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연훈은 변명도 하지 않고 애원도 없이, 곧장 서재 중앙으로 걸어가 상철수를 등지고 외투를 벗어낸 다음 곧게 무릎을 꿇었다. 상철수는 채찍을 손에 쥔 채 소파에서 일어나,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흉터로 가득한 상연훈의 등을 향해 스무 번 이상 채찍을 내리쳤다. 등에 난 크고 작은 상처가 벌어지며 붉은 피가 쏟아졌고 몸 전체가 찢기는 고통에 휩싸였지만, 상연훈은 단 한 번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채찍질을 끝낸 상철수는 손에 든 채찍을 옆으로 던진 뒤 차갑게 상연훈을 바라보았다. “이승하의 뇌 속 칩과 상처에 대해서는 다시는 서유에게 말하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다음엔 스무 대가 아니라는 걸 알아둬.” 상연훈은 고통을 참으며 옷을 걸치고는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관련된 일에 더는 개입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이미 한 번 할아버지를 배신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두 번 다시 배신할 수는 없었다. 이제부터는 서유가 직접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상철수는 상연훈과의 일을 마무리한 뒤 소파에서 일어나 말했다. “지금 바로 루드웰로 가자. 내일 아침 6시까지는 돌아와야 하니, 준비해라.” “예.” 상연훈은 대답하고는 서재 문을 열었다. 마침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서유가 그를 발견하자, 그녀가 보지 못한 틈을 타 상연훈은 이마의 식은땀을 재빨리 닦아냈다. 서재의 방음이 뛰어나 서유는 두 사람이 안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들을 수 없었고, 서재 앞에 보초를 서고 있는 경호원들 때문에 다가갈 수도 없었다. 상연훈이 나오자 서유는 급히 다가가 상철수가 그를 어렵게 하지 않았는지 물었다. 검은 양복이 상처를 덮은 상연훈은 웃으며 자기는 할아버지에게 당할 사람이 아니니 걱정 말라고 했다. 서유가 더 묻기 전에, 빨리 일을 처리해야 하는 상연훈이 그녀를 가로막았다. “서유야, 어머니께서 몸이 안 좋으셔서 빨리 가봐야 해.” 그가 다급한 모습을 보이자 서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유’라는 이름을 들은 순간, 이승하의 고요했던 심장이 갑자기 뛰기 시작했고 어두운 눈동자에 희미한 빛이 떠올랐다. “서유의 소식이라니...” 그녀와 그녀의 뱃속 아이는 이미 바다로 가라앉았는데, 도대체 무슨 소식이 있을 수 있다는 걸까? 상철수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서서 이승하를 지켜보기만 했다. 기다리던 이승하는 상철수가 말이 없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어서 말해!” 상철수는 잠시 침묵하다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소파에 앉았다. “정말로 서유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승하의 눈빛이 급변하며 의문이 서렸다. “만약 서유가 살아있다고 날 속이고 협상을 하려는 거라면, 당장 꺼져.” 연지유와 연중서가 서유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누가 그녀를 구할 수 있으며, 또 누가 구하려고 했겠는가? 그는 믿지 않았고, 상철수는 변명하지 않았다. 대신 손에 든 담배를 가볍게 흔들어 상연훈에게 신호를 보냈다. “영상을 보여줘라.” 상연훈은 휴대폰을 꺼내 친자 확인 만찬에서 촬영한 영상을 열고 이승하 앞에 내밀었다. 영상 속에서 샴페인색 드레스를 입은 서유는 배나무 아래에 서서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산들바람이 불어와 치맛자락이 살짝 휘날렸다. “이 영상은 오늘 밤 촬영된 거다. 시간 기록도 있으니 확인해 봐.” 이승하는 상철수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영상 속 여인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녀의 얼굴과 표정은 아무 변화도 없었다. 그렇다면... 진짜 살아있는 게 맞는 걸까? 이승하는 눈물이 가득 차오르는 걸 애써 참아냈는데 손끝이 떨릴 정도로 심장이 아파왔다. 그는 떨리는 손을 뻗어 영상 속 그녀의 얼굴을 만지려 했으나, 힘이 들어가지 않아 몇 번 시도해 보다가 결국 손을 내려야 했다. 그는 차마 영상을 계속 볼 수 없어 시선을 옮겨 휴대폰을 들고 있는 상연훈을 보았는데 이게 무슨 일이냐는 듯 묻고 있었다. 두꺼운 마스크 너머로 이승하의 붉어진 눈을 바라보던 상연훈은 잠시 죄
