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는 대답하지 않았다. 육성재는 잠시 기다린 후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요. 외삼촌은 어릴 적부터 나를 잘 돌봐주셨고 절대 해치지 않을 거예요.”그런데 유라시아 연합 상회 부회장인 김종수가 여전히 루드웰에서 일을 도와주다니, 만약 육성재가 그 증거를 찾아내면 그들의 입장은 적대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육성재는 김종수를 설득해 루드웰에서 떠나게 하는 방법과 루드웰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 더 걱정했다. 하지만 이러한 일은 서유와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말하지 않았다.서유가 걱정하는 것은 여전히 이승하다. 하지만 육성재는 김종수에게서 그에 대한 정보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도 굳이 묻지 않았다.두 사람은 잠시 침묵을 지켰고, 그러던 중 의상 디자이너가 드레스를 들고 들어왔다. 서유는 그에게 육성아를 잘 돌봐주라고 부탁하고 전화를 끊었다. 디자이너는 곧 그녀에게 최신 유행 드레스를 입혔다.서유는 상씨 집안의 뛰어난 유전자를 물려받아 아름다운 눈빛과 복숭아처럼 빛나는 뺨, 연꽃처럼 맑은 피부를 지니고 있었다. 그녀의 눈매에는 은은한 우아함이 드러났다. 전체적인 모습은 기품이 넘쳤는데 여유로운 표정으로 세련된 샴페인 색 드레스를 입으니 마치 흩날리는 복숭아 꽃잎처럼 경쾌하고 비범해 보였다.상씨 집안 세 형제가 그녀가 나오자 일제히 일어나 그녀 앞에 나섰다.“처음 봤을 때부터 정말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꾸미니 더욱 아름다워.”“네가 크는 걸 못 본 게 아쉬워. 그렇다면 넌 도자기 인형처럼 우리에게 보호받으며 자랐을 거야.”첫 번째 말은 상태준의 놀라움이었고, 두 번째는 상준석의 탄식이었다. 오직 상연훈만이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네 남매가 입체 거울 앞에 서 있을 때, 주하늘이 다가왔다. “서유 씨, 만약 관심이 있다면 준석 씨랑 함께 DK의 모델을 해봐요.”서유는 이 독립적이고 강한 여성에게 많은 존경심을 느꼈다.“제 꿈도 하늘 씨처럼 이런 회사를 만드는 거예요.”팔짱을 끼고
“서유야, 앞으로 너는 상씨 집안의 둘째 아가씨고, 연초는 상씨 집안의 막내 아가씨다.” 상철수의 말이 끝나자 뜨거운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를 들으며 상철수는 매우 기뻐하며 사람들을 불러 술을 권했다. 사람들은 모두 상철수 주위로 몰려와 잃어버린 아이를 찾은 것을 축하했다. 하지만 서유는 조용히 몇 걸음 물러서며 떠들썩한 무리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외진 곳으로 걸어가서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을 올려다보았다. 어렸을 때는 가족을 찾으면 정말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저 쓸쓸함만 느낄 뿐이었다. 만약 지금 이승하가 곁에 있다면, 그녀는 그의 팔짱을 끼고 기쁜 마음으로 가족과 인사를 나눴을 것이다.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있는 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일 텐데 어찌 외로운 마음이 들겠는가. “그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어?” 검은색 연미복을 입은 상연훈이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천천히 걸어와 그녀 앞에 섰다. 상연훈은 그녀의 눈 속에서 반짝이는 별빛을 보고는 시선을 따라 별들을 바라보았다. “어디서 보더라도 밤하늘은 다 똑같지. 다만 어떤 사람은 그걸 볼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보지 못할 뿐.” 아무도 없는 곳에 갇힌 이승하는 이 밤하늘을 볼 수 없겠지. 그게 참 애달프고 쓸쓸한 일이다. 서유는 상연훈의 목소리임을 알아챘지만 눈길을 돌리지 않고 여전히 별들을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 “왜들 승하 씨가 내 곁에 없는 이유를 묻지 않는 걸까요?” 그녀는 내내 의아했다. 마치 상씨 집안 사람들은 그녀가 이미 이혼한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누구도 그것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런데 이혼 사실을 아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한데, 상씨 집안 사람들은 어떻게 그걸 미리 알 수 있었던 걸까? 상연훈은 눈을 내리며 그녀의 깨끗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응시했다. “족보를 서재에 돌려놓으면 답을 알게 될 거야.”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족보를 그녀 앞에 건넸다. “내가 이걸 서재에 놓으라고
