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살짝 얼굴을 스치는 걸 느끼던 서유는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국내에도 경치 좋은 곳이 많아요. 바람도, 나무도, 길도 다 비슷하죠.” 상준석이 부드럽게 맞받았다. “사실 나도 캐나다에 상주하지 않아. 가끔씩 들르기만 할 뿐이야. 네가 있다면 자주 와서 보러 올 텐데.” 서유는 그 말에 덧붙였다. “보고 싶으면 그냥 A시로 돌아와요.” 상준석은 미소 지으며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좋아, 이건 네가 스스로 허락한 거야.” 순간 함정에 빠진 듯한 서유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그런데 상연훈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우리 둘째 형은 평소에 바빠서 너한테 자주 방해될 일은 없을 거야. 걱정 마.” 느긋한 표정으로 말하는 상연훈의 모습에 서유는 못 참겠다는 듯 말했다. “상연훈 씨도 절대로 나 찾으러 오지 마요.” 상연훈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평온하게 말했다. “걱정 마. 볼 일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널 보러 갈 거니까.” “...”상씨 집안의 삼 형제는 서유를 데리고 상태준의 아내가 운영하는 회사로 향했다. 상연훈은 상태준의 아내가 평범한 사람으로, 대단한 집안 출신이 아니라고 설명했지만 서유는 직접 만나본 후 그가 엄청난 오해를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상태준의 아내는 DK라는 명품 브랜드를 창립한 장본인이자 명망 높은 인사였다. 상연훈 같은 재벌가 출신들은 귀족 가문과 부호의 개념을 다르게 여기기에 서유를 이렇게 오해하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주하늘이 아이를 데리고 나타났을 때 서유는 그저 전업주부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 주하늘이 깔끔한 단발머리에 정장 차림, 하이힐을 신고 바쁜 걸음으로 사무실을 누비는 모습을 보고 서유는 한동안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주하늘은 업무를 마친 뒤 서유와 상씨 집안 삼 형제를 보고 미소 지으며 손을 들어 인사했고, 직원이 곧 그들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전문 분야에 있어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주하늘은 이들이 스타일링을 하러 왔다는 사실을 듣고는 서유의
상연훈은 잠시 서유를 바라보다가 화제를 돌렸다. “너 얘기나 해봐. 자꾸 나만 말하니까 지루하잖아.” 서유는 똑같이 받아쳤다. “나도 딱히 할 얘긴 없어서 지루해요.” 상연훈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었다. “뭐야, 나를 도둑 보듯 경계하는구나.” 서유도 미소 지었다. “그쪽 집에서도 날 도둑 보듯 경계하는 거랑 다를 바 없잖아요.” 서유는 상설수에게 어떻게 정여희의 마음를 가로챘는지 물어봐도 말하지 않았고, 상연훈에게 그 노인 밑에서 뭘 하고 있는지 물어봐도 대답이 없었다. 그런데 굳이 자신의 일을 말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서유는 가슴까지 내려오는 큰 웨이브 머리를 쓸어 넘기며 옷 갈아입으러 피팅 룸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꼿꼿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상연훈은 팔짱을 낀 채 의자에 기대어 얕은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는 이승하가 그녀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싶었지만,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임신한 몸으로 이승하를 찾기 위해 위험을 무릅쓴 걸 보면, 이승하는 그녀에게 자기 목숨보다 소중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중요한 사람이 이제 할아버지 손에 끌려가 고통스러운 곳에 갇혀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서유는 분명 몹시 마음 아플 것이다. 그 생각에 상연훈은 약간 찡그렸다. 그가 깊이 생각에 잠겨있을 때, 상씨 집안에서 입양된 아이가 새로 나온 가방 몇 개를 들고 스타일링 룸 문을 열었다. 그녀는 상연훈을 보자 잠시 멈칫하더니, 금세 돌아서려 했지만 상연훈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그녀 옆을 지나가며 냉소적으로 말했다. “왜 피하는 거야.” 그녀는 문손잡이를 잡은 채 말없이 그가 지나가길 기다렸다가 몰래 눈길을 들어 그의 뒷모습을 살짝 훔쳐보았다. 상연훈은 한때 그녀에게 고백을 했었다. 정말 좋아하니, 네가 원하면 집안에 얘기해 널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하지만 그녀는 거절했다. 상연훈의 어머니는 입양된 자식도 상씨 집안의 자식이자 상연훈의 여동생이니, 도의상 맞지 않다고 말했다.