상철수는 이승하의 질문을 무시한 채 계속해서 조건을 제시했다. “너희가 만나더라도 서유에게 절대 말하면 안 돼. 네 자유를 제한한 루드웰 이야기나 네 머리에 있는 칩에 대해선 입 밖에도 내지 마. 강제로 이혼하게 된 이유나 우리가 네 정체를 알고 있다는 사실도 절대 말하지 마라. 평범한 척, 그저 2-9로서의 잠입 신분을 유지하며 서유와 지내면 돼.” 이승하는 1-1이 무슨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 몰랐지만 갑작스럽고 이상한 조건들에 짙은 눈썹을 찌푸렸다. 이 모든 걸 서유에게 말하지 않는다면 23일간 연락도 없이 집에 돌아가지 못한 이유나, 연지유를 통해 강제로 이혼시킨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승하는 잠시 깊은 생각에 잠기다가, 상철수의 말에서 무언가 떠오른 듯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그는 검은 마스크를 쓴 상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혹시 당신 서유의 친척이라도 되는 겁니까?” 이렇게까지 서유가 그가 겪고 있는 고통을 아는 것을 꺼린다면, 그것은 가족이기 때문일 수밖에 없었다. 이승하의 날카로운 추측에 상철수는 무릎 위에 얹힌 손이 잠시 떨렸다.“이미 눈치챘다면 숨길 이유가 없겠지.” 상철수는 사실 애초에 그걸 감출 생각은 없었다. 둘이 만나면 금방 드러날 일이었으니까. 그는 소파에서 일어나 이승하 앞으로 다가가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는 서유를 CCTV에서 처음 봤을 때, 내 아내와 닮았다는 걸 깨닫고 유전자 검사를 했지. 검사 결과, 서유는 내 외손녀였어.” 이제야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이승하는 진실을 깨달은 후, 차츰 눈빛이 어두워졌다. “내 머리에 칩이 있다는 사실을 숨기는 건, 서유가 당신을 미워하는 게 두려워서겠죠.” “역시 똑똑하군.” 상철수는 이승하의 능력을 칭찬했지만, 이승하는 냉소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간신히 찾은 가족이라면 소중히 여겨야 하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잔인하게 구는 겁니까?” 그는 서유의 친족이 누구인지 깊이 고민하지 않았지만, 서유
“맞아.” 상철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설령 서유가 내 외손녀라고 해도 우리 사이의 화해는 불가능해. 그러니 이 대표, 서유를 위해 복수를 포기하거나, 아니면 서유와 완전히 이별해야 할 거야.” 이승하의 눈빛은 한순간 살벌하게 차가워졌다. “서유가 내 상황을 알게 된다면, 우리가 영원히 적이라 해도 결국 내 편에 설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 없습니까??” “그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밤을 새워 널 만나러 온 거야. 그렇지 않았으면 널 당장 쏴버리는 게 더 간단했겠지.” 상철수의 어투에서는, 이제 그의 관심이 S의 창립자보다 서유에게 더 기울어졌음을 엿볼 수 있었다. 이를 포착한 이승하는 다시금 길고 섬세한 속눈썹을 내려, 눈빛 속에 잠시 스쳤던 계산을 감추었다.“내일 어디서 만납니까?” “여기.” 이승하는 먼저 조건을 수락하고 다시 움직이려는 듯했지만, 상철수는 한마디로 그의 희망을 무참히 끊어놓았다. “네 머릿속 칩은 다시 프로그램을 수정할 거다. 네가 신의를 저버린다면, 난 기꺼이 네 머리를 날려버릴 생각이야.” 늘 그 칩의 위협을 받고 있던 이승하는 눈빛에 슬픔이 스며들었지만, 얼굴엔 무심한 냉소가 떠올랐다. “서유가 당신을 평생 원망하게 될 각오가 되어 있다면, 마음대로 해봐요.” 상철수는 이승하의 입가에 서린 조소를 바라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서유를 네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다면 순순히 협조하는 게 좋을 거야.”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누가 더 서유를 아끼는지 마음속에서 치열한 심리전을 벌였다. 하지만 이승하는 상철수보다도 그녀를 더 깊이 아꼈다. 이승하는 서유가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길까 두려웠고, 그리움에 지쳐 자신을 따라 죽음에 이를까 겁이 났다.결국 이 심리전에서 서서히 밀리고 있는 쪽은 그였다.“서유를 보고 싶어요.”상철수의 예상대로 이승하는 서유에 대한 그리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녀를 보고, 안고, 입 맞추고 싶었다. 그리고 이혼 서류에
하느님이 그와 큰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인지. 그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눈이 새빨개진 채 실실 웃기만 하는 그의 모습을 상철수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10분 줄 테니까 잘 생각해 보게나.”말을 마친 상철수는 화학 구역을 떠났고 그의 뒤를 따라 검은 옷차림의 사람들도 자리를 떴다. 사람들이 떠난 후, 상연훈이 낮은 목소리로 이승하에게 귀띔했다. “일단 받아들여요. 자유를 얻어 이곳에 나간 뒤 서유한테 해명하면 되니까.”“셋째야, 내가 귀머거리인 줄 아느냐?”상철수의 무서운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오자 상연훈은 이내 입을 꾹 닫고 빠른 걸음으로 화학 구역을 나갔다. 그가 밖으로 나오자 상철수는 가면을 벗고 포악한 눈을 드러낸 채 상연훈을 차갑게 노려보았다.“돌아가서 벌받거라.”할아버지가 두려웠던 상연훈은 천천히 고개를 떨구었다.