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연훈은 변명도 하지 않고 애원도 없이, 곧장 서재 중앙으로 걸어가 상철수를 등지고 외투를 벗어낸 다음 곧게 무릎을 꿇었다. 상철수는 채찍을 손에 쥔 채 소파에서 일어나,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흉터로 가득한 상연훈의 등을 향해 스무 번 이상 채찍을 내리쳤다. 등에 난 크고 작은 상처가 벌어지며 붉은 피가 쏟아졌고 몸 전체가 찢기는 고통에 휩싸였지만, 상연훈은 단 한 번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채찍질을 끝낸 상철수는 손에 든 채찍을 옆으로 던진 뒤 차갑게 상연훈을 바라보았다. “이승하의 뇌 속 칩과 상처에 대해서는 다시는 서유에게 말하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다음엔 스무 대가 아니라는 걸 알아둬.” 상연훈은 고통을 참으며 옷을 걸치고는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관련된 일에 더는 개입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이미 한 번 할아버지를 배신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두 번 다시 배신할 수는 없었다. 이제부터는 서유가 직접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상철수는 상연훈과의 일을 마무리한 뒤 소파에서 일어나 말했다. “지금 바로 루드웰로 가자. 내일 아침 6시까지는 돌아와야 하니, 준비해라.” “예.” 상연훈은 대답하고는 서재 문을 열었다. 마침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서유가 그를 발견하자, 그녀가 보지 못한 틈을 타 상연훈은 이마의 식은땀을 재빨리 닦아냈다. 서재의 방음이 뛰어나 서유는 두 사람이 안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들을 수 없었고, 서재 앞에 보초를 서고 있는 경호원들 때문에 다가갈 수도 없었다. 상연훈이 나오자 서유는 급히 다가가 상철수가 그를 어렵게 하지 않았는지 물었다. 검은 양복이 상처를 덮은 상연훈은 웃으며 자기는 할아버지에게 당할 사람이 아니니 걱정 말라고 했다. 서유가 더 묻기 전에, 빨리 일을 처리해야 하는 상연훈이 그녀를 가로막았다. “서유야, 어머니께서 몸이 안 좋으셔서 빨리 가봐야 해.” 그가 다급한 모습을 보이자 서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유’라는 이름을 들은 순간, 이승하의 고요했던 심장이 갑자기 뛰기 시작했고 어두운 눈동자에 희미한 빛이 떠올랐다. “서유의 소식이라니...” 그녀와 그녀의 뱃속 아이는 이미 바다로 가라앉았는데, 도대체 무슨 소식이 있을 수 있다는 걸까? 상철수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서서 이승하를 지켜보기만 했다. 기다리던 이승하는 상철수가 말이 없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어서 말해!” 상철수는 잠시 침묵하다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소파에 앉았다. “정말로 서유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승하의 눈빛이 급변하며 의문이 서렸다. “만약 서유가 살아있다고 날 속이고 협상을 하려는 거라면, 당장 꺼져.” 연지유와 연중서가 서유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누가 그녀를 구할 수 있으며, 또 누가 구하려고 했겠는가? 그는 믿지 않았고, 상철수는 변명하지 않았다. 대신 손에 든 담배를 가볍게 흔들어 상연훈에게 신호를 보냈다. “영상을 보여줘라.” 상연훈은 휴대폰을 꺼내 친자 확인 만찬에서 촬영한 영상을 열고 이승하 앞에 내밀었다. 영상 속에서 샴페인색 드레스를 입은 서유는 배나무 아래에 서서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산들바람이 불어와 치맛자락이 살짝 휘날렸다. “이 영상은 오늘 밤 촬영된 거다. 시간 기록도 있으니 확인해 봐.” 이승하는 상철수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영상 속 여인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녀의 얼굴과 표정은 아무 변화도 없었다. 그렇다면... 진짜 살아있는 게 맞는 걸까? 이승하는 눈물이 가득 차오르는 걸 애써 참아냈는데 손끝이 떨릴 정도로 심장이 아파왔다. 그는 떨리는 손을 뻗어 영상 속 그녀의 얼굴을 만지려 했으나, 힘이 들어가지 않아 몇 번 시도해 보다가 결국 손을 내려야 했다. 그는 차마 영상을 계속 볼 수 없어 시선을 옮겨 휴대폰을 들고 있는 상연훈을 보았는데 이게 무슨 일이냐는 듯 묻고 있었다. 두꺼운 마스크 너머로 이승하의 붉어진 눈을 바라보던 상연훈은 잠시 죄
