛰어난 인재로 키우기 위해 온갖 정성을 쏟았다. 시간이 흘러 아이는 아빠를 존경했고 아빠를 많이 따랐다. 이승하는 좋은 남편이자 좋은 아빠였다. 그가 있었기 때문에 이 집이 따뜻하고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좋은 남자가 그녀와 아이의 옆에서 평생을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랐다. 잠시 후,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날카롭던 시선도 이젠 나이가 드니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조각같이 잘생긴 얼굴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고 세월마저 그의 얼굴을 그냥 스쳐 지나간 듯 그는 처음 봤을 때와 큰 차이가 없었다. 검은색 셔츠와 긴 바지 사이에 흰색 허리띠를 두르고 있는 그의 몸이 석양 아래에 우뚝 서 있었고 그가 양쪽 허리춤에 손을 얹고 있었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머리 뒤로 잘 빗겨져 있었고 약간 고개를 돌리니 머리카락이 왼쪽으로 살짝 흔들렸다. 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서유한테 가까이 오라고 했다. 옅은 미소를 짓던 그녀는 그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 소지섭을 지나치다가 손에 있던 손수건을 챙겨 앞으로 다가갔다. “여보, 허리 숙여요.”그가 허리를 약간 숙이자 서유는 발끝은 세우고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주었다.“저녁에 뭐 먹고 싶어요?”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잡자 가녀린 그녀가 그의 품에 쏙 들어왔다. “우리 서 대표님이 직접 요리를 하실 건가?”그의 장난에도 그녀는 화를 내지 않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그렇게 좀 부르지 말아요.”지난 5년 동안 서유도 많이 바삐 보냈고 자신의 건축 사무소까지 차렸다. 그러나 프로젝트를 많이 맡지 않고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남편과 아이를 돌봤다. 하지만 이승하는
그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칼, 총, 레이싱카, 배, 비행기 이것들 중에서 뭐부터 배우고 싶어?”하준이가 초롱초롱한 눈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아빠, 저한테 가르쳐주시려고요?”소파에 등을 기대고 있던 남자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이론 지식은 이미 거의 다 배웠으니 이제부터는 호신술을 가르쳐 줄 생각이야. 나중에 날 대신해 네가 엄마를 지켜줘야 하니까.”아이는 머리를 살짝 기울인 채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아빠가 옆에 있는데 왜 제가 엄마를 지켜줘야 해요?”벌써 두통 증상이 심해진 그는 머릿속에 있는 칩에 대해 아이한테 얘기하지 않았다.“당분간은 로봇 프로젝트 때문에 많이 바쁠 거야. 자주 자리를 비우게 될 테니까 내가 없는 동안에는 네가 엄마를 지켜줘야 해.”요즘 아빠가 로봇 개발 중인 걸 알고 있던 이하준은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세요. 열심히 배워서 엄마를 지켜줄 거예요.”아이의 약속을 듣고 이승하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일단 총 쏘는 법부터 가르쳐줄게.”하준이도 냉큼 그의 뒤를 따라 일어섰다.“세 살 때, 총을 가지고 놀다가 아빠한테 호되게 맞았던 적이 있었는데. 다시는 총을 못 잡게 할 줄 알았어요.”아이가 그 어릴 때의 일까지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때는 네가 너무 어렸으니까 총을 가지고 놀지 못하게 한 거야.”“저 이제 겨우 10살인데요. 지금은 총 가지고 노는 거 안심하세요?”발걸음을 멈추던 그가 뒤돌아서 어느새 허리 높이까지 키가 훌쩍 큰 아이를 바라보았다.“이제 곧 공부하러 해외로 가잖아. 돌아와서 배우면 그땐 이미 늦었어.”천재가 맞는 건지 하준이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학교의 입학 통지서를 받게 되었고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이국땅에서 다른 천재 아이들과 함께 공부를 하게 되었다. 서재로 들어간 그는 10년 동안 사용하지 않은 총을 꺼내 하준이를 데리고 정원으로 향했다.한편, 이승하가 아이에게 사격을 가르치려 한다는 걸 진작부터 알고