“네.”상철수가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사람들을 향해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셋째 넌 메인 통제실로 가서 프로그램을 켜놓거라. 이따가 쓸 일이 있을 것이다.”“다른 사람들은 칩을 이동 창고에 넣고 칩 하우스를 폐쇄하거라.”명을 마친 뒤 그가 다시 핸드폰을 꺼내 들고는 모든 조종자와 검은 옷차림의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칩에 대한 얘기와 이승하가 루드웰에서 겪은 일들에 대해 입 밖으로 꺼내지 말라고 명했다. 특히 김종수에게 주의를 줬다. 한편, 저 멀리 치앙라이에 있는 김종수는 그 통지를 보고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승하를 잡은 후부터 상철수는 요즘 알 수 없는 명령을 자꾸만 내리고 있다. 잠시 후, 상철수는 검은 옷차림의 사람들을 데리고 다시 화학 구역으로 돌아왔고 두 눈을 꼭 감고 있는 이승하를 내려다보았다.“생각해 보았는가?”이승하는 눈이 가늘게 떨릴 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상철수도 서두르지 않고 소파에 다시 앉아 인내심을 가지고 그의 답을 기다렸다.1-1은 칩의 제어 범위를 먼저 풀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겠다고 했던 제안과 모순되는 것이다. 이 조건이
그러나 마음과 달리 그의 몸은 고목과 같이 무감각해졌고 그저 벽에 멍하니 기대어있었다. 시간은 정처 없이 흘러가고 있지만 아픈 그의 마음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손을 뻗어 가슴을 꾹 누르니 조금은 아픔이 덜한 것 같았다. 통증이 가라앉으니 생각이 조금씩 되살아났다. 1-1은 CCTV를 통해 서유가 자신의 아내와 닮은 걸 확인하고 유전자 검사를 진행하였고 그 결과 서유가 그의 외손녀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생김새만으로 알아본 가족이라면 분명 가족 중에 서유와 닮은 사람이 또 있다는 뜻인데. 서유와 닮은 사람이라... 이복자매인 연지유 말고도 상연훈의 그 눈이...그의 짐작이 맞는다면 방금 두 번이나 그에게 귀띔을 한 1-2는 상연훈일 것이다. 서유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면 굳이 1-1의 미움을 사면서까지 그와 말을 섞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1-2는 1-1이 있는 상황에서 두 번이나 그한테 귀띔을 해주었다. 그건 두 사람 사이가 파트너일 뿐만 아니라 아주 가까운 관계임을 뜻한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방금 1-2가 그한테 말을 걸었을 때 1-1은 바로 그 자리에서 1-2한테 한 소리 했을 것이지만 그러지 않았다. 게다가 1-2는 그와 이야기할 때 늘 전자음을 사용했고 그건 그와 접촉했을 때 그가 알아볼까 봐 두려워서 일부러 위장했던 것 같다. 1-2의 정체가 상연훈이라는 걸 눈치챈 이상 그와 가까운 사이인 1-1의 정체를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북미의 우두머리인 상철수라면 루드웰을 만들 능력이 충분했다. 복잡한 생각이 하나둘씩 정리되자 어두웠던 그의 눈동자도 점차 빛을 되찾았다. 내일 서유가 만약 그에게 루드웰의 보스가 누구인지 알려준다면 이미 알고 있다고 대답할 생각이다. 그럼 그녀도 뭔가 이상함을 눈치챌 것이다. 지금껏 루드웰에 잠복해 있었다는 건 그가 아직 루드웰의 보스를 본 적이 없다는 뜻이었다. 때문에 서유한테 그가 알고 있다고 한다면 상철수가 미리 그를 만났다는 걸 서유도 분명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그리
상철수가 루드웰의 보스만 아니었어도 서유는 지금 그의 행동에 조금 감동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아무런 감정도 없이 그저 그의 뒤를 따라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차를 운전하는 사람은 상연훈이었고 차 안에는 그들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은 없었다. 서유는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는 걸 깨달았다. 상연훈을 제외한 상씨 가문들의 사람들은 루드웰의 존재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그 당시, 상철수가 위장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그녀의 말에 상연훈은 그녀에게 상철수는 S 조직이 얼마나 잔인한지 루드웰의 조종자들이 S 조직에 얼마나 큰 피해를 보았는지 말해주었었다. 옆에서 자신을 설득하려고 하는 상철수의 모습에 서유는 귀찮은 표정을 지으며 몇 마디 쏘아붙이고는 머리를 한쪽으로 돌려 차 밖의 풍경을 보면서 가는 길을 머릿속에 익혔다. 가는 여정이 만만치가 않았다. 차를 몰고 가다가 헬기를 탔고 이어서 배를 타고 또 헬기를 탔다. 거의 꼬박 하루를 이동하니 이름 모를 산 정상에 도달하였다. 자신이 오는 길을 기억할까 봐 상철수 쪽에서 일부러 먼 길을 돌아온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익숙하게 이동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니 그건 아닌 듯했다. 