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는 결국 육성아를 보러 갔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 머리를 기울인 채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날씨가 흐려 어두컴컴한 탓에 병실은 더 차갑게 느껴졌다. 서유는 병실 앞에 서서 한참을 서성이다가 발걸음을 옮겨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얘기 좀 할까요?”육성아는 대답도 하지 않고 거절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서유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서 그녀의 허리를 묶고 있는 두 개의 벨트 위로 옮겨갔다.육성재의 말로는 이성을 잃은 육성아가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간병인에게까지 손찌검을 했다고 한다. 병원 측에서는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진정제를 놓고 병상에 묶어두었다. 나중에 정신장애로 판정받으면 아마 육우성에 의해 정신병원으로 이송될 수도 있었다.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자식을 잃고 자유까지 영원히 잃게 된다면 그녀에게 남은 길은 딱 하나였다. 주서희와 같은 비극이 다시 일어나는 걸 서유는 보고 싶지 않아 용기를 내 그녀를 만나러 왔다. 육성아의 손목에 있는 상처를 보니 아마도 아이를 잃은 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 같았다. 육성아의 비참한 삶을 생각하며 서유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차가운 그녀의 손가락을 어루만졌다.그녀가 자신을 뿌리칠 줄 알고 살짝 건드리기만 하고 손을 거두는데 그녀가 서유의 손을 덥석 잡았다.“아주 오랜 시간... 아무도 날 보러 오지 않았어요.”오빠인 육성재를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은 한 번도 오지 않았다.다들 그녀를 비웃고 있었다. 남자 때문에 미치광이가 되어버렸다고 혀를 찼다. 그래서... 아주 오랫동안 그녀를 보러 온 사람이 없었다.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에 조금씩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낀 서유는 그녀의손가락을 다시 꼭 잡았다. 예전에 광기 어른 그녀의 모습을 전혀 개의치 않아 했고 그녀가 갑자기 이성을 잃고 자신을 다치게 할 거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서유의 눈에 그녀는 미치광이가 아니라 그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가여운 여인이었다. 그녀는 공허한 눈을 천천히 들어 여전히
그 말이 설득력이 있을까? 오히려 상대를 속박하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았다.나중에 육성아는 그녀만의 택이를 다시 찾을 수 있을지?한 사람을 죽도록 사랑하면 그 사람과 똑같이 생긴 사람을 만나 다시 사랑하게 된다는 말이 있다.시간이 지나 아이까지 낳아 행복한 가정을 꾸린 그녀가 택이를 여전히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을지? 서유는 짐작할 수가 없었다. 세월이 흘러 택이의 무덤 앞에서 육성아를 만나는 장면을 그려보았다.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검은색 베레모를 쓴 채, 꽃바구니를 들고 아이와 함께 각자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무덤 앞에 있는 싱싱한 국화꽃을 보고 서유는 고개를 돌려 육성아의 모습을 찾아보았다.그녀의 모습은 급히 사라져 울창한 숲속으로 들어가더니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매년 기일, 서유가 택이의 무덤을 찾을 때면 무덤 앞에 항상 꽃다발이 놓여있었다.육성아가 한 번도 택이를 잊은 적이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상들은 모두 나중의 일이었다. 지금의 육성아는 몇 번이나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만큼 힘겹게 버티고 있다.다들 그녀가 미쳤다고 했다. 잠깐 정신이 나갔던 건 사실이지만 아이를 잃고 난 뒤 그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아이를 소중히 여기지 않은 그녀의 탓이었다. 몇번이나 출혈이 있었고 결국 아이는 영원히 그녀의 곁을 떠났다. 그녀는 서유를 껴안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모두 자신의 탓이라고 했다.