자신이 이미 루드웰에 갔었고 그곳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그들이 모두 알면서도 그녀에게 아무렇지 않게 숨기고 있었다니. 게다가 그녀가 김초희를 사칭해서 정여희와 닮은 걸 알아냈다며 그 덕에 가족을 찾게 된 것처럼 거짓말까지 했다. 사실은 루드웰의 CCTV 영상을 통해 그녀의 얼굴을 보고 찾아온 것이면서. 이렇게 속이고 감추면서도, 어떻게 가족이라고 나서서 그녀를 찾을 면목이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승하는 루드웰의 창시자를 찾기 위해 반년 넘게 그녀와 떨어져 지내야 했고, 택이는 그 임무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이들은 사람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일을 저지르면서도, 어떻게 나서서 그녀에게 친족이라 할 수 있을까. 이제 어떻게 육성아를 대할 수 있단 말인가. 서유는 금빛 잎사귀를 쥐고 그리움과 분노로 가득 찬 눈빛을 떨치지 못한 채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녀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꾹 참으며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그때 서재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곧 서재 문이 밖에서 열리더니, 흰 정장을 입은 상철수가 나타났다. 상철수는 아래층에서 서유를 찾다 서재에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는데, 과연 맞아떨어졌다. 그는 서유 옆에 놓인 족보를 힐끗 보고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상연훈에게 족보를 돌려놓으라 했는데, 그 녀석이 이 일을 서유에게 맡길 줄이야. 상철수는 표정을 숨긴 채 서유 앞까지 다가와 그녀 손에서 금빛으로 반짝이는 잎사귀를 건네받았다. “이미 들켰으니 변명하진 않겠다.” 그는 잎사귀를 들고 책상 쪽으로 돌아서더니 자연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해두지. 네가 루드웰을 떠난 후에야 너의 존재를 알게 되었어. 네 남편과 네가 그 안에서 겪은 일은 나와 무관해.” 그의 말은 곧, 루드웰은 그의 일이며 서유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그는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서유의 존재를 몰랐을 때 벌어진 일이었고, 그녀를 알았더라면 절대
서유는 눈앞의 상철수를 바라보며 싸늘한 오한이 느껴졌다. 그의 증오는 이제 특정 인물에 대한 복수를 넘어 무고한 사람들까지도 겨냥하고 있었다. 루드웰에 여러 방식의 죽음을 세세히 마련해 둔 것도 그의 살인적 본능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었고,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사람을 희생시키며 그 피비린내에 집착해 왔다. 서유는 상철수의 마음이 증오로 인해 극도로 일그러졌음을, 사람의 생명을 풀 한 포기처럼 여기는 그를 설득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눈앞에 앉은 백발이 가득하고 눈동자는 핏빛인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깊은 깨달음에 다다랐다. 때로는 한 사람을 너무 사랑하는 것이 결코 좋은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그래서, 서유야, 넌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니?” 상철수는 지난 기억을 가라앉히고서 그저 정여희와 똑 닮은 그녀의 얼굴을 조용히 응시했다. “복수를 위해 너무 많은 사람의 목숨을 희생시키면 안 됐어요.” 서유는 잠시 말을 멈추고 더 분명히 설명을 덧붙였다. “정여희 씨를 죽인 사람을 찾아 복수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무고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것은 옳지 않아요.” “그 사람들을 찾을 수가 없었다!” 상철수는 목소리를 높이며 감정을 억누르기 어려워했다. “복수를 원하면서도 적을 찾을 수 없는 그 무력함과 절망감이 뭔지 알아? 나를 미치게 만들었단 말이다!” 그러니 연지유와 봉태규가 S 조직의 멤버 명단을 가져와 루드웰로 들어오자, 상철수가 그들을 중시한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 역시 자신의 적을 간절히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적들을 찾게 된다면 루드웰을 해체하겠다고 약속할 수 있어요?” 이 질문에 상철수는 잠시 침묵하며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평생을 증오 속에서 살고 싶은 사람은 없어.” 