이연석은 급히 손을 흔들며 말했다.“아닙니다. 그냥 기부하려던 거예요.”하지만 전문가는 그런 돈을 받을 수 없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그의 고지식한 태도에 이연석은 화가 나서 책상을 치며 일어섰다.“그러니까 머리카락 한 올 없이 다 빠졌지! 다 선생님 고지식함이 다 빨아먹은 거예요!”전문가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는 같은 책상을 치며 맞섰다.“도련님, 제 지능을 모욕하는 건 참겠는데, 머리카락을 모욕하는 건 안 됩니다!”“그래요? 그럼 선생님 머리카락을 모욕하죠!”두 사람이 거의 싸울 뻔한 순간, 이하율 남매가 배를 움켜쥐며 말했다.“아빠, 우리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너무 배고파요...”이연석은 남매에게 화살을 돌리며 소리쳤다.“하루 종일 먹을 것만 찾고! 하준이처럼 간식 줄이고 책 좀 보란 말이야!”이하율 남매는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아빠, 우린 아직 글도 다 못 읽어요. 책 보는 것도 재미없어요. 우리에겐 간식이 제일 재미있어요.”옆에 있던 전문가는 그 말을 듣고 자신감이 생겼다.“보세요. 이 두 아이가 어디 130과 148의 IQ를 가진 것처럼 보이시나요?”이연석은 할 말을 잃었다. 화가 난 그는 두 아이를 번쩍 들어 올리며 외쳤다.“이 고집불통 대머리야! 이런 허접한 기관은 확 망해버려!”전문가는 속으로 생각했다.‘지금까지 수많은 IQ 테스트를 해봤지만, 이런 사람은 처음이야. 이럴 수가!’A시로 돌아가기 전, 이연석은 테스트 결과를 컴퓨터로 수정하고 새로 출력한 뒤 두 아이를 데리고 이승하를 찾아갔다.“형, 봐봐. 우리 애들도 IQ가 엄청 높아! 특히 내 아들, 148이야! 나중에 mensa에 들어갈 수도 있다고!”그 말을 듣던 이승하는 고개도 들지 않고 키보드를 두드리며 이하율에게 물었다.“오뚝아, 68 곱하기 42는 얼마야?”감자칩을 먹으며 손에 기름이 잔뜩 묻은 이하율은 손가락을 세며 계산하기 시작했다.3분 뒤, 그는 대답했다.“110!”순간 이연석은 참지 못하고 이하율을 향해 발길질을 하
흐트러진 커튼 너머로 달빛이 스며드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서유는 무의식적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해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크게 외쳤다.“여보, 성재 씨의 보디가드가 그러던데 그 사람이 망원경으로 우리 집을 자주 훔쳐본대요. 제발 여기선 그러지 마요.”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던 이승하는 짙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는 맞은편 별장을 한 번 흘겨보더니, 아무렇지 않은 척 리모컨을 집어 들고 불을 꺼버렸다.“걱정 마, 안 보여.”“하지만...”서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의자 팔걸이에 손을 짚은 이승하가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그리고 늑대처럼 그녀의 혀끝을 휘감아 그녀가 하려던 말을 그대로 삼켜버렸다.처음에는 저항하던 서유도 이승하가 한쪽 무릎을 꿇는 순간, 온몸이 떨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만 두 손톱으로 의자 등받이를 필사적으로 긁을 뿐이었다.예전에는 체력에만 의지하던 이승하가 오늘은 어쩐 일인지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가 꺼낸 물건들은 서유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제발 그런 거 쓰지 마요!”서유가 간절히 부탁했지만, 남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낮고 매혹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여보, 참지 말고 소리 내봐.”서유는 도저히 소리를 낼 수가 없어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런 그녀를 본 이승하는 도구와 체력을 총동원해 강도를 높였다.“난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만약 방음이 되지 않았다면, 그리고 커튼이 창문을 가리지 않았다면, 서유는 지금 부끄러움에 혀를 깨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더욱 끔찍한 것은 그녀가 꼼짝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저 이승하에게 온전히 ‘당하기’만 했다.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두 번, 세 번...기진맥진한 서유는 뒤돌아 닫혀 있는 방문을 바라보며 간절히 바랐다.‘제발, 하준이가 문을 두드리며 배가 아프다고, 병원에 같이 가달라고 했으면...’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이하준은 수많은 문제 속에 갇혀 있었다. 서재