택이와 함께 있을 때, 늘 그한테 손찌검하고 싫은 소리 하고 다정하게 대하지 못한 게 후회된다고 했다.택이 앞에서 늘 공주처럼 그한테 이래라저래라 하면서 그를 제대로 사랑하지 않았던 걸 후회한다고 했다. 택이가 이 세상에 남긴 핏줄조차도 제대로 지키지 못한 걸 후회한다고 했다.이기적이고 나쁜 여자라 늘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했다.그녀의 말을 들으며 서유도 밤새 따라 울었다.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이 어떤 건지 서유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도 한때는 이승하가 죽은 줄 알고 지금의 육성아보다 더 괴로워했으니까.그녀는 육성아를 안
육성아는 결국 정신을 잃고 쓰러졌고 서유는 바로 의사를 불러 응급처치를 했다.잠시 후, 육우성은 육성아의 상태가 더는 호전되지 않자 정신병원으로 보낼 생각을 했다. 동의할 수 없었던 육성재는 육우성과 대판 싸웠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육성아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내 아이를 죽이고 이젠 나까지 죽일 생각이에요?”육우성은 아니라고 해명했고 그녀가 계속 이렇게 소란을 피우면 그마저도 미쳐버릴 것 같다며 좀 봐달라고 애원했다.“알았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아빠 얼굴에 먹칠하는 일 더는 없어요.”정곡을 찌른 그녀의 말에 육우성은 화를 벌컥 내며 마음대로 하라는 말만 남긴 채 자리를 떴다. 그가 떠난 후 육성아는 붉게 달아오른 눈을 들어 지칠 대로 지쳐있는 육성재를 바라보았다.“오빠, 치앙라이 쪽에 절이 있거든. 예전에 택이 씨랑 여행 가려고 했었는데 못 갔어. 나 거기 가서 지내고 싶어.”1년 동안 부처님께서 예배를 드리라는 택이의 부탁 때문이었다. 1년이 지나서도 그녀가 아직 자신을 잊지 못했다면 어떤 방식으로도 그녀의 곁에 돌아오겠다고 했으니 그녀는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절망적인 그녀의 눈을 한참 동안 쳐다보던 육성재는 마침내 결심을 굳혔다.“나랑 같이 가.”거절하려 하였지만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성아야. 이 세상에 너보다 더 중요한 사람은 없어.”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나왔다.“오빠, 오빠는 내가 밉지도 않아?”그는 고개를 흔들며 손을 뻗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넌 이미 사랑하는 사람도 잃고 아이도 잃었어. 나라도 네 곁에 있어야지. 어떻게 네가 나까지 잃게 만들어?”죽음만이 누군가를 잃는 것은 아니었다. 그 사람에 대한 무관심도 버림과 마찬가지니까. 친아버지인 육우성은 가장 먼저 그녀를 포기한 사람이었다.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육성재의 품에 안겼다. 어린 소녀처럼 오빠의 허리를 끌어안고 서글프게 울었다. 그는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옆에 서서 말없이 울고 있는 서유를 쳐다보았다.내가 사랑하는 여자, 당신
서유는 공항을 나와 결혼 전 머물렀던 별장으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았다. 앞으로 이승하와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고민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방법은 없었다. 대신 소수빈에게 메시지를 보내 이승하의 행방을 찾았는지 물었고, 소수빈은 아직 찾지 못했다고 답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승하가 위험에 빠질까 걱정스러웠다. 특히 육성아 사건을 겪은 후라 그녀의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그러나 서유는 그 상황 속에서도 육성아보다 조금 더 침착을 유지할 수 있었다. 많은 일을 겪으면서 예전보다 많이 강해진 덕분이었다. 서유가 책상에 앉아 멍하니 있을 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상씨 가문의 삼 형제가 그녀에게 결정을 내렸는지 묻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서유는 여전히 거절했지만 삼 형제는 아무 말 없이 그녀에게 충분한 휴식을 취하라고 했다. 그런데 다음 날 상씨 가문에서는 온갖 명품과 보양식들을 보내왔고, 상씨 장남의 아내가 직접 찾아와 그녀를 위해 임산부식을 만들어주기까지 했다. 심지어 그들 부부의 아이를 데려와 그녀의 외로움을 달래주기도 했다. 그들의 열성적인 배려에 서유는 차마 쉽게 거절할 수 없었다. 그녀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을 때 상씨 집안의 어르신이 직접 찾아왔다. 