서유는 대답하지 않았다. 육성재는 잠시 기다린 후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요. 외삼촌은 어릴 적부터 나를 잘 돌봐주셨고 절대 해치지 않을 거예요.”그런데 유라시아 연합 상회 부회장인 김종수가 여전히 루드웰에서 일을 도와주다니, 만약 육성재가 그 증거를 찾아내면 그들의 입장은 적대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육성재는 김종수를 설득해 루드웰에서 떠나게 하는 방법과 루드웰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 더 걱정했다. 하지만 이러한 일은 서유와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말하지 않았다.서유가 걱정하는 것은 여전히 이승하다. 하지만 육성재는 김종수에게서 그에 대한 정보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도 굳이 묻지 않았다.두 사람은 잠시 침묵을 지켰고, 그러던 중 의상 디자이너가 드레스를 들고 들어왔다. 서유는 그에게 육성아를 잘 돌봐주라고 부탁하고 전화를 끊었다. 디자이너는 곧 그녀에게 최신 유행 드레스를 입혔다.서유는 상씨 집안의 뛰어난 유전자를 물려받아 아름다운 눈빛과 복숭아처럼 빛나는 뺨, 연꽃처럼 맑은 피부를 지니고 있었다. 그녀의 눈매에는 은은한 우아함이 드러났다. 전체적인 모습은 기품이 넘쳤는데 여유로운 표정으로 세련된 샴페인 색 드레스를 입으니 마치 흩날리는 복숭아 꽃잎처럼 경쾌하고 비범해 보였다.상씨 집안 세 형제가 그녀가 나오자 일제히 일어나 그녀 앞에 나섰다.“처음 봤을 때부터 정말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꾸미니 더욱 아름다워.”“네가 크는 걸 못 본 게 아쉬워. 그렇다면 넌 도자기 인형처럼 우리에게 보호받으며 자랐을 거야.”첫 번째 말은 상태준의 놀라움이었고, 두 번째는 상준석의 탄식이었다. 오직 상연훈만이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네 남매가 입체 거울 앞에 서 있을 때, 주하늘이 다가왔다. “서유 씨, 만약 관심이 있다면 준석 씨랑 함께 DK의 모델을 해봐요.”서유는 이 독립적이고 강한 여성에게 많은 존경심을 느꼈다.“제 꿈도 하늘 씨처럼 이런 회사를 만드는 거예요.”팔짱을 끼고
“서유야, 앞으로 너는 상씨 집안의 둘째 아가씨고, 연초는 상씨 집안의 막내 아가씨다.” 상철수의 말이 끝나자 뜨거운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를 들으며 상철수는 매우 기뻐하며 사람들을 불러 술을 권했다. 사람들은 모두 상철수 주위로 몰려와 잃어버린 아이를 찾은 것을 축하했다. 하지만 서유는 조용히 몇 걸음 물러서며 떠들썩한 무리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외진 곳으로 걸어가서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을 올려다보았다. 어렸을 때는 가족을 찾으면 정말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저 쓸쓸함만 느낄 뿐이었다. 만약 지금 이승하가 곁에 있다면, 그녀는 그의 팔짱을 끼고 기쁜 마음으로 가족과 인사를 나눴을 것이다.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있는 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일 텐데 어찌 외로운 마음이 들겠는가. “그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어?” 검은색 연미복을 입은 상연훈이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천천히 걸어와 그녀 앞에 섰다. 상연훈은 그녀의 눈 속에서 반짝이는 별빛을 보고는 시선을 따라 별들을 바라보았다. “어디서 보더라도 밤하늘은 다 똑같지. 다만 어떤 사람은 그걸 볼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보지 못할 뿐.” 아무도 없는 곳에 갇힌 이승하는 이 밤하늘을 볼 수 없겠지. 그게 참 애달프고 쓸쓸한 일이다. 서유는 상연훈의 목소리임을 알아챘지만 눈길을 돌리지 않고 여전히 별들을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 “왜들 승하 씨가 내 곁에 없는 이유를 묻지 않는 걸까요?” 그녀는 내내 의아했다. 마치 상씨 집안 사람들은 그녀가 이미 이혼한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누구도 그것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런데 이혼 사실을 아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한데, 상씨 집안 사람들은 어떻게 그걸 미리 알 수 있었던 걸까? 상연훈은 눈을 내리며 그녀의 깨끗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응시했다. “족보를 서재에 돌려놓으면 답을 알게 될 거야.”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족보를 그녀 앞에 건넸다. “내가 이걸 서재에 놓으라고
