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성아는 결국 정신을 잃고 쓰러졌고 서유는 바로 의사를 불러 응급처치를 했다.잠시 후, 육우성은 육성아의 상태가 더는 호전되지 않자 정신병원으로 보낼 생각을 했다. 동의할 수 없었던 육성재는 육우성과 대판 싸웠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육성아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내 아이를 죽이고 이젠 나까지 죽일 생각이에요?”육우성은 아니라고 해명했고 그녀가 계속 이렇게 소란을 피우면 그마저도 미쳐버릴 것 같다며 좀 봐달라고 애원했다.“알았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아빠 얼굴에 먹칠하는 일 더는 없어요.”정곡을 찌른 그녀의 말에 육우성은 화를 벌컥 내며 마음대로 하라는 말만 남긴 채 자리를 떴다. 그가 떠난 후 육성아는 붉게 달아오른 눈을 들어 지칠 대로 지쳐있는 육성재를 바라보았다.“오빠, 치앙라이 쪽에 절이 있거든. 예전에 택이 씨랑 여행 가려고 했었는데 못 갔어. 나 거기 가서 지내고 싶어.”1년 동안 부처님께서 예배를 드리라는 택이의 부탁 때문이었다. 1년이 지나서도 그녀가 아직 자신을 잊지 못했다면 어떤 방식으로도 그녀의 곁에 돌아오겠다고 했으니 그녀는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절망적인 그녀의 눈을 한참 동안 쳐다보던 육성재는 마침내 결심을 굳혔다.“나랑 같이 가.”거절하려 하였지만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성아야. 이 세상에 너보다 더 중요한 사람은 없어.”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나왔다.“오빠, 오빠는 내가 밉지도 않아?”그는 고개를 흔들며 손을 뻗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넌 이미 사랑하는 사람도 잃고 아이도 잃었어. 나라도 네 곁에 있어야지. 어떻게 네가 나까지 잃게 만들어?”죽음만이 누군가를 잃는 것은 아니었다. 그 사람에 대한 무관심도 버림과 마찬가지니까. 친아버지인 육우성은 가장 먼저 그녀를 포기한 사람이었다.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육성재의 품에 안겼다. 어린 소녀처럼 오빠의 허리를 끌어안고 서글프게 울었다. 그는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옆에 서서 말없이 울고 있는 서유를 쳐다보았다.내가 사랑하는 여자, 당신
서유는 공항을 나와 결혼 전 머물렀던 별장으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았다. 앞으로 이승하와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고민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방법은 없었다. 대신 소수빈에게 메시지를 보내 이승하의 행방을 찾았는지 물었고, 소수빈은 아직 찾지 못했다고 답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승하가 위험에 빠질까 걱정스러웠다. 특히 육성아 사건을 겪은 후라 그녀의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그러나 서유는 그 상황 속에서도 육성아보다 조금 더 침착을 유지할 수 있었다. 많은 일을 겪으면서 예전보다 많이 강해진 덕분이었다. 서유가 책상에 앉아 멍하니 있을 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상씨 가문의 삼 형제가 그녀에게 결정을 내렸는지 묻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서유는 여전히 거절했지만 삼 형제는 아무 말 없이 그녀에게 충분한 휴식을 취하라고 했다. 그런데 다음 날 상씨 가문에서는 온갖 명품과 보양식들을 보내왔고, 상씨 장남의 아내가 직접 찾아와 그녀를 위해 임산부식을 만들어주기까지 했다. 심지어 그들 부부의 아이를 데려와 그녀의 외로움을 달래주기도 했다. 그들의 열성적인 배려에 서유는 차마 쉽게 거절할 수 없었다. 그녀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을 때 상씨 집안의 어르신이 직접 찾아왔다. 다른 사람들처럼 선물을 가져오진 않았지만 상씨 가문의 주식 일부를 가지고 찾아왔다. 그와 처음 만났을 때와 다름없이 백발에 하얀 정장을 입은 그는 어떻게 봐도 70대처럼 보이지 않는 활기찬 모습이었다. 서유는 그의 당당하고 강력한 기운에 압도되면서도 존경을 표하며 그를 맞이했고, 차를 내렸다. “사실 난 차를 좋아하지 않아.” 그는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서유는 잠시 멈칫하며 맑은 눈으로 그를 흘깃 쳐다보았다. “우리 집엔 차밖에 없어요. 마시고 싶으면 드시고, 싫으면 그냥 목마른 채 계세요.” 그녀의 쏘아붙이는 말에 상철수는 더 이상 까다롭게 구는 대신 조용히 차를 한 모금 마시며 그녀의 집을 둘러보았다. “집안 분위기가 괜찮군. 그래도 네가 직접