그는 복수를 끝낸 후에는 정여희의 곁을 따라갈 수 있을 테니, 그렇게 된다면 영원히 해방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서유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깊이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를 본 상철수는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물었다. “뭔가 알고 있는 건가?” 서유는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 확실한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함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어떻게든 이승하와 연락을 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그에게 알려 루드웰에 계속 잠입해 있는 위험을 피해야 했다. “승하 씨를 보내줄 수 있어요?” 상철수는 테이블 위에 합장해 두었던 손가락을 가볍게 움직였다. “서유야, 나는 이승하의 자유를 제한한 적이 없어.” “자유를 제한하지 않았다면 승하 씨가 집에 돌아오지 않고, 전화 한 통 없이 지낸 이유가 뭐죠?” 서유는 이전에 루드웰이 운영자에게 자유를 제한하지 않는데도 이승하가 23일 동안 자신과 연락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생각이 정리되자, 상철수가 그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고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승하가 자신과 연락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상철수가 왜 그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는 걸까? 혹시 상철수가 이승하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방금 그의 반응은 그것과는 다르게 보였다. 상철수는 마치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한 마디 한 마디 천천히 말했다. “내가 정한 규칙에 따라 루드웰 운영자는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고 외부와도 자유롭게 연락할 수 있다. 루드웰은 이를 방해하지 않아.” “네가 말한 대로라면 이승하가 왜 집에 돌아가지 않았는지, 왜 연락하지 않았는지는 나도 정말 모르는 일이다.” “심지어... 너희 둘이 부부라는 사실도 네가 떠난 후 CCTV를 보고 나서야 알았을 정도다.” 이 말을 마친 상철수는 서유보다 더 혼란스러워 보이는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주시했다. “난 계속 이상하다고 생각해 왔어. 이승하처럼 모든 것을 가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남
서유는 시험 삼아 몇 마디 던져보았고, 여전히 상철수가 이승하를 풀어줄 생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만약 상철수가 이승하의 정체를 알아서 그를 가둔 거라면, 이승하는 지금 매우 위험한 상황에 놓인 셈이었다. 이 생각에 서유의 가슴은 답답하게 조여왔고, 호흡이 가빠지는 가슴을 눌러 진정시키며 깊은 눈빛으로 상철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의 책장으로 다가가, 족보를 다시 꺼내 들어 그녀와 관련된 이름이 적힌 페이지를 펼쳤다. 서유는 상철수 앞에서 족보를 찢어버리려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뭐 하는 거야?” 상철수는 깜짝 놀라 곧바로 달려와 서유의 손에 있는 족보를 빼앗으려 했다. 하지만 서유는 재빨리 몸을 빼면서 그를 피했다. 서유는 족보를 든 채로 몇 걸음 뒤로 물러나며, 눈길을 상철수의 얼굴에서 거두어 창밖에 모여 있는 귀족들 쪽으로 돌렸다. “지금 당장 루드웰을 해체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이 친족 관계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고, 당신의 정체를 모두에게 폭로하겠어요.” 상철수가 이승하를 풀어줄 생각이 없자, 서유는 그를 강하게 몰아붙이기로 결심했다. 상철수가 루드웰을 몰래 운영하며 가면을 쓰고 정체를 숨기는 걸 보면, 주변 사람들은 물론 그의 가족조차도 그의 이중생활을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특히 두 명의 외삼촌인 상태준과 상준석조차도 모르고, 상철수의 곁에서 일하는 상연훈만이 그 비밀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그녀는 추측했다. 그는 그녀가 모르는 걸 알고 있듯이, 그녀도 그의 약점을 쥐고 있었다. 지금은 양쪽 모두 피해가 따르더라도 그 피해를 최소화하는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상철수는 서유가 이렇게 강단 있게 나올 줄은 몰랐다. 친족 관계를 무기로 협박할 뿐 아니라 그의 정체까지 쥐고 흔들다니, 그것도 두 가지로 협박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상철수는 냉정하게 대꾸했다. “서유야, 난 아직 네 외할머니에 대한 복수를 끝내지 않았어. 어떻게 루드웰을 해체할 수 있겠니?” “게다가 루
