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가 귀국했다. 그의 베일에 싸인 애인으로서, 서유는 곧바로 8호 맨션으로 보내졌다.계약의 규정에 따라 그를 만나기 전엔 티 없이 깨끗하게 몸을 씻어야 했고 향수나 화장품 냄새를 절대 풍겨선 안 됐다.그의 취향에 완벽하게 맞추기 위해 그녀는 오랫동안 목욕을 하고 실크 잠옷으로 갈아입은 후, 2층 침실로 왔다.컴퓨터 앞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이승하는 그녀가 들어오는 기척에 그녀를 흘긋 바라봤다.“이리 와.”별다른 감정이 섞이지 않은, 담담하면서도 차가운 말투가 이어졌다. 그 목소리는 서유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평소에 무덤덤한 것 같으면서도 종잡기 어려운 성격을 가진 그가 혹시나 화가 나기라도 할까 봐 그녀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달려갔다.그의 앞에 제대로 서기도 전에 이승하가 그녀를 와락 안아버렸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그녀의 붉은 입술에 키스하는 이승하.항상 그런 식이었다. 아무런 설명도 없었고 부드러움도 없었다. 그녀를 만나면 그저 함께 자고 싶을 뿐이었다.이번에 외국으로 출장 가게 되면서 3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여자를 만지지 못했으니 오늘 밤은 쉽게 그녀를 놓아줄 리가 없어 보였다.그녀가 잠에 곯아떨어질 때가 되어서야 남자는 끝날 기미가 보였다.다시 잠에서 깨어난 서유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욕실에서 샤워기 소리가 들려와 그녀는 그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간유리 너머로 흐릿하게 귀의 기다란 그림자가 보였다. 매번 검사를 마치고 나면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린 적이 없었던 그였다. 그런데 이번엔 왜 떠나지 않은 걸까?서유는 가까스로 피곤한 몸을 이끌어 침대에서 일으켜 세우고 착한 고양이 마냥 남자가 나오기를 기다렸다.몇 분 뒤, 욕실에서 물소리가 멈추고 남자가 샤워 타워를 두른 채 걸어 나왔다. 머리끝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그의 넓은 어깨로부터 쇄골 언저리를 타고 흘러내리다가, 가슴골을 따라 부드럽고도 단단해 보이는 그의 복근 위로 미끄러졌다. 치명적일 만큼 유혹적이다. 그의 조각처럼 아름다운 얼
방을 떠나는 이승하 뒤로 그의 개인 비서 소수빈이 쟁반 위에 올린 약을 들고 나타났다. “서유 씨, 부탁드립니다.”공손한 태도로 약을 건네주며 그가 입을 열었다.피임약이었다.서유를 사랑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그녀가 자신의 아이를 가지길 허락하지 않는 이승하였다. 그래서 매번 일이 끝나면 소수빈을 시켜 약을 건네주었고 그가 보는 앞에서 먹게 했었다.하얀 알약을 바라보며 서유의 마음이 다시 아려왔다.심장이 허약해져서인지 아니면 이승하의 무정함에 마음이 아파서인지 숨쉬기가 가빠졌다.“서유 씨…”아무런 반응이 없는 그녀가 혹여나 약을 먹으려 하지 않을까 봐 소수빈이 다그치듯 그녀를 불렀다.그런 그를 흘긋 보던 서유는 조용히 약을 받아 입에 넣었다. 물도 마시지 않고 그대로 꿀꺽 삼켜버렸다.그제야 걱정스러운 표정을 살짝 풀며 소수빈은 가방에서 집문서와 수표들을 꺼내 테이블에 배열했다.“서유 씨, 대표님께서 드리는 보상입니다. 부동산과 고급 자동차 외, 현금 백억 원을 준비하셨습니다.”실로 놀라운 액수다.하지만 아쉽게도 그녀가 원하는 것이 돈이었던 적은 없었다.서유는 고개를 들어 소수빈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이런 거 필요 없어요.”