다른 사람들처럼 선물을 가져오진 않았지만 상씨 가문의 주식 일부를 가지고 찾아왔다. 그와 처음 만났을 때와 다름없이 백발에 하얀 정장을 입은 그는 어떻게 봐도 70대처럼 보이지 않는 활기찬 모습이었다. 서유는 그의 당당하고 강력한 기운에 압도되면서도 존경을 표하며 그를 맞이했고, 차를 내렸다. “사실 난 차를 좋아하지 않아.” 그는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서유는 잠시 멈칫하며 맑은 눈으로 그를 흘깃 쳐다보았다. “우리 집엔 차밖에 없어요. 마시고 싶으면 드시고, 싫으면 그냥 목마른 채 계세요.” 그녀의 쏘아붙이는 말에 상철수는 더 이상 까다롭게 구는 대신 조용히 차를 한 모금 마시며 그녀의 집을 둘러보았다. “집안 분위기가 괜찮군. 그래도 네가 직접
그녀가 죽기 전 남긴 영상 속에서 이렇게 말했다.“이제부터 난 당신을 잊을 거예요, 영원히.”그 순간을 떠올리자 상철수의 눈가가 서서히 촉촉해졌다. “너희 할머니는 항상 날 기다려주지 않으려 했지. 만약 나를 기다려주었다면, 너희 어머니는 지금보다 훨씬 행복했을 거야...” 정여희는 딸을 가장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딸을 멀리 보낸 것도 그녀를 보호하기 위함이었지만, 상철수를 향한 복수의 의미도 있었을 것이다. 상철수는 생각 끝에, 그게 그녀가 영상을 통해 자신에게 오직 두 명의 아이만 낳았다고 알린 이유임을 깨달았다. 정여희는 평생 그와 싸우며 살아온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는 늘 그녀의 강한 저항심을 느껴왔다. “정여희 씨는 당신이 다른 여자를 아내로 맞이한 것만으로 당신에게 분노하여 아이를 보낸 게 아닐 거예요. 다른 이유도 있었겠죠?” “그래.” 서유는 그가 부정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상철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여희와 여희 첫사랑 사이에 끼어들었기 때문이지. 여희는 그 일로 날 원망하고 있어.” 그는 더 이상 자세히 말하지 않았으나 서유는 그 말속에서 중요한 단서를 잡았다. “그분의 첫사랑이 누구였나요?” 상철수의 날카로운 눈빛이 어두워졌다. “재수 없는 사람이었지.” 서유가 더 묻기 전에 상철수는 대화를 다른 방향으로 돌리라고 했다. 그녀는 그의 굳어진 표정을 잠시 바라보다 다시 질문을 던졌다. “어르신께서 끼어들었으니, 정여희 씨는 당신을 사랑하기보다는 미워했을 확률이 더 높지 않아요?” 상철수는 그녀가 직설적으로 묻는 것에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볼 수도 있어.” “그렇다면 왜 어르신의 아이를 낳았어요?” 상철수는 자세를 고쳐 앉아 서유의 의문 가득한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사랑에 대한 감정은 시기의 문제일 수도 있어. 아마 너도 공감할 수 있을 거야.” 그의 말뜻을 알아듣자, 서유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렇게 하자. 일단 나랑 함께 가서 가족들을 만나보고, 이후에 나랑 함께 생활할지는 천천히 결정하도록 하자.” 상철수는 서유의 걱정을 읽은 듯, 뒤로 물러나 그녀가 상씨 집안의 분위기를 먼저 느끼도록 권유했다. “그리고 네 언니의 아이도 함께 데려와. 자신의 어머니가 상씨 집안의 피를 이었음을 알려줄 수 있게 말이다.” 서유는 잠시 망설인 후, 상철수의 손을 밀어내고 단정히 앉아 말했다. “제 언니의 아이는 지씨 집안과 심씨 집안의 핏줄이에요. 상씨 집안과는 두 세대나 떨어져 있어서, 굳이 지금 확인할 필요가 없어요. 그리고 저는...” 그녀는 잠시 멈추고 미간을 찌푸렸으나 이내 얼굴을 부드럽게 펴고 말했다. “가족들을 만나보는 건 괜찮지만 저도 제 가정이 있으니 함께 살지는 않을 거예요.” 현재 이승하와 불화를 겪고 있지만, 그녀는 그와 관계없을 때도 그녀 나름의 가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자신만의 생활이 있고 앞으로도 자신만의 아이들과 연이와 함께할 것이기에 굳이 상씨 집안으로 완전히 돌아갈 필요는 없었다. 서유의 뜻을 이해한 상철수는 더 이상 그녀를 강요하지 않았다. 서유가 상씨 집안의 핏줄임을 인정했으니, 그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기뻤다. “그럼 내일, 연훈이를 보내 널 데리러 오게 할 테니 나랑 함께 집으로 가자.” 서유는 더 말을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상철수는 알아서 자리에서 일어나며 떠나기 전에 서유에게 푹 쉬라는 당부를 남겼다. 서유는 탁자 위의 서류봉투를 들고 상철수에게 돌려주려 했지만, 그는 이건 아들과 손자가 준비한 것이라며, 그녀와 연이에게 마땅히 돌아갈 몫이라 주장했다. 서류 안에는 그녀와 연이의 이름이 명시되어 있었다. 상철수는 그녀에게 최선을 다해 보상하고자 했다. 떠나가는 그의 등이 처음보다 훨씬 더 굽어 있는 걸 바라보며, 서유는 그가 한 말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그가 한 말이 떠올랐다. “만약 그때 여희가 나를 속이지 않았다면 영주가 어디에 있든 반