상철수는 이승하의 질문을 무시한 채 계속해서 조건을 제시했다. “너희가 만나더라도 서유에게 절대 말하면 안 돼. 네 자유를 제한한 루드웰 이야기나 네 머리에 있는 칩에 대해선 입 밖에도 내지 마. 강제로 이혼하게 된 이유나 우리가 네 정체를 알고 있다는 사실도 절대 말하지 마라. 평범한 척, 그저 2-9로서의 잠입 신분을 유지하며 서유와 지내면 돼.” 이승하는 1-1이 무슨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 몰랐지만 갑작스럽고 이상한 조건들에 짙은 눈썹을 찌푸렸다. 이 모든 걸 서유에게 말하지 않는다면 23일간 연락도 없이 집에 돌아가지 못한 이유나, 연지유를 통해 강제로 이혼시킨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승하는 잠시 깊은 생각에 잠기다가, 상철수의 말에서 무언가 떠오른 듯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그는 검은 마스크를 쓴 상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혹시 당신 서유의 친척이라도 되는 겁니까?” 이렇게까지 서유가 그가 겪고 있는 고통을 아는 것을 꺼린다면, 그것은 가족이기 때문일 수밖에 없었다. 이승하의 날카로운 추측에 상철수는 무릎 위에 얹힌 손이 잠시 떨렸다.“이미 눈치챘다면 숨길 이유가 없겠지.” 상철수는 사실 애초에 그걸 감출 생각은 없었다. 둘이 만나면 금방 드러날 일이었으니까. 그는 소파에서 일어나 이승하 앞으로 다가가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는 서유를 CCTV에서 처음 봤을 때, 내 아내와 닮았다는 걸 깨닫고 유전자 검사를 했지. 검사 결과, 서유는 내 외손녀였어.” 이제야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이승하는 진실을 깨달은 후, 차츰 눈빛이 어두워졌다. “내 머리에 칩이 있다는 사실을 숨기는 건, 서유가 당신을 미워하는 게 두려워서겠죠.” “역시 똑똑하군.” 상철수는 이승하의 능력을 칭찬했지만, 이승하는 냉소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간신히 찾은 가족이라면 소중히 여겨야 하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잔인하게 구는 겁니까?” 그는 서유의 친족이 누구인지 깊이 고민하지 않았지만, 서유
“맞아.” 상철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설령 서유가 내 외손녀라고 해도 우리 사이의 화해는 불가능해. 그러니 이 대표, 서유를 위해 복수를 포기하거나, 아니면 서유와 완전히 이별해야 할 거야.” 이승하의 눈빛은 한순간 살벌하게 차가워졌다. “서유가 내 상황을 알게 된다면, 우리가 영원히 적이라 해도 결국 내 편에 설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 없습니까??” “그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밤을 새워 널 만나러 온 거야. 그렇지 않았으면 널 당장 쏴버리는 게 더 간단했겠지.” 상철수의 어투에서는, 이제 그의 관심이 S의 창립자보다 서유에게 더 기울어졌음을 엿볼 수 있었다. 이를 포착한 이승하는 다시금 길고 섬세한 속눈썹을 내려, 눈빛 속에 잠시 스쳤던 계산을 감추었다.“내일 어디서 만납니까?” “여기.” 이승하는 먼저 조건을 수락하고 다시 움직이려는 듯했지만, 상철수는 한마디로 그의 희망을 무참히 끊어놓았다. “네 머릿속 칩은 다시 프로그램을 수정할 거다. 네가 신의를 저버린다면, 난 기꺼이 네 머리를 날려버릴 생각이야.” 늘 그 칩의 위협을 받고 있던 이승하는 눈빛에 슬픔이 스며들었지만, 얼굴엔 무심한 냉소가 떠올랐다. “서유가 당신을 평생 원망하게 될 각오가 되어 있다면, 마음대로 해봐요.” 상철수는 이승하의 입가에 서린 조소를 바라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서유를 네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다면 순순히 협조하는 게 좋을 거야.”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누가 더 서유를 아끼는지 마음속에서 치열한 심리전을 벌였다. 하지만 이승하는 상철수보다도 그녀를 더 깊이 아꼈다. 이승하는 서유가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길까 두려웠고, 그리움에 지쳐 자신을 따라 죽음에 이를까 겁이 났다.결국 이 심리전에서 서서히 밀리고 있는 쪽은 그였다.“서유를 보고 싶어요.”상철수의 예상대로 이승하는 서유에 대한 그리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녀를 보고, 안고, 입 맞추고 싶었다. 그리고 이혼 서류에