약간 놀란 듯, 아니, 이해가 되지 않는 듯이 소수빈이 고개를 갸웃했다.“혹시 성에 차시지 않은 겁니까?”그 말에 가슴 한쪽이 저릿했다.‘소수빈마저 내가 돈을 위해서 승하 옆에 있는 거로 생각하니 이승하는 오죽할까. 이렇게 많은 이별 비용을 내는 건 앞으로 더는 돈 때문에 들러붙지 말라는 뜻이겠지?’“이건 승하 씨가 줬던 건데 다시 전해주실래요? 그리고 카드에 있는 돈은 건드린 적이 없다고 알려주세요. 지금 주신 돈과 부동산 모두, 전 받지 않을 거예요.”자리에서 일어나 가방 안에 있던 블랙 카드 한 장을 꺼내 건네며 서유가 말했다.‘5년 동안 대표님께서 주신 돈은 한 푼도 건드리지 않은 건가?’믿을 수 없다는 듯, 소수빈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그가 믿든 말든 서유는 블랙 카드를 집문서와 수표들
서유가 캐리어를 끌고 도착한 곳은 친구 정가혜가 사는 곳이었다.그녀는 가볍게 문을 두드리곤 문 옆에 우두커니 서서 기다렸다.둘은 같은 보육원 출신이었고 고아라는 슬픔을 공유한 자매 같은 사이었다.과거 이승하가 서유를 데려갈 때, 정가혜가 그녀에게 말했었다.“서유야, 앞으로 갈 데가 없어지면 집으로 돌아오는 걸 잊지 마.”바로 그 말 한마디 때문에 서유는 이승하가 준 집을 돌려줄 용기가 생겼다.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고 서유를 본 정가혜가 활짝 웃으며 따듯하게 그녀를 맞이했다.“우와, 오랜만이네!”하지만 서유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난감한 듯한 미소를 보였다.“가혜야, 나 너한테 얹혀살려고 왔어.”그제야 가혜는 서유가 캐리어를 들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고 미소가 차츰 굳어졌다.“무슨 일이야?”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서유가 멋쩍게 웃었다.“그 사람이랑 헤어졌어.”그 미소가 억지로 쥐어짠 미소임이 가혜는 너무 눈에 선했다.서유의 작은 얼굴은 찬찬히 뜯어보면 야위어서 눈이 움푹 꺼져 보였으며 안색이 창백했다.차가운 바람 속에서 서유의 몸은 얄팍한 종잇장처럼 불안해 보였다.가혜는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괜찮아, 내가 있잖아.”순간 서유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녀도 두 손으로 가혜를 끌어안고 가볍게 등을 두드렸다.“나도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그 말이 그저 위로일 뿐이라는 걸 가혜가 모를 수 없었다. 서유에게 있어 이승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동안 똑똑히 보아왔으니까.5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승하에게 돌려줄 2억이라는 돈을 모으기 위해 서유는 몸이 부서지라 일했다.멍청하게도 그리하면 이승하의 눈에 조금이라도 더 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결국엔 무정하게 버림받았다.가혜의 기억이 비바람이 휘몰아치던 5년 전 그날 밤으로 돌아갔다…만약 그때, 서유가 송사월을 위해 몸을 팔지만 않았어도 이승하를 만날 수 없었을 테고 그렇게 되었더라면 지금의 서유는 훨씬 행복했을 것이다.‘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지금 뭐라고 그랬어요?”엄청난 비밀을 들은 것처럼 원영이 두 팔로 최민지를 흔들며 흥분해서 물었다.“JS 그룹의 그분, 여자한테 관심 없다고 하던데, 아니에요? 어떻게 여신이 있을 수가 있죠? 게다가 그 여신이 우리 회사에 곧 임명될 CEO란 말이에요?“최민지가 씩 웃으며 원영의 손을 툭툭 두드렸다.“저런, 정보가 그렇게 부족해서 어떻게 직장 생활을 하시겠어요? 재벌가에서 돌아가는 일에 무지하면 대표님 사무실에서 어떻게 일하시려고 그래요.”