한편, 그들의 뒤를 밟던 소수빈은 그들을 놓쳐버린 바람에 불같이 화를 내면서 핸들을 내리쳤다.“늙은 여우 같은 노인네. 헬기까지 미리 준비했는데도 결국 놓치고 말았어.”“어찌 됐든 루드웰의 보스 아니야? 이만한 눈치도 없었으면 우린 진작에 저들을 처리했겠지. 진정하고 일단 사모님 연락 기다려보자.”두 사람이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 때, 서유는 이미 상철수와 상연훈을 따라 어느 한 별장으로 들어갔다. 상철수는 그녀에게 산속의 별장들을 가리키며 소개했다.“저기 봐봐. 남쪽을 향한 별장은 A 구역이고 북쪽은 향한 건 B 구역, 그리고 서쪽을 향한 건 C 구역이고 동쪽을 향한 건 화학 구역이야.”별장을 소개한 뒤, 그는 또 서유한테 1-1이 되려면 Ace에 대해 잘 알아두어야 한다고 했다.그는 Ace의 네 개 구역과 Ace의 규
자리에 앉은 후, 그녀는 고개를 들어 조종자들을 훑어보았다. 메인 통제실의 조명은 매우 밝았다. 밝은 조명 아래, 사람들 사이에 앉아 있는 차가운 기운의 남자가 한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은 각자 가면을 쓰고 있었어도 수많은 인파를 사이에 두고 한눈에 서로를 찾을 수 있었고 시선을 마주한 두 사람의 눈에는 오로지 서로뿐이었다. 가면 아래의 이승하가 자신을 봤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리 그가 무사하다는 걸 알게 되니 그녀는 마음이 놓였다.그녀를 계속 지켜보고 있던 이승하는 그녀가 살아있는 것을 직접 확인한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고 담담했던 가슴이 조금은 풀린 듯했다. 그에게 있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은 그녀가 살아있다는 것이었다. 그녀만 살아있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다 이겨낼 수 있었다. 모든 사람이 도착한 뒤, 상철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난 이제 곧 은퇴할 나이네. 앞으로 1-1의 자리는 내 옆에 있는 이 여인이 맡을 것이야. 코드명은 파랑새, 내가 비밀리에 키워온 내 후계자일세.”그 말에 이승하는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서유가... 상철수의 뒤를 이어 1-1이 될 거라고?그럼 그녀는 이제 그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그가 다리 위에 올려놓은 손을 꽉 움켜쥐었다.그를 만나러 오고 싶다는 그녀의 뜻을 상철수가 동의하지 않아서 그녀가 어쩔 수 없이 상철수와 이리 거래를 한 것이라고 짐작했다. 반면, 상철수가 그 제안을 받아들인 건 서유가 자신의 외손녀라서가 아니라 서유를 일부러 루드웰로 끌어들이기 위한 그의 꼼수였을 것이다. 서유가 1-1이 된다는 건 그녀가 루드웰의 리더가 되고 더 나아가 S 조직 멤버들의 복수의 대상이 된다는 뜻이었다.상철수... 서유를 앞세우고 서유를 이용해 그가 이곳을 떠난 뒤의 행동을 견제하려는 것이다. 참으로 지독한 인간이다. 외손녀까지 이용하다니. 정말 양심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는 인간.한편, 상철수는 이승하의 반응을 살핀 뒤 입꼬리를 살
이제 막 열여덟 살이 된 제시카는 그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그러나 그가 걸음을 옮길 때까지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이를 악물고 애써 참았다. 이하준, 이번 생에 절대 내 손안에 떨어지지 마. 평생 후회하게 만들어줄 거니까. 그러나 아직까지 감정이라는 게 뭔지 몰랐던 이하준은 그녀의 복수심을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잠시 후, 연이를 업고 계단을 내려오면서 하준이는 연이가 뚱뚱하다고 투덜댔고 화가 난 연이는 그의 머리카락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렇게 두 남매는 웨딩카에 올라타는 그 순간까지도 옥신각신 다투었다. 두 사람을 지켜보며 고개를 가볍게 흔들던 이승하는 서유의 손을 잡고 웨딩카의 뒤를 따라 결혼식장으로 향했다. 아빠가 없는 연이에게 오늘 이승하는 아빠 노릇을 해주기로 했다. 연이의 손을 잡고 버진로드를 걸어가 그녀의 손을 신랑에게 맡겼다.입장하기 전, 문밖에 서 있던 연이가 곱게 화장한 얼굴을 치켜들고는 그를 쳐다보았다.“이모부, 제가 어렸을 때부터 이모부한테 손도 못 대게 하시더니. 오늘은 어쩔 수 없죠?”검은 정장 차림의 그가 담담한 얼굴로 하이힐을 신고 있는 연이를 내려다보았다.“오늘만이야. 다음은 없어.”연이가 입을 삐죽거리며 눈을 흘겼다.“어쩜 이리 하준이랑 똑같아요? 이렇게 좋은 날 꼭 그런 말을 해야겠어요?”한참을 고민하던 그가 덕담 한마디 내뱉었다.“우주랑 평생 행복하길 바란다. 이번 생에 이리 네 손 잡고 입장하는 건 한 번으로 족해...”연이는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가 연이의 손을 잡고 입장하여 그녀의 손을 심우주에게 건네주었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조카한테 경고했다.“내 딸한테 잘해. 안 그러면 내가 너 가만 안 둬.”그 말 한마디에 연이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흐릿한 시선 속에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이승하의 얼굴이 들어왔다.이모부한테 그녀는 처음부터 딸이었다...감동을 받은 연이는 발길을 돌리려는 이승하를 덥석 끌어안고 낮은