하느님이 그와 큰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인지. 그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눈이 새빨개진 채 실실 웃기만 하는 그의 모습을 상철수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10분 줄 테니까 잘 생각해 보게나.”말을 마친 상철수는 화학 구역을 떠났고 그의 뒤를 따라 검은 옷차림의 사람들도 자리를 떴다. 사람들이 떠난 후, 상연훈이 낮은 목소리로 이승하에게 귀띔했다. “일단 받아들여요. 자유를 얻어 이곳에 나간 뒤 서유한테 해명하면 되니까.”“셋째야, 내가 귀머거리인 줄 아느냐?”상철수의 무서운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오자 상연훈은 이내 입을 꾹 닫고 빠른 걸음으로 화학 구역을 나갔다. 그가 밖으로 나오자 상철수는 가면을 벗고 포악한 눈을 드러낸 채 상연훈을 차갑게 노려보았다.“돌아가서 벌받거라.”할아버지가 두려웠던 상연훈은 천천히 고개를 떨구었다.“네.”상철수가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사람들을 향해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셋째 넌 메인 통제실로 가서 프로그램을 켜놓거라. 이따가 쓸 일이 있을 것이다.”“다른 사람들은 칩을 이동 창고에 넣고 칩 하우스를 폐쇄하거라.”명을 마친 뒤 그가 다시 핸드폰을 꺼내 들고는 모든 조종자와 검은 옷차림의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칩에 대한 얘기와 이승하가 루드웰에서 겪은 일들에 대해 입 밖으로 꺼내지 말라고 명했다. 특히 김종수에게 주의를 줬다. 한편, 저 멀리 치앙라이에 있는 김종수는 그 통지를 보고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승하를 잡은 후부터 상철수는 요즘 알 수 없는 명령을 자꾸만 내리고 있다. 잠시 후, 상철수는 검은 옷차림의 사람들을 데리고 다시 화학 구역으로 돌아왔고 두 눈을 꼭 감고 있는 이승하를 내려다보았다.“생각해 보았는가?”이승하는 눈이 가늘게 떨릴 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상철수도 서두르지 않고 소파에 다시 앉아 인내심을 가지고 그의 답을 기다렸다.1-1은 칩의 제어 범위를 먼저 풀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겠다고 했던 제안과 모순되는 것이다. 이 조건이
그러나 마음과 달리 그의 몸은 고목과 같이 무감각해졌고 그저 벽에 멍하니 기대어있었다. 시간은 정처 없이 흘러가고 있지만 아픈 그의 마음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손을 뻗어 가슴을 꾹 누르니 조금은 아픔이 덜한 것 같았다. 통증이 가라앉으니 생각이 조금씩 되살아났다. 1-1은 CCTV를 통해 서유가 자신의 아내와 닮은 걸 확인하고 유전자 검사를 진행하였고 그 결과 서유가 그의 외손녀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생김새만으로 알아본 가족이라면 분명 가족 중에 서유와 닮은 사람이 또 있다는 뜻인데. 서유와 닮은 사람이라... 이복자매인 연지유 말고도 상연훈의 그 눈이...그의 짐작이 맞는다면 방금 두 번이나 그에게 귀띔을 한 1-2는 상연훈일 것이다. 서유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면 굳이 1-1의 미움을 사면서까지 그와 말을 섞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1-2는 1-1이 있는 상황에서 두 번이나 그한테 귀띔을 해주었다. 그건 두 사람 사이가 파트너일 뿐만 아니라 아주 가까운 관계임을 뜻한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방금 1-2가 그한테 말을 걸었을 때 1-1은 바로 그 자리에서 1-2한테 한 소리 했을 것이지만 그러지 않았다. 게다가 1-2는 그와 이야기할 때 늘 전자음을 사용했고 그건 그와 접촉했을 때 그가 알아볼까 봐 두려워서 일부러 위장했던 것 같다. 1-2의 정체가 상연훈이라는 걸 눈치챈 이상 그와 가까운 사이인 1-1의 정체를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북미의 우두머리인 상철수라면 루드웰을 만들 능력이 충분했다. 복잡한 생각이 하나둘씩 정리되자 어두웠던 그의 눈동자도 점차 빛을 되찾았다. 내일 서유가 만약 그에게 루드웰의 보스가 누구인지 알려준다면 이미 알고 있다고 대답할 생각이다. 그럼 그녀도 뭔가 이상함을 눈치챌 것이다. 지금껏 루드웰에 잠복해 있었다는 건 그가 아직 루드웰의 보스를 본 적이 없다는 뜻이었다. 때문에 서유한테 그가 알고 있다고 한다면 상철수가 미리 그를 만났다는 걸 서유도 분명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그리