자신이 이미 루드웰에 갔었고 그곳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그들이 모두 알면서도 그녀에게 아무렇지 않게 숨기고 있었다니. 게다가 그녀가 김초희를 사칭해서 정여희와 닮은 걸 알아냈다며 그 덕에 가족을 찾게 된 것처럼 거짓말까지 했다. 사실은 루드웰의 CCTV 영상을 통해 그녀의 얼굴을 보고 찾아온 것이면서. 이렇게 속이고 감추면서도, 어떻게 가족이라고 나서서 그녀를 찾을 면목이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승하는 루드웰의 창시자를 찾기 위해 반년 넘게 그녀와 떨어져 지내야 했고, 택이는 그 임무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이들은 사람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일을 저지르면서도, 어떻게 나서서 그녀에게 친족이라 할 수 있을까. 이제 어떻게 육성아를 대할 수 있단 말인가. 서유는 금빛 잎사귀를 쥐고 그리움과 분노로 가득 찬 눈빛을 떨치지 못한 채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녀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꾹 참으며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그때 서재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곧 서재 문이 밖에서 열리더니, 흰 정장을 입은 상철수가 나타났다. 상철수는 아래층에서 서유를 찾다 서재에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는데, 과연 맞아떨어졌다. 그는 서유 옆에 놓인 족보를 힐끗 보고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상연훈에게 족보를 돌려놓으라 했는데, 그 녀석이 이 일을 서유에게 맡길 줄이야. 상철수는 표정을 숨긴 채 서유 앞까지 다가와 그녀 손에서 금빛으로 반짝이는 잎사귀를 건네받았다. “이미 들켰으니 변명하진 않겠다.” 그는 잎사귀를 들고 책상 쪽으로 돌아서더니 자연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해두지. 네가 루드웰을 떠난 후에야 너의 존재를 알게 되었어. 네 남편과 네가 그 안에서 겪은 일은 나와 무관해.” 그의 말은 곧, 루드웰은 그의 일이며 서유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그는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서유의 존재를 몰랐을 때 벌어진 일이었고, 그녀를 알았더라면 절대
서유는 눈앞의 상철수를 바라보며 싸늘한 오한이 느껴졌다. 그의 증오는 이제 특정 인물에 대한 복수를 넘어 무고한 사람들까지도 겨냥하고 있었다. 루드웰에 여러 방식의 죽음을 세세히 마련해 둔 것도 그의 살인적 본능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었고,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사람을 희생시키며 그 피비린내에 집착해 왔다. 서유는 상철수의 마음이 증오로 인해 극도로 일그러졌음을, 사람의 생명을 풀 한 포기처럼 여기는 그를 설득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눈앞에 앉은 백발이 가득하고 눈동자는 핏빛인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깊은 깨달음에 다다랐다. 때로는 한 사람을 너무 사랑하는 것이 결코 좋은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그래서, 서유야, 넌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니?” 상철수는 지난 기억을 가라앉히고서 그저 정여희와 똑 닮은 그녀의 얼굴을 조용히 응시했다. “복수를 위해 너무 많은 사람의 목숨을 희생시키면 안 됐어요.” 서유는 잠시 말을 멈추고 더 분명히 설명을 덧붙였다. “정여희 씨를 죽인 사람을 찾아 복수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무고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것은 옳지 않아요.” “그 사람들을 찾을 수가 없었다!” 상철수는 목소리를 높이며 감정을 억누르기 어려워했다. “복수를 원하면서도 적을 찾을 수 없는 그 무력함과 절망감이 뭔지 알아? 나를 미치게 만들었단 말이다!” 그러니 연지유와 봉태규가 S 조직의 멤버 명단을 가져와 루드웰로 들어오자, 상철수가 그들을 중시한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 역시 자신의 적을 간절히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적들을 찾게 된다면 루드웰을 해체하겠다고 약속할 수 있어요?” 이 질문에 상철수는 잠시 침묵하며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평생을 증오 속에서 살고 싶은 사람은 없어.” 그는 복수를 끝낸 후에는 정여희의 곁을 따라갈 수 있을 테니, 그렇게 된다면 영원히 해방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서유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깊이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를 본 상철수는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물었다. “뭔가 알고 있는 건가?” 서유는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 확실한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함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어떻게든 이승하와 연락을 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그에게 알려 루드웰에 계속 잠입해 있는 위험을 피해야 했다. “승하 씨를 보내줄 수 있어요?” 