그가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힘겹게 말을 뱉었다.“연이야, 뒤돌아서 나 좀 봐봐.”화를 참으며 고개를 돌리니 얇은 셔츠 차림에 눈밭에 서서 눈시울을 붉히고 있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잠깐 멈칫하던 그녀는 차갑게 시선을 돌렸다. “심우주, 나 이제 너한테 관심 없어. 그러니까 더 이상 귀찮게 찾아오지 마.”말을 마친 연이는 전화를 끊고 남자 친구의 손을 잡은 채 숙소로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이때, 남자 친구가 허를 찌르는 물음을 내던졌다.“그렇게 귀찮아할 거면서 왜 연락처를 아예 차단하지 않았어?”차단하면 다시는 연락할 수 없을 것이다. 눈을 내리깔며 한동안 망설이던 연이는 남자 친구 앞에서 심우주의 연락처를 차단해 버렸다.연이를 찾을 수 없었던 심우주는 2년 동안 혼이 빠진 사람처럼 살았다. 문자를 받지도 못하는 그녀의 핸드폰으로 2년 동안 수없이 많은 문자를 보냈다. 시간이 지나 졸업을 앞두고 연이의 남자 친구는 바람을 피우고 연이를 차버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화가 나야 할 상황인데 연이는 오히려 침착하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그를 찾아가 따지지도 않았다. 그후, 심우주 학교의 퀸카가 그를 미친 듯이 따라다닌다는 소식을 듣고 연이는 그제야 남자 친구의 바람에 자신이 왜 전혀 개의치 않았던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남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심우주였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누구한테 먼저 고개를 숙일 사람이 아니었다. 졸업식 당일 밤, 우연히 심우주를 다시 만난 그녀는 지난 4년 동안 그가 수없이 몰래 찾아와서 자신을 보고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마음이 변치 않은 그를 보며 그녀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어렸을 때부터 날 좋아하지 않았던 애가 언제부터 날 좋아하게 된 걸까?그녀의 의혹에 그는 대답을 하지 않고 진한 키스로 뒤늦게 알아버린 자신의 진심을 쏟아냈다. 그의 고백을 받아들일 때, 연이는 뼛속까지 보수적이었던 자신을 다행으로 여겼다. 첫 번째 남자 친구와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지 않았기 때
이승하를 따라 차에 올라탄 하준이는 서유의 모습을 발견하고 어안이 벙벙해졌다.“엄마, 엄마가 여긴 어떻게...”오랜만에 만난 아들이 이젠 어엿한 어른이 된 모습에 그녀는 눈시울이 붉어졌다.“몰래 네 얼굴만 보고 갈 생각이었는데. 이런 일이 있을 줄이야...”얼굴에 찍힌 신발 자국을 보니 서유는 더 마음이 아팠다. 손을 뻗어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지려다가 아이가 어색해할까 봐 허공에서 손이 굳어버렸다. 조심스러워하는 엄마를 보고 하준이는 예전처럼 무뚝뚝하게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수척해진 아이의 얼굴에 손끝이 닿는 순간, 그녀는 비에 흠뻑 젖은 아들을 품에 꽉 끌어안았다.“네가 외국에서 이렇게 괴롭힘을 당하는 걸 알았더라면 5년 전에 엄마는 절대 널 외국으로 보내지 않았을 거야.”아이가 그녀보다 더 큰 손을 뻗어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어쩌다 이런 일이 생긴 거예요. 평소에는 제가 애들을 괴롭히는 편이에요.”아이가 당하는 꼴을 직접 눈으로 본 서유는 자신을 위로하는 아이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그녀는 아이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어디 다친 데는 없어?”그 물음에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저 나름 솜씨가 좋아요. 그러니까 아빠가 올 때까지 버티고 있었던 거고요.”말을 마치고 그가 고개를 들어 앞줄에 앉아 수건으로 머리를 닦고 있는 남자를 우러러보았다.“아빠, 방금 절 구해주던 아빠의 모습은 진짜 영웅 같았어요.”옅은 미소를 짓던 이승하는 소수빈이 건네준 수건을 받아 아이에게 건네줬다.“너도 이제 다 큰 어른인데. 언제까지 내가 와서 구해주기만을 기다릴 거야? 나중에 아빠가 없으면 어떡하려고 그래?”수건을 받아 대충 머리를 닦던 아이는 모처럼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우리 아빠가 얼마나 대단하고 위풍당당한 사람인데 어떻게 없을 수가 있겠어요?”아이의 말에 차가운 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서유도 소수빈도 아무 말이 없었고 차 안의 분위기가