“거래는 끝났으니, 이제 나랑 함께 내려가서 오늘 밤 연회를 마무리하자.” 상철수는 신사답게 손을 서유 앞에 내밀었다. 서유는 과거 피로 물들었던 그 손을 보며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세속에 물들지 않고 평온하게 살아가고 싶었지만, 결국 스스로 이 세상에 발을 들이기로 했다. 그녀는 상철수에 대한 분노와 실망을 삼키며, 그의 피 묻은 손에 손을 얹고 마지막 연극에 맞춰 함께 내려갔다. 모든 손님이 떠난 후, 상철수는 입양된 딸들에게 서유를 잘 보살피고 불만을 가지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의 말투 속에는 서유에 대한 배려가 느껴졌다. 사실 루드웰 문제만 제외한다면, 상철수는 서유를 제법 잘 대해주었다. 만약 그가 루드웰의 창시자가 아니라면, 서유는 그를 자신의 외조부로 진정 받아들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상씨 집안에서 입양된 딸들은 모두 네 명이었고, 두 외삼촌의 명의 아래에 각각 두 명씩 등록되어 모두 상씨 성을 갖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주하늘의 회사에서 브랜드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었는데, 차분하고 온순한 성격에 눈치도 빠른 편이었다. 그녀가 눈치가 빠르다고 느낀 건, 서유가 화장실에서 입양된 딸들이 자신에 대해 수군거리는 걸 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유가 어디서 튀어나온 사람인지 모르겠다며 불만을 표했고, 자신들이 지니고 있던 장녀, 차녀의 지위를 빼앗겼다고 투덜거렸다. 이때 바로 그 온순한 여성이 그들에게 반박하며 장녀, 차녀의 지위는 원래 서유의 것이었고, 자신들은 외부인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이 말에 다른 세 명은 기분이 상해 그녀를 비난하기 시작했고, 나아가 그녀가 상연훈을 짝사랑하고 있다는 소문까지 언급하기 시작했다. 수치심이 드러나자 온순했던 그녀도 점차 달라졌다. 상연훈에 대한 마음을 부정하며, 그들에게 그저 분수를 지키라고 쏘아붙였고, 자칫하다가는 상씨 집안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말을 마친 그녀는 종이를 한 장을 들고 언니들을 밀쳐내며 화장실을 나갔고, 남은 세 명은 그녀
이승하가 귀국했다. 그의 베일에 싸인 애인으로서, 서유는 곧바로 8호 맨션으로 보내졌다.계약의 규정에 따라 그를 만나기 전엔 티 없이 깨끗하게 몸을 씻어야 했고 향수나 화장품 냄새를 절대 풍겨선 안 됐다.그의 취향에 완벽하게 맞추기 위해 그녀는 오랫동안 목욕을 하고 실크 잠옷으로 갈아입은 후, 2층 침실로 왔다.컴퓨터 앞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이승하는 그녀가 들어오는 기척에 그녀를 흘긋 바라봤다.“이리 와.”별다른 감정이 섞이지 않은, 담담하면서도 차가운 말투가 이어졌다. 그 목소리는 서유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평소에 무덤덤한 것 같으면서도 종잡기 어려운 성격을 가진 그가 혹시나 화가 나기라도 할까 봐 그녀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달려갔다.그의 앞에 제대로 서기도 전에 이승하가 그녀를 와락 안아버렸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그녀의 붉은 입술에 키스하는 이승하.항상 그런 식이었다. 아무런 설명도 없었고 부드러움도 없었다. 그녀를 만나면 그저 함께 자고 싶을 뿐이었다.이번에 외국으로 출장 가게 되면서 3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여자를 만지지 못했으니 오늘 밤은 쉽게 그녀를 놓아줄 리가 없어 보였다.그녀가 잠에 곯아떨어질 때가 되어서야 남자는 끝날 기미가 보였다.다시 잠에서 깨어난 서유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욕실에서 샤워기 소리가 들려와 그녀는 그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간유리 너머로 흐릿하게 귀의 기다란 그림자가 보였다. 매번 검사를 마치고 나면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린 적이 없었던 그였다. 그런데 이번엔 왜 떠나지 않은 걸까?서유는 가까스로 피곤한 몸을 이끌어 침대에서 일으켜 세우고 착한 고양이 마냥 남자가 나오기를 기다렸다.몇 분 뒤, 욕실에서 물소리가 멈추고 남자가 샤워 타워를 두른 채 걸어 나왔다. 머리끝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그의 넓은 어깨로부터 쇄골 언저리를 타고 흘러내리다가, 가슴골을 따라 부드럽고도 단단해 보이는 그의 복근 위로 미끄러졌다. 치명적일 만큼 유혹적이다. 그의 조각처럼 아름다운 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