상철수는 테이블 위에 합장해 두었던 손가락을 가볍게 움직였다. “서유야, 나는 이승하의 자유를 제한한 적이 없어.” “자유를 제한하지 않았다면 승하 씨가 집에 돌아오지 않고, 전화 한 통 없이 지낸 이유가 뭐죠?” 서유는 이전에 루드웰이 운영자에게 자유를 제한하지 않는데도 이승하가 23일 동안 자신과 연락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생각이 정리되자, 상철수가 그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고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승하가 자신과 연락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상철수가 왜 그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는 걸까? 혹시 상철수가 이승하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방금 그의 반응은 그것과는 다르게 보였다. 상철수는 마치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한 마디 한 마디 천천히 말했다. “내가 정한 규칙에 따라 루드웰 운영자는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고 외부와도 자유롭게 연락할 수 있다. 루드웰은 이를 방해하지 않아.” “네가 말한 대로라면 이승하가 왜 집에 돌아가지 않았는지, 왜 연락하지 않았는지는 나도 정말 모르는 일이다.” “심지어... 너희 둘이 부부라는 사실도 네가 떠난 후 CCTV를 보고 나서야 알았을 정도다.” 이 말을 마친 상철수는 서유보다 더 혼란스러워 보이는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주시했다. “난 계속 이상하다고 생각해 왔어. 이승하처럼 모든 것을 가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남
서유는 시험 삼아 몇 마디 던져보았고, 여전히 상철수가 이승하를 풀어줄 생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만약 상철수가 이승하의 정체를 알아서 그를 가둔 거라면, 이승하는 지금 매우 위험한 상황에 놓인 셈이었다. 이 생각에 서유의 가슴은 답답하게 조여왔고, 호흡이 가빠지는 가슴을 눌러 진정시키며 깊은 눈빛으로 상철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의 책장으로 다가가, 족보를 다시 꺼내 들어 그녀와 관련된 이름이 적힌 페이지를 펼쳤다. 서유는 상철수 앞에서 족보를 찢어버리려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뭐 하는 거야?” 상철수는 깜짝 놀라 곧바로 달려와 서유의 손에 있는 족보를 빼앗으려 했다. 하지만 서유는 재빨리 몸을 빼면서 그를 피했다. 서유는 족보를 든 채로 몇 걸음 뒤로 물러나며, 눈길을 상철수의 얼굴에서 거두어 창밖에 모여 있는 귀족들 쪽으로 돌렸다. “지금 당장 루드웰을 해체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이 친족 관계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고, 당신의 정체를 모두에게 폭로하겠어요.” 상철수가 이승하를 풀어줄 생각이 없자, 서유는 그를 강하게 몰아붙이기로 결심했다. 상철수가 루드웰을 몰래 운영하며 가면을 쓰고 정체를 숨기는 걸 보면, 주변 사람들은 물론 그의 가족조차도 그의 이중생활을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특히 두 명의 외삼촌인 상태준과 상준석조차도 모르고, 상철수의 곁에서 일하는 상연훈만이 그 비밀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그녀는 추측했다. 그는 그녀가 모르는 걸 알고 있듯이, 그녀도 그의 약점을 쥐고 있었다. 지금은 양쪽 모두 피해가 따르더라도 그 피해를 최소화하는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상철수는 서유가 이렇게 강단 있게 나올 줄은 몰랐다. 친족 관계를 무기로 협박할 뿐 아니라 그의 정체까지 쥐고 흔들다니, 그것도 두 가지로 협박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상철수는 냉정하게 대꾸했다. “서유야, 난 아직 네 외할머니에 대한 복수를 끝내지 않았어. 어떻게 루드웰을 해체할 수 있겠니?” “게다가 루
이제 막 열여덟 살이 된 제시카는 그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그러나 그가 걸음을 옮길 때까지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이를 악물고 애써 참았다. 이하준, 이번 생에 절대 내 손안에 떨어지지 마. 평생 후회하게 만들어줄 거니까. 그러나 아직까지 감정이라는 게 뭔지 몰랐던 이하준은 그녀의 복수심을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잠시 후, 연이를 업고 계단을 내려오면서 하준이는 연이가 뚱뚱하다고 투덜댔고 화가 난 연이는 그의 머리카락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렇게 두 남매는 웨딩카에 올라타는 그 순간까지도 옥신각신 다투었다. 두 사람을 지켜보며 고개를 가볍게 흔들던 이승하는 서유의 손을 잡고 웨딩카의 뒤를 따라 결혼식장으로 향했다. 아빠가 없는 연이에게 오늘 이승하는 아빠 노릇을 해주기로 했다. 연이의 손을 잡고 버진로드를 걸어가 그녀의 손을 신랑에게 맡겼다.