그녀가 죽기 전 남긴 영상 속에서 이렇게 말했다.“이제부터 난 당신을 잊을 거예요, 영원히.”그 순간을 떠올리자 상철수의 눈가가 서서히 촉촉해졌다. “너희 할머니는 항상 날 기다려주지 않으려 했지. 만약 나를 기다려주었다면, 너희 어머니는 지금보다 훨씬 행복했을 거야...” 정여희는 딸을 가장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딸을 멀리 보낸 것도 그녀를 보호하기 위함이었지만, 상철수를 향한 복수의 의미도 있었을 것이다. 상철수는 생각 끝에, 그게 그녀가 영상을 통해 자신에게 오직 두 명의 아이만 낳았다고 알린 이유임을 깨달았다. 정여희는 평생 그와 싸우며 살아온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는 늘 그녀의 강한 저항심을 느껴왔다. “정여희 씨는 당신이 다른 여자를 아내로 맞이한 것만으로 당신에게 분노하여 아이를 보낸 게 아닐 거예요. 다른 이유도 있었겠죠?” “그래.” 서유는 그가 부정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상철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여희와 여희 첫사랑 사이에 끼어들었기 때문이지. 여희는 그 일로 날 원망하고 있어.” 그는 더 이상 자세히 말하지 않았으나 서유는 그 말속에서 중요한 단서를 잡았다. “그분의 첫사랑이 누구였나요?” 상철수의 날카로운 눈빛이 어두워졌다. “재수 없는 사람이었지.” 서유가 더 묻기 전에 상철수는 대화를 다른 방향으로 돌리라고 했다. 그녀는 그의 굳어진 표정을 잠시 바라보다 다시 질문을 던졌다. “어르신께서 끼어들었으니, 정여희 씨는 당신을 사랑하기보다는 미워했을 확률이 더 높지 않아요?” 상철수는 그녀가 직설적으로 묻는 것에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볼 수도 있어.” “그렇다면 왜 어르신의 아이를 낳았어요?” 상철수는 자세를 고쳐 앉아 서유의 의문 가득한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사랑에 대한 감정은 시기의 문제일 수도 있어. 아마 너도 공감할 수 있을 거야.” 그의 말뜻을 알아듣자, 서유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렇게 하자. 일단 나랑 함께 가서 가족들을 만나보고, 이후에 나랑 함께 생활할지는 천천히 결정하도록 하자.” 상철수는 서유의 걱정을 읽은 듯, 뒤로 물러나 그녀가 상씨 집안의 분위기를 먼저 느끼도록 권유했다. “그리고 네 언니의 아이도 함께 데려와. 자신의 어머니가 상씨 집안의 피를 이었음을 알려줄 수 있게 말이다.” 서유는 잠시 망설인 후, 상철수의 손을 밀어내고 단정히 앉아 말했다. “제 언니의 아이는 지씨 집안과 심씨 집안의 핏줄이에요. 상씨 집안과는 두 세대나 떨어져 있어서, 굳이 지금 확인할 필요가 없어요. 그리고 저는...” 그녀는 잠시 멈추고 미간을 찌푸렸으나 이내 얼굴을 부드럽게 펴고 말했다. “가족들을 만나보는 건 괜찮지만 저도 제 가정이 있으니 함께 살지는 않을 거예요.” 현재 이승하와 불화를 겪고 있지만, 그녀는 그와 관계없을 때도 그녀 나름의 가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자신만의 생활이 있고 앞으로도 자신만의 아이들과 연이와 함께할 것이기에 굳이 상씨 집안으로 완전히 돌아갈 필요는 없었다. 서유의 뜻을 이해한 상철수는 더 이상 그녀를 강요하지 않았다. 서유가 상씨 집안의 핏줄임을 인정했으니, 그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기뻤다. “그럼 내일, 연훈이를 보내 널 데리러 오게 할 테니 나랑 함께 집으로 가자.” 서유는 더 말을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상철수는 알아서 자리에서 일어나며 떠나기 전에 서유에게 푹 쉬라는 당부를 남겼다. 서유는 탁자 위의 서류봉투를 들고 상철수에게 돌려주려 했지만, 그는 이건 아들과 손자가 준비한 것이라며, 그녀와 연이에게 마땅히 돌아갈 몫이라 주장했다. 서류 안에는 그녀와 연이의 이름이 명시되어 있었다. 상철수는 그녀에게 최선을 다해 보상하고자 했다. 떠나가는 그의 등이 처음보다 훨씬 더 굽어 있는 걸 바라보며, 서유는 그가 한 말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그가 한 말이 떠올랐다. “만약 그때 여희가 나를 속이지 않았다면 영주가 어디에 있든 반