비가 쏟아진 그날 밤, 이하준은 우산을 쓰고 학교를 나와 골목으로 들어갔다. 마침 쇠몽둥이를 든 외국인 무리와 마주쳤고 그들은 하나 같이 근육질 몸매에 흉악한 얼굴이었다. 가끔 멍청이 같은 사람들이 그를 귀찮게 할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그는 이승하의 말을 명심하고 애써 참았지만 상대의 모함을 받게 되었다. 한 번은 누군가 그가 개발한 약을 교수의 물컵에 넣었다. 다른 친구가 발견하지 않았다면 사람이 죽었을지도 모른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던 이하준은 그들을 응징하기로 결심했다. 하루 만에 수십 명의 사람들을 응징했고 학교 측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교수가 그를 믿고 지켜주지 않았더라면 학교에서 쫓겨났을지도 모른다. 그를 무너뜨리지 못한 악당들은 교수의 신임을 받고 있는 그를 질투하고 증오했다. 지금 눈앞의 놈들은 분명 그들이 그를 혼내주려고 부른 사람들일 것이다.학교에 다니면서도 소지섭에게 격투 기술을 배우는 걸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두렵지가 않았다. 우산을 살짝 받쳐 드는 순간, 얼음처럼 차가운 눈이 드러났고 그 눈 밑에 살의가 가득했다.근육질 남자들은 순식간에 그를 에워쌌고 이하준은 손에 든 우산을 접어 날카로운 한끝으로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을 세게 찔렀다. 싸움 실력이 뛰어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을 쓰러뜨렸다. 그러나 아무리 실력이 대단하더라도 점점 더 많이 달려오는 근육질의 남자들을 혼자 당해낼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손을 대지 않겠다고 교수님과 약속했었지만 수세에 몰리자 그는 어쩔수 없이 허리춤에 있던 금빛 칼을 빼 들고 근육질 남자의 복부를 향해 찔렀다. 어린 나이에 칼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고 몇몇 근육질의 남자는 흠칫했다. 그러나 이내 쇠몽둥이를 들어 온 힘을 다해 이하준의 머리를 내리쳤다.이하준의 목숨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바보로 만들어달라는 요구가 있었다. 한 사람을 바보로 만들려면 머리를 쳐야 한다. 바보가 안 된다면 적어도 식물인간으로 만들어야 하니까. 근육질의 남자들은 이하준을 제압하기 위해
그가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입을 열었다.“난 죽는 게 두려운 사람이 아니었어. 그런데 당신을 만난 후부터 죽는 게 그렇게 겁이 나더라.”죽는 게 두려웠기 때문에 전 서계를 돌아다니며 의사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원하는 결과는 끝내 얻지 못하였고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기만 했다. 겁이 난 서유는 그를 꼭 껴안았다. 그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당신한테는 내가 있고 우리 하준이가 있어요. 그러니까 절대 죽으면 안 돼요. 당신이 죽으면 우리는 어떡하라고요?”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미 5년을 버텨온 그는 점점 더 통증이 심해졌고 하느님이 조금씩 조금씩 그의 목숨을 빼앗아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통이 전해지는 횟수가 갈수록 늘어나고 통증은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칩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것 같았다. 다만 떠나기 전에 모든 일을 다 마치고 가야 하는데...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품 안에 있는 여인이 가장 걱정되었다. 소리 없이 흐느끼는 그녀의 모습에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깊이 파고들었다.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릴 만큼 뜨겁고 짜릿한 느낌, 슬픈 마음을 녹일 수 있을 것 같아 두 사람은 뜨겁게 몸을 섞으며 하나가 되었다. 그녀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할 때쯤, 두 사람의 아찔한 행위가 끝이 났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녀의 몸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고 소중한 물건을 끌어안듯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유람선 안으로 들어온 희미한 달빛을 빌려 그가 세월의 흔적도 없는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다음 생에도 당신이 내 여자였으면 좋겠는데. 당신의 다음 생은 송사월한테 주기로 약속했었나?”아직 잠들지 않은 서유가 그의 가슴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번 생에 당신이 나보다 먼저 가면 나 절대 당신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다음 생에 당신 안 만날 거라고요.”그가 슬픈 표정을