입장하기 전, 문밖에 서 있던 연이가 곱게 화장한 얼굴을 치켜들고는 그를 쳐다보았다.“이모부, 제가 어렸을 때부터 이모부한테 손도 못 대게 하시더니. 오늘은 어쩔 수 없죠?”검은 정장 차림의 그가 담담한 얼굴로 하이힐을 신고 있는 연이를 내려다보았다.“오늘만이야. 다음은 없어.”연이가 입을 삐죽거리며 눈을 흘겼다.“어쩜 이리 하준이랑 똑같아요? 이렇게 좋은 날 꼭 그런 말을 해야겠어요?”한참을 고민하던 그가 덕담 한마디 내뱉었다.“우주랑 평생 행복하길 바란다. 이번 생에 이리 네 손 잡고 입장하는 건 한 번으로 족해...”연이는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가 연이의 손을 잡고 입장하여 그녀의 손을 심우주에게 건네주었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조카한테 경고했다.“내 딸한테 잘해. 안 그러면 내가 너 가만 안 둬.”그 말 한마디에 연이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흐릿한 시선 속에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이승하의 얼굴이 들어왔다.이모부한테 그녀는 처음부터 딸이었다...감동을 받은 연이는 발길을 돌리려는 이승하를 덥석 끌어안고 낮은
그가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힘겹게 말을 뱉었다.“연이야, 뒤돌아서 나 좀 봐봐.”화를 참으며 고개를 돌리니 얇은 셔츠 차림에 눈밭에 서서 눈시울을 붉히고 있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잠깐 멈칫하던 그녀는 차갑게 시선을 돌렸다. “심우주, 나 이제 너한테 관심 없어. 그러니까 더 이상 귀찮게 찾아오지 마.”말을 마친 연이는 전화를 끊고 남자 친구의 손을 잡은 채 숙소로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이때, 남자 친구가 허를 찌르는 물음을 내던졌다.“그렇게 귀찮아할 거면서 왜 연락처를 아예 차단하지 않았어?”차단하면 다시는 연락할 수 없을 것이다. 눈을 내리깔며 한동안 망설이던 연이는 남자 친구 앞에서 심우주의 연락처를 차단해 버렸다.연이를 찾을 수 없었던 심우주는 2년 동안 혼이 빠진 사람처럼 살았다. 문자를 받지도 못하는 그녀의 핸드폰으로 2년 동안 수없이 많은 문자를 보냈다. 시간이 지나 졸업을 앞두고 연이의 남자 친구는 바람을 피우고 연이를 차버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화가 나야 할 상황인데 연이는 오히려 침착하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그를 찾아가 따지지도 않았다. 그후, 심우주 학교의 퀸카가 그를 미친 듯이 따라다닌다는 소식을 듣고 연이는 그제야 남자 친구의 바람에 자신이 왜 전혀 개의치 않았던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남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심우주였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누구한테 먼저 고개를 숙일 사람이 아니었다. 졸업식 당일 밤, 우연히 심우주를 다시 만난 그녀는 지난 4년 동안 그가 수없이 몰래 찾아와서 자신을 보고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마음이 변치 않은 그를 보며 그녀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어렸을 때부터 날 좋아하지 않았던 애가 언제부터 날 좋아하게 된 걸까?그녀의 의혹에 그는 대답을 하지 않고 진한 키스로 뒤늦게 알아버린 자신의 진심을 쏟아냈다. 그의 고백을 받아들일 때, 연이는 뼛속까지 보수적이었던 자신을 다행으로 여겼다. 첫 번째 남자 친구와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지 않았기 때
이승하를 따라 차에 올라탄 하준이는 서유의 모습을 발견하고 어안이 벙벙해졌다.“엄마, 엄마가 여긴 어떻게...”오랜만에 만난 아들이 이젠 어엿한 어른이 된 모습에 그녀는 눈시울이 붉어졌다.“몰래 네 얼굴만 보고 갈 생각이었는데. 이런 일이 있을 줄이야...”얼굴에 찍힌 신발 자국을 보니 서유는 더 마음이 아팠다. 손을 뻗어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지려다가 아이가 어색해할까 봐 허공에서 손이 굳어버렸다. 조심스러워하는 엄마를 보고 하준이는 예전처럼 무뚝뚝하게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수척해진 아이의 얼굴에 손끝이 닿는 순간, 그녀는 비에 흠뻑 젖은 아들을 품에 꽉 끌어안았다.“네가 외국에서 이렇게 괴롭힘을 당하는 걸 알았더라면 5년 전에 엄마는 절대 널 외국으로 보내지 않았을 거야.”아이가 그녀보다 더 큰 손을 뻗어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어쩌다 이런 일이 생긴 거예요. 평소에는 제가 애들을 괴롭히는 편이에요.”아이가 당하는 꼴을 직접 눈으로 본 서유는 자신을 위로하는 아이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그녀는 아이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어디 다친 데는 없어?”그 물음에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저 나름 솜씨가 좋아요. 그러니까 아빠가 올 때까지 버티고 있었던 거고요.”말을 마치고 그가 고개를 들어 앞줄에 앉아 수건으로 머리를 닦고 있는 남자를 우러러보았다.“아빠, 방금 절 구해주던 아빠의 모습은 진짜 영웅 같았어요.”옅은 미소를 짓던 이승하는 소수빈이 건네준 수건을 받아 아이에게 건네줬다.“너도 이제 다 큰 어른인데. 언제까지 내가 와서 구해주기만을 기다릴 거야? 나중에 아빠가 없으면 어떡하려고 그래?”수건을 받아 대충 머리를 닦던 아이는 모처럼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우리 아빠가 얼마나 대단하고 위풍당당한 사람인데 어떻게 없을 수가 있겠어요?”아이의 말에 차가운 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서유도 소수빈도 아무 말이 없었고 차 안의 분위기가