상철수가 루드웰의 보스만 아니었어도 서유는 지금 그의 행동에 조금 감동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아무런 감정도 없이 그저 그의 뒤를 따라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차를 운전하는 사람은 상연훈이었고 차 안에는 그들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은 없었다. 서유는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는 걸 깨달았다. 상연훈을 제외한 상씨 가문들의 사람들은 루드웰의 존재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그 당시, 상철수가 위장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그녀의 말에 상연훈은 그녀에게 상철수는 S 조직이 얼마나 잔인한지 루드웰의 조종자들이 S 조직에 얼마나 큰 피해를 보았는지 말해주었었다. 옆에서 자신을 설득하려고 하는 상철수의 모습에 서유는 귀찮은 표정을 지으며 몇 마디 쏘아붙이고는 머리를 한쪽으로 돌려 차 밖의 풍경을 보면서 가는 길을 머릿속에 익혔다. 가는 여정이 만만치가 않았다. 차를 몰고 가다가 헬기를 탔고 이어서 배를 타고 또 헬기를 탔다. 거의 꼬박 하루를 이동하니 이름 모를 산 정상에 도달하였다. 자신이 오는 길을 기억할까 봐 상철수 쪽에서 일부러 먼 길을 돌아온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익숙하게 이동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니 그건 아닌 듯했다. 한편, 그들의 뒤를 밟던 소수빈은 그들을 놓쳐버린 바람에 불같이 화를 내면서 핸들을 내리쳤다.“늙은 여우 같은 노인네. 헬기까지 미리 준비했는데도 결국 놓치고 말았어.”“어찌 됐든 루드웰의 보스 아니야? 이만한 눈치도 없었으면 우린 진작에 저들을 처리했겠지. 진정하고 일단 사모님 연락 기다려보자.”두 사람이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 때, 서유는 이미 상철수와 상연훈을 따라 어느 한 별장으로 들어갔다. 상철수는 그녀에게 산속의 별장들을 가리키며 소개했다.“저기 봐봐. 남쪽을 향한 별장은 A 구역이고 북쪽은 향한 건 B 구역, 그리고 서쪽을 향한 건 C 구역이고 동쪽을 향한 건 화학 구역이야.”별장을 소개한 뒤, 그는 또 서유한테 1-1이 되려면 Ace에 대해 잘 알아두어야 한다고 했다.그는 Ace의 네 개 구역과 Ace의 규
자리에 앉은 후, 그녀는 고개를 들어 조종자들을 훑어보았다. 메인 통제실의 조명은 매우 밝았다. 밝은 조명 아래, 사람들 사이에 앉아 있는 차가운 기운의 남자가 한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은 각자 가면을 쓰고 있었어도 수많은 인파를 사이에 두고 한눈에 서로를 찾을 수 있었고 시선을 마주한 두 사람의 눈에는 오로지 서로뿐이었다. 가면 아래의 이승하가 자신을 봤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리 그가 무사하다는 걸 알게 되니 그녀는 마음이 놓였다.그녀를 계속 지켜보고 있던 이승하는 그녀가 살아있는 것을 직접 확인한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고 담담했던 가슴이 조금은 풀린 듯했다. 그에게 있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은 그녀가 살아있다는 것이었다. 그녀만 살아있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다 이겨낼 수 있었다. 모든 사람이 도착한 뒤, 상철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난 이제 곧 은퇴할 나이네. 앞으로 1-1의 자리는 내 옆에 있는 이 여인이 맡을 것이야. 코드명은 파랑새, 내가 비밀리에 키워온 내 후계자일세.”그 말에 이승하는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서유가... 상철수의 뒤를 이어 1-1이 될 거라고?그럼 그녀는 이제 그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그가 다리 위에 올려놓은 손을 꽉 움켜쥐었다.그를 만나러 오고 싶다는 그녀의 뜻을 상철수가 동의하지 않아서 그녀가 어쩔 수 없이 상철수와 이리 거래를 한 것이라고 짐작했다. 반면, 상철수가 그 제안을 받아들인 건 서유가 자신의 외손녀라서가 아니라 서유를 일부러 루드웰로 끌어들이기 위한 그의 꼼수였을 것이다. 서유가 1-1이 된다는 건 그녀가 루드웰의 리더가 되고 더 나아가 S 조직 멤버들의 복수의 대상이 된다는 뜻이었다.상철수... 서유를 앞세우고 서유를 이용해 그가 이곳을 떠난 뒤의 행동을 견제하려는 것이다. 참으로 지독한 인간이다. 외손녀까지 이용하다니. 정말 양심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는 인간.한편, 상철수는 이승하의 반응을 살핀 뒤 입꼬리를 살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