이하준은 그 순간, 이승하에게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마치 성인처럼 빛나는 그 모습에 그는 아버지가 꽤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한순간에 완전히 압도당한 이하준은 고개를 푹 숙이고, 이승하의 품에서 낮게 말했다.“아버지가 알고 있는 걸 전부 가르쳐 주신다면, 그때는 진심으로 인정할게요.”작은 아이를 상대로 주도권을 쥔 이승하는 이하준이 자신의 능력을 배우고 나중에 자신을 압도하려는 속셈임을 눈치챘다.하지만 미안하지만 이미 그가 아들을 길들이기로 마음먹은 이상, 이하준이 다시는 반격할 수 없을 것이다.이승하는 이하준을 내려놓고 그의 눈앞에서 컴퓨터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이 프로그램에는 전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지능 문제가 모여 있어. 이 모든 문제를 풀어낸다면, 그때 가서 다른 걸 가르쳐 줄게.”그 말을 남기고 이승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를 나섰다. 이하준은 뒤따라가며 물었다.“근데 아버지는 문제 푸는 것 말고도 다른 걸 할 줄 아세요?”이승하는 걸음을 멈추고, 작은 고개를 들어 자신을 올려다보는 이하준을 내려다보며 말했다.“너도 곧 알게 될 거야.”그 당시 이하준은 아버지가 무엇을 더 할 줄 아는지 몰랐다.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이승하의 도박 실력, 사격과 검술, 컴퓨터 및 AI 개발, 그리고 탁월한 경영 능력을 직접 목격한 후에야 그는 아버지의 진짜 능력을 깨달았다.지금의 이하준은 오직 하나의 목표만 가지고 있었다. 바로 프로그램 속의 모든 난제를 풀어내고 아버지를 압도한 뒤, 주도권을 되찾는 것이다.그가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문제를 풀고 있는 동안, 이승하는 욕실 문 앞에 기대 서 있었다. 서유가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서유는 깜짝 놀라 물었다.“저녁 먹으러 안 가고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이승하는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아 몸을 들어 올리며 가슴에 밀착시켰다.“고픈 건... 배가 아니야.”머리카락이 축축한 서유는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그만해요. 하준이가
‘저 멍청이한테 사과하라니, 이건 내 지능에 대한 모욕이야.’하지만 영구적인 자유를 얻기 위해서라도, 이하준은 결국 입을 열었다.“미안.”오뚝이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손가락 사이로 살짝 눈을 뜨고 떠나가는 이하준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봤다.“형, 귀신 들린 거야?”이하준은 눈을 굴리며 대꾸도 하지 않고 거실로 돌아와서 이승하 앞에 섰다.“이미 사과했어요. 문제는요?”이승하는 우아하게 물 한 모금을 마시고는 일어섰다.“서재로 따라와.”이하준은 투덜대며 따라갔다. 아버지는 그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책상에 앉아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의자 가져와.”화를 꾹 참고 이하준은 하얀 소매를 걷어 올리고 의자 등을 붙잡고 있는 힘껏 끌었다. 그리고 힘겹게 의자를 책상 앞으로 옮기고 자리에 앉았다.그제야 이승하는 컴퓨터를 켜고 몇 가지 문제를 불러온 후, 화면을 이하준 쪽으로 돌렸다.“총 여섯 문제야. 수학, 컴퓨터, 천문학, 반중력, 철학, AI 각각 한 문제씩.”이하준은 이게 어린애한테 너무한 거 아니냐는 표정으로 말했다.“반중력이 뭔지도 모르는데...”이승하는 냉정하게 대꾸했다.“그렇게 잘난 척했으면서 반중력이 뭔지도 몰라?”궁지에 몰린 이하준은 이를 악물고는 입을 다물었다. 이승하는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한 시간 줄게. 못 풀면 깨끗이 인정해.”이하준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지만, 자존심 때문에 아버지와 한판 승부를 벌이기로 마음먹었다.아이는 손을 뻗어 컴퓨터를 받아 들고 작은 얼굴을 들고는 화면에 떠 있는 문제를 응시했다.이승하는 문제마다 프로그램을 설정해 두었다. 하나를 풀어야 다음 문제로 넘어갈 수 있었다. 첫 번째 문제부터 막힌 이하준은 점점 초조해졌다.책을 읽고 있던 이승하는 아이가 초조해하는 것을 눈치채고는 미소를 살짝 지었다.“못 풀겠으면 그냥 포기해.”이하준은 질 수 없다는 듯이, 이리저리 공식을 떠올리며 해결책을 찾기 시작했다. 역시 천재답게, 즉석에서 배운 것도 금세 활용했다.하지만 이건 세계