비가 쏟아진 그날 밤, 이하준은 우산을 쓰고 학교를 나와 골목으로 들어갔다. 마침 쇠몽둥이를 든 외국인 무리와 마주쳤고 그들은 하나 같이 근육질 몸매에 흉악한 얼굴이었다. 가끔 멍청이 같은 사람들이 그를 귀찮게 할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그는 이승하의 말을 명심하고 애써 참았지만 상대의 모함을 받게 되었다. 한 번은 누군가 그가 개발한 약을 교수의 물컵에 넣었다. 다른 친구가 발견하지 않았다면 사람이 죽었을지도 모른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던 이하준은 그들을 응징하기로 결심했다. 하루 만에 수십 명의 사람들을 응징했고 학교 측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교수가 그를 믿고 지켜주지 않았더라면 학교에서 쫓겨났을지도 모른다. 그를 무너뜨리지 못한 악당들은 교수의 신임을 받고 있는 그를 질투하고 증오했다. 지금 눈앞의 놈들은 분명 그들이 그를 혼내주려고 부른 사람들일 것이다.학교에 다니면서도 소지섭에게 격투 기술을 배우는 걸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두렵지가 않았다. 우산을 살짝 받쳐 드는 순간, 얼음처럼 차가운 눈이 드러났고 그 눈 밑에 살의가 가득했다.근육질 남자들은 순식간에 그를 에워쌌고 이하준은 손에 든 우산을 접어 날카로운 한끝으로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을 세게 찔렀다. 싸움 실력이 뛰어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을 쓰러뜨렸다. 그러나 아무리 실력이 대단하더라도 점점 더 많이 달려오는 근육질의 남자들을 혼자 당해낼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손을 대지 않겠다고 교수님과 약속했었지만 수세에 몰리자 그는 어쩔수 없이 허리춤에 있던 금빛 칼을 빼 들고 근육질 남자의 복부를 향해 찔렀다. 어린 나이에 칼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고 몇몇 근육질의 남자는 흠칫했다. 그러나 이내 쇠몽둥이를 들어 온 힘을 다해 이하준의 머리를 내리쳤다.이하준의 목숨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바보로 만들어달라는 요구가 있었다. 한 사람을 바보로 만들려면 머리를 쳐야 한다. 바보가 안 된다면 적어도 식물인간으로 만들어야 하니까. 근육질의 남자들은 이하준을 제압하기 위해
그가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입을 열었다.“난 죽는 게 두려운 사람이 아니었어. 그런데 당신을 만난 후부터 죽는 게 그렇게 겁이 나더라.”죽는 게 두려웠기 때문에 전 서계를 돌아다니며 의사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원하는 결과는 끝내 얻지 못하였고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기만 했다. 겁이 난 서유는 그를 꼭 껴안았다. 그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당신한테는 내가 있고 우리 하준이가 있어요. 그러니까 절대 죽으면 안 돼요. 당신이 죽으면 우리는 어떡하라고요?”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미 5년을 버텨온 그는 점점 더 통증이 심해졌고 하느님이 조금씩 조금씩 그의 목숨을 빼앗아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통이 전해지는 횟수가 갈수록 늘어나고 통증은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칩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것 같았다. 다만 떠나기 전에 모든 일을 다 마치고 가야 하는데...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품 안에 있는 여인이 가장 걱정되었다. 소리 없이 흐느끼는 그녀의 모습에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깊이 파고들었다.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릴 만큼 뜨겁고 짜릿한 느낌, 슬픈 마음을 녹일 수 있을 것 같아 두 사람은 뜨겁게 몸을 섞으며 하나가 되었다. 그녀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할 때쯤, 두 사람의 아찔한 행위가 끝이 났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녀의 몸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고 소중한 물건을 끌어안듯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유람선 안으로 들어온 희미한 달빛을 빌려 그가 세월의 흔적도 없는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다음 생에도 당신이 내 여자였으면 좋겠는데. 당신의 다음 생은 송사월한테 주기로 약속했었나?”아직 잠들지 않은 서유가 그의 가슴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번 생에 당신이 나보다 먼저 가면 나 절대 당신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다음 생에 당신 안 만날 거라고요.”그가 슬픈 표정을