그러자 최민지가 익살스럽게 웃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민지 언니가 한 수 가르쳐 주세요~”그제야 최민지가 목소리를 낮게 내리깔고 말했다.“이 대표님이랑 우리 이사장님 따님께서는 어렸을 때부터 소꿉친구 사이였대요. 찌라시긴 하지만, 5년 전에 이 대표님께서 청혼하셨는데 아씨가 학업 때문에 거절했대요. 그 일로 둘 사이에 문제가 약간 있었던 거 같아요. 그래서 5년 동안 연락을 끊었대요. 하지만 아씨가 귀국하자마자 이 대표님께서 직접 공항으로 마중 나갔어요. 그럼 이 대표님께서 아씨를 얼마나 애틋하게 생각하는지 이걸로 설명 끝 아닌가요?”원영은 과장된 표정으로 입을 틀어막고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세상에나! 완전 로맨스 드라마 같아요!”하지만 듣고 있던 서유는 가슴이 턱 막히며 안색이 점점 더 창백해졌다.이승하가 애인 계약을 앞당겨 끝냈던 이유는 그의 여신님께서 돌아왔기 때문이었다.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으면서 왜 5년 전에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그녀를 집으로 데려갔던 것일까?심지어 하룻밤 자고 나서는 애인 계약을 맺자고 강압적으로 나오기까지 했었다.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잘 믿기지 않았다. 최민지에게 어디에서 들은 소문이냐고 물어보려던 찰나, 대표님 전속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열렸다.이사장의 비서 허민과 몇 명의 고위층들이 먼저 내렸고 깍듯한 태도로 허리를 숙여 엘리베이터 안을 향해 말했다.“이 대표님, 연 대표님, 대표님 사무 구역에 도착했습니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말이 끝
간단한 소개와 인사말을 마친 연지유가 이승하의 팔짱을 끼고 허민과 함께 대표님 사무실로 걸어갔다.원영은 목을 길게 빼고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부러워 죽겠다는 듯이 말했다.“부임한 첫날부터 이 대표님께서 직접 데려다주시는 거 봐요. 설마 이게 그 말로만 듣던 대표님의 사랑스러운 여자친구 뭐 그런 건가요?”최민지가 그녀의 어깨에 팔을 올리며 혀를 끌끌 찼다.“이 속에 어떤 의미가 들어 있는지 모르시나 봐요? 귀국하자마자 대표님 자리부터 꿰찼으니 이온 인터내셔널의 주주들이 다들 옳다구나 하고 가만히 있겠어요? 선임 된 첫날부터 이 대표님께서 직접 데려다주시는 건 주주들에게 연 대표님 뒤엔 JS 그룹이 받쳐주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죠!”부러움이 한도치를 넘은 원영이 턱을 받치고 중얼거렸다.“이렇게나 빨리 여신님을 위해 앞날 걱정까지 다 해주시다니. 정말 로맨티시스트가 따로 없네요.”최민지도 부러움에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이 사장님 딸만 아니었다면 서울에서 권력을 주름잡는 남자의 눈에 들기나 했겠어요?”하지만 원영은 동의하지 않는 듯, 고개를 저었다.“연 대표님은 이미 아주 훌륭하세요. 학력도 높지 얼굴도 예쁘지… 그러고 보니까 얼굴이 약간…”원영이 서유를 바라봤다.“서유 씨랑 닮았는데요…?”최민지가 바싹 다가와 서유를 유심히 보더니 말했다.“어머 웬일이래. 정말 닮은 거 같은데요? 하지만 저는 서유 씨가 더 예쁘다고 생각해요.”“장난 그만 쳐요.”창백한 얼굴로 한마디 하고 나서 서유는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곧 쓰러질 듯이 연약해 보이는 뒷모습을 보며 걱정스러운 어조로 원영이 물었다.“서유 씨 무슨 일 있는 걸까요?”최민지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아마도 연 대표님이랑 비슷하게 생겼지만 대표님의 운명을 가지지 못해서 질투 났나 봐요.”원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항상 앞과 뒤에서 하는 말이 달랐던 최민지였으니 더는 얘기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화장실에서 서유는 빠르게 심장의 통증을 억제하는 약을 꺼내 물도 없이 삼켜버렸