갓 거실에 들어선 이승하는 이하율의 울음소리를 듣고 넥타이 매듭을 풀던 손을 잠시 멈췄다. 차가운 시선이 곧장 주방 문가에서 구경을 하고 있던 작은 실루엣으로 향했다.“이하준.”이승하의 목소리가 들리자 이하준은 몸이 순간 굳었다. 눈에 띄던 웃음기를 싹 지우고는 재빨리 몸을 돌려, 이제 막 재킷을 벗어 집사에게 건네는 남자와 마주했다.“이리 와.”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묘하게 압도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평소 안하무인이고 건방진 이하준도 그 미묘한 압박감에 발걸음을 옮겨 얌전히 다가갔다.이승하는 넥타이를 풀어 집사에게 건넨 후, 짙은 속눈썹을 내리며 자신 앞에 무표정으로 서 있는 이하준을 바라보았다.“하율이에게 사과해.”스스로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한 이하준은 입꼬리를 살짝 비틀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이는 여전히 이승하에게 말 한마디 없이 꼿꼿이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 행동으로 자신의 반항심을 드러내고 있었다.“문지기가 되고 싶다면 계속 서 있어. 하지만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곧바로 하율이에게 사과해야 해.”이승하의 차가운 한마디는 이하준을 진퇴양난의 상황에 몰아넣었다. 짙은 눈썹을 잔뜩 찌푸린 채 이승하를 노려보았지만, 키 크고 외모가 빼어난 이 남자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신발을 갈아 신고는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그 모습에 이하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작은 주먹을 꽉 쥐고는 억울함에 이를 악물었다.한편, 울며 엄마를 찾고 있던 이하율은 이하준이 벌서고 있는 모습을 보자마자 눈물을 그쳤다. 소매로 얼굴에 잔뜩 묻은 치즈를 닦고는 이하준 앞으로 뛰어가 통통한 코를 손으로 눌러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메롱~!”이하준은 이런 이하율을 멍청이라고 하는 것조차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이하준은 어리석은 자와 논쟁할 필요 없다고 판단해 눈을 감고 이하율을 무시하기로 했다.정가혜가 있기에 이승하는 후원에 있는 서유를 찾지 않고 샤워를 마친 후, 서유가 보낸 IQ 테스트 결과를 확인했다. 한동안 꼼꼼히 살펴보다가 문
서유의 하소연을 듣고, 정가혜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눈썹을 찡그렸다.“아주버님은 꽤 똑똑해 보이던데. 머리도 좋을 테니 그분이 아이를 이끌면 되잖아.”그 말에 서유는 어쩐지 쑥스러워 고개를 숙였다.“그이야 회의 끝나면 돌아와서 신경 쓰겠다고는 했지만, 몇 년째 마음을 아이에게 쏟은 적이 한 번도 없어서... 아마 크게 기대하긴 어려울 것 같아.”정가혜는 서유의 셔츠 아래로 드러난 목과 어깨에 남은 짙은 흔적들을 보고 굳이 묻지 않아도 이승하의 관심이 어디에 쏠려 있는지 알 수 있었다.“참 대단하다. 하루하루 어떻게 그렇게 정력이 넘치지?”정가혜가 최근 이연석과 시간을 많이 보내면서 이런 농담을 서슴없이 하게 된 덕에, 서유는 더더욱 얼굴이 붉어졌다.“나만 붙잡고 있는 건 아니야. 회사 일도 어느 정도 신경을 쓰고 있어.”정가혜는 그녀를 힐끔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결정이 어려운 일이나 재무 회의 같은 걸 제외하고는 거의 집에만 있던데?”서유는 얼굴의 절반을 손으로 가리며 말했다.“아 가혜야, 넌 나를 도우러 온 거야? 아니면 날 놀리러 온 거야? 제발 다른 이야기 좀 하자.”정가혜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었다.“난 너를 도울 방법이 없어. 내 머리로는 오뚝이와 깡순이를 간신히 상대할 정도지, 네 천재 아들은 도저히 감당이 안 돼.”정가혜가 숙모로서 이하준의 신임을 얻은 건 그가 어릴 적 그녀의 모유를 먹은 적이 있어서다. 그렇지 않았다면 성격 까칠한 이하준이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것이다.“그래도 걱정하지 마. 이 대표가 있잖아. 하준이가 잘못된 길로 갈 리 없을 거야.”사실 이승하가 아이에게 무심했던 건, 머릿속에 심어진 칩 때문에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래서 온 신경을 서유에게 쏟아왔던 것이다. 하지만 서유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그이가 아이를 가르친다 해도 선생님 몇 명을 붙여서 공부만 시키고 끝나버려. 정작 아이와 소통은 전혀 하지 않아.”정가혜는 웃음을 터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