그 당시 풋풋한 어린 소녀였던 연이는 심우주가 자신과 같은 학교에 간다는 말을 듣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교과서는 정말 내가 가져오지 않았어. 아마도 애들이 가져간 것 같은데 내일 학교에 가면 돌려주라고 할게.”연이도 하준이와 마찬가지로 학교에서는 짱이었다. 친구를 괴롭히는 일은 없었지만 너무 인기가 많아서 여자아이들이 그녀를 짱으로 받들고 남자아이들도 하루 종일 그녀의 주위를 맴돌며 꼬리를 흔들었다.반면, 심우주는 착실히 공부만 했고 가끔 연이의 괴롭힘에 그는 반격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였기 때문에 심우주는 그런 그녀가 얄미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가 제멋대로 하는 걸 사랑스럽게 지켜보았았다. 다들 오냐오냐하니까 연이는 학교에서도 늘 제멋대로였다. 그러나 그 당시 자신의 마음을 잘 몰랐던 심우주는 연이의 그런 모습에 조금 짜증이 나기도 했다. 잠시 후, 어른들에게 차례로 작별 인사를 마친 이하준이 차에 올라탔다. 늘 차갑기만 하던 아이가 한동안 머뭇거리더니 차에서 내려와 서유를 덥석 끌어안았다.“엄마, 몸 잘 챙겨요.”갑작스러운 아이의 행동에 서유는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하준아, 엄마 아빠는 집에서 우리 하준이 기다리고 있을게.”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있는 힘껏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손을 풀고 옆에 있던 이승하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아빠, 제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아빠도 절 이길 수 없을 거예요.”입꼬리를 살짝 올리던 그가 손을 뻗어 아이의 어깨를 토닥였다.“자부심이 강한 사람은 남의 칼에 찔리기 쉬운 법이야. 자세를 낮추는 법을 배우거라.”아빠의 충고를 아이는 가슴 깊이 새겼다.“네, 그렇게 할게요.”이내 그가 허리춤에서 ‘S'라고 새겨진 금빛 칼을 꺼내 아이한테 건네주었다. “돌잡이 때 네가 잡은 칼이야. 이제는 네가 갖고 있어.”전에 소지섭한테서 아빠의 이야기를 들은
서유는 어쩔 수 없이 의사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문밖을 지키고 있던 소지섭은 의사가 떠나는 것을 보고 급히 물었다.“방금 연이랑 하준이가 와서 묻더라고요. 대표님한테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냐고...”서유가 입을 열기도 전에 안에서 이승하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감기라고 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고개를 끄덕이던 소지섭은 자리를 떴고 그녀 혼자 덩그러니 문밖에 서 있었다. 그가 얼마나 더 그녀와 함께 할 수 있을지...어느 순간 갑자기 그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가 옆에 있어도 그녀는 여전히 불안한 마음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하준이 유학길에 오른 그날, 이씨 가문과 상씨 가문 사람들이 그를 배웅하러 왔다. 마치 하준이의 돌잡이 때처럼 정원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어른들의 모습이 이미 많이 변했고 아이들도 훌쩍 자란 상태였다. 서유와 이승하의 우월한 유전자만 이어받은 이하준은 10살밖에 안 된 나이지만 정교한 이목구비에 곧은 몸매를 가지고 있어 보기만 해도 귀티가 철철 흘러넘쳤다. 게다가 180 가까이 되는 아이큐를 가지고 있어 누가 봐도 엄친아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특히 이연석은 흰색 스웨터 차림에 한 손은 주머니에 넣고 한 손에 가방을 든 채로 계단을 내려오는 이하준의 모습을 보고 숨이 턱 막힐 것만 같았다. 그는 옆에서 초등학생 교복을 입은 채 케이크를 뺏어 먹고 있는 오뚝이와 깡순이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똑같은 10살인데 이게 뭐냐? 누구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명문 학교에 입학하고 누구는 아직도 초등학교나 다니고 있으니.”그 말에 정가혜가 그를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팥 심은 데 팥 나고 콩 심은 데 콩 나는 거죠. 내가 몇 번을 말해요. 자꾸만 애들 다그치지 말라고 했죠.”이를 갈던 그가 두 아이 앞으로 다가가 케이크를 낚아채 입에 쑤셔 넣었다.“너희들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로 일찍 진학 못 하면 아빠 진짜 가만 안 둬.”두 아이는