그 당시 풋풋한 어린 소녀였던 연이는 심우주가 자신과 같은 학교에 간다는 말을 듣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교과서는 정말 내가 가져오지 않았어. 아마도 애들이 가져간 것 같은데 내일 학교에 가면 돌려주라고 할게.”연이도 하준이와 마찬가지로 학교에서는 짱이었다. 친구를 괴롭히는 일은 없었지만 너무 인기가 많아서 여자아이들이 그녀를 짱으로 받들고 남자아이들도 하루 종일 그녀의 주위를 맴돌며 꼬리를 흔들었다.반면, 심우주는 착실히 공부만 했고 가끔 연이의 괴롭힘에 그는 반격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였기 때문에 심우주는 그런 그녀가 얄미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가 제멋대로 하는 걸 사랑스럽게 지켜보았았다. 다들 오냐오냐하니까 연이는 학교에서도 늘 제멋대로였다. 그러나 그 당시 자신의 마음을 잘 몰랐던 심우주는 연이의 그런 모습에 조금 짜증이 나기도 했다. 잠시 후, 어른들에게 차례로 작별 인사를 마친 이하준이 차에 올라탔다. 늘 차갑기만 하던 아이가 한동안 머뭇거리더니 차에서 내려와 서유를 덥석 끌어안았다.“엄마, 몸 잘 챙겨요.”갑작스러운 아이의 행동에 서유는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하준아, 엄마 아빠는 집에서 우리 하준이 기다리고 있을게.”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있는 힘껏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손을 풀고 옆에 있던 이승하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아빠, 제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아빠도 절 이길 수 없을 거예요.”입꼬리를 살짝 올리던 그가 손을 뻗어 아이의 어깨를 토닥였다.“자부심이 강한 사람은 남의 칼에 찔리기 쉬운 법이야. 자세를 낮추는 법을 배우거라.”아빠의 충고를 아이는 가슴 깊이 새겼다.“네, 그렇게 할게요.”이내 그가 허리춤에서 ‘S'라고 새겨진 금빛 칼을 꺼내 아이한테 건네주었다. “돌잡이 때 네가 잡은 칼이야. 이제는 네가 갖고 있어.”전에 소지섭한테서 아빠의 이야기를 들은
서유는 어쩔 수 없이 의사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문밖을 지키고 있던 소지섭은 의사가 떠나는 것을 보고 급히 물었다.“방금 연이랑 하준이가 와서 묻더라고요. 대표님한테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냐고...”서유가 입을 열기도 전에 안에서 이승하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감기라고 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고개를 끄덕이던 소지섭은 자리를 떴고 그녀 혼자 덩그러니 문밖에 서 있었다. 그가 얼마나 더 그녀와 함께 할 수 있을지...어느 순간 갑자기 그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가 옆에 있어도 그녀는 여전히 불안한 마음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하준이 유학길에 오른 그날, 이씨 가문과 상씨 가문 사람들이 그를 배웅하러 왔다. 마치 하준이의 돌잡이 때처럼 정원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어른들의 모습이 이미 많이 변했고 아이들도 훌쩍 자란 상태였다. 서유와 이승하의 우월한 유전자만 이어받은 이하준은 10살밖에 안 된 나이지만 정교한 이목구비에 곧은 몸매를 가지고 있어 보기만 해도 귀티가 철철 흘러넘쳤다. 게다가 180 가까이 되는 아이큐를 가지고 있어 누가 봐도 엄친아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특히 이연석은 흰색 스웨터 차림에 한 손은 주머니에 넣고 한 손에 가방을 든 채로 계단을 내려오는 이하준의 모습을 보고 숨이 턱 막힐 것만 같았다. 그는 옆에서 초등학생 교복을 입은 채 케이크를 뺏어 먹고 있는 오뚝이와 깡순이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똑같은 10살인데 이게 뭐냐? 누구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명문 학교에 입학하고 누구는 아직도 초등학교나 다니고 있으니.”그 말에 정가혜가 그를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팥 심은 데 팥 나고 콩 심은 데 콩 나는 거죠. 내가 몇 번을 말해요. 자꾸만 애들 다그치지 말라고 했죠.”이를 갈던 그가 두 아이 앞으로 다가가 케이크를 낚아채 입에 쑤셔 넣었다.“너희들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로 일찍 진학 못 하면 아빠 진짜 가만 안 둬.”두 아이는