어떻게 심장이 터져나갈 듯이 아플 수가 있을까?가까스로 빠르게 요동치는 심장을 손으로 꾹 누르며 서유는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한시라도 빨리 떠나야 한다. 얼마 남지 않은 삶을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보는 것에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자신이 견디지 못할까 봐, 참지 못하고 이승하에게 달려가 왜 자신을 대체품으로 사용했는지 따져 물을까 두려웠다.사직서를 작성하고 나서 그녀는 대표님 사무실의 책임자인 허민에게 가서 심사를 부탁했다.애초에 서유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허민은 몇 마디 부질없는 말을 내뱉곤 곧장 허락했다.퇴사 절차는 한 달이 걸렸다. 즉시 떠날 수 없게 되자 서유는 15일의 연차를 사용했다.그녀가 이온에서 일한 지 5년째였고 그간 연차를 모아두기만 했던 덕분에 마침 15일이 남아있었다. 퇴사하기 전에 사용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허민은 이토록 다급해 보이는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눈을 흘겼다.“물론 연차를 쓸 수는 있어요. 하지만 휴가가 끝나면 바로 돌아와 인수인계 잘하세요.”“네.”서유는 짤막한 대답을 남기고 가방을 챙겨 이온 인터내셔널을 빠져나왔다.다급한 걸음으로 회사를 빠져나올 때, 맞은 편에서 태안 그룹의 대표 임태진을 마주치게 되었다.업계에서 소문이 난 변태였는데 여자와 잠자리를 가지는 방식이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잔인하다고 했다.그가 웃으며 자신을 향해 걸어오자 서유는 본능적으로 두려움에 뒤돌아서서 도망가려고 했다.하지만 임태진이 잽싸게 달려와 그녀의 팔을 낚아채며 품에 와락 안더니 물었다.“어디가?”그는 일부러 고개를 숙여 서유의 귓가에 가볍게 숨을 불어넣었고 서유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안간힘을 써서 그에게서 벗어나려 했으나 그는 허리를 꽉 누르며 그녀를 제압했다.“몸에서 좋은 향기가 나네…”서유는 그의 손을 밀어내며 차갑게 말했다.“이러지 마세요.”“내가 뭘 하고 있는데?”임태진은 그녀의 귓불을 깨물며 껄렁하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매력적이었으나 내뱉은 말은 혐오스러웠다.이
이승하의 뒷모습이 점차 멀어질 때야 이씨 가문의 둘째 도련님이 지나갔다는 것을 알아챈 임태진은 얼른 서유를 놓아주고 그에게 인사를 하러 달려갔다.하지만 이승하는 곧바로 차에 올라타 문을 거칠게 닫아버렸다. 밖에 대기하고 있던 열 몇 대의 호화스러운 차들이 그의 출발과 함께 떠났다. 허탕을 쳤으니 다시 서유나 찾으러 가야겠다고 생각한 임태진이 뒤돌아서 보니 그녀는 이미 고객용 엘리베이터 방향으로 도망가고 없었다.그는 조금 전 서유의 볼에 키스했던 입술을 어루만지며 사냥감을 노리는 포식자처럼 흥분으로 눈을 번뜩였다.“임구, 서유의 집 주소를 알아 와.”그의 뒤를 따라오던 임구가 바로 ‘네.’하고 대답했다.집에 돌아온 서유는 손에 든 가방을 내려놓고 약간 넋이 나간 듯한 얼굴로 소파에 앉았다.핸드폰 벨 소리가 울리자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보니 그곳에 찍힌 번호가 그녀를 인상 쓰게 만들었다.‘소수빈이 왜 내게 전화를 걸지?’잠시 의아했지만 이내 잠금화면을 풀고 전화를 받았다.