저녁 만찬이 시작되기 전에, 상철수는 서유를 데리고 그가 머무는 집으로 갔다. 이곳은 예전에 서유가 김초희로 신분을 위장해 왔던 장소로, 정여희가 한때 살았던 집이었다. 상씨 집안은 캐나다에 집이 많았지만, 상철수는 이곳에서 사는 것을 더 좋아했다. 아들들과 손자들에게 만찬 준비를 맡긴 뒤, 상철수는 서유를 정원을 가로질러 그녀가 설계했던 작은 정원으로 데려갔다. “여긴‘배나무 정원’이라고 해. 앞으로 네 집이야. 돌아오고 싶을 때 언제든 이곳에 머물러도 된다.”그는 이렇게 말했다. 서유는 대꾸하지 않고 상철수를 따라가며 가끔씩 주위를 둘러보았다. 작은 정원 안으로 들어서자 상철수는 돌아서서 그녀에게 물었다. “마음에 드니?” 서유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냥 잠깐 머무는 것뿐이라 마음에 들고 말고 할 건 없어요.” 그녀의 말뜻을 알아챈 듯, 상철수는 개의치 않고 말했다. “얼마나 머물든 네가 돌아와 준 것만으로도 난 충분하다.” 말을 마친 상철수는 옆에 대기하던 집사를 향해 손짓했다. “둘째 아가씨가 돌아왔으니 저녁 식사를 준비해.” 그는 장녀의 자리를 비워두고 김초희에게 돌려주며, 그녀의 신분을 보완해 주고자 했다. 집사와 하인들이 자리를 떠나자 넓은 거실에는 상철수와 침묵 속의 서유만 남았다. 서유가 여전히 어색해하는 기색을 알아챈 상철수는 그녀가 불편해할까 봐 하인을 시켜 그녀를 방으로 안내하도록 했다. 그녀가 임신 중인 걸 알고, 주 침실은 남향의 1층에 준비되었다. 넓은 공간과 아늑한 인테리어, 유럽풍의 분홍색 계열로 꾸며진 방은 마치 딸을 위한 공간 같았다. 상철수는 한때 정여희가 딸을 무척이나 좋아했다며, 김초희에게 이 작은 정원을 설계하게 한 것도 딸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아직 김영주가 자신의 딸이라는 걸 몰랐던 때였지만, 정여희가 생전에 좋아하던 취향을 따라 지은 집이었다.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서유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상철수의 깊은 사랑에 감동하면서
서유는 두 팔을 가슴에 모으고 무릎 위에 올린 채 창밖의 야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가로등 아래로 그림자처럼 흔들리며 비치는 실루엣 하나가 보였다. 그녀는 상철수가 이미 떠났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는 여전히 정원에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모습 너머로 상철수가 자신을 통해 정여희를 그리워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서유는 그를 한동안 바라보다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신발을 갈아 신고 정원으로 내려갔다. 상철수는 그녀가 나올 줄 몰랐는지, 살짝 놀라며 감동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서유는 그의 앞까지 다가가 아무 말 없이 몇 발자국 더 걸었다. 마치 산책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인 듯 보였다. 상철수는 눈치가 빠르게도 그녀의 곁에 다가서며 이렇게 말했다.“네 외할머니는 겉으로는 강해 보였지만 속은 부드러웠지. 너랑 비슷해.” 서유는 그저 자신이 느끼는 쓸쓸함을 털어내고 싶어서 나온 건데, 괜히 상철수에게 덤벼보듯 말했다. “전 정여희가 아니에요.” 상철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가 여희가 아니라는 걸 잘 안다. 그래도 혈연이라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지. 넌 여희와 닮았어.” 서유는 옆에 나란히 걷는 상철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정여희 씨를 어떻게 사랑하게 됐는지, 그리고 왜 그분을 강요했는지 이야기해 줄 수 있어요?”그녀가 뭔가 캐내려 한다는 걸 알면서도 상철수는 숨기지 않고 말문을 열었다. “그때 난 열여섯이었어. 생일 파티를 열었는데 여희가 친구들과 함께 와서 피아노를 쳤지.”말하면서 상철수는 드물게 진심 어린 미소를 지었다. “사실 네 외할머니 피아노 실력은... 정말 형편없었어. 내가 솔직하게 말하자 여희는 화를 냈지.”상철수는 서유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그 시절 난 이미 상씨 집안의 후계자로 정해져서 모두가 나를 칭찬하고 띄워줬는데, 오직 여희만이 나한테 그렇게 말했지.”처음에는 그저 그녀가 재밌다고 생각했을 뿐 사랑에 빠진 건 아니었지만, 수영장에 빠졌을 때 천사처럼 그를 구하러