“승하 씨...”깜짝 놀란 그녀는 미친 듯이 핸드폰을 찾았지만 온몸에 힘이 빠져 일어서지도 못하였다. 어떻게 의사를 찾아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애틋한 그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긴장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녹아내렸고 바닥을 짚고 있던 손에도 덩달아 힘이 풀렸다.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고 입술이 파르르 떨려 말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당신... 왜... 그래요?”지난 10년 동안, 이승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지내온 그녀는 거의 울어본 적이 없다. 잠깐 정신을 잃은 모습에도 이렇게 펑펑 우는 것을 보니 그는 너무 마음이 아팠다. 애써 두통을 참으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던 그가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녀를 품에 안고 소파에 쓰러지더니 세월조차 비껴간 잘생긴 얼굴을 살짝 치켜들었다.“깊게 잠이 든 것뿐이야. 왜 이렇게 겁을 먹어?”말을 하면서 손을 뻗어 눈물로 뒤덮인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부러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당신 요즘 살이 좀 오른 것 같은데.”화제를 돌리려고 했지만 그녀는 눈물이 글썽한 두 눈을 들어 그의 창백한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아무리 깊은 잠에 빠져도 그렇죠. 어떻게 사람이 깨우는데 아무 반응이 없어요?”맑고 깨끗한 그녀의 눈을 그는 차마 마주칠 수가 없었다.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떼어 그녀의 등을 눌러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얹었다. “바보,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거야. 피곤할 때는 꿈을 꾸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거든.”그 말을 그녀는 당연히 믿지 못하였다.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어서 그의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왜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졌는지 그녀는 짐작할 수 있었다.단단한 가슴 위에 얹혀있던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미안해요. 당신 머릿속에 있는 칩을 꺼낼 의사를 찾아야 하는데...”겁이 났다. 이승하를 잃을까 봐 두려웠다. 자신을 목숨보다 더
지난주, 토론 대회에 나간다고 말하는 연이를 향해 이하준은 엄청 비꼬았다. 그 모습에 화가 난 연이는 씩씩거리며 이하준과 내기를 했고 뜻밖에도 그녀가 이기게 될 줄은 몰랐다.눈꺼풀을 내리깔던 하준이가 손을 힐끗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평소에 그렇게 재잘재잘하더니 실력 한번 제대로 발휘했네. 축하해.”진심으로 축하하는 것 같지 않고 그가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아무튼 이번에는 네가 졌어. 그러니까 잊지 말고 돈 입금해.”이하준은 천천히 냅킨을 깔면서 담담하게 말했다.“밥 먹고 나서 줄게. 근데 누나...”그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기세등등하게 연이를 쳐다보았다.“누나 올해 열일곱이지? 아직까지 고등학교에 다니고. 수시 자격도 따내지 못했으니 수능 봐서 어떤 대학에 합격할 수 있을지 정말 걱정이다.”그 말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너... 명문대에 합격했다고 잘난 척하지 마. 내년에 나도 그 학교에 합격할지 모르니까.”이하준은 칼과 포크를 집어 들고 스테이크를 썰어서 입에 넣었다.“그럼 내 후배가 되는 건가?”화가 난 연이가 반격할 겨를도 없이 그가 또 빈정거렸다.“내년에 학교에서 만나. 만나면 나한테 선배라고 부르는 거 잊지 말고.”“아악. 열받아 죽겠네.”연이가 가슴을 내리치더니 옆에 있던 의자를 끌어당겨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서유의 팔짱을 끼고 어깨에 기댄 채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이모, 하준이 쟤 정말 얄미워죽겠어요. 빨리 학교에 보내버려요.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요.”서유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막상 가고 나면 또 보고 싶을걸?”“아니요. 그럴 일은 절대 없어요.”입을 삐죽거리면서 시선은 이하준의 얼굴로 향해 있었다. 솔직히 이 녀석과 10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많이 싸우기도 했지만 정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얄미운 동생인 건 사실이다. “빨리 갔으면 좋겠어요.”웃음을 짓던 서유가 포크로 과일을 집어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 연이는 과일을 받아먹으면서 이하준을 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