저녁 만찬이 시작되기 전에, 상철수는 서유를 데리고 그가 머무는 집으로 갔다. 이곳은 예전에 서유가 김초희로 신분을 위장해 왔던 장소로, 정여희가 한때 살았던 집이었다. 상씨 집안은 캐나다에 집이 많았지만, 상철수는 이곳에서 사는 것을 더 좋아했다. 아들들과 손자들에게 만찬 준비를 맡긴 뒤, 상철수는 서유를 정원을 가로질러 그녀가 설계했던 작은 정원으로 데려갔다. “여긴‘배나무 정원’이라고 해. 앞으로 네 집이야. 돌아오고 싶을 때 언제든 이곳에 머물러도 된다.”그는 이렇게 말했다. 서유는 대꾸하지 않고 상철수를 따라가며 가끔씩 주위를 둘러보았다. 작은 정원 안으로 들어서자 상철수는 돌아서서 그녀에게 물었다. “마음에 드니?” 서유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냥 잠깐 머무는 것뿐이라 마음에 들고 말고 할 건 없어요.” 그녀의 말뜻을 알아챈 듯, 상철수는 개의치 않고 말했다. “얼마나 머물든 네가 돌아와 준 것만으로도 난 충분하다.” 말을 마친 상철수는 옆에 대기하던 집사를 향해 손짓했다. “둘째 아가씨가 돌아왔으니 저녁 식사를 준비해.” 그는 장녀의 자리를 비워두고 김초희에게 돌려주며, 그녀의 신분을 보완해 주고자 했다. 집사와 하인들이 자리를 떠나자 넓은 거실에는 상철수와 침묵 속의 서유만 남았다. 서유가 여전히 어색해하는 기색을 알아챈 상철수는 그녀가 불편해할까 봐 하인을 시켜 그녀를 방으로 안내하도록 했다. 그녀가 임신 중인 걸 알고, 주 침실은 남향의 1층에 준비되었다. 넓은 공간과 아늑한 인테리어, 유럽풍의 분홍색 계열로 꾸며진 방은 마치 딸을 위한 공간 같았다. 상철수는 한때 정여희가 딸을 무척이나 좋아했다며, 김초희에게 이 작은 정원을 설계하게 한 것도 딸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아직 김영주가 자신의 딸이라는 걸 몰랐던 때였지만, 정여희가 생전에 좋아하던 취향을 따라 지은 집이었다.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서유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상철수의 깊은 사랑에 감동하면서
서유는 두 팔을 가슴에 모으고 무릎 위에 올린 채 창밖의 야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가로등 아래로 그림자처럼 흔들리며 비치는 실루엣 하나가 보였다. 그녀는 상철수가 이미 떠났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는 여전히 정원에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모습 너머로 상철수가 자신을 통해 정여희를 그리워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서유는 그를 한동안 바라보다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신발을 갈아 신고 정원으로 내려갔다. 상철수는 그녀가 나올 줄 몰랐는지, 살짝 놀라며 감동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서유는 그의 앞까지 다가가 아무 말 없이 몇 발자국 더 걸었다. 마치 산책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인 듯 보였다. 상철수는 눈치가 빠르게도 그녀의 곁에 다가서며 이렇게 말했다.“네 외할머니는 겉으로는 강해 보였지만 속은 부드러웠지. 너랑 비슷해.” 서유는 그저 자신이 느끼는 쓸쓸함을 털어내고 싶어서 나온 건데, 괜히 상철수에게 덤벼보듯 말했다. “전 정여희가 아니에요.” 상철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가 여희가 아니라는 걸 잘 안다. 그래도 혈연이라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지. 넌 여희와 닮았어.” 서유는 옆에 나란히 걷는 상철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정여희 씨를 어떻게 사랑하게 됐는지, 그리고 왜 그분을 강요했는지 이야기해 줄 수 있어요?”그녀가 뭔가 캐내려 한다는 걸 알면서도 상철수는 숨기지 않고 말문을 열었다. “그때 난 열여섯이었어. 생일 파티를 열었는데 여희가 친구들과 함께 와서 피아노를 쳤지.”말하면서 상철수는 드물게 진심 어린 미소를 지었다. “사실 네 외할머니 피아노 실력은... 정말 형편없었어. 내가 솔직하게 말하자 여희는 화를 냈지.”상철수는 서유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그 시절 난 이미 상씨 집안의 후계자로 정해져서 모두가 나를 칭찬하고 띄워줬는데, 오직 여희만이 나한테 그렇게 말했지.”처음에는 그저 그녀가 재밌다고 생각했을 뿐 사랑에 빠진 건 아니었지만, 수영장에 빠졌을 때 천사처럼 그를 구하러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