“승하 씨...”깜짝 놀란 그녀는 미친 듯이 핸드폰을 찾았지만 온몸에 힘이 빠져 일어서지도 못하였다. 어떻게 의사를 찾아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애틋한 그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긴장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녹아내렸고 바닥을 짚고 있던 손에도 덩달아 힘이 풀렸다.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고 입술이 파르르 떨려 말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당신... 왜... 그래요?”지난 10년 동안, 이승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지내온 그녀는 거의 울어본 적이 없다. 잠깐 정신을 잃은 모습에도 이렇게 펑펑 우는 것을 보니 그는 너무 마음이 아팠다. 애써 두통을 참으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던 그가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녀를 품에 안고 소파에 쓰러지더니 세월조차 비껴간 잘생긴 얼굴을 살짝 치켜들었다.“깊게 잠이 든 것뿐이야. 왜 이렇게 겁을 먹어?”말을 하면서 손을 뻗어 눈물로 뒤덮인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부러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당신 요즘 살이 좀 오른 것 같은데.”화제를 돌리려고 했지만 그녀는 눈물이 글썽한 두 눈을 들어 그의 창백한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아무리 깊은 잠에 빠져도 그렇죠. 어떻게 사람이 깨우는데 아무 반응이 없어요?”맑고 깨끗한 그녀의 눈을 그는 차마 마주칠 수가 없었다.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떼어 그녀의 등을 눌러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얹었다. “바보,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거야. 피곤할 때는 꿈을 꾸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거든.”그 말을 그녀는 당연히 믿지 못하였다.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어서 그의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왜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졌는지 그녀는 짐작할 수 있었다.단단한 가슴 위에 얹혀있던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미안해요. 당신 머릿속에 있는 칩을 꺼낼 의사를 찾아야 하는데...”겁이 났다. 이승하를 잃을까 봐 두려웠다. 자신을 목숨보다 더
지난주, 토론 대회에 나간다고 말하는 연이를 향해 이하준은 엄청 비꼬았다. 그 모습에 화가 난 연이는 씩씩거리며 이하준과 내기를 했고 뜻밖에도 그녀가 이기게 될 줄은 몰랐다.눈꺼풀을 내리깔던 하준이가 손을 힐끗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평소에 그렇게 재잘재잘하더니 실력 한번 제대로 발휘했네. 축하해.”진심으로 축하하는 것 같지 않고 그가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아무튼 이번에는 네가 졌어. 그러니까 잊지 말고 돈 입금해.”이하준은 천천히 냅킨을 깔면서 담담하게 말했다.“밥 먹고 나서 줄게. 근데 누나...”그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기세등등하게 연이를 쳐다보았다.“누나 올해 열일곱이지? 아직까지 고등학교에 다니고. 수시 자격도 따내지 못했으니 수능 봐서 어떤 대학에 합격할 수 있을지 정말 걱정이다.”그 말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너... 명문대에 합격했다고 잘난 척하지 마. 내년에 나도 그 학교에 합격할지 모르니까.”이하준은 칼과 포크를 집어 들고 스테이크를 썰어서 입에 넣었다.“그럼 내 후배가 되는 건가?”화가 난 연이가 반격할 겨를도 없이 그가 또 빈정거렸다.“내년에 학교에서 만나. 만나면 나한테 선배라고 부르는 거 잊지 말고.”“아악. 열받아 죽겠네.”연이가 가슴을 내리치더니 옆에 있던 의자를 끌어당겨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서유의 팔짱을 끼고 어깨에 기댄 채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이모, 하준이 쟤 정말 얄미워죽겠어요. 빨리 학교에 보내버려요.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요.”서유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막상 가고 나면 또 보고 싶을걸?”“아니요. 그럴 일은 절대 없어요.”입을 삐죽거리면서 시선은 이하준의 얼굴로 향해 있었다. 솔직히 이 녀석과 10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많이 싸우기도 했지만 정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얄미운 동생인 건 사실이다. “빨리 갔으면 좋겠어요.”웃음을 짓던 서유가 포크로 과일을 집어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 연이는 과일을 받아먹으면서 이하준을 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