서유가 이승하의 아내라는 사실은 상씨 집안 사람들이 당연히 알아낼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들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녀 앞에서 이승하나 뱃속의 아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서유는 그들이 자신의 남편이 누구인지는 신경 쓰지 않고 오직 그녀만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 줄 알았는데, 이제 상철수가 직접 묻자 그녀도 도망가지 않았다. 잠시 멈추어 선 후, 서유는 돌아서서 상철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중요해요.” 중요하다. 마치 하늘의 별처럼. 지금 이승하는 구름에 가려져 보이지 않지만, 언젠가 이 구름이 걷히면 다시 그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상철수는 작은 정원을 사이에 두고 서유와 마주 보았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상철수는 한참 후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사해 보니 이승하는 너한테 그리 잘해주지 않았더군. 한때 다른 여자 때문에 너를 거의 죽일 뻔한 적도 있었고. 그런 남자가 정말 중요해?” “그건 과거에 있었던 오해예요. 지금 우리는 결혼했고, 아이도 생겼으니 이제는 과거를 붙들고 있을 필요가 없어요.” 게다가 그들 둘의 일은 외부에서 평가할 문제가 아니었다. 중간에 나타난 외할아버지라 해도 그건 변하지 않았다. 서유는 배꽃나무 아래 서서 노란 가로등 불빛에 비친 상철수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 눈빛엔 흔들림 없는 결의가 서려 있었다. “네가 이승하를 많이 사랑한다는 건 알겠다. 그런데 이승하도 너에게 그러한가?”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쉽게 그녀를 버릴 수 있는 남자가 정말 사랑할 가치가 있는 사람일까? 서유는 잠시 고민한 후, 가로등 불빛을 타고 상철수의 세월에 지친 듯한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어르신께서는 자신의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이고 다른 사람의 사랑은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상철수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자갈길을 따라 몇 그루의 작은 나무를 지나 서유 앞에 섰다. “어떤 사람들은 내 사랑이 비뚤어졌
손안에 놓인 간식을 보며 서유는 앞에서 운전 중인 큰외삼촌 상지태과 조수석에 앉은 작은외삼촌 상지훈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 모두 백미러로 그녀를 살피고 있었다. “마음에 안 드니?” 서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전에는 좋아하지 않던 간식이었지만, 임신을 하고 난 후부터는 이런 신맛 나는 음식이 자꾸 당겼다. “감사해요.” 감사를 전한 후, 그녀는 봉지를 열어 매실을 꺼내 입에 넣었다. 새콤한 맛이 차 안의 답답함을 금세 날려주었다. 상지훈은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간식을 먹는 모습을 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만약 그의 여동생이 아직 살아 있었다면, 지금 저런 모습일까 생각해본다. “네가 있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네 외할아버지가 나서기 전에 내가 먼저 널 데려왔을 거야.” 서유는 손에 든 봉지를 꼭 쥐고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말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상지훈은 그녀가 수줍음을 많이 타는 성격임을 아는 듯, 한마디만 건넨 후 앞을 바라보며 더 이상 방해하지 않았다. 옆에 앉아 있던 상철수는 두 아들을 한번 살피고는 서유가 들고 있는 간식을 보았다. 잠시 고민하던 상철수는 옆 상자에서 과자 한 통을 꺼내 두 아들처럼 서유에게 건넸다. “길이 좀 멀어, 배고프면 이거라도 좀 먹어봐.” 서유는 그 과자를 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너무 퍽퍽해서 먹기 힘들 것 같아요.” “퍽... 퍽퍽해서?” 상철수는 어색한 표정으로 과자를 거둬들인 뒤, 대신 물병을 건넸다. “그럼 물이라도 좀 마셔.” 서유는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저 목마르지 않아요.” 차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이 모습을 보자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평소에 늘 엄격한 태도였던 상철수가 이렇게 난처해하는 모습은 드문 일이었다. “형, 그 말 뭐더라?” 형제는 눈빛만 교환해도 서로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호랑이 그리려다 개 됐다...” 뒤의 세 글자를 상지태가 작게 속삭였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