“수빈 씨, 무슨 일이죠?‘격식을 차린 소수빈의 목소리가 안에서 흘러나왔다.“서유 씨, 조금 전 아파트를 청소할 때 남겨두신 물건을 발견했어요. 시간이 날 때 와서 가져가실래요?”서유는 이승하가 그녀에게 뭔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남긴 물건 때문이었다니. 심장이 다시 무겁게 가라앉았다.“그냥 버려주세요.”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그리고 깔끔하게 소수빈과 이승하의 연락처를 모조리 삭제해버렸다.그녀는 어쩌면 이승하가 자신에게 먼저 연락할 거라는 망상을 어제까지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연락처를 아까워서 지우지도 못했다.하지만 이제 진실을 알게 되었으니 완전히 마음이 죽어버린 것 같았다.그녀는 핸드폰을 끄고 소파에 새우처럼 웅크려 누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얼마나 잤을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깨어나게 되었다.요즘 가혜는 늦게까지 야근을 하는 일이 잦아 아예 열쇠를 그녀에게 준
서유가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임태진은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그가 그녀의 잠옷을 단숨에 벗겨버리고 더럽고 차가운 손으로 그녀의 등을 어루만질 때, 서유는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임태진!”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마구 주무르던 임태진의 손이 멈칫했다.죽여도 시원치 않을 듯한 눈빛으로 서유가 그를 노려봤다.“임태진, 오늘 함부로 날 대하면 내일 법원에 가서 널 고소할 거야.”마치 세상 재밌는 농담을 듣기라도 한 듯, 피식 웃으며 임태진이 답했다.“경찰도 무섭지 않은 내가 법원에 고소한다고 두려워할 것 같아?”서유는 주먹을 꽉 쥐고 힘주어 말했다.“당신 집안에 권력이 높다는 거 나도 알아. 하지만 그럼 뭐?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어. 권력으로 더러운 짓을 덮으려 하면 내가 언론에 실명으로 널 고소할 거야.”임태진은 아무렇지 않은 듯 눈썹을 살짝 추켜세웠다.“뭐, 그래. 언론에 나 폭로해봐. 실검에 안 오른 지 너무 오래됐나.”그의 말에서 가소롭다는 뜻이 뚜렷하게 전해지자 서유는 절망과 무력감에 휩싸였다. 왜 하필 일반인이 아닌, 재벌가 권력이 높은 집안의 변태 아들에게 찍힌 걸까? 그는 손쉽게 뉴스를 잠재울 수 있었고 그녀가 강하게 나온다 한들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다.서유는 점차 이성을 되찾으려 애썼다. 임태진 같은 사람을 마주할 때 강하게 나오는 건 소용이 없다. 그를 힘으로 이길 수도, 백으로 이길 수도 없었다. 자신을 구하려면 가식적으로 그에게 순종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그녀는 결심한 듯, 눈을 꾹 감았다. 그리고 이내 다시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임 대표님, 일부러 고소하려고 하는 것도, 언론 얘기로 위협하려는 것도 아니에요. 도저히 서로 사랑하지 않는 사이에서 잠자리를 가질 수 없었을 뿐이에요.”그녀의 말에 임태진의 표정이 약간 누그러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눈앞의 먹잇감을 놓아줄 리는 없었다. 그는 머리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깊이 빨아들이더니 말했다.“그렇지만 난 꼭 너랑 자고 싶은 걸 어떡해?”너무 역겨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